은혜 설교 모음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사사기 9:7-15

하나님아들 2024. 6. 10. 23:35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사사기 9:7-15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는 3가지 평가를 받습니다. (1)‘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냐’하는 평가이며, (2)‘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대한 평가와 (3)‘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같은 평가를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는 평가이고 지금 현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평가이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평가입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는 사사시대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 가나안 정착시기에 사사시대가 350년간 이어져왔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나라에 왕정 통치 없이 350년 간이나 이어져 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앞세워 신정통치를 했기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사(士師)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사는 판관 혹은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군소 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민족이 침입하면 사사들을 중심으로 전쟁을 했습니다. 사사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백성들의 시빗거리를 재판해 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재판관(쇼프팀)으로 불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사라는 말보다는 전쟁영웅(나기드)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대부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구출하는데 앞장섰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charismatic leaders)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배경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모두 12명입니다. 여기에 ‘드보라’라는 여 선지자요 사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사들 중에서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옆에 있는 아세라 여신상을 찍어 그 나무로 번제를 바칩니다( 7:25-26). 이것을 본 성읍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기드온에게 항의하면서 죽이려고 하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성읍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만일 바알과 아세라 신이 참 신이라면 저들 신들이 제단을 헐고 찍어 불살라 버린 기드온에게 벌을 내려 줄 것이요. 그대들이 나서서 바알 산당을 무너트린 내 아들에게 벌 줄 필요는 없지 않겠소?”라고 말해서 그 때부터 기드온이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사십년 간 이스라엘은 평안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기드온은 여러 명의 아내와 첩과 함께 살았습니다. 사사기 9장의 이야기는 기드온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의 부인에게서 난 자식이 70명이고, 그 외 그의 첩에게서 난 자식은 아비멜렉이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이름에서와 같이 왕이 되려고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아비멜렉(Abimelech)이라는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아비멜렉은 여룹바알(기드온)의 업적을 등에 업고 왕이 되려고 하는 행동을 빗대어 사용한 이름입니다. 여룹바알과 전혀 다르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도 아버지의 후광을 최대한 이용하여 작은 대통령이라고 불린 사람도 있었고 아버지 대통령의 후광을 입어 온갖 비리에 연루된 아들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대판 아비멜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의 외가의 친척을 찾아가서 현혹합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 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좋으냐?” 아비멜렉의 이 말은 하나님만이 왕이고, 현실에서 사사는 혈통으로 계승되지 않는 것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사사는 하나님의 영(은혜, 카리스마)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아비멜렉은 혈통으로 이어 받으려고 합니다. 아비멜렉의 외가 친척인 세겜 성읍의 사람들은 혈연에 기울어져 아비멜렉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냥을 꺼내어 아베멜렉에게 전달합니다. 바알브릿은 46절의 엘브릿과 같은 의미인데, 바알과 맺은 언약(계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잘못인 바알숭배의 온상에서 나온 돈을 정치자금으로 내어 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건달과 불량배”를 용역으로 고용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건달과 불량배는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 쓸모없고 오만한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이 멀리하고 사회에 유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용역깡패들과 아버지의 집인 오브라로 가서 (이복)형제들 70명은 “한 바위 위에서” 학살합니다. 이는 공개적으로 처형했다는 말하고, 자기가 왕이 되는 길에 거추장스럽거나 왕의 권력에 도전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죽일 것이라는 협박을 하는 행동입니다. 결국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의 온 집안”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밀로’는 성채나 요새를 의미합니다. 46절에 세겜 망대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살아남은 한 아들 요담은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서 ‘가시나무왕 이야기’를 하면서 축복(그리심)과 저주(에발)를 선언합니다. 가시나무는 자기에게 왕이 되라는 나무들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 가나안 땅의 가시나무(아타드)는 그늘이 있지만 가시가 많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는 말은 가시나무 그늘 밑에서 편하게 쉬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내 수하에 들어 철저히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위협과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아타드라는 가시나무에 불이 붙으면 나무 전체가 금방 타들어가고 주변의 나무들까지 삽시간에 태워버립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주로 평지에서 자라고, 백향목은 산지에서, 그것도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 국경 산지에서 자랍니다. 가시나무에서 나온 불이 레바논 백향목을 태워버린다는 것은 잘못된 왕을 세운 파급효과가 전체 이스라엘 국토에 미칠 광범위한 재앙을 초래할 것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요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찰스 베어드라는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박사님께서 평생 역사를 연구하시면서 깨달은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사람들을 멸한 때를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교만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에 빠질 때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했는가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과 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면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역사의 면면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항상 남겨 둔 자가 있고, 그루터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갈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집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계산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계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나고 나서도 계산하십니다.

 

사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직위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이 중요한 감람나무입니다.

감람나무는 나무의 왕이 되어 요동하고 권세를 휘두르는 것보다 열매를 맺어 그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의 존재 목적도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열매를 맺어 기름을 짜게 되고 그 기름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 집니다. 감람나무 열매의 기름은 올리브유인데 요즈음 한국에서도 식용유대신 올리브유를 많이 사용합니다. 불포화지방산이 많고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며, 위염을 치료하는 등 대단히 좋은 기름이며 기름의 왕이라고 할 만큼 좋은 기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람유를 세 가지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1)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되었으며, (2) 왕이나 제사장의 임직식에서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며, (3) 성막 안에서 불을 밝힐 때 감람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 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슨 자리에 있든지, 어떤 사명을 감당하든지 모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도 존귀함을 얻게 하고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큰일을 하고 많은 일을 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인격에 타격을 주고 모독하는 일이 되어 지면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감람유가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불에 태워져야 합니다.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왕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질 때 기름이 제사장이나 왕의 머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름은 머리에서 흘러내리고 기름부음 받은 왕이나 제사장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시133:2) 한 알의 감람나무 열매가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깨어지면서 당하는 아픔과 고통은 대단히 큰 것입니다. 깨어지면서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감수하고 불에 태워지고 머리에 부어지는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려는 사명을 위해서 쓰여 지는 것이 감람나무 기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직위보다는 사람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사명이 중요한 무화과나무입니다.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너는 와서 우리 왕이 되라”고 말하자,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버리고 어찌 내가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양식이 되는 열매입니다. 일부는 약재로도 사용되고 당도가 매우 좋아서 설탕 대용으로도 사용됩니다. 무화과는 매우 많은 열매를 맺는데 1년에 9-10개월 이상 계속해서 그 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또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넓고 무성해서 더운 지방에서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생명의 생존에 중요한 양식이 되는 무화과 열매를 맺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단맛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인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왕이 되서 요동하는 일, 권세를 휘두르는 일이 과연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지 못하고 죽이는 일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두려움과 고통을 주는 일인데 내가 왜 왕이 되겠느냐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되고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위한 양식을 제공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며 절망하는 사람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보다 중요한 일은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달콤한 기쁨과 소망을 주는 일입니다.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은, (1)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고 하셨으며, (2)신령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요4:34)고 하셨으며, (3)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이 우리에게 생명과 영생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고 했습니다. 또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지만 이 떡을 먹지 못하면 심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처럼 아름다운 실과를 공급하는 그리스도인은 크고 좋은 직분 받아 요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공급하고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이루어 드리고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고 전하는 일이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명이 중요합니다.

 

직위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술을 공급하는 사명이 중요한 포도나무입니다.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때에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버리고 어찌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포도 열매로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고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생산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드릴 때 받쳐지는 포도주였습니다. 이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포도주인 전제와 함께 드리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진 자라”(삼상10:3)고 했습니다. 또 포도주는 곤비한 자에게 활력을 주는 음료수였으며(삼하16:2),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해 약으로 사용되었으며(딤전5:23),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소독약 대용으로 사용하였으며(눅10:34),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104:15)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을 새 포도주에 비유할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9:17)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가히 포도주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중요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결코 왕이 되는 일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깨닫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찬송, 기도, 봉사와 헌신이 우리의 사명임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사랑,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고 위로하고 칭찬해 주며 도움을 주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소홀히 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람나무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명, 무화과나무처럼 생명을 위한 양식을 제공하는 사명, 포도나무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명을 외면하고 열매 없는 가시나무처럼 왕의 자리, 직분만을 탐할 때 직분을 가진 자도 그 직분을 가진 자와 함께 동거하는 사람도 함께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포도주는 성령의 은혜를 말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 오순절 성령이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하여 각 나라의 방언으로 큰 소리로 말할 때에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에서는 목마른 자들이 와서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합니다. 포도주는 성령의 은혜요 젖은 말씀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은혜 속에 사는 삶을 망각하고 아비멜렉처럼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산다면 포도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가시나무 그늘로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삿9:19-20)고 했습니다. 잘못된 왕이 세워지면 왕과 백성이 함께 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명과 직분을 함께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됩시다. 이 나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특별히 이 나무들은 겸손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 나무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세 나무는 기드온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반면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을 의미합니다. <삿 8:23절>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여기 보면, 분명히 나도 왕이 안 되고, 내 아들들도 왕이 되지 않게 하겠다 고 했습니다.

 

영월에 가면 단종릉이 있습니다. 조선의 5번째 왕 문종이 죽자 그 아들 단종이 12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단종이 왕이 된지 3년 만에 삼촌인 수양 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영월로 귀향을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조라고 칭하고 단종을 따르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같은 많은 충신들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세조는 단종이 장성하면 자기에게 복수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 결국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여 버립니다.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그 욕망을 지키기 위해 자꾸만 무자비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양대군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침을 뱉는 것이 아닙니까? 수양대군은 놀라서 그 침을 피했는데 그만 침이 등에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부터 꿈에 침이 떨어진 등에 종기가 나서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더니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결국은 그 종기가 온몸에 퍼져 수양대군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지도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명과 목적을 잃어버린 인생

 

가시나무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상징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아는 양심이 없는 사람은 삶의 분명한 목적도 없이 자신만을 살아가려는 탐욕의 노예로 살기 쉬운 것입니다. 가시나무로 대표되고 있는 아비멜렉은 철저 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 나무의 중심은 하나님이 중심이고 이웃이 중심입니다. 그러한 삶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는 오직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무신론의 인생관을 가진 사람과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神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자기 이름을 위해서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인생의 사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자에게는 사는 목적이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가시나무는 무엇을 위해서 살며, 무엇 때문에 산다고 하는 목적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허무한 인생이 곧 가시나무 인생입니다.

 

(삿 9: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 향 목을 사를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그늘에, 이제부터 내 지배를 받으며, 내 명령을 받으며, 나를 높이며,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으리라 합니다. 이 사람의 인생관은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 가장 커다란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제나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고 그리고 이웃이며 마지막에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와 같은 인간은 이 순서를 뒤집고 말았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혹시 시간이 있으면 이웃을 생각하려합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다 하다가 늙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이 세상의 타락한 인간의 문법은 언제나 일인칭이 나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맨 나중으로 밀려나게 만듭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누구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사랑하는 이웃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 째 순위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멜렉은 하나님도 이웃도 없었습니다. 오르지 자기 자신만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세 나무와 같은 삶을 사는 인생들이 있고 아비멜렉과 같이 다른 나무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왕이 되겠다고 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 삶 중에서 너는 어떤 삶을 살다가 왔느냐고 물으실 때에 기꺼이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가 왔습니다.’라고 기꺼이 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