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능력을 갖게 하는 말씀 (히브리서 4:12-16)

하나님아들 2024. 6. 10. 23:33

 능력을 갖게 하는 말씀 (히브리서 4:12-16)

 

 

천주교를 가리켜서 예전(禮典)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의식이 중심이 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에 참여해보면 일어났다 앉았다, 기도문을 암송하고 매주일 성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행합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대부분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프리스톤 대학교의 교수였던 잭 윌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교수님에게 학생 몇 명이서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박사님,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교수님과 함께 토론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이 때에 윌슨 교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학생들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는가?" "예, 아직 1독을 하지 못했는데요." 윌슨 교수는 다시 말합니다. "나는 40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 성경을 읽었는데 한 번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의심해본 적이 없네. 자네들은 우선 성경을 몇 독이라도 하고서 나와 토론하도록 하세."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한 마디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강원도 어느 지역에 술꾼으로 유명한 분이 있었답니다. .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는지, 술 하면 그 분이에요. 술에 대해서는 그 분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요.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있는 거예요. 시편 말씀에도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이 분이 시편의 말씀처럼 성경 맛에 취해서 생활이 달라지는데, 아침에 직장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면 집으로 곧바로 옵니다. 전에는 퇴근하면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이 꼭 술집에 들러서 술에 충만해서 왔는데 이제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옵니다. 이유는 성경을 읽기 위해섭니다. 이 분은 예수 믿고 나서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전에는 술이 최고였는데, 이제는 성경이 최고가 된 것입니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의 15%가 성경을 매일 읽고, 18%가 1주에 한 번, 12%는 한 달에 한 번 읽는 답니다. 났어요. 65세 이상의 27%가 매일 성경을 읽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교회를 나가는 둥 마는 둥 하며 신앙 생활하는 어떤 성도가 저에게 묻기를 "요즘 누가 성경 읽는 사람있습니까?" 그래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내가 매일 열어서 성경을 읽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곳에 등록을 하고 성경을 읽는 회원이 수 십 만 명에 이릅니다.” 탤런트 중에 정영숙 권사라는 분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몇 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인이었답니다. 대학 2학년까지 소리 내어 기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30대 후반에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신앙에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정영숙 권사는 자신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불교에서 개종한 어느 할머니 신자가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하여 “성경 말씀 50장을 암송하자, 성경 구절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노라”고 간증을 했답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성경을 읽고 성경구절을 암송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저작자가 두 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글로 쓴 자들입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 요한복음을 쓴 요한, 로마서를 쓴 바울 등이 성경을 글로 쓴 저자들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저작자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준 성령님이라는 원저작자입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우리의 가슴으로 깨닫게 될 때 성경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성경 읽기의 세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먹고 마시면서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성경책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책이 나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 앞에서 자기 몸을 벌거벗은 채로 다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의 그대로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연약한 것, 교만한 것, 죄악된 것, 부끄러운 것, 이기적인 것, 영혼의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병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역사를 가지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성경의 형성 과정을 보십시오. 구약 창세기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집필되고 형성되는 데는 15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50여명에 가까운 다양한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은 모든가 다 하나님의 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후 1:20-21절에 보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경만큼 많이 팔리는 책은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은 매년 4,400만권이 팔리고 있고, 미국의 모든 가정에는 평균 6.8권의 성경이 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얼마 전 타임지에 ‘성경은 가장 잘 팔리는 책’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서점의 책의 종류와 영역이 해마다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때에 이 한권의 책이 시간이 흘러가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 이상하고, 아니 점점 더 신(God)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첨단 과학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2000년 전에 완성된 성경이 지금도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이유는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문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번 말하고 나면 그 말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말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력이 있어서 여러 가지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의 말이 이와 같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동력이 있다”라고 하는 말은 이 말씀이 활동적이고,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을 적시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분의 뜻을 이루어 그분이 명하신 말씀대로 성취되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소성 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십니다. 로마서 1장 16절을 보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성경은 신비한 책일 뿐 아니라 그 안에 기록된 말씀은 실제로 살아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living) 활력이 있어(active)...” 본절과 13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본 단락의 문맥의 흐름과 맞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앞부분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만물이 지어졌다는 내용인데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그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케네스 헤긴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은 말하길 “나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룻밤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처럼 놀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점차 병이 악화되어 15살이 되어서는 완전히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되었습니다. 의사 5명 모두 제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던 12개월째인 3월에 저는 점차 죽어 가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보던 내게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을 얻는 자는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에 건강이 됨이니라”(잠언 4:20-22) 웬일인지 이 말씀이 역사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나의 것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얼마 후 16년간의 고통에서 완전히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제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조온)’라는 원문의 의미는 현재 분사 형으로 말씀이 지금 현재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근원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에 언제든지 그 말씀이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주님의 의도대로 성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랜디 피터슨(Randy Petersen)과 윌리엄 피터슨(William J. Petersen)이 지은 <말씀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서희연 역, 엔크리스토). 이 책은 묻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비전? 이념? 돈? 권력? 이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라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켰던 99명의 평범하거나 위대한 인물들과 그들을 변화시킨 99개의 성경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람, 어거스틴 같이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 존 뉴턴 같은 노예 상인, 마르틴 루터처럼 성질이 정말 급한 사람, 존 웨슬리같이 우둔한 사람, 에이미 카마이클 같은 병자와 전신마비 障碍人인 조닉 에릭슨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종, 시대, 생활환경, 사고방식, 시대 상황 등 모든 것이 천차만별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하여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 인생의 전환을 맞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은 …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합니다. 옛 개역성경에는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핀다’는 뜻인데, 바로 앞의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는 말씀이 의학적인 표현이었다면, 이 부분은 법률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판단한다”, “감찰한다”는 말은 고대에서 재판관의 태도, 능력, 권리, 행동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재판관이 피고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피듯, 주님의 말씀이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살피는 재판관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감출수 없고 숨길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단한 활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절의 ‘활력이 있어(에네르게스)’ 는 철학적, 물리학적 단어인데, ‘에너지(energy)’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전 개역 성경에서는 ‘운동력이 있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무엇입니까? 에너지는 힘(力)입니다. 힘이 있어야 움직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대단한 활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결합되어 힘을 발휘케 합니다. 그래서 완고했던 마음이 녹아지고, 교만했던 마음이 낮아져 겸손해 집니다. 불신과 회의 속에 살던 사람에게 확신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처럼 효과적이고 강력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활기 있게 작용해 왔습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무언가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단순한 연구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것이 운동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와는 다소 다른 강조점을 지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감동, 감화의 능력보다는 심판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은 이를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과 축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말씀이 문자를 입고 오신 것이 성경이요, 말씀이 언어를 입고 오신 것이 설교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예수라고 설명해줍니다. 본문 말씀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동정한다’는 말은 성경원어로는 ‘쉼파떼오’란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긍휼히 여긴다’는 뜻과 함께 특별히 ‘체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긍휼(矜恤)’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그러나 ‘체휼(體恤)’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오늘 여러분이 읽으신 대로 ‘동정한다’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서는 ‘체휼한다’는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 시103:14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체휼한다’는 말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방과 똑같아져서 같은 입장에서 그대로 체험하며,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옛말에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더 잘 안다’는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같은 입장 속에서 나오는 아픔의 나눔! ― 이것이 바로 체휼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는 말은, 예수님도 바로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우리가 겪어야할 고통을 함께 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겪는 것처럼 배고파보기도 하셨으며, 수면부족으로 몹시 지친 상태를 겪으시고도 하시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셨고 감정이 있어서 분노를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외로운 체험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체휼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형편을 누구보다도 더 잘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효과적으로 도우시고 이끌어 주실 수 있습니다.

 

 

말씀은 은혜의 보좌 앞에 이르게 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소’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모든 떡상과 향단과 촛대가 놓여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지성소’는 이름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서,하나님의 법궤가 있고 그 위에는 시온소가 있어서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 하여 계시는 ‘은혜의 보좌’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러한 곳입니다. 1년에 한 차례 선택된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나마도 부정한 몸으로 들어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 때문에 죽은 제사장을 끌어내기 위해 줄을 몸에 감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이렇게 엄위한 곳을 죄 많은 우리들이 이 휘장안의 지성소인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극히 거룩한 보좌 앞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또한 우리의 어떠한 공로로도, 결단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를 따라서 가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서 간다’는 말은 성경원어로는 ‘프로도모스’란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선행자’라는 말입니다. 이 ‘프로도모스’란, 이 말이 사용되는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옛날 그 당시엔 항구시설이 아주 나빠서, 큰 배가 들어오려면 몹시 위험하였습니다. 항구 안에도 이곳저곳에 암초들과 모래 턱이 있고, 그래서 파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정박하러 들어오던 배가 항구 안에서 좌초하거나 파선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그 항구에 익숙한 ‘인도하는 배’를 앞에 세워서 이 인도하는 배가 앞에서 가는 데로 뒤에서 따라오게 하여 무사히 부두에 정박시키곤 하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인도하는 이 배를 가리켜 ‘프로도모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즈음도 보면, 아주 큰 상선이 항구로 접안하려고 할 때는, 그 항구를 잘 알고 있는 전문적인 선도자가 승선을 하여서 그 배의 선장 대신에 키를 잡고서 배를 접안시키는 데 이 직종에 종사는 사람을 도선사라 합니다. 항해 경력이 20년 정도 돼야 도선사 자격을 얻게 되는데 1년 연봉이 1억 2-3천 만원을 받는 고액 연봉자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지요. 이 인생이란 항해를 험하게 헤쳐 오는 동안,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결단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도모스’인 우리 인생의 도선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등장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들 앞에서 한 걸음 앞장서서 가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써, 무사히 천국 항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말에 사용된 ‘따라 간다’는 이 말을 성경원어로 보면 ‘아코루떼오’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예수님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하나씩 점찍듯이 맞추어 나간다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마치 지뢰가 잔뜩 깔려 있는 곳을 경험 많은 선임 수색대장이 지뢰 사이를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가면 그 뒤를 따라 발자국 밟은 그대로 부대원들이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에 세상에는 악한 마귀가 심어놓은 불행의 지뢰밭이 가득히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에 우리의 발자국을 하나씩 하나씩 맞추면서 뒤따라가게 되면 평온하고 안전한 곳으로 복된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수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되며 우리가 가는 길이 평탄하게 됩니다.

 

 

2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 말씀으로 생명을 살리고 마귀를 물리치고 능력을 나타내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수 없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의 능력체험을 하지 못하게 됩니까? 들은 바 그 말씀이 유익하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살아 꿈틀거리는 말씀이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그 말씀이 왜 유익되지 못합니까? 그것은 말씀을 듣는 자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들은 바 그 말씀이 믿음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에네르게스’ 즉 대단한 에너지가 생깁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음으로 결부시켜 대단한 힘과 에너지를 받아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하여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에네르게스를 주시는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