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약속이 있는 인내의 믿음 (야고보서 5:7-11)

하나님아들 2024. 6. 10. 23:29

약속이 있는 인내의 믿음 (야고보서 5:7-11)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3P가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어 알파벳으로 P자로 시작되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 페이션스(patience) 즉 인내가 있어야하고, 2). 프랙티스(practice) 즉 실천력이 있어야 하고, 3). 피스(peace) 즉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하였습니다. 성공에 첫 조건을 인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내는 우리 인간에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모네'입니다. 이 말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변치 않고 끝까지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초고속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입니다. 또 정보화 시대입니다. 가지고 다니는 전화기로, 온 세계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정보화시대입니다.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오래 참음 즉 인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고통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성격이 급하고 부지런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빨리빨리"를 원합니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터넷의 속도가 빠른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의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고, 로마서 8:24-25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누가복음 21:19절에서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려놓고 이른 비를 기다립니다.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이른 비는 10월 하순에서 11월 상순 사이에, 늦은 비는 4월과 5월 사이에 내립니다. 농부들은 비를 기다리는 데 절대로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유 있게 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전에 해두어야 할 일에 전념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이미 정해졌지만 우리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해서 앞당겨지거나,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늦춰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되 부끄러움 없이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농사에 있어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한해의 풍작과 흉작을 가늠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경 여러 군데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시 11:14(신 11:14 에는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셔야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농작물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결실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결실이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 결실에 계절에 결실이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농부에 대해서 배울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입니다. 즉 농부는 참을 줄 압니다. 둘째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입니다. 즉 농부는 또한 기다릴 줄도 압니다. 먼저 농부의 참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열매가 하룻밤 사이에 쉽게 맺혀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농부가 귀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땀을 흘리면서 수고해야 합니다. 쌀 한 톨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농부는 엄청난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자로 쌀 미(米)자를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 열 십(十)자가 있습니다. 그 위에 여덟 팔(八)자를 거꾸로 표기하고, 아래는 여덟 팔자(八)를 바르게 표기해서 포개 놓은 형상이 바로 쌀 미(米)자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농부가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서는 팔십 여덟 번의 수고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 울며 씨를 뿌려야 됩니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도 참아야 됩니다. 아울러서 뜨거운 땡볕도 참아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 땀 흘리고 모든 수고를 인내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1800년대 말엽에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은혜로 적셨던 죠지 마티슨이라는 시각 장애를 가졌던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글들이 여기저기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중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과거의 위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풍요의 자리가 어디였던가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기까지 약속의 자녀를 기다리며 인내하지 않았는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록 중에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노인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노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2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그런데 그 위에 성령이 계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내시는데 적합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를 원망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아서 하나님의 역사하실 때 그 역사하심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다섯 절에는 참는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실을 위해서는 참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결실을 위해서는 힘들어도 참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괴로워도 참고 억울해도 참고 하여튼 참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것처럼 욥이 자기에게 닥친 환란과 고통을 참은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 연탄을 피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너무 추워 나가 보았더니 그토록 잘 피던 연탄이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분명 세든 사람의 소행이라 생각했지만 교회 다니는 집사가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참았습니다. 다음날 저녁잠을 자는 척하고 나가보니 건넌방 부인이 연탄을 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뛰어나가 잡을까 했으나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간신히 참았습니다. 이런 일이 두 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세든 부인이 찾아와 "제가 연탄을 가져간 줄 알고 계셨죠?" 하며 사실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점쟁이한테 물었더니 누구와 싸우면 액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온다고 하여 싸움을 하려고 연탄을 가져갔는데도 도저히 싸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녀에게 점쟁이의 잘못됨을 깨우쳐 주고 전도하여 그의 가정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참았더니 싸움도 안 일어나고, 좋은 평판도 듣고, 영혼도 구원하는 열매를 얻었으니 할렐루야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종종 워싱턴 D.C.의 뉴욕 에비뉴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교회에 조셉이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어떤 기회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특별히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나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였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링컨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다림의 축복을 확신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인물이었기에 주님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높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매를 주실 때까지 나에게 응답을 주실 때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또 내가 응답을 받을 그릇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그릇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베푸실 때까지, 또 나는 은혜 베푸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수준에까지 도달하도록 기다리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뜻을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다림은 아주 쉽게 됩니다.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의 그 거룩하신 계획 속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나의 사건이 있다는 믿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지자들의 인내를 배워야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들은 이 말씀을 전하였지만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갇히고, 매 맞고, 쫓겨 다녔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고난을 감당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마태복음 5:11에는 주를 위해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에 끝까지 참고, 충성하면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혹시 믿음 때문에 가족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큰 위로를 주십니다. 믿음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해도, 신앙 때문에 직장이나 가정에서 핍박을 당해도 인내하고 견디시길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끝까지 참고 인내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면 내가 당하는 것은 크고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작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당한 고난과 참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사명을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참았습니다. 사명 있는 자의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사명 수행의 과정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다니엘 같은 분들은 생명을 걸고 고난을 참았습니다. 암울한 현실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소망으로 인내함으로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함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선민사상으로 충만한 지도자들에게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한다. 전쟁에 패배한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대언 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숨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내한 것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해가 있어도 우리는 듣고 본 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노라 이렇게 죽어 갔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영혼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끝까지 인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의 결과입니다.

 

 

원망하지 말아야합니다.

 

본문 9절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망이라는 것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전 10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3가지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이고 두 번째는 간음이며 세 번째는 원망입니다. 서로 원망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지도자들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멸망 이유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원망입니다. 이 마음으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원망은 미움을 낮습니다. 미움은 증오를 낮습니다. 증오는 적대감을 낮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에는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부유하면서 교만치 않기는 참 어렵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원망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하면 불평이 생겨납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대상을 향해 분노가 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욥의 인내를 배워야합니다.

 

욥은 동방의 부자요 지혜의 스승이었습니다. 다복한 가정이었고 엄청난 재산과 명예를 소유한 경건한 가정이었는데 불행이 닥칩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의 결말을 보았다고 합니다. 욥은 인내의 화신이었습니다. 인간 인내의 한계에 도전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큰 축복과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아들이 일곱, 딸이 셋에 재산도 많았습니다. 양이 7천, 약대 3천, 소가 5백, 암나귀가 5백이나 되는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재산과 자식을 다 잃습니다. 스바 사람들이 몰려와 종을 다 죽였고, 그 자리에 벼락이 쳐서 양떼와 가축들이 다 죽었고,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와 약대를 약탈해갔습니다. 또한 열 명의 자녀들이 큰 아들 집에 모였다가 돌풍이 불어 그 집이 무너져 열 자녀가 한 자리에서 압사합니다. 이같이 엄청난 재앙을 만났으면서도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뿐 아니라 욥도 더러운 병에 걸립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고, 나중에는 너무 가려우니까 기와로 몸을 긁습니다.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았습니다. 정말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을 한꺼번에 당한 겁니다. 너무도 가혹한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까지 하지만,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면, 재앙도 받지 않겠냐’며 그 어리석은 말을 그치라고 합니다. 욥은 병들어 회복의 희망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그가 울면서 하는 말은, “나의 달려갈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였습니다. 욥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처절하게 고백한 내용입니다.

 

 

욥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대속해 주실 메시야 즉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했고 끝까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풀어 복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합니다. 그 결과 더 큰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당한 고난을 통하여 역사 이래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본이 되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모든 인류의 고난의 스승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 주게 됩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의 한계를 경험한 욥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이 무엇입니까? 욥기 마지막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고 했습니다(42:10). 욥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그를 위로하였다고 했습니다(42:11). 그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장수의 복까지 주셔서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42:16). 욥은 예수님 다음으로 인내력을 발휘한 사람입니다. 욥의 인내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약속된 축복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종말의 때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기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애용하던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 “마라나타”는 아람어인데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근 250년 동안이나 지속된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이겨낸 것은 바로 이 ‘마라나타’ 신앙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기독교의 신앙적인 표현 중 하나 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마라나타!” 곧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도 속히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이 땅에서 나는 열매를 바라보고도 참고 수고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고 영원히 있을 하늘의 열매와 상급을 바라는 성도들은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참고 기다려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는 사람은 이 땅의 어려움들을 마땅히 참고 견뎌야합니다. 그런대 안타깝게도 이 귀한 진리가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서는 쉽게 무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된 열매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귀한 것인 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이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그만 인내하지 못하고 하늘의 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도 참고 기다림 없이는 열매를 얻을 수 없는데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어찌 참고 인내하지 못하겠습니까?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미국의 어떤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뽑기 위해 시험을 치렀습니다. 모이는 시간은 새벽 네 시였습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회사 문은 잠겨 있었고, 모인 이들은 저마다 불평을 하며 한 사람씩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섯 시간이나 지난 아홉 시에 회사의 문이 열렸으니 사람들이 돌아갈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시에 나타난 시험관은 입사 지망자들에게 한 마디의 해명도 없이 다음과 같은 이상한 질문을 해댔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얼마입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팔은 몇 개입니까?" 그런 질문만 계속하더니 "감사합니다. 이제 모든 시험이 끝났습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 회사 시험의 전부였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 날 5시간을 기다린 후 말도 안 되는 시험을 친 몇 사람에게 합격통지서가 전해졌습니다. “저희 회사 입사 시험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먼저 당신은 시간을 지키는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당신이 네 시 정각에 온 것을 우리는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신은 인내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네 시에서 아홉 시까지 잘 인내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성격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짜증날만한 질문에도 당신은 화내지 않고 온화하게 대답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 인내할 줄 아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을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인데, 당신은 그 세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기에 합격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5절로 26절에 보면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에게는 무엇보다도 인내하는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려 약속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