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해 달려가라. (빌립보서 3:12-16)
요쉬카 피셔가 쓴 “나는 달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 뚱뚱해서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10km씩 달리므로 112kg 뚱보에서 75kg 날씬이로 37kg을 뺐습니다. 처음에는 100m도 뛰기 힘들어 헉헉대던 뚱보 피셔는 한밤중에라도 1시간 정도 10km를 뛰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자신을 재충전하는 ‘달리기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피셔는 달리기가 주는 자신만의 시간과 명상 효과를 즐기면서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달리기를 통해 외적인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내적인 평온과 조화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신앙을 달리기에 비유하였습니다. 성도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달리는 마라톤 선수와도 같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는 우리 인간을 ‘도상의 실존’이라고 말했습니다. 길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길 위에 우리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도상의 실존이라는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분이 오늘 본문 말씀을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고백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과거지향적 삶이 아닌 목표지향적 삶이 성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한 일’이 아닌 ‘할 일’에 초점이 맞춰진 삶을 고백했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달려가노라.” 물론 ‘한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를 무책임하게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것이 책임 있는 삶이라는 겁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그는 두 개의 부정과 하나의 긍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개의 부정은 무엇입니까?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얻지 못했다는 부정입니다.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법 얻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얻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한 것이지 이미 얻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에 대해서 연구해 보면 이룬 것이 많습니다. 신약 성경 29권 중에서 절반 정도가 그를 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셨습니까? 그에게 얼만 놀라운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러나 이루긴 했으되 온전히 이룬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에게는 늘 영적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얻고자 하는 배고픔, 이루고자 하는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긍정이 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하나의 긍정은 자신이 예수님께 잡혔다는 점입니다. 그는 한 가지 알았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잡혀있구나. 여러분도 예수님께 잡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는 예수님께 사로잡힌 존재’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잡혀서 끌려가는 것은 수동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수동적인 신앙적 삶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부름의 상을 받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뒤에 것을 잊어버려라.
여기 '잊어버린다'는 말의 원어는 '에팔란다 노메노스'인데, 이 말은 '과거의 기억이 앞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렸는지를 항상 물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1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3:13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여기에서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이란 물론 과거를 말합니다. 바울은 과거와의 단절을 결단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대해 회한(悔恨)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이에 젖어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물론 반성은 해야 합니다. 바울이 오늘의 고백을 하기 전에 또 하나의 고백을 한 것이 있습니다. 앞의 7-9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도 바울도 과거에 많은 죄악을 범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그는 과거에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을 때에도 사람들을 선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과거의 죄악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의 능력으로 과거의 죄를 용서 받고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믿기 전에는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죄악을 저질렀던지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롬 8:1,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박사는 그의 저서 '불황에서 벗어나는 길'에서 몇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져라! 즉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앞을 보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연설가운데서 "원수는 우리 마음에서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느 늙은 여인이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원수는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바로 원수를 없애버립니다." 물론 원수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원수를 없앤다면 우리 마음속에 미운 감정이 독버섯처럼 살아나 심장을 도려 먹는다는 사실을 링컨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자기 마음속에서 미운 생각을 지워버렸던 것입니다.
인간이 매사에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실수와 실패의 쓴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내용과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실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신앙생활도 돌이켜 보면 영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보다 우리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일이 참으로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실패를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음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실패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그런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전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바울은 뒤에 있는 것 즉 과거는 잊어버린다고 했습니까? 과거를 가지고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했던 실패로 인하여 패배주의에 빠져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과거에 이루었던 성공으로 인하여 교만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는 회개함으로 그리고 과거의 성공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일을 자꾸 들추고 기억하면 화목한 관계는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하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용서를 하거나 받지 못하면 화목한 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기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잊어버려야 용서가 됩니다. 물론 그렇게 용서하고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즉 과거의 실패와 성공을 하나님께 맡기듯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실수와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하려고 하면 우리 자신부터가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셨듯이 우리도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도 사는 길이고, 상대방도 사는 길이고 공동체도 사는 길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는 믿음입니다.
자기 부족을 인정하라!
저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우리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가 잘 알듯 사도 바울은 큰 사람이었고 영적인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고, 수 십 년 동안 오직 복음전도에만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나는 이미 얻었거나 온전히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8을 보시면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표현을 섰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1, 12장을 보시면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 즉 자신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숙한 삶의 자세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과정 중에 있습니다. 천국백성이 다 된 것이 아니라 천국백성으로 변화되고 있는 과정을 살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하신 것 중에,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대해 하신 말씀 중에는 씨앗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씨앗이 자라나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자라나는 과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인식한 것은 미완의 자아입니다.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미완성적인 자신의 모습입니다. 얻었다, 이루었다, 잡았다! 인생의 목표 달성을 의미하는 말들입니다. 바울은 어떤 점에서든지 미완성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꽤 완성된 인간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요? 바울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반도덕주의자들입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으니 마음대로 살자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니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온다! 부활도, 영생도, 천국도, 인격 완성도, 다 이루어진다!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 놓고 죄를 짓는다면 십자가에 대한 최대의 모독입니다. 자기만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 예수 믿으니까 마음대로 살자는 이방인, 모두가 잘못 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자신들을 완성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되었든지, 주님의 은혜로 되었든지 자신들을 완전한 자로 보고 있는 것이 잘못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에 참 자유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완벽주의에 빠진 이들은 자신이 완벽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완벽해야만 성이 차는 사람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자유속에서 살아갑니다. 더욱이 그 완벽한 기준을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요구할 때에 상대방을 죽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온전함과 성숙함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 도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의 여유와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겸손하고 진지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
12절을 보시면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오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14절을 보시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푯대, 즉 목표가 있었습니다.
신앙 경주의 첫 번째 원칙은 목표 설정입니다. 경주의 목적지가 어디인가?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목표와 목적이 선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직’이란 단어를 3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절) "오직...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절) “오직...그대로 행할 것이라”(16절) 집중력입니다. 여러분! 망치로 나무를 치면 나무가 깨지기는 해도 망치가 나무에 박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못을 데고 망치로 치면 못이 나무에 박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못 끝의 뾰족한 곳으로 힘이 모이니까 박히는 것입니다. 이게 집중력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려면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인생의 성공은 자신의 부르심, 자신의 사명, 자신의 비전을 알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는 여러분들이 도실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스코폰’은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경주자가 달려가고 있는 경주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바울이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경주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역경 속에서 자신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예수를 향하여 전진하여야 함을 뜻합니다. 12절에, “달려가노라”는 이전 성경에는 “좇아가노라”(dioko)고 번역했습니다. 사냥개가 표적을 따라가듯 오직 집중하고 몰두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단거리 선수가 자기 몸을 앞으로 쭉 내밀고 두 눈은 저 멀리에 있는 푯대, 골인 지점을 집중하여 전력으로 달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 단어도 집중력과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을 뜻합니다. 단거리 선수가 관중이 뭘 하고 있는 지, 어떤 표정을 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안됩니다. 오직 골인 지점을 바라보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目標)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달려야 왔다갔다하지 않고 직선거리로 달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바라보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다면 방황할 수밖에 없고, 삶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삶은 느슨해지거나 집중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칸트는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해야 할 목표가 분명하다면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지만 반드시 해야 할 목표가 세워지지 않으면 능력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이 12절을 해석하면서 12절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모습을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아테네에 있던 육상경기 트렉은 192미터 길이였다. 출발선에는 돌로 된 발판이 있었다. 선수들은 손을 발판에 대고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최대한 빨리 출발하도록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선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도록, 아니 죽을 고비를 맞아가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로마 감옥의 죄수 신분입니다. 언제, 어떻게 자유의 몸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쉬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출발 신호가 울리면 바로 내달리려고 출발선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출발신호가 “탕”라고 울리면 바울은 죽을힘을 다해 다시 달릴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1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상으로 여기고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복음 증거에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우리의 꿈과 목표가 되길 원합니다. 뉴욕의 한 의사가 천 여명의 환자들을 대하면서 병의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한 결과, 그들에게는 주된 목표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건들건들 사는 사람들은 병에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목표가 뚜렷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관리도 잘 해서 건강하게 장수한다는 통계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목표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히브리서 12:2을 보시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과 부끄러움이 있을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이나 상황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음 성가 중에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바라보아라"가 있습니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박사가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던 중, 승무원이 검표를 시작했습니다. 승무원이 다가오자 아인슈타인 박사는 표를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무원은 “아인슈타인 박사님, 저는 당신을 잘 압니다. 차표 없이 기차를 타실 분이 아니시니 제가 믿고 그냥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승무원이 기차 제일 마지막 칸까지 검표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보니까 아인슈타인이 그때까지 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승무원은 “표를 확인한 것으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더 이상 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그게 아닙니다. 표에 내가 내릴 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어느 역에서 내리는지 알 수가 없어 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기는 탔는데 어느 역에 내려야하는지를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표 없는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며,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인생은 이렇게 방황하고 그러다가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생의 공통된 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상 받기 위함입니다. 달리기 선수의 공통된 목표가 금메달을 목에 달고 영광을 얻고자 함과 같이 우리 또한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상 받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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