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나에게 도움이 오는 곳 (시121:1-8)

하나님아들 2024. 6. 10. 23:36

나에게 도움이 오는 곳 (시121:1-8)

 

 

1967년 6월 5일 당시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던 모세 다이안 장군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200만밖에 되지 않은 인구를 가진 이스라엘의 다이안 장군은 100배나 되는 2억 인구를 가진 아랍 연합국과 맞서는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무기가 있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계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노벨상 수상자도 많고 과학자도 많고 돈도 많으니 이 말이 공갈만은 아닐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능가하는 숨겨놓은 신무기일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 다이안 장군은 그 신무기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할 그 신무기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본 시편 121편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전쟁은 단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때 있었던 일화가 당시 이스라엘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도 용감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누군가 알지 못하지만 어디선가 나를 따르라는 음성이 있었고 하늘에서 불비가 내려 적군의 진격을 막고 사막에서 땅벌이 진격해 오는 기갑부대를 무력화시켰는가 하면 진군해 오던 몇 개 사단의 병력이 허상을 보고 항복하는 등 이 때 일어난 기적적인 도우심은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시편 121편의 말씀이 결코 허풍이거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기적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결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쓴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 시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A Song of Degrees)'로 이 시가 불려졌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짐승의 공격이나, 강도의 습격이나, 질병이나,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바라며 이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가장 암울하고 힘들었던 바벨론 포로 70년의 그 시절에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노래함으로서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내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라고 노래합니다.

 

 

 

바라봐야 할 시온 산성

 

시편 121편에 나오는 산은 다른 시편을 통해 시온의 산들, 즉 하나님의 성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는 것은 시온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는 뜻으로서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른 시편에서 말하는 시온으로부터 구원이 임한다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시 14:7). 철학자 칸트는 생전에 산을 즐겨 찾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산은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고 공허한 영을 만족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산을 자주 찾았다고 복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셨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히브리인들은 산을 곧 하나님의 품으로 생각했고 보좌로 생각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시온산 자락을 보기만 해도 위안을 받았고 하나님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온 산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산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인생의 도움을 세상의 산들로부터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산들이 무엇입니까? 인간들의 생각에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입니다. 이 세상의 산들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산들을 바라보면 헛된 열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처럼 형통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열망을 갖게 되면 결국 세상의 산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 세상의 산들을 오르내리면서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열망은 갖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세상을 향한 열망은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열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뜻을 이루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고 사는가?

 

오늘 본문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시인은 먼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인생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창 2: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여자를 지으신 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을 돕는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홀로 있던 아담에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을까요? 아담에게는 함께 할 수 있는 하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와에게는 아담이 없었다면 또 얼마나 삭막했을까요? 하와에게도 아담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삽니다. 남을 도와주기도 싫고, 남에게 도움을 받기도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의존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선배와 형제, 친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남편의 도움, 혹은 아내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았고, 현재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46:3-5절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권세 있는 자도 한계가 있고, 의사도 부모도 한계가 있고, 인간 자체에 한계가 있으니 그런 인간을 도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어렸을 때, 한 번은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깊은 곳으로 밀려가서 익사 직전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정원사의 아들이 용감하게 강물에 뛰어들어 처칠을 구해 주었는데, 처칠의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너는 내 아들의 은인이다. 네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모두 부담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원사의 아들은 처칠의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서 열심히 공부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처칠도 장성해서 정치가가 되어 영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처칠이 어느 날 그만 급성폐렴에 걸려서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한 사람이 폐렴치료의 최고 권위자 한 사람을 소개해 주어 그 의사는 의식불명의 처칠을 말끔히 치료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사는 바로 어렸을 때 강물에서 자기를 구해주었던 정원사의 아들 '알렉산더 플래밍'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플래밍은 처칠의 아버지가 은혜를 갚기 위해 지원해 준 학비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는데, 그는 백신 연구에 종사하여 페니실린을 발견해서 많은 사람에게 치료의 효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다시 한 번 처칠이 생명을 구해주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도움을 주기는 하면서도,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로서 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중에 우리의 모든 사업에 참여하시는 '조용한 동업자'이십니다. 시46: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오는 곳

 

여자 골프 선수 가운데 신지애 선수가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목회자였습니다. 다른 선수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골프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세계를 뒤 흔들어 놓는 골프 선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기독교 신문의 기사를 보니 신지애 선수에게 하나님께 직접 전화 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직통 번호로 자주 전화한다고 했습니다. 교환도, 비서실도 거치지 않고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전화만 걸면 즉각 하나님과 통화할 수 있는 희망의 전화번호, 전국어디서나 지역번호 없이 세계 어디서든 없이 무조건 걸면 하나님과 통화가 가능한 번호가 있는데 24-4110번입니다. 구약 이사야서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나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육성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격려가 되는 말씀이 있을까요? 외롭고 힘들고 절망스러울 때 24-4110번을 누르시고 하나님께 전화를 거십시오. 이런 말씀을 듣고 필드에 나가면 얼마나 든든하며 담대해 지겠습니까? 2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직통 전화를 걸면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십니다.

 

 

어느 이름 있는 큰 병원에 수술을 잘하기로 소문이 난 소위 '명의'가 있었습니다. 그 의사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곤 했습니다. 많은 후배 의사들은 그 선배의 성공과 수술 전에 혼자 있는 습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번은 인턴 중의 하나가 그 선배 의사에게 자기들의 이러한 궁금증을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수술 전에 혼자서 은밀한 시간을 갖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예, 나는 수술을 하기 전에 어떤 의사보다 더 위대한 의사이신 하나님께, 내가 수술을 하는 동안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손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수술을 하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수술을 성공하곤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수술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어떤 일이든 행하고자 할 때 실수 없이 무난하게 일을 마무리하도록 도우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합니다.

 

 

어느때나 언제든지 지켜 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실 뿐 아니라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4절). 왜 그렇게 지키십니까? 말라기 3장 17절에 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두 눈은 무한한 사랑의 광채를 내뿜으시는 반면, 반짝이는 두 눈을 망각의 졸음으로 감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밤에도 낮에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8절을 보면,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러실 겁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분초마다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아차 하는 순간에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지켜주셔서 실족하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네 우편에서 네 그들이 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편”이라는 말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편’은 공간적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그늘’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6절 보면,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켜주신다고 했습니다. 광야 사막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낮에는 열사의 햇볕이 괴롭히고, 밤에는 차가운 달빛이 힘들게 합니다. 또 사막은 개활지이므로 달빛이 밝으면 강도와 맹수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7절(상) 말씀대로 ‘모든 환란’에서 지켜주십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낮의 해’라는 환난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해'와 '달'의 해(害)를 받았습니다. 해는 그 빛이 아주 강하게 내려 비치기 때문에 샘의 근원을 마르게 하고, 사람의 머리에 쬐어서 일사병에 걸리게 합니다. 일사병에 걸리면 열이 나고, 숨이 막혀서 즉사하거나 속히 죽기 때문에 사막의 여행자들은 일사병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광야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태양입니다.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낮 온도가 40도가 넘는 기온에 태양 빛이 내려 쪼이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욘 4:8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죽음을 구할 정도로 광야의 태양의 위협은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글을 썼는데, “이전에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광야를 3시간 정도 걸어보니까 낮의 해가 얼마나 고통인지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밤의 달’이라는 환난이 있습니다. 또 달빛 아래서 잠을 자다가 해(害)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낮의 열기가 밤에는 극도로 추운 냉기로 변해서 달빛을 받고 잠을 잔 사람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는데, 좀더 심하면 정신이상이나 간질, 열병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월사병(月斜病)이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을 낮의 해와 대구로 표현했습니다. 즉 낮에 당하는 모든 고통과 환난을 말하고, ‘밤의 달’은 밤에 당하는 모든 고통과 환난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밤에는 첫째, 추위가 고통입니다. 둘째, 독충과 전갈이 고통입니다. 셋째는 이리와 맹수들의 위험이 있습니다. 맹수는 밤에 가축을 해치고, 사람도 해칩니다. ‘밤의 달’도 인생에 찾아오는 환난을 말합니다. 정신 이상자를 영어로 '루나틱'(lunatic)입니다. 그 말은 로마시대의 '루나'라는 '달신'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도중에 야영을 하게 되면 내리 비추는 달빛이 사람들을 미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낮의 해와 밤의 달을 피해야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낮이나 밤이나 우리의 그늘이 되어주셔서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게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낮의 열기와 밤의 열기의 차이가 30도의 온도차이가 나기 때문에 밤에는 극도로 추위를 느낍니다. 그래서 밤에 사막에서 잠을 잔 사람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는데, 좀더 심하면 정신이상이나 간질, 열병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해를 당합니다. 그러나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고, 낮의 해가 나를 상하게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라고 말씀한다.

 

 

 

때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그런 고난과 역경의 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험난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그런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습니다. 그런 역경과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도 우편에서 우리의 그들이 되어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워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 있는 오른팔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너무 잘 알았던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가운데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롬웰은 어렸을 때 유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요람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집에서 키우던 원숭이 한 마리가 그를 안고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아이는 그만 죽는다고 울고 있습니다. 온 집이 난리가 났습니다. 지붕 위에서 원숭이가 아이를 놓아 버리면 큰일입니다. 가족들은 난리를 피웠습니다.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 소리에 가족들이 모두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하고 한마디씩 합니다. 그보다 먼저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땅에 깔고 혹시 아이가 지붕 위에서 떨어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합니다. 또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가 어떻게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더 강하게 요구하기를 '잔 말 말고 함께 기도하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모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원숭이가 갑자기 저지른 자기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동안 조용히 아이를 안고 내려와 마당에 놓고 다시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어린 아이가 자라서 후에 영국을 살린 '크롬웰' 장군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주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통로입니다. 요14: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출입'은 밖으로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데, 한 사람의 전 생활 영역에서의 모든 삶과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출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영원히 지키고 보호하시며 복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면, 가정에 들어와도 화목하고 평안하고 나가서 일하는 직장과 사업장에서도 형통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축복과 은총을 주십니다. 낮이나 밤이나 우리는 지켜주실 뿐 아니라 일평생 동안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해를 당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는 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때마다 일마다 그 분의 도움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