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구원의 길 눅15:11-24

하나님아들 2024. 6. 9. 23:42
구원의 길 

누가복음 15:11-24

지난 1월 6일은 교회력으로 주현절이었습니다. 주현절의 원래 의미는, 주님께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 나타나셔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사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날로 여깁니다. 
하지만 정교회를 제외한 서방 교회에서는 그것을 분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12월 25일에 기념하며, 
1월 6일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받고 세상에 밝히 알려지게 되었음을 기념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주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세례 받으심을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날인 것입니
다. 
신약성서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쓴 ‘신약의 기독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
하는데 상당히 큰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으로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한 호칭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아마 여러분이 잘 아시는 호칭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주’, ‘구주’, ‘그리스도’,  ‘종’ 정도일 것입니다.
오스카 쿨만도 이런 호칭들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인자’, ‘선지자’, ‘말씀’
이라는 호칭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해 주는 다양한 호칭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호칭은 무엇일까요? 아마 ‘그리스도’
라는 호칭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주’라는 호칭과 더불어, 신약성서 안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 단어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호칭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서의 핵심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합니다. 오늘 교독문을 통해서 읽은 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에서 독생자
로 이 땅에 오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구원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는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메시야’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목적을 가장 잘 알려 주는 호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아야 합니다. 
감리교회를 시작한 존 웨슬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구원의 완성을 향한 순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원래 32절까지이지만, 
오늘 설교의 초점이 24절까지라서, 다 읽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 또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 후, 
구조주의 성서해석 학자들에 의해, ‘하나님 사랑의 비유’로 부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5절
부터 32절까지에는 탕자 곧 돌아온 아들은 없고, 대신 맏아들이 등장하며, 이 비유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공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11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은 아버지와 둘째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받아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남의 집에서 일하며 살았지만,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습니다. 그때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영접을 받고, 다시 아들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유의 전반부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유의 후반부인 25절부터 32절까지의 내용은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과 그 아들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가 못마땅
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고, 아버지는 그런 맏아들에게 집에 들어오기를 설득했습니다. 
이것이 비유의 후반부 내용입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든지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나 맏아들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전반부에만 나오든가, 후반부에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비유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여, 두 아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특별히 주인공인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주제로 한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이 주제가 된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비유의 후반부에 나오는 맏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용납하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나오지 
않지만, 비유의 전반부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확실히 구원받았습니다.
어떻게 둘째 아들이 구원받게 되었을까요? 

둘째 아들이 구원받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께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의 관심은 재산에서 육체적 쾌락으로, 그리고 육의 양식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서운해 하실는지,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실는지, 아버지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실 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굶주려 죽게 된 상황이 되자,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은 궁극적 관심이다.”라고 했습니다. 폴 틸리히의 주장에 의하면, 현대인들
에게 있어서 신앙의 위치에 있는 것은 재물이요, 지위요, 권력이요, 명예요, 쾌락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의 길은 이 모든 것으로 향하던 지대한 관심을 하나님께 돌이켜야 열려집니다. 
신명기 30장 1절부터 3절까지에 있는 말씀은 그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
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
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아무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하나님
께서 명령하신 것을 따르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장 22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고침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섰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구원의 길이 열려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구원받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죄를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과 19절을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서면서, 아버지를 뵈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본문 21절을 보면, 아버지를 만난 둘째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이든지 숨기면, 계속 그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백하게 되면,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
한 베드로는, 죄에서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보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한 강도는, 예수님께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
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용서를 얻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이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해야, 
구원의 길이 열려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구원받게 된 세 번째 이유는 과거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회복된 신분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신분이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특히 손에 가락지를 끼운 것이
나, 발에 신을 신기는 것이 그러합니다. 발에 신을 신는다는 것은 더 이상 종이 아님을 의미하며, 손에 가락
지를 낀다는 것은 지위가 있는 신분을 가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회복된 신분을 받아들였습니다. 곧 종이 아니라, 둘째 아들로서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
게 함으로써, 그는 완전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모두 사도 바울의 말로, 변화된 신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9절에 보면, 바울의 말대로, 변화된 신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합당하게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에베소의 마술사들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2년 동안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놀라운 주님의 능력을 나
타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귀신도 나갔습니다.

 

그러자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던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
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하면서,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귀신들이 그들에게 “내가 예수
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뛰어올라 짓눌러 이기자, 그들은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술을 행하다 믿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의 책을 모아서, 모든 사람 앞에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그 책값을 
계산해 보니, 은 5만에 맞먹었다고 합니다. 이 돈은 상당히 큰 액수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에 은 30을 받았으니까, 5만이면, 30의 1,500배 정도가 되는 액수입니다. 
마술을 행하다 믿게 된 사람들은, 바울의 말대로, 변화된 신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결단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화된 신분을 받아들이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신분을 받아들이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이 회복된 신분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분을 받아들
이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온전한 구원의 길이 열려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처럼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섰고, 죄를 고백했으며, 회복된 신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구원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구원의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구원자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죄를 고백하며, 회복된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서, 올 한해 구원의 길을 
걷는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
      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하나 어떤 사본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가 있음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