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교사 교육

주님의기도 (이재철목사 성숙자반 다섯째 단원)

하나님아들 2019. 6. 15. 18:20

V. 주님의기도 (주기도문)

동기와 목적

주기도문의 정확한 명칭, 고유명사 주님의기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의미.

기도를 가르쳐주신 동기:

① 모범 기도문을 만들어 주심

혼자 하기에 어려운 기도이기에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모범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음. (지금도 로마가톨릭 교인들은 모범 기도문 책을 가지고 있음.) 이런 예를 따른 한 제자의 요청( 11:1)에 의해 응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모범 기도문이 주님의기도.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

② 믿음의 토대 위에서 바르게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함.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믿음이 없어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한 유대인들. 이방인들은 우상에게 기도하기에, 그 우상이 자신의 기도를 들었다는 표시가 없어 동일한 내용의 기도를 날마다 반복. 의심의 토대 위에서 하는 기도.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도 마찬가지. 자신들이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전제하에 날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림.

 의심의 토대 위에서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님과 무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믿음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

주님의기도를 주신 목적:

기도의 수준을 높여 신앙의 수준을 향상시키시기 위함.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6:9)

그러므로의 앞 구절은 구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내용. 따라서 더 이상 자신의 필요를 위해 중언부언하지 말고 믿음의 토대 위에서 주님의기도를 따라 기도의 수준을 높이라는 것.

한 사람의 신앙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

① 위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답게 대처하는가?

② 기도의 내용이 내 것만을 위하는가? 아니면 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가?

 기도의 수준과 신앙의 수준은 어긋나지 않음. 내 것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라는 틀에 갇힌 자기 노예일 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성숙한 신앙인.

 

주님의기도의 내용

1) 기도의 대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       파테르 (아버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예수님.

  ① 하나님 아버지는 남성인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 하나님 아버지를 남성으로 인식할 경우, 육신의 아버지로부터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남에 있어 어려움이 생길 가능성이 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면 어머니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하였다면 누구든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어른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질 것임.

  ② 박해의 때에 부르는 아버지의 의미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박해와 가난과 굶주림과 고난. 순교의 자리에서 주님의 기도를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을 것.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 아빠가 지닌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됨.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됨.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를 부르시며 마지막 기도를 드린 예수님,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음을 고백한 바울( 4:6)에게 힘이 되었음.

  돌아온 탕자가 그 아버지에게 던진 첫 마디 아버지”. 이 한 마디로 가출했던 아들의 존재가 회복되었고, 단절되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음. 아버지란 호칭이 지닌 위력이요 감동.

  주님의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이런 감동을 느끼며, 신앙이 성숙해져야 할 것.

- 헤몬 (우리의)

 우리의를 뜻하는 1인칭 복수형 소유격인 헤몬. ‘파테르 헤몬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느 개인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나만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할 때, 그 아버지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됨. 같은 아버지를 가진 형제간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게 될 것.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잊지 말 것.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뜻.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비판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 밖에 모르기 때문.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예수님을 시험한 율법사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사랑’’과 그와 똑같이 큰 사람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며, 그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하심. ‘하나님 사랑사람 사랑의 두 기둥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졌다는 의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어 단어 X로 표시. 사선이 교차하는 점은 ’, 그 윗부분은 하나님 사랑’, 동일한 영역의 그 아랫부분은 사람 사랑.

 하나님 사랑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음.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됨.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 사랑의 종점이 아니라 통로일 뿐이라는 것.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의 하나님 사랑은 똑 같은 크기의 사람 사랑으로 이어져야 함. 바로 X의 아랫부분.

 X의 아랫부분, 사람 사랑의 영역에서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 그래서 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도 우리의 아버지안에서 포용 가능. 그 사람 역시 우리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

- 우라노이스 (하늘들)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라노이스는 하늘을 뜻하는 우라노스의 복수형, 즉 하늘들. 따라서 정확한 번역은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복수형 우라노이스는 땅과 반대 개념으로서의 하늘이 아님. 하늘들에 계시는 아버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두루 퍼져 계시는, 편재(遍在)해 계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아버지를 뜻함.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 ( 66:1) 이라고 당신의 무소부재하심을 표현하신 하나님.

 박해 받던 초대 교인들에게, 그들의 박해 받는 현장에 함께 계시는 아버지는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 것인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어디에서 어떤 상황을 맞더라도 바로 그곳에 우리의 아버지께서 계시는데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늘들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를 믿는다면 우리가 감히 그릇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짓을 서슴없이 행하는 것은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

 진정으로 하늘들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믿어야 할 것.

 

2) 하나님을 향한 기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가 일 경우 (Hollowed be your name by me)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아버지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뜻함.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모습,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알게 되므로, 나의 삶으로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다짐.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실 경우(Hollowed be your name by you)

 인간에 의해 더럽혀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회복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버지 당신밖에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인간에 의해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을 당신께서 거룩하게 회복시키실 것임을 친히 밝히신 에스겔 36:22~23. “너희가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죄인인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더럽힌 아버지의 이름을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으므로, 주님의기도를 통해 아버지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 앞으로는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단의 기도라는 점에서 이 기도의 주체가 일 경우와 동일.

어느 쪽이든 이 기도는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앞으로는 거룩하게 살기를 결단한다는 것. 따라서 주님의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 삶의 지표가 거룩임을 재확인하여 우리 삶의 질과 방향을 날로 새롭게 해야 할 것.

-       나라가 임하시오며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과 자기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는 뜻. 절대주권인 하나님의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주셨음. ( 15:16, 43:1). 나 같은 죄인을 자녀로 삼아주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만 가능. 구원해 주신 절대주권에 감사 드린다면,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당연히 인정해야 마땅함. 그러나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는 감사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통치권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율배반을 저지르고 있음.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주님의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받아들일 것을 재다짐해야 할 것.

② 자기 중심으로 살려는 어둠의 권세와의 충돌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결단을 의미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살려 할 때, 어둠의 권세가 자기 중심으로 살라고 교묘하게 유혹할 것.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려는 나와 어둠의 권세가 충돌하기 마련이나, 그 충돌을 회피하지 않고 주님의 기도를 통해 극복.

 내가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살면 그리스도가 죽는다.” (본 회퍼)

③ 자기자신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가 되겠다는 결단의 기도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절로 임하는 것이 아님.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고 개간하는 하나님 나라의 첨병이 되어야만 가능. 성시화는 집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진리의 빛으로 살아갈 때에만 가능.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주님. ( 5:14) 이 말씀은 세상은 어둠이라는 뜻.

 주일예배를 마친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인 채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봐야 세상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을 것.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면 성시화는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

 우리의 후손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살아갈 이 세상을 거룩하게 이루어주는 것.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기를기도하면서, 이 기도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해야 함.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① 위를 지향하는 삶을 결단하는 기도

여기에 쓰인 하늘은 단수형 우라노스로 땅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그 방향은 .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를 지향하는 삶을 결단하는 기도.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 ( 3:1a)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위의 것을 구해야 함.

이 세상은 거대한 무덤’ (우치무라 간조) 새것도, 생명도, 진리도 결코 아래로부터 올 수 없고, 오직 로부터 주어짐. 참되고 영원한 것은 언제나 위에서만 오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위를 보면서 위의 것을 구해야 함.

     ②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겠다는, 말씀의 사람이 되겠다는 적극적인 결단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그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되어야만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아버지의 도구로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매일 먹고 마셔야 함. 그렇게 살 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육화되는 삶을 살게 될 것.

 

3) 우리를 위한 기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① 영육간에 결핍된 존재에 불과한 자기 실상에 대한 고백

 양식의 생산부터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건강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조차 먹을 수 없는 존재.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유한하고 결핍된 존재에 불과한 우리 자신을 재확인하고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됨.

 고후 11:30, 12:9~10에서 자신이 얼마나 결핍된 존재인지 잊지 않는 방편으로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한 사도 바울. 자신의 약함과 결핍을 확인할수록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장 약할 때 역설적으로 주님 안에서 가장 강할 수 있었음.

②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는 청지기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

 일용할 양식 이상의 재산이 있더라도 자신을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고, 초과분은 주님의 청지기로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겠다는 결단의 고백. 자신에게 무엇이 있든지 그것은 탐심의 대상일 수도, 자기 개인의 소유일 수도 없다는 것.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라는 점이 중요. 청지기 의식이 없는 사람은 나의배만 부르면 복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 청지기 의식을 지닐 때에만 가 맡은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음.

 하나님께서는 의 주머니를 늘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하려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를 찾고 계심. ‘가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할 것.

③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바르게 모으고 바르게 사용하겠다는 결단

 양식은 하루 세 끼 밥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주시는 모든 것을 뜻함.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왜 모으는지, 왜 쓰는지, 그것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인지 명확한 기준과 생각이 있어야 함.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돈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서 추해 지게 됨.

 이 기도를 할 때마다 물질을 바르게 모으고 바르게 사용하겠다는 다짐을 되새겨야 함.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헬라어 원문에서 먼저 나오는 구절.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를 정결케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유한함에 대한 고백.

 마태복음은 옵헤일레마로 표기. , 채무라는 의미. 이때의 죄()는 관계상의 죄().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빚질 일도 없음. 누가복음은 하마르티아’ (본질적인 죄)로 표기.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질적인 죄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 속에서 짓는 크고 작은 범죄들마저도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살아있을 수 없음.

 단 한 번도 용서받아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타인을 용서할 수 없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받았고 또 받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고 있음. 하나님의 이 은총을 깨달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됨.

 타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길. 나의 용서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믿음의 행위.

 이 기도를 통해 타인의 죄를 용서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할 것.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여기에 사용된 는 마태, 누가복음 공히 옵헤일레마’ (, 채무)로 표기. 사람간에 범하는 죄는 관계의 죄일 뿐 본질적인 죄가 아니라는 뜻.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본질적인 죄인이므로, 죄인간에 범하는 죄는 모두 관계의 죄일 뿐.

 따라서 본질적인 죄까지 용서받은 우리가 관계에서 일어나는 누군가의 잘못을 왜 용서하지 못하겠느냐는 의미.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까지 용서하라시며 예로 드신 왕에게 1만 달란트 (6천만 데나리온) 빚진 종과 그 종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6천만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들. 세상 사람들이 내게 진 빚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탕감 받은 액수의 60만 분의 일에 불과. 내가 탕감 받은 액수를 기억하고 100 데나리온을 기꺼이 탕감해 주겠다는 결단을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해야 할 것.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므스’. 시험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면 훈련’, 주체가 사탄이면 유혹이라는 의미.

이 기도문은 우리로 하여금,

①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를 재인식하게 해 줌.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사탄을 이길 수 있음.

②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유혹거리를 적극적으로 제거해 가도록 우리를 인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하면서도 그 유혹거리들 속에서 살아간다면, 계속 유혹에 빠져 살겠다는 말. 진정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유혹거리들을 스스로 제거해야 할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함, 곧 구별.

 빌립보서 4:8의 바울의 권면은 네 자신과 네 삶을 돌아보며, 네가 진정으로 참되고 정결할 수 있도록 너 자신을 가꾸어라.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버려라는 의미. 나를 유혹하고 실족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버려야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후회 없이 사는 길.

③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실천하게 함.

 자신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유혹에 빠지거나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 인간을 넘어뜨리는 것은 무서운 범죄 ( 17:2)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유혹에 빠지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통해 서로서로 세워주고 지켜주어야 할 것. 초대교회 교인들과 같이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유혹을 이기고 더불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 ‘우리라는 신앙공동체를 통해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굳건하게 세워져 갈 수 있음.

-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구하시옵소서의 헬라어 뤼오마이건져내다, 구출하다는 의미. 현 상태는 어디엔가 빠져 있다는 것을 전제. 즉 빠져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일.

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이 아닌 상태로 끌어내리는 구체적인 세력.

아담의 원래 뜻은 얼굴을 붉히다’. 사람됨을 상실하는 것은 얼굴 붉힘즉 수치심을 잃어버리는 것. 수치심의 상실은 악의 제일 가는 특성.

육체가 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으나 죄의 수치를 몰랐던 아담과 같이, 악에 빠지면 두려움은 느끼나 죄의 수치는 모름.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3:5b) 성경을 읽으며 자신에 대해 수치를 느낄 때가 있다면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증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수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영적 상태를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아야 할 것.

이 구절의 기도는 더더욱 말씀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의미. 누구든 말씀 안에서 살면 그 사람은 악과 무관해 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2:19)

말씀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자체가 악이요 고통.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사람됨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하며, 그 삶은 고통으로 끝날 수 밖에 없음.

은 헬라어로 포네로스’. ‘바쁘다, 수고하다, 애쓰다의 뜻인 동사 포네오의 파생어. 즉 하나님 없이 바쁜 것이 악. 하나님 없이 바쁘고 수고하고 애쓸수록 더 악에 빠지기 마련.

나의 삶이 왜 그토록 바쁜지, 그 바쁜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그 바쁜 일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지 않고 단지 바쁘기만 하다면, 바쁜 만큼 자신도 모르게 더 악에 빠질 수 있음.

 

4) 송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멘

-        대개(大蓋)

큰 원칙으로 보건대라는 의미의 부사. 헬라어 원문은 호티’ – ‘왜냐하면이라는 뜻. 즉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이유를 밝히는 단어.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때문.

영원한 권세, 영원한 나라, 영원한 영광이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있기에,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아버지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악에서 구하여 주실 것을 기도 드리는 것.

-        아버지께

헬라어 원문에는 2인칭인 당신께로 기록되어 있음. 아버지로 시작하여 당신으로 끝나는 주님의기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주님의 기도를 드릴수록, 하나님을 바로 우리 앞에 계시는 당신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함. 우리를 품고 계시는 아버지 당신의 숨결과 온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 이것이 주님의기도가 아버지로 시작해서 당신으로 끝나는 이유.

-        아멘

송영의 마지막 단어이자 주님의기도의 마지막 단어, 아멘.

진실이라는 의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하실 때 진실로가 바로 아멘. 주님의 말씀은 모두 참 말씀이라는 뜻.

동의한다는 의미.

 예배시간에 기도자의 기도가 끝나는 순간 기도자의 아멘제가 드린 기도의 내용은 모두 진실입니다라는 의미, 예배참석자의 아멘기도자의 기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기도가 저의 기도입니다라는 고백. 성가대의 찬양이 끝날 때 화답하는 아멘도 같은 고백.

이루어 주십시오, 믿습니다, 확신합니다의 의미

 주님의 기도 마지막 단어 아멘의 의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전적인 자기의탁으로 끝나는 것.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당연히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도 다 알고 계심. 이런 하나님 아버지 덕분에 우리가 수준 높은 기도를 드릴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

 

결론

1)     주님의기도는 기도의 방향과 틀 그리고 수준을 교정해 주는 기도의 거울.

  주님의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의 방향이 바른지, 그릇된 기도의 틀을 지니고 있지는 않는지, 기도의 수준이 어떠한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음.

주님의기도는 복음 전체의 개요이며, 기도의 정수이고, 기도를 가르쳐주는 기도’ (교부 터틀리아누스)

사복음서의 요점이 주님의기도에 들어있으며, 모든 기도를 대표하는 기도의 본임.

2)     주님의기도는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한 결단의 기도

  자신의 욕구나 원하는 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삶을 추구하기를 결단하는 기도.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우리를 위한 삶으로 변화하기 위한 결단. 짧은 주님의기도 속에 개인을 위한 기도는 한 마디도 없는 대신 우리라는 단어는 여섯 번이나 나옴. ‘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이기 때문.

3)     이 기도의 원천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는 사람만 주님의기도와 같은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고, 그 결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음. 기도와 믿음, 기도와 삶은 비례하기 때문.

  우리가 창공을 나는 새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 6:25~27)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믿음이 작은 자인가? 큰 자인가? 어떤 경우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 기도의 핵심일 수 없음을 강조하신 주님. ( 6:28~32)

  기도의 최종 목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가 바로 주님의기도.

  그 기도의 결과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게 해야 함.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 ( 6:33)

  내일 일은 내일을 주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 ( 6:34)

  괴로움이 있어야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됨.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적인 괴로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실 것이나, 그 괴로움은 그날로 끝이 남. 그 다음날은 그 다음날을 주신 하나님께서 또 책임지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만 날마다 주님의기도를 삶으로 드릴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