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나실인방, 나무광, 한센병자실, 15계단, 기름실

하나님아들 2012. 9. 6. 11:18
성전 설계도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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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장 16-17절

요점
신령한 성전에서 나실인의 방은 하나님 주권중심을, 나무광은 육신을 사용한 열심을, 문둥병자실은 죄를 회개함을, 15 계단은 넘치는 찬양을, 그리고 기름실은 성령충만한 삶을 가리킨다.


오늘은 성전론에서 설계도 6-10번까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전이란 단순에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어야 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지어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 번의 것을 간단히 복습하면 성전담처럼 세속에서 거룩한 성전, 열두 돌계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전, 고린디안 문처럼 항상 기도하는 성전, 여인의 뜰처럼 십자가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성전, 그리고 낮은 뜰처럼 겸손과 사랑으로 성도의 교통하는 성전이 되자고 했습니다. 오늘도 계속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6번은 나실인의 방입니다.

이것을 의미하는 제 6번이 나실인의 방입니다. 이 나실인의 방은 여인의 뜰의 네 모퉁이에 있는 네 방 중에서 하 좌편에 있는데 방입니다. 이 방에서는 서원이 끝난 나실인들이 드리는 번제 속죄제 화목제의 세 가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입니다. 이 방에서 화목제의 요리도 만들고, 그들의 서원 기간 동안에 자라난 머리카락도 이 방에서 잘라서 화목제사의 불속에 살랐습니다. 나실인이란 '나지르'로서 '성별된, 구별된'이란 의미로 고도의 헌신을 상징했습니다. 나실인이었던 삼손은 모태에 있을 때 그의 부모부터 시작하여 그의 일생에 포도주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고 삭도를 대지 않도록 했습니다. 머리를 기르는 것은 내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나실인은 이제 자신을 내 몸으로 여기지 않고 주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나실인이셨습니다. 그래서 일생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시고 죽으셨습니다(요10:37, 요8:28-29).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 나실인의 방은 자아파쇄 즉 하나님 주권사상을 가리킵니다. 자아파쇄는 철저히 하나님 주권을 인정함에서 이루어집니다. 합2:20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성전이라면 우리 안에 아버지께서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즉 내가 주장되는 곳이라면 하나님께서 편하실 수 없고 성전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여인의 뜰의 한 모퉁이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열심히 자아를 십자가에 넘겨주라는 것입니다. 자아란 죽여도 다시 살아납니다. 이 자아가 살아나면 성전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내가 왕노릇하는 집이 되고 맙니다.

7번은 나무광입니다.

이 곳에는 번제단에 쓰일 나무를 저장하는 곳입니다. 이 나무 역시 벌레 먹거나 더러워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곳에서 좋은 나무를 골랐습니다. 나무 고르는 작업은 은퇴한 노인 제사장이나 제사장 후보들이 담당했습니다. 아직도 비밀이지만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법궤가 이 곳 아래에 숨겨져 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흠없는 나무는 인성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나무광은 열심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나무는 인성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집을 지으려면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육체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영성이란 내 몸을 죽고 썩을 것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영과 함께 하나님을 섬김에 합당하도록 헌신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육체는 오랜 습관 속에 잘못 길들여 있어서 잘되지 않으므로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기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교회 혹은 징계로서 강한 신앙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체에 영성을 입는 일입니다. 육체에 영성을 입음이란 각종 은사를 육체에 입혀 주셔서 육체로 하여금 실족치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하도록 도우심입니다. 육체에 영성을 입게 되면 시시때때로 은사로서 하나님께서 지도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십니다. 게으를 때는 깨워도 주시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는 깨닫게도 하시고, 연약할 때는 치료로서 도우십니다. 이 영성을 입지 않으면 육체는 어디까지나 육체로서 그 타성을 벗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인성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우리 몸은 비록 그렇지는 못하나 대신 육신에 영성을 입혀주셔서 실족치 않을뿐 아니라 영혼의 좋은 내조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나무들은 번제단에서 숯불로 변합니다. 제단 숯불은 죄악도 변화시키는 성령불의 상징입니다(사6:6-7). 이처럼 신비한 것은 우리 육체로 심지만 신령한 것을 거두고 썩을 것을 심지만 썩지 않을 영원한 것을 거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전15:42-4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했습니다. 잠시 있을 물질도 하나님께 드리면 영원한 상급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내 몸과 마음과 시간과 힘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섬기면 그 섬긴만큼 거룩함과 생명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롬6:13-14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했고 19절에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하면서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내 몸을 드리지 않는 신앙이란 관념에 그칠뿐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같이 영적 실재가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드려 헌신적으로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훈련하고 공부하며 이 몸을 드리는 일을 힘써야 영성이 됩니다. 초막절에 물을 길듯 열심히 몸을 드려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요7:37-38). 힘쓰지 않고서 성령의 강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광이 여인의 뜰에 있고 또 바닥의 모습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적극적인 의미는 봉사와 충성입니다. 또 열심은 혼자보다 함께 하므로 생겨집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다.

8번은 문둥병자 정결예식소입니다.

이 곳은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고 정결예식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장소입니다. 당시 문둥병은 불치의 병이었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리면 미리 장례식을 지내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고침받은 사람들은 이 곳에 와서 정결예식을 준비하고 정결케 된 이 후에는 정상인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다만 죄가 무엇인가를 교훈하기 위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병에 대한 편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어원상으로 볼 때 문둥병( 차라아트)은 '더럽다, 부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죄는 더럽고 부정한 것임을 성경은 300여회 이상을 언급합니다(렘17:9). 문둥병의 증상은 죄병의 모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먼저 문둥병의 원인으로 보면 스스로, 부스럼, 화상, 접촉 등을 통해서 발생합니다. 이와 같이 죄병도 근본은 원죄(벧전1:18)로 말미암지만 타인의 영향과(고전5:6, 고후6:14, 잠5:8) 환경적인 악조건을 통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병징으로 보면 잠복기 권태기 오한 발진 피부질환 무감각 궤양 신체기능정지 떨어져 나감 몸전체파괴 사망이라는 수순으로 진행하듯이 죄병의 징후도 신앙생활에 나태가 최초 징후입니다. 그 후 신앙의 권태가 오고 신앙에 대한 기쁨이 사라지며 신앙을 멀리할 결정적인 구실이 생기면서 양심도 무디어지고 신인식도 무디어지며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던 신앙마저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주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여기서 깨닫는 교훈은 신앙생활의 나태가 우리의 가장 큰 적이라는 사실입니다(벧전5:8). 그런데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시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무엇을 통해서든지 회개토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 방에서 사유와 치료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문둥병자실은 회개의 신앙을 상징합니다. 회개에는 믿을 때 이루어지는 단회적인 칭의적인 회개와 날마다 자신의 자범죄를 용서받는 관계적인 회계와 죄성을 처리받고 새롭게 되는 성화적인 회개가 있습니다. 이 방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성도들은 성화를 위하여 날마다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고전3:16-17).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여 더럽힌 자들을 두 번이나 척결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이방인의 뜰인데 성경은 그곳까지도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전은 거룩해야 하며 또 예수만이 거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들도 날마다 씻어야 주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유지됩니다.
이 씻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결은 영육 간의 생명입니다. 사람의 장기에도 몸을 정결케 하는 기능들이 약화되면 피가 더러워져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가령 몇 분만 숨을 못 쉬어도 영혼이 그 몸을 떠나버립니다. 인간의 영혼도 더러운 몸을 떠날 수밖에 없다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러운 심령에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자비의 하나님이시기에 떠나시지는 않으시지만 임재의식과 교통은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반드시 날마다 자신의 심령을 깨끗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깨끗게 하기 위해 힘쓰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이 정결예식소가 여인의 뜰에 위치한 것은 죄병은 스스로 외에도 서로가 사랑 안에서 기도하므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죄를 보고 비판하지 말고 사랑 안에서 기도로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남의 발을 씻어주는 영적인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온전히 죄의 뿌리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은 죄악의 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이루어집니다.

9번은 기름실입니다.

이 곳은 기름이나 포도주나 밀가루 등 제사에 쓰일 제물 들을 관리하던 곳입니다. 소제와 전제를 드리려는 사람들은 이 곳이 와서 금액을 지불하고 제물을 구했습니다. 여인의 뜰에 있는 다른 방과 다른 점은 다른 방들은 문이 하나이지만 이 방은 문이 여인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을 향하여 둘이었는데 이는 제사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성령을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신령한 성전에서도 이 기름실은 성령의 충만의 상징입니다. 아름다운 성령의 전을 위하여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엡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권면합니다. 여기 '성령 충만을 받아라'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으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현재도 계속적으로 채워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내 내주와는 달리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사항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뜰과 방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대개 육신이 힘을 내어서 도와야 할 성질의 것들입니다. 이 방 역시 육신의 힘을 드려 늘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인의 뜰에 위치한 것은 서로 사랑의 기도로서 도우므로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하게 됨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불과 같이 영의 대 화재로 번져가게 해야 합니다.

10번은 15계단입니다.

이 15계단은 여인의 뜰 서쪽 끝에 반달형의 15계단을 가리킵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이스라엘 뜰을 거쳐 제사장의 뜰이 나타납니다. 이 계단이 총 높이는 3.75미터였고 넓이는 7.5미터였습니다. 이 곳에서 때때로 레위인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계단을 '찬양이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니카놀문이라는 놋문이 나타나는데 이 문은 장정 20명이 열어야 하는 거대한 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거운 놋문일지라도 찬양을 하면 열리고야 맙니다. 이러한 성전의 구조를 알아야 다윗의 시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00:4에 "감사하므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하므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생을 사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이 계단이 보여주는 신령한 의미는 찬송의 신앙입니다. 찬송할 때 니카놀의 놋문도 열리듯 찬송할 때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사단은 물러가며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다윗이 찬양할 때 사울에게 붙은 악신이 떠나갔던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높고 위대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함께 하심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송 중에 거하십니다. 시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계단이 15계단의 높은 계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5의 수는 약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15는 구비수인 10에 그 절반을 더한 수로서 넘치고 넘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높이 찬송하되 넘치고 넘치게 찬송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야만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존경의 마음 속에서 항상 넘쳐나야 합니다. 또 15는 하나님의 수 3에 고통의 수 5를 곱한 수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찬양은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수고와 희생을 깨달을 때 비로소 터져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잠시의 고난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께서 수 천년 동안 우리를 향해 탄식하신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아름다운 심령 성전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므로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 주권 중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불타는 열심도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랑하므로 서로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또 사랑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충만한 찬송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생활이 바로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힘써서 우리 하나님을 모시고 영화롭게 해드릴 아름다운 성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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