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설계도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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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2장 18-20절
요점
아름답고 온전한 성전이 되어지기 위해 날마다 주시는 연단 속에 믿음을 훈련해야 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고, 깨끗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며, 두루마기를 빠는 성화의 옷을 입고 범사에 감사를 넘치게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전론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제 10번까지 했는데 여러분의 심령성전은 얼마나 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배우는 대로 내 신앙에 접목시킬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모시는 성전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제 11번에서 15번까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구조부터 설명하면 11번은 찬양계단 양 옆에 지하로 나 있는 지하통로이고 그 곳으로 들어가면 지하찬양연습실입니다. 12번은 니카놀문이라해서 성전뜰로 들어가는 거대한 놋문입니다. 13번은 작은 두문으로 니카놀문의 양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14번은 핀처의 옷 제작실입니다. 그리고 15번은 대제사장 소제실입니다. 헤롯은 46년 동안 성전을 지었지만 우리는 설교를 통해 더 빠른 시일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단지 성전의 설계도를 교육함일뿐 우리들이 순종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지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1번은 지하통로입니다.
이 지하통로는 15계단의 찬양이 올라가는 계단의 좌우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으로 내려갑니다. 이 곳은 레위인들이 찬양을 연습하는 곳이요 악기를 보관하는 악기창고입니다. 대상23:4-5을 보면 찬양하는 사람들만 4,000명이었습니다. 이를 24반으로 나누어 인솔자를 두어 한 반에 288명씩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수금과 비파와 제금 등의 많은 악기들이 있었고 찬양하는 소리로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지하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곳 지하는 훌륭한 작품이 완성되도록 찬양을 연습시키는 곳입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지하찬양연습실은 연단받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완전한 찬양을 위하여 지하에서 연습을 시켰듯이 우리의 온전한 신앙을 위하여 연단이 필요합니다. 지하의 일은 밖에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듯이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 음성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 가지 어두운 시련과 환난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연단의 손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단이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 무언의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그 의도에 충실하여 열심히 신앙의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연단하심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유무는 천지차이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연단이란 언제나 목표가 있기에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 모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수립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연단은 또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나팔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악기실에는 본 성전 북쪽으로부터 통하는 지하 통로가 하나 더 있어서 제사장의 뜰로부터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즉 반대로 지하 찬양실에서 제사장의 뜰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제사장으로 만들어 내심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히12:10-13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그 거룩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생활을 소유해야 합니다. 성전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생활에는 안일함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12번은 니카놀문입니다.
앞서 말씀한 대로 찬양의 15계단을 올라가면 맞은 편 중앙의 놋으로 만든 육중한 문이 바로 니카놀문입니다. 이 문은 이스라엘의 뜰로 올라가는 곳으로 남자들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 문을 윗문이라고 부르는데 크기는 20규빗에 5규빗의 크기로 장정 20명이 움직여야 열리는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은 특별할 때 즉 안식일 축제일 그리고 왕이 성전에 나타날 때만 열었습니다. 이 문을 니카놀문이라고 한 것은 니카놀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거대한 두 놋문을 만들기 위하여 기술자를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운송 도중에 폭풍우로 말미암아 문 하나를 바다에 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 문이 항구로 떠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이 니카놀문입니다. 성전의 모든 문들은 금으로 입혀졌지만 이 문만은 놋입니다. 그 이유는 이 기적의 문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표하는 문입니다. 왕이 성전에 들어올 때 문이 열렸듯이 이 왕은 영원한 왕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시24:7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했습니다. 이 찬송은 구약 성전에서 부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표합니다. 이 문은 애굽의 니카놀이 만든 거대한 놋문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와 저주와 죽음과 원수의 권세를 다 깨뜨리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습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이 문은 영적부흥의 문입니다. 이 문이 찬송의 계단 위에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며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영적권세가 임합니다. 또 이 문은 대 축제나 왕이 성전에 나타날 때 열었듯이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이 때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서로 나누고 도와서 숙박하고 먹으므로 지상의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또 이 문은 간혹 열렸고 여는데 힘이 든 것처럼 부흥의 문은 많은 기도가 모아져야 합니다. 또 이 문이 기적의 문이듯이 대 부흥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문을 애굽인이 만들었듯 성령의 역사로 대 부흥이 일어나면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가슴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두 짝의 문이었듯이 부흥운동의 두 축은 기도와 찬송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기도에 전무했고(행2:42) 늘 성전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눅24:53). 그러므로 성도는 이 부흥운동을 일으킬 귀한 기도와 찬송의 사역자로 헌신해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영적 대 부흥운동의 원리를 보여주는 부분이 계9:13-21의 유브라데 네 천사입니다. 여섯째 천사의 나팔로 나타나는 이 계시는 문자적으로는 지상에 나타날 대전쟁의 예고이지만 영성적으로는 기도를 통해 지상에 나타날 영적 대 부흥운동의 원리입니다. 금단 네 뿔은 영적부흥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큰 강 유브라데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발원한 성령의 대 강수를, 결박한 네 천사를 놓음은 복음운동의 활발한 역사를, 년 월 일 시가 정해짐은 영적부흥은 정한 시각이 있음을, 예비한 자가 있었음은 부흥운동을 위하여 인내로서 많이 기도해야 함을 보여준다. 즉 성도들의 많은 기도가 모아져서 성령의 강수가 댐처럼 터지는 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나 1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 최근 펜사콜라의 부흥운동 등을 볼 때 모두 인내의 기도의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또 이만만의 마병대는 부흥운동의 위력이 불가항력적인 회심의 역사를 동반하며 급속도로 확산될 것을, 그 말과 탄 자가 착용한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은 이 부흥운동이 어떤 방해도 어떤 장애도 다 이겨낼 수 있음을, 삼분의 일이 죽음은 육체에 영성을 입혀줌 혹은 인간이라는 본체는 상관치 않고 인간적인 본질만 변화시킴을,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꼬리에 있었는데 입과 꼬리는 말씀과 이적을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부흥운동에 충만한 말씀과 이적들이 무수할 것을 보여주며, 회개치 않은 남은 자가 있었음에서 부흥운동이 죄를 회개시키는 운동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흥운동의 일시적인 외적충만에만 만족하지 말고 진정한 회개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미국 어느 교회는 찬송을 많이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는 본래 세속 노래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을 하다보니 뜨거운 기도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2-3시간 이상 찬송할 때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고 수천명의 성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불길은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했던지 성령의 역사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사랑 이 네 가지는 초대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교회가 집중적으로 힘쓸 일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이 문이 열리는 때처럼 부흥운동이라는 특별한 날이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13번은 작은 두 문입니다.
작은 두 문은 니카놀문의 양 옆에 있습니다. 이 문에서 행해지는 예식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민5:11-31의 의심받는 여인의 정결예식이 그곳에서 행해지면, 다른 하나는 고침받은 문등병자가 자기가 드린 예물이 제단에서 드려짐을 그 문에서 지켜보며 확인하는 장소입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에게 확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처증에 있던 남편도 여기 여호와 앞에서 맹세하는 아내를 보고 의심을 풉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완전한 화평과 자유를 얻습니다. 문둥병자 역시 이 예식을 통해서 사회에서 완전한 자유를 받게 됩니다. 이 두 문은 진리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이 문은 선한 양심의 상징입니다. 2는 증거의 수로 양심 역시 율법의 기능이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에만이 믿음의 비밀이 깃듭니다. 양심이 꺼림직하면 믿음이 파선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며 영혼은 크게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모시려면 양심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는 회개해야 하고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않고 믿음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딤전1:19-20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했고, 딤전3:9에서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벧전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면 신앙이란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양심이란 마음의 율법입니다. 양심은 율법에 대한 지식에 따라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죄가 되던 것이 어떤 이에게는 죄가 안되기도 합니다. 우상제물 문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여긴 사람이 그것을 범했을 때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로 여기지 아니한 자는 양심에 거리낄 이유도 없고 따라서 회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은사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던 분들이 타인을 지도하는 경험 속에서 터무니 없이 넓은 죄관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의 예처럼 어떤 이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은 죄를 회개하라'고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경우입니다. 이 말씀은 그 특정한 양심을 가진 자에게 국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보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언의 은사자가 성경의 진리에 능통해야 할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 속에도 많은 예언의 은사자들이 서로 교리에 대한 의견 충돌이 있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과거에 이 부분에서 많은 의문을 가져보았습니다. 왜 성령께서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양심의 자유를 얻을 지식보다 회개를 강조하시는가? 물론 전혀 아니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의 은사가 담당할 영역이 있고 말씀의 은사가 담당할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말씀의 은사로 그를 지도한다면 '형제님 우상의 제물로 양심을 거스렸던 것은 회개하십시오. 그러나 성경을 보니 우상의 음식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다만 타인의 양심과 덕을 위하여 먹거나 아니 먹을뿐 그렇지 않다면 그냥 감사하므로 들어도 됩니다'(고전10:30) 라고 양심의 자유를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의 특징을 잘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참고로 그러나 방언과 통역 등은 외마디이긴 하지만 그 인도를 받으면 결국은 신령한 성전을 완성하는데 이릅니다. 사 28장을 보면 교만한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이 독주에 취한 제사장들에 대한 불평이 있습니다. 사28:9-10에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는구나 하는도다" 했습니다. 즉 그들은 독주에 취한 제사장들의 외마디 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상을 복음으로 보면 성령에 취하여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의 예표입니다.
그 증거가 11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외마디 소리 밖에는 못하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그들의 연단을 맡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과 앗수르가 어디입니까? 연단의 장소가 아닙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 외마디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지배하시겠다고 장담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외마디 겨우 그 정도라고 비난하던 방언과 통역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앙적으로 온전케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양심을 이렇게 두 문에 비유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양심을 버리면 이스라엘의 뜰로 가는 문이 닫히듯 심령이 강하게 봉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했을 때 심령이 답답합니다. 혹은 지체들의 심각한 영적상태로 인해 이웃 지체들의 심령이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이 양심으로 봉쇄된 영혼을 풀기 위해서 많은 애씀이 필요합니다. 범죄로 봉쇄된 양심을 풀기 위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회개를 통한 그리스도의 핏공로입니다(히9:13-14). 그리고 지체의 영적 고통을 내가 느낄 때는 애써 기도하면 봉쇄는 풀려집니다.
또 이 문은 이스라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담대함의 상징입니다(고전16:13). 이처럼 그리스도의 핏공로를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지나친 완전주의는 자기의 심령을 한시도 편하게 하지 못하고 정죄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불완전하므로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지나치게 소심한 자녀보다는 좀 뻔뻔스런 자녀들이 더 건강한 모습임과 같습니다. 그래서 히4:14-16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선하고 화평한 심령을 성전 삼으시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거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4번은 핀처의 옷 제작실입니다.
이 방은 니카놀문 오른쪽 문 옆에 위치한 방입니다. 핀처의 방이란 핀처가 옷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였는데 그가 이 곳에서 제사장과 성가대의 까운 등을 모두 만들었습니다. 제사장 까운을 보관하기 위해서 96칸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제사장이 24반열에 4가지 종류의 옷 즉 바지 셔츠 띠 관을 보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옷들은 본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섬기기 위한 옷들입니다. 제사장일지라도 이 세마포를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핀처가 이 옷들을 잘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이 옷 제작실은 칭의와 성화의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옷 제작실에 겉옷과 속옷 등이 있었듯이 성도도 칭의의 겉옷과 성화의 속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칭의의 옷은 다 입게 됩니다. 그러나 성화의 옷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성결된 자만이 입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 피로 씻어야 합니다.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자들도 자기 두루마기를 예수 피로 씻은 자들이었습니다(계22:14).
15번은 대제사장 소제실입니다.
니카놀 왼편 작은 문 옆에는 대제사장 소제실이 있습니다. 핀처의 방과 대제사장의 소제실은 벽속에 있음이 그 특징입니다. 매일 대제사장은 제단에 나아가 12번의 소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방에서 상번제인 소제가 준비되었습니다. 즉 6번은 아침에 또 6번은 저녁에 드렸습니다(레6:20-23). 이 때 드린 소제는 고운 가루에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구운 후 다시 기름을 적신 다음 썰어서 소제로 드렸습니다. 이 소제는 자기의 육체를 아낌 없이 성령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상징입니다.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 대제사장의 소제는 감사의 신앙입니다. 소제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단독으로 드려지지는 않고 모든 제사에 곁들여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에 더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자가진단법에서도 나타나듯이 감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느 단계에서도 빠지지 않는 그리고 넘치게 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고 권면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할 때도 감사(레7:15), 말씀할 때도 감사(시69:30), 나아갈 때도 감사(시95:2), 문에 들어갈 때도 감사(시100:4), 밤중에 일어나서도 감사(시119:62), 지난 은혜를 생각하면서도 감사(시136편), 먹을 때도 감사(롬14:6), 먹지 않아도 감사(롬14:6), 찬양할 때도 감사(골3:16), 기도할 때도 감사(살전1:2) 등 살아도 죽어도 무엇을 하든지 해야 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심지어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즉 조석으로 소제를 상번제로 드렸는데 조석이란 처음부터 마지막을 즉 전체를 의미하고,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의 소제는 기름과 반죽하여 기름 속에서 구워졌고 또 기름에 적신 후 썰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기름 범벅입니다. 기름은 성령입니다. 즉 감사는 이처럼 모든 일에 성령의 은혜로 넘치고 넘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권면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감사의 훈련이 잘 안되어 있으면 하루에 수 십번 이상 감사를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면술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감사가 내 인격에 정착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성전론 다섯 가지를 배웠습니다. 아름답고 온전한 성전이 되어지기 위해 날마다 신앙을 훈련합시다. 기도와 찬송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십시다. 선한 양심을 가집시다. 성화의 옷을 입읍시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집시다. 그래서 깨끗하고 견고하고 높고 크고 질서있고 구비하고 아름답고 밝고 향내나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성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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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2장 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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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온전한 성전이 되어지기 위해 날마다 주시는 연단 속에 믿음을 훈련해야 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고, 깨끗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며, 두루마기를 빠는 성화의 옷을 입고 범사에 감사를 넘치게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전론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제 10번까지 했는데 여러분의 심령성전은 얼마나 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배우는 대로 내 신앙에 접목시킬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모시는 성전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제 11번에서 15번까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구조부터 설명하면 11번은 찬양계단 양 옆에 지하로 나 있는 지하통로이고 그 곳으로 들어가면 지하찬양연습실입니다. 12번은 니카놀문이라해서 성전뜰로 들어가는 거대한 놋문입니다. 13번은 작은 두문으로 니카놀문의 양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14번은 핀처의 옷 제작실입니다. 그리고 15번은 대제사장 소제실입니다. 헤롯은 46년 동안 성전을 지었지만 우리는 설교를 통해 더 빠른 시일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단지 성전의 설계도를 교육함일뿐 우리들이 순종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지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1번은 지하통로입니다.
이 지하통로는 15계단의 찬양이 올라가는 계단의 좌우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으로 내려갑니다. 이 곳은 레위인들이 찬양을 연습하는 곳이요 악기를 보관하는 악기창고입니다. 대상23:4-5을 보면 찬양하는 사람들만 4,000명이었습니다. 이를 24반으로 나누어 인솔자를 두어 한 반에 288명씩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수금과 비파와 제금 등의 많은 악기들이 있었고 찬양하는 소리로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지하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곳 지하는 훌륭한 작품이 완성되도록 찬양을 연습시키는 곳입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지하찬양연습실은 연단받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완전한 찬양을 위하여 지하에서 연습을 시켰듯이 우리의 온전한 신앙을 위하여 연단이 필요합니다. 지하의 일은 밖에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듯이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 음성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 가지 어두운 시련과 환난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연단의 손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단이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 무언의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그 의도에 충실하여 열심히 신앙의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연단하심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유무는 천지차이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연단이란 언제나 목표가 있기에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 모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수립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연단은 또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나팔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악기실에는 본 성전 북쪽으로부터 통하는 지하 통로가 하나 더 있어서 제사장의 뜰로부터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즉 반대로 지하 찬양실에서 제사장의 뜰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제사장으로 만들어 내심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히12:10-13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그 거룩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생활을 소유해야 합니다. 성전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생활에는 안일함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12번은 니카놀문입니다.
앞서 말씀한 대로 찬양의 15계단을 올라가면 맞은 편 중앙의 놋으로 만든 육중한 문이 바로 니카놀문입니다. 이 문은 이스라엘의 뜰로 올라가는 곳으로 남자들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 문을 윗문이라고 부르는데 크기는 20규빗에 5규빗의 크기로 장정 20명이 움직여야 열리는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은 특별할 때 즉 안식일 축제일 그리고 왕이 성전에 나타날 때만 열었습니다. 이 문을 니카놀문이라고 한 것은 니카놀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거대한 두 놋문을 만들기 위하여 기술자를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운송 도중에 폭풍우로 말미암아 문 하나를 바다에 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 문이 항구로 떠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이 니카놀문입니다. 성전의 모든 문들은 금으로 입혀졌지만 이 문만은 놋입니다. 그 이유는 이 기적의 문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표하는 문입니다. 왕이 성전에 들어올 때 문이 열렸듯이 이 왕은 영원한 왕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시24:7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했습니다. 이 찬송은 구약 성전에서 부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표합니다. 이 문은 애굽의 니카놀이 만든 거대한 놋문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와 저주와 죽음과 원수의 권세를 다 깨뜨리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습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이 문은 영적부흥의 문입니다. 이 문이 찬송의 계단 위에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며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영적권세가 임합니다. 또 이 문은 대 축제나 왕이 성전에 나타날 때 열었듯이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이 때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서로 나누고 도와서 숙박하고 먹으므로 지상의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또 이 문은 간혹 열렸고 여는데 힘이 든 것처럼 부흥의 문은 많은 기도가 모아져야 합니다. 또 이 문이 기적의 문이듯이 대 부흥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문을 애굽인이 만들었듯 성령의 역사로 대 부흥이 일어나면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가슴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두 짝의 문이었듯이 부흥운동의 두 축은 기도와 찬송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기도에 전무했고(행2:42) 늘 성전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눅24:53). 그러므로 성도는 이 부흥운동을 일으킬 귀한 기도와 찬송의 사역자로 헌신해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영적 대 부흥운동의 원리를 보여주는 부분이 계9:13-21의 유브라데 네 천사입니다. 여섯째 천사의 나팔로 나타나는 이 계시는 문자적으로는 지상에 나타날 대전쟁의 예고이지만 영성적으로는 기도를 통해 지상에 나타날 영적 대 부흥운동의 원리입니다. 금단 네 뿔은 영적부흥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큰 강 유브라데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발원한 성령의 대 강수를, 결박한 네 천사를 놓음은 복음운동의 활발한 역사를, 년 월 일 시가 정해짐은 영적부흥은 정한 시각이 있음을, 예비한 자가 있었음은 부흥운동을 위하여 인내로서 많이 기도해야 함을 보여준다. 즉 성도들의 많은 기도가 모아져서 성령의 강수가 댐처럼 터지는 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나 1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 최근 펜사콜라의 부흥운동 등을 볼 때 모두 인내의 기도의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또 이만만의 마병대는 부흥운동의 위력이 불가항력적인 회심의 역사를 동반하며 급속도로 확산될 것을, 그 말과 탄 자가 착용한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은 이 부흥운동이 어떤 방해도 어떤 장애도 다 이겨낼 수 있음을, 삼분의 일이 죽음은 육체에 영성을 입혀줌 혹은 인간이라는 본체는 상관치 않고 인간적인 본질만 변화시킴을,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꼬리에 있었는데 입과 꼬리는 말씀과 이적을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부흥운동에 충만한 말씀과 이적들이 무수할 것을 보여주며, 회개치 않은 남은 자가 있었음에서 부흥운동이 죄를 회개시키는 운동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흥운동의 일시적인 외적충만에만 만족하지 말고 진정한 회개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미국 어느 교회는 찬송을 많이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는 본래 세속 노래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을 하다보니 뜨거운 기도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2-3시간 이상 찬송할 때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고 수천명의 성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불길은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했던지 성령의 역사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사랑 이 네 가지는 초대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교회가 집중적으로 힘쓸 일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이 문이 열리는 때처럼 부흥운동이라는 특별한 날이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13번은 작은 두 문입니다.
작은 두 문은 니카놀문의 양 옆에 있습니다. 이 문에서 행해지는 예식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민5:11-31의 의심받는 여인의 정결예식이 그곳에서 행해지면, 다른 하나는 고침받은 문등병자가 자기가 드린 예물이 제단에서 드려짐을 그 문에서 지켜보며 확인하는 장소입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에게 확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처증에 있던 남편도 여기 여호와 앞에서 맹세하는 아내를 보고 의심을 풉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완전한 화평과 자유를 얻습니다. 문둥병자 역시 이 예식을 통해서 사회에서 완전한 자유를 받게 됩니다. 이 두 문은 진리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이 문은 선한 양심의 상징입니다. 2는 증거의 수로 양심 역시 율법의 기능이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에만이 믿음의 비밀이 깃듭니다. 양심이 꺼림직하면 믿음이 파선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며 영혼은 크게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모시려면 양심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는 회개해야 하고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않고 믿음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딤전1:19-20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했고, 딤전3:9에서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벧전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면 신앙이란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양심이란 마음의 율법입니다. 양심은 율법에 대한 지식에 따라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죄가 되던 것이 어떤 이에게는 죄가 안되기도 합니다. 우상제물 문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여긴 사람이 그것을 범했을 때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로 여기지 아니한 자는 양심에 거리낄 이유도 없고 따라서 회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은사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던 분들이 타인을 지도하는 경험 속에서 터무니 없이 넓은 죄관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의 예처럼 어떤 이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은 죄를 회개하라'고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경우입니다. 이 말씀은 그 특정한 양심을 가진 자에게 국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보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언의 은사자가 성경의 진리에 능통해야 할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 속에도 많은 예언의 은사자들이 서로 교리에 대한 의견 충돌이 있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과거에 이 부분에서 많은 의문을 가져보았습니다. 왜 성령께서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양심의 자유를 얻을 지식보다 회개를 강조하시는가? 물론 전혀 아니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의 은사가 담당할 영역이 있고 말씀의 은사가 담당할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말씀의 은사로 그를 지도한다면 '형제님 우상의 제물로 양심을 거스렸던 것은 회개하십시오. 그러나 성경을 보니 우상의 음식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다만 타인의 양심과 덕을 위하여 먹거나 아니 먹을뿐 그렇지 않다면 그냥 감사하므로 들어도 됩니다'(고전10:30) 라고 양심의 자유를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의 특징을 잘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참고로 그러나 방언과 통역 등은 외마디이긴 하지만 그 인도를 받으면 결국은 신령한 성전을 완성하는데 이릅니다. 사 28장을 보면 교만한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이 독주에 취한 제사장들에 대한 불평이 있습니다. 사28:9-10에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는구나 하는도다" 했습니다. 즉 그들은 독주에 취한 제사장들의 외마디 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상을 복음으로 보면 성령에 취하여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의 예표입니다.
그 증거가 11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외마디 소리 밖에는 못하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그들의 연단을 맡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과 앗수르가 어디입니까? 연단의 장소가 아닙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 외마디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지배하시겠다고 장담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외마디 겨우 그 정도라고 비난하던 방언과 통역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앙적으로 온전케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양심을 이렇게 두 문에 비유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양심을 버리면 이스라엘의 뜰로 가는 문이 닫히듯 심령이 강하게 봉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했을 때 심령이 답답합니다. 혹은 지체들의 심각한 영적상태로 인해 이웃 지체들의 심령이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이 양심으로 봉쇄된 영혼을 풀기 위해서 많은 애씀이 필요합니다. 범죄로 봉쇄된 양심을 풀기 위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회개를 통한 그리스도의 핏공로입니다(히9:13-14). 그리고 지체의 영적 고통을 내가 느낄 때는 애써 기도하면 봉쇄는 풀려집니다.
또 이 문은 이스라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담대함의 상징입니다(고전16:13). 이처럼 그리스도의 핏공로를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지나친 완전주의는 자기의 심령을 한시도 편하게 하지 못하고 정죄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불완전하므로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지나치게 소심한 자녀보다는 좀 뻔뻔스런 자녀들이 더 건강한 모습임과 같습니다. 그래서 히4:14-16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선하고 화평한 심령을 성전 삼으시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거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4번은 핀처의 옷 제작실입니다.
이 방은 니카놀문 오른쪽 문 옆에 위치한 방입니다. 핀처의 방이란 핀처가 옷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였는데 그가 이 곳에서 제사장과 성가대의 까운 등을 모두 만들었습니다. 제사장 까운을 보관하기 위해서 96칸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제사장이 24반열에 4가지 종류의 옷 즉 바지 셔츠 띠 관을 보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옷들은 본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섬기기 위한 옷들입니다. 제사장일지라도 이 세마포를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핀처가 이 옷들을 잘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이 옷 제작실은 칭의와 성화의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옷 제작실에 겉옷과 속옷 등이 있었듯이 성도도 칭의의 겉옷과 성화의 속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칭의의 옷은 다 입게 됩니다. 그러나 성화의 옷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성결된 자만이 입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 피로 씻어야 합니다.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자들도 자기 두루마기를 예수 피로 씻은 자들이었습니다(계22:14).
15번은 대제사장 소제실입니다.
니카놀 왼편 작은 문 옆에는 대제사장 소제실이 있습니다. 핀처의 방과 대제사장의 소제실은 벽속에 있음이 그 특징입니다. 매일 대제사장은 제단에 나아가 12번의 소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방에서 상번제인 소제가 준비되었습니다. 즉 6번은 아침에 또 6번은 저녁에 드렸습니다(레6:20-23). 이 때 드린 소제는 고운 가루에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구운 후 다시 기름을 적신 다음 썰어서 소제로 드렸습니다. 이 소제는 자기의 육체를 아낌 없이 성령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상징입니다.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 대제사장의 소제는 감사의 신앙입니다. 소제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단독으로 드려지지는 않고 모든 제사에 곁들여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에 더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자가진단법에서도 나타나듯이 감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느 단계에서도 빠지지 않는 그리고 넘치게 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고 권면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할 때도 감사(레7:15), 말씀할 때도 감사(시69:30), 나아갈 때도 감사(시95:2), 문에 들어갈 때도 감사(시100:4), 밤중에 일어나서도 감사(시119:62), 지난 은혜를 생각하면서도 감사(시136편), 먹을 때도 감사(롬14:6), 먹지 않아도 감사(롬14:6), 찬양할 때도 감사(골3:16), 기도할 때도 감사(살전1:2) 등 살아도 죽어도 무엇을 하든지 해야 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심지어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즉 조석으로 소제를 상번제로 드렸는데 조석이란 처음부터 마지막을 즉 전체를 의미하고,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의 소제는 기름과 반죽하여 기름 속에서 구워졌고 또 기름에 적신 후 썰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기름 범벅입니다. 기름은 성령입니다. 즉 감사는 이처럼 모든 일에 성령의 은혜로 넘치고 넘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권면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감사의 훈련이 잘 안되어 있으면 하루에 수 십번 이상 감사를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면술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감사가 내 인격에 정착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성전론 다섯 가지를 배웠습니다. 아름답고 온전한 성전이 되어지기 위해 날마다 신앙을 훈련합시다. 기도와 찬송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십시다. 선한 양심을 가집시다. 성화의 옷을 입읍시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집시다. 그래서 깨끗하고 견고하고 높고 크고 질서있고 구비하고 아름답고 밝고 향내나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성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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