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설계도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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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장 12-13절
요점
신령한 성전에서 담은 거룩을, 열두 돌계단은 경외를, 고린디안 미문은 기도를, 여인의 뜰은 사랑의 수고를, 그리고 낮은 뜰은 성도의 교통을 의미한다.
오늘은 성전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열망과 신령한 성전건축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보충하면 신령한 성전건축이란 나는 사라지고 내 인격과 생명에 성전되신 그리스도가 나타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영화로움을 얻으시고 또 예수가 없는 것은 그 무엇도 인정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신 곳에 아들이 계시고 아들이 있는 곳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것은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란 내가 예수 안에 나타나고 예수가 내 안에 나타나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성전건축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신령한 성전건축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설계도는 성전의 자세한 구조이자 예수 안의 우리 성도들의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론을 마칠 때까지 참고해야 할 사실은 이 성전에 담긴 신앙의 모습들을 우리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나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신령한 성전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신앙을 배우면 됩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그리스도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성전건축이란 곧 신앙생활의 회복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 속에 삼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앞의 화보란을 보면 성전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그림에는 모두 53번까지의 넘버가 붙어있습니다. 성전의 바닥의 크기는 광야 성막의 50배입니다. 그러니까 부피로 치면 수백 배에 달하는 거대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성전을 예수님께 자랑하면서 보이려고 했었습니다. 참고적으로 이 설계도는 솔로몬 성전의 자세한 것은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배경이 되는 헤롯 성전의 설계도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으나 후에 그것을 본 사람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고 이 스룹바벨 성전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헤롯에 의해 정밀히 분해되어 지하 대광장이나 외곽 등 확장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그 기본 설계가 계승되었기 때문에 성전 자체를 공부하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 부분은 솔로몬 성전과 일치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헤롯 성전이라는 부정적인 의식을 떨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구조와 그 역할을 알기 위하여 성전 안에 들어가 봅시다.
1번은 성전담입니다.
이 성전담은 성전의 사면 밖으로 둘러있는 굵은 점선입니다. 이 담은 이방인의 뜰과 성전을 구분해 주는 담으로 너머를 볼 수 있을만큼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 성전담의 벽에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이 신성한 성전에 들어가면 죄값으로 죽는다" 라는 경고 문구가 곳곳에 붙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담을 통과하려면 할례받아 언약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담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는 담입니다. 즉 성전은 예수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서는 이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10:9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담은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자만이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이 바로 구원과 천국이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이방인의 뜰에 거하고 있다면 속히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담 밖의 이방인의 뜰도 성경에서는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짐승들과 돈바꾸는 상을 엎으시고 쫓아내셨는데 성경은 이를 "성전 안에서"(마21:12-13)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꼭 구별한다면 이방인의 뜰, 제단뜰, 성소 즉 애굽 단계, 광야 단계, 가나안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의 이방인이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다릅니다. 이는 입으로는 예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음에 아직 이르지 못한 아직 거듭남에 이르지 못한 영적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성전담은 마치 이스라엘의 앞을 가로막았던 홍해와 같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들의 앞을 가로막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 믿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이 성전담은 거룩의 상징입니다. 여기 신령한 의미란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텐데 바로 우리를 성전으로 보고 해석함을 가리킵니다. 즉 성전이 객관적인 구속사로는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신령한 관점으로는 내가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부는 약 3중의 해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먼저는 구약 그대로 성전 자체에 대한 해석이며, 다음은 성전을 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며, 그 다음에는 성전을 성도로 보는 신령한 관점입니다. 이 셋은 공통성이 있으면서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전된 우리에게 세속의 잡된 것들이 침투해서는 안됩니다. 이 거룩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파수꾼이 바로 성전담이요 거룩입니다. 이것은 성의 성곽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고전3:16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2번은 열두 돌계단입니다.
이 계단은 성전담 안에 성전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성전의 기초입니다. 여기 열두 돌의 12는 신구약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상징합니다. 엡3:20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받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의 원기초는 그리스도이시고 그 위에 선지자들과 사도의 기초가 있습니다.
그럼 사도와 선지자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 특별히 사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계단이 열두 계단입니다. 즉 우리 신앙의 기초가 성경의 모든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중에 몇 단계쯤 아는 수준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니까 안됩니다. 성경을 가감하여 믿어도 그 신앙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모르면 영적으로 심히 방황하고 흔들립니다(사8:20-22). 그리고 말씀의 기초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불안합니다. 각종 이단과 사이비도 그래서 나옵니다.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의 기초는 곧 집의 기초입니다. 심령의 진리의 유무는 하나님 거하심의 유무와 같은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버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충만할 때 신령한 성전으로서 바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성전에서 이 열두 돌계단은 경외하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이 계단은 성전의 위치를 12단계나 높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언제나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예루살렘 산 위에 건설되었고 또 돌계단을 쌓아 지면보다 더 높았을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을 곳곳에서 약속합니다(요28:28, 시33:18, 시61:5, 시110:10, 잠3:7, 잠14:27, 잠22:4, 사33:6, 말4:2). 우리에게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 어떻게 바른 성전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하나님을 높일 뿐이니라 내가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계19:5에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했습니다.
3번은 고린디안 문입니다.
이 문을 일명 아름다울 미(美) 미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은 성전의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문으로 출입이 빈번한 성전의 주출입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기도하기 위해 매일 이 문을 출입했습니다.
이곳은 신령한 성전에서 기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즉 기도가 없이는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기도와 함께 방언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우리 심령의 문도 활짝 열리며 신령한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도구가 됩니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지만 이 미문이 주출입구였던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주출입구입니다. 기도할 때 심령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기도란 곧 심령의 문이요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점 때문에 보좌 앞이기도 합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점에서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견고히 닫혀진 그런 성전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문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도 나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길에 앉은 뱅이를 예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이적과 부흥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의 미문의 기적 사건은 방언 기도의 좋은 비유를 제공합니다. 그 시간이 구시니까 오후 세시로서 실재로는 가장 더울 때입니다. 방언은 대개 이렇게 열심이 고조될 때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나면서 않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방언하지 않으면 자립신앙이 결여되기 쉽고 기도를 해도 육신중심의 구걸하는 기도이기 쉽습니다. 또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명령했는데 둘은 증거의 수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비유는 즉 방언은 신자에게 약속하신 은사라는 점입니다. 막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이 방언에는 달란트적인 것과 일반 은사적인 것으로 구분됩니다. 일반 은사적인 방언은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않은뱅이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던 것처럼 혀에 초자연적인 성령의 힘이 주어지므로 방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찬송함과 같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며 증거합니다(행2:11). 이것을 볼 때 왜 하나님께서 기도를 상징하는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고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며 구했으나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왜 기적에 하나님의 능력 더하기 인간의 힘인가? 의문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방언의 이적은 때로는 사람이 도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성령충만한 종들이 안수를 통하여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개는 나타납니다. 그래도 전혀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베드로가 주의 이름으로 손을 잡아 일으켰듯 우선 내 혀의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잠재한 방언을 나타내기 위함이지 인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선 아무 소리라도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기도하다 보면 방언이 더 자유로워지면서 힘이 오고 점차 바뀌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풍성한 방언으로 바뀌어지게 되고 나이가서는 통역까지 나옵니다. 이 기간이 짧을 수도 혹은 길 수도 있으니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원리는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성령의 힘이 와서 스스로 터지도록 함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래야 의심도 없고 갈망 중에 받기 때문에 그 세력도 강하고 지속성도 강합니다. 마치 알에서 부화하는 병아리가 스스로 깨어 나오도록 방치함이 가장 좋은 병아리를 얻을 수 있음과 같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고린디안 문에서 우리는 기도의 신앙을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의 신앙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고린디안 문을 들어가는 자만이 여인의 뜰에서 온갖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4번은 여인의 뜰입니다.
여인의 뜰은 퍽 다양합니다. 여인의 뜰은 4번과 함께 사면 모퉁이 위치한 5, 6, 7, 8, 9번의 네 큰 방까지 포함됩니다. 4번의 여인의 뜰은 바닥 모양이 독특하게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순결한 여인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온갖 아름다운 봉사와 수고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이 여인의 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연보궤가 그곳에 있었고(막12:41-44), 구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장소였으며, 초막절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고, 초막절기가 끝나는 날에 물 길러 오는 예식이 이곳에서 진행되었고 예수님께서 이곳에 나타나신 적이 있었습니다(요7:2-14, 요7:37-38). 그러니까 돈과 물질과 힘과 관련된 봉사가 이루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심판하려했으나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신 곳이기도 합니다(요8:1-3). 이 십자가의 여인의 뜰에서 현숙한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봉사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신령한 성전에서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뜰의 십자가 모형은 여인들의 사랑의봉사와 관련해 볼 때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사랑이 요소의 필요성은 절대적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으므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일4:12-13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했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여인들은 헌신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자녀를 위하여 한 목숨 다 헌신합니다. 이 막강한 힘이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봉사와 헌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5, 6, 7, 8, 9의 방들도 이 사랑과 관련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훈련하고 공부하며 사업하며 이 몸을 드려야 합니다. 복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사랑하기 때문에가 되어야 합니다.
5번은 낮은 뜰입니다.
이 낮은 뜰은 여인의 뜰 한 모퉁이의 조그만 사각형의 낮은 뜰입니다. 이 뜰은 모여서 교제하도록 우묵하게 패여 있는 조그만 사각형의 소그룹 교육장입니다. 우리는 소구룹의 교육형태를 이 성전에서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소구룹의 환경을 사용하셔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는 겸손과 온유로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마11:29).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는 성도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교통은 신령한 집을 건축함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낮은 뜰이 여인의 뜰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의 교통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구나 이곳은 십자가 형태의 바닥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구룹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즉 소구룹의 목적은 지식전달보다는 구룹원들을 가깝게 만나서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지식전달을 위해서는 소구룹보다 주입식이 더 전문성이 있고 전달하기 용이합니다. 그러나 주입식으로는 변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이 그토록 기도하고 신령하고 오묘한 말씀을 많이 설교했지만 교인들이 변하지 않으므로 놀라는데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강단을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제공했고 그들의 영혼으로 살찌게 했음은 사실이지만 변화의 전기는 대부분 소구룹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회는 대중적일뿐 아니라 일대 일의 개인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목회였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통에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요 성령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예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교통에는 비밀이 공개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적인 모임은 피해만 줄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행치 않는 성도의 교통은 모두 부덕이 됩니다. 가령 사랑이 없는 세계에 자기의 마음을 내어놓는 일도 어리석은 것이요, 반대로 남의 숨겨진 영적인 상태를 성령으로 지적함 역시 사랑이 부족했을 때는 타인을 내어쫓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질 때 대단히 유익합니다. 성도가 목회자에게 자신의 중심을 털어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할 때 비로소 신령한 지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통은 인간적인 교통이 아닌 성령 안에서의 교통이어야 하고 사랑 안에서의 교통이어야 합니다.
우리 영성 상담이 여기서 이러한 좋은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이 성도의 교통을 통하여 날마다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 이 영성 상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5:6에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고 고전12:31-13:3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낮은 뜰이 보여주는 것처럼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지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고 지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과 겸손 속에서 성도의 교통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고 주의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성령의 아름다운 전을 건축하십시다. 오늘 배운 대로 세속의 오염에서 분리된 거룩한 성전이 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전이 됩니다. 항상 기도하는 성전이 됩시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성전이 됩시다. 겸손과 사랑으로 성도의 교통하는 성전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신령한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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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장 12-13절
요점
신령한 성전에서 담은 거룩을, 열두 돌계단은 경외를, 고린디안 미문은 기도를, 여인의 뜰은 사랑의 수고를, 그리고 낮은 뜰은 성도의 교통을 의미한다.
오늘은 성전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열망과 신령한 성전건축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보충하면 신령한 성전건축이란 나는 사라지고 내 인격과 생명에 성전되신 그리스도가 나타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영화로움을 얻으시고 또 예수가 없는 것은 그 무엇도 인정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신 곳에 아들이 계시고 아들이 있는 곳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것은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란 내가 예수 안에 나타나고 예수가 내 안에 나타나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성전건축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신령한 성전건축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설계도는 성전의 자세한 구조이자 예수 안의 우리 성도들의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론을 마칠 때까지 참고해야 할 사실은 이 성전에 담긴 신앙의 모습들을 우리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나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신령한 성전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신앙을 배우면 됩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그리스도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성전건축이란 곧 신앙생활의 회복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 속에 삼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앞의 화보란을 보면 성전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그림에는 모두 53번까지의 넘버가 붙어있습니다. 성전의 바닥의 크기는 광야 성막의 50배입니다. 그러니까 부피로 치면 수백 배에 달하는 거대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성전을 예수님께 자랑하면서 보이려고 했었습니다. 참고적으로 이 설계도는 솔로몬 성전의 자세한 것은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배경이 되는 헤롯 성전의 설계도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으나 후에 그것을 본 사람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고 이 스룹바벨 성전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헤롯에 의해 정밀히 분해되어 지하 대광장이나 외곽 등 확장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그 기본 설계가 계승되었기 때문에 성전 자체를 공부하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 부분은 솔로몬 성전과 일치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헤롯 성전이라는 부정적인 의식을 떨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구조와 그 역할을 알기 위하여 성전 안에 들어가 봅시다.
1번은 성전담입니다.
이 성전담은 성전의 사면 밖으로 둘러있는 굵은 점선입니다. 이 담은 이방인의 뜰과 성전을 구분해 주는 담으로 너머를 볼 수 있을만큼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 성전담의 벽에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이 신성한 성전에 들어가면 죄값으로 죽는다" 라는 경고 문구가 곳곳에 붙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담을 통과하려면 할례받아 언약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담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는 담입니다. 즉 성전은 예수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서는 이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10:9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담은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자만이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이 바로 구원과 천국이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이방인의 뜰에 거하고 있다면 속히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담 밖의 이방인의 뜰도 성경에서는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짐승들과 돈바꾸는 상을 엎으시고 쫓아내셨는데 성경은 이를 "성전 안에서"(마21:12-13)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꼭 구별한다면 이방인의 뜰, 제단뜰, 성소 즉 애굽 단계, 광야 단계, 가나안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의 이방인이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다릅니다. 이는 입으로는 예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음에 아직 이르지 못한 아직 거듭남에 이르지 못한 영적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성전담은 마치 이스라엘의 앞을 가로막았던 홍해와 같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들의 앞을 가로막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 믿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이 성전담은 거룩의 상징입니다. 여기 신령한 의미란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텐데 바로 우리를 성전으로 보고 해석함을 가리킵니다. 즉 성전이 객관적인 구속사로는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신령한 관점으로는 내가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부는 약 3중의 해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먼저는 구약 그대로 성전 자체에 대한 해석이며, 다음은 성전을 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며, 그 다음에는 성전을 성도로 보는 신령한 관점입니다. 이 셋은 공통성이 있으면서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전된 우리에게 세속의 잡된 것들이 침투해서는 안됩니다. 이 거룩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파수꾼이 바로 성전담이요 거룩입니다. 이것은 성의 성곽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고전3:16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2번은 열두 돌계단입니다.
이 계단은 성전담 안에 성전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성전의 기초입니다. 여기 열두 돌의 12는 신구약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상징합니다. 엡3:20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받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의 원기초는 그리스도이시고 그 위에 선지자들과 사도의 기초가 있습니다.
그럼 사도와 선지자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 특별히 사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계단이 열두 계단입니다. 즉 우리 신앙의 기초가 성경의 모든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중에 몇 단계쯤 아는 수준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니까 안됩니다. 성경을 가감하여 믿어도 그 신앙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모르면 영적으로 심히 방황하고 흔들립니다(사8:20-22). 그리고 말씀의 기초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불안합니다. 각종 이단과 사이비도 그래서 나옵니다.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의 기초는 곧 집의 기초입니다. 심령의 진리의 유무는 하나님 거하심의 유무와 같은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버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충만할 때 신령한 성전으로서 바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성전에서 이 열두 돌계단은 경외하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이 계단은 성전의 위치를 12단계나 높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언제나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예루살렘 산 위에 건설되었고 또 돌계단을 쌓아 지면보다 더 높았을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을 곳곳에서 약속합니다(요28:28, 시33:18, 시61:5, 시110:10, 잠3:7, 잠14:27, 잠22:4, 사33:6, 말4:2). 우리에게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 어떻게 바른 성전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하나님을 높일 뿐이니라 내가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계19:5에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했습니다.
3번은 고린디안 문입니다.
이 문을 일명 아름다울 미(美) 미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은 성전의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문으로 출입이 빈번한 성전의 주출입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기도하기 위해 매일 이 문을 출입했습니다.
이곳은 신령한 성전에서 기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즉 기도가 없이는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기도와 함께 방언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우리 심령의 문도 활짝 열리며 신령한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도구가 됩니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지만 이 미문이 주출입구였던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주출입구입니다. 기도할 때 심령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기도란 곧 심령의 문이요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점 때문에 보좌 앞이기도 합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점에서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견고히 닫혀진 그런 성전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문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도 나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길에 앉은 뱅이를 예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이적과 부흥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의 미문의 기적 사건은 방언 기도의 좋은 비유를 제공합니다. 그 시간이 구시니까 오후 세시로서 실재로는 가장 더울 때입니다. 방언은 대개 이렇게 열심이 고조될 때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나면서 않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방언하지 않으면 자립신앙이 결여되기 쉽고 기도를 해도 육신중심의 구걸하는 기도이기 쉽습니다. 또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명령했는데 둘은 증거의 수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비유는 즉 방언은 신자에게 약속하신 은사라는 점입니다. 막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이 방언에는 달란트적인 것과 일반 은사적인 것으로 구분됩니다. 일반 은사적인 방언은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않은뱅이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던 것처럼 혀에 초자연적인 성령의 힘이 주어지므로 방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찬송함과 같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며 증거합니다(행2:11). 이것을 볼 때 왜 하나님께서 기도를 상징하는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고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며 구했으나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왜 기적에 하나님의 능력 더하기 인간의 힘인가? 의문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방언의 이적은 때로는 사람이 도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성령충만한 종들이 안수를 통하여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개는 나타납니다. 그래도 전혀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베드로가 주의 이름으로 손을 잡아 일으켰듯 우선 내 혀의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잠재한 방언을 나타내기 위함이지 인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선 아무 소리라도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기도하다 보면 방언이 더 자유로워지면서 힘이 오고 점차 바뀌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풍성한 방언으로 바뀌어지게 되고 나이가서는 통역까지 나옵니다. 이 기간이 짧을 수도 혹은 길 수도 있으니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 원리는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성령의 힘이 와서 스스로 터지도록 함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래야 의심도 없고 갈망 중에 받기 때문에 그 세력도 강하고 지속성도 강합니다. 마치 알에서 부화하는 병아리가 스스로 깨어 나오도록 방치함이 가장 좋은 병아리를 얻을 수 있음과 같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고린디안 문에서 우리는 기도의 신앙을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의 신앙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고린디안 문을 들어가는 자만이 여인의 뜰에서 온갖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4번은 여인의 뜰입니다.
여인의 뜰은 퍽 다양합니다. 여인의 뜰은 4번과 함께 사면 모퉁이 위치한 5, 6, 7, 8, 9번의 네 큰 방까지 포함됩니다. 4번의 여인의 뜰은 바닥 모양이 독특하게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순결한 여인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온갖 아름다운 봉사와 수고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이 여인의 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연보궤가 그곳에 있었고(막12:41-44), 구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장소였으며, 초막절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고, 초막절기가 끝나는 날에 물 길러 오는 예식이 이곳에서 진행되었고 예수님께서 이곳에 나타나신 적이 있었습니다(요7:2-14, 요7:37-38). 그러니까 돈과 물질과 힘과 관련된 봉사가 이루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심판하려했으나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신 곳이기도 합니다(요8:1-3). 이 십자가의 여인의 뜰에서 현숙한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봉사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신령한 성전에서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뜰의 십자가 모형은 여인들의 사랑의봉사와 관련해 볼 때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사랑이 요소의 필요성은 절대적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으므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일4:12-13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했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여인들은 헌신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자녀를 위하여 한 목숨 다 헌신합니다. 이 막강한 힘이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봉사와 헌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5, 6, 7, 8, 9의 방들도 이 사랑과 관련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훈련하고 공부하며 사업하며 이 몸을 드려야 합니다. 복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사랑하기 때문에가 되어야 합니다.
5번은 낮은 뜰입니다.
이 낮은 뜰은 여인의 뜰 한 모퉁이의 조그만 사각형의 낮은 뜰입니다. 이 뜰은 모여서 교제하도록 우묵하게 패여 있는 조그만 사각형의 소그룹 교육장입니다. 우리는 소구룹의 교육형태를 이 성전에서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소구룹의 환경을 사용하셔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는 겸손과 온유로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마11:29).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는 성도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교통은 신령한 집을 건축함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낮은 뜰이 여인의 뜰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의 교통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구나 이곳은 십자가 형태의 바닥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구룹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즉 소구룹의 목적은 지식전달보다는 구룹원들을 가깝게 만나서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지식전달을 위해서는 소구룹보다 주입식이 더 전문성이 있고 전달하기 용이합니다. 그러나 주입식으로는 변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이 그토록 기도하고 신령하고 오묘한 말씀을 많이 설교했지만 교인들이 변하지 않으므로 놀라는데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강단을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제공했고 그들의 영혼으로 살찌게 했음은 사실이지만 변화의 전기는 대부분 소구룹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회는 대중적일뿐 아니라 일대 일의 개인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목회였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통에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요 성령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예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교통에는 비밀이 공개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적인 모임은 피해만 줄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행치 않는 성도의 교통은 모두 부덕이 됩니다. 가령 사랑이 없는 세계에 자기의 마음을 내어놓는 일도 어리석은 것이요, 반대로 남의 숨겨진 영적인 상태를 성령으로 지적함 역시 사랑이 부족했을 때는 타인을 내어쫓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질 때 대단히 유익합니다. 성도가 목회자에게 자신의 중심을 털어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할 때 비로소 신령한 지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통은 인간적인 교통이 아닌 성령 안에서의 교통이어야 하고 사랑 안에서의 교통이어야 합니다.
우리 영성 상담이 여기서 이러한 좋은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이 성도의 교통을 통하여 날마다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 이 영성 상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5:6에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고 고전12:31-13:3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낮은 뜰이 보여주는 것처럼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지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고 지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과 겸손 속에서 성도의 교통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고 주의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성령의 아름다운 전을 건축하십시다. 오늘 배운 대로 세속의 오염에서 분리된 거룩한 성전이 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전이 됩니다. 항상 기도하는 성전이 됩시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성전이 됩시다. 겸손과 사랑으로 성도의 교통하는 성전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신령한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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