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성전론 서론

하나님아들 2012. 9. 6. 11:16
성전론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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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장 1-5절

요점
서론에서 성전론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다 각도로 제시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각자가 신령한 성전임을 인식케하여 신령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이 되게 한다.


오늘부터 성전론에 대하여 시리즈로 강해하겠습니다. 우리가 성막론에 관하여는 익숙하지만 성전론은 어쩐지 처음 듣는 것 같다든가 혹은 성전이란 규모만 다르지 성막론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등의 여러 가지 의문을 할만큼 아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전론을 꼭 배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 성전론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성전은 새로운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대상28:19에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흔히 성전은 솔로몬이 성막의 개념을 적절히 포함시켜 확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상29:19의 말씀을 통해 볼 때 성전은 다윗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과 성전 기구에 관한 구체적인 식양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여기 "여호와의 손이 나로 그려" 라는 의미가 직접 여호와의 손이 다윗의 손을 잡고 그리신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임했다'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의 감동'과 관련하여 사용한 점을 미루어 여호와께서 성경 기자를 감동하시듯 동일하게 분명한 계시를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왕하3:15, 겔1:3). 우리는 "내가 네게 보여준 식양대로 할지니라" 하신 모세의 성막에 대한 계시보다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는 다윗이 받은 성전의 계시가 그 강조점에 있어서 더 강한 어조로 보여집니다. 물론 모두가 동일한 영감이며 또한 성전은 성막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나 수효나 모양이나 낭실, 곳간, 다락, 골방, 사면의 방 등과 같이 추가된 면 등 크게 변천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구원의 계시에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는 역사적인 변천사가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내신 최초의 것은 제단입니다. 여기에는 돌단도 있었고(출20:25), 토단도 있었습니다(출20:24). 이 제단은 족장세대에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다음에는 모세가 만든 성막이 있습니다. 이 성막은 사울시대에 블레셋에 범궤를 빼앗기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법궤와 성막이 구분되어 존재하는 등의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기브온에는 법궤 없는 성막만 있었고, 시온산에는 성막 없는 법궤가 장막 안에 존재한 시대가 있었습니다(대상15:1, 대상17:5). 그러다가 다윗의 열망으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을 통하여 비로소 모리아 산이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왕상6:27-38).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금으로 만든 솔로몬 성전은 안타깝게 바벨론에 의해서 주전 586년에 파괴되고 70년 후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였는데 이를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스5:1-2). 이 성전은 솔로몸 성전에 비해 초라했습니다(스3:12-13). 그 후 에스겔 성전이 성경에 나타나지만 이 성전은 에스겔이 환상으로만 본 성전이지 존재했던 성전은 아닙니다(겔 40장-48장). 다만 이 성전은 미래에 나타날 신령한 성전의 예표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이 BC. 40년 헤롯에 의해 다시 아름다운 성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이 헤롯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첩놓이지 않고 무너지고(마24:1-2) 이제 지상에는 성도들이 성전이 되는 신약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고전3:16-17, 고후6:16).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을 연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바로 성령을 모신 성전이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올바른 성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시대는 다 끝났는데 무슨 성전이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성전시대가 끝났고 객관적 구속사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완성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속죄의 제물로서 이미 드려졌고 아직도 천상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제물로서 드려지는 신령한 관점에서의 그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하나님께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 즉 성전은 우리 성도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막과 장막과 성전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증거합니다(요2:19-22). 세분한다면 성막은 초림의 예수를, 장막은 고난의 예수를, 성전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예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도들을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성도를 성막이라고 부르는 곳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성막이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막이 그리스도의 구속도리의 예표라면 성전은 그것과 함께 성령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를 포함하는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서는 죽음이 강조되지만 성전에서는 죽음과 아울러 부활과 안식과 천국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성막에서 성전으로 변천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 역시 성막에 머물지 말고 성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영화롭게 해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충만한 은혜와 안식을 누리는 신령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 믿는 성도는 이미 성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성전다운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전론이란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3.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벧전2:4-5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했습니다.
성도에게는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이미 성전이지만 성전다운 바른 신앙이 형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의식과 신령한 삶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신령한 성전이 잘 지어지면 솔로몬 성전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자연스럽게 영적 교통이 있으며 신령한 그리스도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구약 성전에서는 놀라운 이적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이 존재했으며 성전이 정상적일 때 한 번도 국가의 재난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며 일어난다 해도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기타 약 열 가지의 기적 목록을 보면 먼저 성전에서는 수백 수천 혹은 대절기에는 수만 마리의 희생제물이 불에 타는 일이 있어 그 희생 제물의 연기 때문에 여인들이 잘못된 적이 없었으며, 그 많은 짐승들이 죽지 않으려고 공격적이 된 적이 한 건도 없었으며, 잡아 놓은 제물에 파리가 붙은 적도 없었고, 대제사장이 부정으로 인하여 대속죄일을 집행하지 못한 적이 없었으며, 비로 인하여 번제단의 불이 꺼진 적이 없었고, 어떤 강풍에도 번제단의 불은 수직으로 타올랐으며, 떡상의 떡과 소제물에서 부정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뜰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입장한 사람들이 엎드려 절할 때 충분한 공간이 생겨 가능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뱀이나 전갈이 피해를 준 적이 없고, 아무리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와도 '숙박할 곳이 없다' 라는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헤롯성전을 지을 때도 46년 동안 낮에 비가 온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히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면서도 주의 임재도 음성도 모르고 기적도 모르는 성도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성전론을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성전다운 신령한 성전으로 지어져서 구약 성전의 기적과 같은 기적이 여러분에게도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재세시 공생애 전후 두 번이나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장사의 소굴이 되어 장사와 짐승과 돈의 소리와 그 더러움으로 문란할 때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이 더러워서는 만민의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을 위해서 성전 신앙을 구비해야 합니다.

4.최고의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학1:2-9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지교회 예배당 짓는데 필요한 말씀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예배당을 헌신적으로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도 주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신앙의 신령한 집을 짓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학개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로 이 신령한 집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학1:10-11에도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15절 이하에도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석 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 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건축할 때 복을 약속하십니다. 학2:6-9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학2:19-23에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 달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약속하십니다. 이 상의 구약의 육신적인 복들은 우리 신약의 성도들의 썩지 아니할 하늘의 신령한 영원한 복들에 대한 예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령한 복을 위해서라도 신령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성전을 짓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자기들의 일에 더 빨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신령한 집에는 개인의 신령한 성전과 교제가 가능한 지교회 공동체 성전과 우주적인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 성도는 개인 성전과 공동체적인 성전 건축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양적인 부흥은 물론이고 우주적인 성전도 건축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명분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지만 혹시 마굿간 같은 심령은 아닌지 살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마굿간과 같이 싸늘하고 더러우며 지저분한 곳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심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솔로몬 성전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새예루살렘과 같은 신령한 성전이 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론을 하게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성전입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거하실만한 성전입니까? 축복과 저주는 성전의 상태에 달렸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멸하시지만 성전이 잘 지어지면 온갖 복락과 기적으로 가득히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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