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소금실, 파르바실, 세척실, 물문, 첫 예물문

하나님아들 2012. 9. 6. 11:20
성전 설계도 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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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40편 6-8절

요약
성전의 구조 중 소금실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주고, 가죽을 벗겨 보관하는 파르바실에서는 진실을 암시하며, 세척실에서는 자신의 더러움을 내어놓고 회개하는 성화신앙을 상징하며, 물문은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고, 첫 예물문은 낮아져서 순종하는 신앙을 교훈한다.


이 시간에도 계속하여 성전의 설계도를 중심으로 우리 성전을 건축하고록 하겠습니다. 저는 예배당을 여러번 직영으로 건축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무일푼으로 시작을 했기에 예배당은 언제나 기도와 눈물과 봉사와 희생으로서 지어졌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성전도 기도와 눈물과 봉사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배당의 완공을 위해서 온 교인들이 나와서 밤을 지새우며 몇 년을 기도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이처럼 신령한 성전도 이러한 눈물어린 오랜 기도로 지어져야 합니다. 또 예배당 건축이 힘들지만 완공한 후에 오는 기쁨이 크듯이 신령한 성전도 우선은 힘들지만 완공하고만 나면 그 영광은 두고 두고 빛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신령한 성전을 완성해 보십시다.

21번은 소금실입니다.

소금실의 위치는 이스라엘의 뜰의 북편 맨 아래에 있습니다. 성전에 소금실이 있어야 했던 이유는 모든 제물에는 소금을 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언약을 맺을 때도 사용되어 '소금 언약'(민18:19, 대하13:5)이라 했는데 이는 영원한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변치 않는 물질입니다. 그 때문에 이 언약의 소금이 모든 제물과 성막의 향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출30:35). 레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변치 않는 언약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며 또한 영원한 보장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소금은 번제단의 경사길에도 뿌려서 미끄러지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소금실 지붕에는 제사장들이 자기 몫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금실은 성전에서 제물들 위에 소금을 뿌려 영원성을 부여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언약의 영원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변치않는 일편단심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물인 자신에게 소금을 뿌여야 합니다. 그래서 엡6:24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했습니다. 또 사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했고 잠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제물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처럼 믿음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사랑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소망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충성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마음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열심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선행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제물은 제물이 아닙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믿음이 짧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을 뿌려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실의 지붕에 제사장들의 자기 몫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끝까지 변치 않아야 그 결과의 분깃이 찾아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히10:35-37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갈6:7-10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언약으로 끝까지 계속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번은 파르바실입니다.

파르바실은 소금실 곁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방을 파르바실이라고 한 것은 파르바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파르바는 지성소가 궁금하여 이 방을 만들고 나서 몰래 이 방부터 지성소까지 지하굴을 뚫었으나 발각되어 사형이 처해졌다고 합니다. 이 방은 제물의 가죽을 소금에 절여 무드질한 후 말려서 보관하던 장소였습니다. 벗겨진 짐승의 가죽들은 제사장들의 몫이었고 양피지 성경을 쓰는데 이 가죽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지붕 위에는 목욕탕이 있어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4번 들어와서 사용하였습니다.
여기 파르바실은 신령한 성전에서 진실의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가죽은 의복, 투석기, 목자의 제구, 가죽부대, 두루마리 양피지, 성막의 덮개와 기구, 신발, 장막, 띠 등 그 용도가 광범위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가죽은 각종 오물이 묻어 있는 부분이요, 짐승의 옷과 같은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가죽을 벤다는 용어는 굳은 마음이나 행악과 외식의 제거를 상징하였습니다. 렘4:4에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대속죄일에 이 짐승의 가죽을 보관한 파르바실 위의 목욕탕에서 목욕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짐승이 가죽을 벗고 깨끗한 하나님의 제물이 되듯이 인간의 가식을 벗고 진실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목욕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가죽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탈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합니다. 이 벗겨낸 가죽에다 성경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가죽 벗김이 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왜 진리의 성경을 기록함이 나올까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가식을 벗겨낸 가죽창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가죽창고가 없다면 아직 벗겨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모습을 제거하시고 영성으로 입혀주시기 위해서 잠재한 악을 폭로하시는 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때 느낀 점은 억울함입니다. 나는 본래 그런 사람 아니었는데 공교롭게 그런 방향에서 실수하거나 그런 악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개 이러한 폭로는 환경을 사용하사 이루십니다. 환경을 통하여 내 속의 악함을 드러내십니다. 이 때 우리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말고 그것이 나의 본 모습임을 일단은 철저히 시인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새 옷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23번은 세척실입니다.

세척실은 파르바실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물의 내장은 이 방에서 세척되어 번제단에 놓여졌습니다. 세척실 위에는 파르바실 위에서 물문으로 뚫린 통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문에서 물을 공급받아야 세척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레1:9에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했습니다.
여기 세척실은 죄악된 감정과 그 행위를 씻어내는 회개의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내장은 강력한 욕망과 감정이 깃든 곳입니다. 그리고 정갱이란 다리의 아랫 부분으로 행동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배를 탐욕의 우상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히노애락이 모두 내장에 표현됩니다. 기쁘면 내장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장은 제 2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다 내장은 더러운 오물을 담고 있습니다. 모두 죄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내장을 씻음이란 곧 죄악된 감정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환언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정갱이 역시 짐승의 다리의 아랫 부분으로 이 부분은 행동하는 부분이요 오물이 묻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가야 할 곳 안 가야 할 곳 다 간 우리의 죄악된 행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악된 감정과 행위를 말씀과 성령으로서 깨끗이 씻어야 하겠습니다.

24번은 물문입니다.

이 물문은 넓이가 10규빗에 높이가 20규빗의 큰 문입니다. 이 문은 초막절에만 사용되었는데 초막절에 실로암으로부터 이 문을 통하여 물을 날랐습니다. 이 물은 포도주와 더불어 번제단 위에서 아래로 부었습니다. 이 예식은 대속죄일에서 5일 지난 7월 15일부터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죄인을 위하여 아낌없이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예표합니다. 평소에는 뜰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물문으로 흘러가게 하였습니다. 물문 입구 왼편에 조그만 두 방이 있는데 그 중에 서쪽 방은 아브티누스 방으로 향단의 향을 만드는 곳이요, 동쪽 방은 미크바 방으로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5번 목욕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슥13:1에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했습니다. 이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피와 물의 만남입니다. 즉 만인의 죄를 어린양의 피로서 대속하는 대속죄일에만 사용했던 이 물문의 원리가 역시 피와 물의 만남입니다. 그 뿐아닙니다. 이 물문으로 들어온 물은 피와 섞여서 헌수가 되어 번제단에서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기 번제단에서 샘물과 피와의 만남은 보혈의 공로의 세척성과 계속성과 풍부성을 암시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의 적용을 통하여 지금도 깨끗이 계속하여 얼마든지 그리고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택한 자들을 모두 씻어줍니다. 즉 성령의 적용케 하심이 있으셨기에 그 세척성과 계속성과 풍부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이 물문의 물은 입구를 막고 있는 향실과 목욕실을 통과하여 들어옵니다. 향은 기도요, 목욕은 중생을 상징합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물이라면 성령밖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물문은 초막절에만 열렸습니다. 요7:37-39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했는데 이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습니다. 즉 이 초막절 7일 동안 번제를 드린 후에 물에 피를 섞어서 헌수하였던 이 사건을 배경으로 주님의 성령의 교훈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 7일간 열린 물문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즉 물문이 교훈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전에서 물문은 보혈의 확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샘솟는 보혈은 믿는 우리에게도 우리에게도 성령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 사죄의 확신을 모르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피와 물이 섞인 이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피는 보혈이요 물은 성령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보혈을 경험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는 일입니다. 이 믿음에 서면 양심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25번은 첫 예물문입니다.

첫 예물문은 첫 예물 짐승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제물에는 중요한 제물과 그리 중요하지 않는 제물로 나누어졌습니다. 아주 중요한 제물은 번제단 북쪽에서 잡았습니다. 그러나 덜 중요한 제물은 아자라(니카놀문에서부터 서쪽벽까지를 가리킴) 어디에서나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예물의 짐승은 그리 중요한 제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왔던 자리에 세워졌던 문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경에서 첫 것은 모두 여호와의 것이었습니다(출22:29, 출34:19). 그런데 첫 것은 모두 수컷이었고(출34:19), 무흠해야 했으며(레27:11-13) 반드시 드려져야만 했고, 거룩히 성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것은 흠 없는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더구나 이 문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했던 자리로서 죽는 자리까지 순종했던 이삭은 희생의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런데 이 첫 예물은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림의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귀히 여기지 않을 것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53:2-4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했습니다.
그럼 신령한 성전에서 이 첫 예물문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순종신앙입니다. 특히 문이란 들어가고 나가는 출입이 그 특징과 아울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죽기까지 순종한 순종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메시야의 예언시를 한 부분 소개합니다. 시40:6-8에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제는 짐승의 예물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께 속죄의 예물로 드리려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시입니다.
이 우주에서 예수님과 같으신 효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복하여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순종에는 온 우주가 찬양했고 하늘에서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들레헴 탄생시에도 그랬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랬고 변화산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던 때도 그랬습니다. 이 순종신앙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성장의 모델은 바로 영원하신 독생자이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신령한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가지십시다. 외식을 버리고 진실하십시다. 죄악을 내어 놓고 씻음을 받으십시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다. 그리고 온전히 낮아져서 순종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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