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여인의문, 찬양문, 양실, 난로실, 진설병실

하나님아들 2012. 9. 6. 11:21
성전 설계도 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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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3장 8-10절

요약
여인의 문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므로 눈물의 신앙을, 찬양문은 충성되이 예비하는 신앙을, 양실은 흠도 티도 점도 없이 변화받는 성화를, 난로실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을, 그리고 진설병실은 항상 성경을 묵상함을 가리킨다.


31번은 여인의 문입니다.

여인의 문은 북쪽 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문은 크지 않은 문입니다. 여인들은 제사장의 뜰인 안 뜰로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 문에 서서 자기들이 바친 제물이 불타는 모습을 작은 문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적당한 비유일지는 모르나 마치 화장터에서 불타는 시신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문에서는 제물을 잡거나 태우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더구나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지는 그 모습이요, 그 희생물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때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인들에게 그 모습을 보게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본래 여자는 감정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의 희생물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위한 희생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비록 좁은 문으로 바라다 보지만 여인들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깊이 슬퍼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기 여인은 성령의 감동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억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성령의 감동 속에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으로 이해할 때 이처럼 여인들의 심정이 되어집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늘 충만할 때 주님을 생각만 생각해도 감격에 겨워서 눈시울이 붉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령한 성전에도 이 여인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령의 충성하심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이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성도는 성숙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재앙이 보여주는 복음의 비밀입니다. 여기 대접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을 성령으로 깊이 깊이 성령으로 7수처럼 온전히 경험할 때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라도 주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를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를 완성시키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예레미야처럼 눈물의 성도가 됩시다.
위성방송을 통해서 청송교도소 주임인 박효진장로의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죄수들에게 원성을 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된 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죄수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두 사람은 거기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되었고 그 죄수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른 죄수들까지 전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죄수의 이름이 영호인데 영호의 주 무기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방 안의 죄수들을 모아놓고 '할 이야기가 있어' 하고서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계속 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너도 나도 울기 시작합니다. 그 눈물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면 그 완악한 죄수들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운 다음 '나는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 박주임도 예수 믿고 변화되었어, 그러니 너희들도 예수 믿고 새사람되라' 하고 또 울 때 그들에게 이 말이 전부였지만 모두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새로워지는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눈물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살펴봅시다. 어느 목사님은 저에게 '나는 눈물이 부족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 수는 없을까요?'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이 없다면 우리 심령에도 여인의 문을 만드십시다. 주님의 고난을 늘 생각하며 바라보는 눈이 바로 여인의 문입니다. 이 눈물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바라볼 때 생겨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32번은 찬양문 혹은 난로문입니다.

이 찬양문은 성소와 지성소 다음에 큰 공간을 가진 문입니다. 이 찬양문의 네 모퉁이에는 양실 난로실 진설병실 수납실 등의 네 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이라기 보다는 다용도실과 같은 큰 방입니다. 이 문의 이름은 찬양을 맡은 레위인들이 악기를 들고 이 문을 출입하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난로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려지는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밤에 이 곳에서 자야 하기 때문에 밤에 춥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장들이 자는 방을 헐스(난로)라고 불렀고 제사장 침대가 층층으로 되어 있어서 나이가 많은 제사장일수록 윗침대에서 잤습니다. 제사장이 쉬는 곳으로는 이 곳과 본 성전을 둘러 싼 38칸으로 된 작은 사무실들입니다(50번). 그런데 이 난로문은 대기 상태에 있는 제사장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찬양문은 남과 북에 작은 두 문이 있는데 이는 이른 아침에 손쉽게 문을 열고 제사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찬양문의 신령한 의미는 충성되이 예비하는 신앙생활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이 방에서는 인력이나 제물로 드릴 양이나 진설병이나 각종 필요한 기구들이 필요한 대로 조달되어야 했듯이 신앙생활도 예비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충성된 마음이란 하라는 것 이상으로 지나치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땅에 가장 지혜로운 것 네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잠30:25절에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그랬습니다. 여기에 최고 실력자의 비결이 나타나는데 그 첫째가 준비입니다. 제가 감히 여러분의 실력과 명성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준비만 잘 해보세요. 그런데 이것이 내 말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보장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출판계에 '와이 미'라는 책이 대 인기인데 이 책은 한 대학 교수인 평신도의 신앙적인 성공담을 기록한 책으로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책입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 김춘근 교수는 익산에서 태어나 전주와 서울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이수한 후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최우수 교수상도 받고 알레스카 주립대학에 스카웃되어 그의 탁월한 교수활동으로 역시 그 곳에서도 최우수 교수상을 획득했으며 알레스카 주지사의 정책고문을 10년간 맡으면서 알레스카의 수출을 300%로 증대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별명이 알레스카 요셉입니다. 지금은 켈리포니아 대학에서 일하면서 '미국을 신앙으로 위대하게 만들라'는 하나님의 비젼을 실행하기 위해 열심히 선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2회에 걸친 교수최우수상의 비결은 다름 아닌 준비였다는 고백입니다. 한인 일세로서 미국 땅에서 존립하기도 어려운데 이처럼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준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강의안을 완전히 외워서 자신있게 강의함에서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누구도 준비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습니다. 국회에서도 보좌관들을 애경사나 우선 인기 유지를 위한 곳에 투입하는 사람들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철저한 전문위원회로 활용하는 의원들은 언제나 상위권에서 크게 튀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천 번만 연습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천재라고 부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철저히 준비하여 세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그 부문의 일인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성도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도 준비해야 합니다. 목회도 준비해야 합니다. 타인을 부러워 하지 마시고 하루 3분의 1을 그 부분에 투자해 보십시오. 성경구절도 몇 백구절 아예 외우십시오. 기도도 중요한 핵심들은 아예 뽑아서 줄줄줄 나오도록 하십시오. 바울도 너희에게 같은 말 쓰는 것이 나에게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도 안전하니라 했습니다. 최근 전문가 집단들의 연구실은 하루 24시간 가동된다고 합니다. 여기 찬양문의 제사장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주님이 오시면 문을 열어줄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33번은 양실입니다.

앞서 말씀한 찬양문 혹은 난로문 안에 남서쪽 모퉁이에 한 방이 있는데 그 방이 바로 양실입니다. 이 방에는 최소한 80마리의 양이 대기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는 매일 두 번의 상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양들은 이 양실에 보관하여 하루에 두 번씩 4일간 검사하여 흠이 있거나 병든 양은 제외된 합격된 양이어야 합니다. 이방은 돌로 만들어 양의 오물 등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도록 잘 차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방을 제물실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양은 객관적으로는 점도 흠도 티도 없고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 양들은 제사장들과 장소는 약간 다르지만 함께 몇 일동안 자면서 깊은 정이 듭니다. 이 정든 양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이 양실은 흠도 티도 없어진 우리 신앙을 의미합니다. 본래 우리는 죄악 투성이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흠도 티도 주름잡힌 것도 없이 날마다 온전해져가고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아름다운 제물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온전해집니까? 양들이 제사장들과 함께 잤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 온전해집니다. 부정한 식물로 여김 받던 것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딤전4-5). 이처럼 부정한 식물같은 우리 자신들도 말씀과 기도로서 거룩해집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전제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신다면 이제는 제사장들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거룩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롬6:12-22).

34번은 난로실입니다.

이 방은 찬양실의 북서쪽 구석에 있습니다. 이 방에 들어서면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진 길이 있습니다. 이 지하 길은 목욕실과 찬양대의 악기실과 안토니아성까지 이어졌습니다. 지하에는 곳곳에 등을 설치하여 어둠을 밝혔습니다. 이 난로실은 제사장들이 우거하는 찬양문(난로문)의 큰 방을 난방해 주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이 곳은 지상과 지하의 길이 모인 로비였습니다. 이 곳에 오면 지상의 성전 안팎과 지하의 여러 곳을 가장 용이하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길은 로마로! 로마의 길은 세례로! 와 같이 통로의 요충지였습니다.
여기 난로실은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은 난로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난로의 훈기는 제사장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했듯이 우리의 사랑도 타인의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즉 신앙 안에서 교제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으로 교제하면 공동체에 도움이 안됩니다. 그런데 왜 난로실은 그토록 통로의 요충지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모든 것의 방법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로 가든지 아래로 가든지 안으로 가든지 밖으로 가든지 이 난로실에서 몸을 따뜻하게 데운 다음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고전14:1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 했고, 고전16:14에는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했으며, 골3:14에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했고, 롬13:8-10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고전12:31-13:3에도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통로가 난로실을 거치게 된 것은 사랑의 방법의 위대성을 강조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려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대로 사랑을 주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할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엽니다. 이유 없이 비협조적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사랑결핍증에 걸렸다고 이해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달호 월간목회에서 창훈대교회 한명수 목사님의 통닭목회에 대한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토록 비협조적이던 교인들에게 통닭을 사들고 가서 함께 먹었더니 그 때부터는 적즉적인 목회의 지원자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팀목회가 파산될 때 얻은 교훈이지만 아무리 설교에 능하고 행정에 능하더라도 사랑에 능한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통로의 난로실은 사랑이 우리 영성의 완성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교훈한 대로 사랑함이 곧 어둠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생명을 얻는 길이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요, 두려움을 이기는 길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받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사랑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 신앙은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사랑에서 완성됩니다. 이처럼 사랑은 여러 면에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난로실을 통로의 요충지에 배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의 난로실에 불이 꺼졌는지 점검하시고 따뜻하게 지피시기를 바랍니다.

35번은 진설병실입니다.

난로문의 남동쪽 방이 진설병실입니다. 매 금요일마다 진설병은 이 방에서 만들어 안식일에 성소 떡상 위에 갈아 놓았습니다. 이 떡은 금으로 만든 팬에 구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떡상 위에 떡을 두라고 하신 말씀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제사장들은 과거의 떡과 교체할 때 새 떡으로 물리는 떡을 밀면서 진설하였습니다. 이 떡은 일주일 내내 부패하지 않고 신선했으며 탈무드의 전승에 의하면 일주일 내내 뜨끈뜨끈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떡을 콩알만큼씩 떼어 주어도 먹는 이들이 배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떡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진설병은 가르모 가문에서 맡았는데 그 비밀은 성전이 무너진 이 후에도 지켜졌고 그의 가정에서도 만들어 먹지 않았다고 전해옵니다. 여기 진설병은 바로 우리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진설병실은 성경 묵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복있는 사람을 시편 1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성도에게 있어서 성경은 읽든지 듣든지 언제나 묵상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진설병 만드는 비법이 비밀이었듯 성경연구법도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전에 쓰이는 진설병은 한 주에 열두 개씩 만들었습니다. 이 떡은 개당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의 이(4.4키로)에 감람기름으로 반죽하여 구운 후에 6개씩 두 줄로 진설한 다음 그 위에 유향을 한 병씩 놓았다가 다음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이 유향 기름과 함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여기서 성경을 묵상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곡식가루는 일점 일획도 틀림없는 말씀 혹은 인성의 상징 즉 여러 가지 문자적 역사적인 배경을 옷입고 있는 성경의 배경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과 아울러 또한 인성적인 배경을 옷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일점 일획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떡은 모두 열두개로 이는 열두 지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두 줄로 진설됨은 신구약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신약만 먹어도 안되고 구약만 먹어도 안됩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구약은 신약에 펼쳐져 있고 신약은 구약에 감춰져 있다" 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먹을 때 그 의미가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이 떡을 제사장들에 국한하여 유향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떡이 고운가루였듯이 먼저 일점일획이라도 의미 없지 않는 성경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제사장이 유향과 함께 먹는데 여기 유향은 기도의 상징이요, 제사장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의 상징입니다. 즉 성경은 충분한 배경연구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풀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충분한 기도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시간 묵상한 것과 여러 날 묵상 것과는 그 깊이가 다릅니다. 늘 느끼는 것은 성경 이해는 샛별이 떠오르는 것 같다는 베드로의 경험담입니다(벧후2:19). 그는 이렇게 되기까지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즉 기도하면서 충분히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아직 덜 되서 그렇겠지만 286컴퓨터 화면 뜨는 것보다 몇 배 혹은 몇 십배 어떤 때는 몇 백배 더 느립니다. 그러나 샛별이 떠오르는 것에 비교한 베드로의 간증을 참고할 때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배경 연구가 부족한 구속사적 해석이 되어서는 안되며, 반대로 문자 자체에도 진리가 있음이 사실이지만 너무 문자적 배경에만 매달리는 매마른 상황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벧후3:15-16에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경고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십시다. 그 때 진실로 눈물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충성되이 예비하는 신앙을 가집시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에 힘쓰십시다. 그 때 흠도 티도 점도 없이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다.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항상 성경을 묵상하여 우리 마음의 상에 말씀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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