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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납실, 갈고리기둥, 대, 24후프, 번제단

하나님아들 2012. 9. 6. 11:21
성전 설계도 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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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장 1-4절

요약
구약의 성전제사는 끝났으나 신령한 성전의 영적제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수납실은 재림과 임종의 기름준비를 뜻하고, 갈고리 기둥은 연단을 통해 옛사람을 벗는 신앙을 가리키며, 창자를 처리하는 대는 신자의 감정처리를 가리키고, 짐승을 죽이던 원형 후프는 자아처리를 상징하며, 그리고 번제단은 성령의 불길로 성화되어지는 원리를 보여준다.


오늘도 성전설계도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구약 성전의 제사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안의 신령한 성전의 영적제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성전론 공부는 얼마나 귀한 것인지 오늘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36번은 수납실입니다.

이 수납실은 소제를 드릴 사람들이 이 곳에 돈을 지불한다 해서 생겨진 이름입니다. 이곳에서 돈을 지불한 사람들은 여인의 뜰의 있는 기름실로 가서 기름을 구했습니다. 시리아가 쳐들어와 성전을 더럽히며 번제단에서 우상을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마카비는 후에 부정한 번제단을 이 방으로 옳기고 번제단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번제단은 컸기 때문에 이 방의 밑을 파서 크게 방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수납실은 재림을 대비한 믿음준비를 가리킵니다. 즉 수납실은 기름을 팔았던 곳입니다. 기름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수납실은 제사를 예비하던 찬양문(난로문) 안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비의 성격이 강한 곳입니다. 더구나 이 곳에서 돈을 지불한 후에 여인의 뜰로 내려 가서 기름을 구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수납실은 성령의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신앙을 교훈합니다. 마25:1-4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그러면서 마25:13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번제단을 마카비가 이 곳에서 다시 만들었듯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세속에 늘 넘어지던 우리의 육체를 완전한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납실이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성령의 기름준비를 해야 합니다. 생전에 주님께서 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육체를 벗고 주님을 뵙기 위해서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임종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림준비와 임종준비는 그 성격이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부분을 임종으로 풀어 본다면 "졸며 잘새"는 노년기의 임종의 임박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문이 닫힌지라"는 이미 세상을 떠나 구원의 기회가 끝남을 뜻합니다. 그러기 전에 성도는 자기의 믿음의 등불을 밝힐 성령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석에 보니 이 기름준비란 주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을 통하여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두시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짜는 틀'이라는 의미로 그 곳은 감람나무 동산이었습니다. 이 기름준비가 곧 재림을 맞을 준비요 또한 임종준비인 것입니다.

37번은 갈고리 기둥입니다.

이 곳은 번제단 북편으로 제물을 잡는 곳입니다. 이 곳에 동물을 달고 아래로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떴습니다. 이 곳에는 8개의 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기둥은 백향목으로 만들어졌고 각 기둥에는 동남북 3면에 3개씩의 모두 9개의 갈고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효가 많을 때는 갈고리 대신 앞으로 뻗친 제사장의 팔을 이용한다든가, 막대에 매달아 두 사람의 어께에 메고 짐승을 잡았습니다. 기둥의 서쪽면에 갈고리가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지성소를 등지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제물의 측면에서 보면 지성소를 등지는 방향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이 모습대로니까 제물들은 모두 하나님을 등지는 방향이 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갈3:13)라고 했습니다. 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곳은 죄인들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옷 벗김의 수치를 당하시면서 또한 죄인의 취급으로 우리 대신 아버지의 버림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기둥의 갈고리의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지도하심에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령한 성전에도 8개의 갈고리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옷을 벗기는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입니다. 이 기둥은 견고했고 유동성이 없고 갈고리는 날카로워서 한 번 걸리면 벗겨지지 않는 가죽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한 면에 세 개씩의 갈고리의 3은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리고 8수는 사방을 뜻하는 4의 중복수로서 우리를 둘러싼 영육간의 환경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에 한 번 걸리게 되면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이 변화되는 길밖에는 선택이 없는 불가항력입니다. 이 손길은 내가 변하기까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혈기 많던 모세도 이 하나님의 갈고리에 걸려서 온유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의 방법으로 성취하려던 야곱도 이 갈고리에 걸려 연단받다가 기도로서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거역하고 도망친 요나도 이 갈고리에 걸려서 어둡고 두려운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갈고리에만 걸리면 그 누구도 여지없습니다.
그래서 단12"10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라고 했고, 엡4:22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으며, 약1:3-4에서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짐승이 가죽을 벗듯이 나의 옛사람이 벗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환경을 바꾸려고 말고 나 자신을 바꾸려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도 급한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훈련을 받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순히 순종하는 가장 현명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객관적구속사 외에도 신령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38번은 대(Table)입니다.

앞서 말씀한 갈고리 기둥 앞에는 8개 즉 각각의 대가 있습니다. 즉 갈고리 기둥에서 제물을 잡아주면 이곳에서 내장을 씻고 요리할 준비와 바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내장이 모두 드러나서 더러움이 제해집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지기 위하여 마치 내장이 존재하지 않는 어린양같이 잠잠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12:19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원수들의 대적 앞에 자신의 의와 권세와 능력을 들고 나오셨다면 십자가의 구속은 성취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감정처리를 가리킵니다. 내장이란 제 2의 얼굴이라 할만큼 감정이 민감한 곳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면 속이 뒤틀입니다. 그리고 슬픔과 간절할 때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큰 시험을 당하고 난 후에는 대개 여러 장기에 병이 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지려면 인간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만약 내장처리가 안된 제물이 드려진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불경입니다. 이처럼 감정처리가 안된 심령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열납될 마음은 성령으로 감동된 심령이라야 합니다. 어떻게 세속적 욕망과 혈기와 원망과 시기와 갈등이 가득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찬송하고 성령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39번은 24 원형 후프입니다.

번제단 바로 북쪽 옆에 4개씩 6줄로 원형으로 된 후프가 있습니다. 이 원형 후프는 짐승을 죽이고 목의 피를 빼는 틀입니다. 제사장들이 짐승을 잡을 때 끈으로 이곳에 매고 당겨서 정신을 잃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앞 부분의 동맥을 찔러 피를 빼내었습니다. 혹은 제물의 목을 그곳에 끼고 피를 빼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은 짐승들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순종하는 잠잠한 그 양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양실에서 함께 생활하던 그 양들이 아닙니까? 이처럼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이 제물처럼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충격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는 이와 같은 죽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의 죽임입니다.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단회적입니다. 히9:28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라고 했고, 10:12에도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구속사에서 우리 안에서 매일 죽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관적 구속사가 신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도 죽이는 일이 없으면 성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양들이 애지중지하던 사랑하는 양이었던 것처럼 자아란 내 일생 내가 얼마나 사랑하던 것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원형 후프가 4개씩 6줄이었습니다. 4는 사방 즉 세계 우주 혹은 환경의 숫자입니다. 이처럼 자아처리는 환경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6은 사람의 수입니다. 이처럼 자아처리는 내가 자신을 십자가 아래 넘겨야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속의 죄는 은혜가 나타나면 저절로 죽어집니다. 그러나 자아는 성령의 은혜를 많이 경험해도 죽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강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아는 환경을 통해서 밝혀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자아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환경을 통하여 잠재한 것을 폭로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이것이 내 모습이다' 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히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짐승이 정신을 잃듯 나는 사라지고 자의식조차도 잊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은 잊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자아는 자꾸만 살아나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원형 후프가 방치되는 날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령한 성전을 잘 관리함입니다.

40번은 번제단입니다.

성막이나 성전 뜰에서 맨 먼저 만나는 것은 번제단입니다. 이곳에서 피를 뿌리고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대하4:1에 "솔로몬이 또 놋으로 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십 규빗이며" 했습니다. 이 구절이 성전의 번제단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약술한 것은 모든 것은 성막의 번제단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번제단은 놋으로 만들었는데 놋은 심판 혹은 십자가의 상징입니다(민21:6-9). 그러니까 놋은 죄사함의 자리이고 금은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성전 제단의 크기는 20×20×10규빗이었습니다. 이 크기는 5×5×3규빗의 성막 제단에 비해 약 50배나 큰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2는 증거 혹은 율법수요, 10은 모든 구비 환난 혹은 십계명 그러니까 역시 율법수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나타나는 곳을 예표합니다. 그 고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번제단의 용량은 4,000 입방 규빗으로 지성소 위의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구원과 천국의 보물이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20×20의 사이즈는 정방형으로 정방형은 진리와 충만의 상징으로 이는 우리의 죄가 올바로 온전히 처리되었을 암시합니다. 이 번제단에서는 제물이 불로서 자취를 감취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도 온전히 처리됨을 보여줍니다. 이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뿔은 힘과 권세의 상징으로 속죄의 권세를 나타내며, 뿔이 네 방향에 있음은 4는 땅의 수로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했음을 보여주며, 이 뿔에 번제물을 매 두기도 했는데(시118:27) 이는 그곳에 피하면 살 수 있는 도피성임을 보여줍니다(왕상1:50-53). 그러므로 범죄하면 속히 회개하고 속죄의 복음을 믿어야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의 위치는 남족에 바다가 있다는 점에서 북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죄는 북쪽에서 생겼습니다(사14:12-14). 마귀의 상징인 단지파의 진지도 북편이었고(민2:25)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자기의 땅을 버리고 북쪽으로 이주했습니다. 즉 죄의 자리에 속죄의 피가 뿌려졌는데 이는 번제단의 성격을 잘 암시해 줍니다(히7:27). 전승에 의하면 번제단의 불의 기세는 신기하게도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와 같았다고 합니다. 제 1성전 시대에는 제 2성전 시대보다 더 뜨거웠습니다. 또 거기서 나온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물에 타서 몸에 바르면 정결해졌습니다(민19:1, 19). 그리고 다른 것들은 다수였어도 번제단은 하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구속의 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 신령한 성전에도 번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번제단은 죄악을 태우는 성령의 번제단입니다. 이 불길은 구약의 장작불이 아니라 소멸하시는 성령의 불길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의 부정을 제하여 주던 그 불입니다. 사6:6-7에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제단에서 부르짖음으로 죄성을 제함받고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계6:9-11에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의 영성적인 의미는 바로 제단불의 성결의 축복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의미의 성전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구약의 성전제사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의 영적제사는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재림과 임종을 대비할만한 준비된 신앙이 있습니까? 옛사람은 얼마나 벗었습니까? 감정처리는 얼마나 이루어졌습니가? 자아는 얼마나 처리되셨습니까? 그리고 성령의 불길로 얼마나 거룩해졌습니까? 우리 모두 성전의 기능을 활발하게 하십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거룩하고 복된 성도로 변화될 것입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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