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설계도 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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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4장 2-6절
주요 요점
번제단 곁의 하수도랑은 자범죄 회개의 예표요, 바다는 성도를 씻어 온전케 하심이요, 12계단은 제자로서의 삶을 교훈한다.
오늘도 성전론 41번부터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전론에서 객관적 구속사와 아울러 주관적 구속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약 성경을 하나의 교훈이나 예화 수준으로 알기 쉬운데 거기서 예수를 발견한다는 것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는 주관적 혹은 영성적인 말씀으로까지 이해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계속하여 신령한 성전의 구조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41번은 하수도랑입니다.
하수도랑은 번제단으로 올라가는 경사길의 양 옆에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번제단 옆 삼각형 모양이 그 입구 부분입니다. 이 곳에 제사에 쓰이고 남은 피를 부었습니다. 그 피는 기드론 시냇물과 섞여 흘렀습니다. 제사장들이 번제단을 청소할 때 쓰인 물도 이 곳을 통해서 버려졌습니다. 번제단을 청소할 때는 거기 치우고 남아있는 재가 물에 혼합되어 흐르게 되는데 이 잿물 하수는 정결예식 때 쓰는 물과 동일한 물입니다(민19:8-9). 그러니까 자동으로 정결수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하수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될 물입니다. 그래서 그 곳은 물과 피가 흐르는 곳입니다. 그 때 순식간에 물을 흘려서 하수구 내부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한 청소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은 배수통 속의 배수구를 뚜껑으로 막아 물을 가두었다가 청소를 마친 후 충분한 수위가 차면 열었습니다. 이 뚜껑의 크기는 사방 1규빗이었습니다. 이 하수도랑은 70년에 한 번씩 젊은 제사장들이 도랑 속까지 들어가서 청소를 하였습니다. 객관적구속사에서 이 하수도랑은 죄인을 위하여 물과 피를 아낌없이 흘려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하수도랑은 자범죄 회개의 예표입니다. 피를 두 용도로 구분한다면 제사 과정에서 번제단에 뿌린 피는 택한 백성들의 죄과를 대신 지불하신 대속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사용하고 남아 하수도랑에 버려지는 나머지의 피는 택한 자의 양심과 죄성을 씻어주는 성결과 용서의 피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하므로 영원한 대속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자범죄로 더러워진 양심의 부정은 하나님 앞에 고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극단적인 보혈주의자들은 영원한 속죄만을 전부로 믿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 만큼 자기 손해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자범죄를 고백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께 버려지는 번제단을 씻은 물은 회개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여기 물을 버리는 방법이 하수구 입구에 물이 차도록 충분히 받은 다음에 버렸듯이 자범죄를 범한 성도들은 자기의 죄를 충분히 인정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자범죄의 회개는 결코 형식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마치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인임을 인정시키는 특수한 세례입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베풀 때 물 속으로 집어넣어 ‘나는 이처럼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며 시인하도록 만들었듯 우리가 자범죄를 회개할 때 ‘나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충분한 수위가 되었을 때 버렸던 하수도랑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고백만으로 그쳐서도 안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여야 합니다(막3:8). 즉 회개는 고백하고 돌아서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눅3:11-14) 외쳤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요한의 세례란 우리와는 무관하고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교훈적인 측면에서 그 번지수를 찾아드린 것입니다(막1:4).
그런데 유의할 점은 마냥 자신의 죄만을 붙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하수구에 물을 버리되 피와 함께 버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버려지는 피일지라도 역시 고귀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버렸다는 것보다는 보혈의 또 다른 작용을 교훈함이라고 이해해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되 내 죄를 담당하신 보혈의 공로를 믿으면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양심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70년마다 그 도랑을 청소했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여기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회복의 때를 연상시킵니다. 즉 죄 고백이 필요없는 때가 올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때는 구원이 완성된 천국과 재림에서의 회복의 때입니다. 그 때는 죄를 애통하거나 고백할 필요가 없는 영원세계의 때입니다. 그러나 이 청소함의 예표는 꼭 미래의 지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상에 사는 한 반드시 자범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역설함입니다. 즉 지상에 사는 성도는 성숙한 신앙인일지라도 때로는 자범죄를 범하게 됩니다. 고의성이 없을지라도 죄악의 때가 묻어 심령이 악해지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 그 심령을 내어놓고 회개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회개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보혈주의자를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42번은 바다입니다.
바다에 대한 기록은 대하4:2-6과 왕상7:23-26, 44절, 대상18:8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한 곳만 소개하면 대하4:2-6에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고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며 소 형상이 있는데 매 규빗에 소가 열씩 있어서 바다 주위에 둘렸으니 그 소는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줄로 부어 만들었으며 그 바다를 열두 소가 받쳤으니 셋은 북을 향하였고, 셋은 서를 향하였고, 셋은 남을 향하였고, 셋은 동을 향하였으며 바다를 그 위에 놓았고 소의 뒤는 다 안으로 두었으며 바다의 두께는 한 손넓이만 하고 그 가는 백합화의 식양으로 잔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삼천 밧을 담겠으며 또 물두멍 열을 만들어 다섯은 우편에 두고 다섯은 좌편에 두어 씻게 하였으며 그 바다는 제사장들의 씻기를 위한 것이더라” 했습니다.
놋바다는 놋으로 만든 큰 물두멍으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다라고 했습니다. 이 바다는 제물을 씻었던 물두멍과는 달리 제사장들이 자기를 씻기 위한 것입니다. 놋바다의 재료는 놋입니다. 그 동안 배운대로 뜰의 모든 기구들이 다 놋이었는데 놋은 심판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뜰은 죄를 처리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죄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거니와 그 곳에서 봉사는 더욱 불가능합니다.
이 시간에는 놋바다가 보여주는 영성적 원리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 마디로 놋바다는 하나님 보좌 앞의 유리바다의 모형으로 성도를 세속과 죄악의 오염에서 씻으사 온전케 하심의 은혜를 교훈합니다. 먼저 성막의 물두멍과 성전의 바다의 재료에 담긴 의미입니다. 출38:8 보면 성막의 물두멍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했습니다. 거울은 말씀의 예표입니다. 이것은 깨닫게 하사 온전하고 아름답게 단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예표합니다. 더구나 부정을 용납지 않는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이니 얼마나 자기를 깨끗이 단장했겠습니까? 영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 놋바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바다는 대상18:8을 보면 아람의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은 심히 많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람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연단의 장소입니다. 즉 야곱도 거기서 연단을 받았고, 사사시대의 이스라엘도 이 곳의 구산 리사다임에게서 연단을 받았고, 남쪽 유다도 바로 이 곳 바벨론에서 연단을 받았고, 이스라엘도 이와 비슷한 앗수르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다의 담긴 물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물로서 우리를 씻으시되 연단이 그 씻음의 원동력이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불가항력 앞에 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다의 크기는 높이가 5규빗에 지름이 10규빗이었습니다. 5는 고통의 수요, 10은 율법의 충족수로서 온전한 구비 등을 뜻합니다. 이는 고난을 통한 온전함을 보여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려면 연단과 함께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또 놋바다의 모양은 둥근 큰 대야와 같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바다는 넓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사랑은 넓습니다. 또 바다의 둘레가 “30규빗 줄로 두를만하며”(왕상23) 했습니다. 여기 두를만하다는 것은 대략적인 표현입니다. 30은 성숙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요셉도 다윗도 제사장들도 30세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만큼 성숙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또 바다의 두께는 손 넓이만큼 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두꺼운 두께인데 손바닥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우리에게 반드시 영성을 입히사 온전케 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또 놋바다는 네 마리씩 동서남북으로 열 두마리의 놋소가 받들고 있었습니다. 12는 선택수요 소는 겸손과 충성의 상징입니다. 즉 겸손과 다방면의 충성스런 육체의 영성이 없이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은 불가능하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늘 엎디어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또 놋바다의 가장자리에는 백합꽃과 두 줄의 300개의 박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백합화는 주님 사랑이요(악2:16) 박은 이웃 사랑으로(욘4:6. 10) 영성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1규빗에 10개씩 둘레가 30규빗이니까 300개인데 300은 하나님의 완성의 수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암시합니다.
또 놋바다의 위치는 전 우편이었습니다(왕상7:39). 이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하시는 대제사장 예수님이 계십니다(요일2:1). 그래서 우리가 온전케 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또 놋바다의 물의 양은 2000바트 혹은 3000바트였습니다. 그런데 왕상7:26절에는 바다의 물이 2,000바트, 대하4:5에서는 3,000바트라고 했습니다. 왜 같은 바다인데 서로 다른가? 그것은 용량은 3000바트인데 보통 2,000바트를 넣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2,000은 성소의 용적수와 같고 3,000은 지성소까지 합한 용적수입니다. 이는 사역의 양면성으로 제사장적인 입장에서 기도와 선지자적인 입장에서 말씀을 통해서 온전케 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물로 놋바다를 가득히 채워야 하겠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다 같이 하나님께로 가는 약도입니다. 먼저 번제단에 피를 드린 뒤에 물로 나아가듯 회개한 마음은 말씀충만과 성령충만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도 성숙치 못하여 죄에 머무름은 놋바다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제사장들은 제사하기 전에 손발을 씻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씻지 않으면 안됩니다. 천국에는 유리바다가 있습니다(계4:6). 이 곳을 통과해야 지성소인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다에 담긴 물은 다음날 쓰는 일이 없이 언제나 신선한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벤 카틴은 바다를 들어 내려서 물을 쏟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아침은 바다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로 시작되며 이 소리는 멀리 여리고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하16:13, 17을 보면 놋바다가 변형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아하스왕이 놋바다를 놋소에서 내려다가 돌 판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또 왕하25:13-16에 느브갓네살왕도 놋바다를 깨뜨려서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성화적인 노력을 포기하거나 타락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43번은 12계단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12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계단의 높이는 모두 반규빗이므로 모두 3m입니다. 그러나 계단의 깊이는 1규빗씩인데 3계단을 한 단위로 3계단마다 넓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1.1.3, 1.1.3, 1.1.3, 1.1.4 등의 4조입니다. 이렇게 성전은 안과 밖으로 계단이 많으며 질서정연합니다. 그 만큼 성전은 높고 거룩하며 단계적입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수제자의 구룹이 3명인 것과 처음 것은 마지막과 같다는 영의 공식이 적용될 수 있다면 아마도 4그룹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제자의 그룹과 일반 제자들의 그룹과는 차이를 두시고 교육시키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제자들 간에도 수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식간에 영적 수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충분히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그 앞에 당당히 나아가라는 교훈은 그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감히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전의 12계단은 제자로서의 준비적인 삶을 예표합니다. 그헐다면 이왕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충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성전뜰에서 본성전 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12계단을 거쳐야 합니다. 이처럼 육신에 속한 갈릴리 어부들이 오순절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제자가 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훈련을 거쳤습니다. 그 준비적인 내용은 다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먼저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적들이 이 방향을 위해서 제공되었습니다. 이적을 본 제자들은 “저가 뉘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의문을 품다가 결국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했습니다. 다음은 믿음의 훈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삶속에 철저히 적용토록 하셨습니다. 사실 이 일이 얼마나 어렵고 많은 시행착오가 따릅니까? 그래서 초기에 제자들이 책망을 받았다 하면 거의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비로소 말씀하시고 자기를 버리는 훈련이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아버지의 뜻에 기거동작 살고 죽는 모본을 통하여 이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즉 나를 십자가에 내어놓는 자아처리 부분입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시고 기도하시는 삶을 통하여 영적인 능력을 위한 생활의 틀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이 상의 네 가지는 시작 시기에는 약간의 서열이 있긴 하나 모두 공생애 전반에 걸쳐 복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이러한 말씀과 훈련의 단계를 거쳐 준비되어지므로 오순절이라는 신령한 성전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육에는 성령의 능력과 아버지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즉 12계단이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참된 신앙을 배우고 훈련받아야 성전의 삶이 가능함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3계단씩 이 한 조로 되어 있음은 이 모든 영성과정을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조로 되어 있음은 이 영성을 여러 방향에서 훈련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혼의 영성, 육체의 영성, 물질의 영성, 대인의 영성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혼의 영성이란 복음적인 확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중생과 성화의 과정이라면, 육체의 영성이란 육체에 은사를 입혀주시므로 육체가 불의의 병기가 아니라 의의 병기로 영혼을 따라 하나님을 섬김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되는 것이요. 물질의 영성이란 모든 소유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가 공급하시고 책임지시며 또한 아버지의 뜻대로 쓰여지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심을 믿고 그 뜻을 묻고 순종하는 청지기로 사는 것이며, 대인의 영성이란 모든 사람들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전의 기둥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 기둥들이 잘 세워질 때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없이도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훈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온전히 믿음에 의존하도록 바다 위를 걷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임재의식은 성령으로 부어지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었을 때는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언제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왕이 한 두 번 찾아 올까 말까한 먼 서열의 비빈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제일 가는 왕비 술람미입니다. 그러므로 임재의 무의식을 정상으로 알고 체념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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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4장 2-6절
주요 요점
번제단 곁의 하수도랑은 자범죄 회개의 예표요, 바다는 성도를 씻어 온전케 하심이요, 12계단은 제자로서의 삶을 교훈한다.
오늘도 성전론 41번부터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전론에서 객관적 구속사와 아울러 주관적 구속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약 성경을 하나의 교훈이나 예화 수준으로 알기 쉬운데 거기서 예수를 발견한다는 것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는 주관적 혹은 영성적인 말씀으로까지 이해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계속하여 신령한 성전의 구조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41번은 하수도랑입니다.
하수도랑은 번제단으로 올라가는 경사길의 양 옆에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번제단 옆 삼각형 모양이 그 입구 부분입니다. 이 곳에 제사에 쓰이고 남은 피를 부었습니다. 그 피는 기드론 시냇물과 섞여 흘렀습니다. 제사장들이 번제단을 청소할 때 쓰인 물도 이 곳을 통해서 버려졌습니다. 번제단을 청소할 때는 거기 치우고 남아있는 재가 물에 혼합되어 흐르게 되는데 이 잿물 하수는 정결예식 때 쓰는 물과 동일한 물입니다(민19:8-9). 그러니까 자동으로 정결수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하수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될 물입니다. 그래서 그 곳은 물과 피가 흐르는 곳입니다. 그 때 순식간에 물을 흘려서 하수구 내부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한 청소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은 배수통 속의 배수구를 뚜껑으로 막아 물을 가두었다가 청소를 마친 후 충분한 수위가 차면 열었습니다. 이 뚜껑의 크기는 사방 1규빗이었습니다. 이 하수도랑은 70년에 한 번씩 젊은 제사장들이 도랑 속까지 들어가서 청소를 하였습니다. 객관적구속사에서 이 하수도랑은 죄인을 위하여 물과 피를 아낌없이 흘려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하수도랑은 자범죄 회개의 예표입니다. 피를 두 용도로 구분한다면 제사 과정에서 번제단에 뿌린 피는 택한 백성들의 죄과를 대신 지불하신 대속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사용하고 남아 하수도랑에 버려지는 나머지의 피는 택한 자의 양심과 죄성을 씻어주는 성결과 용서의 피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하므로 영원한 대속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자범죄로 더러워진 양심의 부정은 하나님 앞에 고백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극단적인 보혈주의자들은 영원한 속죄만을 전부로 믿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 만큼 자기 손해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자범죄를 고백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께 버려지는 번제단을 씻은 물은 회개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여기 물을 버리는 방법이 하수구 입구에 물이 차도록 충분히 받은 다음에 버렸듯이 자범죄를 범한 성도들은 자기의 죄를 충분히 인정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자범죄의 회개는 결코 형식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마치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인임을 인정시키는 특수한 세례입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베풀 때 물 속으로 집어넣어 ‘나는 이처럼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며 시인하도록 만들었듯 우리가 자범죄를 회개할 때 ‘나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충분한 수위가 되었을 때 버렸던 하수도랑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고백만으로 그쳐서도 안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여야 합니다(막3:8). 즉 회개는 고백하고 돌아서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눅3:11-14) 외쳤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요한의 세례란 우리와는 무관하고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교훈적인 측면에서 그 번지수를 찾아드린 것입니다(막1:4).
그런데 유의할 점은 마냥 자신의 죄만을 붙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하수구에 물을 버리되 피와 함께 버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버려지는 피일지라도 역시 고귀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버렸다는 것보다는 보혈의 또 다른 작용을 교훈함이라고 이해해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되 내 죄를 담당하신 보혈의 공로를 믿으면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양심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70년마다 그 도랑을 청소했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여기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회복의 때를 연상시킵니다. 즉 죄 고백이 필요없는 때가 올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때는 구원이 완성된 천국과 재림에서의 회복의 때입니다. 그 때는 죄를 애통하거나 고백할 필요가 없는 영원세계의 때입니다. 그러나 이 청소함의 예표는 꼭 미래의 지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상에 사는 한 반드시 자범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역설함입니다. 즉 지상에 사는 성도는 성숙한 신앙인일지라도 때로는 자범죄를 범하게 됩니다. 고의성이 없을지라도 죄악의 때가 묻어 심령이 악해지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 그 심령을 내어놓고 회개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회개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보혈주의자를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42번은 바다입니다.
바다에 대한 기록은 대하4:2-6과 왕상7:23-26, 44절, 대상18:8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한 곳만 소개하면 대하4:2-6에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고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며 소 형상이 있는데 매 규빗에 소가 열씩 있어서 바다 주위에 둘렸으니 그 소는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줄로 부어 만들었으며 그 바다를 열두 소가 받쳤으니 셋은 북을 향하였고, 셋은 서를 향하였고, 셋은 남을 향하였고, 셋은 동을 향하였으며 바다를 그 위에 놓았고 소의 뒤는 다 안으로 두었으며 바다의 두께는 한 손넓이만 하고 그 가는 백합화의 식양으로 잔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삼천 밧을 담겠으며 또 물두멍 열을 만들어 다섯은 우편에 두고 다섯은 좌편에 두어 씻게 하였으며 그 바다는 제사장들의 씻기를 위한 것이더라” 했습니다.
놋바다는 놋으로 만든 큰 물두멍으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다라고 했습니다. 이 바다는 제물을 씻었던 물두멍과는 달리 제사장들이 자기를 씻기 위한 것입니다. 놋바다의 재료는 놋입니다. 그 동안 배운대로 뜰의 모든 기구들이 다 놋이었는데 놋은 심판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뜰은 죄를 처리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죄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거니와 그 곳에서 봉사는 더욱 불가능합니다.
이 시간에는 놋바다가 보여주는 영성적 원리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 마디로 놋바다는 하나님 보좌 앞의 유리바다의 모형으로 성도를 세속과 죄악의 오염에서 씻으사 온전케 하심의 은혜를 교훈합니다. 먼저 성막의 물두멍과 성전의 바다의 재료에 담긴 의미입니다. 출38:8 보면 성막의 물두멍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했습니다. 거울은 말씀의 예표입니다. 이것은 깨닫게 하사 온전하고 아름답게 단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예표합니다. 더구나 부정을 용납지 않는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이니 얼마나 자기를 깨끗이 단장했겠습니까? 영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 놋바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바다는 대상18:8을 보면 아람의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은 심히 많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람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연단의 장소입니다. 즉 야곱도 거기서 연단을 받았고, 사사시대의 이스라엘도 이 곳의 구산 리사다임에게서 연단을 받았고, 남쪽 유다도 바로 이 곳 바벨론에서 연단을 받았고, 이스라엘도 이와 비슷한 앗수르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다의 담긴 물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물로서 우리를 씻으시되 연단이 그 씻음의 원동력이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불가항력 앞에 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다의 크기는 높이가 5규빗에 지름이 10규빗이었습니다. 5는 고통의 수요, 10은 율법의 충족수로서 온전한 구비 등을 뜻합니다. 이는 고난을 통한 온전함을 보여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려면 연단과 함께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또 놋바다의 모양은 둥근 큰 대야와 같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바다는 넓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사랑은 넓습니다. 또 바다의 둘레가 “30규빗 줄로 두를만하며”(왕상23) 했습니다. 여기 두를만하다는 것은 대략적인 표현입니다. 30은 성숙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요셉도 다윗도 제사장들도 30세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만큼 성숙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또 바다의 두께는 손 넓이만큼 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두꺼운 두께인데 손바닥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우리에게 반드시 영성을 입히사 온전케 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또 놋바다는 네 마리씩 동서남북으로 열 두마리의 놋소가 받들고 있었습니다. 12는 선택수요 소는 겸손과 충성의 상징입니다. 즉 겸손과 다방면의 충성스런 육체의 영성이 없이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은 불가능하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늘 엎디어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또 놋바다의 가장자리에는 백합꽃과 두 줄의 300개의 박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백합화는 주님 사랑이요(악2:16) 박은 이웃 사랑으로(욘4:6. 10) 영성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1규빗에 10개씩 둘레가 30규빗이니까 300개인데 300은 하나님의 완성의 수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암시합니다.
또 놋바다의 위치는 전 우편이었습니다(왕상7:39). 이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하시는 대제사장 예수님이 계십니다(요일2:1). 그래서 우리가 온전케 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또 놋바다의 물의 양은 2000바트 혹은 3000바트였습니다. 그런데 왕상7:26절에는 바다의 물이 2,000바트, 대하4:5에서는 3,000바트라고 했습니다. 왜 같은 바다인데 서로 다른가? 그것은 용량은 3000바트인데 보통 2,000바트를 넣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2,000은 성소의 용적수와 같고 3,000은 지성소까지 합한 용적수입니다. 이는 사역의 양면성으로 제사장적인 입장에서 기도와 선지자적인 입장에서 말씀을 통해서 온전케 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물로 놋바다를 가득히 채워야 하겠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다 같이 하나님께로 가는 약도입니다. 먼저 번제단에 피를 드린 뒤에 물로 나아가듯 회개한 마음은 말씀충만과 성령충만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도 성숙치 못하여 죄에 머무름은 놋바다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제사장들은 제사하기 전에 손발을 씻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씻지 않으면 안됩니다. 천국에는 유리바다가 있습니다(계4:6). 이 곳을 통과해야 지성소인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다에 담긴 물은 다음날 쓰는 일이 없이 언제나 신선한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벤 카틴은 바다를 들어 내려서 물을 쏟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아침은 바다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로 시작되며 이 소리는 멀리 여리고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하16:13, 17을 보면 놋바다가 변형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아하스왕이 놋바다를 놋소에서 내려다가 돌 판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또 왕하25:13-16에 느브갓네살왕도 놋바다를 깨뜨려서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성화적인 노력을 포기하거나 타락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43번은 12계단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12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계단의 높이는 모두 반규빗이므로 모두 3m입니다. 그러나 계단의 깊이는 1규빗씩인데 3계단을 한 단위로 3계단마다 넓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1.1.3, 1.1.3, 1.1.3, 1.1.4 등의 4조입니다. 이렇게 성전은 안과 밖으로 계단이 많으며 질서정연합니다. 그 만큼 성전은 높고 거룩하며 단계적입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수제자의 구룹이 3명인 것과 처음 것은 마지막과 같다는 영의 공식이 적용될 수 있다면 아마도 4그룹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제자의 그룹과 일반 제자들의 그룹과는 차이를 두시고 교육시키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제자들 간에도 수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식간에 영적 수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충분히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그 앞에 당당히 나아가라는 교훈은 그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감히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전의 12계단은 제자로서의 준비적인 삶을 예표합니다. 그헐다면 이왕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충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성전뜰에서 본성전 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12계단을 거쳐야 합니다. 이처럼 육신에 속한 갈릴리 어부들이 오순절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제자가 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훈련을 거쳤습니다. 그 준비적인 내용은 다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먼저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적들이 이 방향을 위해서 제공되었습니다. 이적을 본 제자들은 “저가 뉘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의문을 품다가 결국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했습니다. 다음은 믿음의 훈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삶속에 철저히 적용토록 하셨습니다. 사실 이 일이 얼마나 어렵고 많은 시행착오가 따릅니까? 그래서 초기에 제자들이 책망을 받았다 하면 거의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비로소 말씀하시고 자기를 버리는 훈련이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아버지의 뜻에 기거동작 살고 죽는 모본을 통하여 이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즉 나를 십자가에 내어놓는 자아처리 부분입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시고 기도하시는 삶을 통하여 영적인 능력을 위한 생활의 틀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이 상의 네 가지는 시작 시기에는 약간의 서열이 있긴 하나 모두 공생애 전반에 걸쳐 복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이러한 말씀과 훈련의 단계를 거쳐 준비되어지므로 오순절이라는 신령한 성전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육에는 성령의 능력과 아버지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즉 12계단이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참된 신앙을 배우고 훈련받아야 성전의 삶이 가능함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3계단씩 이 한 조로 되어 있음은 이 모든 영성과정을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조로 되어 있음은 이 영성을 여러 방향에서 훈련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혼의 영성, 육체의 영성, 물질의 영성, 대인의 영성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혼의 영성이란 복음적인 확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중생과 성화의 과정이라면, 육체의 영성이란 육체에 은사를 입혀주시므로 육체가 불의의 병기가 아니라 의의 병기로 영혼을 따라 하나님을 섬김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되는 것이요. 물질의 영성이란 모든 소유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가 공급하시고 책임지시며 또한 아버지의 뜻대로 쓰여지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심을 믿고 그 뜻을 묻고 순종하는 청지기로 사는 것이며, 대인의 영성이란 모든 사람들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전의 기둥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 기둥들이 잘 세워질 때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없이도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훈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온전히 믿음에 의존하도록 바다 위를 걷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임재의식은 성령으로 부어지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었을 때는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언제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왕이 한 두 번 찾아 올까 말까한 먼 서열의 비빈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제일 가는 왕비 술람미입니다. 그러므로 임재의 무의식을 정상으로 알고 체념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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