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설계도 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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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장 19-20절
주요 요점
여기 지성소의 문은 주를 사랑하고 죄를 이기고 거룩케 된 자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입구사무실은 믿음으로 준비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작은사무실 즉 제사장다락은 신앙이란 안식과 예비된 복락을 누리는 것임을, 경사로는 자만해서는 실족함을, 바깥뜰은 하나님을 높이며 타인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물받이는 시험을 이기는 삶을 보여준다.
48번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극히 거룩한 곳입니다. 이 시간에는 휘장 역할을 하는 지성소의 벽과 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그 안에 있는 법궤 곳간 크기 등은 따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휘장을 대신한 지성소의 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상6:16에 “또 전 뒤편에서부터 이십 규빗 되는 곳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전의 내소 곧 지성소를 만들었으며” 했습니다. 최초 성막에서의 지성소의 벽은 휘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보듯 성전에서는 백향목이 그 휘장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백향목이 철거되고 다시 휘장이 쳐지게 됩니다. 이렇게 휘장의 재질이 두 가지로 나타난 것은 휘장의 여러 의미를 나타내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백향목 휘장은 그리스도의 인성 즉 육체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네 가지 색깔의 베 휘장은 이 구분을 철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여러 속성과 아울러 그 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이 철폐됨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어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지성소에는 7월 10일 대속죄일 일년 일차에 한하여 대제사장만이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육체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27:50-51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했고,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그럼 우리의 신령한 성전에서 여기 갈라진 휘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곧 내 자아의 죽음을 뜻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께서 영혼만이 아니라 마음과 육체까지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지배하십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과 삶에 나타납니다. 성전의 주재이시요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자아란 내가 하나님 자리에서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출현은 하나님과의 원수요 따라서 막힘의 휘장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음에 지성소의 문을 말씀드립니다. 지성소의 문은 감람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성소의 문을 잣나무로 만든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는 다시 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기름부음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문인방과 문설주는 역시 감람목이었는데 이는 감람목 문설주와 인방이 문을 지탱하듯 그리스도께서 구원사역의 집행을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지성소문의 폭은 성전벽의 5분의 1이었습니다. 5는 고통의 수입니다. 10은 환난과 연단의 수인데 5는 그 중심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양손 양발 옆구리 등 5곳에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이 문이 열릴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벽의 4분의 1인 성소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성소의 문도 성소문처럼 2 짝씩 4짝으로 되어 젖혀서 열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언젠가 휘장이 갈라질 것을 예상한 것이며 4짝은 4수로서 세상의 택한 백성들이 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을 암시합니다.
지성소문의 무늬는 성소의 문처럼 핀 꽃과 종려나무와 그룹을 아로새겼습니다. 즉 주를 사랑하며 이긴 자여야 하고 거룩함을 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을 열 자는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감람목문은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이는 완전한 신인성을 동시에 취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이 문의 돌쩌귀는 역시 금이었습니다(왕상7:50). 이는 성령의 은혜로 만이 구원의 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엡2:8). 또 금못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영적인 못입니다(사22:22-25). 그리고 지성소 앞에는 금사슬을 건너질렀습니다(왕상6:21). 이 부분을 사람에 비유하면 목에 해당한 곳으로 마치 목걸이를 연상시킵니다. 성경에서 대개 금사슬은 진리를 상징했습니다(잠1:8-9). 왜냐하면 목걸이는 여러 개의 고리가 연결된 것처럼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한 진리로 꿰뚫어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지성소에는 진리의 법궤가 있습니다. 즉 모든 진리는 결국 이 지성소의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감이 그 목적입니다.
49번은 입구사무실입니다.
이 사무실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현관의 좌우 공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사무실의 주요한 임무는 성전 출입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나눈다면 성전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눕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성전 구분법으로 성도들의 영적인 수준을 구분합니다(계11:1-2). 그러므로 성전뜰의 수준에 있는 성도가 준비되지 않고서는 성소의 수준을 알 수 없고 성소의 수준에서 지성소적인 영적 사람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입구사무실은 준비되지 않고서는 건너뛸 수 없과 철저한 신앙훈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천성 밖은 신앙을 준비하는 곳으로 나타나 있는데(계22:14) 이것의 모형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입구사무실은 마치 천성의 문을 천사들이 지키고 있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출입의 통제는 약 세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는 성전담입니다. 이방인들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다음은 성전 입구사무실입니다. 해당된 제사장 외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앞입니다. 거기에는 금사슬줄이 문을 가로 막고 그룹이 지키고 있으므로 일년 일차 해당된 한 명의 대제사장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이 출입통제선은 철폐되고 이제 믿음만 가지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믿음으로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보좌 앞의 일곱 영이신 성령께서는 죄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예수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변화시키셔서 보좌 앞까지 인도하시는 임무를 지금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착실히 신앙훈련을 받아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50번은 작은 사무실입니다.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하층 다락의 광은 다섯 규빗이요, 중층 다락의 광은 여섯 규빗이요, 제 삼층 다락의 광은 일곱 규빗이라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으며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나사모양 사닥다리로 말미암아 하층에서 중층에 오르고 중층에서 제 삼층에 오르게 하였더라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왕상6:5-10)
이 제사장의 다락은 제사장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이 방은 2만 4천명의 제사장들 중에 제비 뽑혀 성전에서 봉사하던 복 받은 제사장들의 처소였습니다. 여기 24,000명은 교회수 12와 충만수 1,000 곱하기 2이니까 이는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예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제사장 이야기가 아니라 만인 제사장인 우리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방의 기원은 엘리사 시대에 있었습니다. 왕하 4장을 보면 수넴 여인이 그 곳을 지나가는 엘리사를 위하여 자기 남편과 상의하여 담 위에 방을 짓고 유하게 합니다. 이 성전 안에 크고 작은 약 90개의 방이 있는데 이 많은 휴식 공간은 요14:2에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국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쉬는 곳입니다. 그래서 계15:13에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했습니다. 시23편에도 여호와는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영혼이 진정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쉼을 얻을수록 그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혹시 안식도 모르면서 나 신앙생활 이상 없다 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이 다락은 배불리 먹는 만족의 장소였습니다. 겔42:13에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드려지는 온갖 제사에서 제사장에게 돌려질 소제의 떡이나 짐승의 여러 부분이나 양식들이 다 이 곳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진설된 진설병도 역시 제사장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은 먹고 마시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도 먹는 재미로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계22:2에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의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했고,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를 하실 때 잔치의 비유가 많았습니다. 먹고 먹고 또 먹되 예수떡도 먹고 성령물도 마십니다. 천국은 잔치의 장소입니다.
이 다락은 각종 보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대상28:14-19을 보면 은등대도 있고 은상도 있고 각종 대접과 잔들도 있고 기타 여러 가지의 기물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다 제사장들의 다락에 놓고 쓰는 기구들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그 곳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했던 것처럼 이 다락에는 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각종 가구들이 방마다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은 길바닥도 금이요 집도 기구도 온갖 보석으로 되어 있는 천국을 상징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곳이 빈곤해서는 이스라엘에 복이 없을 것이다 하셨습니다(말3:10). 이 제사장 다락의 보물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경건되이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감추어 놓으신 하늘의 귀한 은사들을 풍성히 부어 주심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사장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이 다락은 3층으로 각 층마다 30개의 방이었습니다. 겔41:6-7에 “골방은 삼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삼십이라 그 삼면 골방이 전 벽 밖으로 그 벽에 의지하였고 전 벽 속은 범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두루 있는 골방이 그 층이 높아갈수록 넓으므로 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갈수록 전에 가까와졌으나 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랫층에서 중층으로 윗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 했습니다. 교회에도 이와 같은 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시공부를 위해 절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그네의 쉼터가 있어야 합니다. 각 층당 30개의 방은 제사장이 사역을 시작하는 나이를 상징합니다. 즉 성도들이 제사장의 사역을 시작해야 이 풍성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제사장 사역이란 늘 예배하고 남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바로 만인제사장들의 사역입니다. 만인제사장이라니까 강단을 쳐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람들입니다. 또 3층이었는데 이는 삼층천인 천국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삼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이 다락은 크고 조용하고 보물도 많고 좋았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 수준도 올라갈수록 더욱 평안하고 고요하며 주시는 복은 더욱 크고 귀하고 넓습니다. 그럼 올라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겔41:7을 보면 높아 갈수록 성전에 가까웠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하층은 먹이나 부정한 짐승들과 정한 짐승들이었으나 맨 위층은 의인 노아와 여덟식구들이 기거하는 장소였듯 신앙생활이란 올라가면 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에도 나와 있는대로 1층에서 3층을 올라가는데는 나사 모양의 층계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각 층을 거쳐야 상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단계를 암시합니다. 마치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처럼 이것은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왕상6:8에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올라 가면 전 오른편이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승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방의 넓이는 상층일수록 한 규빗씩 넓어집니다. 즉 1층은 5규빗으로 5는 고통의 수로 은혜를 위해 고난도 많은 단계입니다. 2층은 더 넓은 6규빗인데 6은 사람의 수요 사역의 수로 안식도 누리지만 아직도 인간의 수고와 염려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3층은 그 보다 더 넓은 7규빗으로 7은 완성과 안식의 수로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안식하는 상태입니다. 이 신앙은 하늘이 무너져도 주님을 믿고 안식하며 감사하는 단계요 신앙의 최고봉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안식의 단계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제사장 다락은 문이 하나였습니다. 왕상6:8에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했습니다. 이 문이 하나임은 말할 것도 없이 오직 예수를 의미합니다. 요10:9에 “내가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 외에 다른 안식의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문이 하나라는 것은 신앙의 단계란 건너 뛰는 것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또 제사장 다락은 백향목 들보를 사용하였습니다. 왕상6:10에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 여기 백향목 들보란 문자적으로는 들보의 견고성이요, 영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겔41:6을 보면 전의 벽을 홈 파지 않고 벽의 돌을 빼어 거기에 걸쳐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좀 높은데 걸터 앉았다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섰다 자만하면 떨어진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3층에서 떨어진 유두고처럼 3층에서는 청년이라 했는데 1층에서는 아이라고 했습니다(행20:9).
또 제사장 다락에는 은등대를 켰습니다. 대상28:15에 은등대가 있습니다. 금등대는 성소의 등대지만 은등대는 제사장 다락의 등대였습니다. 금등대는 성령이요 은등대는 구속받은 거룩한 빛입니다. 이 빛이 밝을수록 회개가 터집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생명은 성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사장 역할을 하다가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회개하기 전에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또 이 곳에서는 은떡상에서 떡을 먹었습니다. 대상28:16에 은상이 나옵니다. 은 떡상의 떡은 구속 진리의 성경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받아야 밖으로 추방되지 않습니다. 또 제사장의 다락은 제사장 전용실입니다. 아무나 들어 올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달랴가 왕의 씨를 말리려 할 때 갓난 핏덩이 요아스를 그의 누이 여호세바가 이 방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6대 왕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가 없는 동안에 성전재건을 방해하고 유대인들과 내통하며 모의하던 도비야가 골방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의 특혜로 그 곳의 여호와께 드리는 귀한 물품들을 다 팽개치고 이 곳에 몰래 기생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 느헤미야는 도비야를 내어 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들여 놓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도비야를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도비야는 죄와 게으름과 인간의 생각과 악한 영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곳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65: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축복은 제사장의 직무를 충실히 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안식의 그리스도 안의 특급호텔에서 주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51번은 경사로입니다.
경사로는 성소와 지성소의 측면의 제사장 다락과 바깥벽 사이에 경사로가 있었습니다. 하층의 첫방 입구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천장까지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도 장애인을 위해 이런 경사로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 경사로의 용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영적인 교훈은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수준에 올라갔다고 자만하면 미끌어진다는 교훈입니다.
앞에서 3층에서 루에서 떨어진 유두고 이야기가 있었는데 성경은 기록하기를 3층에서는 그를 청년이라 했는데 1층에서는 아이라고 했습니다(행20:9-12). 교훈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청년은 세상을 감화시키는 성령충만한 영에 속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이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나인성을 감동시킨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죽으면 적당히 묻어야 할 나이도 배경도 아비도 형제도 없는 과부의 아들의 장례식에 온 성민이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를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청년의 감동적인 기질은 성령충만한 기질의 좋은 비유입니다. 그런 영적 최고봉의 유두고가 3층에서 졸다가 1층으로 떨어졌습니다. 1층에서는 아이라고 부르는데 아이는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고전3:1-3). 그러므로 신앙생활에도 경사로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2번은 바깥뜰입니다.
이 바깥뜰은 이스라엘의 뜰 혹은 큰 뜰이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대하4:9, 겔40:17). 성전뜰에는 안뜰과 바깥들이 있었는데 안뜰은 앞서 배운 번제단 놋바다 등이 있는 제사장의 뜰로서 보통 때는 제사장 외의 백성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깥뜰은 백성들이 들어와 경배와 찬양을 돌리는 곳입니다. 겔46:9에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지며” 한 대로 백성들은 찬양하기 위해 남문 혹은 북문에서 들어오는데 그러나 뒤로 돌이키지 못하고 반드시 성전 뒤 서편을 돌아 다른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바깥뜰의 핵심은 감사와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 들어온 성도에게는 규칙이 있는데 북문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남문으로 나가야 하고 남문으로 둘어온 사람들은 북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때 서로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는 성도의 교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과의 교제가 아닌 모두와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쁜 얼굴을 보고 서로가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곳은 오직 전진만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겔46:9에 “들어 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며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찌며”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순탄하든 역경이든 하나님을 믿고 찬송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감사와 찬송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줄을 지어 나아가는데 그냥 나아가지 않고 성전뜰을 둘러싸고 있는 돌 세 켜와 백향목 판자로 쌓은 낮은 대를 손으로 만지며 찬송을 하며 나아갑니다. 이 대를 전에 메시야 라인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야 라인을 만지면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상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에 대한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메시야가 이미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약의 성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몸으로 체득하면서 믿고 찬송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 피와 살을 경험하는 성찬예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신 복음을 믿지 못한다면 안됩니다.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하셨음을 믿고 그 믿음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찬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찬송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우리는 형식만 따르지 말고 정말 찬양해야 합니다.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을 찬양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제 메시야 라인을 만지면서 찬송하십시오.
그래서 골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고 골1:22-23에서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을 생각하며 우리 심령성전의 바깥뜰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53번은 물받이입니다.
물받이는 남쪽 벽과 남쪽 사무실 사이에 있습니다. 성전의 지붕에 내린 비가 이 곳에 모여져서 밑으로 흘렀습니다. 만약 물받이가 없으면 성전 안은 온통 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의 비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단의 시험과 유혹과 저주 등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에의 비는 가장 추운 겨울에 우기라하여 80%가 내립니다. 그래서 겨울비를 흠뻑 맞게 되면 심한 감기에 걸리기 때문에 겨울에는 출입이 제한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겨울도 지났다고 하면서 밖으로 유도하는 것을 보아 이스라엘의 겨울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받이가 있다는 것은 비를 잘 처리 혹은 사태를 예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성전에서 죄악의 물이 심령에 스며들면 큰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방수공사를 잘해야 합니다. 물이란 좋은 의미로는 말씀과 성령의 상징이지만 나쁜 의미로는 세속적인 사상과 생각을 가리킵니다(사1:22, 마12:43). 시험은 맨 먼저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침투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의 빗물입니다. 어떤 때는 염려나 근심이나 분노 등의 생각의 불화살이 날라옵니다. 이 때는 믿음의 방패로 맏아야지 받아들이게 되면 심령이 온통 타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마음을 말씀과 은혜로 잘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심령성전이 순식간에 대 혼란에 빠집니다.
혹은 물은 나쁜 의미에서는 저주의 상징이요(시109:18), 고생의 상징이요(왕상22:27, 사30:22), 위기의 상징이요(시40:2), 잘못된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잠9:17). 비는 위에서 쏟아지듯이 성도를 파괴하려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역사입니다(엡6:12). 이 시험을 이기려면 항상 열심히 깨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깨여 근신함이 부족할 때 마귀는 먹이를 찾는 사자와 같이 소리 없이 접근하다가 적절한 기회를 통해 넘어뜨립니다. 기도가 부족하여 오는 시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시험의 빗물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장막으로 덮어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입니다(고후12:7).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렇게 설계도면에 나타난 성전의 구조 설명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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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장 19-20절
주요 요점
여기 지성소의 문은 주를 사랑하고 죄를 이기고 거룩케 된 자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입구사무실은 믿음으로 준비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작은사무실 즉 제사장다락은 신앙이란 안식과 예비된 복락을 누리는 것임을, 경사로는 자만해서는 실족함을, 바깥뜰은 하나님을 높이며 타인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물받이는 시험을 이기는 삶을 보여준다.
48번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극히 거룩한 곳입니다. 이 시간에는 휘장 역할을 하는 지성소의 벽과 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그 안에 있는 법궤 곳간 크기 등은 따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휘장을 대신한 지성소의 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상6:16에 “또 전 뒤편에서부터 이십 규빗 되는 곳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전의 내소 곧 지성소를 만들었으며” 했습니다. 최초 성막에서의 지성소의 벽은 휘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보듯 성전에서는 백향목이 그 휘장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백향목이 철거되고 다시 휘장이 쳐지게 됩니다. 이렇게 휘장의 재질이 두 가지로 나타난 것은 휘장의 여러 의미를 나타내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백향목 휘장은 그리스도의 인성 즉 육체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네 가지 색깔의 베 휘장은 이 구분을 철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여러 속성과 아울러 그 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이 철폐됨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어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지성소에는 7월 10일 대속죄일 일년 일차에 한하여 대제사장만이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육체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27:50-51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했고,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그럼 우리의 신령한 성전에서 여기 갈라진 휘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곧 내 자아의 죽음을 뜻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께서 영혼만이 아니라 마음과 육체까지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지배하십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과 삶에 나타납니다. 성전의 주재이시요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자아란 내가 하나님 자리에서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출현은 하나님과의 원수요 따라서 막힘의 휘장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음에 지성소의 문을 말씀드립니다. 지성소의 문은 감람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성소의 문을 잣나무로 만든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는 다시 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기름부음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문인방과 문설주는 역시 감람목이었는데 이는 감람목 문설주와 인방이 문을 지탱하듯 그리스도께서 구원사역의 집행을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지성소문의 폭은 성전벽의 5분의 1이었습니다. 5는 고통의 수입니다. 10은 환난과 연단의 수인데 5는 그 중심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양손 양발 옆구리 등 5곳에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이 문이 열릴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벽의 4분의 1인 성소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성소의 문도 성소문처럼 2 짝씩 4짝으로 되어 젖혀서 열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언젠가 휘장이 갈라질 것을 예상한 것이며 4짝은 4수로서 세상의 택한 백성들이 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을 암시합니다.
지성소문의 무늬는 성소의 문처럼 핀 꽃과 종려나무와 그룹을 아로새겼습니다. 즉 주를 사랑하며 이긴 자여야 하고 거룩함을 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을 열 자는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감람목문은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이는 완전한 신인성을 동시에 취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이 문의 돌쩌귀는 역시 금이었습니다(왕상7:50). 이는 성령의 은혜로 만이 구원의 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엡2:8). 또 금못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영적인 못입니다(사22:22-25). 그리고 지성소 앞에는 금사슬을 건너질렀습니다(왕상6:21). 이 부분을 사람에 비유하면 목에 해당한 곳으로 마치 목걸이를 연상시킵니다. 성경에서 대개 금사슬은 진리를 상징했습니다(잠1:8-9). 왜냐하면 목걸이는 여러 개의 고리가 연결된 것처럼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한 진리로 꿰뚫어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지성소에는 진리의 법궤가 있습니다. 즉 모든 진리는 결국 이 지성소의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감이 그 목적입니다.
49번은 입구사무실입니다.
이 사무실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현관의 좌우 공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사무실의 주요한 임무는 성전 출입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나눈다면 성전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눕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성전 구분법으로 성도들의 영적인 수준을 구분합니다(계11:1-2). 그러므로 성전뜰의 수준에 있는 성도가 준비되지 않고서는 성소의 수준을 알 수 없고 성소의 수준에서 지성소적인 영적 사람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입구사무실은 준비되지 않고서는 건너뛸 수 없과 철저한 신앙훈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천성 밖은 신앙을 준비하는 곳으로 나타나 있는데(계22:14) 이것의 모형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입구사무실은 마치 천성의 문을 천사들이 지키고 있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출입의 통제는 약 세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는 성전담입니다. 이방인들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다음은 성전 입구사무실입니다. 해당된 제사장 외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앞입니다. 거기에는 금사슬줄이 문을 가로 막고 그룹이 지키고 있으므로 일년 일차 해당된 한 명의 대제사장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이 출입통제선은 철폐되고 이제 믿음만 가지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믿음으로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보좌 앞의 일곱 영이신 성령께서는 죄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예수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변화시키셔서 보좌 앞까지 인도하시는 임무를 지금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착실히 신앙훈련을 받아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50번은 작은 사무실입니다.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하층 다락의 광은 다섯 규빗이요, 중층 다락의 광은 여섯 규빗이요, 제 삼층 다락의 광은 일곱 규빗이라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으며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나사모양 사닥다리로 말미암아 하층에서 중층에 오르고 중층에서 제 삼층에 오르게 하였더라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왕상6:5-10)
이 제사장의 다락은 제사장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이 방은 2만 4천명의 제사장들 중에 제비 뽑혀 성전에서 봉사하던 복 받은 제사장들의 처소였습니다. 여기 24,000명은 교회수 12와 충만수 1,000 곱하기 2이니까 이는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예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제사장 이야기가 아니라 만인 제사장인 우리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방의 기원은 엘리사 시대에 있었습니다. 왕하 4장을 보면 수넴 여인이 그 곳을 지나가는 엘리사를 위하여 자기 남편과 상의하여 담 위에 방을 짓고 유하게 합니다. 이 성전 안에 크고 작은 약 90개의 방이 있는데 이 많은 휴식 공간은 요14:2에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국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쉬는 곳입니다. 그래서 계15:13에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했습니다. 시23편에도 여호와는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영혼이 진정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쉼을 얻을수록 그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혹시 안식도 모르면서 나 신앙생활 이상 없다 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이 다락은 배불리 먹는 만족의 장소였습니다. 겔42:13에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드려지는 온갖 제사에서 제사장에게 돌려질 소제의 떡이나 짐승의 여러 부분이나 양식들이 다 이 곳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진설된 진설병도 역시 제사장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은 먹고 마시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도 먹는 재미로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계22:2에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의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했고,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를 하실 때 잔치의 비유가 많았습니다. 먹고 먹고 또 먹되 예수떡도 먹고 성령물도 마십니다. 천국은 잔치의 장소입니다.
이 다락은 각종 보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대상28:14-19을 보면 은등대도 있고 은상도 있고 각종 대접과 잔들도 있고 기타 여러 가지의 기물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다 제사장들의 다락에 놓고 쓰는 기구들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그 곳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했던 것처럼 이 다락에는 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각종 가구들이 방마다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은 길바닥도 금이요 집도 기구도 온갖 보석으로 되어 있는 천국을 상징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곳이 빈곤해서는 이스라엘에 복이 없을 것이다 하셨습니다(말3:10). 이 제사장 다락의 보물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경건되이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감추어 놓으신 하늘의 귀한 은사들을 풍성히 부어 주심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사장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이 다락은 3층으로 각 층마다 30개의 방이었습니다. 겔41:6-7에 “골방은 삼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삼십이라 그 삼면 골방이 전 벽 밖으로 그 벽에 의지하였고 전 벽 속은 범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두루 있는 골방이 그 층이 높아갈수록 넓으므로 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갈수록 전에 가까와졌으나 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랫층에서 중층으로 윗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 했습니다. 교회에도 이와 같은 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시공부를 위해 절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그네의 쉼터가 있어야 합니다. 각 층당 30개의 방은 제사장이 사역을 시작하는 나이를 상징합니다. 즉 성도들이 제사장의 사역을 시작해야 이 풍성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제사장 사역이란 늘 예배하고 남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바로 만인제사장들의 사역입니다. 만인제사장이라니까 강단을 쳐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람들입니다. 또 3층이었는데 이는 삼층천인 천국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삼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이 다락은 크고 조용하고 보물도 많고 좋았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 수준도 올라갈수록 더욱 평안하고 고요하며 주시는 복은 더욱 크고 귀하고 넓습니다. 그럼 올라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겔41:7을 보면 높아 갈수록 성전에 가까웠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하층은 먹이나 부정한 짐승들과 정한 짐승들이었으나 맨 위층은 의인 노아와 여덟식구들이 기거하는 장소였듯 신앙생활이란 올라가면 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에도 나와 있는대로 1층에서 3층을 올라가는데는 나사 모양의 층계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각 층을 거쳐야 상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단계를 암시합니다. 마치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처럼 이것은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왕상6:8에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올라 가면 전 오른편이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승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방의 넓이는 상층일수록 한 규빗씩 넓어집니다. 즉 1층은 5규빗으로 5는 고통의 수로 은혜를 위해 고난도 많은 단계입니다. 2층은 더 넓은 6규빗인데 6은 사람의 수요 사역의 수로 안식도 누리지만 아직도 인간의 수고와 염려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3층은 그 보다 더 넓은 7규빗으로 7은 완성과 안식의 수로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안식하는 상태입니다. 이 신앙은 하늘이 무너져도 주님을 믿고 안식하며 감사하는 단계요 신앙의 최고봉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안식의 단계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제사장 다락은 문이 하나였습니다. 왕상6:8에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했습니다. 이 문이 하나임은 말할 것도 없이 오직 예수를 의미합니다. 요10:9에 “내가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 외에 다른 안식의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문이 하나라는 것은 신앙의 단계란 건너 뛰는 것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또 제사장 다락은 백향목 들보를 사용하였습니다. 왕상6:10에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 여기 백향목 들보란 문자적으로는 들보의 견고성이요, 영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겔41:6을 보면 전의 벽을 홈 파지 않고 벽의 돌을 빼어 거기에 걸쳐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좀 높은데 걸터 앉았다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섰다 자만하면 떨어진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3층에서 떨어진 유두고처럼 3층에서는 청년이라 했는데 1층에서는 아이라고 했습니다(행20:9).
또 제사장 다락에는 은등대를 켰습니다. 대상28:15에 은등대가 있습니다. 금등대는 성소의 등대지만 은등대는 제사장 다락의 등대였습니다. 금등대는 성령이요 은등대는 구속받은 거룩한 빛입니다. 이 빛이 밝을수록 회개가 터집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생명은 성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사장 역할을 하다가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회개하기 전에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또 이 곳에서는 은떡상에서 떡을 먹었습니다. 대상28:16에 은상이 나옵니다. 은 떡상의 떡은 구속 진리의 성경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받아야 밖으로 추방되지 않습니다. 또 제사장의 다락은 제사장 전용실입니다. 아무나 들어 올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달랴가 왕의 씨를 말리려 할 때 갓난 핏덩이 요아스를 그의 누이 여호세바가 이 방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6대 왕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가 없는 동안에 성전재건을 방해하고 유대인들과 내통하며 모의하던 도비야가 골방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의 특혜로 그 곳의 여호와께 드리는 귀한 물품들을 다 팽개치고 이 곳에 몰래 기생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 느헤미야는 도비야를 내어 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들여 놓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도비야를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도비야는 죄와 게으름과 인간의 생각과 악한 영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곳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65: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축복은 제사장의 직무를 충실히 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안식의 그리스도 안의 특급호텔에서 주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51번은 경사로입니다.
경사로는 성소와 지성소의 측면의 제사장 다락과 바깥벽 사이에 경사로가 있었습니다. 하층의 첫방 입구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천장까지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도 장애인을 위해 이런 경사로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 경사로의 용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영적인 교훈은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수준에 올라갔다고 자만하면 미끌어진다는 교훈입니다.
앞에서 3층에서 루에서 떨어진 유두고 이야기가 있었는데 성경은 기록하기를 3층에서는 그를 청년이라 했는데 1층에서는 아이라고 했습니다(행20:9-12). 교훈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청년은 세상을 감화시키는 성령충만한 영에 속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이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나인성을 감동시킨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죽으면 적당히 묻어야 할 나이도 배경도 아비도 형제도 없는 과부의 아들의 장례식에 온 성민이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를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청년의 감동적인 기질은 성령충만한 기질의 좋은 비유입니다. 그런 영적 최고봉의 유두고가 3층에서 졸다가 1층으로 떨어졌습니다. 1층에서는 아이라고 부르는데 아이는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고전3:1-3). 그러므로 신앙생활에도 경사로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2번은 바깥뜰입니다.
이 바깥뜰은 이스라엘의 뜰 혹은 큰 뜰이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대하4:9, 겔40:17). 성전뜰에는 안뜰과 바깥들이 있었는데 안뜰은 앞서 배운 번제단 놋바다 등이 있는 제사장의 뜰로서 보통 때는 제사장 외의 백성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깥뜰은 백성들이 들어와 경배와 찬양을 돌리는 곳입니다. 겔46:9에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지며” 한 대로 백성들은 찬양하기 위해 남문 혹은 북문에서 들어오는데 그러나 뒤로 돌이키지 못하고 반드시 성전 뒤 서편을 돌아 다른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바깥뜰의 핵심은 감사와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 들어온 성도에게는 규칙이 있는데 북문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남문으로 나가야 하고 남문으로 둘어온 사람들은 북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때 서로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는 성도의 교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과의 교제가 아닌 모두와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쁜 얼굴을 보고 서로가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곳은 오직 전진만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겔46:9에 “들어 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며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찌며”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순탄하든 역경이든 하나님을 믿고 찬송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감사와 찬송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줄을 지어 나아가는데 그냥 나아가지 않고 성전뜰을 둘러싸고 있는 돌 세 켜와 백향목 판자로 쌓은 낮은 대를 손으로 만지며 찬송을 하며 나아갑니다. 이 대를 전에 메시야 라인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야 라인을 만지면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상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에 대한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메시야가 이미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약의 성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몸으로 체득하면서 믿고 찬송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 피와 살을 경험하는 성찬예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신 복음을 믿지 못한다면 안됩니다.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하셨음을 믿고 그 믿음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찬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찬송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우리는 형식만 따르지 말고 정말 찬양해야 합니다.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을 찬양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제 메시야 라인을 만지면서 찬송하십시오.
그래서 골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고 골1:22-23에서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을 생각하며 우리 심령성전의 바깥뜰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53번은 물받이입니다.
물받이는 남쪽 벽과 남쪽 사무실 사이에 있습니다. 성전의 지붕에 내린 비가 이 곳에 모여져서 밑으로 흘렀습니다. 만약 물받이가 없으면 성전 안은 온통 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의 비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단의 시험과 유혹과 저주 등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에의 비는 가장 추운 겨울에 우기라하여 80%가 내립니다. 그래서 겨울비를 흠뻑 맞게 되면 심한 감기에 걸리기 때문에 겨울에는 출입이 제한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겨울도 지났다고 하면서 밖으로 유도하는 것을 보아 이스라엘의 겨울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받이가 있다는 것은 비를 잘 처리 혹은 사태를 예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성전에서 죄악의 물이 심령에 스며들면 큰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방수공사를 잘해야 합니다. 물이란 좋은 의미로는 말씀과 성령의 상징이지만 나쁜 의미로는 세속적인 사상과 생각을 가리킵니다(사1:22, 마12:43). 시험은 맨 먼저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침투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의 빗물입니다. 어떤 때는 염려나 근심이나 분노 등의 생각의 불화살이 날라옵니다. 이 때는 믿음의 방패로 맏아야지 받아들이게 되면 심령이 온통 타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마음을 말씀과 은혜로 잘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심령성전이 순식간에 대 혼란에 빠집니다.
혹은 물은 나쁜 의미에서는 저주의 상징이요(시109:18), 고생의 상징이요(왕상22:27, 사30:22), 위기의 상징이요(시40:2), 잘못된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잠9:17). 비는 위에서 쏟아지듯이 성도를 파괴하려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역사입니다(엡6:12). 이 시험을 이기려면 항상 열심히 깨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깨여 근신함이 부족할 때 마귀는 먹이를 찾는 사자와 같이 소리 없이 접근하다가 적절한 기회를 통해 넘어뜨립니다. 기도가 부족하여 오는 시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시험의 빗물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장막으로 덮어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입니다(고후12:7).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렇게 설계도면에 나타난 성전의 구조 설명은 끝났습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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