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치수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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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장 1-7절
주요 요점
성전의 치수는 역사 속에 펼쳐진 구속사의 비밀임과, 또 성전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임이, 그리고 성전건축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준다.
오늘은 성전 치수와 성전의 터에 들어 있는 영적인 의미에 관해서 함께 생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전 치수의 의미입니다.
신기한 것은 성전은 그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하게 되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성전은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진리와 하나님 나라를 설계의 기본 이념으로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친히 성도의 생명과 복과 기쁨으로 영원히 내주하시고자 하시는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전의 원형인 저 새예루살렘성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이런 수치의 공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종 수효와 숫자와 치수에도 모두 귀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의 치수를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성막의 치수의 의미부터 말씀드리면 이 속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사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를 7,000년으로 봅니다. 즉 아담에서 모세까지를 2,500년, 모세부터 그리스도 초림까지를 1,500년, 그리스도 초림부터 그리스도부터 재림까지를 약 2,000년으로 보고, 나머지 1,000년을 천년왕국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7,000년의 구속사의 비밀이 신비하게 성막의 치수에서 나타납니다.
그럼, 성막의 치수를 살펴보면 성막에는 뜰의 울타리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는데 먼저, 뜰의 울타리가 총길이가 300규빗에 높이 5규빗으로 1,500제곱규빗입니다. 그러니까 1,500년입니다. 이것은 성막이 세워지던 모세시대에서 예수님 오시기까지 율법시대 1,500년을 보여줍니다. 또 성소는 길이 20규빗 광이 10규빗 높이 10규빗으로 그 넓이가 2,000제곱규빗입니다. 그래서 2,000년 이것은 예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교회시대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규빗으로 1,000인데 이것은 재림 이후에 이어질 1,000년 왕국의 예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모세까지 2,500년을 합하면 모두 7,000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구원의 역사가 마치 성막의 세마포와 휘장과 가죽이 펼펴지듯이 펼쳐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인정이 되는데 이 중에 한 가지 교회시대 2000년에 관한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을 꼭 연대기적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개념적인 의미 즉 충만한 완성적인 의미 등으로 이해하면 좋다고 이해됩니다. 추측이지만 이제 그 날이 이르렀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구원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혹은 우리의 일생이 다 끝나기 전에 꼭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한 번 문 닫히면 열어 주소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헛 일입니다. 또 구원의 진리는 날이 갈수록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뜰에서 받는 은혜와 성소에서 받는 은혜와 지성소에서 받는 은혜가 다름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맛도 구약보다는 신약이, 신약보다는 천년왕국이, 천년왕국보다 영원천국에서의 은혜가 더 풍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 각자의 신앙의 단계를 보여주는 척도도 됩니다(계11:1-2). 어떤 사람은 뜰에 있는데 이는 예수는 믿지만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소에 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을 죄는 씻었으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계11:1-2에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척량하지만 성전 밖 마당에 속한 사람은 마흔 두달 즉 3년 반 즉 환란에 버려 두신다는 내용을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육신은 아직 구원을 기다리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경험합니까? 성령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성령받고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 시대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령을 구하고 계십니까?
그럼, 성전의 치수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왕상6:2에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전은 장이 육십규빗이요 광이 이십규빗이요 고가 삼십규빗이며” 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성막보다 길이가 배나 크고 높이가 세 배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부대시설까지 하면 바닥 평수가 성막보다 50배, 성전 자체는 성막보다 12배가 됩니다. 성전 치수의 의미는 한 마디로 천국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설명한 성막이 구속사와 관계가 있었지만 성전은 구곳사와 아울러 천국론과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성전의 성소는 길이가 40, 넓이가 20, 높이가 30규빗으로 모두 24,000 입방규빗입니다. 24는 교회수요 하나님의 질서의 수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24수가 많습니다. 이처럼 성전은 천국의 상징이기에 모두가 24 숫자였습니다. 제사장도 24반열, 문지기도 24반열, 성가대도 24반열, 모두가 24반열 24,000명이었습니다. 대상27:1에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족장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유사들이 그 인수대로 반차가 나누이니 각 반열이 24,000명씩이라 일 년 동안 달마다 체번하여 들어가며 나왔으니” 했습니다. 또 하루가 24시간이듯 이와같이 천국도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영원한 아침입니다.
다음에,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0규빗씩의 정입방체입니다. 이와같이 천국의 새예루살렘성도 정사각입방체입니다. 계21:16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타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했습니다. 높이만 해도 성막은 20규빗인데 성전은 30규빗이라하여 3층천의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다 천국의 모형입니다.
또 성전의 바닥은 금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계21:21을보면 천국의 밑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은 바닥이 거친 모래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성전은 그 구원이 완성된 미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막은 그 자체의 의미가 예수님이시기에 아무도 예수님이 될 수 없음 같이 우리들은 성막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예수님과 아울러 우리도 성전입니다. 엡2:22에 분명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예수 안과 성령 안이라는 말씀을 주시해야 합니다. 즉 성전은 다윗의 준비와 솔로몬의 시공했던 작품임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적용케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성령이 임해야 예수 믿음도 생기고, 성령이 임해야 거룩도 생기고, 성령이 임해야 자아 죽일 믿음도 생기고, 성령이 임해야 육체도 순복시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수있습니다. 또 성령이 임해야 찬송과 담대와 확신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건축의 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하3:1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터는 다윗이 정했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성막과 성전의 터는 몇 번 거처가 바귀었습니다. 먼저는 이동하는 광야가 그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실로에, 엘리 제사장 이후에는 기브온으로, 그 후에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더 압축하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그 성전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군데의 모든 장소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광야는 아사셀 양되신 예수를, 실로는 법궤를 빼앗긴 곳이듯 잡히신 예수를,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하던 곳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다윗이 인구조사하여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재앙을 멈췄던 곳으로 우리의 속제 제물이 되사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 주신 예수님을, 그리고 예루살렘은 평화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령한 성전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그 위에 터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을 보면 예수 기초 없이 집만 짓겠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잘하자. 도를 닦자. 욕심을 버리자. 도덕사회를 이룩하자 구호도 요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터가 아니기에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다 떠내려갈 집들입니다. 또 그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 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본 주의라고 합니다. 고전3:12의 금과 은과 보석은 성령 즉 신본주의의 재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모두 인본주의의 재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짓는 집은 인간 스스로가 짓는 인본주의 집이기에 심판 날에 다 불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3:10에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은 비단 이교도만이 아니라 예수에 터를 잡았지만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려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성령의 적용하시는 은혜에 무관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로 그 공력을 심판하실 날이 옵니다. 이것은 먼 장래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환경을 통해서 인간의 의와 자아를 드러내십니다. 그 대 심령의 상태는 마치 불타는 것과 같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론을 통하여 자기의 신앙을 말씀 안에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성전터에서 잠시 오벧에돔이 법궤를 자기 집에 둔 후에 복을 받은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법궤를 집에 둔지 불과 3개월만에 다윗 왕궁까지 소문 나도록 복받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궤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레셋에 법궤가 칠 개월있을 동안에 법궤는 온 블레셋을 죽음과 파괴의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법궤를 아스돗에 옮겨 놓으니 아스돗에 독종이 임하여 수만명이 죽습니다. 그래서 가드로 옮겼더니 가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에그론으로 옮겼지만 에그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멍에 메지 않은 젖나는 두 소에 실어 레위지파의 성 벧세메스로 보내지만 그 곳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 보다가 칠십인이 죽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즉 이방인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궤는 기럇여아림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법궤를 옮겨오지만 법궤가 수레에서 흔들리자 대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 그러니까 그도 제사장입니다. 이 웃사가 법궤를 붙드는 순간 그는 즉사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아가서는 제사장까지도 죽인 이런 법궤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가 그 법궤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석달 있는 동안에 오벧에돔의 집에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복이란 대부분 생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번성하고 소떼가 번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자식 낳지 못하던 자부들이 자녀를 잉태하고 오벧에돔 집을 찾아오는 자들이 다 평안을 얻고 얼마나 그가 단시일에 큰 복을 받았는지 다윗 궁까지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우상이건 이방인이건 제사장이건 대제사장이건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던 그 법궤가 이제는 복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 동일한 법궤인데 이렇게 그 결과가 다른 것입니까? 즉 왜 같은 예수를 믿는데 그 결과가 다릅니까? 여기서 우리는 복받는 비결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오벧에돔은 목숨걸고 법궤를 모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생명걸고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의 부족이 아닙니다. 너무 안일한 신앙생활이 문제입니다. 여러 방향에서의 죽음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목숨걸고 믿었기에 온 세상이 다 알도록 생명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여러분의 생명을 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을 짓되 잘 지으십시다. 성전이 없이 마음의 천국도 성화도 복도 없습니다. 여러분 때가 지나기 전에 지읍시다. 예수님 위에 지읍시다. 성령으로 지읍시다. 그래서 모두 다 아름다운 신령한 성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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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장 1-7절
주요 요점
성전의 치수는 역사 속에 펼쳐진 구속사의 비밀임과, 또 성전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임이, 그리고 성전건축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준다.
오늘은 성전 치수와 성전의 터에 들어 있는 영적인 의미에 관해서 함께 생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전 치수의 의미입니다.
신기한 것은 성전은 그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하게 되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성전은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진리와 하나님 나라를 설계의 기본 이념으로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친히 성도의 생명과 복과 기쁨으로 영원히 내주하시고자 하시는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전의 원형인 저 새예루살렘성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이런 수치의 공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종 수효와 숫자와 치수에도 모두 귀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의 치수를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성막의 치수의 의미부터 말씀드리면 이 속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속사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를 7,000년으로 봅니다. 즉 아담에서 모세까지를 2,500년, 모세부터 그리스도 초림까지를 1,500년, 그리스도 초림부터 그리스도부터 재림까지를 약 2,000년으로 보고, 나머지 1,000년을 천년왕국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7,000년의 구속사의 비밀이 신비하게 성막의 치수에서 나타납니다.
그럼, 성막의 치수를 살펴보면 성막에는 뜰의 울타리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는데 먼저, 뜰의 울타리가 총길이가 300규빗에 높이 5규빗으로 1,500제곱규빗입니다. 그러니까 1,500년입니다. 이것은 성막이 세워지던 모세시대에서 예수님 오시기까지 율법시대 1,500년을 보여줍니다. 또 성소는 길이 20규빗 광이 10규빗 높이 10규빗으로 그 넓이가 2,000제곱규빗입니다. 그래서 2,000년 이것은 예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교회시대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규빗으로 1,000인데 이것은 재림 이후에 이어질 1,000년 왕국의 예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모세까지 2,500년을 합하면 모두 7,000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구원의 역사가 마치 성막의 세마포와 휘장과 가죽이 펼펴지듯이 펼쳐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인정이 되는데 이 중에 한 가지 교회시대 2000년에 관한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을 꼭 연대기적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개념적인 의미 즉 충만한 완성적인 의미 등으로 이해하면 좋다고 이해됩니다. 추측이지만 이제 그 날이 이르렀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구원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혹은 우리의 일생이 다 끝나기 전에 꼭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한 번 문 닫히면 열어 주소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헛 일입니다. 또 구원의 진리는 날이 갈수록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뜰에서 받는 은혜와 성소에서 받는 은혜와 지성소에서 받는 은혜가 다름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맛도 구약보다는 신약이, 신약보다는 천년왕국이, 천년왕국보다 영원천국에서의 은혜가 더 풍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 각자의 신앙의 단계를 보여주는 척도도 됩니다(계11:1-2). 어떤 사람은 뜰에 있는데 이는 예수는 믿지만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소에 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을 죄는 씻었으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계11:1-2에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척량하지만 성전 밖 마당에 속한 사람은 마흔 두달 즉 3년 반 즉 환란에 버려 두신다는 내용을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육신은 아직 구원을 기다리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경험합니까? 성령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성령받고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 시대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령을 구하고 계십니까?
그럼, 성전의 치수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왕상6:2에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전은 장이 육십규빗이요 광이 이십규빗이요 고가 삼십규빗이며” 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성막보다 길이가 배나 크고 높이가 세 배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부대시설까지 하면 바닥 평수가 성막보다 50배, 성전 자체는 성막보다 12배가 됩니다. 성전 치수의 의미는 한 마디로 천국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설명한 성막이 구속사와 관계가 있었지만 성전은 구곳사와 아울러 천국론과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성전의 성소는 길이가 40, 넓이가 20, 높이가 30규빗으로 모두 24,000 입방규빗입니다. 24는 교회수요 하나님의 질서의 수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24수가 많습니다. 이처럼 성전은 천국의 상징이기에 모두가 24 숫자였습니다. 제사장도 24반열, 문지기도 24반열, 성가대도 24반열, 모두가 24반열 24,000명이었습니다. 대상27:1에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족장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유사들이 그 인수대로 반차가 나누이니 각 반열이 24,000명씩이라 일 년 동안 달마다 체번하여 들어가며 나왔으니” 했습니다. 또 하루가 24시간이듯 이와같이 천국도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영원한 아침입니다.
다음에,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0규빗씩의 정입방체입니다. 이와같이 천국의 새예루살렘성도 정사각입방체입니다. 계21:16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타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했습니다. 높이만 해도 성막은 20규빗인데 성전은 30규빗이라하여 3층천의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다 천국의 모형입니다.
또 성전의 바닥은 금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계21:21을보면 천국의 밑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은 바닥이 거친 모래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성전은 그 구원이 완성된 미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막은 그 자체의 의미가 예수님이시기에 아무도 예수님이 될 수 없음 같이 우리들은 성막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예수님과 아울러 우리도 성전입니다. 엡2:22에 분명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예수 안과 성령 안이라는 말씀을 주시해야 합니다. 즉 성전은 다윗의 준비와 솔로몬의 시공했던 작품임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적용케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성령이 임해야 예수 믿음도 생기고, 성령이 임해야 거룩도 생기고, 성령이 임해야 자아 죽일 믿음도 생기고, 성령이 임해야 육체도 순복시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수있습니다. 또 성령이 임해야 찬송과 담대와 확신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건축의 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하3:1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터는 다윗이 정했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성막과 성전의 터는 몇 번 거처가 바귀었습니다. 먼저는 이동하는 광야가 그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실로에, 엘리 제사장 이후에는 기브온으로, 그 후에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더 압축하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그 성전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군데의 모든 장소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광야는 아사셀 양되신 예수를, 실로는 법궤를 빼앗긴 곳이듯 잡히신 예수를,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하던 곳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다윗이 인구조사하여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재앙을 멈췄던 곳으로 우리의 속제 제물이 되사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 주신 예수님을, 그리고 예루살렘은 평화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령한 성전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그 위에 터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을 보면 예수 기초 없이 집만 짓겠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잘하자. 도를 닦자. 욕심을 버리자. 도덕사회를 이룩하자 구호도 요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터가 아니기에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다 떠내려갈 집들입니다. 또 그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 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본 주의라고 합니다. 고전3:12의 금과 은과 보석은 성령 즉 신본주의의 재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모두 인본주의의 재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짓는 집은 인간 스스로가 짓는 인본주의 집이기에 심판 날에 다 불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3:10에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은 비단 이교도만이 아니라 예수에 터를 잡았지만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려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성령의 적용하시는 은혜에 무관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로 그 공력을 심판하실 날이 옵니다. 이것은 먼 장래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환경을 통해서 인간의 의와 자아를 드러내십니다. 그 대 심령의 상태는 마치 불타는 것과 같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론을 통하여 자기의 신앙을 말씀 안에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성전터에서 잠시 오벧에돔이 법궤를 자기 집에 둔 후에 복을 받은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법궤를 집에 둔지 불과 3개월만에 다윗 왕궁까지 소문 나도록 복받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궤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레셋에 법궤가 칠 개월있을 동안에 법궤는 온 블레셋을 죽음과 파괴의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법궤를 아스돗에 옮겨 놓으니 아스돗에 독종이 임하여 수만명이 죽습니다. 그래서 가드로 옮겼더니 가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에그론으로 옮겼지만 에그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멍에 메지 않은 젖나는 두 소에 실어 레위지파의 성 벧세메스로 보내지만 그 곳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 보다가 칠십인이 죽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즉 이방인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궤는 기럇여아림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법궤를 옮겨오지만 법궤가 수레에서 흔들리자 대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 그러니까 그도 제사장입니다. 이 웃사가 법궤를 붙드는 순간 그는 즉사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아가서는 제사장까지도 죽인 이런 법궤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가 그 법궤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석달 있는 동안에 오벧에돔의 집에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복이란 대부분 생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번성하고 소떼가 번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자식 낳지 못하던 자부들이 자녀를 잉태하고 오벧에돔 집을 찾아오는 자들이 다 평안을 얻고 얼마나 그가 단시일에 큰 복을 받았는지 다윗 궁까지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우상이건 이방인이건 제사장이건 대제사장이건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던 그 법궤가 이제는 복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 동일한 법궤인데 이렇게 그 결과가 다른 것입니까? 즉 왜 같은 예수를 믿는데 그 결과가 다릅니까? 여기서 우리는 복받는 비결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오벧에돔은 목숨걸고 법궤를 모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생명걸고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의 부족이 아닙니다. 너무 안일한 신앙생활이 문제입니다. 여러 방향에서의 죽음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목숨걸고 믿었기에 온 세상이 다 알도록 생명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여러분의 생명을 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을 짓되 잘 지으십시다. 성전이 없이 마음의 천국도 성화도 복도 없습니다. 여러분 때가 지나기 전에 지읍시다. 예수님 위에 지읍시다. 성령으로 지읍시다. 그래서 모두 다 아름다운 신령한 성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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