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설계도 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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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6장 33-35절
주요 요점
성전 입구의 두 기둥은 영성을 수립하시는 하나님을, 성소의 현관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을, 현관 좌우의 칼 창고는 예비된 신령한 말씀을, 성소의 문은 믿음으로 들어감을 보여준다.
44번은 성전의 입구가 되겠습니다.
“저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고는 각각 십 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 또 놋을 녹여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으니 이 머리의 고도 다섯 규빗이요, 저 머리의 고도 다섯 규빗이며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 기둥을 이렇게 만들었고 또 두줄 석류를 한 그물 위에 둘러 만들어서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에 두르게 하였고 다른 기둥 머리에도 그렇게 하였으며 낭실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이 두 기둥 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 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이 줄을 지었더라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왕상7:15-22)
“이와 같이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 곧 기둥 둘과, 그 기둥 꼭대기의 공같은 머리 둘과, 또 기둥 꼭대기의 공같은 머리를 가리우는 그물 둘과, 또 그 그물들을 위하여 만든 바 매 그물에 두줄씩으로 기둥 위의 공 같은 두 머리를 가리우게 한 사백 석류와”(왕상7:40-42)
성전의 입구에는 문이 없고 대신 양 옆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놋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우편의 기둥은 야긴으로 ‘그가 세우실 것이다’ 라는 의미요, 좌편의 기둥은 보아스인데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성전은 아버지께서 그의 주권과 능력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성수립이 내가 하는 것으로 알면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그 동안의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께서 친히 만드시되 아버지의 재료로 만드십니다. 제자들이 이곳에 이르도록 3년 6개월 동안 예수님께 기적적으로 배웠던 것처럼 지금도 육체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기적적인 가르침과 훈련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은사의 도움을 받으면 쉽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시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제는 야긴과 보아스로 서 있습니다. 여기 둘인데 둘은 증거의 수입니다(신17:6, 고후13:1). 그러므로 불과 구름기둥, 야긴과 보아스는 증거하시고 인도하시는 말씀과 은사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수립을 위하여 객관적인 은사와 주관적인 은사를 충성되이 활동해야 합니다.
성전의 기둥은 고가 각각 십팔 규빗이었습니다. 여기 18은 9의 배수로 9는 성령의 열매(갈 5장 22-23)와 성령의 은사(고전12장)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성전이 되려면 성령의 열매와 은사로 충만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성전의 기둥의 둘레는 12규빗이었습니다(15절). 그렇다면 지름이 약 2미터 되는 굵기입니다. 그러니까 코끼리 몸통보다 더 굵은 나무입니다. 12는 선택수 제자수로서 신앙 안에서 충만히 자라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기둥의 머리 부분의 고가 다섯 규빗이었습니다(16절). 10수가 연단과 환난수인데 5는 환난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5는 은혜의 고통의 수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연단을 통하여 성전이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계3:10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하신 후에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둥의 머리는 면류관 모양의 그물과 7개의 사슬과 200개의 석류와 많은 백합화의 모양이 기둥마다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기 그물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7개의 사슬은 주님의 소유로 영원함을(롬8:35), 석류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함을, 백합화는 순결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연단의 목표는 그 만큼 성도를 영광되게 하심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둥이 양 편에 서 있음은 이러한 믿음의 과정을 거친 자만이 진정한 성전으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은유입니다. 그런데 왕하25:13에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전의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기둥같은 신앙일지라도 변질되어서는 안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45번은 성전의 현관입니다.
이 현관을 성경은 낭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대해 왕상6:3에서 “전의 성소 앞 낭실의 장은 전의 광과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광은 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했고 왕상7:12에서는 “또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 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도 일단 이 곳에 들어와야 합니다. 현관은 여러 면에서 예비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낭실의 크기는 20×20×10으로 번제단과 다락방과 지성소의 크기와 동일합니다. 그 용량도 4000입방규빗으로 4000의 수대로 짐승의 피가 흐른지 4000년만에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강문호). 더구나 이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인 메시야 라인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 심장합니다. 전에 언급한 대로 왕상7:12의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 가 메시야 라인입니다. 여기 3은 삼위일체 하나님 혹은 끊어지지 않는 견고성을 상징합니다. 돌은 언약이나 은혜를 상징합니다. 백향목은 인성의 예수의 의미입니다. 이 낮은 담이 낭실의 난간에 늘어져 있었음은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견고한 약속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텅빈 현관에도 이와 같이 모두 준비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현관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만 정복하면 그를 다 정복함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잠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 원수 사단도 직접 인간을 타락시키지 못하니까 사람의 마음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영적으로도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분류는 마음이 어느 편을 손잡아 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란 마음이 육신의 소욕을 붙잡아 줄 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이란 마음이 육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현관은 모든 준비의 과정입니다. 이 곳에서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제사장들은 혹시 자신의 부정으로 여호와의 거룩을 범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을까 심히 두려워 자신을 돌아보았던 장소가 이 곳입니다. 그러므로 현관은 믿음과 회개의 장소였습니다. 욜2:17에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가슴치며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곳은 기도하는 자리였고 통곡하는 자리였고 금식하는 자리였고 혹은 해결받고 기뻐 뛰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곳에서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막1:2-5). 세례요한의 주 임무는 예수가 구주임을 전하고 그 길을 예비시키기 위해서 회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 일을 하셨습니다(막1:15).
그래서 우리 심령은 성전의 현관처럼 텅 비어야 합니다. 현관이 복잡한 집은 전체가 복잡한 느낌을 줍니다. 교회도 현관이 비좁으면 번거롭고 답답하므로 로비를 시원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로비가 넉넉하면 왠지 마음이 그렇게 포근하고 안심되며 시원한지 모릅니다. 호텔이나 백화점을 보십시오. 로비에서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곳인 교회가 그런 부분에 신경을 안씁니까? 성전에서 여러 면을 배우십시다. 이 성전론을 마스터하기 전까지는 성전건축을 잠시 중단합시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설계도 50번 작은 사무실로 나와 있는 제사장 다락같은 부분은 우리가 건축할 때 망각해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숨쉴 수 있는 공간이듯이 또한 교회 역시 죄인도 비천한 자도 숨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너도 못들어가느냐 나도 못들어 간다’가 되면 안됩니다.
이처럼 아직도 마음 속에 온갖 염려와 부정과 인간의 사욕과 생각과 자아로 가득차 있다면 비우시기 바랍니다. 또 좁아서 아무도 용납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넓게 확장하십시오. 진실로 회개하십시오. 그래서 롬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여기 마음의 변화가 모든 것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불교의 마음론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목적은 단순한 마음공부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시체를 아무리 고쳐 보아야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롬12:2의 마음은 이미 중생한 상황을 전제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어 나흘되어 냄새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살아난 나사로는 새마포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고 하셨습니다. 바로 나를 묶고 있는 이 마음을 변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이 마음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현관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니요가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에 항상 예 밖에 없었습니다(고후1:19). 이 곳은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리였습니다. 다윗도 이 곳에서 성전에 계신 여호와를 앙망했습니다(시27:4). 그러므로 이 곳은 능력의 자리였습니다. 이 현관에서 사람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에서 울부짖던 120문도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즉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대하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했습니다. 친구 목사님께서 자기는 하나님을 늘 앙망하면 놀라운 능력을 항상 입히심을 경험했노라고 간증하길래 유심히 들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주님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시73:25). 그런데 이 현관의 양편은 제사장들이 사무를 보는 곳입니다. 어떤 사무입니까? 함부로 출입함을 통제하는 사무입니다. 그러니까 이 현관만 잘 되면 나머지는 다 잘 됩니다. 그러나 이 현관에서 막히면 모든 것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므로 착실히 신앙훈련을 받아 이 곳에까지 도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6번은 칼 창고입니다.
현관 홀의 양편 끝에 두 방이 있는데 이곳은 모두 칼을 두는 창고입니다. 가로 11규빗, 세로 10규빗의 방입니다. 그런데 사용하다가 무딘 칼은 남쪽 창고에 두었고 잘 갈아서 사용할 칼은 북쪽 창고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들어가는 편에서 보면 북편은 오른쪽입니다. 왜 북편 즉 오른쪽에 잘 드는 칼을 두었을까요? 히브리인들은 방향과 숫자 사물 등 상징적인 면에 있어서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즉 오른편에 잘든 칼을 둔 것은 이 칼이라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심입니다. 성전에서 칼은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의사의 칼보다 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들에게 신령한 칼이야 말로 없어서는 안될 무기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절대 무딘 칼은 쓰지 않고 예리한 칼만 썼습니다.
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까지도 찔러 쪼개는 칼이 무엇일까요? 히4:12-13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했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 동안 교인들의 심령을 쪼개지 못하여 영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칼이었다면 그만 거두시고 남쪽 창고에 보관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는 북쪽창고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영성적인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이 듣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육간의 구분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심령에 적용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인 여러 문자 문법 역사 신학 기타의 방법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개는 잘했지만 나와 별로 관계가 없는 말씀이라면 분명 허공을 치는 말씀입니다(고전9:26). 저는 이 배경을 준비하다가 영성적인 적용 부분에 오면 ‘이제는 주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하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영성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전의 입구 부분에 칼 창고를 둔 것은 말씀의 칼로 바른 제물이 되어야 만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말씀은 인간이 죄인임을 가르쳐 줍니다. 다음에 말씀은 예수가 구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말씀은 무엇이 영적이고 육적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여 가르쳐 줌으로 심령의 창조가 이루어져서 마침내 제 7일의 안식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히4:10-11에서 안식을 언급한 후에 제사장의 칼을 언급한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아버지의 계획과 주관 속에 성령과 말씀으로 되어진 것과 같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창조로 본 객관적구속사와 창조로 본 주관적구속사를 간단히 언급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창세기 강해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딤후3:15-17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칼 창고에는 다량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에 희생되는 소와 양과 염소 등의 제물의 수효는 무려 수십만 마리에 달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이 칼을 사용하여 드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수천 개의 칼이었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몇 마디 말씀을 깨달았다고 전부로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한 후 세월이 지나 다시 보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말씀의 한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서로 나누어야 충만해집니다. 앞으로 여러분께서 다른 지체와 나누고 싶은 영성설교들을 가지고 오시면 모아서 집행부에서 이 책만큼 안팎으로 편집해서 매달 한 권씩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들은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꼭 그 일이 시행되어야 하겠습니다.
47번은 성소입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매일 출입하며 하나님을 섬기던 중요한 곳입니다. 이제 전과 다른 것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그 곳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기듯이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제사가 그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해가 떠올라 성소의 문 틈 사이로 맨 먼저 성소의 촛대를 비추면 제사장들은 성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문을 여는 소리가 여리고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 성소에 관한 부분은 떡상 촛대 분향단 등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뒤에서 개별적으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성소로 들어가는 문과 성소의 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소의 문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또 외소의 문을 위하여 감람목으로 문설주를 만들었으니 곧 벽의 사분지 일이며 그 두 문짝은 잣나무라 이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고 저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으며 그 문짝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그 새긴데 맞게 하였고”(왕상6:33-35)
이 성소의 문은 단 한 곳 뿐입니다. 다른 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요10:9, 요14:6). 또 성소의 문은 여기 기록된 대로 양쪽으로 두 문짝씩 두 문짝씩 모두 네 문짝입니다. 각 쪽마다 두 문짝으로 접는 문입니다. 과거의 버스의 접게 문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면 공간이 넓게 활짝 열립니다. 이 네 문은 객관적으로는 왕이시오(마태복음) 선지자시오(마가복음) 제사장이시오(누가복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재판장이신(요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직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네 짝의 문의 4는 땅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땅의 사람들은 다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 문을 제사장은 두 팔로 양편으로 제쳐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은 믿음의 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의심 구름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이제는 두 팔로 과감하게 제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 하지 말고 이 열린 넓은 문을 통해 당당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또 롬5: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두려워 하며 의붓자식처럼 주춤거리는지 모릅니다.
또 이 성전문은 벽의 사분의 일의 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4는 네 방향을 뜻하는 땅의 수인데 그 중에 하나니까 세상의 그 어떤 길이 있다해도 오직 구원의 길은 하나이신 예수이심을 암시합니다. 또 이 문은 잣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잣나무는 낮게 오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잣나무는 아주 강한 나무요 노아의 방주의 재료였듯 이 문은 구원의 문이며 한 번 구원받은 주의 백성은 영원히 버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또 이 문틀인 감람목 문설주는 문을 지탱하는 역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집행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만이 믿어 구원받아 중생하게 될 뿐아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실재가 됩니다. 또 이 문에는 핀 꽃과 종려나무와 그룹천사를 아로새겼는데 이는 신앙의 성숙과 승리와 거룩을 각각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이 성소의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잣나무로 만든 이 문은 금으로 입혀졌는데 이는 비하의 인성과 신성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또 돌쩌귀의 재료는 금이었는데(왕상7:50) 이는 성령의 은혜로 와진 믿음을 가진 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엡2:8).
다음에 성소의 벽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의 벽은 천은 칠천 달란트로 모든 전의 돌벽에 입혔습니다(대상29:4). 또 그 입힌 은 위에 다시 오빌의 삼천 달란트의 금을 입힌 백향목 널판으로 벽과 천장까지 덮었고(왕상6:9, 12) 마루 바닥도 역시 금을 입힌 잣나무로 놓았습니다(왕상6:15). 그 다음에 그 금벽에 박과 핀 꽃과 종려나무와 사슬과 구룹을 무늬를 수놓았고(왕상6:14-18, 29) 그 위에 보석으로 그 벽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대하3:6-7). 여기 오빌의 금은 금 중의 금을, 천은은 은 중의 은인데 금은 신성을, 은은 대가 믿음 구속을 상징합니다. 또 백향목은 희고 부패하지 않으며 향내나는 나무로서 완전한 인성을, 금은 신성을 의미하므로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금벽에 새겨진 박은 성령의 열매를, 핀 꽃은 영적 성숙을,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의와 승리를, 사슬은 하나님의 불변의 언약을, 그룹은 거룩을, 치장된 보석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상을 종합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만이 우리의 인격과 생명에 나타나야 함을 교훈합니다. 나의 인간적인 모습은 감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아야지 아담 안에서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답고 영원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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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6장 33-35절
주요 요점
성전 입구의 두 기둥은 영성을 수립하시는 하나님을, 성소의 현관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을, 현관 좌우의 칼 창고는 예비된 신령한 말씀을, 성소의 문은 믿음으로 들어감을 보여준다.
44번은 성전의 입구가 되겠습니다.
“저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고는 각각 십 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 또 놋을 녹여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으니 이 머리의 고도 다섯 규빗이요, 저 머리의 고도 다섯 규빗이며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 기둥을 이렇게 만들었고 또 두줄 석류를 한 그물 위에 둘러 만들어서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에 두르게 하였고 다른 기둥 머리에도 그렇게 하였으며 낭실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이 두 기둥 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 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이 줄을 지었더라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왕상7:15-22)
“이와 같이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 곧 기둥 둘과, 그 기둥 꼭대기의 공같은 머리 둘과, 또 기둥 꼭대기의 공같은 머리를 가리우는 그물 둘과, 또 그 그물들을 위하여 만든 바 매 그물에 두줄씩으로 기둥 위의 공 같은 두 머리를 가리우게 한 사백 석류와”(왕상7:40-42)
성전의 입구에는 문이 없고 대신 양 옆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놋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우편의 기둥은 야긴으로 ‘그가 세우실 것이다’ 라는 의미요, 좌편의 기둥은 보아스인데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성전은 아버지께서 그의 주권과 능력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성수립이 내가 하는 것으로 알면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그 동안의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께서 친히 만드시되 아버지의 재료로 만드십니다. 제자들이 이곳에 이르도록 3년 6개월 동안 예수님께 기적적으로 배웠던 것처럼 지금도 육체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기적적인 가르침과 훈련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은사의 도움을 받으면 쉽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시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제는 야긴과 보아스로 서 있습니다. 여기 둘인데 둘은 증거의 수입니다(신17:6, 고후13:1). 그러므로 불과 구름기둥, 야긴과 보아스는 증거하시고 인도하시는 말씀과 은사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수립을 위하여 객관적인 은사와 주관적인 은사를 충성되이 활동해야 합니다.
성전의 기둥은 고가 각각 십팔 규빗이었습니다. 여기 18은 9의 배수로 9는 성령의 열매(갈 5장 22-23)와 성령의 은사(고전12장)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성전이 되려면 성령의 열매와 은사로 충만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성전의 기둥의 둘레는 12규빗이었습니다(15절). 그렇다면 지름이 약 2미터 되는 굵기입니다. 그러니까 코끼리 몸통보다 더 굵은 나무입니다. 12는 선택수 제자수로서 신앙 안에서 충만히 자라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기둥의 머리 부분의 고가 다섯 규빗이었습니다(16절). 10수가 연단과 환난수인데 5는 환난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5는 은혜의 고통의 수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연단을 통하여 성전이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계3:10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하신 후에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둥의 머리는 면류관 모양의 그물과 7개의 사슬과 200개의 석류와 많은 백합화의 모양이 기둥마다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기 그물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7개의 사슬은 주님의 소유로 영원함을(롬8:35), 석류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함을, 백합화는 순결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연단의 목표는 그 만큼 성도를 영광되게 하심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둥이 양 편에 서 있음은 이러한 믿음의 과정을 거친 자만이 진정한 성전으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은유입니다. 그런데 왕하25:13에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전의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기둥같은 신앙일지라도 변질되어서는 안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45번은 성전의 현관입니다.
이 현관을 성경은 낭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대해 왕상6:3에서 “전의 성소 앞 낭실의 장은 전의 광과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광은 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했고 왕상7:12에서는 “또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 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도 일단 이 곳에 들어와야 합니다. 현관은 여러 면에서 예비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낭실의 크기는 20×20×10으로 번제단과 다락방과 지성소의 크기와 동일합니다. 그 용량도 4000입방규빗으로 4000의 수대로 짐승의 피가 흐른지 4000년만에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강문호). 더구나 이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인 메시야 라인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 심장합니다. 전에 언급한 대로 왕상7:12의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 가 메시야 라인입니다. 여기 3은 삼위일체 하나님 혹은 끊어지지 않는 견고성을 상징합니다. 돌은 언약이나 은혜를 상징합니다. 백향목은 인성의 예수의 의미입니다. 이 낮은 담이 낭실의 난간에 늘어져 있었음은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견고한 약속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텅빈 현관에도 이와 같이 모두 준비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령한 성전에서 현관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만 정복하면 그를 다 정복함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잠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 원수 사단도 직접 인간을 타락시키지 못하니까 사람의 마음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영적으로도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분류는 마음이 어느 편을 손잡아 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란 마음이 육신의 소욕을 붙잡아 줄 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이란 마음이 육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현관은 모든 준비의 과정입니다. 이 곳에서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제사장들은 혹시 자신의 부정으로 여호와의 거룩을 범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을까 심히 두려워 자신을 돌아보았던 장소가 이 곳입니다. 그러므로 현관은 믿음과 회개의 장소였습니다. 욜2:17에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가슴치며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곳은 기도하는 자리였고 통곡하는 자리였고 금식하는 자리였고 혹은 해결받고 기뻐 뛰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곳에서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막1:2-5). 세례요한의 주 임무는 예수가 구주임을 전하고 그 길을 예비시키기 위해서 회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 일을 하셨습니다(막1:15).
그래서 우리 심령은 성전의 현관처럼 텅 비어야 합니다. 현관이 복잡한 집은 전체가 복잡한 느낌을 줍니다. 교회도 현관이 비좁으면 번거롭고 답답하므로 로비를 시원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로비가 넉넉하면 왠지 마음이 그렇게 포근하고 안심되며 시원한지 모릅니다. 호텔이나 백화점을 보십시오. 로비에서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곳인 교회가 그런 부분에 신경을 안씁니까? 성전에서 여러 면을 배우십시다. 이 성전론을 마스터하기 전까지는 성전건축을 잠시 중단합시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설계도 50번 작은 사무실로 나와 있는 제사장 다락같은 부분은 우리가 건축할 때 망각해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숨쉴 수 있는 공간이듯이 또한 교회 역시 죄인도 비천한 자도 숨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너도 못들어가느냐 나도 못들어 간다’가 되면 안됩니다.
이처럼 아직도 마음 속에 온갖 염려와 부정과 인간의 사욕과 생각과 자아로 가득차 있다면 비우시기 바랍니다. 또 좁아서 아무도 용납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넓게 확장하십시오. 진실로 회개하십시오. 그래서 롬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여기 마음의 변화가 모든 것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불교의 마음론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목적은 단순한 마음공부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시체를 아무리 고쳐 보아야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롬12:2의 마음은 이미 중생한 상황을 전제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어 나흘되어 냄새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살아난 나사로는 새마포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고 하셨습니다. 바로 나를 묶고 있는 이 마음을 변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이 마음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현관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니요가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에 항상 예 밖에 없었습니다(고후1:19). 이 곳은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리였습니다. 다윗도 이 곳에서 성전에 계신 여호와를 앙망했습니다(시27:4). 그러므로 이 곳은 능력의 자리였습니다. 이 현관에서 사람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에서 울부짖던 120문도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즉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대하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했습니다. 친구 목사님께서 자기는 하나님을 늘 앙망하면 놀라운 능력을 항상 입히심을 경험했노라고 간증하길래 유심히 들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주님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시73:25). 그런데 이 현관의 양편은 제사장들이 사무를 보는 곳입니다. 어떤 사무입니까? 함부로 출입함을 통제하는 사무입니다. 그러니까 이 현관만 잘 되면 나머지는 다 잘 됩니다. 그러나 이 현관에서 막히면 모든 것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므로 착실히 신앙훈련을 받아 이 곳에까지 도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6번은 칼 창고입니다.
현관 홀의 양편 끝에 두 방이 있는데 이곳은 모두 칼을 두는 창고입니다. 가로 11규빗, 세로 10규빗의 방입니다. 그런데 사용하다가 무딘 칼은 남쪽 창고에 두었고 잘 갈아서 사용할 칼은 북쪽 창고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들어가는 편에서 보면 북편은 오른쪽입니다. 왜 북편 즉 오른쪽에 잘 드는 칼을 두었을까요? 히브리인들은 방향과 숫자 사물 등 상징적인 면에 있어서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즉 오른편에 잘든 칼을 둔 것은 이 칼이라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심입니다. 성전에서 칼은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의사의 칼보다 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들에게 신령한 칼이야 말로 없어서는 안될 무기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절대 무딘 칼은 쓰지 않고 예리한 칼만 썼습니다.
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까지도 찔러 쪼개는 칼이 무엇일까요? 히4:12-13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했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 동안 교인들의 심령을 쪼개지 못하여 영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칼이었다면 그만 거두시고 남쪽 창고에 보관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는 북쪽창고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영성적인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이 듣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육간의 구분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심령에 적용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인 여러 문자 문법 역사 신학 기타의 방법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개는 잘했지만 나와 별로 관계가 없는 말씀이라면 분명 허공을 치는 말씀입니다(고전9:26). 저는 이 배경을 준비하다가 영성적인 적용 부분에 오면 ‘이제는 주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하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영성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전의 입구 부분에 칼 창고를 둔 것은 말씀의 칼로 바른 제물이 되어야 만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말씀은 인간이 죄인임을 가르쳐 줍니다. 다음에 말씀은 예수가 구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말씀은 무엇이 영적이고 육적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여 가르쳐 줌으로 심령의 창조가 이루어져서 마침내 제 7일의 안식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히4:10-11에서 안식을 언급한 후에 제사장의 칼을 언급한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아버지의 계획과 주관 속에 성령과 말씀으로 되어진 것과 같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창조로 본 객관적구속사와 창조로 본 주관적구속사를 간단히 언급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창세기 강해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딤후3:15-17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칼 창고에는 다량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에 희생되는 소와 양과 염소 등의 제물의 수효는 무려 수십만 마리에 달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이 칼을 사용하여 드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수천 개의 칼이었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몇 마디 말씀을 깨달았다고 전부로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한 후 세월이 지나 다시 보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말씀의 한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서로 나누어야 충만해집니다. 앞으로 여러분께서 다른 지체와 나누고 싶은 영성설교들을 가지고 오시면 모아서 집행부에서 이 책만큼 안팎으로 편집해서 매달 한 권씩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들은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꼭 그 일이 시행되어야 하겠습니다.
47번은 성소입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매일 출입하며 하나님을 섬기던 중요한 곳입니다. 이제 전과 다른 것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그 곳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기듯이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제사가 그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해가 떠올라 성소의 문 틈 사이로 맨 먼저 성소의 촛대를 비추면 제사장들은 성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문을 여는 소리가 여리고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 성소에 관한 부분은 떡상 촛대 분향단 등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뒤에서 개별적으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성소로 들어가는 문과 성소의 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소의 문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또 외소의 문을 위하여 감람목으로 문설주를 만들었으니 곧 벽의 사분지 일이며 그 두 문짝은 잣나무라 이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고 저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으며 그 문짝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그 새긴데 맞게 하였고”(왕상6:33-35)
이 성소의 문은 단 한 곳 뿐입니다. 다른 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요10:9, 요14:6). 또 성소의 문은 여기 기록된 대로 양쪽으로 두 문짝씩 두 문짝씩 모두 네 문짝입니다. 각 쪽마다 두 문짝으로 접는 문입니다. 과거의 버스의 접게 문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면 공간이 넓게 활짝 열립니다. 이 네 문은 객관적으로는 왕이시오(마태복음) 선지자시오(마가복음) 제사장이시오(누가복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재판장이신(요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직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네 짝의 문의 4는 땅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땅의 사람들은 다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 문을 제사장은 두 팔로 양편으로 제쳐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은 믿음의 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의심 구름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이제는 두 팔로 과감하게 제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 하지 말고 이 열린 넓은 문을 통해 당당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또 롬5: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두려워 하며 의붓자식처럼 주춤거리는지 모릅니다.
또 이 성전문은 벽의 사분의 일의 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4는 네 방향을 뜻하는 땅의 수인데 그 중에 하나니까 세상의 그 어떤 길이 있다해도 오직 구원의 길은 하나이신 예수이심을 암시합니다. 또 이 문은 잣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잣나무는 낮게 오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잣나무는 아주 강한 나무요 노아의 방주의 재료였듯 이 문은 구원의 문이며 한 번 구원받은 주의 백성은 영원히 버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또 이 문틀인 감람목 문설주는 문을 지탱하는 역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집행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만이 믿어 구원받아 중생하게 될 뿐아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실재가 됩니다. 또 이 문에는 핀 꽃과 종려나무와 그룹천사를 아로새겼는데 이는 신앙의 성숙과 승리와 거룩을 각각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이 성소의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잣나무로 만든 이 문은 금으로 입혀졌는데 이는 비하의 인성과 신성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또 돌쩌귀의 재료는 금이었는데(왕상7:50) 이는 성령의 은혜로 와진 믿음을 가진 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엡2:8).
다음에 성소의 벽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의 벽은 천은 칠천 달란트로 모든 전의 돌벽에 입혔습니다(대상29:4). 또 그 입힌 은 위에 다시 오빌의 삼천 달란트의 금을 입힌 백향목 널판으로 벽과 천장까지 덮었고(왕상6:9, 12) 마루 바닥도 역시 금을 입힌 잣나무로 놓았습니다(왕상6:15). 그 다음에 그 금벽에 박과 핀 꽃과 종려나무와 사슬과 구룹을 무늬를 수놓았고(왕상6:14-18, 29) 그 위에 보석으로 그 벽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대하3:6-7). 여기 오빌의 금은 금 중의 금을, 천은은 은 중의 은인데 금은 신성을, 은은 대가 믿음 구속을 상징합니다. 또 백향목은 희고 부패하지 않으며 향내나는 나무로서 완전한 인성을, 금은 신성을 의미하므로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금벽에 새겨진 박은 성령의 열매를, 핀 꽃은 영적 성숙을,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의와 승리를, 사슬은 하나님의 불변의 언약을, 그룹은 거룩을, 치장된 보석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상을 종합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만이 우리의 인격과 생명에 나타나야 함을 교훈합니다. 나의 인간적인 모습은 감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아야지 아담 안에서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답고 영원한 존재입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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