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아들 2024. 6. 17. 23:28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복된 새 언약 글/이상봉 목사

 

新約 곧 새 언약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생활의 기초이다.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얻고 양심에 평안을 얻는다. 신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또 신약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으며 속으로부터 하나님을 친밀하고 깊이 알 수 있다. 

 

신약은 주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고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신약을 세우기 전에도 여러 가지 언약을 세우셨다. 처음에 세우신 언약은 노아와 세우신 언약이다.(창9:1-17)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창12:1-3, 13:14-17, 15장, 17:1-14, 22:15-18) 이것은 신약의 기초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언약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셨다. 이것이 바로 舊約이다. 후에 하나님은 다윗과도 언약을 세우셨다. 이 모든 언약이 있은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미리 약속하신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을 세우셨다.


신약은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한 것이다. 모든 언약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새 언약 두 가지이다. 이 두 언약 사이에 구약 곧 흔히 우리가 율법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흔히 구약이라고 하면 39권의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구약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말한다. 그것은 출애굽 때부터 주 예수님의 죽으심 때까지 사람들을 지배하던 언약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8:7에서 이 언약을 첫 언약이라 했다. 구약이 첫 언약이라는 것은 구약이 맨 처음 언약이라는 뜻이 아니고 다만 신약보다 먼저 있었던 언약이라는 뜻이다. 

 

흔히 신약은 구약을 이은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은 신약은 구약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한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그러나 성령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3:15-22) 


여기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는 말에서 천사는 마귀를 가리키고 중보는 모세를 가리킨다. 즉 율법은 사람이 마귀에게 속아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 범죄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어떤 필요에 의해 중간에 더하여진 것이다. “율법이 가입(加入)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5:20) 그러므로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이 중간에 더하여진 이유는 ‘범죄를 더하기 위함’이다. 즉 사람의 죄인된 실상을 드러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은혜)을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율법의 중요한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하려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악함과 무능함을 깨닫게 하려는 부수적 목적도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소개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고 하나님을 닮도록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율법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도저히 부응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만 사람으로 좌절과 절망을 맛보며 정죄와 심판을 받으라고 율법을 주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절망을 느끼는 만큼 그들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은혜 언약)을 추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새 언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구약보다 먼저 세워진 것이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근본 약속(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약속(언약)이다. 신약은 이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다. (갈3:7,9,16,17, 히8:6)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말함으로써 구약이 신약에 비해 흠이 있는 불완전한 언약이라고 했다. 구약(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율법이 흠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의 흠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할 뿐 그것을 실행하여 생명을 얻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히8:19) 흠과 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약을 만족시키지 못했는가? 출애굽기 19-24장은 십계명과 기타 율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구약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만약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백성들은 일제히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고 응답하였다.(출19: 5-8) 이에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선포한 후에 희생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림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음을 확실하게 했다. “보라 이것이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언약의 핵심 내용을 어겼다.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더디하자 십계명의 첫째, 둘째 계명을 바로 어기고 말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신 것은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쓴 증거판을 가지고 내려오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했다.(출32:1-8)


결국 구약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만 알려주었을 뿐 그리고 사람이 그것을 받아내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주었을 뿐 아무 것도 온전케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흠과 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과 새 언약을 세우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히8:8,9)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구약,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기 원했지만 사람이 연약하여 그렇게 되지 못했다. 육으로는 아무리 결심을 해도 그것이 잘 안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 


신약은 이런 구약에 비해 훨씬 좋은 언약이다. 신약 역시 율법처럼 하나님을 소개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증거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책(돌 비)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이다.(고후3:3)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생명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게 되었다. 신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마음 속에, 생명 속에 새겨넣은 것이다.(히8:10)


신약이 구약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약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운동력(능력)에 있다. 하나님은 다만 말씀(명령, 요구)하시고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 구약이었다면 신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그 말씀을 지키게끔 역사하는 것이다. 이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실 뿐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그것을 행할 수 있게끔 역사하신다. 이것이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새 언약이다. 구약은 다만 사람에게 거룩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언약이었지만 신약은 사람에게 거룩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사람을 실제로 거룩하게 만드는 언약이다. 

 

히8:10-12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약의 내용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신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마음에 새긴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둘째, 신약은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이 영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며 그 때문에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속에 있는 생명(마음, 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신약은 사람으로 이러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기억치 않고 사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생명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생명의 법이 되게 하신다. 그 법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품으신 영원한 목적이다. 이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이 모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서 면에서는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깨끗한 상태를 얻고 다음에는 하나님과 깊고 완전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한다.

  
 1.죄 사함에 대해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기억치 않는다고 해서 사람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하시고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시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의 불의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일은 하나님은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는 일을 사람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되새긴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은 잊어버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잊어버리신 것은 계속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다 사해주실까?” “하나님이 비록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더라도 죄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 죄의 흔적을 보고 여전히 우리를 죄인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 신약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의 죄가 많거나 악하다고 해서 용서해 주시지 않거나 한 번 사해 준 죄를 다시 묻거나 계속 기억하시지 않는다.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머물러 살 수 없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의 생명이 작은 죄도 용납하지 않으므로 죄로 인해 엄청난 죄책과 부담을 가지게 된다. 그 사람 속에는 죄와 상관이 없는 새 생명(성질)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절대로 적당히 지나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용서해 주신다. 그것은 언약 때문이다. 

 
요한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3:9)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7,9)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은 신자가 죄를 자백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자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죄를 분명하게 깨닫고 견딜 수 없는 부담과 아픔을 가지고 회개를 해야지 건성으로나 습관적으로 회개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만 진정으로 죄의 무서움과 심각함을 알게 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자백에 대해서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빛 가운데서 자기 죄를 보지 못한 채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자백하곤 한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이용하여 자기를 보호하며 양심을 기만하는 것이다. 매일 같은 죄를 지으면서 매일 같은 회개를 하는 것은 회개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밟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죄를 짓고 한편으로는 계속 형식적인 자백과 회개를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빛 속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자백은 죽은 儀文일 뿐이다. 


 2.생명과 능력

새 언약에는 죄를 사해주시는 것말고도 극히 영광스럽고 귀한 다른 두 가지 약속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그것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과 또 그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약속은 신약의 핵심 약속이요 매우 귀한 약속인데도 많은 신자들이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옛 사람의 생명 그대로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신약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르고 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지한 중에서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무 다를 바가 없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31:31-34)

 

내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5-28)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10:6)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새 마음 혹은 부드러운 마음, 새 영이 바로 지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히7:16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궁한 생명(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이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친히 행하시는 것이다.

 

이 생명의 능력은 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이 생명의 능력은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이루게 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


이 생명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되며 새 율법이 된다. 그래서 이를 生命律 또는 생명의 法이라고 한다.(롬8: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 위에 서 있는 우리는 돌 판에 새긴 외적 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불교의 계율집과 같은 율법 책이 없으며 심지어 성경도 우리에게 율법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생명만이 율법이 된다. 그것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우리를 명하고 규제한다. 이것은 의문처럼 명시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가장 완전하고 편리한 법이다. 그러므로 신약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만 注意한다.


이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능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이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능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만든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1:28)

 
 3.속에 있는 지식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율법을 우리 속에 넣으시고 우리 마음에 새기신 것은 궁극적으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 안에서 하나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곧 우리는 신약으로 말미암아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참된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지음 받았다.


참된 영적 지식은 바깥에 있는 율법이나 연구를 통해 얻어지지 않고 오직 우리 속에 넣어두신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호4:6에서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했는데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은 밖에 율법이나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모든 율법과 기적을 항상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자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밖에서 가르치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속 사람이 강퍅하고 마음이 굳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 곧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감사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 생명을 넣어 두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은 주님과의 약속을 따라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이 성령을 받아들이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 생명이 되신다. 곧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약속은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일서 2:25,27)


그러므로 신약의 최대 축복은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데 있다. 신약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하나님을 그 본성과 생명으로 안다. 그러면 가르칠 필요는 없는가? 성경에서 사도들은 왜 우리를 가르치는가? 또 오늘날 목사나 교사는 필요 없는가? 물론 가르침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르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오직 다시 되풀이하여 신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음성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즉 기억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어둠 가운데 빠져 있는 자를 깨우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탐욕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가르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하실 때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하시기까지 한 것이다. 문제는 신자가 한 번 두 번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동안에 귀가 막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들을 유의하여 보면 많은 가르침들이 되풀이하여 사람들을 깨우칠 목적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교훈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나 형제들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종종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 그것은 “네가 네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느냐? 왜 주님이 네게 명하는 바를 잊고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바울이 전에 그들에게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한 것은 다 주님께서 그들 속에서 친히 가르치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가 속에서 가르치는 주님의 음성을 부주의하게 지나쳐버리고 또 무시하기 때문에 주님은 사도들이나 선생들을 통해 다시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경 혹은 밖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 다시 가르치는 일은 둘 다 필요하다. 그것은 상호보완관계에 놓여 있다. 다만 더 근본적이고 복된 신약의 축복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다는 이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구약에서처럼 가르치는 자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지 않다. 이것이 신약의 최고 축복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 새로워짐으로써 변화를 받았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 사람은 자기의 주관적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마귀가 주는 헛되고 근거 없는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홀연히 들어오는 어떤 생각들은 대개 근거 없는 것이며 자기의 탐욕을 바탕으로 마귀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한 가지라도 이미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계속하여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성경 말씀과 우리 마음의 깨달음의 관계는 상호보완적 관계라고 했는데 이는 마치 기차와 철로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기록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 된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가르침인지 아니면 마귀로부터 온 망상인지 분별할 수 있고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의 느낌이 생명의 느낌인지 아니면 육체의 간절한 욕망으로 인해 생긴 주관적 생각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또 반대로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의 영 곧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을 소유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자라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신약에 대해 개략적으로 언급했는데 문제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제로 우리 삶에서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리려면 진리를 깨닫는 것과 아울러 반드시 그것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신약을 누리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마귀는 이것을 방해한다. 성도가 만일 신약을 바로 알고 누리게 된다면 마귀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교회는 견고하게 될 것이다. 약속의 신실함은 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직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하여 그것을 누리는 일이 남은 문제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1:20) 신약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 복된 언약이며 선조들이 바라며 기다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된 언약을 우리는 다 믿고 삶에서 온전히 누리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신약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