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창 22:1-6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1-6 /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다] 이삭이 점점 자라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기로 하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2) `네가 무척 아끼는 외아들 이삭이 있지 않느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리로 가면 내가 네게 산 하나를 일러 줄 터인데 그 산으로 올라가거라. 거기서 네 아들을 내게 번제물로 바치거라' 3)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나귀에 안장을 얹어 놓고 제사를 드리는 데 쓸 장작을 준비하여 아들과 두 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길을 떠났다. 4) 아브라함이 길을 떠난지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던 그 산이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5)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나귀와 함께 잠시 기다려라. 내가 이삭과 함께 저리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오마'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쓰일 장작을 이삭에게 지게 하고 자신은 칼과 번제물에 불을 붙일 불씨만 들고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번제로 드리라(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자), 독자, 이삭을 반복하여 언급하여 원하시는 제물이 이삭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번제는 태워서 바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창 12:2; 13:16; 17:6, 19)는 이전의 언약과 충돌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처음에 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 두 말씀 사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아브라함이 과연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가를 검증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많은 연단을 통해 믿음의 훈련을 쌓아왔습니다. 이제 그 믿음의 진가를 보일 시간이 되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3-4)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대답은 말씀을 경청하려는 아브라함의 겸손한 자세를 보여줍니다(1). 말씀을 받는 자세는 이후의 실천에 큰 영향을 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경청하는데 그치지 않고, 명령을 받은 즉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찍이란 말씀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속하게 명령을 이행하려고 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핑계를 대며 지체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동사들 일어나, 지우고, 데리고, 쪼개어, 떠나, 가더니 등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입니다. 3일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은 목표 지점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4). 이는 아브라함의 결심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굳은 결심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눅 9:51).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때로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이 동행(5-6) 모리아 산이 눈에 보이자 아브라함은 종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이삭만을 데리고 산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한다면 종들이 가로막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번제 나무는 이삭으로 하여금 지게 하였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갔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노쇠한 반면 이삭은 10대의 소년이었기에 번제 나무를 들고 갈 만큼 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척만 하고 이삭을 살리려는 마음을 처음부터 먹지 않았습니다.
적용: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직후 순종의 행위를 하였습니다. 지금 당신의 신앙생활에서 순종의 행위가 있는가 살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맞춰 생활을 하고 또 그 생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경험한 것, 본 것, 느낀 것 내 생각이 인정하는 것까지만 받아들이며 내 생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순종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
창세기22:1-14 26:1-5
2013년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시작의 책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요셉을 통하여 “꿈을 품게 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둘째 주에는 야곱을 통하여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이삭을 통하여 “순종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살펴보면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붙들으려고 합니다. 이삭은 어떤 사람입니까?이삭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순종의 사람이고, 그 순종을 통해 풍성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올 한해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은 우리의 순종입니다.
1.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마음으로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 합니다.
순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순종의 질은 축복의 질이 됩니다. 순종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입니다. 순종이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식과 부모, 부부, 인간관계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해 복받는 사람들이 되려면 순종하기는 순종하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6:17)”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30:9)” 형식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길이 올 한 해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복 받는 비결이며 첩경입니다. 순종으로 복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순종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형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델을 본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종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모순되지만 그래도 순종합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창22:2)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비추어 두 가지로 모순이 됩니다. 창15:4,5에서 아브라함의 친아들을 통하여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했는데 이삭을 죽이면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겠습니까?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준다고 했는데 이삭을 바치면 누가 그 땅에 가서 삽니까?(창12:7,15) 이성적으로 도저히 설득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당시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자식을 번제로 드리는 악습이 있다하여도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순종하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속히 순종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침 일찍이 일어나 출발하였습니다. 시간을 끌면 마음 바뀌기 때문에 신속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감정과 기분에 의한 순종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강한 순종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집을 떠난 지 3일이 지나도 아브라함의 순종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형식적인 순종도 아니고 체면을 세우기 위한 가식적인 순종도 아니었습니다. 비가와도 핑계 대지 않도록 아예 집에서 나무를 쪼개어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갔다(창 22;4). 두 사환의 반대를 아예 차단하기 위해 두 사환을 산 밑에 놓고 올라갑니다(3,5). 사환을 데리고 가면 이삭을 죽이라고 놓아두겠습니까? 아무리 순종하는 이삭이라도 불이 타오르면 도망칠 것이기 때문에 이삭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결박해버렸습니다(9). 철저하고 진심으로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진정 마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습니다. 이삭 자신도 얼마든지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 있지만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죽기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이 순종으로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맹세하면서까지 아버지를 축복해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16). 순종으로 큰 복을 받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17,24: 35). 아버지의 순종으로 자손들까지 크게 복을 받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16-17).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자식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 폴 비츠 교수가 쓴 ‘무신론의 심리학(아버지의 부재와 무신론 신앙)’에 나온 것처럼 어릴 때 “결함 있는 아버지”로 인해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면 무신론에 빠지게 됩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불순종했던 무신론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흄은 두 살 때, 러셀은 4 살때, 사르트르는 15개월에 각각 아버지를 떠나보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 히틀러, 마우쩌뚱의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전혀 폭력적인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아버지의 부재, 무기력, 죽음, 학대에서 유발된 트라우마와 결핍이 하나님 이미지를 왜곡시켜 하나님에 대한 거부와 불신앙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의 경우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4세 이전의 아이의 대뇌는 백지 상태와 같아서 외부 정보를 그대로 흡수합니다. 4세 이전의 환경과 교육의 영향은 아이의 성격과 소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잠재력이 100이라면 그 이후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100의 수준의 사람이 되지만, 다섯 살이 되어서 교육을 시작하면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80%의 수준밖에는 안 되고, 10살이 될 때는 60%, 15세 때는 40%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순종 교육도 어릴 때 시켜야 합니다. 요즈음 창의성과 자율성, 개성을 살려준다고 아이들이 자기 멋대로 하도록 방임하는 교육을 시키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만 어머니 말을 잘 듣는다고 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세 자녀를 둔 아버지가 장난감 하나를 사왔답니다. 그러자 서로 장난감을 가지겠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엄마 말에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이 가져라."라고 했답니다. 잠시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일제히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럼 아빠가 장난감 가지고 노세요 " 방임하면 아이들 복받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올 한 해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순종교육부터 먼저 시켜야 합니다. 순종은 가정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J.S. 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은 순종 속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고 H. 자일스는 "진정한 순종보다 더 거룩한 것이 없고, 더 고상한 원리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자녀의 미래를 사라"의 저자 존 S.C. 애보트는 순종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픈 딸에게 약을 먹이려는 엄마와 딸의 대화입니다. "애야, 약을 먹게 일어나렴." "엄마, 나 그 약 안 먹고 싶어." "그러면 안 돼. 약을 먹어야 좋아지지." "엄마! 약 먹는다고 좋아지지 않을 거야. 먹기 싫어." "아니야, 약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 "그 약이 쓰단 말이야. 먹기 싫어." 엄마는 계속해서 설득하고, 아이는 먹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딸과 계속되는 실랑이에 지쳐버린 엄마는 약을 던져 버리거나 먹기 싫어하는 약을 강제로 먹이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아이를 설득하지도 못하고 강제로 먹일 만큼의 강한 의지도 없어서 결국 약을 버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에게 가서 진찰을 받을 때 아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약을 먹이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처방 약을 당연히 복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의사는 아이의 병세가 더 심해진 것을 보고 다른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 쓴 약을 복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수긍하지 못했고, 계속되는 엄마의 새로운 시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다정하지만 어리석은 엄마는 다시 약을 버렸고, 아이는 고열에 계속 시달렸습니다. 다시 진료할 때 의사는 처방대로 아이에게 약을 먹이지 않아 쇠약해 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합병증으로 인해 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칼 비테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칼 비테의 교육법으로 후대에 프레벨과 몬테소리에 영향을 미쳐 유아 교육의 기초를 다진 선구자가입니다. 그는 자녀를 낳은 지 15일부터 조기에 언어를 가르쳤고 말씀에 따라 철저히 순종교육을 시켰습니다. 여섯 살 때 무려 삼만 단어 이상을 구사하게 되었답니다. 모국어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 6세부터는 외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8세가 되었을 때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답니다. 그 결과 13세에 철학박사가 되었고 16세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답니다. 평범한 아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확실하게 언어의 기초를 다지자 어느 날 천재가 되는 것을 칼 비테는 직접 자기 아이를 통해 증명해 낸 것입니다.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한데 무엇보다 순종교육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2. 한 번의 순종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온전히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올 한 해 한 번 복 받고 끝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1월도 2월도, 올해가 다 가는 12월까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이삭은 지속적으로 복은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민 32:11)”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신 1:36)”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속적인 복을 누리려면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삭은 어린 시절에도 순종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이삭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삭은 아버지의 몰상식한 행동에 대하여 분을 내지 아니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에 저항하지 아니합니다. 이삭은 순종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합니다. 자기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고민하다 부당하다고 반항할 법도 한데 칼을 내리치는데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고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순종하며 죽고자 하는 자는 사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의 믿음을 확증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순종함으로 확고한 언약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순종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예표가 되는 영광을 함께 받았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순종합니다. 40살에 결혼합니다. 180살까지 살았으니까 지금 말하면 청년의 때입니다.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삼손처럼 자기 마음대로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여인을 골라 결혼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장년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26장에 보십시오. 흉년이 들어 그랄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6장 12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삭은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기본적인 배경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심히 창대하게 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축복을 이삭에게 가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서 백배나 얻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원래 이삭은 유목민으로 농사는 서툽니다. 더구나 그해에는 흉년으로 종자도 건지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백배나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자신도 기대하지 못할 정도로 놀랄 만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심으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의 가치가 퇴색된 시대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하는 시대입니다. 제레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이라는 책에서 이제 수직적 권력의 시대는 지났고 수평적 권력의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화적 의식에서 신학적 의식으로, 신학적 의식에서 사상적 의식으로, 사상적 의식에서 심리적 의식으로, 심리적 의식에서 생물학적 의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식이란 과학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화석 연료에 기반을 둔 현재의 산업 인프라는 전체적으로 노화하고 있으며 점점 황폐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력 기술과 인쇄물이 주가 되었고, 2차 산업 혁명은 내연기관과 전기 커뮤니케이션이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3차 산업 혁명은 재생가능 에너지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 이끈다는 것입니다. MIT의 레이 커즈와일 박사는 현재의 속도 그대로를 가정해 2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대략 2만년 동안의 진보를 목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20세기에 이룬 것보다 1000배가 더 큰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5일 마다 한 세기에 맞 먹는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인간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문명이 어떻게 바뀌고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결국 순종을 통해 복을 받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진정한 복을 잃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22:14에서 "그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고 말씀합니다. 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기록하였고, 14:12에서는 성도들의 인내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잃었던 낙원 순종으로 회복한다는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고 요한계시록에서의 순종은 다시 그 길을 회복케 했습니다. 누가 그 길을 열어 놓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또한 빌립보서 2:8-9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그리고 히브리서 5:8-9 "그가… 순종함을 배워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 한다"(요 5: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여 부활 승천할 때까지 순종으로 구원사역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사역의 목적은 순종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있어서 순종은 하나의 생활원리였습니다. 주님께 있어서 순종은 하나의 기쁨이었습니다. 주님께 있어서 이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있어서 이 순종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단순한 미덕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의 본질입니다. 심장이 뇌의 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허파가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호흡이 멈춥니다. 10조개에서 100조개에 이르는 세포가 순종하지 않고 혼자만 먹으려고 질병에 걸립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원에 있을 때의 일이랍니다. 수도사가 되겠다는 두 사람이 수도원을 찾아왔답니다. 그때 프란체스코가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답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을 했답니다. "배추를 거꾸로 심어라." 뿌리를 하늘로, 줄기를 땅으로 하여 심으로고 하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답니다. 한 사람은 프란체스코의 말대로 순종했고, 또 한 사람은 "말도 안 된다"라며 제대로 심었답니다.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사로 입문하게 되었고, 제대로 심은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즐거이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해 줄 정도의 복을 받으려면 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1:19)” 어차피 하나님 믿고 순종하는 인생 즐겁게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을 즐겁게 따르는 것입니다. 봉사하라고 하면 즐겁게 봉사하고, 전도하라고 하면 즐겁게 전도하고, 효도하라고 하면 즐겁게 효도하고, 용서하라고 하면 즐겁게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즐겁게 사랑하고, 선교하라고 하면 즐겁게 선교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의무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특권입니다. '권력의 미래'를 쓴 조지프 나이 교수는 '파워'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그 방법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미하는 하드파워, 두 번째는 문화-가치-대외원조-국제 교류 등을 두루 뜻하는 소프트 파워, 세 번째는 이 둘을 조화시킨 스마트 파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 원하는 복을 받는 것은 스피릿 파워, 영적인 힘, 순종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무수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첩경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즐겁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얼마나 즐겁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이삭이 우물을 팝니다.
이삭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가를 잘 설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부자가 된 것을 시기하여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막았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리적으로 지중해성 기후와 아열대성 기후 및 사막 기후가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 년의 강수량은 기껏해야 200밀리 안팎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물은 대단히 중요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 우물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26장 15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메워버립니다. 그리고 쫓나냅니다. 경쟁회사가 생긴 것입니다. 경쟁자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려고 하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도 기쁘게 순종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싸우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랄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다시 팝니다. 그랄 목자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또 주어 버립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투었다는 뜻으로 '에섹'이라 불렀습니다. 이삭은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갑니다.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고 붙여 줍니다. 다투는 것보다 더 강한 뜻인 '적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더 강도 높게 우리의 순종을 방해하는 요소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를 건너가라고 말씀합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강풍이 불고 죽을 위협에 처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는데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순종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기근(흉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창12:10). 말씀대로 살았는데 순종하였는데 왜 부도나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실패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회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잘 믿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기까지는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25년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후손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는 43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배를 저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항해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항해이니 당연히 순풍이 불어야 합니다. 그런데 광풍이 부는 것입니다. 미친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물이 배에 들어 닥쳤습니다. 침몰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다를 말씀 한 마디로 바다를 잔잔케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연 질서를 다스리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시고 마게도니아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빌립보 감옥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곳에서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받습니다. 간수와 그 가정 식구가 구원받는 기적을 체험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다 마실 물이 없는 곳을 만났을 때도 그곳에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길 원하십니다. 즐거이 순종함으로 주시는 축복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이삭은 모든 우물을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과 다투지 아니함으로 넓은 공간이라는 뜻으로 '르호봇' 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다투지 않고 즐거이 순종할 그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육적 복뿐 아니라 영적복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고”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원수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반대자들도 인정해 줍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악을 선으로 이겼습니다. 무력으로 다투지 아니하고 양보하고 기도했습니다. 이삭은 지는 자 같았지만 이기는 자요, 빼앗기는 자 같았지만 오히려 더 넓은 땅을 차지하는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쉽게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순종은 풀무불을 통과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다시 일어납니다. 이삭은 우물을 몇 번이고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고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28절을 보십시오. 29절을 보십시오. 올 한 해 이런 복이 우리 성도님들에 넘치시길 바랍니다. 성경 기록 상 최초로 자식을 축복한 족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주신 복을 자신이 받고 그 복을 자식에게 계승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삭은 족장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사신 분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175세(창25:7), 야곱이 147세(창47:28), 요셉이 110세(창50:26)를 살았는데 이삭은 180세(창35:28)를 살았습니다.
올 한 해 이삭처럼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풍성히 누리시길 바랍니다. 순종하기는 순종하되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롬6:17). 순종할 때는 즐겨 순종해야 합니다.(사1: 19). 순종할 때는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삼상15:22). 순종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신 28: 1-14, 사 1 ; 19), 순종하면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행5:32). 순종하면 비를 주시되 때에 맞게 주십니다. 곡식을 주시되 여유있게 주십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를 주십니다. 수를 초월하여 승리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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