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

하나님아들 2024. 6. 6. 23:56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

 

1절 천지의 창조

 

태초에(베레시트)

추상명사 ‘태초’의 원어 레쉬트는 로쉬와 동일 어근에서 온 것으로 ‘처음’, ‘시작’, ‘최초’ 등의 의미를 갖는다. 태초는 시작을 의미 한다. E.J. Young 등은 그 시작을 창조 행위에서 찾는다. 태초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태초란 영원 가운데 처음으로 시간이 개제하는 순간, 즉 시간자체의 시작 또는 만물이 처음으로 존재하는 순간으로 정의됨.

태초의 성질은 1) 단회적 성질을 갖음. 만물이 창조되는 첫 순간으로서의 태초는 절대적으로 1회성임. 그 이전에 또 다른 시점으로서의 태초는 없음. 또한 그 이후에 동일한 의미의 태초 역시 반복될 수 없다. 2) 체험 불가능적 성질을 갖는다. 태초에 있게 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임. 요 1:1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그 분이 곧 하나님”이라 했다. 이것은 이 책이 하나님의 저작이라는 인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 단어에서부터 계시에 의해서만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하시니라

‘창조하다’라는 뜻의 ‘바라’는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 경우에만 사용한다. 1)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행동으로 하나님이 動作主일 때이며 2) 재료 사용 없이 만듦, 즉 ‘창조’를 표시 할 때임. 이것은 절대 창조, 무에서 창조이다.

 

하나님

구약 성경에서 2,570회 사용. 철자상으로 볼 때 ‘엘’은 ‘울’과 유사하며 ‘엘힘’은 단수형인 ‘엘로’와 ‘알라흐’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알라흐’에서 온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엘로힘’의 아람어 동치어가 ‘알라흐’이므로 더 분명하다. 여기서 ‘알라흐’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명칭 ‘엘로아흐’는 ‘위엄 있으신 하나님’을 지칭한다. 여기서 복수형을 취한 이유는 ‘하나님의 장엄성’을 나타내는 ‘장엄복수’일 뿐 다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며 다만 우주의 주인으로서 위엄있으신 하나님을 선포 한다. 단지 창조자임을 고지 할 뿐이다. 주어가 복수인데 비해 동사가 단수인 것은 장엄하신 하나님과 그의 단독 사역이 대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

구약에서 ‘샤마임(하늘)’은 3 가지 의미 중 하나로 사용된다. 1)‘영계 하늘’ 2)‘공간 하늘’ 3) 모든 천체가 포함된 ‘우주 하늘’을 가리키며 천지란 곧 ‘대우주’를 의미한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하늘과 땅 ‘하사마임 붸하아레츠’는 통상적으로 해, 달, 별을 포함한 온 우주를 의미 한다. 태양계 내의 작은 별인 지구가 1절에서 창조된 것이라면 해, 달, 별 등의 기타 천체도 함께 창조된 것이 분명하다. 1절은 해, 달, 별을 포함한 우주 하늘과 그 안에 포함된 지구가 창조되었음을 선포한다. 결국 본절은 ‘태초’란 시점에 ‘하나님’이 ‘온 우주’를 무에서 ‘창조하셨음’을 선포한다. 분문은 우주가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요, 진화론자들의 말처럼 진화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절대자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그래서 본절은 ‘ 이 세상이 언제 어디서 와는가’라는 난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 주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선포한다. 하나님은 당연히 계시고 또 장엄하신 신임을 고지한다.

창조된 우주는 해, 달, 별을 포함하는 하늘과 별 가운데 하나인 지구를 가리킨다. 본 절이 단지 3절로부터 서술되는 6일 창조 사역의 제목이 아닌 한 하늘과 땅은 첫째 날의 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첫째 날에 창조된 사물은 3절의 ‘빛’하나만이 아닌 ‘천지’, 즉 ‘우주’와 ‘빛’임을 유의해야 한다. 특히, 창조의 특성은 무에서의 창조이다. 무에서부터의 창조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하나님 계시에 의해서만 사고될 수 있는 것이다.

 

창 1:1의 ‘태초’와 요 1:1의 태초‘는 같은 것인가?

일반적으로 다르다고 설명된다. 요 1:1의 ‘태초’는 ‘말씀’ 즉 제 2위 되신 성자 예수와 관계된 시점이고 후자는 물질과 관계된 시점이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 전의 태초’이며, 창세기의 태초는 ‘물질계의 태초’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 이 해석의 문제점은? 1) 창조 이전의 시간적인 태초는 의미를 갖지 못함. 의미상 모순성-시간은 피조 된 세계의 존재 형식에 불가하다. 2) 어자적 일치성-요한복음에서 태초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경의 ‘레쉬트’ 와 동치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관사 없이 사용되는 것은 70인경이 관사 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 복음의 저자가 그 서두의 ‘태초’와 창세기에서의 ‘태초’가 동일한 것임을 밝히려는 의도임에 분명하다. 3)의미의 연결성-요 1:1의 태초를 ‘이전 태초’로 이해 한다면 1절은 ‘태초 이전 즉 영원 전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로 해석해야 한다. 이 해석이 하나님의 제2위에 관해서 잘 못된 것을 말해 주지는 않으나 저자가 본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와 다르다. ‘말씀’은 제 2위인 성자께서(언제부터 계셨는지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천지가 창조되던 때, 즉 태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물질에 대한 말씀의 선재성(pre-existence of the Word)을 의미 한다.

 

‘1절 제목설’은 성립될 수 있는가?

창 1:1~2을 6일 창조 사역에 포함하지 않고 3절부터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표적 이론은 ‘1절 제목설’이다. 1절을 제목으로 놓을 때 야기되는 문제는 중요한 2가지가 있다.

- 땅의 창조 날이 없어진다.

- 2절의 땅을 설명하기 어렵다. 출 20:11은 6일 동안에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

셨음을 선포하고 있다.

 

2절 창조된 지구의 최초 상태

 

그런데 그 땅은

‘하아레츠’ 그 땅이란 앞 절에서 언급한 땅, 즉 지구를 가리킨다. 1절의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한 언급은 돌연히 땅에 관한 언급으로 축소된다. 하늘이 비록 무한히 크고 중대하지만 창세기의 기사는 6일 창조가 땅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모여 준다. 그러나 이 말이 하늘에 대한 창조가 1절에서 종결된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 6일 창조 기간 동안 우주에서도 6일 동안 그대로 진행되었을지라도 상세한 설명을 생략함으로써 그것이 구원사적인 내용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땅은 창조에 있어서 우주의 중심이라 할 수 없으나 구원사적 계시(종교적 측면)에 있어서는 우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중조론자들은 이 구절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파괴된 무질서를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원어 ‘하예타 토후 봐보후’는 개역과 같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로 번역하기 어렵다. ‘혼돈’은 구약 성경에서 ‘사막’, ‘광야’ 등과 같이 완전한 꼴을 갖추지 못한 사물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여기서도 아직은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사물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여기서도 아직은 완전한 꼴을 갖추지 못한 사물의 상태를 표현한다. 또한 ‘공허’란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거주민이나 서식 생물이 없는 지역을 뜻한다. ‘그 땅은 부정형이었고 미거주상태였으며’라고 번역된다.

 

흑암

원어 ‘호쉐크’는 빛의 상대로서 물리적 의미로는 ‘어둠’을 말한다. 중조론자들은 하나님은 본래 빛을 창조하였으나 땅을 심판하심으로 인하여 非本來的인 악한 어둠이 개제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어둠에 휩싸인 우주를 창조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론은 영적인 어둠과 물리적 어둠을 혼돈한 데서 오는 곡해이다. 사 45:7에는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어둠은 빛이 창조되기 위한 배경 또는 바탕으로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

‘신’이란 ‘루아흐’는 간혹 ‘바람’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하나님의 바람’으로 번역항f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그러나 ‘루하’가 하나님의 칭호‘엘로힘’에 의해 수식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단지 바람이라기 보다는 ‘신’임을 확실케 한다(창41:38; 출 31:3; 신24:2; 삼상 10:10). 또한 운행하다는 동사자체가 여기서 인격적 동작인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를 묘사하기 때문에 단순히 바람의 사역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신이 창조의 사역을 수행하셨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사 40:12~13; 시33:6;, 104:30; 욥33:4 등이다.

그렇다면 본 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본성을 계시하는 구약성경 최초의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요1장의 성자의 천지창조 사역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천지창조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동시 사역이 설명된다.

 

 

3절 첫째 날의 두 번째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원어‘봐요메르 엘로힘’의 의미는 ‘또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이다. 6일 사역 중 10회 사용되는 것으로 神人同形論的(Anthropomorphic) 표현중 하나이다. 많이 사용한 이유는 시공세계의 언어권에 속해 있는 저자가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본체에 관해 언급할 때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신적 언어의 빈곤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들어내기 위함이었다.

 

빛이 있으라

 

원어 (예히오르)‘빛이 있을지어다’ 히브리어 동사 3인칭 간접명령

예히는 be 동사 하야(있다)의 칼, 미완료, 3인칭, 단수 단축형 -> 3인칭 대상을 향한 명령 또는 희구를 나타냄.

이 명령은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과 땅이 창조된 직 후 주어진 것으로 보임. 하나님은 천지창조된 즉시 빛이 땅에 비치도록 하심으로 지구에 첫째 날 아침이 오게함.

 

빛 ‘오르’는 어떤 빛인가?

St. Augustine

-영적인 빛->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비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설명함.

=> 그러나 이 빛에 의하여 땅에 낮과 밤, 아침과 저녁이 왔으므로 본질상 물질적인 빛이 타당함.

Halley & Murphy

-태양 빛 자체

=>그러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문은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하시며 비로소 “빛이 있게 되었으며”( 3절), 광명이 없던 가운데 “광명을 만드사”비치게 하셨음을 나타내기 때문

Calvin, Leupold, Keil

물리적 빛으로서 태양과 분리된 상태에서 비치는 빛.

-> 매개체인 천체와 구별된 상태에서 어떻게 존재가능한가?

“빛 이 해와 달보다 먼저된 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순서에서(태양 없는 빛을 만드심)태양과 달 없이도 친히 그의 손에서 가지신 빛-영적 빛을 말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음을 증거 해 준다”(Johm Kalvin, op,cit., p. 52.)

 

빛이 있었고

본절은 첫째날의 두 번째 사역을 소개. 하나님은 어둠으로 휩싸인 천지를 창조하시고 즉시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광명과 어둠이 교차하는 세상을 만듬. “빛이 있으라”는 명령은 빛을 실재하도록 함으로써 무한한 능력을 실증해 줌. 빛이 창조되기전의 어둠은 빛이 창조되기 위한 선재 조건이었으며 빛이 있으므로 비로소 존재가치를 발휘하게 됨. 뿐만아니라 빛은 이후에 창조되는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선재요소가 됨. 이와 같이 한날의 창조는 다음 날들의 창조에 착실한 과정이었다.

 

4절 빛의 판정 및 빛과 어두움의 분리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함은

-하나님의 성취의 완전성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성

빛의 창조는 어둠창조의 완성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함. 예) 창1: 1, 1:31, 2:18

결과적으로 “좋았더라”고 하심은 자신의 일을 주의 깊게 살피시고 그 결과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임.

이 표현-> 창조의 완전성, 계시의 완전성, 물질의 善性을 나타냄.

 

빛과 어둠을 나누사

원어를 직역하면 ‘또 하나님께서 그 빛 사이와 어두움 사이를 나누셨다’이다.

낮과 밤의 시간적 교차는 빛과 어둠을 구분한 결과이므로 이들을 동일시 할 수 없다.

본문의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빛 자체와 어둠자체의 구분을 의미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유기능 발휘

-빛과 어둠의 상호관계

결국 본 절은 어둠가운데서 기능을 발하게 된 빛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과 빛과 어둠의 서로 다른 기능을 소개한다. 빛과 어둠의 구분적인 기능 발휘는 지구에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빛과 어둠의 분리는 지구에 관계된 첫날의 마지막 사역이었다.

 

5절 첫째 날의 경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치하시니라.

원어는 ‘하나님께서 그 빛을 위하여는 낮이라고 일컬으시고 그 어둠을 위해서는 밤이라고 일컬으시니라’로 직역됨.

-> 낮과 밤이란 지구의 일정 면적에 빛과 어두움이 나타나는 시간을 지칭하는 이름임. 낮과 밤의 명칭구분은 하나님께서 낮과 밤의 서로 다른 목적을 따라 엄연히 구분하셨음을 보여줌. ‘낮과 밤이 있는 세계’ - 피조된 세계의 변천성과 시간성을 특징 짓는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이는 첫째 날이니라

원어의 문자적 해석 ‘그리고 한 저녁이 있었고 한 아침이 있었다. 첫째 날(이니라)’이다. 첫째 날( 에하드)은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을 제외한 모든 날들에서 처럼 관사없이 사용함. 이는 창조의 날이 여섯째 날까지 중단없이 계속되었으며 제 6일에 진행된 창조사역이 종결되었음을 암시. 각 날의 끝에 이 말이 기록됨은 첫째 날을 위시한 각날의 길이가 모두 동일했음을 암시함. 본 구절이 저녁부터 첫째 날을 언급함은 저녁에서 아침까지의 시간은 단지 첫째 날의 끝부분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진행되지 않았던 밤 시간을 의미 한다. 아침부터 아침까지 완전한 첫날.

창조의 날들이 24시간의 태양일 (문자적 1일)임을 확실시 함. 이외에도 본 절의 내용이 설명하는 몇 가지 사실은?

- 아침과 저녁은 한 날 구성

1회의 아침과 저녁으로 한 날이 구성. 이 저녁과 아침은 빛이 먼저 비치기 시작한 지구의 반쪽 부분을 기점으로 해서 말해지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말함.

-자전 시작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이 시작되었고 태양이 위치한 방향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 낮과 밤을 형성

-일자의 시작

지구는 낮과 밤의 교차에 의해 일자가 시작되었다. 아침은 저녁으로 끝나고 또 저녁은 아침으로 연결되는 쉼 없는 시간의 수레바퀴가 힘찬 전진을 시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첫째 날의 창조 사역은 천지의 창조, 부가적 창조, 물인 흑암과 물의 창조, 빛의 창조, 빛과 어둠의 구분, 낮과 밤의 명칭 구분 등이 었으며 이 위대한 첫째 날의 창조 사역은 저녁과 함께 고요히 막을 내렸다. 하나님은 지구의 쳇바퀴가 이 때 저녁을 맞게 하심으로써 통상적인 태양일을 창조의 날로 확정 하셨다. 이 때 저녁이 오게 하시지 않으셨드라면 한 날의 길이는 오늘날과 달랐을 것임.

 

날에 대한 제 이론(The Day Theories)

- 장기 연대론: 창조의 날을 지질학자들이 구분하는 무생대, 시생대, 원생대, 고생대, 중생

대, 신생대 등의 6시대와 동일시 하는 이론

- 갭을 가진 문자적 1일설: 창조 사역은 문자적 날 안에서 진행되었고 각 날들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설

- 계시적 1일설: 창조의 각 날을 창조 사역에 사용된 날로 취급하지 않고, 각 날의 창조

내용을 계시하는데 사용된 날로 해석하는 이론

- 중조설(The Gap Theory): 1절과 2절 사이에 긴 시간적 간격을 개재시킴. 장기 연대론

의 하나. 장기의 간격을 각 날에 골고루 분배시키지 아니하고 6일 창조 앞에 편중시키는

것.

 

성경의 창조연대와 지질학상의 연대

 

17C 아일랜드의 성경학자 어셔(J. Ussher)감독<신구약 성경 연대기>

-천지 창조 연대 B.C. 4004년(John J. Davis, op, cit., p.41.)-인류의 계보 근거

cf) 지질학자 : 45억년. 측정방법- 지질연대 측정법

 

지질연대 측정법의 역사와 연대측정상의 문제점(지질학적 연대의 비정확성)

- 19c 후반 W.T. Kelvin - 약 5,000만년

- 1896년 Henri Becqqerel 방사능 발견

- 1920년 Emest Rutherford 암석중의 우라늄과 헬륨의 분비량을 측정하여 연령을 계산

해 내는데 성공.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 개발

 

문제점

- 제 2원소의 함유 가능성

- 방사성원소의 급속한 붕괴 가능성:

제 1원소의 붕괴량은 시간에 따라 일정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지만 지구 내부에 있는 암

석들은 시간과 관계없는 물리화학적 변화에 따라서 급속히 붕괴되어 제2원소화 될 수 있

다.

지구의 화산 활동은 방사성 물질이 갑자기 붕괴할 때 생기는 열작용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빈번한 화산활동 등에 의해서 많은 양의 방사성 원소가 갑자기 붕괴될 수 있음.

-제1원소의 상실가능성: 암석의 측정에 있어서는 방사성원소가 전부 붕괴되어 제2원소화

되는 것으로 계산되고 있지만, 방사성 원소는 가열될 때, 물에 노출될 때 자연상실될 수

있어서 그 상실된 양의 원소가 붕괴하는 시간만큼 반감기에 빨리 도달 할 수 있음.

 

성경의 창조연대 계산상의 문제점

어셔 감독이 계산한 우주의 창조연대인 B.C. 4004?

성경의 족보에는 탈락된 부분이 있음.

*성경의 족보 기록 목적

죄의 결과로 인한 인류의 사망의 필연성, 수명의 점차적인 단축경향, 아담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선별된 인물들의 히브리인식 계보를 소개.

*성경의 족보에 의한 계산 연대: 맛소라 사본 BC 4004년, 70인경&사마리아 오경 5411년

-> 지질학적 성경연대와 성경의 연대는 어디에서 만날까? 그 접촉점은 문명의 흔적을 확실하게 찾아 볼 수 있는 Halaf 문명시대(B.C. 4,000년 전), 또는 메소포다미아 문명 시대(B.C. 5,000년 경)이전이 될 것임. 이 연대가 수만 년이나 수십만 년 이상은 아일 것임. 여기서는 문명의 분명한 자취는 발견되지 않음.

 

제 2일 궁창의 창조(6~8절)

 

6절 궁창의 창조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원어는 ‘물가운데 궁창이 있을지니라’로 직역됨.

궁창-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단단한 금속성 물질로 된 ‘하늘의 지붕’(잠8:27~28), 높은 산을 기둥삼아 지탱하는 (욥26:11) 물을 담고 있는 다락방과 같은 것 등으로 생각함. 이는 자연과학적 사실의 표현보다는 궁창의 광대성과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서사시들의 특징을 드러냄.

히브리어에서 궁창은 라키아의 어원인 라카는 ‘내뻗다’, ‘펼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라키아는 ‘확장된 것’, ‘펼쳐진 것’이라는 뜻. 이것은 곧 아랫물과 윗물 사이를 구분하는 ‘대기권’을 가리키는 것임. 하나님께서는 물로 뒤덮인 지표위의 물의 일부(혹은 수증기)를 위로 올리고 그 중간을 가스층의 대기권으로 만드심으로써 윗물과 아랫물의 경계로 삼으셨다.

비즐리(W. Byzely)는 이 수증기 층은 200~300마일까지 펼쳐져 있으며, 그 수증기 층을 지구 위에 있는 바닷물과 같은 밀도로 압축한다면 5마일 두께의 물이 될 만한 양임을 증명함(Loc. cit.,)

 

7절 궁창의 창조사역 서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원어 “봐야아스 엘로힘 엘-하라키아”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와 같이 번역됨. ‘그가 만들었다’라는 봐야아스는 동사 아사(make)의 칼,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 와우계속법 단축형이나 일반적으로 아사는 ‘바라’와 달리 주어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제한 없이 재료의 사용여부와 무관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나타냄.

여기서 궁창창조의 재설명은 “궁창이 있으라”는 명령이 궁창을 실존하게 하기에 불충분하므로 보충하기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짐과 동시에 이후에 그것이 실행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위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서술이다.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혹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판정이 둘째 날에 언급되지 않은 것이 사탄이 이 날에 타락하여 공중의 권세를 잡았기 때문이라 함은 창 1:31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창조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을 선언하고 있음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칼빈은 셋째 날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두 번 반복된 것을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즉 앞의 것은 둘째 날과 관계된 것임을 암시한다.

 

8절 궁창의 새로운 명칭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하늘 ‘쇠마임’은 높다는 뜻을 가진 동사 ‘솨마’에서 온 것으로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궁창은 공간 하늘이며 공간 하늘은 우주의 하늘에 연결되는 부분으로 궁창의 위치를 분명히 하고, 하늘이 그러하듯 궁창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봉사하기위하여 만들어 졌음을 밝혀 준다.

 

제 3일 지표와 초목의 창조(9~12절)

 

9절 육지와 바다의 창조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첫날의 창조사역은 둘째 날과 연결되고, 둘째 날의 사역은 셋째 날에 연결되고 있다. 첫 날에 창조된 빛은 둘째 날의 궁창 창조로 인하여 불순 가스가 제거되고 맑은 공간, 즉 투명한 대기권이 생겨나서 공간을 통하여 자유롭게 지상을 비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 전체를 덮고 있었던 아랫물은 이 빛을 땅에 직접 공급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셋째 날에 이 물들을 한 곳에 모으셔서 빛이 궁창을 통하여 땅에 직젖 공급하는 방편을 만드셨다. 따라서 둘째 날의 창조는 셋째 날에 연결되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완성되었다.

‘한곳으로 모으고’의 한곳(마콤에하드)는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제까지 물로 온통 덮여 있던 지구 표면 전체가 두 장소로 분리될 것을 가리킨다.

 

뭍이 드러나라

원어 의미 ‘ 그 뭍이 보여질지니라’

지각의 침강이나 융기에 의한 현상으로 지구 표면에 나타난 동시적 현상으로써 물과 육지에 양자의 양자의 결과를 함께 미쳤을 것임. 그 방법과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감추어져 있음을 인정하고 머리숙여 감탄하는 것이 마땅하다.

 

10절 뭍과 물의 새로운 명칭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뭍에는 정관사가 있고 땅에는 없음. 이것은 땅이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임을 지적함. 이것은 지구 표면에 드러난 육지가 땅의 일부로서 결국 ‘땅’이라고 불린다.

바다가 없었다면?

바다를 창조하시되 그 넓이를 적절하게 하시며 깊이와 물의 양 등을 짜맞추시듯 정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경탄한다.

 

11절 식물의 창조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속에 씨가 들어 있는 열매를 생산하는 과목을...

본 절에 나타난 세 종류의 구분은 외양적이고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를 반영한 것이며, 이간이나 동물의 용도에 따라 구분한 것임.

씨에 대한 은급이 없는 이 식물은 소위 식물학에서 고등식물로 분류되는 종자식물 이하의 것, 즉 은화식물을 가리키는 듯함. 채소라는 말 ‘에세브’는 풀보다는 더 크고 고등한 식물류를 가리킴. 즉 야채, 곡식류 등과 같이 씨로 번식하는 것들로 풀과 나무사이에 속한 모든 식물을 총칭함.

 

땅은 ... 내라

땅은 식물 창조의 중간 동인(mediate agent). 식물 창조는 간접 창조의 성격을 갖는다. 땅은 씨를 내도록 명령받지 않고 식물 자체를 내도록 명령 받았으며, 또한 씨가 명령의 대상이 아니라 땅 자체였기 때문임.

 

각기 종류대로

식물이 유전될 때 특별한 제한을 가지되 일정한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생물학적 변화 가능성의 외부 한계를 설정하고 있음을 명시함. 따라서 자연적으로 종의 혼합이나 종의 변이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근대 생물학은 이 사실을 증명해 줌. 유전연구 결과 모든 생물체는 생식세포안에 DNA를 포함. 이 구조안에는 조상의 유기체에 포함된 구조만이 후손에게 전달되도록 설정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줌.

 

땅 위에

구절 해석-> ‘땅은 풀과...채소와...나무를 땅위(혹은 지면위에)에 내라’임.

 

12절 식물 창조의 성취 서술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을

 

땅이 ... 내니

 

 

 

 

 

 

제 4일 광명들의 창조

 

14절 광명의 창조

 

하늘 궁창에

원어는 궁창이 하늘에 연계된 소유 구문으로 나타남. 8절 궁창은 하늘. 이는 하늘과 같음을 뜻하고 단지 지구 주위를 둘러싼 공간인 대기권을 가리킴.

14절의 ‘하늘의 궁창’은 8절의 대기권 궁창인 아니라 보다 확대된 의미의 하늘의 한 다른 궁창, ‘천공(the vault of heaven)을 의미. 대기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닌 허공, 공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용례가 됨. 비슷한 용례 다수 보임(시 19:1, 150:1; 단 12:3 등)

 

광명들이

원어 예히메오롯에서 동사는 단수, 주어는 복수. 수의 불일치로 일반적 용례 불일치. 그러나 비슷한 예외적 구문은 주어의 성수를 따라야 할 술어가 주어보다 앞에 위치하는 경우 발견됨. 이 경우 형식보다 의미가 강조됨. 마오르(광명)은 문자적으로 ‘빛을 가진(혹은 빛을 비추는)물체’를 의미. 이 사실은 광명(마오르)이란 빛이라는 말 오르와 물체를 가리키는 마가 결합된 꼴. 그러므로 광명이란 창조된 천체에 3절에서 창조된 빛이 결합된 것임을 분명히 하며 “광명이 있으라는 말씀은 그 동안 존재하지 않던 천체자체를 존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기존하던 천체인 태양과 달에 빛을 부여하여 빛을 가진 천체로 만드신 것을 의미.

마오르(광명)은 등(민 4:9), 눈이 밝음(잠15:16), 얼굴 빛(시 90:8)등과 같이 다양한 뜻으로 사용됨.

 

있으라

원문에서는 문두에 위치하여 상당한 강세를 줌. 개역의 “광명이 있어 ...하라” 표현은 강세적 의미를 드러내지 못함. 있으라는 명령에 따라서 비로소 빛 없는 천체가 광명으로 존재하게 됨. 변화된 사실은 천체 내부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현상일 뿐 외관상으로 지상에 나타난 현상은 그동안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광명이 있게된 것이므로 있으라가 더 적합한 표현임.

알더스(Aalders):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는 명령은 이미 기존하던 천체가 지구에 빛을 발산하는 광명체로 제정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 엘리컷의 첫째 날부터 이미 존재하던 광명이 넷째 날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보이게 된 것이며 그 동안 태양은 대기권의 가스로 인해 지상에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 그러나 이 같은 의견이 용납될 수 없음.

 

 

주야를 나누기 위해

광명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은 지구에 주야를 구분하기 위함. 지구가 빛 자체의 궤도를 공전하지 않는 한 주야만 나뉠 뿐 사시와 연한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와 역학적 관계에 있는 태양을 광명으로 만들어 이 모든 사역이 함께 나타나게 하였다.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위해

문장구조는 목적어 사이에 전치사 레와 접속사 붸가 있어서 징조, 사시, 일자, 연한이 분리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징조는 복수형이며 문자적으로는 징조들, 표적들 또는 증표들을 의미한다. 일자, 사시, 연한 과는 무관한 독립된 의미로 천체의 징조 또는 증표를 의미함.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때 동방 박사에게 별이 나타난 사실이나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 태양이 빛을 잃은 사실 등은 좋은 예임(마 27:45)

 

15절 광명의 기본 사역

 

땅에 비취기 위하여

광명이 빛을 비추는 것은 그것의 존재 목적이며 근본기능임을 밝힘. 땅위에 비치는 모든 빛은 오직 광명으로부터 옴. 땅위에 빛을 비치는 것은 해, 달, 별들도 포함. 이 기능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해 즉시 발휘됨. 수억 광년 거리의 별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즉시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 광명들이 되어라

원문 하야 동사가 전치사 레와 연결되어 관용구를 이룸. 숙어적 의미를 살려 ‘그들이 광명들이 되어라’로 해석. 전치사 레의 숙어적 의미를 살려 번역함.

따라서 천체들이 빛을 소지하여 광명들이 된 사실을 확실시 한다.

 

그대로 되니라

7절, 9절에서와 같이 성취된 사실을 표현한다. 광명 창조와 빛의 비춤이 인간 이성에 비추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자 즉시 성취되었다. 개역성경은 괄호속에 넣어 불필요한 내용처럼 표시함은 잘못임.

 

16절 광명들의 구분과 그 구별된 사역들

 

큰 광명을 만드셨으니

큰 광명은 태양과 달을 말함. 물론 별들 가운데 이들보다 더 큰 별도 존재하지만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눈에 드러난 현상 그대로 큰 사실을 지적한다. 크다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로 땅에 관해서는 크다는 의미임.

‘만드셨으니’에는바라 대신 동사 아사가 사용. 이것은 기존 천체에 광명을 주입하여 광명으로 만드신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준다. 즉 1절에서 창조된 천체와 3절에서 이미 창조된 빛이 재료로 사용된 사실을 보여 줌.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기 위함이며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기 위함이라

큰 광명-태양, 작은 광명-달.

태양이 낮을 다스리고 달이 밤을 다스린다는 표현은 통치의 의미보다는 사역의 의미로, 두 광명이 지상에 빛을 공급하는 사역의 시간적 범위를 지적함.

 

 

 

 

17~18절 광명의 기본 사역 재설명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셨으니

모든 천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생물에게 베푸신 자애로운 배려와 섭리를 계시한다.

그리고 광명은 하늘 궁창에 만들어진 후 임의로 궤도를 이탈할 수 없도록 제한됨.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만 기능을 발휘함.

 

비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각각의 기능들을 광명들에 부여하시므로 별의 진화나 천체 기능의 진화론적 발전설은 용납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배제하고 천체 자체의 본연적 기능을 설명할 수 없게 됨. 천체의 모든 기능은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또 친히 역사하심으로써 발휘하게 되었다. 본문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위해 기록된 것임.

 

제 5일 어류와 조류의 창조(20~22절)

 

20절 어류 및 조류의 창조

 

생물 중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게 할지니라

개역성경 “번성케 하라”는 A.V.(Authorized Version으로 불리는 King James Version)의 오역을 따른 것으로 본문의 의미를 곡해함. 이유는 본 동사 ‘헤엄치게 하라’는 수중생물의 긴밀한 수중활동을 묘사하나 개역의 ‘번성케 하라’는 다산번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임. 이것은 본문이 보여주는 내용과 불일치함.

생물은 ‘네페쉬 하야’로 표현된다. 혹자는 ‘하야’를 혼으로 해석하여 ‘동물에게 혼이 있는 것’으로, ‘생명’으로 해석하여 ‘생명을 가진 헤엄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둘의 해석은 본문의 의도와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 다음절인 21절에서 성취를 표현하면서 이 단어가 생물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임. 여기서 생물 ‘네페쉬 하야’란 식물을 제외한 숨쉬는 동물을 총칭함. 이유는 ‘하야’라는 말이 ‘숨쉬다’라는 의미의 동사 ‘나파쉬’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숨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땅위 하늘 구d창면에서

지상에서 한정된 높이의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새의 활동범위가 한정되어 있음을 의미함. 일반적으로 ‘하늘 궁창’이란 대류권과 성층권을 포함하는 넓은 공간을 지칭하나 ‘하늘 궁창면’이란 그 이하의 범위를 지칭한다.

 

21절 어류와 조류의 창조 서술과 그 판정

큰 물짐승들과

원어 ‘타닌’은 히브리어 동사 ‘타난’(길게 뻗다, 뻗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긴몸집을 가진 동물을 가리킴. 원어 역은 긴 몸집에만 특징을 한정하지 않고 큰 몸통을 특징으로 들어내기 위해 ‘큰 물짐승’으로 보다 폭 넓게 해석하였다.

 

 

모든 생물 즉 물을 헤엄쳐 다니는 어류들

‘어류’란 수중곤충에서 거구를 가진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수중동물 전체를 가리킨다.

 

모든 날개 달린 새를

여기서 새라고만 말하지 않고 날개 달린 새라고 표현한 것은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에서 날아다니지 않는 온갖 종류의 조류를 총칭하기 위해서 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무생물과 사람을 제외한 동식물의 창조에는 ‘그 종류대로’가 창조와 생육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즉 생장과 번식을 계속하는 동물과 식물이 구별된 대로 일정한 유전방식에 따라 품종별로 번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본문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는 말은 창조 시부터 동물들이 다양한 종류로 생성된 것임을 보여줌. 여기서 창조하시다 ‘바라’가 새롭게 사용된 것은 본 절의 창조물이 그 동안의 창조물들과 달리 호흡하고, 활동하고, 의식작용을 가지는 특별한 존재이며, 또한 이들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창조법을 사용하셨음을 보여 줌.

 

22절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선포

 

그들에게 복을 주어

복을 주다 ‘예바레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용 가능한 단어로, 사람에게 사용될 때 ‘축복하다’, ‘복을 빌다’, ‘송축하다’이고, 하나님께 사용될 때 ‘복을 주다’로 번역됨. 이 날의 창조에 있어서 드러난 또 하나의 특징은 창조된 어류에 복을 주신 일이다. 중요성을 돋보이게함.

 

생육하고 번성하여...을 채우라

하나님의 축복 선언은 어류와 조류가 인간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의 돌보심과 배려하심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한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기자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공중의 새를 보라...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마6:26)고 하신 말씀에서 발견됨. 창조주 하나님께서 수중생물과 공중생물의 번성과 증식을 통해 영광 받으시길 기뻐 하셨다.

 

 

제6일 동물과 인간의 창조(24~31절)

 

24절 동물의 창조

 

땅은 생물을 내라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생물을 창조할 수 있었음. 그러나 땅에 명하심은 땅이 모든 생물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는 의도이며, 땅에 생물창조의 중요한 재료와 조건을 공급했음을 보여주기 위함. 하나님의 이 명령에 의해 모든 생물은 땅과 긴밀한 관계를 일생동안 유지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됨. 땅을 통해 생물을 내실것을 의미.

가축과 기어 다니는 동물과 짐승을

땅이 내도록 명령받은 동물은 세 종류로 구분됨.

가축, 기는 동물, 땅의 짐승(하이토 에레츠, 가축과 구별된 야생동물-인간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는 동물)

 

그대로 되니라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또 괄호 안에 넣어 본문에서 제외시킨다. 이것은 15절에서 범한 실수의 반복이다. 마찬가지로 본 구절은 하등의 의심없이 본 절이 귀결로써 필요함.

 

25절 창조사역 서술 및 하나님의 판정

 

땅의 짐승, 가축, 땅에 기는 모든 것

동물들의 배열순서가 24절의 명령과 달리 기록된다. 혹자는 24절의 순서는 등급의 순서이며, 본 절의 순서는 창조 시간적 순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폴드(Leupold)는 이것을 교차 대구적 도치(chiastic inverts)로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함. 단지 표현상의 기법에 불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는 것’ 뒤에 ‘하아다마’(땅)와 결합하였다. 이것은 엄밀히 ‘땅바닥’을 의미하므로 ‘땅에서 기는 것’ 보다는 ‘땅바닥에서 기는 것’이 더 적합한 번역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서술형식상 하나님의 판정이 성취서술 다음에 소개됨.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판정이 여기서 소개됨으로써 동물의 창조가 다음에 설명될 여섯째날의 두 번째 창조물인 인간 창조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을 보여 준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축복이 선포됨은 곧 그에게 예속된 동물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선포된 것임을 의미함. 이같은 사실은 인간이 타락하여 저주 받음으로 동물도 역시 연대적으로 함께 저주 받은 사건을 볼 때 더 분명해 진다.(롬 8:19~22; 창 3:14~19)

 

26절 인간의 창조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원문은 ‘나아세’로서 ‘아사’(만들다)의 1인칭, 복수, 연장형으로 나타남. 개역 성경은 “우리가...을 만들자”라고 올바르게 해석하였음.

‘우리’는 누구인가?

1. 장엄 복수로 취급하여 복수의 의미 대신 단수의 의미로 해석함.

2.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체에게 말씀하신 독백으로 해석

3.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에 대하여 설명함. -> 받아들여지는 해석.

‘우리’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체를 향하여 일컫는 인칭의 표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교통(內的交通)으 보여 줌.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습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지칭한다는 결론에 따라서 “우리의 형상과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의미함.

‘형상과 모습’은 ?

교부들에게서부터 현재의 학자들 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육신상의 닮은 모습을 의미하며, 후자는 윤리적인 국면의 닮은 모습을 의미한다고 설명함. 그러나 히브리어 표현형식의 동의 대구법의 대구를 이루는 어휘들은 종합적인 의미를 나타내거나 보다 진전된 의미를 나타낸다.

특별히 여기서 형상과 모양은 종합적 의미를 나타내는 듯함. 그리고 두 용어의 결합이 나타내는 것은 신인간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유사성과 사역상의 유사성으로 집약될 수 있음.

이때 형상이란 영적이고, 인격적인 유사성 지적함이 분명함.

또한 역사상의 유사성에 의해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역을 부여 받았다. 이것은 인간을 만드신 중요한 목적으로 나타남. 즉 인간이 하나님처럼 만물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사실에서 하나님과 사역의 유사성을 가짐(창 1:26)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절 남자와 여자 창조 서술

 

자기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저를 창조하시니

‘자기형상’, ‘하나님 형상’, ‘저를’, ‘사람을’, ‘그들을’ 등 동의적인 어휘들이 반복되었으며, ‘창조하시다’는 3회 반복 사용됨.

1장 전체에서 겨우 5회 사용되는 ‘창조하다’(바라)가 본 절 한절에서 3회 사용.

-> 이것은 인간 창조의 영광스러움이 이 날 대절정에 이르렀음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임.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

앞 구절의 ‘그를’ 혹은 ‘그 사람을’이라는 단수 표현은 여기와서 ‘그들을’이라는 복수표현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그’와 ‘그들’이 교차적으로 사용된 것은 두 사람의 완전한 연합을 암시함(창2:18~25, 막 10:6~7). 본문의 ‘남자’와 ‘여자’는 원어 상으로는 ‘수컷’과 ‘암컷’을 의미함. 본 구절은 인간이 진화의 소산이 아닌 창조의 소산이며 인간의 신적 근원성을 보여줌.

 

28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선포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과 번성의 축복이외에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사역의 축복을 받은 것임. 또 하나의 차이점은 전저와 달리 ‘그들에게 이르셨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임. 22절에 어류와 조류에게 이르시되 ‘요메르’ 대신 가로되 ‘레모르’가 사용됨. 이 ‘가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위한 연결어에 불과할 뿐 직접 대화를 나누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르시되’는 ‘그가 말씀하셨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을 의미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선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시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셨던 최초의 계시는 인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또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생육과 번성(파라베라바)’는 22절에 어류와 조류에게 주어진 축복과 동일. 이것은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동물들에게도 함께 적용됨. 인간의 출생은 축복의 성취로 나타남. 그러나 이 축복은 무 차별적인 성의 결함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신 일부일처의 신성한 결혼제도 하에서만 성취되도록 하셨음을 유의해야 함.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선언은 단순한 명령이 아닌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의 기능과 능력을 부여하는 또는 창조 시 부여된 기능에 대한 확인임.

‘땅을 채우라’는 원어 ‘미레오 에트하아레츠’인데 동사 ‘마레’가 여기서 타동사로 사용되므로 본문과 같이 번역함이 타당. 이 명령에 의해 인간은 생육이라는 자연적 방편이외에도 미지의 지역에 대한 개발의지와 개척정신을 본능적으로 갖게 되었다.

‘땅을 정복하라’는 축복 선언은 오직 인간에게만 발견되는 내용임.정복한다는 것은 단지 땅을 편만하게 채울 뿐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적절히 사용하는 것을 뜻함.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위에서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을

본 절의 명령에 따라 26절의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될 수 있게 되었다.

 

다스리라

원어‘라다’는 ‘복종시키다’, ‘소유하다’라는 의미. 따라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인간이 동물을 굴복시키고 소유하는 주권행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지상의 모든 생물을 인간의 손에 위탁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생물들에 대한 주권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형상대로’,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그 의미이다. 그러나 이 주권은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하에서만 발휘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마 10:29.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허락하에서만 동물에 대한 주권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시편기자는 이 같은 大權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29~30절 인간과 동물의 식물

 

보라 내가 너희에게 ... 주었노라

보라는 원어로 ‘히네’-> 하나님께서 식물을 주시는 은혜로운 배려에 대해 집중하도록 의도한 기록임.

칼빈은 이 부분을 “보라 내가 너희를 짓기도 전에 이미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놓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너희의 자비로운 아버지임을 믿으라. 너희가 창조되기 전에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듯이 너희에 대한 배려는 장래에도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을 교훈적으로 표현함.

 

씨 맺는 모든 채소와 나무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이간 타락 이전에 이미 식물을 양식으로 주신 사실은 인류 타락 이전에 이미 식물계에는 사망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물을 먹이로 주시지 않는 이상 인류의 타락 전, 동물계에도 사망이 있었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모든 식물의 푸른 것을 먹이로 주었노라

 

 

31절 하나님의 최종 판정과 제 6일의 경과

 

만드신 바 모든 것을 보시니

이는 그 대상이 여섯째 날의 창조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지으신 모든 창조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판정이 기록되지 않은 둘째 날의 창조물도 여기서 판정의 대상에 포함됨(9절).

 

그런데 보라 심히 좋았더라

원어 ‘붸히네. 그런데 보라’는 다음에 소개되는 ‘심히 좋았더라’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개역 성경은 이것의 번역을 생략하였다.

제6일 사역의 종합적인 판정 결과는 심히 좋았더라로 포현된다. 이것은 만물창조의 정점인 인간 창조가 이날에 완성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감격적으로 포현하신 것이다. 이 말은 창조의 6일 가운데 어느 한 날도 어느 한 창조물도 미흡한 것이나 악한 것이 게재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6일 창조는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감탄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완전무결한 창조였다. 심히 좋았더라고 창조자 자신이 판정하신 이 날은 6일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도 종결적인 창조의 날이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여섯째 날 욤하쉬쉬’는 정관사에 의해 다른 날과 구별됨. 이 것을 직역하면 ‘그 여섯째 날로 창조의 날 가운데 가장 기억할 만한 중요한 날임을 암시한다. 또한 정관사 없이 표기되던 모든 날들이 종결되는 날임을 표시하기도 함. 그러므로 창조의 6일은 일자순으로 계속하여 진행되었고 첫째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이어지는 창조 주간을 이루었다. 이로써 지구산에는 창조의 한 주가 경과되었고, 이것은 인간의 역일에 있어서 주일을 이루는 시초가 됨.

 

제7일 하나님의 안식

 

제1절 창조의 완료

 

그리하여

‘그리하여, 붸’의 번역. 개역은 이것의 번역을 생략함. ‘그리하여’란 창 1:1~31과 같이 ‘창조한 결과로써’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본 절은 앞장 전체의 총 결론을 진술함.

 

천지와 만물이

원어 ‘하솨마임 붸하아레츠’는 ‘그 하늘과 땅’으로 직역된다. 여기서 그 하늘과 땅은 창 1:1에서 언급한 하늘과 땅을 지시한다.

 

 

다 이루니라

‘다 이루니라’의 원어는 ‘봐예켈루’임. 이 단어의 어원인 ‘칼라’는 ‘완성하다’ ‘마치다’ 등의 의미를 내포함.

 

2절 하나님의 인식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제7일 안식후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을 예시하기 위한 잠정적 중지 상태를 표현한다.

 

그 지으시던 일이

이것은 일곱째 날에는 이미 창조사역이 끝난 뒤임을 암시 한다.

 

안식하시니라

원어 ‘솨바트’는 ‘고요히 앉다’, ‘휴식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인 동형론적 표현으로 휴식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는 단지 상징적 의미의 휴식일 뿐 창조 이외의 다른 방향에서의 계속적인 활동과는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요 5:17). 곧 6일 창조에서만의 안식을 의미할 뿐 하나님이 모든 사역을 중지하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안식이 완료된 사실을 표현하므로 당일로 안식일은 종료된 것을 의미 한다. 안식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날에 안식하신 이유는 창조의 정점인 인간에게 6일의 노동 후 제7일에는 안식한다는 사실을 표본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피조세계의 모든 것들이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안식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이란 모든 일의 중단이 아니라 활동 방향의 변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안식제도는 창립되었고 이스라엘의 안식일 제도가 선포되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하나님의 안식에서 기원한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창조 이후 인류의 시조 때부터 지켜오던 것이 바벨론, 메소포다미아, 애굽 등 여러 이방 나라들에게 넘어가서 그들의 종교적 특성에 따라 토착화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안식일은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온 날이기 때문이다(출 16:22~30)

 

3절 일곱째 날의 복 주심

 

일곱째 날을 복 주사

비 생명체에게 복을 주심은 특이한 일임. 무생물에 복 주신 것은 없다.

추측되는 이유

1. 앞으로 복이 선포된 이 날을 지키는 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을

예시하기 위해서다.

2. 하나님의 복의 영역은 생물인 동물과 인간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피조된 세계의 모든 영역, 심지어 시간이나 날 또는 무생물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다.

 

 

문자적 창조론(Literal Creation Theory)

 

1절 문자적 창조론의 정의와 의의

문자적 창조론은 신학적 편견을 개입시키지 않고 신화적 의미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비약적 또는 상징적 의미를 개임시키지 않고, 그 대신 문자적 의미로 사실적 의미로 역사적 의미로 해석하는 창조이론이다.

 

2절 문자적 창조론의 타당성 : 제목성/중조설

넷째 날에는 1절에서 창조된 천체 곧 해와 달과 별에 3절에서 창조된 빛이 주입되거나 반사함으로써 발광체와 반사체가 창조되었다. 이 때 우주 내에 수많은 별들도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해 발광체나 반사체가 되었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 날에 비로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된 달에 빛이 반사되어 지구에 빛을 비추는 반사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해, 달, 별 등 모든 천체는 지구와 함께 첫째날에 이미 창조된 것이다.

 

3절 문자적 창조론의 특성 : 무에서의 창조/ 급격한 창조/ 6일 안에서 계속된 창조

결과적으로 우주와 만물의 창조는 계속되는 6일 동안 완성되었으며 날과 날 사이에 간격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따라서 ‘6일 창조’란 말은 ‘6일 안에서 계속되는 창조’, 혹은 ‘계속되는 6일 동안의 창조’란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유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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