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결론[39] 성경: 히13;17-25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7절) 여기 인도자는 지금 자신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은 마음이 동해서 하는 것, 복종은 하기 싫지만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아서 사역자들의 근심이 되는 신자들은 그렇게 하면 자신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는 것입니다.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18-19절) 그리고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경고를 듣는 부족한 신자라도 그 상대를 위하여 기도를 부탁받고 있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20-21절)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인도자요, 큰 목자가 되는 이유는 죽음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느냐면 자신의 피로,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도는 우리에게 선과 즐거움을 우리 속에 이루시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22-25절) 지금까지 한말을 받아들이라, 디모데가 오면 함께 그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문안하고, 축복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1. 복종하라.(17절) 교회가 민주적이고, 좋은 공동체이지만 각자가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지도자로 선출하거나, 배우고 있는 인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기본중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페이도’라는 헬라어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종이라는 말은 ‘훼페이’ 라는 말로써 - 아래 놓인다, 혹은 포기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곳 신자가 인도자 아래 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도자의 말씀 앞에 자신을 꺾는 것, 굴복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인도자가 아니라, 인도자가 가르치는 말이며,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인도자의 가르침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인도자들의 가르침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 된다, 는 것입니다.
주전 300여 년 전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작은 군단의 병사들을 이끌고 강력한 방어벽을 쌓은 한 성을 정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성주가 나타났습니다. “당장 항복하라.” 성주는 비웃었습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항복하느냐. 우리의 군대가 훨씬 많아서 당신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그때 대왕은 “왜 항복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 주겠다.”라고 말하고 군사들을 한 줄로 서게 한 뒤 30미터도 넘는 절벽으로 곧바로 잎으로 라고 말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알렉산더의 병사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주저하지 않고 행진하여 절벽 밑 바위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금이 저리는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열 사람이 떨어져 죽은 뒤 알렉산더는 나머지 군인들을 멈추게 하고, 자기에게 돌아오게 했습니다. 성주와 군인들은 그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알렉산더 대왕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엘렉산드 대왕의 힘일 뿐 아니라. 상대를 두렵게 만드는 능력이요, 힘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따르는 사람이 된다면 사탄은 천리 밖으로 도망을 갈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듣는 것보다,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복종은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생각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계획과 목적 아래에 자신을 두시고, 완전히 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복종하심으로 세상의 구주가 되셨고,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위대한 설교가 마이어(F.B. Meyer)는“많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자신을 복종시킬 때, 이 땅의 혹독한 상황들과 어려운 일들이 변하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아무리 옳은 일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삶의 동기가 훌륭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길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의 미래는 어두움이요, 심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쳐라 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이것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복종을 결심합니다. 이것은 실천에 옮기기 어렵고, 괴롭고, 쓰라린 고통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죽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그 복종의 훈련이 아브라함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이해도 안 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하는 것이 복종입니다. 이 복종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이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번의 복종이 있을 때마다. 자기는 죽고, 속사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놓는 것이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복종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고 나뿐 것이나,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 결단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복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로 바벨론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 나라의 관리가 됩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낙성식이 열렸습니다. 그날 나팔이 울리고 꽹과리 소리가 날 때 모든 참여 객들은 그 신상에 절을 하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엎드려 절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일로 인해서 그들은 왕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기회를 거부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말이 무엇입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 이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고,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쩌면 순종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말씀 드리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성경은 따지고, 계산하지 말고 복종하라! 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심할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포기해야할 자신의 생각이나, 일은 없습니까, 복종은 하면 간단하지만, 힘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왕의 복종은 국가를 살립니다. 지도자의 복종은 조직을 살립니다. 직분 자들의 복종은 교회를 살립니다. 신자들의 복종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복종을 왜 해야 합니까.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결론으로 복종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기도를 하라. 18절에“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19절에“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를 쓰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명령형으로 요청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도 좀 해주면 어떻겠니? 기도 해주면 고맙겠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로 서로 믿고 있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중보 기도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계획은 세우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셔야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요소요, 명령되어지는 가치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 시간을 구별해두면 얼마나 좋습니까, 기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하루의 첫 시간을 중시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신앙 위인들을 보면 대개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 올라가기 전에 마당을 돌아보고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입니다. 환경미화원들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일찍 나와서 자기 일을 하는데 목회자가, 직분 자가 성도가 그들보다 못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침 형 인간'이라는 책을 일반인들 많이 읽고 있습니다. 인생의 승패는 새벽에 달려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도 깨닫고 있습니다. 밤에 자지 않는 것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 아침에 자고 있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도가 새벽 무릎이 되면, 먼저 자신의 인생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세상을 깨울 수 있습니다. 시간에 가치가 다릅니다. 새벽의 1시간과 낮의 1시간은 그 무게가 다릅니다. 새벽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하는 사람이 창조적인 사람입니다. 아침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입니다. 아침이 없는 사람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아침의 시간을 활용하면, 하루 할 일도, 아침 먹기 전에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워서 아침을 맞이하지 마십시오.
어느 날, 한 사람이 강력한 연줄을 잡았습니다. 그가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을 얼마든지 도와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회장님! 사업 자금 좀 빌려주세요?”라고 하면 됩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이 뚝 떨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알아가면서 친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도가 “하나님! 사업 자금 좀 대주세요.”라는 수준의 기도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사업자금을 대주지 않으면 혼자 실망하며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항상 기도를 통해 얻을 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모하고 바라보는 사람의 기도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기도를 앞세우십시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자로 여겨지는 조지 뮬러는 기도 끝나고 15분 후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기도 끝나고 15분쯤 지나면 환경이 보이며 인간적인 생각으로 다시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기도가 없어도 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능함도 기도가 있을 때 그 빛을 발하고 오래 갑니다. 부족해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사람의 인생에는 실패가 있어도 기도의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돈으로 사는 가정은 망할 수 있어도, 무릎으로 사는 가정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학원으로 내모는 자녀는 망해도, 눈물의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자본이 많은 사업체는 무너져도 기도의 입김이 곳곳에 서린 사업체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거름을 많이 준 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은 기도를 축복의 거름으로 삼아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기도는 다른 사람 즉 사역자를 위한 기도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일이 많고,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기도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기도의 내용은 신앙의 내용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는 가를 보면 그의 신앙의 폭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3. 가서 보겠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가 놓였는데 오면 함께 가서 그들을 보겠다고 2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디모데가 놓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디모데가 감옥에 있다가 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함께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저자를 바울이 아닌가? 혹은 바나바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께 가서 너희를 보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들과의 관계가 굉장히 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냥 아는 정도라면 간다, 볼 것이다. 기다려라, 는 등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관계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내 믿음이 흔들리거나 혹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장문의 편지 보내고, 책망도 하고, 기도 부탁도 하고, 또 멀고 먼 곳에서 찾아오겠다, 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부모를 보라, 읽은 책을 보라,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된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요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관계를 가볍게 여기거나, 가벼운 관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뿌리가 약한 나무와 같습니다. 며칠 전에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의 간증을 들었는데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이북 선천에서부터 믿는 4대째 믿는 집안인데 기자로 37년을 살면서 갈등과 방황의 시간이 있었지만 교회는 빠질 수가 없었다는 말을 하면서 그 이유를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이 예배에 빠지면 얼마나 실망을 하실까 생각하니 그렇게 할 수 가없었다, 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의 관계를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말입니다. 그 분은 현제 온 누리교회 장로님이고 중앙일보 대기자로 있는 분입니다.
일본에선 사망 후 4일 이상지나 발견되는 사망자 한 해 1만5600명에 달하였습니다. 또 죽어도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는 무(無)연고 사망자가 3만 2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도쿄에선 죽는 이 10명 가운데 3명은 장례식 없이 곧바로 화장터로 가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30대 남성10명 가운데3명, 여성10명 중 2명은 50대가 될 때까지 결혼을 못할 거라고도 합니다. 결국 일본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가 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인‘가족 울타리’가 약해지고, 급속하게 진행된 저 출산·고령화로 돌봐줄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다 해도 20년 경기침체로 부모를 보살필 경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인구 구성 비율은 일본을 10~15년 차이를 두고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일본의 모습이 내일의 우리 모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도 혼자 사는 집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총각혼자, 처녀 혼자, 남자혼자. 여자혼자 사는 세대 말입니다. 그래서 집이 자꾸 모자랍니다. 혼자 살다가 죽어도 모르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귐이란 말은 Fellowship (koinonia)인데, 먼저 죄 있는 자, 부정해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 외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에게 다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의논하고. 질문하고, 기다리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생활이요 사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러니까, 쉽게 헤어지고, 쉽게 만나서 죽고 못 사는 것처럼 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알맹이가 없는 그런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가서 보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와서 본다니까, 자신의 마음가짐이나 생활 방식을 돌아보면서 아! 바로 해야 하겠다. 잘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알고 상대하고 살면서도 인간관계가 깊지도 못하고, 진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도 없고, 좋은 스승이나 선생도 없고, 신앙의 동지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벌판에 혼자 서있는 갈대요, 고아요, 외톨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잘해 야하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날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야단을 처도, 또 마음상해하거나 슬퍼해도 잠만 잘 자고, 밥만 잘 먹습니다. 컴프터나 스마트폰만 쳐다봅니다. 마음의 연대감이나,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 날 함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했어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대방이 자신 때문에 괜찮을까 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가지는 다 연결 되어 있습니다. 떨어지면 아프고 진물이 나는 것입니다. 피가 나는 것이지요. 코이노니아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굴도 성도 이름도 성격도 나이도 사는 것도 다르지만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어린아이입니다. 좋게 대해야 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철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은 디모데와 내가 너희들에게 가겠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가도 좋으냐. 가 아닙니다. 가면 되겠냐가 아닙니다. 그때 히브리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야! 오신데 우리가 이러면 안 된다. 오실 때 만날 때 실망을 줘서 되겠냐. 잘 모이자, 함께 기도하자. 약한 사람들을 챙기자, 다신 한번 정비를 하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이 죄에는 쾌락과 달콤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독에 빠질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이빨이 다 썩을 때까지 사탕을 먹는 것은 그것이 달기 때문입니다. 무당은 악령을 받았으니 항상 불안할까요, 악령에게 사로잡히는 순간 그들은 엑스터시를 느낍니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손에 돈이 들어오면 그 돈이 자녀의 등록금이든, 전세보증금이든, 무조건 도박을 하러 가게 되는데,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일종의 엑스터시를 느끼고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도박장에 들어가는 순간, 마치 내 집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며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아내가 울면서 호소하고 말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독된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되풀이합니다. 술이든, 담배든, 음란이든, 쇼핑중독이든, 드라마 중독이든, 게임중독이든, 원리는 같습니다. 잠시의 쾌락 이후에는 후회와 불안감이 오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즐거움과 편안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이 악령들이 사람을 사로잡는 미끼입니다. 마귀는 자기들의 쾌락을 희생자에게 공급합니다. 일종의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몇 천배, 몇 만 배의 이득을 취하며 그를 괴롭힙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 영혼을 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내 마음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라,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관계를 신앙적으로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무엇에 중독이 되었습니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맞아도 아파하지 않으며, 듣고 또 들어도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고백합시다. 오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복종의 영을 주소서, 기도의 영을 주소서, 관계의 영을 주소서. .잠속에서. 다 알고 있다 고, 언젠 가는 할 것이라고, 중요한 것을 안다고, 항상 말한다. 그러나 손도 모으지 않고, 무릎도 꿇지 않고, 눈도 뜨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멀었다고, 시간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기회가 있다고, 밤중이라고 말한다. 이미 새들은 날아갔고, 사람들은 살아졌으며, 주차장은 텅 비어 있도다. 눈은 감았고, 귀는 막혔고, 몸은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두렵기다. 꽃은 떨어지고, 잎은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겨울을 벗고 봄을 입는다. 사랑은 지치고, 소망은 죽었고, 믿음은 녹이 쓴다. 말씀만 남아 마음에 파도를 일으킨다. 밤에 취하여, 아침을 보내다니, 미련에 빠져서, 사랑을 잊었다니, 절망에 잠을 자다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다.” 노래 들리고. 사랑이 온다. 이제 일어나야 하겠다. 바람 일렁이는 들과 산으로 가야 하겠다. 천지가 녹색이요, 천지가 빛이요, 천지가 그의 생명이요, 그의 품인 것을, 못 보다니 나는 왜 밤을 떠나지 못하고, 침상을 떠나지 못하고, 겨울을 떠나지 못했는가. 열린 문을 보아라. 광야의 소리를 들어라. 세례요한을 만나고, 요단강에 들어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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