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피[20] 성경: 히브리서9:11-22절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제물이자 흠 없는 제사장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①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곳에서 드려졌고(11절) ② 동물의 피가 아닌 흠 없는 자신의 피로 드려졌으며(12절) ③ 단번에 완성하셨고(12절) ④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려졌기에 완전한 제사가 되었다(14절) 는 것입니다. 불완전했던 동물의 제사가 폐지되면서 새 언약의 주님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13-22절) 히브리서는 신앙의 세 가지 목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이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둘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희미한 그림자이며 모형이다. 셋째는 신앙에는 희생 제물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얻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며 그 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산 재물을 드릴 수 있다, 그 산제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동물로 드리는 제물은 의식적인 부정을 정결케 합니다. 예를 들면 율법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나,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것 같은 것을 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나 내면적인 것은 정결케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장막에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고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을 정결케하고, 인간의 양심으로부터 죄악을 제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동물로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앞으로 사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피가 이룬 성과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속죄(贖罪)의 피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심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그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은 죽어 있어서,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는 인간이 살려면 할 수 없이 짓는 것으로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죄를 짓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죄가 자신을 태우는 만드는 불이요, 쓸개즙처럼 쓰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죄의 달콤한 맛을 사랑하며 삽니다. 그들은 미래에 심판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이런 생각은 짓고 사는 죄로 인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많은 설교와 간증을 듣고 지옥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말을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자신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 잘되겠지 하고 삽니다.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사는 사람이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인간은 죄의 지배 아래 놓였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 누구든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가정은 흔들리고, 국가는 혼란하며, 개개인은 양심을 따라서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포로가 되어서 죄가 끄는 데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가 필요하였습니다. 사람이 남을 용서할 때도 희생이 따릅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한 아들이나 딸을 부모가 용서하는 경우에도 눈물이라든지 얼굴에 주름살이나 백발이나 마음을 에이는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속죄"라는 단어는 "카와퍼"(Kawhfer)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히브리어 사전에 보면 9개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라는 단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야 할 모든 메시지를 담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보혈 안에 담긴 속죄의 의미들입니다. 모든 것을 "덮다", " 갚다, 빚을 탕감한다, "분노를 가라앉히다, "취소하다" "용서" "자비를 얻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죄인인 인간을 당신의 품안으로 인도하실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온갖 불의와 불순종으로 점철된 인간에게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해결책은 바로 아들을 제물로 십자가에 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우리가 무엇인데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처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십니까’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 사함 받기위해서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행실을 그만두게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바른 행실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게 하고 앞날에 희망을 주십니다. 이제부터는 죄를 용서 받고,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죄의 빗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난 승리한 자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정상으로 만드시고, 그 관계가 지속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에게 주시고 날마다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속죄의 은혜요, 보혈의 능력입니다. 2. 새 언약(新 言約)의 피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이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언약은 인간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조건으로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어길 때는 그 언약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언약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이미 죄로 더럽혀졌으며 옛 언약을 지키지 못했고 율법을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이전의 제사 제도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동물제사를 대신한 하나님의 아들이 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행실이나 불순종으로 벌을 받고 추방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이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과거가 청산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애가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출발한지 10분쯤 지났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 청년이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몸을 뒤틀며 떨었습니다. 간질이었습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청년이 그를 의자 위로 들어 올려 눕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바클레이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질이 오는데, 바로 이틀 전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빨리 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친구와 저는 월남에서 함께 싸운 전우로 이 친구는 영국인이고, 저는 미국인입니다. 전쟁에서 우리 둘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한쪽 다리가 날아가 버리고." "이 친구는 옆에서 터진 수류탄으로 인해 한 쪽 가슴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조하러 오던 헬리콥터는 베트콩의 포화를 맞고 추락 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죽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일어섰습니다. 그러고 내 군복을 움켜잡고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죽을 몸이니 그냥 놔두고 가라고 계속해서 말했지만 그는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하면서 악착같이 나를 끌고 갔습니다. 자기 혼자 살기도 어려운 상황에, 그는 결국 나를 이끈 채 정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3년 전 나는 이 친구에게 간질 증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침 독신이었기에, 미국의 집을 팔고, 은행의 돈을 찾아서 친구를 돌보기 위해 영국으로 왔습니다. 이 친구에게는 언제나 곁에서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나는 친구와 늘 이렇게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껏 살아온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바클레이는 "나에게 조금도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해 해 준 일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만천하에 알려졌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결혼식장에서 성악 전공자가 축가로 '사랑의 기쁨'을 부릅니다. 이것은 마르티니가 작곡한 노래로 프랑스 말 또는 이탈리아 말로 흔히 불립니다. 곡이 아름다워서 클래식 가수, 대중가수 가릴 것 없이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가사는“사라진 별이여, 영원한 사랑이여, 눈물의 은하수 건너서 만나리. 그대여 내 사랑 어데서 나를 보나, 잡힐 듯 멀어진 무지개 꿈인가”이렇습니다. 가장 축복된 장소에서 곡이 좋다고 이런 잘못된 가사의 노래를 즐겁게 부르는 것은 인간은 사랑에 대하여 그렇게 무식하고 모른다, 는 말입니다. 마치 사랑이 이런 것이니 결혼하는 너희들 행복은 오늘뿐이다, 라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남녀 간의 사랑은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겉 치례가 되었고,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아예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고 살겠다고 말합니다. 말뿐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 혼자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재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미국에서 딩크족이 있는데 이들은 결혼의 목적을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판 괘락 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맞벌이 하는 부부를 말합니다. 이들이 신체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도 아니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출산을 연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애를 낳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돈을 버니까 수입이 두 배가 되고 거추장스러운 아이가 없으니 지출이 없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부담 없이 여행하고 휴가를 즐기고 또 살다가 싫증이 나면 아이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고 이혼을 할 수 있으니 좋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사랑을 주지도 사랑을 받지도 않겠다는 사람은 매우 교만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베드로는 절대로 자기 발을 주님이 씻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을 하기 전에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거절하거나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 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았고 또 받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시대는 부모의 손을 뿌리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사람도 싫고, 하나님도 싫다, 나는 지옥에 갈 테니까, 나를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 성경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 사람에게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묻기를 그 중요한 사랑의 핵심이요 뿌리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이다. 성경의 핵심이 사랑이다. 그렇게 단정을 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때는 우리를 위해서 무죄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피를 쏟았다, 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버리면서까지 하는 사랑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이요, 피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잘 알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셨다는 십자가 사건에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는 그분의 사랑이 진실이며, 분명한 사실이며, 명확한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염소와 송아지를 제물로 삼아서 피로써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서 자신의 피를 뿌려서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피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랑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단어요, 낱말입니다. 그 피로 나타난 사랑을 우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경배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자유케하고 해방시킨 힘이요 능력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에 참여 하는 것을 소홀하지 말고 그 피의 의미를 새기며 이를 통하여 주님이 주신 구원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새 언약은 피로 새운 것이요. 신약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3. 죽음의 피 죽어야 해결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위해서는 어린양이 죽고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애급의 처음 난 것이 죽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죽지 않으면 피가 없고 피가 없으면 죄의 용서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그 밤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덕택입니다. 그 악한 바로 왕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장자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은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야고보, 베드로, 바울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가죽 옷을 지어서 입히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양이 죽은 것입니다. 피를 흘린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를 당한 가인은 동생을 죽임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벨의 피 소리를 듣고 아담과 이브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애급에서 남자 아이가 나면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떨어 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을 듣고 모세를 보내시고 출 애급을 행하십니다. 피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피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을 요구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의 책임을 끝까지 물으신다면 우리는 도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받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은 교만이며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으실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영혼과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속죄의 제사는 우리에게 살길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심판의 문도 있지만 용서의 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 그 은혜를 누리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이십니다.(사1:18-22, 요14:6, 마11:27-28) 결론 어느 마을에 존경을 받는 노인이 있었는데 청년 몇 사람이 이 노인을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참새를 한 마리 잡아가지고 등 뒤에 숨기고 가서 질문합니다. 할아버지 참새를 한 마리 가지고 있는데 죽은 새입니까? 산새입니까? 산새라 하면 꼭 쥐어 죽일 것이고, 죽은 새라면 놓아서 살려줄 것입니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마음먹은 대로다, 살리겠으면 살리고, 죽이고 싶으면 죽일 수 있으니 네 마음먹는 대로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죽은 말씀으로 만들 것인가, 산 말씀으로 할 것인가? 는 여러분들이 결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은행에 저금해놓은 돈은 사용하지 않고 그냥두면 이자가 붙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사용하지 않으면 살아져 버립니다. 여러분 말씀의 가치를 아시고 말씀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옵니다. 인간은 무대 위에 서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관객은 떠나고, 화려한 조명은 꺼지며 막을 내릴 것입니다. 그때 허탈감을 가지고 무대를 내려올 수도 있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하였음으로 감사하며 끝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면 그 역할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의 자리는 이미 불 꺼진 객석이요, 막을 내린 인생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에서 죄는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으나, 아담과 이브는 따먹고, 그 결과로 사망이 오게 됐었습니다(창2:16-17,3). 이때로부터 죄의 본질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르킵니다.(사1:3). 그려먼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쉽게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참으로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는 거룩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거룩이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결 된 삶을 살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성별된 삶이 이루어지면 그곳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해 지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거룩을 잃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진정한 행복은 거룩에서 오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값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잘못 살아온 것입니다. 거룩이 없는 값싼 행복을 구하는 교회들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거룩이 없는 행복을 구하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으로 올 수 있는 길을 막고 말았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순종이 나옵니다. 순종은 거룩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순종 자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행할 때 그 사람은 변화합니다.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행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실천할 때 순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순종하심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나는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순종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생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순종을 안 할 수 없는 은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조영호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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