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성경에 드러난 노동의 의미

하나님아들 2019. 12. 15. 21:34

성경에 드러난 노동의 의미

 

 

성경에 드러난 노동의 의미

 

 본문: 창세기 2장 15, 3:17-19절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옆 사람하고 같이 인사 나눕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출근할 곳 있다면, 부러운 일.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아요.’ 이것이 우리나라 10대 기업안에 들었던, 한 몰락한 회장의 고백이였습니다. ‘출근할 곳 있다면, 부러운 일.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아요.’ 우리에 삶의 행복 가운데 하나가, 일하는 행복임을, 여러분 아십니까? 예로부터 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호모 바베르’ ‘노동하는 존재’라고 불러왔습니다. 우리 인류가 물어온,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노동이 있느냐? 동물들에게도 노동이 있느냐?’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물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노동은 있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한 노동은 있지만, 의미를 느끼기 위한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을 인간 되게하는, 사람을 사람 되게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노동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노동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직접 듣고자 합니다.


‘노동의 의미’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는, 노동이, 무엇이 아닌가를 말씀드리고, 이어서, ‘노동이 무엇인가?’ 그 적극적인 의미를, 성경을 통해서 함께 찾고자 합니다.


1. 첫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의 본문 말씀을, 그냥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제가 여기, ‘피상적’ 이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피상적으로, 겉으로만 읽는다면, 노동이, 마치 형벌의 댓가라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 범죄의 결과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게, 저주가 임한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땅이 저주를 받고, 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고, 자연속에도, 독소적 요소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타락의 결과다.’ 그러나, 깊이 들어다 보시면, 노동 그 자체를, 하나님이, 타락의 현상으로 설명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면, 타락하기 이전에도,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본문을, 두 곳을 선택했는데, 창세기 2장 15절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자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예.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만드시고, 그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여기 중요한 단어 둘이 나오는데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다.’


여기 ‘다스린다’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야보타’ 혹은 ‘야바타.’ 뭐 이런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꼭같은 단어가, 창세기 2장에 한번 더 나와요. 창세기 2장 5절입니다. 창세기 2장 5절을 한번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거기에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그랬는데, 여기 ‘경작’ 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경작’ 그런데 그게 ‘다스린다’ 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예요. 그러니까, 여기 창세기 2장 15절을, 이렇게 읽어도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그 동산을, 어떻게요? ‘다스리고’ 가 아니라, ‘경작하게 하시며’ ‘경작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노동하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타락 이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그것은 즐거워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영향인 것입니다. ‘즐겁게 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하실 때, 짜증나고, 권태롭고, 막 괴로우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타락의 영향이다.’ 타락의 영향이예요. 저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인류역사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가장 커다란 한 측면이 있다면, 노동의 적극적인 의미, 혹은, 노동의 신성한 측면을 강조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제외한, 모든 문화권에서는, 사실 노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이 들어가는 곳마다,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약 백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동관은, 매우 부정적이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양반일수록 일을 안하고, 천한 사람일수록 일을 한다는, 그런 생각이, 그런 사고가 있었죠. 그것이 소위 유교문화의 영향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처음 선교사님들이 들어와서, 선교를 할 때, 선교 실화 가운데,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조 말기에, 이미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뭐 알렌 의사 선교사라든지, 이런 분들이, 황실을 출입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한번은 선교사 두 사람이, 공터에 테니스장을 만들고, 열심히 테니스를 치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까이 지내던, 아마 장관쯤 되는, 참판인가 하는 아주 황실의 높은 분이 지나 가시다가, 선교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면서 하는 말이 ‘선교사님들, 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하십니까? 아래 것들 시켜서 하시지요.’ 예. 이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생각해 온, 노동에 대한, 땀 흘림에 대한, 생각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하기를 죽어도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영향인지 모르죠.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노동관은 아니에요. 성경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도, ‘너희가 일하기 싫거든,’ 뭐에요? ‘먹지도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노동의 적극적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첫째로, 노동의 한 부정적인 측면으로, ‘노동’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2. 둘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이다.’ 따라서 하십시요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성경은, 노동하는 그 자체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또 노동이, 노동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우리 존재의 근본 목적과 관련될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위에, 근본적인 목적, 아니 존재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존재하는 것.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오래된 고백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산다구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산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그 다음? ‘무엇을 하든지’ 그건 노동행위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행위 그 자체도, 무엇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번 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노동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동하자.’ 말하기는 쉬운데, 그러면 어떻게 노동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스스로 대답해 보세요. 쉽게 생각하세요. 자, 어떻게 일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 간단해요. 일을, 잘 하시면 되는 거예요. 일을 잘하시면 돼요. 일을 아주 잘 해야 되요. 이건 성실성만 가지고는 안돼요. 잘해야 돼요. 여러분,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아주 성실해요. 수술할 때도, 너무너무 열심히 해요. 그런데 수술만하면 사람이 죽어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안됩니다. 일을 잘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일을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떤 사람도, 모든 일을, 다 잘 할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야 되요. 그리고 그것이, 자기 직업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노동은, 우리를 직업의 자리로, 인도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 각자에게, 무엇인가 잘할 수 있도록, 각 사람에게, 적합한 재능과, 달란트와, 은사를 주셨어요.


그래서 내 재능과, 내 은사에 적합한 일을 하게 되면, 너무너무 즐겁고 기뻐요. 그리고 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직업을 가지면, 돈을 얼마나 벌 수가 있느냐?’ 이건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사고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자녀들의 직업 지도를 할 때도, ‘야! 이거 하면, 돈이 잘 벌린다더라’ 혹시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말을 꼭 기억해 두세요. ‘그건, 인간도 아니다.’ 그건 인간도 아니에요. 사람이예요.


그러나 그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에요. 그것은 성경적 가치관이 아닙니다. 그들이 잘 할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줘야 되요. 또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되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조건에, 다 합격해야 합니다. 좋아한다고만 해서도 안되고, 잘할 수 있어야 돼요. 저는 음악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제가 음악을 전공하러, 지금부터 길을 바꾼다고 하십시다. 어떻게 될까요? 저를 아는 분들만 웃고 계십니다.

그것은, 저를 비참하게 하고, 저의 음악을 접하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저는 좋아하지만, 잘할 수는 없어요. 두 가지 조건이, 다 맞아야 돼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어야 되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나의 직업일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간섭하시고, 내 삶을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직업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자 창세기 2장 1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요. 여러분이 여기서, 주어를, 주목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주어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시작이 돼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누가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놓으신 다음에,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겼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아담이 그 사실을 확신하고 일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이 에덴 동산을 맡겨주셔서, 이 동산을 경작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시키셨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아담, 얼마나 신바람이 났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겨주셨다.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일감을 맡겨주셨다.’ 그게 소명이에요. 소명. 여러분, 직업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소명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이 주신, 어떤 그런 감동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는 그렇게 말했잔항요. ‘직업을 천직이다. 천직이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직업이 있는 거에요. 그것을 발견해야 되요. 돈이 잘 벌리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업. 내가 좋아하고,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직업, 그 일 가운데로 불러주시고, 그 일을 하게 되면, 우리가 기쁘게 일할 수 있어요. 그리고 감격스럽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소명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소명을 발견하고 일한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직업을 말할 때마다, 또 노동을 말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들려 드리겠습니다. 중세기에, 어떤 성당 건물을 짓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세명의 인부가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세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어요.


‘당신들은 거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무얼 하고 계십니까?’

첫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보면 모르오? 돈- 벌고 있수다. 돈- 벌고 있수다.’

둘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보면 모르오? 돌- 깍고 있수다. 돌- 깍고 있수다.’

그런데 세번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저요? 하나님이 시켜서, 하나님 집을 짓지요. 하나님이 시키셔서, 하나님 집을 짓지요.’ 


똑같은 작업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지만, 이 세 사람의 태도는, 얼마나 달랐을까요? 자, 이 세번째 사람, 얼마나 신명나게, 문자 그대로, 신바람나게 그 일의 장에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노동을, 소명의 차원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평생 행복하게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노동이, 하나님의 소명인 것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저는, ‘노동이, 무엇이 아니다’ 라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아요. 하나 더, 한걸음 더 나아가서


3. 세 번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래요. 저는 오늘 메시지의 시작을, ‘노동은 결코,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동이, 하나님의 형벌이 아닐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설계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자, 창세기 1장 28절을 한번 보세요.


1장 28절, 같이 읽어요. 다같이 시작,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네. 28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첫 사람들을 창조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그들을 복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자녀를 낳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녀를 낳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말하죠?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뭐냐면, ‘땅을 정복하라’ 그랬거든요. ‘땅을 정복하라.’ 그런데 이 ‘땅을 정복하라’ 라는 말이, 땅을 막 파헤치라는 말이 아니에요.


‘땅을 잘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라! 땅을 잘 관리하라.’ 그것은 노동이예요. 그러니까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이예요.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땅을 정복하는 행위, 다시 말하면, 노동행위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가 일함으로써, 자신과,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죠. 또 노동의 결과로서, 좀 여유를 얻게 되면, 우리가 보다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 수가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 노동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을 해서 자신을 축복 되게 할뿐만 아니라, 이웃들을 축복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되게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즉, 내가 일해서 버는 결과로, 나 뿐만이 아니라, 이웃들을 복되게 하는 것, 우리 기독교의 노동관은, 거기까지 나아갑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어요. 에베소서 4장 28절 말씀인데, 자 저를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예.


‘네 손으로 수고해서, 선한 일을 하라.’ 그런데, 내 손으로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하는 목적이, 뭐라고요? 맨 처음에? ‘빈궁한 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그 일의 목적, 혹은 목표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라’ 이 말이예요. 열심히 일해 가지고, 다른 사람 많이 구제하기 위해서, 일을 하라. 사업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사업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면, 그 사람들을 축복되게 하는 거 아닙니까?


또,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자선하고, 돌아보게 되면, 이웃들을 복되게 하는 것이지요. 물론 구제 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구제하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또 선교하기 위해서 일해야 돼요. ‘하나님, 제가 좀 돈 많이 벌어, 많이 선교하게 도와 주십시요.’ 이게 기독교 노동관의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고, 선교하기 위해서 일하기 말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인의 의식을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었던, 이런 사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참 많이 했어요. ‘벌어서, 남 주나?’ 이런 말을 많이 했죠. 그런데 우리 기독교 노동관은, 벌어서 남 주는 것입니다. 남 주기 위해서 버는 거예요.


벌어서, 우리 가족들의 생계도 유지하지만, 그것으로, 이웃들을 윤택하게 하고, 이웃들의 삶 속에 도움을 끼치기 위해서, 우리는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남들에게 축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평소에도 늘 기도했지만,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아, 내가 우리교회 출석하는, 사업하는 분들을 위해서, 좀 더 기도를 많이 해야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돈을 좀 더 많-이 벌도록, 기도해야겠다.’ 그래서 그 돈을, ‘다- 쓰도록 기도해야겠다.’


그런데, 뒤에 것은 별로 마음에 안들지요? 앞에 것만 마음에 들고. 그런데, 뒤에 것이 분명해야, 앞에 것도, 해야 될 이유가 있는 거에요. 괜히 돈 버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을 가지고 잘 나누기 위해서, 축복하기 위해서. 할렐루야! 제가 들은 예기인데, 미국 LA에, 레이그 은혜교회라고 있는데, 이 교회에서, 세계 선교선터와, 또 교회당을 새로 짓기 위해 기도했는데, 어떤 한 분이 교회 목사님을 찾아와서 헌금을 했대요.


그런데 그 돈이,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300억 가량의 돈을, 헌금했다고 합니다. 300억원을.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너무 놀래 가지고, ‘제발, 이렇게 많이 하지 말라고’ 겨우 말려 가지고, 반만, 150억원만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듣고 ‘하나님!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 한명만 보내 주세요.’ 그랬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죠. 분당에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 교회의 송풍호목사: 퇴직금 30억을 헌금 : 건축)


우리가 정말, 이렇게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일을 하고, 땀을 흘릴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노동관이예요. 우리가 이렇게 근면한 노동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이 축복을 경험하고, 더 나아가서,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기 시작할 수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축복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 이게 바로 그런 의미에요. 축복으로, 세상을, 넘치도록 정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이런 축복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될까요? 어떻게?’


1.우선, 부지런히 일해야 되겠죠.

잠언서는, 우리가 일하는 태도를, ‘개미에게서 배워야 한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만, 또한 그 부지런함이, 너무 과도해서, 일 중독이 되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난 주일 설교의, 안식의 의미죠. 그래서, 지난 주일과, 이번 주일의 설교를 종합하면, 어떻게요? ‘쉬어가며, 열심히 일하자.’ 이 두 가지 균형이, 힘들지만, 우리가 이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 소련 공산당이, 그 쟈르 황제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소련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을 때,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이런 일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9일 동안 일하고, 제 10일에 한번씩 쉬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한 2년 반 동안 했답니다.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그래요. 첫번째 의도는 뭐냐면,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기독교는, 일주일에 한번, 즉 칠일마다 칠일째 교회에서 모이니까, 주일마다 모이니까, ‘아 열흘 만에 한번씩 쉬면, 교회는 없어질 것이 아니냐.’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일주일에 한번씩 쉬던 것을, 열흘에 한번씩 쉬게 되면, 더 많은 날을 일하니까, ‘그만큼 생산량이 증대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의도에서, 열흘에 한번 쉬는 제도를 채용했어요.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온줄 아십니까? 뭐, 생산량이 증대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형편없이, 인민들이 병들기 시작하고, 사기가 저하되고, 일의 결과가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2년 반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서 다시 일주일에 한번 쉬는 제도로 돌아왔대요.


그것은 뭘 말합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과 제도가, 옳았다는 사실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 한번 증명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2. 우리가 일하는 동안, 즐겁게, 일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서 3장 22절에 보면은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 그랬어요. ‘즐겁게 일하는 것처럼, 축복이 없다. 축복 가운데 축복은, 일할 때에, 즐겁게 일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는다.’ 구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회복이에요. 다른말로 말하면, 회복입니다.


여러분, 제가 처음에,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라고 했어요?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 뭡니까? 즐거워해야 할 노동이, 어떻게요? 괴로운 노동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기대를 회복해야 되는데, 회복해야 할 영역중의 하나가, 뭘까요? 우리가 정말 구원 받았다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할 때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


저는,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아주 즐겁게 일했던, 한 사람의,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볼티모어라는 도시에, ‘죤스 하킨스 하스피탈’ 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 현판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브룩스 로빈슨이라는 사람을 기념하여, ‘In memory of, Brooks Robinson’ 이라는 현판이 있어 있다고 그래요. ‘브룩스 로빈슨’ 이 사람이 누구줄 아십니까? 유명한 야구선수였죠. 볼티모아 야구팀의 3루수였어요.


아주 유명했던 선수예요. 이 사람이 3루수를 너무너무 잘하는 거에요. 그는 게임이 있을 때마다, 몸을 던져서, 정말 자기의 전 존재를 던져서,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로, 항상 야구팬들을 열광시켰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크리스챤이었어요. 그는 야구 선수이지만, 기도에 힘썼고, 아이들을 좋아했고, 병원을 찾아 항상 병든 아이들을 방문하기를 좋아했고, 막대한 돈을, 항상 병원에 헌금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볼티모어시와 병원에서는, 이제 그가 늙어서, 죽기 얼마 직전에, 이 사람을 기념해서, ‘로빈슨 형제 기념 센타를’ 지을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 사람을 보내서 물었답니다. 무슨 질문을 했느냐면, ‘당신이 죽은 다음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 질문을 하기 전에, 그들은 이미 그 현판에 새길 글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글이 뭐였냐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 우리 어린아이들의 친구, 브룩스 로빈슨’ 뭐 이런 글을 새길려고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랬더니, 뜻밖에도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래요. ‘저요? 아주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으로 기억해 주십시요.’ 그래서 그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들이 현판의 말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뭐냐면 ‘정말 성-실하지만, 동시에,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어린이들의 친구, 브룩스 로빈슨을 기념하여’ 그래서 그 현판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 노동관을 집약한, 아주 아름다운 글이라고 생각해요. ‘성실하면서도,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저는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우리 예수님의 이 땅에 계실 때의 모습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을, 아버지 요셉의 목공실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일하셨을까요?


그는 즐겁게 30년 동안 목수 일을 하시고, 또 공생애 3년 동안을 즐겁게 사역하시고, 마지막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그 길까지도, 그는 즐겁게 가셨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어요. ‘십자가로 가는 길’ 그 길은 고통스러운 길이었지만, 저는 우리 주님이, 그 길을 즐겁게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원하시면, 그 고통을 피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이것을 옮겨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 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저에게 참으로 인상깊은 성경말씀 하나가 있었는데, 그 말씀이,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인데 이런 말씀이 있더라고요. “저는, 즉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기쁨으로 견디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아야 할 여러분과 저를 생각하시며,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면서, 그는 기쁨으로, 십자가를 견디셨다.’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아팠을 것입니다.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너무 아파요. 그러나, 즐거워요. 제가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저는 기쁘게 이 십자가를 질거에요.’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 조차도 기쁨으로 질 수가 있었다면, 그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저와 여러분이라면, 나머지 한평생, 우리가 남아 있는 여생동안, 그분을 따라 어떻게 일해야 할까요?


그분처럼 성실하게, 그분처럼 즐겁게, 그래서 나중에, 저와 여러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을 회고할 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사님은, 우리의 친구는, 성실하게, 즐겁게 일하다 가셨다고.’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명을 이루는, 노동의 소명을 이루는, 축복된 삶의 모습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이 힘들다고 짜증내지만, 그러나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고맙습니다. 또한 작지만, 일할 수 있는 사업의 터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워요. 가정 주부들, 내가 일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터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왜 괴로워 할까요? 우리의 노동이 짜증스럽고 불평스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뭔가 잘못된 거에요. 오늘 이렇게 기도해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 저를 좀 치료해주세요. 다시금 일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고,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가정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 제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세요.’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노동해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이요, 하나님의 축복인 노동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물로 받았사오니, 주 앞에, 참으로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신실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하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주님이 나를 지으셨기에, 지음 받은 내가 잘못될 때마다, 주님은 나를 회복시키실 수가 있고, 나는 교정하실 수 있는,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오늘도 노동의 현장에서, 직업의 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때로 힘겨워하고, 비틀거리며, 아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오늘 회복시켜 주시고, 또 직업을 찾아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일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주신 모든 직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명의 장으로 생각하고, 기쁨과 즐거움의 감격을 가지고, 그 모든 일을 감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의 창조자시요, 나의 치유자이신 하나님. 때로 나의 시각이 잘못되고, 내가 삶에 대한 비전을 잃을 때, 우리는 직업의 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비틀거리며,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짜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우리의 일터를, 소중한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그 일을, 기뻐하고, 귀히 여기며,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 있도록, 이 시간 주의 자녀들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또 일을 찾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저들에게 은사와 재능에 합당한 직업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돈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지 않게 하시고, 보람과 의미를 위해서 선택하게 하시고,


때로는 그 일이, 인간적으로는 힘겨워 보여도,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천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직업을 귀히 여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것이 나의 사명의 장임을 기억하고, 그 일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의 자녀들이 일어날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가정으로, 사업의 장으로, 직장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의 장마다, 평강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