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신명기 개론

하나님아들 2015. 9. 15. 23:40
 

신명기


 신명기는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여러 가지 명령들을 재강조함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심을 굳건하게 하고자 쓰여진 책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명기에는 많은 율법들과 교훈들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 어떠한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며 그러한 점에서 신명기는 레위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명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레위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며 민수기의 광야 여정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신명기와 레위기의 차이점, 혹은 레위기나 민수기의 보완점을 살펴보고 신명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본 서론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일일이 다룰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이중에서 율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십계명과, 신명기의 학적 논쟁의 열쇠인 '모세 저작설', 그리고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1부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신명기의 히브리 명칭 역시 각 책의 첫 구절을 본떠 그 책의 이름으로 삼는 히브리인의 관습이 그대로 적용되어 '엘레 하떼바림'<!yrib;D]h' hL,ae>이라 명명되었는데 그 의미는 '이것들이 말씀들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 명칭을 따르지 않고 '두 번째 율법', '율법의 재 강조'라는 의미의 '듀테로노미온'(deuvteronomi;on)이라 칭하였는데, 그것은 본문의 율법들이 전에 시내산에서 주어진 첫 번째 율법의 반복, 또는 재강조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명칭은 '불가타역'(Vulgata)에서 그대로 본떠 '듀테로노미움'(Deuteronomium)이라 불렀고, 영어 성경도 70인역을 따라 '듀트로노미'(Deutronomy)라 불렀으며, 한글 개역 성경 역시 이러한 의미를 따라 '신명기'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70인역과 라틴역, 그리고 영어 성경과 한글 개역 성경의 명칭이 신 17:18절의 '이 율법을 등사하여'라는 말씀을 오역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분명 신명기의 율법이 레위기의 율법과 똑같은 것이 아니며 신명기가 '레위기의 후편이나 부록'은 아니라 할지라도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로 인해 시내산에서 주어진 첫 번째 율법의 수령자들이 거의 죽은 이때에 다시금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거룩한 생활의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의 재강조가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II. 저자


   신명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신명기 자체의 증거와(참조, 신 1:1, 4:44, 29:1, 31:9, 24) 신약의 증거(참조, 행 3:22; 롬 10:19; 고전 9:9) 예수님의 증거(참조, 막 7:10; 눅 20:28) 등의 성경적 증거와 그 외의 많은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이성적 비평가들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저작, 또는 후대의 편집이라 주장하여 성경의 증거에 도전하였는데 이러한 견해에 대한 논쟁은 곧이어 다루게 될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 부분에서 자세히 거론하기로 하겠다.


   III. 수신자


   신명기를 기록할 당시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국경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기쁨과 소망 가운데 출애굽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으며 따라서 가나안 지경에 도착했을 때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열 재앙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최초의 율법이 주어질 때에도 그 언약에 참여하지 못한 어린 나이였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을 앞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며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요구되었으며 그들을 깨우칠 율법의 재 반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명기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기록된 것이며, 이러한 이유에서 신명기의 대상자, 또는 수신자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아닌 광야에서 태어나고 광야에서 자라나 장차 약속의 땅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대'였다.


   IV. 기록 목적과 연대


   1. 기록 목적


  신명기의 기록 목적은 광야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제2세대', 또는 '새로운 세대'를 재교육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목적을 세밀하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역사적인 목적-신명기의 역사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후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40년 광야 여정을 돌이켜 회고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약속의 땅에 관한 언약이 어떻게 갱신되는가를 보이고자 함이었다. ② 교리적인 목적-신명기는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과 규례에 대한 재해석과 재강조이다. 이러한 재강조 속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과 그의 '말씀에 복종할 것'을 수차례 강조하였던 것이다. ③ 기독론적 목적-신명기의 기독론적 목적은 신명기에 기록된 여러 가지 말씀들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그리고 믿는 자의 구원에 대한 예표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그리스도의 예표들 중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말씀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해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라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사역, 그리고 그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신 18:15절 말씀이다.


   2. 기록 연대


  신명기는 40년 광야 생활의 끝 부분,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의 40년 방랑 생활을 마치고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를 B.C. 1445년으로 생각할 때(출애굽의 연대에 관한 자세한 증거는 본서의 출애굽기 서론 중 '출애굽의 연대' 부분을 참조할 것) 신명기의 기록 연대는 B.C. 1405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로는 그들의 최초로 받았던 시내산에서의 율법이 40년이 지난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직전인 지금 다시 한 번 재 반복해야만 한다는 역사적인 상황과,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라는 31:24절의 말씀에 의해 증거된다.


   V. 신명기의 특징과 구조


   1. 특징


  신명기의 특징은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언급된 율법의 재 반복 또는 재 강조이다. 그러나 신명기의 재 강조는 단순히 레위기나 민수기의 율법과 사건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의 재해석과 민수기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으로 앞의 기록에 대한 보충 자료, 또는 증거가 되는데 이 점이 바로 신명기가 다른 성경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다. 예를 들면 민수기에서 모세를 돕도록 장로들이 임명되었다는 단순한 기록을(참조, 민 11:16, 24, 25) 신 1:16, 17절에서는 모세가 이들에게 준 교훈이 보충 첨가되었으며, 민수기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 기록에 대해 신 1:19-23절에서는 정탐을 요구한 것이 백성들이었다고 좀더 분명한 상황 설명을 하였고, 민수기에서는 단순히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만이 기록되었으나(참조, 민 27:12-14) 신 3:23-26절에는 그 사건에 관련된 대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신명기의 특징은 레위기와 민수기 내용의 재강조이지만 그것은 그 앞의 사건에 대한 좀더 정확한 상황 설명과 좀더 분명한 해설을 제공하는 오경의 결론이라는 점이다.


   2. 구조


  신명기의 구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회상과(1-4장), 둘째는 이스라엘이 받은 현재의 계명에 대한 재 강조(5-26장), 셋째는 미래를 좌우할 선택(27-30장), 그리고 넷째는 모세의 유언과 죽음이다(31-34장). 이러한 구조를 도표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신명기 도표1).


   VI. 신명기와 레위기와의 관계


   신명기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는 신명기가 '레위기의 부록', 또는 '복사판'이라는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유사점 때문에 비롯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유사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레위기의 내용이 많은 율례와 규례들로 이루어졌을 뿐 사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신명기 역시 레위기처럼 대부분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과 거룩한 백성이 지켜야 할 율례에 대한 기록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신명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율법들이 대부분 레위기와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레위기와 신명기에 이러한 유사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둘에는 전혀 다른 상이점도 존재하는데 주된 차이점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는 기록 장소의 차이이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거하고 있을 때 주어진 것이고, 신명기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진 치고 있는 모압 평지에서 주어졌는데, 시내산은 시내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이요, 모압 평지는 사해 위쪽의 요단 강 건너편의 가나안 땅 맞은편으로서 그 기록 위치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방랑 생활의 차이이다. 즉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방랑 생활이 시작된 것에 대한 예견이지만, 신명기는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종지부 찍고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레위기가 주로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직자의 규례와 그들이 행해야 할 법도를 가르치고 있는 반면 신명기는 성직자보다도 일반인에 그 초점을 맞추어서 일반인이 지켜야 할 법도와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데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신명기가 레위기와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구조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레위기의 부록이나 후편'이 아닌 이스라엘의 미래를 축복과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으로서 레위기와는 엄격하게 구별된 독립된 정경이요 오경의 결론인 것이다.


   제2부 신명기의 특별 주제들


   I. 신명기의 저작설


   신명기에서 가장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인가 아닌가 하는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에 관한 논쟁이다. 오경의 다른 네 권과 구약의 다른 책에 관해서도 저자에 대한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신명기의 저작설에 관한 논쟁이 제일 크게 대두되는 것은 신명기 안에서 모세의 저작이 아닌 후대의 편집처럼 보이는 부분이 가장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가지고 현대의 이성적 비평가들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여러 저자들, 혹은 여러 문서들의 편집이라 주장하면서 모세를 신명기의 유일한 저자로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증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후대의 편집처럼 보이는 말씀들을 그 당시의 상황과 환경에 적용시켜 해석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 한 오류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본문에서도 모세의 저작설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신명기의 난해한 해석 부분들을 새롭게 해석 제공한 뒤 모세의 기록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과 성경 외적인 증거들을 제시하여 신명기의 모세 저작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증명하고자 한다.


   1. 후대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


  1)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신34장)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모세의 사망을 기록한 신 34장의 내용이다. 그들은 만약에 모세가 진정한 신명기의 저자였다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과 그 후의 일에 대해 기록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하면서 모세의 죽음과 그 후에 대한 기록은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신명기는 모세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기록을 편집한 편집물이라는 것이다.


   2) '요단 저편'(신1:1)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의 두 번째 근거는 신 1:1절의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모세와 이스라엘이 도착한 모압 평지에서 바라본 '요단 저편'은 요단 강 건너편의 땅, 즉 가나안을 의미하며 따라서 신명기의 저자 역시 '요단 저편'의 가나안 땅에 거하던 거주민이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거기서 태어난 후대의 이스라엘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의 세 번째 주장은 신명기에 여섯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는 '오늘날과 같다'라는 표현이다(참조, 신 2:30; 4:20, 38; 8:18; 10:15; 29:28). 그들은 '오늘날과 같다'라는 표현을 후대의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때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역사와 동일한 상태임을 발견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본서에 여섯 번씩이나 강조되어 반복된 것은 본서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역사가, 기록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2. 후대 편집설에 대한 반증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후대의 편집설을 지지하는 듯한 위의 세 구절들은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후대의 편집설을 주장하는 말씀들이 될 수도 있고, 정반대로 모세의 저작설을 주장하는 말씀들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문자적 해석을 초월하여 신명기가 쓰여질 당시의 상황이나 풍습,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까지도 참조하여 해석하는 해석의 차이이다.

   이제 이러한 해석들 중 성경을 보다 넓고 심오하게 해석하는 후자의 견해를 가지고 위의 말씀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 후대의 편집설에 대한 오류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신 34장에 대한 새로운 견해

   먼저 신 34장의 해석을 살펴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 34장에 대한 보수주의의 견해는 '모세의 예언적 저술'이라는 설명이었다. 즉 모세가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서 자신의 죽음과 그 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해 예언적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이러한 입장보다도 대다수의 보수주의 역시 신 34장의 기록만은 모세의 기록이 아님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왜냐하면 신 34장의 기록은 모세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세의 죽음 이후의 일, 즉 모세의 장례와 백성들의 애통함, 그리고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으로 전진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관한 일들까지도 모세의 예언이라고 보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생생하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 34장의 기록은 아무리 봐도 모세의 기록이나 예언적 서술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기록하여 첨가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신 34장의 기록이 모세의 기록이 아니라 해도 신명기 전체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 34장의 기록은 어떤 위인의 마지막 작품에 그의 사망 기사를 첨가시키는 매우 관례적인 풍습에 따라 기록된 기록이었는데(Gleason Archer). 이러한 습관은 현대에도 시행되어 위인의 전기나 유명한 저술의 뒤에는 언제나 작가에 대한 프롤로그나 그의 사망,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 후의 일들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뒤따르는데 그러한 기록이 뒤에 삽입되었다고 해서 그 책의 원저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신 34장의 기록이 모세의 기록이 아닌 여호수아의 기록이라고 해서 신명기에서 제외시키거나 성경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는데 그것은 신 34장 역시 성령의 영감하에 쓰여진 성경의 한 부분이며 신명기의 끝맺음과 오경의 결론을 위해 가장 적당하고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신 34장의 기록이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모세의 저작설에 대한 반박 증거가 될 수는 없다.


   2)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에 대한 새로운 증거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에 의하면 '요단 저편'이라는 말은 당연히 '가나안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요단 저편'이 꼭 '요단강의 저편 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때로 어떤 지역을 칭하는 고유명사를 뜻하기도 하였는데 '요단 저편'은 일찍이 팔레스틴 원주민에 의해 모압 평지에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동시에 모압 평지에 거하는 주민들에 의해서도 모압 평지가 '요단 저편'이라 불렸었다(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6, p. 186). 이러한 사실은 고대 시대에만 통용되던 사실이 아니라 신약 시대 역시 그러한 의미가 사용되어 신약 시대 때에도 모압 평지의 거주자들에 의해 '저편 땅'(Peraea)으로 불리웠다(Arche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ion, Moody Press, 1980, p. 256). 그러므로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모압에서 바라본 '요단 저편', 즉 가나안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압인들이 살고 있던 모압 지역 자체를 의미하는 지명이기도 하며 따라서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 때문에 신명기의 기록자를 모세가 아닌 '가나안 땅의 거주자, 또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대의 이스라엘인에 의한 편집'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학설이다.


   3) '오늘날과 같다'는 말에 대한 반대 해석

   모세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자들은 '오늘날과 같다'는 표현을 '후대의 저자가 신명기의 사건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동일함을 발견하고 기록한 표현'으로 해석, 신명기의 후기 편집설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신명기의 나타난 여섯 번의 표현 모두를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당시의 상황과 부합시켜 볼 때 이러한 표현은 40년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당시의 상황과 부합시켜 볼 때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친 모세가 자신과 이스라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40년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셨던 축복의 약속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모세의 모습과 너무나도 잘 일치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2:30절의 '오늘날과 같다'라는 말씀은 시혼을 정복하는 일이 모세의 임종시까지 계속됨을 뜻하며, 4:20절의 '오늘날과 같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받았던 축복의 약속이 끊이지 않고 계속됨을 가리키는 등 신명기에 나타난 여섯 번의 모든 경우가 이스라엘이 겪었던 40년 광야 생활의 연속성과 계약의 연속성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다'라는 표현이 후대의 자작설에 대한 증거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학설이다.


   3. 모세의 저작에 대한 성경적 증거


  신명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밝히는 성경적 증거는 매우 많은 곳에 산재되어 있으며 그러한 증거들은 모두 신명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들이다. ① 신명기 자체의 증거-신명기의 모세 저작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증거는 신명기 스스로의 자증이다. 즉 신명기에는 분명히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라고 증거하여 모세의 저작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을 금하였던 것이다(참조, 신 1:1; 4:44; 29:1; 31:9, 24). ② 예수님의 증거-예수님 역시 신명기를 분명한 모세의 글로 인정하심으로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에 대한 확실한 판결을 내리셨다(참조, 막 7:10; 눅 20:28). ③ 신약의 증거-신명기를 인용한 신약은 신명기를 모세의 율법, 또는 모세의 글로 증거하였다(참조, 행 3:22; 롬 10:19; 고전 9:9). ④ 여호수아의 증거-신명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사실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 의해서도 증거되었는데 모세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받들었던 그는 신명기에 대해 '모세가 자신에게 명한 글'이라고 증거하였다(참조, 수 1:7) ⑤ 구약의 다른 부분의 증거-구약성경의 다른 부분들 역시 신명기를 모세의 글로 인정하였다(참조, 삿 3:4; 왕상 2:3; 에 3:2; 느 1:7; 시 103:7; 단 9:11; 말 4:4).


   4. 저작설에 대한 결론


  오경의 저자는 모세이다. 예수님 역시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증거하셨다. 따라서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거부하거나 후기의 편집설을 주장한다면 종국에는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적 무능이나 불완전함을 주장하며 인정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명기에 대한 모세의 저작설은 성경의 증거 그대로 증거되어야 하며 또한 지켜져야 한다.


   II.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


   신명기는 오경의 결론적인 책이다. 오경의 결론을 내리는 사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한 가지가 출애굽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으로의 입성을 준비함으로 광야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 연구에 앞서 그들이 지나온 광야 여정과 그 각각의 장소에서 일어났었던 독특한 사건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신명기 연구와 오경 전체에 대한 연구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며 이제 이러한 목적 하에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총 정리해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1.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일반적인 경로


  원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일반적인 행로는 세 가지였다. 그 첫째는 고센을 거쳐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통과하여 지중해를 끼고 북상하는 길이었으며, 둘째는 고센 지방에서 숙곳을 우편으로 바라보며 술 광야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가나안의 중앙 부분을 통과하는 길이었고, 셋째는 '온'(On)을 출발하여 수에즈만의 북단을 거쳐 시내 반도의 중앙부를 통과 아카바만으로 직행하는 길이었다. 이중에서 세 번째 길, 즉 시내 반도를 통과하는 길은 애굽 사람들이 시내 반도에서부터 '동광석'을 얻어 들일 목적으로 개설한 일종의 산업 도로였다. 한편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는 길'이었으나 그 길은 곳곳에 애굽 군대가 배치되어 있는 길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숙곳'쪽으로 남하시켰다(참조, 출 13:17).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는 비록 행로에 약간의 어려움은 따르겠지만 애굽 군대의 추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의 경로를 모두 피하여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들의 첫 야영지를 '광야 끝 에담'에 정하게 하셨다(참조, 신명기 도표2)


   2. '에담'으로부터 '시내산'까지


  '에담'을 출발한 이스라엘은 바로와 그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하나님의 기적 속에 홍해를 건넌 후 '마라'와 '엘림', 그리고 '신 광야'와 '르비임'을 통과하여 그들의 첫 번째 정착지인 시내 광야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첫 번째 여행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 중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은 홍해에서의 기적적인 구원이다. 홍해를 건넌 곳에 대해서는 '갈대 바다', '쓴 호수', '수에즈만의 위쪽 부분'의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이중에서 성경의 여러 가지 묘사와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는 장소는 '수에즈만의 위쪽 부분'이라는 학설이다(홍해의 도하 장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은 본서 출애굽기의 서론 중 '홍해에 관한 고찰' 부분을 참조할 것). 다음으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라'였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쓴 물 때문에 여호와께 원망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쓴 물을 달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갈증을 해결하여 주셨다(참조, 출 15:22-26). 하지만 '마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최초로 원망을 시작함으로 그들의 불행스런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시내산까지의 여행 중 기억해야 할 만한 세 번째 사건은 '신 광야'에서 이루어졌다. 즉 이스라엘이 음식으로 인해 또다시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자 그들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는데 만나는 이후로 그들의 40년 광야 생활 동안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내리심으로(참조, 출 16장), 후에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공하신 영원한 양식,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예표가 되었다(참조, 요 6:32-35).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이 최초로 전쟁을 치른 장소가 바로 '르비딤'이었다(참조, 출 17:8-16). 하지만 르비딤에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참조, 출 17:1-7). 즉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한 후 물이 없어 또다시 하나님께 원망을 털어놓자 하나님은 이번에도 긍휼을 베풀어 그들에게 반석으로 물을 공급하셨고, 후에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도 그들을 기적적인 역사로 보호하여 주셨던 것이다. 시내산까지의 여정 중에서 기억해야 할 마지막 사건은 시내 광야에서의 일이다. 이곳에서는 약 1년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 받았고(그중 대표적인 율법은 십계명임) 성막을 건축하였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최초의 구체적 범죄도 시행되었으니 그것은 금송아지 우상의 사건이었다(참조, 출 32장).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을 모두 멸하려 하셨으나 그의 긍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광야 여정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시내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축한 '시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여정은 '다베라'와 '기브롯 핫다아와' 그리고 '하세롯'과 '에시온 게벨'을 거쳐 그들의 두 번째 정착지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두 번째 여정은 '이스라엘의 불평'과 '하나님과의 진노'의 연속으로서 이스라엘이 보인 불신앙의 정점은 그들이 첫 번째 정탐꾼을 보낸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이었다. 이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장소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베라'-여호와의 불이 임한 곳(민 11:1-3).

   비록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 하여 삼천 명 가량 죽은 비극이 있었지만 시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 관계를 유지하여 그들의 정성어린 충성과 헌신으로 성막이 완성되고 성막과 레위인, 그리고 성결에 관한 모든 법률을 수여 받으므로 축복과 기쁨의 생활이 계속되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의 생활을 뒤로 하고 가나안을 향해 다시금 광야 생활이 시작되자 그들의 불평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러한 불평이 '다베라'에 이르자 드디어 표면으로 노출되어 나타났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불'을 보내어 그들의 진 끝을 사르게 하셨으나 모세의 중재 기도로 자신의 진노를 돌이키셨다. 그런데 이러한 '다베라에서의 사건'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시내산까지의 하나님과는 달리 '다베라'에서부터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즉각적인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점이며, 그 불평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 역사 사람의 생명까지도 상하게 하는 형벌과 그렇지 않은 형벌로 나누어 심판하셨다는 점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신 이유는 '다베라'에서부터의 여정은 그들이 지켜야 할 성결의 법이 주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2)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백성들을 장사한 곳(민 11:4-35)

   한 번 시작된 이스라엘의 불평은 그 도를 더해 가서 그들의 불평은 이제 점점 구체화되었고 악랄해져 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동시에 탐욕으로 원망하던 자들에게는 그 고기를 먹지도 못한 채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광야 여정은 점점 더 무가운 발걸음으로 변해가기만 하였다.


   3) '하세롯'-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여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곳(민12:1-16).

   지금까지의 불평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양식으로 인한 불평이었으며, 그 대상도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었고 불평한 자들 역시 이스라엘 전체였다. 그러나 '하세롯'에서의 불평은 그 성격이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즉 불평의 원인부터 그 성격이 지금까지의 불평과는 매우 특이하여 양식으로 인한 불평이 아니라 '모세의 권위에 대한 불평'이었고, 그 대상도 하나님이 아닌 '모세'였으며, 불평하는 자도 이스라엘 전체가 아닌 모세의 형제들인 '미리암과 아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평의 특징은 그들의 불평이 단순한 의식주의 문제에서 '권세와 권위로 확장'되었음을 뜻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불평과 도전에 대해 미리암의 문둥병 사건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으로 일축해 버리셨다.


   4) '가데스 바네아'-첫 번째 정탐을 실시한 불행의 장소(민 13:1-20:21).

   하세롯을 떠난 이스라엘은 '에시온 게벨'을 거쳐(참조, 민 33:35, 36). 그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땅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절정을 이루었던 곳으로 가난으로의 정탐과 고라의 반역,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붉은 암송아지의 제사, 그리고 모세의 범죄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이중에서 '가나안의 정탐과 불신앙적인 보고를 인한 이스라엘의 불행한 결과'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통해 아론의 직위를 확실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불신앙' 등이 가장 기억해야 할 만한 사건들이었다. 이렇듯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진노가 교차되었던 불행의 장소였다.


   4.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평지'까지


  불평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불행의 땅 '가데스 바네아'를 떠난 이스라엘은 '에시온 게벨'로 되돌아온 후 '부논'을 거쳐 '아바림'을 통과 '느보산' 옆 모압 평지에 진 침으로 그들의 40년 광야 생활을 마감한다. 이러한 그들의 세 번째 여정에 대한 특징은 한 마디로 가나안 입성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는데 그 준비 과정은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 가나안 입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세대교체'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대부분 축복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평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절정인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죄악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저주를 임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애굽에서 나온 자 중에서 이십 세 이상 계수함을 입은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였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세 번째 광야 여정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실현되는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씩 둘씩 쓰려져 갔고,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모세의 형 '아론' 역시 '호르산'에서 죽었으며(참조, 민 20:22-29), '모세' 자신도 '느보산'에서 요단 강 건너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여호와께로 소천되므로(참조, 신 34:1-8)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을 위한 '세대교체'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2) 가나안 입성을 위한 두 번째 준비-새로운 세대를 위한 율법의 재 강조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을 통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준비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율법의 재 강조'였다. 신명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율법의 재 강조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최초의 율법 수령자들이 40년 광야 생활에서 모두 죽게 됨에 따라 그들의 율법 준수에 대한 개념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율법의 재 강조가 필요했고, 그러한 작업이 가나안 입성 직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재 강조와 함께 그들은 두 번째 인구 조사, 즉 새로운 세대의 인구 조사를 실시함으로 광야 40년 동안 그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과 그로 인한 자신들의 변화된 모습을 새로이 깨달아 하나님만을 향한 경외심으로 가득한 채 드디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3) 가나안 입성을 위한 세 번째 준비-가나안 주변 부족들에 대한 정복과 가나안 땅의 분배

   '가데스 바네아'로부터 '모압 평지'까지의 세 번째 여정은 '이스라엘의 광야 전쟁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쟁이 많았다. 사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오직 '아말렉'과 단 한번의 전투만 치렀을 뿐(참조, 출 17:8-16)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한 이스라엘은 '아랏'과의 전투를 시작으로 하여(참조, 민 21:1-3) '시혼'과 '옥'의 정복(참조, 민 21:10-35). 그리고 '미디안을 정복'(참조, 민 31:1-54)하기까지 많은 전투를 치르며 가나안 지경까지 전진해 나갔던 것이다. 이렇듯 많은 전투를 치르며 요단 평지까지 이른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지시'와 (참조, 민 33:50-56) '가나안 땅의 분할을 위한 지시'를 (참조, 민 34:1-36:13) 받음으로써 '가나안 입성'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5.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 대한 결론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에 대한 정확한 경로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데스 바네아'외에는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고, 그들이 가나안까지 나아갔을 것으로 추정한 본문의 노정 역시 중간에 많은 장소들이 생략되거나 삽입된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민 33:1-49). 그러므로 우리가 추정해 낼 수 있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단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기록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지도나 도표' 역시 하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 불투명한 장소를 추정하여 그려낸 것이라 해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타난 그들의 광야 여정만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계시되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야 여정을 연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그 정확한 위치와 경로에 대한 추적보다도 그들의 광야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구원의 도는 어떠한 것인가를 연구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이제 이러한 전제 하에서 그들이 여행했던 경로에 대한 도표와 지도를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신명기 도표2), (참조, 신명기 도표3).

   위의 도표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내용에 따른 도표로서 이것이 이스라엘 40년 방랑 생활의 도표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여행한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위의 도표 사이사이에는 좀더 많은 경유지와 정착지가 있으나(참조, 민 33장),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특이할 만한 사건이 없었으므로 위의 도표에 의한 추정 경로를 생각하여도 그리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III. 신명기와 우상 숭배


   신명기의 주된 목적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명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성결을 위한 법률이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그들의 영적 성결을 보존하기 위한 우상 숭배 금지의 명령은 강조된 율법이었다. 이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대해 고찰해 보되 먼저 우상의 정의와 우상 숭배의 여러 형태, 그리고 여러 가지 우상들의 비교와 우상 숭배를 금지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우상과 우상 숭배의 정의


  '우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ls,p, ; 페셀>은 '자르다', '조각하다'라는 뜻으로 '조각된 형상'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나무나 돌 금속 등의 물질에다가 형상을 새긴 것을 말하며, 그러한 형상에 절하고 그것을 경배하는 일을 '우상 숭배'라 한다. '우상'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조상'과 '주조상'으로 구분되는데 '조상'은 '깎아 만든 우상'을 말하며, '주조상'은 '쇠붙이를 녹인 다음 형틀에 부어 만들어 낸 우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상에 절하고 경배하는 우상 숭배는 '인간적 욕망과 욕구가 형상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우상이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로 만들어졌다 해도 대부분이 인간의 형상을 닮아 제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그 자신을 신뢰하였으며, 비록 우상에게 절하고 경배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우상 숭배의 의미는 '자아 숭배(Self-Worship)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만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우상'의 개념을 단순히 '조각된 형상'의 범위에서 초월하여 '하나님보다 더욱 의뢰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확대시켰으며, 이러한 인간의 교만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조상'이건 '주조상'이건 어떠한 형태의 우상 숭배도 용납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간음' 으로 정죄하셨던 것이다(삿 2:11-17; 겔 16:15-43).


   2. 고대 여러 나라의 우상 숭배


  우상 숭배는 고대 동양으로부터 행해졌는데 그들이 행한 우상 숭배는 철저하게 범신론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 만물과 자연의 신기한 능력들을 모두 신으로 간주하여 섬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양', '달', '별', '불'과 '천둥', '번개' 등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자연 만물을 신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고대의 여러 국가들이 행한 여러 가지 우상 숭배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벨론

   바벨론이 섬겼던 여러 가지 우상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그들 역시 많은 신들을 섬겼음이 틀림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들이 섬긴 신 중의 대표적인 신이 '달'을 섬기는 '월신' 인 '신'(Sin)이었는데, 그들은 이 '월신'을 경배하기 위해 독특한 신전과 '지구랏'(Ziggurat) 등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바벨론의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아브라함 역시 이러한 '월신'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에 이러한 우상을 섬겼고, 그의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방의 인신제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반박하는 일조차 쓸데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망상이다.


   2) 수메르

   고대의 수메르인들은 '만신전'의 신들이 우주를 주관하여 다스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섬긴 중요한 신들은 '안'(An), '키'(Ki), '엔릴'(Enlil), 그리고 '엔키'(Enki) 등으로, 이들을 각각 하늘과 땅과 공기와 물을 주관하는 신으로 생각하며 경배하였다.


   3) 메소보다미아(메소포타미아)

   메소보다미아인들이 섬긴 신은 약 1500여 종에 이르렀는데 그중에 널리 알려진 신은 '사마쉬'(Shamash), '말둑'(Marduk), '신'(Sin), '이쉬탈'(Ishtar) 등이다. 이들 중 특히 '다산의 신'인 '이쉬탈'(Ishtar)은 널리 숭배되었는데 메소보다미아인들에 의하면 그녀의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여 그녀의 남편인 '탐무쯔'(Tammuz)를 찾으러 지하 세계에 내려갔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과학과 학문의 보호자인 '나부신'(Nanu), 전쟁과 사냥의 신인 '네르갈신'(Nergal)이 숭배되었다.


   4) 이집트

   고대 애굽의 우상 숭배는 다신교적인 동시에 범신론적이었으며 혼합적이어서 매우 복잡하였다. 먼저 다른 나라와 같이 애굽의 우상 숭배 역시 범신론적인 것이어서 모든 만물을 '신'으로 섬겼는데, 그들이 주로 섬긴 신들은 '태양신'인 '라'(Ra)와 '호루스'(Horus), '물의 신'인 '슈'(Shu), '달의 신'인 '톧'(Thoth) 등이 있었으며, 악어의 일종인 '크로코다일'의 모양을 한 '소벡신'(Sobek)과 '재칼'(여우와 늑대의 중간형)의 머리를 가진 '야누비스'(Anubis) 신도 있었다. 또한 농업을 중요시하였던 애굽인들은 농경의 보호신인 '오시리스'(Osiris)와 생산의 여신인 '이시스'(Isis)와 같은 신들도 섬겼으며, '오시리스'와 '이시스', 그리고 '호루스'로 이루어진 혼합적인 신도 있었다. 이집트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애굽의 왕을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간주하여 왕 역시 신과 같은 예우와 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5) 가나안

   가나안의 우상들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위험을 염려하여 본서 신명기는 가나안이 끼칠 위험한 악영향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고하였을 뿐만 아니라(참조, 신 7:4; 20:18), 그 땅의 모든 거민들을 멸하라고 했으며(참조, 신 7:1-5) '산당과 아세라 목상과 주상과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없애라고 했던 것이다(참조, 신 12:2, 3). 가나안 거민들이 주로 섬겼던 우상들은 하늘의 신인 '엘'(El), 폭우와 번개의 신인 '바알'(Baal), 다산의 여신인 '아스다롯'(Astarte), 풍부한 결실의 상징이자 '엘'(El)의 배우자인 '아세라'(Asherah)신 등이었다. 이들 중 이스라엘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우상이 '바알'과 '아세라'신이었는데 이들 신은 열왕기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의해 숭배되던 우상들이었다.


   3. 여러 나라의 우상들에 대한 비교


  비록 고대의 여러 나라들이 섬겼던 우상들의 이름과 모양은 달랐다 할지라도 그들이 형상화시킨 우상의 대상과 그 의미는 모두 일맥상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여러 나라들의 우상을 비교 검토해 보면 많은 유사점과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신명기 도표4).

   위의 도표는 'C. F. 파이퍼'(C. F. Pfeiffer) 박사의 '오경'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 사이에는 좀더 많은 우상들의 유사성을 찾아내 삽입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우상들이 상징하는 것들 역시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확도와 상관없이 각각의 우상들이 뜻하는 바가 서로 일맥상통하므로 한데 묶어도 별 문제는 없다.


   4. 우상 숭배의 금지 이유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우상 숭배의 죄악이 천지와 우주 만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배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길은 멸망과 저주의 길임을 분명히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이 축복과 영생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를 금하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목적은 '자신의 백성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출처 : 기독교통신신학교
글쓴이 : 신학출판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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