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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4장 1~3절 / 어린양의 신부와 이마에 있는 두 이름

하나님아들 2014. 4. 18. 17:01

제14장 1~3절 / 어린양의 신부와 이마에 있는 두 이름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b)


앞에서의 해석상의 오류로 인한 실수처럼 여기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부분이다. 요한은 144,000인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진 것을 보았다 한다. 두 가지 이름에 대하여 전해지는 해석은, ⓐ.어떤 이는 ‘환난이 지나가고 천년왕국으로 들어서고 있으므로 7장에서 하나님의 인치셨으니 여기서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다.’고 해석하였다. ⓑ.다른 이는 ‘13장 16절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대조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은 자들 중에서 부활된 자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휴거된 자들로 구성되는 새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144,000명이다. 첫째로 이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두 이름이 있다.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서 설명해야 될 부분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믿고 거듭날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라는 표로 성령으로 인 치심(엡4:30)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이다.


둘째로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온전하고 정절을 지켜서 지정의라는 완전한 거듭남이 물로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세마포(βύσσινοs)를 입은(계19:8) 성도로서 어린양의 신부라는 표시로 이마에 쓰이며, 새 이름은 천국에서 영원히 불러질 이름을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 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표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하였다. 일곱 교회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 것도 그러한 목적 때문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휴거 상으로 보는 것은 ‘그이 위[이마]’에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양의 ‘새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이름이 쓰인다는 뜻은 성도의 행실이라고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라 하더라”(19:7-8) 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옳은 행실이 있는 성도에게 어린양은 당신의 신부로 택하실 때, 천국에서 영원히 불러지게 될새 이름’을 예수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나의 새 이름”이라는 뜻이다. 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성안을 아름답게 설명하면서는 요한은 계속해서 “그이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22:4)하셨다. 따라서 어린양의 신부들인 144,000인은 시온에서 영원히 불러질 이름을 직접 주시게 되는데, 그 이름이 “나의 새 이름”이라 한다.


1. 보좌를 얻은 기쁨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키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2-3)


요한은 땅위에서 말씀을 듣고자 자세를 가다듬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 그 소리는 맑은 물소리 같이 잔잔하면서도 맑고 큰 뇌성과도 같이 우렁차지만 거문고 소리처럼 음률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노래는 거문고 타는 자의 거문고 소리와도 같다 한다.


이 아름답고 청아한 노래는 하나님의 보좌 앞과 네 생물들과 장로들 앞에서 부르는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의 신분을 밝히지는 아니하고 다만 ‘저희’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이기에 아무도 배울 수 없는 새노래를 배우고 있을까?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의 수를 분명하게 밝혔으므로 이들은 앞에서 본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다른 견해로 해석하는 경우는;


ⓐ어떤 이는 ‘어린양의 사람들은 그들만이 배울 수 있는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도 어린양의

  사람이 누구라고는 밝히지는 않았다.


ⓑ다른 이는 ‘대 환난이전에 구원받은 교회와 대환난중에 순교하여 들어 올린 무리들’이라고 해석하였

  다. 7장서는 144,000인을 유대교의 전도자라 하고서 여기서는 구원받은 기독교 교회라고 자신도 어

  는 것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는 모순을 보이는 해석이다.


ⓒ또 다른 이는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수’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앞에서는 ‘상징’

  이라 하고서, 여기서는 ‘대표자’로 바꾸어서 스스로의 해석에서도 이중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처음부터 대환난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은 다(All)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양의 신부들로서 144,000인이 서 있는 곳을 시온 산이라고 하였다. 지금 노래하는 장소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 있다. 네 생물과 장로들은 우리가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보좌’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흐름을 달리하게 된다.


보좌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좌이면, 분명히 ‘하나님의 보좌’ 또는 ‘그[의] 보좌’로 명시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좌이면 ‘어린양의 보좌’ 또는 ‘그[의] 보좌’라고 명시한다. 그리고 장로들의 보좌이면, ‘24장로들의 보좌’나 또는 ‘보좌 앞에 서있는 장로들’이라고 보좌의 주인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보좌’에 대하여 누구의 보좌라고 언급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 이 보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20:4a)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을 이긴 자들에게 보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계3:21). 믿음을 이기고 약속하신 보좌를 이제 얻은 것이다(계14:3). 그들은 천년왕국이 끝나고 백보좌심판 때에 자신들이 얻은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게 된다(계20:4a). 그러므로 144,000인의 앞에 있는 보좌는 이들의 보좌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유는 계시록을 깊이 있게 읽어보지 아니하고, 남들이 전해주는 설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은 이러한 해석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성경이론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예수님의 설명은 틀림이 없으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해석 앞에서 학자들의 해석이나 저자들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요한이 기뻐하고 감탄하며 보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2. 기쁨과 새 노래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3)


땅에서 구속함은 받은 144,000인이 믿음을 이기고 보좌를 얻은 기쁨으로 노래를 부른다. 이들이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 있는 자기들의 보좌를 두고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합창은 숫자만큼이나 우렁차고, 많은 물소리와 같이 부드러우며, 음률은 거문고소리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새 노래는 이들 외에는 배울 자가 없다는 내용에 대한 견해들을 보면,


 

ⓐ어떤 이는 ‘직접 이기고 구원받은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노래조차 부를 수 없으므로 이들은 자

   신들을 구속시켜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②다른 이는 ‘전3년 반 동안의 격렬한 환난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올

   라온 사람들로서 환난을 이겼던 체험에 바탕을 두고 노래한다.’라고 해석하였다.


 

ⓒ또 다른 이는 ‘환난 중에서 순교하여 들어 올린 무리들이 하늘의 주민들로부터 새롭게 노래를 배운

   다.’라고 해석하였다.


ⓓ또 다른 이는 ‘예수 믿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수의 인원들이 새 노래를 배우는데 창조

   의 노래는 옛 노래라고 하는 반면에 구속의 노래를 새 노래’라 해석하였다.


 

이기고 구원받은 기쁨의 노래에는 수긍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새 노래를 배우는 신분상의 견해는 무리가 따르게 된다. ⓒ와 ⓓ는 새 노래를 배우는 신분이나, 먼저 간 하늘의 주민들로부터 배운다는 견해들은 본문과는 괴리(Estrangement)적인 해석이므로 그런 해석은 수용하면 안 된다. 신분은 1절에서 설명된 어린양의 신부들이라고 제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All)라는 해석은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또한 대환난에서 순교를 당한 신자들이라고 해석하였는데 그들은 부끄럽게 구원을 받은 쭉정이 신자들이므로 그런 해석도 옳지 않다. 그리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도 아니다.


새 노래를 배울 자들은 144,000인 뿐이라는 뜻은 믿음을 이기고 부활과 휴거된 어린양의 신부들로서 새 예루살렘에 거할 자들이 144,000인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믿음을 이기고 어린양의 신부가 된 거룩한 성도들 외에는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는 능히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배울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 하였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한다(엡4:30). 성령으로 보호 받을지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완전한 구속이 되지 않았기에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구속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공중강림 하시는 날이 구속의 날이다. 또 성경은 “우리 곧 성령으로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하였다.


베드로는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3-5)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어린양과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고전15:23)라고 분명하게 설명하셨으므로 어떠한 다른 해석은 용납될 수 없다.


 

위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주신 것은 몸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들림을 받기까지 보호하시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배우는 신분은 어린양의 신부들인 144,000명 외에는 없다.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공중 강림하였을 때에 부활되고 휴거된 자들만이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처음 익은 열매”(계14:3,4)로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여러 견해들은 바른 해석이 아니므로 그런 것을 수용하게 되면 자신의 안일한 신앙으로 인하여 대환난에 남겨지게 된다.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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