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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교회 목회와 설교

하나님아들 2012. 12. 22. 15:04

개혁교회 목회와 설교

- 서창원 목사


1. 한국교회 강단 이대로 좋은가?

 


물난리 속에 마실 물 없다는 말이 있다. 매주일과 새벽마다 전국 5만여개 교회 강단에서 그리고 기독교티브이와 방송매체에서 엄청난 양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 이쯤이면 말씀의 홍수라고 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왕래해보지만 얻을 수 없는 영적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암 8:11~)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개선되겠다는 기대감 상승보다는 좌절감이 더 증폭된다는 전망이고 보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설교자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목사들은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사용하여 종교사업에 열중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성례전과 같은 예식을 준행하라고 세워진 자들도 아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고전 1:17) 하려고 부름을 받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종교적 행사에 능통한 전문 경영인이 될지언정 생명의 말씀의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전파하는 것이 주님의 진리이기보다는 종교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해 갈 수 있는 일들만 만들어낸다. 종교사업가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린다. 마치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흥왕케 하는 최선의 길인 줄 알고 말이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지키실 것이다. 주의 종들은 주님의 말씀의 뜻을 풀어 밝히 증거하는 사명자이다. 설교는 우리의 대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을 위하여 목사가 부여받은 가장 우선되어져야 할 임무이다. 동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 잣대는 개개인의 양심이나 세상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천지가 변해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그 말씀 안에 우리가 믿는 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지를 다 습득하게 된다.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를 목자(ποιμήν-shepherd)와 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치는 일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요 21:15-17).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지 못하면 결코 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선한 사업에 힘쓰지 않아서가 아니다. 훌륭한 신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명 줄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 희박하기에 삶을 변화시킬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장사라도 굶으면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성도들이 생명의 꼴을 골고루 잘 섭취할 때 각자의 처소에서 어둠을 몰아낼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매 주일마다 교회는 사람들로 메워진다. 물론 대형교회들이 그러할 뿐이지만. 그러나 예배당을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성령의 능력은 자취를 감춘다. 금방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다. 밝은 미소조차도 찾기 힘들고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삐 돌아선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예배자 자신들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조금 전에 들은 것이 영혼을 소생케 하는 생명의 양식이었는지가 의심스럽다. 혹 그들은 단지 종교적 전문가들의 유희에 의해서 변색 퇴조된 음성을 듣고 나오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가 머물기엔 적합하지 못한 자리였던 것이다. 설교자도 양들도 어쩌면 지존하신 그 분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교자나 예배자들이 단지 예배의식에 참여하였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을 뿐은 아닌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쐬고 오겠다는 그 이상(異像)을 기대하지도 않게 만든 설교자들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목사들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서 그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할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전파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님의 일을 태만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저주를 받게 하는 것이다(렘 48:10). 지금 한국교회가 그 건물과 숫자의 위용만 자랑할 뿐 영적인 힘을 잃고 있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소리만 난무하다. 


물론 청중들의 자세도 문제이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니까 이젠 기대조차도 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적한 것이 성취되고 있는 시대에 잘 맞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자신의 양심을 찔리게 하고 심장을 도려내는 예리한 말씀의 위력을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적당하게 위로받고 세상과 타협하며 부와 영화를 꿈꾸어도 그것이 능력이 많고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칭송을 받게 하는 것을 즐기고자 한다. 설교자들이 처음에 하나님 편에 많이 머물러 있다가 점점 사람들 편으로 기울어지더니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사람들 편에 서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는 중재자(사제)역할에 충실해지고 있다. 더 이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의 하수인 노릇하는 것으로 흐뭇해한다. 실제로 그것은 진리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고 고난당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게 먹고 살만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에서 교회 개혁을 너도나도 외친다. 작년에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요란하게 떠들었던 것은 부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너도나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부흥이었는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는가? 주님의 훼손된 진리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주님의 심장으로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굶주림 때문이었는가? 그런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운동을 주도한 대다수는 지금보다 더 많은 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부흥을 꿈꾼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비대하다. 그러나 더 누리고자 하는, 그야말로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구해도 얻지 못한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는’(약 4:3) 것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한국교회는 부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도 철저하게 세속화의 때를 벗어버리는 개혁이다. 대형교회가 없었어도 한국교회 초창기는 변혁의 힘이 있었다. 지금은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십대 교회 중 절반이 수도 서울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저변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히 미미한 이유가 무엇인가? 부하려는 세속적 욕망에 덧 씌어져, 믿음에서 떠나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고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정욕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믿음을 외치지만 권력과 부와 명예를 믿음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한국교회 강단을 휘어잡고 있지는 않는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고백하는 개혁교회 목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은혜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더욱 갈망한다. 그래서 파렴치하게도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한다. 옛날 황실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황제의 업적과 성은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신하들은 박수를 치지 못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그의 권위 앞에서 말도 행동도 주의해야 했다. 입을 열 때는 황제의 업적을 생각하며 그의 권위를 높이는 일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들과 성도들은 만 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이 여기려고 설친다.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 그에게 박수를 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업적을 은근 슬쩍 끼워 어깨춤을 춘다. 하나님께 무례하게 행동하는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러한 곳에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는가? 황제 앞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다시는 그 앞에 설 수도 없는 것이다.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의 열 왕들이 다 모여도 그의 권세를 따라갈 수 없는 천지의 주재자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도 우리는 그 앞에서 불알친구처럼 행동할 수 없다. 그는 지존자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설교자이다. 설교자들이 어명을 가지고 함부로 장난치는 일은 대역죄에 해당된다. 성경 말씀을 말씀으로 바르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단의 개혁이야말로 제 2, 제 3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다. 루터가 고백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 온 유럽을 강타한’ 제 1의 종교개혁 성공은 지금의 개혁도 성공을 거두게 할 동일한 도구인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개혁교회 설교와 목회의 모토이다. 기독교는 사람들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하는 것이 한국교회 개혁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도나도 그렇게 말은 하는데 실지로 그렇게 말하는 자들 중 상당수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무지이며 또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하고 완전하며 충분한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성경의 무오성은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성경의 충분성은 의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아무 두려움이 없이 ‘목회는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닌 자들만이 그런 말을 한다. 물론 이것도 입으로는 부정할 사람들이 대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강단에서 인용하고 즐겨 사용하는 말들을 분석해 보라. 얼마나 많은 심리학적이고 경영학적이고 철학적인 용어들이 성경진리보다 능가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경우는 설교가 심리학 또는 상담학 강론인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별로 우아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말들을 인용하며 설교자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업인 성경엔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설교자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심지어 이성이 받아드릴 수 없는 말씀도-을 예외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설교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강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성경에 능통한 자여야 한다. 물론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물론 요즘엔 신학자라고 해서 다 성경 박사는 아니지만 말이다.


성경에 능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교회 강단에 주된 흐름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첫째는 주제설교이다. 주제 설교는 시사적이다. 설교자가 한 주 동안에 일어난 여러 사회적 문제들, 정치적인 것들, 신문에 보도된 주요 기사들을 의존하여 설교하는 것이다. 또는 청중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필요에 맞추는 설교를 한다. 또는 자신이 독서한 책 내용을 가지고 요약하여 설교를 한다. 지극히 도덕적이고 시사적이며 교훈적인 것이 설교의 전부인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적어도 두 가지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단지 설교자의 기호에 맞추는 보조 재료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설교자의 설교는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성경본문에서 이탈하면 안된다. 그런데 상당수의 주제설교들은 성경 본문에서 그 내용들을 근거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설교자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보조 재료가 될 뿐이다. 또 주제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전하기 쉽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설교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잘 소화시킨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이러한 설교는 개혁교회 설교가 아니다. 설교자는 윤리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 것이다. 사람들의 문화적 교양과 품위를 높여주고 선도하는 교양 선생이 아니다. 문화사절단이 아니라 복음 전파자이다. 


둘째는 기복주의 설교이다. 물론 성경에도 복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가난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분명하다(마 6:33).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영화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아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집트의 모든 보물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것을 더 큰 보물로 간주했다(히 11:24-26). 그런데도 강단의 설교자들은 세상적 가치관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한다. 예수를 믿으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주님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복을 부어 주셨다. 성도는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잘 섬기기 위한 부와 영화를 생각해야하지 단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분명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며 단지 부활의 영광에만 동참하고자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잘못이 매우 크다. 설교자들도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한 기복신앙은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 메시지가 될 뿐이다. 그같은 메시지로는 믿음으로 살다간 선조들의 길을 결코 따를 수 없게 된다. 한국교회 강단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오직 말씀 중심의 강단이어야 한다.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전파할지 몰라도 본문에 충실하고 성경 전체 메시지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 한 진정한 설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자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전파하는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가 아니다. 사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 혹은 야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신 혹은 대사의 위치나 역할은 그를 파송한 분의 의중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조국과 대통령을 위해서 말하는 자이다. 그가 부여받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 경륜, 혹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설교자인 것이다. 성경 말씀이어야 한다. 누구든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 같이 하라고(벧전 4:11)하는데 하물며 전권대사야말로 마땅히 그를 파송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되지 않겠는가?  


복 받으라는 말씀도 많이 있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 더욱 강렬한 메시지임을 기억하라. ‘세상 부귀영화 분토만도 못하다’고 노래는 하면서 실지로는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이 너무 많다고 온 몸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설교자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설교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하고 크시고 놀라운 분인지를 잘 드러내보여야 하는데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매력 없는 분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더욱 더 알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의 청중들은 왜 그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강단에서 들려지는 것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들도 예수를 너무 모르고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어야 할 중심에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이 자리 잡도록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당에 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것들에 집착하는데 격려를 받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실로 교회는 하늘나라 보배로운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세상의 가치들을 더 소유하고 누리게 하는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되어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강단은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시키는 교회경영전문가 집단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들의 설교는 성경말씀에 충실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데이빗 웰스가 쓴 <신학실종>에서 말한 통계자료를 보면 1980년대와 90년대의 미국교회도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설교자들은 겨우 20%대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본다. 사실 강단의 심각한 문제는 웰스의 지적처럼 오늘날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다. 그것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급격하게 전환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진리에 충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학이 없는 설교요 설혹 신학을 말한다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시시 컬컬한 신학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개혁은 강단 개혁이 우선되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전인적인 변혁이 가능한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설교는 진리에 대한 증거였다. 성도들은 그 들은 진리를 삶에서 경험하였다. 그에 비해 오늘날 설교자들의 증거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한다. 자신의 체험을 강조한다.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 경험담이 강단과 노래의 주를 이루고 있다. 오! 설교자들이여! 성경에 전문가가 되라. 성경을 전할 수 없으면 설교자 되기를 포기하라. 성경 진리를 전파할 수 없는 사람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강단에 우상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존 낙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도리들을 철저하게 습득해야 한다.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펄젼 목사가 존 번연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존 번연의 몸 어디를 찔러도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말씀의 피다.’ 생명의 떡이 강단에서부터 줄줄 흘러나와야 한다. 성경 진리가 교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끌어야 한다. 목회자의 목회철학이나 회중들의 욕구가 교회 운영지침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성경을 설교하라. 하나님을 말하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혁의 원리이다.

   


2. 설교는 왜 하는가? 


요즘 한국 교회 성도들이 교회당에 나가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의 필요한 모든 힘을 공급받기 위하여 예배당에 가는가? 과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한지는 매우 단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상당수가 교인들과의 교제를 위해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인터넷이나 설교티브이 방송을 통해서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누리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교인들 간의 만남이 우선순위가 되어버렸다. 대형교회일수록 이 부분은 너무나 명백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설교는 왜 하는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교회에 있어서 최고로 영광스러운 직임을 설교사역으로 여긴다. 교회의 삼대표지측면에서 보아도 말씀선포 사역이 그 첫째이다. 과거에는 설교 강단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함으로써 말씀의 권위를 가장 높이 여겼지만 현대교회들은 강단의 축소화 내지 낮춤과 병행하여 찬양대석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는 권위주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위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가 말씀선포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목사는 윤리선생도 문화조성자도 복지사업가도 경영인도 아니다. 목사는 첫째도 설교자요 둘째도 설교자요 셋째도 설교자인 것이다. 청교도 초기 설교자인 윌리암 퍼킨즈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설교사역을 감당하지 않을지라도 친절한 호의를 베풀고 이웃간의 평화를 조장하며, 다른 자선 행위에 열심이며, 선한 행실을 드러내는 일에 전념한다면, 그들의 임무를 충분히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저히 기만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목사가 설교사역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설교자로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나 교회 역사에서 목사는 설교자였다. 설교를 하지 않아도 다른 일들로 얼마든지 목사라는 직임을 받음이 가능한 현대교회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설교는 왜 하는가? 라는 질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요 복음주의 신학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그러나 지금은 로마 가톨릭과의 연합에 앞장서 있는 제이 아이 팩커는 복음주의 선을 넘지 않았을 때 그 질문을 던지면서 설교 부재의 시대에 설교는 해서 뭐해? 와 같은 냉소주의 흐름과 동시에 설교다운 설교가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설교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구된다는 도전의식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후자의 입장에서 올바른 설교를 해야 할 이유 여섯 가지를 말하였다. 


첫째, 오늘날 강단에 설교 아닌 설교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통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어야 한다.


째, 주제별 설교가 강단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설교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성경을 이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설교자의 사상을 전달하기 쉬운 주제별 설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종교적 전문가의 주장에 의해 퇴색 변조되게 하는 것이다.


셋째, 설교에 대한 기대감이 저조하기 때문이다. 신적 음성이 아닌 사람의 소리가 넘친다.


넷째, 성경적이지 않고 불건전한 운동들이 강단사역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 자들의 미혹, 이단들의 침공, 신비주의, 은사집회, 찬양집회, 간증집회 등의 명목으로 행해지는 일련의 행사들이 강단사역의 중요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다섯째, 예배순서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가 설교사역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예배자들의 정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당연히 순서 자들은 온통 자기가 맡은 순서만을 사모하고 기다릴 뿐 주님의 말씀 듣기는 안중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순서가 끝나면 다른 모임을 위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말의 힘의 중요성이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시대가 그 증거이다. 그래서 설교가 짧을수록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지(롬 10:17) 보는 것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현대교회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설교시간에 도입하고 있는 영상매체들은 목회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삼을 수 있다. 과거 중세시대 말기에 종교개혁의 횃불이 치솟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보여주는 시각적 교훈과 가르침이었다. 물론 당시 문맹률이 대다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그림이나 조각 또는 음악을 통해서 전달했다. 그 결과 유럽의 상당수 신부들도 성경 자체에 무지하였고 동시에 성도들 역시 성경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루터가 복음서를 가지고 많이 설교하게 되자 루터의 설교를 들은 일부 신부들은 ‘복음서는 루터가 쓴 성경인가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그 정도는 아니라할지라도 그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조짐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과거에 주일날은 예배당에 오는 사람들은 성경찬송가를 앞가슴에 대고 희망차게 들어왔다. 그러던 것이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젠 차안에 두고 다니더니 지금은 아예 빈손으로 예배당에 오는 이가 적잖다. 왜냐하면 화면에 띄어주는 성경 구절과 찬송가 가사들이 다 있기 때문에 굳이 따로 들고 들어와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성경 찾는 것을 잊게 된다. 찬송가 가사도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대다수 예배자들이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보고’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거 중세시대처럼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지 않아도, 그리고 찬송가도 직접 찾아 부르지 않아도 신앙 생활하는 일에 전혀 지장이 없게 만들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성경에 무지한 목사와 성도들이 무지기수로 양산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성경에 무지한 설교자들이 많고, 성경을 모태에서부터 듣고 자랐다고 하는 아이들도 성경의 교훈에 무지한 일들이 많은데 앞으로 그 정도는 더 심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설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옛 전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은사 중에 설교사역이야말로 가장 무겁고 영광스러운 최고의 직임임을 설교자들이 깊이 인식해야 한다. 물론 설교는 예배의 5대 요소 중 하나이다. 다른 요소들, 찬양, 기도, 헌물 및 성례 모두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설교가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찬양과 기도와 헌금은 다 피조물인 우리로부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비중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더 크다. 성례가 말씀선포보다 덜 무게 있는 것은 말씀 선포 없이는 성례 거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례는 말씀 선포사역이 이루어지고 그 말씀에 따라 거행되는 예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있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설교 사역은 사람이 부름 받을 수 있는 소명 중 최고로 높고 최고로 크고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다...기독교회에 가장 시급한 필요는 참된 설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자이며 그 선포되는 설교는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인하여 신자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진리로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 설교자도 데살로니가 전서 2:13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러한 중요성을 무슨 권리로 경시할 수 있는가?

2.2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이처럼 귀한 사명인 설교 사역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 이미 답은 주어졌다.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교회 설교관이다. 설교의 모든 내용이 다 본문에서 나와야 한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라고 말했다. 사실 골로새 교회에는 천사 숭배와 헛된 철학과 속임수로 인하여 성도들이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지 못하고 아무 유익이 없는 세상의 초등학문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과 디모데는 펜을 들어 골로새서를 쓰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전파한다는 것은 이미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확인한바 있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 이후 이것은 지금까지 모든 설교자들이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할 잣대가 되었다. 


사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교훈하신 것도 이것이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그리스도를 설교하려면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강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자신과 자신의 행하신 일을 기술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더 나은 길을 발견했다든지 성경 밖의 어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해 주는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는 말은 주제넘은 주장이 될 뿐이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발견한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는 첩경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할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좋은 소식, 곧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들어야 한다. 그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 및 다시 오심에 대한 모든 가르침들을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를 수 있겠는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는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겠는가 우리는 오직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한다. 그가 유일한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예수만을 전파해야 한다. 그가 왜 인간이 되었는지, 그가 왜 고난을 당하셨는지, 그가 왜 십자가 죽음을 받으셔야 했는지, 그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다시 오신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파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 경륜을 설교하는 것이다. 인간의 말이나 세상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의 좋은 가르침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헛된 철학이나 속임수를 전하는 것도 아니다.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기 위한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마지막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에 꿇어야 한다. 모든 방언이 그를 주라 시인하여야 한다. 그가 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았고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 그에게 경배하지 않고 누구에게 엎드릴 수 있겠는가? 그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이 경배이다. 그가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옛날 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 청교도들인 언약도들은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때문에 목숨을 내놓았다. 교회와 국가의 통치권자로 자처한 찰스 1세와 찰스 2세의 학정에서 갖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교회의 머리는 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임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른바 ‘살인시대’ 동안에 무려 18,000명이나 순교를 당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오늘 우리들은 만유의 주재자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에게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이 강단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슬픈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설교사역의 회복이야말로 무너진 성전의 영광을 되찾는 길이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모독당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높여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전파해야한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설교특징이다. 그리스도 주변을 맴도는 신학과 설교사역이야말로 청교도들과 앞서간 믿음의 선조들이 물려준 개혁교회 전통이며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유산이다.  


3.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개혁교회 목회 방법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목회기술을 익히기 위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데이빗 웰스는 현대 신학교의 흐름이 어떤지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신학생들 사이에 목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소명의식에 의한 것임이 사라지고 일종의 기독교 사역의 전문직종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의 글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신학생은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으며, 신학의 각 학문 분과에 대한 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습득하지도 않는다. 신학생은 전문가로서의 활동 분야를 연마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위한 신학의 중요성이 사라지면서 옛날식의 신학은 거의 다 사장되었으며, 이에 따라 신학교 훈련도 점점 일종의 공적인 처세와 에티켓을 주입하고, 심령을 돌보는 사업상의 비법을 전수해 학생들에게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 길을 닦아 주는 일로 바뀌고 있다. 종종 큰 교회를 꿰차고 많은 봉급을 받고 있는 사람 가운데 신학도 없고 심지어 반신학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신학생들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에게 무슨 훈련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자나 사상가나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의 신분을 소유한 관리자가 되는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신학생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인문학 분야의 과정과 더불어 성경신학에 대한 관심보다 교회 경영 혹은 목회직 관리업무에 더 많은 할애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지도자상은 진리의 전달자에서 교회경영전문가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가 정말로 갖추어야 할 것은 소비자 중심 여론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적절하게 수요를 공급해주는 지도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지식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목사는 성경의 맥이 무엇인지를 알고 성경의 중심 사상을 풀어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하나님의 진리의 요구가 무엇이며, 일반 문화의 습관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인지에 대해 교인들이 잘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이다...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충성하지 않는 기독교적 섬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가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한다면 전문직종 관리업무에 능통한 자가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여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성경을 충실하게 배워야 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부룩스(Thomas Brooks, 1608-1680)에 대한 동료들의 평가는 이러했다. ‘그의 머리 속에 조직신학이 들어 있으며 그의 심장 속에는 신학의 능력이 들어있다.’ 신학은 삶이지 학문의 한 분야가 아니다. 대부분 목사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일생을 익혀야 할 신학의 전부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학교를 졸업하면 신학서적을 거의 읽지 않는다. 실용주의 책들, 간증거리들, 자신의 지적 능력의 우수함을 알리는 책들을 섭렵할 뿐이다. 주님의 진리를 더욱 풍성케 깨닫게 하는 책들은 거의 접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공사례만 눈독을 들인다. 그런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사람과 동류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이 있음을 알고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강한 어조로 당부하였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그러면서 바울은 성경의 효능에 대하여 언급하며 3장을 맺는다. 우리는 사도들로부터 전수받은 고귀한 신앙, 성경의 권위를 훼손치 말고 성경에 충실한 사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의 모든 것은 다 성경에서 나온다. 어떻게 목양할 것인지 그 방법도 성경에서 다 발견할 수 있다. 교회 밖에서 혹은 세상의 별 우아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목양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에 복종하는 목회자가 되지 않는 한 선포되는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는 얻기 힘들다. 교회와 목회영역에서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질 뿐이다. 목회 방법이나 기술조차도 심지어 경영조차도 성경 밖을 넘어가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특히 골로새서 1장에서 사도는 아주 효과적이고 능력있는 목회 방법론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복음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역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네 가지 방법을 숙고할 수 있다.


 

3.1 케리그마와 디다케


목회에는 선포하는 케리그마 사역과 가르치고 양육하는 디다케의 사역이 있다. 선포가 없는 디다케는 가슴을 잃게 되고 디다케 없는 선포는 머리를 잃게 된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목회에 언제나 병행되어야 할 일이다. 케리그마와 관련된 것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목회의 최우선적인 임무이다. 이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이다. 만일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고전 9:16). 케리그마 사역자는 사실 자신의 열정이나 재능 및 기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한 불가항력적 은혜로 일하는 자이다. 그런 자만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이나 사도 바울의 각오를 외칠 수 있다. 스펄젼 목사는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권고하면서 그 사명감이 없는 자는 목회로부터 속히 떠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케리그마 사명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른 일을 절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교합니다. 도저히 제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 뼛속에서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도저히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설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강권적인 부름을 가진 자가 설교자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은 천사나 일개 국왕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만유의 주재자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사명감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끝까지 충성하는 자가 된다. 사명의식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선한 싸움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믿음을 지키게 만든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부름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해서 설교자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강력한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이다. 그 사명은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고 주님의 양을 치는 것이다. 이 목양사역은 주님의 모든 양 무리들을 향한 것이다. 어린양만이 아니라 성숙한 양까지, 건강한 양만이 아니라 병든 양까지 한 마리 한 마리 다 포함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만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양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요 10:16).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서 예수께 맡기신 양 전부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대목자장이신 예수께서 맡겨주신 모든 양들을 먹이는 케리그마 사역과 동시에 그들을 잘 돌보는 디다케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목사의 자질은 잘 다스리는 자만이 아니라 잘 가르치는 자라야 한다(딤전 5:17). 돌봄은 훈육을 통해서 온전해 진다. 성경 진리를 잘 가르치는 양육과정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성도는 특정한 제자 훈련기간에만 양육과 돌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평생교육과정에 있는 자들이다.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음식을 섭취하듯 성도들도 온전히 거듭난 성숙한 자일지라도 단단한 음식을 날마다 섭취해야 하며 돌봄을 받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배워야 한다.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주님을 더욱 닮게 되는 것이다. 디다케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서 그들의 심령에 맞는 처방을 잘 내릴 수 있는 영혼의 의사가 되어야 한다. 의사의 진단은 처방전에 반드시 실시되어야 하듯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성도들의 형편을 잘 알 때 이루어진다. 따라서 심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개인의 영적 상태가 다 다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거듭난 자들인지, 아닌지, 교만한 자인지 겸손한 자인지 마음이 완악한 자인지, 교육이 필요한 자들인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할 자인지, 교정을 필요로 하는 자인지, 상처받은 자들인지, 낙심한 자들인지, 의기소침한 자들인 연약한 자들인지 다양한 사람들의 정황을 잘 파악하여 그들의 영혼에 적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일은 케리그마 사역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심방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적절하게 치유했는지를 점검하며 돌보는 일을 감당한 것이다.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목사의 주된 일이다. 이 일을 제쳐두고 종교사업에 열중하는 전문 경영인으로 만족하지 말라. 더구나 교회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간궤가 언제나 노리고 있기 때문에 양들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목사는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이단 사상들이 침투해 들어와서 양들을 늑탈하는 일들을 방치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 목사를 교회의 감독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곳에서 경계 근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보초병이 자신이 돌아볼 구역을 소홀히 여기면 간첩 침투로 인하여 아군이 몰사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신천지 이단에 교회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더욱 목사의 케리그마와 디다케 사역에 충실해야 함을 경각하게 된다. 성도들이 이단에 넘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친목적인 것이 아니다. 주된 것은 진리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뼈대를 이루는 교리적 가르침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이 거짓 교사들의 활약을 방지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목적 때문에 시작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의 가르침들을, 그리고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학적 체계를 분명하게 가르쳐서 말씀 위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는 목회여야 한다. 목사가 교리를 가르칠 수 없다면 어찌 목사라고 할 수 있는가? 목사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경영인도 아니다. 목사는 설교자요 동시에 교사이다. 이것이 디모데 전서 5:17절의 교훈이요 에베소서 4:11절의 목사와 교사의 의미이다.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는 일과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일군인 것이다.



3.2 경계와 책망 


목회에 있어서 양들을 돌보는 일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 경계와 견책이다. 양을 치는 일은 단지 먹이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곁길로 가지 않도록,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삼키려고 덤벼드는 사단의 공략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훈련되어져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케리그마 사역에서도 충분히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케리그마의 효력은 디다케가 뒷받침될 때 극대화된다. 따라서 이 일의 중요성 때문에 나는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성경의 효능에 대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말씀 선포와 교리적 가르침은 그 자체 안에 경계와 견책이 다 들어가 있다. 사람들은 곧바로 실질적인 교리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더욱이 요즘같이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어디서나 쉽게 다른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목양에 있어서 양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깨어있도록 교정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요구된다 하겠다. 


우리 말 ‘경계’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누데시아(νουθεσια)와 마르투로마이(μαρτυρομαι)가 있다. 전자는 고린도전서 10:11절에 사용된 것으로 권면 또는 경고에 해당되는 말이다. 후자는 데살로니가 전서 2:11-12절에 있는 말씀에서 본 주제에 해당되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르투로마이’라는 단어는 증인이라는 뜻의 마르투스(μαρτυς)에서 파생된 것으로 증인으로서 ‘엄숙히 선언하다’, ‘엄히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목회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밝히 말하고 있듯이 성도 각 사람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엄히 증거하여 타이르고 꾸짖고 바르게 훈계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다. 사실 이것은 목회의 목적과도 같다. 골로새서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이유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이 주의할 것이 있다. 경계함에 있어서 반드시 아비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망도 마찬가지이다. 책망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엘레그모스(ελεγμος)인데 이 뜻은 잘못과 허물을 꾸짖는 견책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여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성경 말씀 자체가 그런 기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의 죄를 책망할 때 정죄하려는 목적 때문에 아니라 바르게 교정하는 일을 위하여 사랑으로 훈계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아비의 심정으로 경계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교훈을 주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그렇다. 사랑의 마음이 없는 책망과 경계는 반발만 살 뿐이다. 참 사랑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진리를 말할 때도 사랑가운데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엡 4;15).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이 정말로 양들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양들이 알게 해야 한다. 목회가 목회자의 유익과 영화를 위한 것이 되면 우리의 경계와 책망은 무익한 것이 될 뿐이다.  


경계와 책망은 바른 교훈으로 해야 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진리요 다른 하나는 행함이다. 경계와 책망은 목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지혜의 말로 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디도에게 감독의 자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고 했다. 바른 교훈은 건전한 말씀(trustworthy words)을 말한다. 무엇이 신뢰할만한 말씀이겠는가? 물론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뜻한다. 그러나 목사의 가르침이 힘을 발휘하려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자녀들이나 성도들은 아비의 말을 통해서 배우는 것보다 행동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따라서 바른 교훈으로 경계하고 책망하되 진리의 말씀과 동시에 우리의 행함으로 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칼빈의 교훈을 새기고자 한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려는 수고가 없다면 강단에 오르다가 목이 부러지는 편이 낫다.’ 


경계와 책망에는 설교자에게 용기가 필요하다.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 것을 보면 바울에게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9-20). 아무리 속상하고 곤욕스러울지라도 진리를 선포하고 책망이 필요하면 꾸짖을 수 있는 용기가 설교자에게 요구된다. 목회사역에는 항상 대적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쫓아다닌 무리들이 무려 40여명이나 존재하였다. 회중들 가운데는 양들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염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미혹을 받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럴지라도 설교자들은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의 종들은 붙들어주시며 원수들은 반드시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와 책망함에 있어서 설교자가 가진 용기는 존낙스와 그의 후계자 앤드류 멜빌에게서 찾아진다.

존 낙스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당시 여왕 메리와 담판을 짓는 일이 네 번이나 있었다. 그 때마다 여왕의 눈에서 눈물을 빼내게 할 정도로 낙스의 설교는 굽힘이 없었다. 신하주제에 뭔데 군주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고 따지는 여왕의 눈물을 보며 낙스는 이렇게 말했다: ‘설교 장소에서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자기는 다만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고 땅위의 그 어떤 육체에게도 아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뿐이오...나는 이 나라에서 태어난 신하요, 마담! 나는 이 나라에서 백작도 영주도 그렇다고 남작도 아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 보기에 그렇게 비천해 보이는 나를 이 나라 안에서 유익한 시민으로 만들었소.’ 메리여왕은 불란서 군대의 침공보다 낙스의 기도를 더 무서워할 정도였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이 되고 있어서 책망과 경계를 일삼는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설교자는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야 할 것을 선포하는 자이다. 책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경계와 책망과 관련하여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목사는 제사장직보다 선지자직에 더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주는 화목의 사역이 강하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죄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희생제물을 바치고 하나님의 죄 용서함의 은총을 입는다. 물론 선지자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임을 가졌다. 그러나 선지자는 죄 회개를 촉구한다.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하여 어떤 긍휼이나 감싸줌이 없다. 예리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굶는 법이 없어도 선지자들은 굶는 일이 빈번하였다. 오늘날 교회에서 인기가 좋고 잘 대접을 받는 자들은 제사장적 직임에 더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선지자처럼 행동했다가는 인기도 없고 언제 배척당할련지 알 수 없다. 그럴지라도 설교자는 나팔 소리를 분명히 내야 한다. 그것이 개혁교회 설교자의 임무이다. 설교자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교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다 옳은 줄로 알 것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하는 사역에 충실할 때 주님의 날에 저들이 우리의 자랑이요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 날을 사모하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자가 되자.

3.3 돌봄(목자와 양)

설교자는 양들을 잘 돌보는 아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목사라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것이다. 쉽게 유혹당하고 넘어지고 낙담하는 연약한 양들이기 때문에 잘 돌봐야 한다. 사랑의 돌봄이어야 한다. 돌봄에 있어서 곁길로 갈 수 있는 것은 베드로의 일침에서 발견된다. 즉 부득이함으로 한다든지 혹은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한다든지 또는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권위적인 자세로 하는 것이다(벧전 5:2). 그러나 목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심장을 품고 양들을 돌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8-31).


흉악한 이리가 교회 안에 언제든지 침입할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은 양떼를 죽이는 일이다. 죽이지 못해도 크게 상처를 입히고 회복 불가능한 자로 만들고자 한다. 목회를 다 파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이 미혹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양 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영혼 전체를 목양에 헌신해야 한다. 바울사도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양들을 위한 감독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목양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든 말든 목양에 전념해야 한다. 종종 목양실에 목양일념(牧羊一念)이라는 족자가 걸려 있는 것을 본다. 정말 목양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것이지만 양들을 돌보는 일보다 다른 업무에 바쁘게 다니는 자들도 많이 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쉽게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돌봄에는 눈물이 수반된다. 목양에 눈물이 없는 날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웃으셨다는 말은 없어도 울었다는 구절은 있지 않는가? 주님이 흘리신 눈물도 심한 통곡과 눈물이었다. 그만큼 목양사역이 힘들고 고달픈 일이다. 그래도 즐거움으로 이 길을 가야하는 것은 이 길이 주님이 가신 길이요 생명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름에 순종하여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잠 27:23). 바울도 3년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 목회는 노동이 아니라 소명이다. 소명은 자신을 위하지 않고 부르신 자를 위한 것이다. 부르신 자가 맡겨준 양들을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양육하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가 되게 해야 한다. 목사가 맡은 이 일에 온 마음과 영혼을 다 던져 넣어야 한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선포와 가르침과 경계와 책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면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더러운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되지 말아야 한다. 양들에게 유익한 것은 곧 우리에게도 유익하다. 목사는 양부(養父)임을 잊지 말라. 유모여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 눈물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증거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수고하는 것은 돈을 위하거나 명예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정말 모세나 사도 바울이 그런 것처럼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져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아비의 마음으로 진리를 말하는 주님의 일군들이어야 한다. 세상에 누가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모두다 다 자기 살겠다고 아우성인 판에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럴지라도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아픔이 곧 목자의 아픔이요 그들의 고통이 목자의 고통이다. 주께서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해 주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종종 자식들이 어버이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해서 가슴에 못을 박는 경우들이 있다. 목회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버이 사랑은 내리사랑이듯 양들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기억하고 사랑의 수고를 다해야 한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장 28절 한 구절에서 “각 사람”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언급하였다. 그만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돌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는 자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흐름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목사가 경영인이 되고 있으니 목자로서 양들을 돌봄에는 자연스럽게 사무적인 것으로 전락되어 간다. 존경과 사랑의 관계보다 업무적인 관계가 되고 있다. 개혁교회 목사는 CEO형 지도자가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는 자요 목양자여야 한다. 주님의 날에 우리가 맡아 목양한 그들의 우리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면류관이요 자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 


3.4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우리의 지혜나 명철이나 능력이나 재주를 자랑한다든지 뽐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은 목회는 내게 있는 것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Dei Gratia)로만 할 수 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라: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절).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가르치고 권하고 책망하여 성도 개개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 목회이다. 그 일을 위해서 두 채널이 반드시 요구된다. 둘 중의 하나가 아니다. 둘 다 없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목사 자신의 수고와 땀이요 동시에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물론 성령은 목사의 수고가 없이도 얼마든지 능력있게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연약한 그릇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시다. 고로 목회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학벌을 가진 사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사도, 유대인의 훌륭한 가문 출신이요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라고 뽐낼 수 있던 그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선택한 방식은 사람들의 눈에 정말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의 많은 학식과 수련해 온 방식들을 의지하지 않았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이 일을 위해 그가 수시로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모습 그 자체는 매우 시간낭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는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수고와 땀을 값지게 만드는 힘임을 안다.


사도는 자신을 신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존하였다. 왜냐하면 목회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할 이유는 많다.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것은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이다. 주님의 사신이 주님의 임재하심이 없다고 한다면 어떤 능력도 권위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신 이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은 영으로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세상의 현인들의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 말들이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도리어 번민에 빠지게 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번민과 고통과 무거운 죄 짐에서 인간을 구원해 낼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생산한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의 임하심을 기도하며 기다린 제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니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결실들이 나타났다. 


오늘날 일부 목사들이 성령을 마치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자신의 뜻에 따라 역사하는 것처럼 교만 떠는 자들이 있다. 마치 신접한 자가 귀신을 불러내어 맘대로 명령하듯 성령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조종 가능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데 목사는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라야 한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소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의 성공여부는 목사 개인의 자질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부어주심과 개입하심에 달려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목사와 설교>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대한 주제를 강의 맨 끝에다 둔 이유를 설명하기를 목사가 설교 준비나 사역에 임함에 있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철저한 대비는 소홀히 여기고 오로지 성령 하나님만 의존한다는 우를 범할까봐 그렇게 했다고 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 균형잡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사실 목사로서 사력을 다한 수고가 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본 비상사태에 해당될 때뿐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모든 수고를 친히 감당해야 했듯이 설교 준비를 비롯하여 목회에 필요한 제반 업무에 잘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만 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한다거나 행동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설교준비에 철저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일반 은총에 따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다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 원어 공부를 위해서 단어를 암기하고 문장 해독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 방언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는 유별난 존재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 빠질 뿐이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물리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우리의 수고를 다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즉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으면 온 종일 수고한 것이 다 헛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꿇는 무릎이 많아야 한다. 기도하는 것도 노동이다. 설교준비는 말씀을 연구하는 땀과 기도의 노동이 어우러져야 열매가 맺힌다. 어느 선배 목사의 말에 의하면 목회는 무릎을 꿇는 시간에 좌우한다고 했다.  

기도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다고 했다. 구제하는 것을 포함한 재정관리 안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의 땀과 눈물을 기뻐하신다.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어떠함을 나타내신다. 눈물과 기도 없이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없는 땀과 눈물은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설교자에게 부어지는 성령이다. 그것은 능력의 관통이다. 그것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며 성령을 통해서 설교자에게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넘어선 방식으로 사역을 감당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였다. 그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사도는 최선을 다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높여드린 것이다. 


목회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만 일하는 것도 아니다. 힘을 다한 수고, 해산의 수고가 따라야 한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수고 없이 열매를 딸 수는 없다. 극상품 열매를 위해서는 밤낮으로 수고해야 한다. 성경읽기와 묵상, 신학서적 읽기, 교회사 책 읽기, 위인전 읽기, 인기소설 읽기, 신문읽기 등 성도들의 영적 형편을 살피는 심방까지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해 힘써야 한다. 그 모든 수고를 통해서 한편의 좋은 메시지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자신의 역량에 따라 또는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지 초등학생이 대학생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주어진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야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질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행세하는 것은 허풍쟁이가 된다. 화호류구(畵虎類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고 하는데 실지로 개를 그렸을 뿐이라는 뜻이다. 호랑이를 그릴 실력이 있는데 개밖에 그리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개 그릴 정도의 실력뿐인데 호랑이 그린다고 과욕을 부리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각 사람마다 자기 일에 적합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탐내면 욕심이다. 그릇은 그릇을 만드신 하나님의 소관이지 그릇 자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각자 자기의 수고한 대로 자기 상을 받는다”고 했다(고전 3:8). 두 달란트 받은 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이는 다른 상을 받은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수고한 대로 자기들의 상을 받았다. 큰 교회 하는 자들을 흉내 내고자 애를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바울처럼 사용해 주지 않는다고, 역사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인물들처럼 사용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세월을 보낼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 불러주시고 일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하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전력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역량을 최고조로 다 발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령의 임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사역을 효과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임하심은 주권적이다. 우리가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할 때마다 목회 사역에 임하는 순간마다 성령의 임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리고 기대하라! 우리 가운데서 그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주님이 우리를 즐거움을 받아 사용하시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라.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능히 역사하실 수 있으신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을 날마다 사모하라. 우리는 ‘생명수를 다른 이에게 날라다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우물에 나아갈 수밖에 없고,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큰 통을 갖고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펄젼은 ‘성령 없이 육천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했다. 이것이 개혁교회 목회이다.  


나가는 말 


사도 바울이 목회하던 시대와 다르지 않게 지금도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다. 저마다 성경을 말한다고 하나 우리의 현실은 성경과 거리가 멀다. 외치는 자 많건만 생명수는 말라버린 시대에서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누구나 다 고민한다. 그리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찾는다. 그들이 이룬 업적에 매료되어서 그들의 방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도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진리이시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진리를 전파하는 자이다. 강단은 자신의 박학다식한 지식과 재주를 뽐내는 자리가 아니다. 강단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자리가 아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생명수가 흘러넘치는 자리여야 한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떡이 공급되는 자리여야 한다.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하는 자라야 한다. 무식한 자이든 유식한 자이든, 잘난 자이든 못난 자이든 아이이든 어른이든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그들이 들어야 할 말씀은 그들의 품위와 인격을 뽐내게 하는 교양 있는 자들의 말이 아니다. 목사는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꼭 들어야 할 말을 전파하는 자이다. 


목회는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께 온전히 붙어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성도 개개인을 돌보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 말씀 밖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되게 해야 한다. 목회는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담대하게 외쳐야 한다. 하나님의 전 경륜을 다 전파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히 연구하고 묵상하며 동시에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목회여야 한다. 목회성공은 현 시대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대 목자장이신 주님의 날에 잘했다 칭찬 듣는 것으로 결론날 것이다. 그 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개혁주의 목회사역에 몰입하는 사역자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출처 : 남은자7000
글쓴이 : 겸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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