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서를 통해 본 교사의 사명
교회학교의 어린이들이 점점 줄고 있다고 다들 아우성입니다.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만 해도 성공했다고 평가된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이런 저런 문제의 분석과 대책이 제시되지만 눈에 뜨이는 획기적인 돌파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교회학교의 위기'라는 말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지금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교사로서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디모데 전·후서는 「목회서신」으로 분류됩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를 맡아서 목회하던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서신을 통해 목회적 권면과 격려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때 직접 개척한 교회였고, 약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목회했던 곳이기 때문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중한 교회를 바울 자신이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디모데라고 하는 젊은 목회자에게 맡겼습니다. 아직은 미숙한 디모데를 염려한 바울이 그에게 목회적 원리들과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날 교사인 우리가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작은 목회자이고, 우리가 담당하는 반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목회의 현장이며, 우리 자신 역시 어떤 의미에서 작은 디모데라고 한다면 이 디모데서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성경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로서의 교사 자신을 발견하고 귀중한 목회적 원리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사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직분(딤전 1:1,2)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확고한 소명감이 필요했으며, 편지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로마서 1:1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린도전서 1:1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갈라디아서 1:1에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서 1:1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골로새서 1:1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라고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사도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28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교사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직접 세우신 직분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구석구석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사는 거룩한 피가 묻어 있는 직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교사로 부르셨다고 하는 천직(calling)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결코 중단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교사로 부르셨다고 하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 자리는 거룩한 피로 세우신 자리라고 하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조금 섭섭하게 한다고 실망하고, 힘들다고 그만두고, 다른 교사들에게 상처받는다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부르신 천직이라고 하는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복음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히려 알아주지도 않는 곳에서 힘들게 수고만 하는 가엾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교사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감이 교사의 영적인 권위이고 사람들을 향한 담대함입니다.
교사는 복음을 위하여 세움(딤전 1:3∼11)
교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 후서 1:11에서도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교회 교육의 절대적인 구심력입니다. 세상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복음에서 나옵니다. 복음과 만날 때 참된 변화가 있습니다. 교회 교육의 목적은 흥미를 유발하거나 어줍잖은 재미거리를 제공하는데 있지 않고, 어린이들이 복음과 만나서 변화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매주일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처럼 아이들이 신비하게 여길 이야기만 전해서 예수님을 요술쟁이로 만드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고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관념적인 이야기만 실컷 늘어놓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된다는 의미를 세상은 그저 악한 것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관해서 능통한 지식이 있어서 성경은 잘 가르쳐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말하지 못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성경에 관해서 읽지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마치 잘 읽고, 잘 알고, 잘 깨닫고 있는 것처럼 자신까지 속이고 가르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재미있게 들려주거나 비싼 간식을 사주는 것으로 교사의 의무를 다했다고 만족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죄송하지만 바울이 지적했던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용서'에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용서하신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율법으로는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하는 여인을 예수님은 돌을 던지는 대신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율법보다 더 위대한 법은 은총과 용서의 법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후의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용서의 기쁨과 감격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알면 세상 이야기를 더 많이 할 것이고, 예수를 더 많이 알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다면 복음을 전하겠지만 모르면 윤리나 도덕을 강의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게 용서의 기쁨과 확신이 있으면 그 기쁨을 전하겠지만 그것이 없으면 율법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와 복음과 용서의 감격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사의 자기 이해(딤전 1:12∼17)
1. "나는 죄인이다"
교사로서 나는 죄인이었으며 내가 가르치는 자들도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를 교사로 세우신 것은 나 같은 죄인도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교사가 되게 하신 것은 나는 이미 그 예수를 통하여 그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어떻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느냐를 많은 사람들에게 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16절에 기록된 '본'이라고 하는 것은 '모방'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를 모방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모방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2. "나를 능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겸손한 고백과 함께 빌립보서 4:13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교사는 자신의 지식이나 자격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로서 느끼는 두려움과 주저함은 그리스도가 나를 능하게 하심을 믿을 때에 극복될 수 있습니다. 연말이나 연초에 교사가 부족해서 마땅한 분들에게 교사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면 대개는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라는 이유로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의 교사는 지식이나 자격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매번 되풀이하면서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어느 한 사람 그럴듯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거의가 어부였고, 하나같이 변변치 못한 그렇고 그런 하류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은 다음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고, 무지랭이 같은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졌으며, 세계 역사를 바꾸었던 것을 본다. 나를 나되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지 내가 아닙니다.
3. "나를 충성 되이 여기셨다"
교사는 철저하게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이런 분명한 자기 이해가 없으면 실망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인정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나를 충성 되다고, 신뢰할만하다고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목사인 저도 누가 나를 알아주고 칭찬하고 인정해 주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남이 나를 모른 척 하고 내 공로를 몰라주면 은근히 화가 납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상하는 일입니까? 대개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상급이나 칭찬이나 인정이 있어야만 만족합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사람이 알아주기만을 바랬다면 그는 선교에 헌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몰려드는 성도들을 자기 사람이나 만들면서 편하게 목회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신처럼 추앙 받으면서 명예와 권위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미련을 가차없이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교사는 주님이 맡기신 직분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한 말씀이 더 붙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충성 되이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신뢰할만하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교사가 된 분들은 그만큼 이미 주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사람이 나를 대접하고, 사람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교사의 직분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충성 되이 보셔서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우린 주일마다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두 번도 더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교사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딤전 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레위기 11:45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라고 말씀했고, 베드로 사도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내 자신의 죄를 비추어 보게 하고 돌이키게 하며 의로운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은 자가 기도할 수 있으며, 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사 자신의 영적인 힘과 능력은 거룩함을 좇는 말씀과 기도 곧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진다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해당되는 성경구절을 모두 풀어서 말씀드릴 테니까 잘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이 타오르고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숩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불태우고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을 깨뜨립니다.(렘 23:29) 우리는 이런 약속의 말씀을 받았기에 우리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고후 7:1)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벧전 1:23)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이 됩니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책망하시고 자백하게 하고 거듭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로운 길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길인가를 보여주고 비춰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 집니다. 마치 여자들이 손거울을 들고 다니면서 화장 지워진 곳을 없는지, 이빨 사이에 음식이 끼진 않았는지,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았는지 살피고 바로잡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우리의 삶의 거울이 되어 바르지 못한 곳을 고치고 무엇인 바른 길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의 방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늘 읽지 않는 사람은 마치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얼굴에 때가 묻고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도 모른 채 태연하게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도 말씀의 위력이 안 믿어지는 분을 위해서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김 선생님! 잠시 일어나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제가 김 선생님을 움직이게 한 것은 오직 말이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역사하는 힘이 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기도로 거룩해 진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신자의 삶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근거한다면 삶 전체가 기도라고 하는 편이 옳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설교나 전도하는 법을 가르치신 적은 없지만 기도하는 법은 일찍부터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받은 사람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받은 사람이 기도할 수 있지 아무 것도 받지도 못한 사람이 기도할 꺼리가 뭐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기도할 마음이 생길 리가 있습니까? 무엇을 구해야할지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구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찾아야할지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제대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힌 모험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열심히 기도는 해도 잘못 구하고, 정욕으로 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을 구하기 때문에 당연히 응답이 없습니다. 한가지 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기도라는 단어는 2:1절에서 사용되었던 '도고'의 기도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말은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하는 것이 단지 내가 내 자신이 거룩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나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특별히 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기도와 간구와 도고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하나님 뜻에 나 자신을 굴복시키며 기도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결과라는 말입니다.
교사로서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딤전 5:17∼25)
바울은 22절에서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했다. 이 말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교사에게 있어서 남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도중에 한 눈 팔다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직분을 잃어버리지 말고 잘 지켜야 합니다. 교사인 우리도 남을 가르치고 권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그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런 두려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부탁을 하셨는데 저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름다운 것들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한 눈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기왕에 주신 것을 온전하게, 순결하게 지켰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기왕에 드릴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는가? 그 답이 사사기 2:6∼1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한 이유는 왕을 잘못 세웠기 때문도 아니고, 가뭄과 흉년이 찾아왔기 때문도 아니고,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도 아니고, 군사력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처음에 여호수아의 지휘를 받고 가나안을 정복했던 세대들이 그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가르치지 않아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니까 당연히 다른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버리게 된 원인은 바로 그 전 세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의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선교 초기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장년만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초기부터 어린이들에 대한 전도와 신앙 교육에 열정적으로 힘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양육된 아이들이 자라서 헌신된 교사가 되고 또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그들이 어른이 되기를 거듭하면서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 교회학교는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교회마다 훌륭한 교육관과 좋은 시설과 교사들이 있지만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열정과 교회의 관심은 그 때보다 오히려 더 식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전 같지 않다"고 염려하거나 비판할 줄은 알지만 누구 하나 교회학교와 교육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당장은 장년이 있으니까 교회가 빈 것 같지 않지만 오늘의 세대가 모두 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오면 그 때는 이 땅의 교회도 텅 비어서 창고가 되거나 맥주집으로 팔려갈 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일들을 힘써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쾌락과 정욕의 우상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들의 어깨에는 교회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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