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조직신학
서론
제1부: 신학의 개념, 역사, 방법
1. 신학의 개념과 분야들
1-1. 신학의 개념
신학(神學, theology)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학(學) 혹은 학문(science, 과학)이란 "체계적 연구에 의해 얻어진 사실들이나 원리들에 대한 지식" 즉 어떤 주제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나님과 그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은 조직신학을 가리킨다.
기독교 정통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에만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좀더 자세히 서술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신학을 단순히 신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 경험의 학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객관적 성경 말씀에서만 찾는 것이 바른 태도이며 역사적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그 사실들이 내포하는 원리들이나 일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고 했다(Charles Hodge, Systema- tic Theology, I, 18).
오늘날, 신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학의 다섯 분야라고 말하는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에 신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 소위 상황신학의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통일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 주제 혹은 분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신학을 때로는 교의학(dogmatics) 혹은 교의신학(dogmatic theolo- gy)이라고도 한다. 교의학이란 교의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의(敎義, dogma)라는 말은, 신학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을 가리킨다. 그것은 니케야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과 같이 교회의 공식적 신조[신경]나 신앙고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의란 교리(敎理, doctrine)와 구별된다. 교리란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바른 교리는 진리와 같다. 그러나 교의는 교리보다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진술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의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반틸은 바르게 말하기를,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고 했다(C. Van Til, Introduc- 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
이와 같이, 교의는 성경 진리의 체계적 진술이므로, 교의신학은 내용적으로 신학 혹은 조직신학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교의학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로 정의했고, 박형룡 박사는 "바른 교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질서 있는 논술을 제출하기를 추구한다. . . . 교의학은, 즉,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다"고 말했다(교의신학, 1권, 21, 44쪽). 오늘날 신학, 조직신학, 교의학은 다 동의어로 사용된다.
교회 역사상, 기독교 진리들의 체계를 가리키는 용어들은 센텐디아에(sententiae), 수마(summa), 로키 콤무네스(loci communes), 인스티투티오(institutio) 등 다양했다. 그러나 12세기에 피터 아벨라드는 최초로 '신학'(데올로기아)이라는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했다. 종교개혁 이후 신학이라는 말이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점차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에 라인하르트(L. Reinhardt)는 최초로 '교의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의 저서의 이름은 교의신학 대의(Synopsis Theologiae Dogmaticae)이었다. 오늘날에는 교의학보다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더 사용된다.
오늘날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성경신학, 즉 구약신학 혹은 신약신학이란 무엇인가? 성경신학은 18세기 후반 J. P. 게이블러에 의해서 한 독립적 분과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 다른 점은 연구 방법에 있었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정돈하려고 하는 반면, 성경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역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정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다 성경을 자료로 삼고 성경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성경적' 신학이며, 그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조직적' 신학이었다.
그러나 게이블러의 성경신학의 개념은 즉시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채용되었고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성경신학은 대체로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교의신학과 대립하고 그것을 비평, 수정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적 성경신학들은 성경의 중심 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초보적 단계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조직신학이 정리해온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이 구원의 대주제 아래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이 정돈되어 왔다. 왜 구원이 필요했는지, 어떻게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구원의 결과, 즉 구원받은 자들의 삶과 소망은 무엇인지 등의 소주제들이 그 안에 포함되었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고(요 5:39),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쓰기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다(딤후 3:15).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이다.
1-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될 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된다. 거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고 무한하신 분이시지만 사람은 피조물이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는 대답은 당연한 것이다. 욥은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고백했고(욥 11:7), 또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욥 36:26).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사람은 능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그룹들이 날개로 가리웠다"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더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졌고 또 왜곡되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 27), 그리고 이제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하여,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했고(호 6:3),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했다(사 11:9). 주 예수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실 수 있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단정하는 칸트의 철학 사상이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정당하지 못하다. 회의주의자들은 흔히 자기모순적이게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 사람이 신이나 실재(實在)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다.
1-3. 신학의 분야들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다섯 분야들로 나뉜다. 첫째로, 구약학은 히브리어, 구약사, 성경 고고학, 구약개론, 구약석의, 구약신학 등이 포함된다. 둘째로, 신약학은 헬라어, 신약사, 신약개론, 성경해석학, 본문비평학, 신약석의, 신약신학 등이 포함된다. 셋째로, 조직신학은 조직신학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과 더불어 현대 신학, 변증학, 윤리학 등이 포함된다. 역사신학은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근세교회사, 한국교회사, 교리사, 신조학 등이 포함된다. 다섯째로, 실천신학은 목회학, 설교학, 예배학, 교회행정학, 교회정치학, 선교학, 기독교 교육학, 교회음악학 등이 포함된다. 구약학과 신약학은 조직신학을 위해 성경 자료를 제공하고 역사신학은 역사 자료를 제공한다. 또 구약학부터 역사신학까지는 이론신학이고, 실천신학은 적용신학이다. 전자는 신앙 사상에 관해 논하고, 후자는 목회 실제에 관해 논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의 다섯 분야들 중에서, 본래의 신학이 의미했던 조직신학은 일곱 주제들로 구성된다. 첫째로, 조직신학 서론은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신학의 개념과 성격, 신학의 필요성과 분야들, 신학의 역사, 신학의 방법; 종교와 계시, 특별계시와 성경, 성경의 정경성, 성경의 신적 권위성, 성경의 본문 문제, 성경의 명료성과 해석 원리들 등이 포함된다.
둘째로, 신론은 하나님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속성들, 삼위일체; 작정과 예정, 창조, 섭리 등이 포함된다.
셋째로, 인간론은 사람에 관하여, 특히 사람의 죄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기원, 인성의 구성 요소, 하나님의 형상, 행위언약; 죄의 기원, 죄의 본질, 죄의 전가(轉嫁), 원죄와 자범죄, 죄의 형벌, 하나님의 법; 구속언약, 은혜언약 등이 포함된다.
넷째로, 기독론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일인격성(一人格性); 그리스도의 생애--낮아지심(성육신, 율법에 복종, 고난, 죽으심, 장사되심), 높아지심(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재림);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및 속죄 사역, 왕직 등이 포함된다.
다섯째로, 구원론은 성령께서 죄인을 실제로 구원하심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 부르심, 중생, 회개와 믿음, 칭의, 성화, 영화 등이 포함된다.
여섯째로, 교회론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 교회의 속성, 교회의 권세와 임무, 교회의 조직, 말씀, 성례, 기도 등이 포함된다.
일곱째로, 종말론은 성도들의 소망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몸의 죽음과 영혼 불멸, 죽음 후의 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천년 왕국,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 등이 포함된다.
1-4.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 관계는 어떠한가? 신학과 변증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변증학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 워필드 같은 이는 변증학이 신학체계의 서론적 분과로서 하나님, 종교, 계시, 성경 등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들에 대한 이성적 변호의 학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카이퍼와 바빙크 같은 이들은 변증학이 기독교 진리들에 대한 공격에 대항한 성경적 답변의 학이라고 이해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철학과 신학은 우주의 근원, 인간의 존재 의미, 도덕적 선 등의 공통적 주제들을 취급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 경험, 혹은 직관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도 한다. 칸트는 양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영생의 존재를 논증했다. 또한,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우주의 기본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신학과 심리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심리학은 사람의 행위의 동기와 방식 등 사람의 심리 작용을 연구한다. 심리학도 종교 경험의 현상을 연구할 수 있으나, 빈번히 종교 현상을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며,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죄악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과 일치하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은 신학의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윤리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윤리학은 사람의 올바른 행동과 생활의 원리들을 연구한다. 이것은 무엇이 선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계된다.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신 올바른 행위와 생활의 원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가리킨다. 역사상, 신학자들이 교리적, 신학적 논술에서 십계명의 해설 등 윤리적 주제들을 다루기도 하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촬스 핫지와 로버트 댑니의 조직신학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윤리학과 구별된다. 조직신학은 믿음의 내용들을 논하고, 윤리학은 행위의 원리들을 논한다.
2. 신학의 필요성과 성격
2-1. 신학의 필요성
신학은 필요한가? 신학의 필요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신학은 인간 속에 있는 체계적 지식에 대한 기본적 욕구 때문에 필요하다. 지식의 체계화는 사람의 기본적 욕구이며,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단편적으로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기에 신학의 필요성이 있다.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므로 모든 진지한 성도들의 기본적 욕구에 충족이 된다. 반틸은 말하기를,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 총전을 조직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고 했다.
둘째로,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적 전달을 위하여 필요하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나 새 신자에게 가르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을 효과있게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논리 정연하다. 그것은 앞 뒤가 모순된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논리 정연한 제시는 설교를 더욱 힘 있고 효과적이게 만들 것이지만, 혼란한 개념이나 모순된 논리는 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의 논리로만 활동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간의 논리를 거슬려 활동하신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 건전한 설교와 교훈은 반드시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가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대 신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대 전도자들이 결코 있지 못할 것이다. . . . 천박한 학생들 중에서 영혼을 움직이는 대 전도자들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세째로, 신학은 교회의 사상적 일체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교회의 일체성[하나됨]은 유형적이기 전에 먼저 영적이며 교리적이다. 교회는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서 한 몸을 이룬다. 정통 신앙을 가진 자와 이단자가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바울 사도는 "다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했고(고전 1:10), 또 "믿음은 하나이요"라고 말씀했다(엡 4:5).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 common faith, 딛 1:4)은 온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연합의 기초이다.
비록 신학들의 불완전과 상호 간의 차이가 교파들의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신학은 교회의 일체성의 방해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매개물이요 접착물이다. 사실, 사상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공허하며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신학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과, 핫지의 조직신학, 벌코프의 조직신학, 박형룡의 조직신학 같은 교회의 신학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표시요 증거이다.
넷째로, 신학은 이단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진리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사실, 이 목적은 역사상 신학 정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다. 이단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잘못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단들이 성경을 완전히 저버리는 경우는 쉽게 식별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적용할 때 그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체계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단들의 교묘한 오류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성경의 부분적 지식이 아니라 체계적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에게는 물론이요 일반 신도들에게도 체계적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 즉 신학 공부가 필요하다.
2-2. 신학의 성격
신학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신학의 몇 가지 성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신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신학은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나오며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성경밖의 자료들은 단지 성경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보조물에 불과하다.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하며, 성경적인 신학만이 신학이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논하는 모든 개념들과 사상들은 바른 신학이 될 수 없고 오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불신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작부터가 잘못이요 따라서 그 결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파괴되는 곳에서 신학을 논할 수 없고, 성경 없이 논의되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은 그 대신 신학의 문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혹시 어떤 시대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순전히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시대, 어느 문화의 사상을 혼합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어느 신학이든지 비성경적 사상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하고 배제하여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신학은 권위적이다. 신학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권위적이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의 신적 권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신학도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만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반영한다면, 그 신학은 성경과 같이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듯이, 성경적 신학은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성경만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를 가짐을 믿는다. 우리는 신학이 성경과 달리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오류에 떨어진 부분들은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교정될 수 있고 교정되어야 함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 교회의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경에 충실하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제시하는 한, 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존중하듯이, 신학도 신적 권위의 진술들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세째로, 신학은 불변적이다. 물론 신학의 불변성은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돈 방식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정돈 방식은 변할 수 있으며 역사상 실제로 변해 왔다. 신학적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신학적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후 2세기는 기독교 변증학의 시대이었고, 3세기와 4세기는 신론, 5세기는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중세 시대에 이어 종교개혁기에는 구원론과 교회론, 그리고 오늘날에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다.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신학의 정돈 방식은 다듬어져 왔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보다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고, 핫지의 책보다 루이스 벌코프의 것은 더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진 한, 그것은 또한 불변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내용이 변할 수 없듯이, 성경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기본 내용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 말에도 초대 교회의 사도 신경이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고백하며, 17세기의 정통적 신앙고백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믿고 고백하며 사랑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칼빈과 핫지 등의 정통적 개혁 신학자들의 글들을 사랑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 내용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 진리들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것은 실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불변적임과 같이, 성경적 신학은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정돈 방식 즉 신학의 제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그 근본 내용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네째로, 신학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록 처음에 개인이 깨닫고 믿고 고백하기 시작할지라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구약의 이스라엘이든지 신약 교회이든지 간에--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선언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할 권세를 주께로부터 받았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딤전 3:15). 이 교훈의 권세는 단지 어느 시대까지의 교회나 교회 회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교회 회의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어떤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에 그쳐서는 안되며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학의 교회적 성격은 이와 같은 공동적 신앙고백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신학적 활동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오늘 우리들이 가진 신앙 고백들은 전시대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수고의 결실이며, 그 배후에 성령의 섭리적 지도와 후원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신조들과 신앙 고백들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바른 신학의 정립과 성실한 전달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신학들이 난립하며 성경적 신학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이는 오늘 시대에, 성경적 믿음과 확신이 없고 신실함과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교회의 신학적 사명 곧 바른 신학의 정립과 전달은 더욱 절실하다.
3. 신학의 역사
3-1. 구 카톨릭 시대
오리겐(182-251년경)의 제일 원리들에 관하여(페리 알콘)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적 문서라고 생각된다. 그는 다룬 주제들은 1권에서 하나님, 말씀, 성령, 및 천사; 2권에서 세계와 사람; 3권에서 죄와 구속; 4권에서 성경 및 전체 요약 등이다. 오리겐은 대 학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 이단적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의 책에서 그는 영원 전의 창조, 영혼의 선재(先在) 및 선재 상태에서의 범죄, 보편적 구원(심지어 사탄도 회복된다고 봄) 등을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풍유적(allegorical) 성경 해석 방식은 후대에 큰 해가 되었다.
어거스틴(353-430년)은 초대 교회에서 사상적으로 대체로 건전하였다고 본다. 비록 그가 교회에 관하여 감독교회적인 견해를 가졌고 성례에 대하여 그것을 구원에 필수적이게 보는 로마 천주교회 사상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죄악성과 은혜의 구원에 관한 그의 사상은 매우 성경적이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어거스틴주의는 원죄, 인간의 전적 부패성,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을 믿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는 라우렌티움을 위한 안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하여(En- chiridion ad Laurentium: De Fide, Spe, et Caritate)라는 책을 썼다(엔키리디온은 교본, 안내서라는 뜻임). 그는 이 책에서 믿음의 제목 아래 믿음의 주요 조항들을 논했고, 소망의 제목 아래 기도를, 사랑의 제목 아래 윤리 문제들을 각각 논했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관하여(De Trinitate),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De Civitate Dei) 등 교리적인 저술들을 남겼다.
다메섹의 요한(700-760년)은 고대 동방교회의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정통신앙정해(Ekdosis Akribes tes Orthodoxou Pisteos)는 동방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지식의 원천이라는 책의 제3부인데, 그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하나님과 삼위일체; 2권--창조, 사람의 본질; 3권--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음부에 내려가심; 4권--그리스도의 부활, 다스리심, 믿음, 세례, 성상 숭배 등. 그의 책은 고대 동방 교회의 특징을 반영하는데, 사색적이며, 신학적으론 반(半)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이며, 성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3-2. 중세 스콜라 신학 시대
안셈(1033-1109년)은 이태리 출생으로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이었으며 '스콜라 신학의 시조' 또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경건과 지식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독백(Monologium)과 대화(Proslogium)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해 논한 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삼위일체의 믿음과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De Fide Trinitatis et de Incarnatione Verbi)라는 책과, 예정론을 다룬 조화에 관하여(De Concordia), 그리고 속죄론을 다룬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 등의 저서를 남겼다.
피터 롬바드(1100-1160년)는 이태리 출생으로 파리의 대주교를 지낸 자로서 서방 교회의 최초의 대 교의학자이었다. 그의 선언서(Sententia- rum Libri IV)라는 책은 스콜라 시대의 최초의 주요한 교의학서로서 중세 시대 여러 세기 동안 신학 교본으로 사용되었다(센텐티아룸이라는 말은 문제들에 대한 결론들이라는 뜻임). 그의 책의 주제들은 1권--하나님(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 삼위일체 등); 2권--창조 세계, 천사; 3권--기독론, 구속(아벨라드의 영향을 입음); 4권--성례(최초로 일곱 성례로 분류함), 종말 등이다.
헤일스의 알렉산더(1180-1245년)의 신학대전(Summa Universae Theologiae)은 롬바드의 선언서에 대한 주석으로서 많이 읽혀졌다.
토마스 아퀴나스(1221-74년)는 이탈리아의 신학자로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최대의 인물이며, 천주교회의 대 권위자이다. 그의 신학은 천주교회의 표준적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대전(Summa Totius Theologiae)은 미완성 작품이었고, 그것의 성례와 종말에 관한 부분은 다른 곳에서 그의 글들 중에서 발췌하여 추가한 것이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하나님과 그의 사역들; 2권--사람, 윤리학; 3권--그리스도, 은혜의 수단 등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의 신학의 형식으로 삼았고, 어거스틴주의를 그의 신학의 기본적 내용으로 삼았으나 중요한 많은 점들에서 그것을 수정하였다.
3-3. 종교개혁 및 신조 작성 시대
개혁파
죤 칼빈(1509-64년)은 마틴 루터와 마틴 부처(1491-1551년)의 영향 아래 성경적인 어거스틴주의를 부흥시켰다. 바울 사도의 은혜의 복음을 핵심으로 하는 성경적 정통 신학은 고대에 어거스틴을 거쳐 칼빈에게서 밝히 정리되었다. 그의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는 개혁교회의 쑤마[신학대전]라고 불리웠다. 그의 책에는 특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이 강하게 흐르고 있고 교리와 윤리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의 책의 주요 주제는 1권--하나님; 2권--그리스도; 3권--성령과 구원; 4권--교회와 성례 등이다. 칼빈은 또 많은 성경 주석들을 남겼다.
라이덴 대학의 네 명의 교수들이 쓴 순수신학개요(Synopsis Purio- ris Theologiae)라는 책이 개혁 교회의 세계에서 많이 읽혀졌다.
이태리 출신 스위스 신학자 프란시스 투레틴(1623-87년)의 신학은 권위 있는 정통 개혁파 신학이었고 그 후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에서 계승되었다. 그의 논변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iae, Insti- tutes of Elenctic Theology)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중요한 신학 참고서가 되었다. 칼빈의 개혁파 정통 신학의 흐름은 투레틴과 같은 인물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
코체유스(1603-69년)는 전통적 개혁파 신학의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이탈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들을 중심으로 진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프랑스의 소우물 신학교의 아미랄더스(1596-1664년)는 가설적(假說的)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개혁교회는 그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경계할 오류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견해를 아미랄더스주의 혹은 소우물학파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화란에서는 기스베르트 보에티우스(1589-1676년),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청교도적 대 신학자 죤 오웬(1616-83년)과 리차드 백스터(1615-91년) 등이 있었다. 죤 오웬은 가장 엄격하였으나 '신학자들의 신학자'로 알려진 자이었고, 리차드 백스터는 가장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다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학자들이었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개혁파 신조들로는 스위스의 제1 스위스 신앙고백(1536년)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네델란드의 벨직 신앙고백(1561년)과 도르트 신경(1619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1563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1647년) 등이 있다.
기타
필립 멜랑톤(1497-1560년)은 루터의 제자이었고 그의 저서 신학통의(通義)(Loci Communes)는 최초의 루터교 신학서이었다(로키 코뮤네스라는 말은 공통구절들[common places]이라는 뜻임).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 기독교 교리 체계 속에 성경의 기본 구절들과 그 해석을 모았다. 초판은 루터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어거스틴주의적이었으나, 그 후의 판들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변질되었다.
죤 게하르트(1582-1637년)는 17세기 루터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서 신학통의(通義)(Loci Communes Theologici)라는 책을 썼다. 그는 멜랑톤의 입장에 반대하였고, 루터의 사상과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초판(1530년)의 사상인 어거스틴주의에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루터파 신조들은 루터의 요리문답(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 cord, 1577년) 등이다.
에피스코피우스(1583-1643년)는 화란 라이덴 대학교의 신학교수 제임스 알미니우스(1560-1609년)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설하였으나 실상 그의 선생보다 더 나아갔다. 그는 신학강요(Institu- tiones Theologicae)라는 책을 썼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돌트 대회의 결정들에 항거하였으므로 항론파(Remonstrants)라고 불리웠고 후에는 알미니우스파로 불리웠다.
파우스터스 소시너스(1539-1604년)의 라코 요리문답(Rakow Cate- chism, 1605년)은 소시너스주의의 신학서이다. 그는 삼위일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 타락과 원죄 등을 부정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적 사랑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근대 유니테니안(Unitarian, 일위신론자[一位神論者])들의 선조(先祖)이었다.
추기경 로버트 벨라민(1542-1621년)은 이 시대에 로마 천주교회의 대변자이었다. 기독교 신앙 논쟁에 관한 변론(Disputationes de Con- troversiis Christianae Fidei)이라는 그의 책은 로마 카톨릭 신학의 완성된 해설서이었다. 그는 교황지상주의를 옹호했고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하여는 반(半)펠라기우스적이다.
3-4. 근세 시대(18세기 이후)
개혁파
촬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년)는 구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자로서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871-73년)은 오늘날까지 개혁파 정통 신학의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서론, 1부(신론); 2권--2부(인간론), 3부(구원론; 기독론 포함); 3권--3부(계속)(구원론 계속; 성화론에 십계명 해설과 성례론을 포함함), 4부(종말론) 등이다.
에이 에이 핫지(A. A. Hodge, 1823-86년)는 신학 개요(Outlines of Theology, 1879년)라는 그의 책에서 부친 촬스 핫지의 신학 사상을 이어서 신학을 평신도들을 위해 평이하게 문답식으로 정리하였다.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1820-98년)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자이었다. 조직신학강의(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1871년)라는 그의 책은 그의 사후에 그의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다(수정판, 1927년).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 1820-94년)도 근대에 탁월한 조직신학자이었다. 그의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 3권. 1888- 94년)은 1권--서론, 성경론, 신론; 2권--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성례론 포함), 종말론; 3권--보충 설명 및 교리사적 참조 등을 다루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년)의 개혁파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 1895-1901년)은 지금까지 화란에서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년)는 훌륭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39년) 책을 썼는데,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책의 기초가 되었다. 벌코프는 전통적, 정통적 개혁 신학을 그의 선배들보다 잘 정돈하여 전달하였다.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 d. 1965년)는 미국 프로테스탄 개혁교회의 학자로서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tics, 1966년)이라는 깊이 있는 정통적 신학서를 남겼다.
박형룡(1897-1978) 박사는 벌코프의 책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참조하여 교의신학(7권. 1964-1973년)이라는 역작을 남겼다. 그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 책의 성격을 '편집'이라고 겸손히 표현하였지만, 그의 책은 실로 '편집 이상'이다. 그 책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위한 귀한 신앙의 유산이다.
기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소위 '경건주의'라는 한 운동이 일어났다. 스페너(P. J. Spener), 프랑케(A. H. Francke), 랑게(J. P. Lange)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의학을 스콜라주의적 형식에서 해방하여 성경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쉴라이엘마허(1768-1834년)는 근대 자유주의의 시조로서 사람의 종교적 감정, 자의식, 경험을 교리체계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는 종교에 관한 강연(Reden uber die Religion)과 신앙의 교리(Glaubens- lehre) 등의 책을 썼다.
릿츨(1822-89년)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교리 체계의 기초로 삼으려 했으며, 윤리적 기독교를 주창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 도덕 감화설을 취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기독교의 칭의와 화목의 교리(Die Christ liche Lehre von der Recht- fertigung und Versohnung)다.
프란시스 피이퍼(Francis Pieper, 1852-1931년)의 기독교 교의학(Christliche Dogmatik, 1917-24년)은 루터파의 정통적 조직신학이다(영역, Christian Dogmatics, 1950년).
루이스 쉐이퍼(Lewis S. Chafer, 1871-1952년)는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이며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47-48년)은 세대주의를 반영한다.
칼 바르트(1886-1968년)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13권. 1936-1962년) 등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객관적 기록으로 보지 않으며, 성경의 유오성(有誤性)을 주장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폴 틸리히(1886-1965년)는 매우 자유주의적 신학자로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3권. 1963년)을 썼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명백히 부정한다.
밀라드 에릭슨의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1983-85년)은 가장 최근에 복음주의 진영에서 쓰여진 조직신학이다. 그는 신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해 왔다. 그의 입장에 맞게, 그는 그의 책 첫 페이지에서 그 책을 신복음주의자 버나드 램과, 자유주의자 윌리암 호던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게 바친다고 썼다.
4. 신학의 방법
신학의 방법은 무엇인가? 즉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 시킬 수 있는가?
4-1. 바른 방법--세 가지 원리들
신학의 바른 방법은 세 가지의 기본 원리들에 의해 나타난다. 첫째로, 신학의 '존재의 원리' 혹은 신학의 본질적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자신과 온 세계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학자 중에 학자시요 과학자 중에 과학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지식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일반 학문도 그러하지만, 신학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해 확실하게, 무오(無誤)하게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또 바울 사도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복음 진리]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했다(고전 2:10).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닮은 지식이요, 그 지식을 조금 나누어 가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둘째로, 신학자들이 '지식의 외적 원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유일한 원리라고 보았다(투레틴, 바빙크). 그러나 다른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일차적, 중심적 원리로 보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인의 경험 등을 신학의 이차적, 부수적 원리로 보았다(워필드).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가지 특별한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을 성경에, 그리고 오직 성경에만,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과 그 유일한 저장소인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객관적 자료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충분히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객관적 형태로, 완전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또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했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기독교 진리를 논하거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셋째는 '지식의 내적 원리'이다. 그것은 성령의 증거에 의거한 믿음과 이성이다. 죄인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참 지식의 시작이다. 이것이 주께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하신 의미이며, 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하신 뜻이다.
믿음의 지식은 성령의 내적 활동에 의해 생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말씀과 함께 활동하셔서 그러한 지식을 주신다. 성령의 내적 활동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단순히 인간에게 내어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도 성령의 내적 활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고(고전 2:12), 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고전 12:3).
요한 사도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했다(요일 2:27).
그러나, 이미 믿게 된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성(理性)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기본적 수단이 된다. 이성은 우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백치(白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만한 지식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성은 진리의 이해를 위한 기본적 수단이다.
이성은 또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의 증거는 사람의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행 17:2, 3). 그는 다른 곳들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 18:4; 19:8; 20:7). '강론하다'나 '증명하다'는 말은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 등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거나 내포한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성경은 도무지 상당한 이유에 의함이 없이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Hodge, I, 53). 워필드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 합리한 때문이요 불합리할지라도 믿는 것은 아니다. . . .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불합리한 믿음, 즉 정당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다(B. B. Warfield, Bibli- cal and Theological Studies, pp. 45, 46).
이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을 정돈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작용과 활동이 없이는 신학을 포함하여 어떤 학문도 있을 수 없다. 학문은 정돈된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화이기 때문이다.
4-2. 잘못된 방법들
기독교 역사상 신학의 몇 가지 잘못된 방법들이 있었다. 첫째로, 신학의 방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교권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신학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대표적 예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다. 로마 교회는 이론적으로 교회의 전통과 성경을 함께 신학의 원리로 보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성경보다 더 궁극적 원리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교황과 회의들)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무오(無誤)한 해석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교회 혹은 교황이 무오(無誤)하다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실제로도 무오하지 못했고 또 못하다. 예수께서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다(마 15:3). 또 그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기도 하셨다(마 16:23). 이 말씀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 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을 보인다.
사실상 로마 천주교회의 역사는 교황이 무오하다는 교리에 반대된다. 예를 들어,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교리들은 다 비성경적이다. 또 그레고리 1세(590-607년)는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그런 칭호를 받았다(607년). 또 씩스투스 5세(1585-1590년)는 성경 읽기를 권장했으나 피우스 7세(1800-23년) 등 여러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사상들은 서로 충돌하였다.
교회의 권위는 무오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감과 배려로 사도들을 통하여 신약성경을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의 교훈은 스스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오직 성경적일 때만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의, 최종의 권위이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회와 교회의 교훈들의 권위에 의존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
둘째로, 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가운데 또 하나는 이성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을 신학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것은 순전히 연역적 방법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성은 진리의 최종적 판단자로서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가 되고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진리가 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짐에 있어서 사람이 궁극적 원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시며 사람은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실제로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이 우주와 우리 자신의 구조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와 사람의 창조자이신 완전자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도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마 22:29).
더욱이, 자연 이성 즉 타고난 대로의 이성은 죄로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의 바른 원천이 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고(고전 1:21), 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고 했다. 또 그는 "저희[이방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말했다(엡 4:18).
사실, 이성주의는 신학과 철학을 혼동하여 신학을 철학화 하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경험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의 종교적 경험, 감정, 및 의식(意識)을 신학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성주의와 정반대로, 이것은 순전히 귀납적 방법이다. 이 견해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을 진리에서 제외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나머지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슐라엘마허는 신학을 종교적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릿츨은 신학을 사람의 종교 도덕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리 혹은 원천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겸손히 의존해야 한다.
또한 사람은 실제로 현재 하나님의 진리들을 다 경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천지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 밖의 과거의 특별계시의 일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 등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다(요 20:27-29).
더욱이,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나 감정은 진리와 오류,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방 종교인들도 매우 종교적일 수 있다. 구약의 바알 숭배자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 아덴 사람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사도행전 17:22에 보면,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말했다. 종교적 감정이 종교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의 도덕 의식도 그러하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양심은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 의식에 기초한 도덕적 신관, 도덕적 종교는 완전치 못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다(롬 3:10-12).
실상, 신학의 경험주의적 방법은 신학과 종교 심리학을 혼동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종교 심리학은 될 수 있으나, 신학은 될 수 없다.
넷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신비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신학의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시고 전달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내적인 빛 혹은 내면적 음성이라고 부른다. 교회 역사상,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계시들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라고 했다(사 8:20).
또한, 신비주의적 방법론은 이성의 정당한 기능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정당하고 정상적인 인식과 판단의 도구이다. 덧붙여, 신비주의적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명확히 분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빈번히 탈선에로 나아간다.
신론
제1부: 하나님의 존재
1. 하나님 존재의 증거들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진리들을 정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만일 그가 계시지 않다면, 그에 대한 모든 신학적 토론은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말씀하기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다(히 11:6).
1-1. 이성적 증거들
역사상,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성적 증거들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로,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이란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제시한 매우 오래된 논증으로서 인과 논증(因果論證)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논증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어떤 원인의 결과이며, 어떤 결과가 있으면 그것의 원인도 존재하는데, 우주는 한 결과이고 하나님은 그것의 궁극적 원인 혹은 제1 원인이시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둘째로,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이란 소크라테스나 키케로나 필로 등이 제시한 역시 매우 오래된 논증이다. 이 논증에 의하면, 모든 설계된 작품들, 예를 들어 집이나 시계 등은 그 설계자의 존재를 증거하는데, 우주는 한 놀라운, 설계된 작품이며, 그것의 놀랍고 신비한 질서와 적응성, 예컨대 천체의 질서나 동식물과 사람의 구조 등은 그것을 만드신 이지적(理智的) 창조자 곧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본체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이란 안셈이나 데카르트 등이 제시한 논증으로서 존재론적 논증 또는 관념론적 논증이라고도 불리운다. 그것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하나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방법이다. 이 논증에 의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이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이 개념 속에는 '존재한다'는 성질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함으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넷째로, 도덕적 논증(Moral Argument)이란 칸트 등이 제시한 것으로서, 사람의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은 그것을 주신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며, 또 세계의 상선벌악적(賞善罰惡的) 역사에서 나타난 도덕질서도 그것을 시행하시는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이러한 이성적 논증들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촬스 핫지는 "그것들[이성적 논증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 건전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말했고(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 p. 203), 로레인 뵈트너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우주론적, 목적론적, 본체론적, 도덕적 변론들은 개방되고 편견없는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든지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고 논평했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82). 박형룡 박사도 말하기를, "유신논증들은 큰 가치를 가진 것이다. 성경과 기독교 경험에 의하면, 성령이 사람의 심령(心靈)에 확신(確信)과 회심(回心)을 산출하시는 과정에 논증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논증들 자체들은 아무 사람도 중생시키지 못하나 오히려 전도의 과정에 기구(器具)로 되어 왔다"고 했다(신론, 32쪽).
1-2. 성경의 증거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2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답: "사람 속의 본성의 빛 자체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명백히 선포하지만, 그의 말씀과 성령께서만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를 충분히 그리고 효력있게 계시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그 사실을 전제(前提)하고 선포한다.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이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온 우주는 그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 그를 전제하지 않고서 인간은 이 세상의 아무 것도 바로 알 수 없고 논할 수 없다.
성경에 처음부터 전제되고 선포된 하나님은, 무엇에 의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요,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된 원어(에예 아쉐르 에예)는 직역하면 "나는 '나는 있다'(혹은 '나는 이다')이다"이다. 헬라어 70인역은 "나는 있는 자이다"(에고 에이미 호 온)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했다('I am that I am'). 우리 말에 '여호와'(예호와)로 번역된 하나님의 히브리어 명칭은 '이다' 혹은 '있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위의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추론들을 인정한다. 시편 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궁창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는 말씀은 우주론적 논증이나 목적론적 논증을 암시한다.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인간 본성 속에 보인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말씀도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을 암시한다.
히브리서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것도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을 내포한다.
시편 94:8, 9,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이 말씀은 다음의 두 구절들과 함께 목적론적 논증과 관계된다.
사도행전 14:16, 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7:24-28, ". . .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연적 증거들보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즉 신현(神現, 직접 나타나심)과 말씀과 기적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충만한 증거들이 아닐 수 없다. 신명기 4:32-35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증거하였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1-3. 무신론의 어리석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하는 무신론(無神論)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많은 증거들, 즉 자연만물과 성경의 증거들을 무시하므로 참으로 어리석다. 그래서 시편 14:1은 말씀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했다. 무신론자는 무슨 증거를 제시하는가? 그는 아무런 믿을 만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무신론은 어리석은 사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 죄악이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큰 죄이다. 또 무신론은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죄악들의 뿌리이다. 시편 14:1은 말씀하기를, "저희[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 로마서 1:28은 증거하기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사역들에 있어서 그에게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결코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전(全) 본질은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전 본질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질(what) 자체에 대해서 묵상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속성들(what kind of)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 좀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이신지 즉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정의(定義)하기 어려우나, 그의 속성들로 그를 서술할 수는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답: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시다."
2-1.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악이다. 요한복음 4:24에서,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증거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영이심은, 우선 그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물질적 존재가 아니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24:39에서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는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존재도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영이심은, 또한 그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8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증거했고, 로마서 1:20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 . . "라고 말씀했다. 골로새서 1:15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디모데전서 1:17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 그리고 디모데전서 6:16은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라고 말씀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2계명은 하나님의 이 불가견적(不可見的) 영성에 근거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의 손(출 3:20), 하나님의 팔(출 6:6), 하나님의 귀와 눈(사 37:17) 등의 표현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속성들과 능력들과 활동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이다. 이런 표현들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자들은, 이 표현들을 오해한 자들이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명백한 성경 진리에서 탈선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고 주장했던, 17세기의 스위든볼그(Swedenborg) 같은 신비주의자들이나 오늘날의 몰몬교도 같은 이들은 다 잘못이다.
성경에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표현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였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 24:9, 10, "모세와 아론과 . . .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단면을 보았다는 의미이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도(마 5:8),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단면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의 본질을 본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이심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분이심을 내포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모든 우상들과 하나님의 다른 점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 10:10은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하였다. 디모데전서 6:16도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말씀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영이심은, 특별히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이심을 말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2:4, 5은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라고 말씀했다. 에베소서 1:11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라고 말씀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들은 그의 인격성의 한 증거이다. 또한, 인격적 하나님이신 그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신다.
2-2.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의 존재와 그의 속성들에 적용된다. 우선,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무한하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키, 하나님의 가슴둘레, 하나님의 몸무게가 얼마이겠는가? 누가 하나님을 측량할 수 있겠는가? 솔로몬을 말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하였다(왕상 8:27). 이사야 66:1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증거하였다. 예레미야 23:24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했고, 시편 139편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씀했다(7-10절).
하나님의 무한성은 공간적 무한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들의 총화(總和)가 아니고 그 이상이다. 그것은 모든 공간적 제한성을 초월하심과 동시에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현존(現存)하시는 성질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유한성 즉 공간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초월적 방식으로 모든 공간에 충만하시다(Turretin, Berkhof, 박형룡). 그는 초월자로서 안계신 곳이 없으시며(無所不在) 어디에나 계신다(遍在, omnipresent).
물론 그를 단순히 만물의 총화(總和)와 동일시 하는 소위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은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존재에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지식이나 능력에 있어서만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고 생각하는 소위 자연신론(Deism)이나 소시너스주의(Socinianism)도 또한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편재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표현하였다. 모세는 신명기 26:15에서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시고"라고 표현하였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8:30에서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라고 말했다.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씀했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때때로 성경은 그가 세상에 내려 오셨다고 표현하였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주 예수 자신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시는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성경에서 '하늘'이 장소적 의미가 없이 단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성경에 자세히 증거된 엘리야나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하늘 위로의 장소적 이동은 무의미할 것이다(왕하 2:11; 행 1:9-11).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그의 완전성(完全性)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그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 거룩과 의, 선에 있어서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자이시다. 그는 완전충족하셔서 어떤 점에서도 부족이 없으시다. 그의 완전성은 곧 그의 영광이다. 그는 빛 가운데, 영광 중에 거하시며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엄위하시다. 그는 하늘과 땅에서 인생이 유일하게 영원히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시 73:2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은 하나님의 완전성 혹은 완전충족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혹은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2-3.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앞에서 생각한 하나님의 무한성은 시간적으로는 영원성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맨처음에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또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심을 증거한다. 창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표현했다. 시편 90:2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말씀했다.
시간은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창조 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간 속에 속한 분이 아니시고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는 창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그래서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은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씀했다. 그는 어떤 이의 표현과 같이 '영원한 현재'이시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후(後)도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고 하였다(Charles Hodge, I, p. 385).
영원성은, 시간적 시작을 부정하는 개념이므로, 또한 '영원자존성'(永遠自存性)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절대성'이라고도 표현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며, 또한 자신의 존재의 근거가 자신 이외에 없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원인이시다. 사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또한,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훼)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성을 나타낸다. 이 말은, '이다, 있다'는 뜻의 히브리어 기본 동사(하야의 고어형[古語形] 하와의 칼[단순형] 미완료 3인칭 단수)에서 나왔고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2-4. 불변하심
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라고 말씀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했다. 또, 야고보서 1:17에는, "그는[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항상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17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들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본질과 속성들의 불변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의지[뜻]와 계획과 작정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증거했다. 또, 이사야 14:24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뜻하신 바를 변경함이 없이 다 성취하신다.
성경에 때때로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에 보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했고, 사무엘하 24:16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씀했다.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했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들로서 하나님의 불변성과 충돌되지 않는다.
무한,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모든 문제의 대답이 되시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 영원자존자이신 그 안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안정을 찾을 수 있다.
2-5.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밝히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데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시편 139:1, 2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고백했다.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기도했다(삼상 2:3).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심을 증거하셨다(마 10:30). 또, 히브리서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증거했다(히 4:13).
지식은 대상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 뿐만 아니라, 또한 가능적인 것도 포함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지식의 원형(原形)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은 직각적이며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며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람의 지식은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며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다.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가 전포괄적(全包括的)이므로, 하나님의 지식은 보통 전지(全知, omniscience)라고 불리운다.
지식과 구별하여,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을 사용하셔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복종해야 할 것이다.
2-6.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들(엘,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그 말들은 '강하다'는 말(울)에서 나왔다고 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 omnipotence)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샤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심을 증거한다. 창세기 18:14은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다(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고 고백했다(렘 32:17). 누가복음 1:37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니라]"고 증거했다.
하나님의 전능(全能)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그는 그의 뜻 가운데 스스로 전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할 수 없으시다. 예를 들어, 그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죽으실 수 없다. 바울은 말하기를,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다(딤후 2:13).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變改)함이 없으시니"라고 증거했다(삼상 15:29). 또 바울은 디모데전서 6:16에서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의 인격성과 연합하여 그의 주권성(主權性)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주권적이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 문제에 관계하여,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하셨다(마 19:26).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아도나이)이다(창 15:2). 이 말은 '재판하다, 통치하다'는 뜻을 가진 말(둔)에서 나왔다. 신명기 10:17은,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말씀했다. 역대상 29:11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씀했고, 역대하 20:6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믿는 자는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치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만을 바라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의 열쇠가 있다.
2-7.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출애굽기 15:11에서,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라고 고백했다.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모든 피조 세계와 분리되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 존재적 엄위성은 모든 피조물의 찬송과 경배의 이유가 된다. 시편 22:3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고 고백했다. 이사야 6:3은, 천사들이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증거하였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또한 모든 피조물의 죄악과 불결로부터 떠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우월성은 인간들의 도덕적 의무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1:45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고 말씀하셨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하다.
2-8.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고백했다. '의'라는 히브리어(차디크, 체데크, 체다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도덕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일치한 인격자가 될 때, 그는 의로운 자로 불리운다. 모세는, 신명기 6:25에서, "우리가 그[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디모데후서 4:8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 시편 9:8은, "[여호와께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는 '보상적 의'와,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형벌적 의'를 모두 '보응적 의'라고 부른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2:5-8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으셨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반드시 필요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로우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증거하였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을 부정하지만, 성경은 매우 분명히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창 6-8장)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성의 유황불 심판(창 19장)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이 외에도,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형벌을 가르치고 있다. 그 대표적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 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2-9.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 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표현하셨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자들을 사랑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그의 사랑이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히브리어 켄, 헬라어 카리스)란, 받을 권리가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로마서 3:24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히브리어 케세드와 라캄, 헬라어 엘레오스)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친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대까지 은혜(케세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출애굽기 34:6에서, 자신을 '자비롭고(라캄)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케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레크 아프)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출애굽기 34:6에서,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 바울은, 로마서 2:4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을 베푸심을 의미한다. 시편 145:9, 15은 증거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하였다.
2-10.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시편 36:5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고백했다(시 57:10; 108:4도 비슷한 말씀임). 시편 89:14은,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고 말씀했다. 시편 92:2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고 했다. 바울은, 로마서 3:4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증거했다. 심지어 이방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되신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한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서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모세는, 신명기 7:9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 . .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13에서,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 등 열 가지의 속성들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등 세 가지는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이것을 흔히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다시 말해,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 등의 속성들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이다. 이것을 흔히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3. 삼위일체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제6문: "하나님의 본체 안에 몇 인격들(persons)이 계신가?" 답: "하나님의 본체 안에 세 인격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데, 이 셋은, 본질(substance)에 있어서 동일하시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3-1. 본체의 단일성
첫째로,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다.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세상에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문: "하나 이상의 하나님들이 계신가?" 답: "살아계시고 참되신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주요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단수; '우리'가 아니고]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6:4,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의 유일하심은 그의 본체의 단일성이라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본체(혹은 본질)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과 활동들의 공통적 주체(主體)가 되는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말에 본체와 본질은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 것 같다. 본질(本質)은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모든 것(what God is, or whatever it is to be God)을 가리키는 비교적 추상적 개념이지만, 본체(本體)는 그러한 본질을 가지신 구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맛이 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촬스 핫지는, 니케야 신조의 호모우시오스('같은 본체[혹은 본질]의')라는 말이 단순히 종류적 동일성(specific sameness)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수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만일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이 종류적 동일성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니케야 신조는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을 가르칠 것이다"고 했다(I, p. 460).
초대교회에 작성된 아다나시우스 신조(Symbolum Quicunque)는 다음과 같이 보다 분명하게 진술한다: "아버지는 영원하시고, 아들은 영원하시고, 성령은 영원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자들이 아니고 한 영원자이시다. . . . 이와 같이 아버지는 전능하시고, 아들은 전능하시고,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전능자들이 아니고 한 전능자이시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dom, II, p. 67).
3-2. 삼위의 구별
둘째로, 하나님께는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과 성령의 삼위(三位, 세 인격)가 계시며, 이 삼위는 서로 구별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본체(the Godhead)의 단일성 안에, 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세 인격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역사상, 하나님의 삼위의 구별을 부정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을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 혹은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이라고 부른다. 성부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소위 성부(聖父) 수난설도 이런 사상에서 나온 오류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 곧 세 인격의 구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마태복음 3:16, 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위(位) 혹은 인격(person)이란,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인식하는 이성적 개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 안의 삼위는 서로 구별되는 세 개체적 존재 혹은 실존(subsistence)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내가 의미하는 위(位)는 신적 본체 안의 한 실존, 즉 다른 둘과 관계되었으되 공유(共有)될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실존이다"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1. 3. 6).
영원한 신적 본체는 동일하게 모든 위들에 공통되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하나이다. 그러나 이 신적 본체는 위적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셋이다. 뿐만 아니라, 삼위는 신적 본체와 나란히 있는 어떤 존재들이 아니고 그 본체 안에 있으며 신적 본체의 한 존재 양식이다. 아버지는 참 하나님이시요, 아들도 참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다. 각 위는 신적 본체와 동일하고, 다른 둘을 합한다 할지라도 더 크지 않다. 그것은 각 위에 신적 본체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 아버지는 삼위를 대표하며, 그래서 그는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되고,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그는 또한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아버지로서 언급된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요한복음 5:17, 18,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 . . .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8:54,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한복음 17:2, 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에베소서 1:3, 4,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 .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삼위의 두번째 위[인격]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의 신성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비록 메시아적 의미로 그 명칭이 사용되는 문맥이라 할지라도, 약속된 메시아는 신적 메시아이심이 증거된다. 다시 말해, 이 명칭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존재론적 관계에서 아들이시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요한일서 4:9,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독생자'(모노게네스)라는 명칭(요 1:14, 18; 3:16, 18, 요일 4:9)은, 비록 사람의 외아들(눅 7:12; 9:38)이나 외동딸(눅 8:42)에게도 사용되지만, 성부와 성자의 독특한, 형이상학적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다른 여러 구절들(마 11:27; 요 5:18-25 등)도 이런 의미를 암시한다. 신성은 인격성을 내포하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의 말씀(로고스)은 인격적 신성의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므로 그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또한 성자[아들]의 영원 출생의 신비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라고 표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하다. 그 관계를 시간 세계 속의 무엇으로 생각한다면, 아들의 신성에 결함을 주고 그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출생을 영원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영원적이라는 말은 비시간적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예수께서는 친히 요한복음 17:5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성자의 영원 출생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하심, 그의 불변하심 그리고 성자의 참된 신성 등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원 출생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자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진술과 같이, 다음의 4가지 요점으로 정리된다.
① 신적 명칭들에 의하여. 이사야 9:6, "그 이름은 . .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② 신적 속성들에 의하여.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③ 신적 사역들에 의하여.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④ 신적 존영들에 의하여.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한계시록 5:12, 13,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고대의 아리우스주의(Arianism)와 오늘날의 일위신론(一位神論, Unitarian- ism)이나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다.
☞ 삼위의 세번째 위[인격]는 성령이시다. 성경에서 성령은 몇 가지 명칭으로 불리웠다. '영'(루아크, 프뉴마)은 바람같이, 생명의 호흡같이 일하시는 그의 외적 사역의 양식을 나타낸다. '성령(聖靈)'은 그의 본질과 사역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낸다. 그는 거룩한 영이시며 거룩을 이루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그의 신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보인다.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적 관계성을 보인다.
성자의 영원 출생과 같이, 성령의 나오심도 영원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근거는, 성자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 그리고 성령의 참된 신성이다.
성령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진술과 같이, 다음의 4가지 요점으로 정리된다.
① 신적 명칭들에 의하여. 사도행전 5:3, 4, "네가 성령을 속이고 . . .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도행전 28:25,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 .").
② 신적 속성들에 의하여. 고린도전서 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
③ 신적 사역들에 의하여.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욥기 26:13,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④ 신적 존영들에 의하여.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초대교회로부터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단일신론, 소시너스주의, 일위신론 등이 그러하다. 특히, 그들은 성령께서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부정했다. 그러나 성령의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내포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격성은 성경에서 사용된 성령의 인격적 명칭들과 인격적 특성들을 통해 밝히 증거된다.
① 성령의 인격적 명칭들. 요한복음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성령은 헬라어에서 중성명사이지만, 여기 '그가'(에케이노스)라는 말은 남성 지시대명사로서 그의 인격성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여기의 '이는'(호스)도 남성 관계대명사로서 역시 그의 인격성을 보인다.
② 성령의 인격적 특성들. 요한복음 14:26,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사도행전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사도행전 10:19,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사도행전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사도행전 16:7,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아들로부터도'(filioque = and from the son) 나오신다는 사실은 역사상 논쟁되었던 바이었다. 동방의 그리스 정통교회는 이 사실을 부정했고 그것이 11세기 동방의 그리스 정통교회와 서방의 천주교회의 분열의 교리적 주요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성경적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 불리우신다는 사실에 있다.
요한복음 15:26,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1:19,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1:4 참조). 또한 요한계시록 2:1, 7은 예수님과 성령을 동일시한다.
3-3. 삼위 간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시는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답이 진술하는 대로, 삼위는 신적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하나님의 본체 안에 세 인격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며, 이 셋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삼위는 그 위적(실존적) 특성과 사역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를 가지시며 그런 점에서 그들 가운데 어떤 종속적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 ". . .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지도 나오지도 않으시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삼위 간의 논리적 순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다. 비록 영원적으로이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셨다. 요한복음 3:16, 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물론, 삼위의 참된 신성(神性)을 생각할 때, 삼위 간의 영원적 종속이라는 개념은 사람의 이성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이다.
또한, 삼위는 서로 간의 사역에 있어서 구별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신다. 낳으심은 성부만의 사역이다. 아들은 오직 낳으심을 받으신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신다. 성령은 오직 그들로부터 나오심을 받으신다. 이것을 삼위의 내향적 사역(opera ad intra) 혹은 본질적 삼위일체(essential Trinity)라고 부른다.
삼위는 또한 창조와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비록 근본적으로는 연합하여 일하실지라도, 어느 정도 사역적 구별을 가진다. 창조는 주로 성부에게, 구속은 주로 성자에게, 구속의 적용(중생과 성화 등)은 주로 성령에게 돌려진다. 이것을 삼위의 외향적 사역(opera ad extra) 혹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라고 부른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진리는 매우 신비하다. 이 진리의 교리적 진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만족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단지 단일신론이나 양태론(樣態論, Modalism) 혹은 삼신론(三神論) 등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것을 믿음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 때문이다"고 하였다(교의신학, 2권, 202쪽).
그러나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진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 체계의 중심과 같아서 신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이 진리가 버림을 당한다면, 속죄와 중생 같은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위신론(一位神論, Unitarianism)은 항상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부정하는 자력적(自力的) 구원 사상(펠라기우스주의와 소시너스주의의 인간론과 구원론)과 같이간다. 덧붙여,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의 독립성, 그의 자충족성(自充足性, 스스로 충족하심) 그리고 그의 인격성을 후원한다. 삼위일체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아무 부족이 없으시며 인격적 교제와 사랑을 가지시는 하나님으로 더 잘 이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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