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4. 3. 10. 20:59

‘언약’이란 무엇인가?

 

 

1. 언약의 어원적 의미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예레미야 11:4)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핵심적 요소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어떤 결속이 존재하는지를 
규명해 주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풀어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신앙의 기본 요소들이 모두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약’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베리트’이다. 
그 어원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1) ‘먹다’라는 의미의 동사 ‘바라’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언약 체결과 함께 이어지는 음식 나눔 축제가 언약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2) ‘사이’를 의미하는 아카드어 전치사 ‘비리트’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언약의 당사자들 ‘사이’를 의미하는 전치사가 언약을 지칭하는 전문용어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3) ‘선택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베리트’의 어원적 의미는 ‘결정’ 혹은 ‘확정’이다.

(4) ‘속박하다’ ‘묶다’ ‘걸다’ 등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비리투’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본인의 논문 지도교수였던 히브리대학교의 바인펠트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서, 
언약 당사자 간의 ‘결속’이 ‘베리트’의 기본적 의미라는 주장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베리트’의 어원적 의미를 고려할 때, 
언약은 일정한 형식의 서약을 통하여 언약 당사자들 사이의 결속을 확정하는 엄숙한 약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떤 형태로 결속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외견상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쌍무적인 관계로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 공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역할을 하시게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쌍무적이다.

그러나 성경이 강조하는 언약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된다는 점에서 일방성과 함께 불평등성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의 언약은 출애굽 구원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출애굽 구원을 이루셨다. 
비록 모세라는 인물을 앞세우시기는 했지만, 출애굽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구원의 역사이다. 

그런 하나님의 주도적 역할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언약을 맺은 장소가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시내산이었다는 점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낸다.

언약과 관련한 하나님의 일방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언약을 주도하신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언약의 상대역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 당사자로 삼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곧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이스라엘에게로 자신을 스스로 낮추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셨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신명기 7:7-8). 
그런 점에서 언약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가장 큰 은혜요 복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발탁됨으로, 그 동안 누적되었던 여타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었다. 
그렇듯이 신분의 상승은 모든 것을 일시에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복 중에 가장 큰 복이다.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구원의 결과로 얻은 복 가운데 가장 크고 우선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당당하게 누릴 새로운 신분과 권리가 주어졌다. 
그것이 곧 우리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할 이유와 근거이다(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언약의 구조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굽기 19:4)

성경의 언약 이해에 도움을 준 학문적 결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정치적 조약들에 관한 연구이다. 
특히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근동 지방의 다양한 정치적 조약들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게 됐다. 
그 가운데 강대국들 사이의 쌍무적 관계의 조약들보다는, 제국과 그 종속국 사이의 소위 ‘종주권 조약’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연구 가운데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왕들과 그에 예속된 종속국 군주들 사이에 맺은 정치적 조약에, 
성경의 언약과 많은 유사성이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의 조약 문서 형태는 특별하게 고정된 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문서에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요소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1) 서두--종주권자의 신원과 칭호와 조상들을 밝힌다.

(2) 역사적 서언--종주권자와 종속자 사이에 있었던 이전 역사의 관계를 기록하면서, 
종주권자가 종속국의 유익을 위하여 베푼 행위들을 강조한다.

(3) 조약 규정들--종속국이 종주권자에게 어떤 책임과 의무가 있는가를 밝힌다. 
대표적인 규정으로는, 종속국이 히타이트 제국 외의 나라와 조약을 맺지 말아야 하는 점, 
종주권자의 지배 아래 있는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지 않아야 하는 점, 
종속국 군주는 매년 일차씩 종주권자 앞으로 나와야 하는 점을 들 수 있다.

(4) 조약 문서의 보관--종속국은 조약 문서를 자국의 신전에 보관해야 하며, 
정기적으로 낭독하여 자신들에게 종주권자에 대해 어떤 책무가 있는지를 상기시켜야 한다.

(5) 저주와 축복--종주권자에 대한 충성 여부에 따른 상벌이 규정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주제가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 관련 본문은, 출애굽기 19장에서 시작되어 24장까지 이어지는 시내산 언약이다. 
시내산 언약과 관련된 본문이 히타이트 조약 문서의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히타이트의 종주권 조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대부분 등장하고 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굽기 19:4)는 언약의 역사적 서언에 해당된다. 
그런 점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출애굽기 20:2)라는 선언에서 다시 언급된다. 
비록 히타이트 조약 문서의 역사적 서언보다는 짧은 내용이지만, 
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억압에서 구출하셨다는 이전의 역사가 진술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출애굽 사건을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애굽기 19:5)는 조약의 기본 규정과 그에 따르는 복의 규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규정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를 위한 언약법으로 확대된다(출애굽기 21-23장).

이런 규정들은 언약 당사자들 사이의 쌍무적 규정이기보다는, 
종주권자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하신 의무 규정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출애굽기 24:3-8은 언약서의 낭독과 증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언약서 기록과 낭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할 뿐 아니라 그것을 보관하고 공중 앞에서 낭독해야 함을 전제한다. 
또한 열두 기둥은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언약에 대한 증인 역할을 한다.

고대 근동의 조약 문서는 성경의 언약을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문서를 통하여 언약과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의 언약이 종주권자인 하나님과 종속국인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졌다는 점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신 의무 규정이 더없이 큰 복이라는 점이다. 
전자가 언약의 근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언약에서 강조되는 법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내려오셔서 우리들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셨지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여호와 경외’는 신앙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법 없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통하여 ‘여호와 경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은 우리를 죽이는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로마서 8:2).
 
 
 
3. 언약과 율법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신명기 6:1-2)

언약은 세상 어느 것으로도 단절시킬 수 없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결속이다. 
히타이트 종주권 조약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종주권자에 의하여 주도되는 결속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결속은 종주권자인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언약은 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새로운 자유이다.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은 바로의 통치에 억눌려 살았던 노예의 신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동안은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길 수가 없었다(출애굽기 8:1).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바로에게서 해방시키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을 삼으셨다.

출애굽 구원은 바로의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정치적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새롭고 거룩한 삶의 시작이다. 
곧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 구원을 베풀어 주신 참 하나님 여호와께 헌신과 사랑을 돌려드릴 책무가 부여되었다. 
그런 점에서 출애굽 구원은 언약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근거이다. 
이러한 언약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언약의 규정인 율법이다.

히타이트 조약의 주된 관심은 종속국의 종주권자에 대한 충성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언약 규정도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사랑에 근본을 두고 있다. 
예수께서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고 답변하셨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핵심 요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기본적 자세는 신명기의 쉐마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신명기 6:4-9). 
쉐마 본문에서 ‘언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본문은 신명기서의 구조적 틀이자 중심 사상인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쉐마 본문은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적 진리’이면서 
그 위에 세워진 ‘근본적 의무’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전자가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신명기 6:4)이고, 
후자는 최선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응답(신명기 6:5)이다. 

그런 사랑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그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신명기 6:5-9).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곧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기본 자세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응답으로서의 율법 준수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신명기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면서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신명기 6:2). 
율법은 구원받는 근거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거룩한 수단이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은 율법 준수의 기본 자세가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여된 율법은, 겉만 화려한 회칠한 무덤이다.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 15:22)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 중심에서의 순종이 빠지면, 제사는 번거로운 형식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 역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서 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10)고 하였다.

율법은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였다(시편 1:2). 

사랑은 율법을 온전케 하는 핵심이다.


 

4. 언약과 인자(헤세드)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편 25:10)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출애굽 구원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은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런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도하신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당사자 모두가 유지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쌍무적이다.

그렇다면 언약 유지를 위한 쌍무적인 책임은 무엇일까? 
언약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은 구원과 함께 언약의 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사랑과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길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반면 언약의 시혜자인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그것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성경에서 강조하는 ‘인자’이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다.
‘인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다. 
대표적인 번역은 ‘인자’이지만, 그 외에도 ‘사랑’ ‘자비’ ‘긍휼’ ‘선함’ 등이 있다. 
헤세드’의 어원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언약에 기초한 ‘확고부동한 사랑’(steadfast love)으로 정의할 수 있다.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곧 일상적 생활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신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그리고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등이다.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헤미야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언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헤세드’와 ‘에메트’가 한 단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는 용례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
(창세기 24:27, 49; 32:11; 47:29; 출애굽기 34:6; 민수기 14:18; 여호수아 2:14; 사무엘하 2:6; 15:20; 

시편 25:10; 40:11, 12; 57:4; 61:8; 85:11; 86:15; 89:15; 115:1; 잠언 3:3; 14:22; 16:5; 20:28). 
그것은 신뢰에 바탕을 둔 성실함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신명기 32:10; 시편 17:8; 잠언 7:2)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시편 121:4)으로 표현한다.

 

 

5. 언약과 광야 40년 경험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수기 14:30, 34)

 


역사적으로 언약은 광야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광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신 곳이다. 
언약을 맺으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 

그곳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경험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상반된 광야 경험은 이원론적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상호 보완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으로 이끌기 위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질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은 거부되었다. 
그거나 그것은 영구적인 것 아니라, 40년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만 유보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본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이 불순종에 대한 일시적 심판이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할 과정임을 보여 준다. 
그런 기간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정화된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상반되면서도 상호 보완성을 지닌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예언서의 중요한 신학적 틀이 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자로는 예레미야와 호세아를 들 수 있다(예레미야 2:2; 호세아 2:14-15).

고대 근동의 정치적 조약들은 체결에서 제시된 조건들이 매우 중요했다. 
체결 조건의 조항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곧바로 조약 자체가 파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 근동의 정치적 조약들은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일종의 약정(contract)이었다. 
엄격한 조건들에 묶여 있는 조약과는 달리, 언약은 보다 큰 유연성을 지닌다. 
물론 언약에도 언약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특별 규정인 율법이 있다. 
그러나 언약에서 낱낱의 조항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조항들을 지키려는 마음가짐,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다.

율법 준수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랑과 순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 역시 저주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한 일에 대한 징계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회복을 목적으로 한 정화의 과정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은 반복되는 불순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민수기 25:1-3; 신명기 9:7-9 참조).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회복했다. 심판이 복으로 전환된 것이다.

심판을 통한 복의 경험은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 자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40년간 방랑하며 지냈던 광야는 환경 그 자체가 저주였다. 
그곳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런 광야에서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판이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살려 주는 원동력이었음을 의미한다.

징계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선임 동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상호 충성이라는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과의 결속을 유지하셨다. 
그것이 ‘인자’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헤세드’의 본질적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 ‘헤세드’로 해석할 수 있다(요한복음 3:16).


6. 언약과 하나님 경외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애굽기 20:20)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명기 5:29)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경외가 사랑의 동의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포괄적 의미의 사랑을 보다 분석적으로 제시해 준다.

‘사랑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동사 ‘아헤브’는 대상에 대한 전적인 집중을 의미한다. 
곧 사랑은 하나에 대한 집중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한 분이신 여호와 때문이다(신명기 6:4-5). 
하나이신 하나님께 대한 집중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경외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동사 ‘야레’의 우선적인 의미는 ‘두려워하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경외의 한쪽 면이고, 다른 쪽에는 그 두려움보다 더 큰 이끌림이 있다. 
그런 더 큰 인력 때문에, 멀리 달아나려는 두려움이 오히려 하나님에게로의 쏠림으로 바뀐다. 
두려움과 이끌림의 팽팽한 균형, 그런 가운데 이끌림 쪽으로 두려움의 자리가 기울어진 상태, 그것이 하나님 경외의 모습이다.

사람에게 경외심을 유발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사람의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존재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초자연성의 영적 신비이다. 

그런 영적 신비는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신비(mysterium tremendum)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신뢰를 유발시키는 신비(mysterium fascinans)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압도적인 주권 앞에서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과 인간의 절대 무능을 고백하게 만드는 
신비라면, 후자는 인간을 하나님의 면전으로 잡아 이끄는 매혹적인 힘으로서의 신비이다. 
서로 상반되는 이런 두 요소가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 신비의 본질이다.

여호와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두 종류의 신비는, 
언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 있다. 
여호와의 시내산 강림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왕으로서의 현현이었다. 
이스라엘은 왕으로서 현현하시는 여호와를 맞이하기 위하여 적어도 네 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1) 이틀 동안 백성을 성별하는 일; (2) 옷을 빠는 일; (3) 셋째 날을 맞이하는 일; 
(4) 현현 장소인 시내산 주변을 거룩하게 유지하고 백성들의 침범을 막는 일 등이었다(출애굽기 19:10-15).

여호와의 시내산 강림은 두 가지 놀라운 자연 현상을 동반하였다. 
하나는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출애굽기 19:16)으로 나타난 폭풍 이미지고, 
다른 하나는 ‘연기와 불과 진동’(출애굽기 19:18)으로 나타난 화산 폭발 이미지다. 
여호와의 시내산 강림과 함께 나타난 이런 자연 현상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 현현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예고하는 전령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현상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 강림에서도 나타났다(사도행전 2:2-3).

하나님 현현에 동반된 자연 현상으로 나타난 즉각적인 결과는, 
진중 모든 백성이 두려움에 떨게 된 것이다(출애굽기 19:16). 
여기에서 ‘떨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하라드‘는 공포심을 유발하는 두려움인데,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경외하다’ 와 동의어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같은 문맥의 다른 곳에서는 ‘경외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야레’가 사용되기도 하였다(출애굽기 20:18). 
모세를 통하여 전달된 여호와의 시내산 강림 목적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출애굽기 20:2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언약에 규정된 율법 이해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언약의 율법은 외관상 의무규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며 언약 관계를 심화시켜 주는 활력소 역할을 한다. 
율법 준수는 더 이상 억압이거나 부담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다. 
그것은 언약이 여호와께 대한 경외를 그 기본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대한 경외는 그 출발점이 이스라엘 자신이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행동하시는 여호와에게서 비롯된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두려움을 유발하는 떨림과 더불어 신뢰와 경외의 이끌림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 경험 속의 경외가, 율법을 부담감이 아닌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거대하고 두려운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면서도 
그분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신비로운 이끌림을 경험하였다. 
그것이 언약과 율법을 이해하는 핵심인 경외이다. 
언약의 율법은 우리들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냉정한 대상이 아니다. 
율법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경외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꿀보다 더 달콤한 매력이다(시편 19:10; 119:103).

 

7. 새 언약의 약속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배교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가는 비극적 역사를 맞이하였다.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이스라엘과 같이 작은 종속국은 
그것으로 모든 역사가 종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포로기라는 비극적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가 있었다. 
그 비결은 언약의 선임 당사자이신 하나님께 있었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은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유지시켜 주는 ‘헤세드’의 소유자이시기도 하셨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깨어진 언약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근거이다.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려 저주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없어지거나 무효화되지 않았다. 그것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예레미야 31:31에 단 한 번만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시겠다는 것은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이사야 42:6; 49: 6-8; 55:3; 
59:21; 61:8; 예레미야 31:33; 32:40: 50:5; 에스겔 16:60, 62; 34:25; 37:26; 호세아 2:18). 

신약성서는 ‘새 언약’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에 있음을 확언하고 있다. 
그에 따라 복음서를 비롯하여 바울서신 등에 ‘새 언약’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누가복음 22:20; 마태복음 26:28; 마가복음 14:24; 로마서 11:27; 고린도전서 11:25; 고린도후서 3:6; 
히브리서 8:8, 13; 9:15; 10:13; 12:24).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주후 185-254년)이 
‘신약’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도, 예레미야가 언급한 ‘새 언약’에 근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31:32)면서 
언약 파기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역으로 새 언약의 소망이 옛 언약의 파기로 인한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경고와 회복에 관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게 멸망이 임하게 될 원인으로 강조하는 것은 율법의 불이행이다. 
예레미야 7장에 나오는 성전 설교에서 예레미야는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예레미야 7:3)고 
강조하면서,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거짓 맹세와 이방신에게 분향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예레미야 7:5, 9).


이스라엘이 멸망을 받은 것은 언약 파기에 따른 결과였다. 
예레미야서는 언약이라는 용어를 27번이나 사용하고 있으며, 심판 경고 내용도 시내산 언약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예레미야 2:6; 7:22, 25; 11:4, 7; 16:14; 23:7; 31:32; 32:21; 3:13.)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언약에 관하여 안일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요시야에 의해 시도된 종교개혁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일깨우지 못한 채 
예루살렘 성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외적 조치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의 실패는 신학적 혼란을 가져왔고, 당대를 풍미하였던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현혹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에는 요시야의 개혁에 반대하는 많은 제사장들도 있었다(열왕기하 23:9).

예레미야가 제시하고 있는 심판과 멸망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겪으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멸망에 그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율법의 불이행으로 심판과 멸망을 받게 되지만, 
그들의 조상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예레미야 16:15; 25:5; 30:3; 32:13).

오히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예레미야 24:4-7; 29:4-15). 
회복의 약속은 소위 ‘위로의 책’이라고 알려진 예레미야 30-33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서 전체에 일관되게 강조되어 있다. 
회복의 약속은 유다 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멸망한 북왕조 이스라엘에까지 확대되어 있다(예레미야 3:11-18). 
멸망은 곧 새로운 회복을 위한 전제라는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역사의 거룩한 신비이다.


 

8. 새 언약의 ‘새로움’ 이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일에 실패하였다.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거나 언약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속적으로 지키며 유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 언약이 필요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과 옛 언약 사이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곧 두 언약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새로움’은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다쉬’는, 어원적으로 나빠진 상태를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나빠지는 상태를 막기 위하여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움의 대상은 황폐한 성읍이나 성전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일 수도, 영이나 시간과 같이 비가시적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본래 상태로의 복구를 의미한다.

회복의 의미로서의 새로움은 ‘달(月)’을 의미하는, 같은 어원의 ‘호데쉬’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초승달이 떠오르는 것을 곧 그 달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으로 받아들여 월삭 축일로 삼았다. 
그들은 달이 차서 이지러진 다음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것에서 본래 상태로의 회복을 본 것이다.

‘새로움’은 회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편 23:3)에서 ‘소생시키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슈브’이다. 
‘슈브’의 기본적 의미는 ‘되돌아가다’인데, 구약성경에서는 ‘회개’를 뜻하는 대표적인 동사이다. 
‘치료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라파’ 역시 회복의 뜻을 담고 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신앙 대결을 벌이기 전에,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였다(열왕기상 19:30). 
여기에서 ‘수축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파’이다. 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래 상태로의 회복에 있다.

‘새로움’의 우선적 의미는 갱신을 통한 본래 상태로의 회복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그런 과거지향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의 회복은 질적으로 옛것을 뛰어 넘는 새로운 시작이다. 
곧 옛것의 본질을 공유하되 옛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차원이 있다. 
이사야가 강조한 ‘새 하늘과 새 땅’(이사야 65:17)은 옛 창조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변형으로서의 창조이다.

그것은 옛 창조의 회복을 제시하면서도 옛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실체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전도서의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전도서 1:9)는 선언은, 본질의 불변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본질적 요소를 공유하면서도 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임을 보여 준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의 연속성과 함께 불연속성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옛것의 실패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신다.

 

9. 새 언약의 연속성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3)


성경적으로 새것은 전혀 다른 것으로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옛것과는 본질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위에 불연속성의 새로운 차원을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 역시 옛 언약과 본질적 요소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질적 요소를 더한 언약이라 할 수 있다. 

곧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일까? 
연속성부터 살펴 보기로 하겠다. 
새 언약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옛 언약과 연속성을 지닌다.

첫째로,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되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닌다. 
새 언약의 대표적 본문이기도 한 예레미야 31:31-34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표현이 매 절마다 나오고 있으며, ‘내가’라는 주격 표현도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새 언약의 주도자도 옛 언약처럼 하나님 자신이심을 보여준다.

둘째로, 두 언약 모두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성을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 31:33에 언급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구체적으로 풀이한 표현 문구이다.
그런 문구는 시내산에서 언약 맺는 과정에서도 나오며(출애굽기 19:5,6), 
신명기를 비롯하여 구약 예언서에서 언약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또한 아브라함의 언약이나 다윗의 언약에서도 언급되는 표현이기도 하다(창세기 17:7; 열왕기하 11:17).

옛 언약에서와 같이 언약의 수혜자인 ‘하나님 백성’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서는 그들을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으로 나누어 구체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역사 경험을 거치면서 완전히 결렬된 남북 왕조의 관계가, 
옛 언약 초기 시대처럼 하나로 통합될 것임을 예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 31:33에서는 ‘유다의 집’이 빠진 채 ‘이스라엘 집’만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이스라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협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광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해석이 예레미야서 전체 문맥과 상통한다.

셋째로, 두 언약 모두 율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약의 구조를 놓고 볼 때,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준으로서 언약의 핵심이며 필수적 요소이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세우는 것은 곧 새로운 차원에서 율법을 새롭게 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새롭게 제정되는 새 율법이 아니라 옛 언약의 율법, 곧 모세의 율법 그대로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율법에 관한 다른 설명이 별도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두 언약 모두 율법 중심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새 언약은 인간의 마음속에 율법을 지킬 내적 동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돌비에 새긴 옛 언약의 율법과는 구별되는 불연속성을 지닌다.

 

 

10. 새 언약의 불연속성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1:34)

 

                                        
언약의 본래 목적이기도 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본질적 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깨어진 언약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새 언약은 옛 언약과 확연히 구별되는 불연속성을 지닌다. 

그런 점은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예레미야 31:32)이라는 예레미야의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된 언약은 그 자체에 결점이 있다거나 
중도에 폐지될 수 없다. 

언약의 중도 파기가 발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결함 때문이었다. 
새 언약은 인간의 그런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언약 파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내리신 특별 조치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역시 옛 언약처럼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언약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은 수동적 입장에 있을 뿐이다.
예레미야에 의하여 제시된 새 언약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새 언약은 그 성취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미래 약속의 핵심이다. 
그것은 새 언약의 성취가 종말론적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의 제시에 앞서 “날이 이르리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인데, 미래 희망을 뜻하는 대표적인 종말론의 표현이다. 
이는 새 언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획하고 계신 새로운 시대의 언약임을 예고한다.


둘째로, 죄악의 용서에서도 새 언약은 모세의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를 선언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하고 편만하여,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율법 문제에 관하여도 새 언약의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옛 언약의 율법은 돌비에 새겨졌지만, 새 언약은 그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는 옛 언약의 외형적이고 부분적인 율법과는 달리, 
새 언약의 율법은 내면적이며 그 성취가 완전하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새 언약의 세 가지 불연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과 관련된 불연속성이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측정하는 잣대 역할을 한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도 마음 중심에서부터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 언약이 율법 문제를 앞세워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11. 새 언약과 율법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이다(렘 31:33). 이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고 있다. 이는 앞 절에서 강조된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곧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법을 돌 판이 아닌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새 언약의 강조가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옛 언약 역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은 신명기와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였다(신 6:6; 10:12; 11:18; 30:6, 14; 시 37:31; 40:8; 119:34.). 그러나 그것은 율법 준수의 책무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한다는 강조일 뿐이다. 새 언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고 약속에 있다.

 

율법의 준수는 언약 체결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언약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이 언약의 시혜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요 구체적인 방법이다. 율법은 법적인 제재나 의무사항과 같이 이스라엘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의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이 해방의 감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율법의 내면화는 언약관계 유지의 우선순위가 아닐 수 없다.

 

‘마음에 새기다’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전치사 ‘알’은 ‘위에’(on)를 뜻하는데, 이는 마음이 은유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전치사 ‘베’(in)가 사용된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마음이 곧 율법을 기록하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마음’은 정서적 장소가 아니라 도덕적 의지가 자리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여 주신다는 약속은 곧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도덕적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하시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것은 율법을 돌 판에 새긴 옛 언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율법을 돌 판에 새겼다는 것은 곧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옛 언약의 돌 판과 새 언약의 마음을 서로 대비시킨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옛 언약의 율법은 모세와 같은 중재자가 필요했지만, 새 언약에서는 더 이상 그런 중재자가 필요치 않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옛 언약에서는 율법을 새길 돌을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셨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런 돌 대신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마음에 새겨주심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과 의욕을 마음에 불어 넣어주신다.

 

새 언약은 율법을 지키려는 의지적 노력에 앞서 마음에 율법을 새겨줌으로 그 자체가 삶의 한 구성요소이면서 인격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새 언약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하나로 일치하는 것을 지향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온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새 언약이 강조하는 율법의 그런 내면화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편만함과 그들의 죄가 사하여져 다시는 그 죄가 기억되지 않는 죄 용서의 영구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원동력인 셈이다. 

 

 
 
 
 
12. 새 언약의 성취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 36:26-28) 

 

 

율법 준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다.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의 유지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백성으로서 마땅하고도 바른 자세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셨다(마 5:17). 예수는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기존의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전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해답은 새 언약에서 약속된 율법의 내면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에 대한 암시가 에스겔의 예언 속에 나와 있다(겔 36:26-28).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여러 면에서 에스겔이 강조한 ‘새 영’에 의한 ‘새 마음’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서처럼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마음으로부터 율법을 지키게 되는 새로운 변화이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게 된다.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나의 법’ 대신에 ‘내 율례’와 ‘내 규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법’(토라)이 율법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율례’(호크)와 ‘규례’(미쉬파트)는 그것을 보다 세분화시킨 구체적인 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마음에 기록되는 율법의 원칙을 제시한 반면, 에스겔은 새 영과 새 마음의 결과로 율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의 자각이나 자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영에 있다. 그런 점에서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율법의 내면화는 성령의 강림에서 구체적인 성취를 기대할 수 있다. 곧 율법의 온전함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며 성령을 쫓아 행하는 삶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생명의 법’(롬 8:2)이 마음에 새겨진 새 언약의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언약은 하나님과의 결속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약 공동체에 속한 전체 구성원의 결속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언약의 핵심인 율법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온전한 결속을 지향한다.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로 요약한 것도 율법의 공동체 지향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공동체의 온전함 곧 공동체의 ‘샬롬’을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평안’ 혹은 ‘평강’ 등으로 번역되는 ‘샬롬’의 어원적 의미는 ‘온전함’(completeness, wholeness)이다.

 

율법이 전체 공동체의 온전함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외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약하면서 소외되기 쉬운 계층이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나그네였다. 이들은 경제적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활동 자체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성경이 이들의 복지에 관하여 국가와 같은 공적 기관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 각 개개인이 깊이 관심을 갖고 돌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그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이들의 상태를 이스라엘 사회의 건전성 측정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오늘의 우리는 구약시대와는 많이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많은 율법 조항이 오늘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기본 요구는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거룩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기본이며 성령 충만한 삶의 본질이다.

 


권혁승 교수(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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