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역사적 발전사 고찰
(언약의 진전과 상호 연계성에 관한 연구 논문<Th.D.> 중에서 발췌)
언약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관련해, 종교개혁 시대를 중심으로 네 단계로 시대를 구분해 각 단계별로 해당 인물들의 성경에 대한 언약신학적 입장과 주장 및 관심 등을 중심으로 요약해 정리했다. 이를 통해 초대교회시대로부터 종교개혁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계시된 언약사상이 어떤 모습으로 발전돼 나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적 언약사상 정립을 보다 객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특별히 필자가 본 논고를 역사적으로 고찰함에 있어서 서요한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해 책으로 출간한‘언약사상사’와 정성욱의 저서‘성경신학과 개혁신학’에 많은 부분을 의존해 기술했음을 첨언한다.
서요한은 언약개념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관련해“비록 기독교회가 구약과 신학을 신성한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언약사상을 계속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회 신학자들의 관심과 이들의 다양한 조직 형태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어떤 심오한 관심도 유발시키지는 못했다. 이것은 언약 개념이 계속되는 기독교 신학에서 현저히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는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평범한 삶의 새로운 형태들과 신구약 모두에서 새로워진 관심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은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후 2세기를 지내면서 조직적으로 발전하였다. 언약신학은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우르시누스, 그리고 코케이우스와 같은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주요한 신학적 논쟁들 중의 하나인 언약 개념으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역사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피력한다.
서요한은 언약개념의 중요성과 관련해“언약은 중요한 성경적 개념으로써 언약 개념은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신구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 언약이라는 말은 인간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나타내는 탁월한 표현으로 사용된다”고 Thomas Edward McComiskey의 The Covenant of Promises(계약신학과 약속)를 인용해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성경의 언약 개념이 기독교 교회역사 속에서 어떻게 초대교회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천의 과정을 밟아 나왔는지 간추려서 살펴보기로 하자.
Ⅰ.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언약에 대한 개괄적 이해
A. Irenaeus(130-200) :
이레니우스는 사도시대 이후 2세기 동안 영지주의(Gnosticism), 말시온주의(Marcionism) 등 이단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초대교회를 지키고 성경진리를 수호한 속사도 교부이다. 어릴 때 그는 순교자인 폴리캅(Polycarp, 69-160)으로부터 신학과 신앙을 지도받았다. 또한 동시대의 변증가였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0-165)에게서 변증학적 훈련을 받았으나 저스틴과는 달리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64년경 리용(Lyons)에서 감독으로 안수를 받은 후 리용의 주교로서 일생을 마쳤다.
이레니우스는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이단에 대한 반박’(Against Heresies)과‘사도적 가르침의 증거’(Proof of the Apostolic Preaching) 등이다. 그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의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신구약의 통일성을 입증하고 수호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성경신학자였다. 이레니우스는 당시 신약정경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4복음서와 13편의 바울서신이 신약정경의 핵심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영지주의자와 말시온 주의자들의 비성경적 주장을 반박하고 성경적 창조론을 확립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언약개념을 주로 세 가지 상황들 속에서 사용하였다. 즉 그는 세례, 성경의 정경론(biblical canon)과 대속(atonement) 가운데서 언약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의 정경론에서 언약사상을 구원 교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고 범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은혜로운 언약을 통하여 구속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그리고 언약의 중심된 성취로서의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양분된 상태로 주어지는 구속사역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기술한다.
이레니우스의 신학사상 중 가장 독특한 것은 그의 구원론과 이와 관계된 악과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 노력이다. 그의 사상은 일반적으로‘인류의 점진적 교육이론’(a theory of progressive education of the human race)으로 부른다. 그에 따르면 처음 창조된 아담은 본래 미숙한 존재(immature being)로서 하나님의 최대 은사인 완전성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완전성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된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인간은 그 완전성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완전성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유지할 수 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의 이단에 대한 반박(Against Heresies)에서 갈파한다.
결국 이레니우스는 아담이 타락의 가능성을 창조 시부터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비록 아담이 하나님 보시기에‘심히 좋은’상태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창세전에 수립된‘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한 선택’이란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신학적/언약적으로 아담의 타락은 이미 고려된 사건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타락한 아담을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구원해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되는 방식으로 거듭난 생명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구원의 목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하게 된다(롬 11:32).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아담의 상태를 미숙한 존재(immature being)로 해석한 이레니우스의 관점은 괄목할만하다. 결과적으로 이레니우스는 그의‘인류의 점진적 교육이론’을 통해 아담의 타락을 필연적인 성숙의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피력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레니우스가 아담의 최초의 상태를 미숙한 존재로 보았다는 의미가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관련시켜 전(全)포괄적이며 합목적적인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정성욱은은 이레니우스의‘인류의 점진적 교육이론‘의 상당부분에 동의하면서 그가 사도들과 시기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그의 견해가 사도들의 관점을 많은 부분 반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이레니우스는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 부활의 전 과정을 인간의 영적 성숙을 위한 필연적인 교육과정으로 이해한 듯하다. 이 과정에서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이해한 것은 탁월한 안목으로 평가된다. 아담이 본래 미숙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그의 견해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발전과 성장의 단계를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그러나 그 단계는 선악과 금령을 자력으로 순종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특별계시의 경지이다(엡 1:4). 그러므로 선악과금령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는 것으로 확대해석하기보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순종의 당위성의 수준에서 가감해선 안 된다. 이레니우스가 창세전 구속언약에 근거를 둔 성경의 총체적 언약사상에 얼마나 정통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저서 이단에 대한 반박(Against Heresies)에서‘율법-행위경륜’과‘복음-언약’사이를 구별하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전자는 타락과 관련되고 후자는 구속과 관련된다. 이런 점에서 행위언약(창 2;17)을 은혜언약(창 3;15)에 앞세우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레니우스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불가분의 관계성과 관련해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을 수행하심으로 실현된다고 피력한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섭리라고 하는 원대하신 계획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기술하면서, 이 섭리를 4단계의 언약으로 구분한다. 첫 번째 언약은 아담언약으로 아담에서 노아 홍수까지이다. 두 번째 언약은 노아언약으로 홍수 이후부터 출애굽까지이다. 세 번째 언약은 모세언약으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초림까지이다. 마지막 네 번째 언약은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종말까지이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을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회복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의 신학의 중심점은 기독론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새 아담으로서 창조의 계속이며 동시에 완성이시다.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로 표현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들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며 바로 이것이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n)이다.
총괄갱신의 주요 골자는 첫째,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서 총괄하신다는 것은 곧 인류를 죄인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이며, 갱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구속의 정점이다. 둘째, 총괄갱신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측면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3단계로 이루어진다. 처음 단계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현현되어 총괄갱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사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비장의 무기였던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세 번째 단계로 사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하며 그 때가 오면 만물은 그에게 귀속될 것이다.
이레니우스가 타락한 인류의 구속과 관련해 아담언약, 노아언약, 모세언약, 그리스도의 언약 등 4단계의 연속적인 신적 언약관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방안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 죄인의 회복과 갱신교리를 담고 있는 총괄갱신을 주창한 것은 괄목할만하다. 비록 그의 언약사상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포괄적이지는 못할지라도 신구약의 언약적 통일성에 근거해 통시적인 안목으로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합목적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B. Augustine(354-430) :
정성욱은 Peter Brown의 저서 Augustine of Hippo를 인용해“어거스틴은 교부신학의 완성자로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모두가 신학적 뿌리를 어거스틴에서 찾고 있을 정도로 서구 기독교신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교도였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tricius)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 (Monica)사이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던 어거스틴은 라틴 문학과 고대 희랍 문학 등에 심취하여 웅변가로서 훈련을 받고 성장했다”고 기록한다.
20대의 어거스틴은 선과 악의 근본적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Manichaeism)에 매혹되었다. 마니교도들은 인간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Gnosticism) 계열의 이교도 단체였다. 20대 후반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단절하고 회의주의(Skepticism)자가 되었다가 30대 초 밀라노(Milan)의 주교 암브로스(Ambrose)를 알게 되어 그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여러 신학적, 철학적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는 자전적 신앙고백서인 고백론(The Confessions), 역사 철학서인 신의 도성(The City of God), 삼위 일체론(On the Trinity), 자유 의지론(On Free Will), 은총과 자유의지(On Grace and Free Will), 예정론(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견인론(On the Gift of Perseverance) 등이 포함된다.
서요한은 그의 저서‘언약 사상사’에서“언약은 어거스틴이 사용한 많은 신학 용어들 중 하나였다. 어거스틴이 언약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 있다. 이 용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의 저서 고백록(The Confession)에서이다. 고백록에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말하고 죄로 가득한 자신의 삶과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말한다. 언약이라는 용어는 펠라기우스(Pelagius)와의 논쟁 기사에서도 발견된다. 이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자신이 언약 교리에 대해 전혀 낯선 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밝힌다.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 지상에 있는 언약 조직체(covenantal institution)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된 언약(predestined covenant) 아래 있는 두 가지 주요한 집단 곧 가시적(visible)과 비가시적(invisible)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지상 영역에 속하며, 후자는 천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는 우리가 가현적 교회에서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언약사상을 더욱 자세하게 하나의 구체적인 주제로 다룬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빛의 창조로부터 최후의 심판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세대들을 통하여 주어지는 예언들의 점진적인 진행과정(progressive line)에 대해 말해준다. 어거스틴은 두 원칙들 사이의 갈등에 주목한다. 이 원칙들은 그가 두‘도성들’‘국가들’‘사회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 실현되어 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첫 번째 반역이 있은 후로 줄곧 이 두 도성들 즉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 존재해 왔다. 그리고 각 도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지상의 도성은 가인으로부터 바벨론과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천상의 사회는 어떤 세대에 속했건 간에 이 땅에서 자신들이 나그네들이며, 순례자들임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대표된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모든 역사는 이러한 두 도성들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지상의 도성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도성은 악을 누르고 공적 질서(civil order)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양의 선이 없다면 지상의 도성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지상의 도성은 그 본성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며 일시적이도록 운명지어져있다. 신의 도성 즉 천상의 도성만이 영원성을 갖는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언약 개념은 교회와 국가를 규합시켜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셨으며 지도자들을 지명하셨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지으시고 돌보아 주신다. 어거스틴은 언약을 자신의 삶과 자신이 처한 상황 전체에 적용시켰다고 서요한은 그의 저서에서 밝힌다.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도덕적 상황에 언약사상을 적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모든 자녀들은 그들 모두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하여 언약을 파괴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언약을 파괴시켜왔다. 어거스틴은 인간 본성 속에는 그것에 의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 수 있는 질서(order)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자연의 질서(order of nature)는 하나님과 반대된다. 하나님 바로 그분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인간을 죄로부터 끌어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그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의로운 삶을 살려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들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행동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신의 도성에서 피력한다. 서요한은 이상의 내용을 통해 어거스틴의 언약사상을 요약적으로 기술하면서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 속에서 불가항력적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기초한다고 정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거스틴은 그의 죄론과 타락론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호하고 피조물에게 죄책을 돌리기 위하여 자유의지 개념을 도입한다. 여기에 어거스틴 사상의 변신론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정성욱은 그의 저서‘성경신학과 개혁신학’에서 평가한다. 정성욱은 계속해서 자신이 주장하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총체적 주권과 인간의 유기적(의존적) 종속의지, 그리고 죄악 섭리 등을 성경적으로 치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였고 선악의 개념을 하나님 중심으로 철저하게 정립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거스틴은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예정 사역 가운데 정위시킴으로 부분적이나마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바르게 강조하였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아울러 내린다.
C. 요약Summary) :
이레니우스가 주장했던‘인류의 점진적 교육이론’(a theory of progressive education of the human race)에 따르면 처음 창조된 아담은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창조 목적)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본질상 완전하지 못했다는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레니우스는 아담이 타락의 가능성을 창조 시부터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이레니우스가 창세전 구속언약에 근거를 둔 성경의 총체적 언약사상에 얼마나 정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저서 이단에 대한 반박(Against Heresies)에서‘율법/행위 경륜’과‘복음언약’사이를 구별하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이로 보건대 이레니우스는 아담의 타락이 전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 금령에 따른 행위언약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보다 성숙한 완전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레니우스도 전통적인 개혁언약신학자들처럼 행위언약을 통해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장했으나 불순종함으로 불가피하게 은혜언약을 맺어주셔서 구속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립하고 있는 4단계의 연속적인 언약관의 정립과 언약의 핵심주제인 총괄갱신은 범죄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사탄을 패배시키고 사망과 음부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해방시킴으로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는 주장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타락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과 논리적/신학적/언약적으로 연계시킬 때‘선 계획-후 성취’의 구조적인 언약적 틀 속에서 틀림없이 고려된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를 사전에 방지하며 극복케 하기 위해 선악과 금령에 따른 행위언약을 맺어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담의 범죄를 현실화시킴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언약적 선택과 구속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이며 합목적적인 섭리역사의 일환으로 해석될 때 논리의 일관성이 정립된다(롬 11:32; 엡 1:6; 눅 15:32).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시기에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선할 뿐이다(롬 8:28).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요구되는 책임적 존재가 아니시다(롬 9:21).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하시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과 관련해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교리는 계시보다는 이성에 기초해 사색의 결과로 빚어진 변신론(Theodicy)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창조주의 절대 주권적 사역을 피조물의 관점에서 상대화시킨 결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작정하시고 부분적으로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사와 만물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총괄해 섭리적으로 주관하신다(롬 11:36; 마 10:29).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제외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타락은 신적 작정과 무관한 불행하며 비극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수 없다. 보다 적극적이며 역설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더욱 은혜 되게 하는 하나님의 전(全)포괄적이며 합(合)목적적인 절대 주권적 섭리역사의 일환으로 재해석돼야 할 것이다(엡 1:4-6; 롬 11:32-33).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변호하고 피조물에게 죄책을 돌리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인간의 타락을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에 기초하면서도 죄책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책임론을 제시한다. 결국 인간의 타락이 창세전부터 예정돼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속성상 죄의 조성자(maker)가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런 사상이 후에 토마스 아퀴너스에 의해 정립된 허용적 작정교리에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토마스 아퀴너스는‘하나님의 허용’개념을 신학 작업에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악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 왜냐하면 그 악으로부터 더 큰 선을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 허용 이후의 구속사역이 하나님의 사역 중 가장 우월한 사역이다”라고 그의 신학대전에서 밝힌다.
어거스틴의 타락론은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섭리와 연관시킨다는 데서 부분적으로 성경적인 관점을 견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성욱이 지적한 대로‘어떻게 선하게 창조된 인간이 타락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예정섭리 안에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독립적인 자유의지인가? 궁극적으로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돌려질 수 있는 것일까?’ 등등의 질문에 총체적인 관점에서 답변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어거스틴은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롬 8:28)과 하나님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범죄하기 전 아담의 자유의지의 정체성 및 절대주권자로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하심으로 책임적 존재가 아니시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피조물인 인간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과 의무감을 갖는 유일한 대상이다. 어거스틴에 대한 상기 서요한과 정성욱의 반성적인 평가는 충분히 고려할만하다. 특별히 창세기 1-3장을 통해 발견되는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언약적 패러다임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언약(신적 작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될 때, 여전히 논리적/신학적/언약적인 문제점을 유발시킨다. 성경의 계시사는 창세전 선(先) 계획과 창세 후 성취라는 구조적인 맥락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언약적 목표를 향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호 일관성/점진성/연속성/연계성이 보증돼야 한다는 게 필자의 관점이다.
Ⅱ. 종교개혁 시대의 언약에 대한 개괄적 이해
언약교리의 뼈대는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후 2세기를 지내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 특별히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코케이우스와 같은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언약 개념은 주석이나 신학적 숙고를 위한 중심 역할을 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언약개념은 주로 구원론적 측면들로 이해되었다.
A. Huldrych Zwingli(1484-1531) :
"16세기 초 언약의 통일성과 발전 개념은 쮜리히의 개혁자 쯔빙글리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고 서요한은 그의 저서에서 J. Wayne Baker의 언급을 인용해 기술한다. 서요한은 언약이란 용어가“1525년 11월 5일, 쯔빙글리가 쓴‘후브마이어에 대한 응답’(Reply to Hubmaier)에서 처음 언급되었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대개‘논박’으로 불리는 그의 저서‘재세례파의 속임수들에 대한 논박’(Refutation of the Tricks of the Anabaptists)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쯔빙글리는 언약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했다”고 지적한다. Trinterud, Moller 그리고 Greaves와 같은 학자들에 따르면 쯔빙글리는 언약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순종과 관련시켜 사용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에는 신적 측면과 인간적인 측면이 모두 있었다. 쯔빙글리는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를 언약적 표징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구약의 백성들과 신약의 백성들 간의 언약적 연속성과 통일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반면에 Robert W. A. Letham은 쯔빙글리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들이 인간 편의 일정한 조건 충족에 좌우되는 식의 언약 관계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언약이라는 말이 상호간의 쌍무적인 협정(mutual agreement)으로 사용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언약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약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영원한 선택에 전적으로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쯔빙글리는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믿음으로 표현되는 순종의 사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는 그의 이런 주장을 후기 저작인 믿음에 대한 설명(Exposition of Faith)에서 피력하였다. 이 책에서 쯔빙글리는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씨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했다. 보증으로서의 언약은 궁극적으로 약속으로서의 언약에 의존한다고 기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에 대한 언약적 반응으로서 순종을 기대하신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경외는 그분의 신적인 호의의 결과이다. 쯔빙글리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결과들은 가시적인‘선택의 표징’이다.
쯔빙글리는 자신의 이런 언약개념에 근거해 그의 언약사상을“첫째로 유아 세례 및 외적인 표징들인 성례에 대한 방어책으로 사용했다. 이런 표징들은 기독교인들의 내적, 외적 연합으로 알려졌으며 신자들에게 은혜의 수단 역할을 했다. 둘째로 언약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세례언약(baptismal covenant)에는 하나님과 인간 양쪽 모두에 의해서 주어지는 보증이 포함되었다. 세례의 궁극적 기초는 우리가 하나님의 봉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종들로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데 있다. 쯔빙글리는 세례는 초보적인 의식(initiary ceremony)이나 보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언약 속에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성례가 적절하게 시행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발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쯔빙글리는 선택의 교리 때문에 유아 세례를 확고히 믿었으며, 또 이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쯔빙글리는 언약의 통일성의 맥락에서 유아 세례의 객관성을 보증했다. 쯔빙글리는 ‘세례와 재침례 및 유아 세례’(Baptism, Rebaptism and the Baptism of Infants)라는 책에서 유아세례는 언약의 표(sign)이며, 그 언약은 전 가족을 바라보는 것이지, 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옹호했다.
쯔빙글리의 언약사상을 살펴볼 때, 그의 언약사상은 철저하게 은혜언약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신적 은혜에 따른 강력한 그러나 자발적인 순종의 의무는 신약의 기자들이 기술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 은혜와 순종의 상호적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그의 언약개념 속에 행위언약사상이 담겨 있는 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한편 쯔빙글리가 그의 언약사상을 논술하면서 "선택교리 때문에 유아세례를 확고히 믿었으며 언약의 통일성에 근거해 이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말은 일말의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런 주장은 자칫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의 선택과 언약이 자녀들에게 혈통적으로 계승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오해될 수 있다. 물론 구약적 배경에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이 할례를 언약적 표징으로 삼아 아브라함의 언약적 후손들로 편입된 사실을 성경은 기술한다(창 17:9-14). 그러나 이때에 아브라함과 그의 가속들이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친백성들이 받을 성령세례를 모형적으로 예표하는 성례전적 행위이다. 당시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과 가속들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로 영구히 편입된 것이 아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시적으로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예표요 그림자자일 뿐이다. 신약의 기자는 분명하게 표면적 유대인이 아닌 이면적 유대인이 참 아브라함의 언약적 후손인 사실과,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을 요구함으로(롬 2:28-29) 성령세례로 거듭난 사실을 할례의 실체로 논증한다(골 2:11-12).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인 성령세례의 표상이요 예표에 해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구약의 할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유아들에게 부모와의 혈통적 연대 속에서 언약백성으로 간주해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견해는 할례의 예표와 실체 사이의 언약적 관계성을 바르게 해석해 적용한 것으로 보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 속의 진정한 후손은 육체의 할례를 받은 혈통적 후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할례의 실체인 성령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될 신약의 교회원들을 총칭한다(갈 3:29, 7; 골 2:11-12). 창세기 17:7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신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정체는 본질상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 곧 신약의 교회를 총체적으로 일컫는다(롬 2:28-29; 갈 3:7, 29). 더구나 요한복음 1: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 국한된다”고 분명히 증거한다. 쯔빙글리 자신도“중생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명확하게 언급하면서도 세례에 대해서는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직접성(immediacy)을 강조함”으로 다소 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재세례파와의 신학적 논쟁을 통해 저들의 부당함을 성경적으로 증거하며 강조하려는 데서 비롯된 편향적 발상으로 해석하면 무리일까.
B. Johann Heinrich Bulinger(1505-1575) :
언약의 통일성과 발전 개념은 16세기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에서 시작되었다.쯔빙글리가 성경적 언약개념을 소개했다면 그것을 발전시키고 조직화한 사람은 그의 후계자 불링거였다. 불링거의 언약사상은 그가 1549년에서 1551년에 행한 일련의 설교들을 모아 놓은 Decades로 알려진 기독교 신앙 해설집에서 그의 사상의 가장 현저한 위치를 점하였다.
불링거는 구약을 약속으로 신약을 성취로 이해했다. 그리스도를 신약 뿐 아니라 구약의 목표요 중재자로 보았다. 불링거는 신구약을 이 둘의 구원론적 통일성의 빛 가운데서 연결시켰으며, 이러한 사상은 그를 본능적으로 언약 신학으로 인도했다. 불링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한 후에 그와 언약을 맺으실 때, 그리고 이후에 계속해서 아브라함, 모세와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와 함께 우리를 참가자(partaker)로 부르셨으며,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신 하늘의 복들과 더불어 언약들을 주셨으며(창 17:7; 22:18), 믿음과 마땅한 순종 안에서 우리를 당신에게 매어 놓으셨다고 피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구약의 언약사상을 연계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예표와 실체의 관계를 통해 해석한 불링거의 통찰력은 탁월하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언약의 수혜자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과 더불어 신약의 백성들도 본질상 함께 그 언약에 동참하게 하셨다는 통찰력은 놀랍다. 이는 언약에 담긴 이중 구조적 정체성 곧 현재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성취의 이중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불링거는 쯔빙글리와는 달리 신약의 언약개념(diatheke)을 편무적인 언약(unilateral covenant)이 아닌 contract, 즉 조건적(bilateral)인 쌍무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이런 맥락에서 불링거는 인간의 책임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더욱 명료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창 17: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라고 피력한다. 그러나‘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백퍼센트 순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의 표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에녹과 노아의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저들 자신의 의로운 행동에 근거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일 뿐이다(창 6:9; 히 1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시는 의중도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적 삶을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율법을 행하여 완전함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율법의 기능은 오히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삼아 심판에 이르게 함으로 구속주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다는 게 성경의 증언이다(롬 3:19-20; 갈 3:21, 23-24).
그런 의미에서 불링거가 신적 언약의 성격을 편무적이 아닌 조건적 즉 쌍무언약의 관점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은혜언약(편무적)과 행위언약(쌍무적) 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인 듯싶다. 일례로 불링거는 두 서판(십계명)에 기록돼 있는 언약을 조건적 언약으로 믿었다. 불링거는 언약간의 연계성과 통일성을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언약으로 대변되는 십계명이 아브라함 언약과의 불가분의 연계성 속에서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신 사실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John Murray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Grace에서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온 전통을 비판하면서“성경 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이었다”는 은혜언약 일원론을 강조한 것은 바른 지적이다. 은혜언약 속에 요구되는 행함의 본의는 우리의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은혜의 은혜 됨을 더욱 절감케 함으로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는 삶을 고양시킨다(고전 15:10). 이런 관점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영적 주식으로 삼는 자들이다.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불링거는 유아세례를 옹호하기 위해 언약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성례에 관해서는 언약 개념을 한결 더 확장시켰다. 불링거는“유아들은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이는 이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신앙이나 입을 통한 여호와께 대한 고백 때문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들을 정결케 하사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들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언약신학자들이 유아세례의 증거본문으로 삼는 성경구절들은 대부분 창 17:7; 막 10:15; 행 16:31; 고전 7:14에 집중된다. 그러나 유아세례의 증거본문으로 제시된 구절들이 진정으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성경적으로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본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는 불확실하다.
C. John Calvin(1509-1564) :
정성욱은“칼빈은 루터와 더불어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한 개혁자였을 뿐 아니라 신학자, 설교자, 주석가, 목회자로서도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중 성경적인 부분만을 수용하려고 노력했고, 신플라톤주의적 요소는 거부하고자 했다. 칼빈은 1세대 개혁자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경적 신학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성경적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칼빈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입각하여 성경만을 기독교 진리의 원천으로 인정했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그의 주석과 설교에도 잘 나타나 있으나 그의 주저‘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술회한다.
서요한은“칼빈의 저작들에서 언약이라는 말은 탁월한 특징을 가진다. 칼빈은‘기독교 강요’(vol. Ⅱ., ch. 9-11)에서 세 장을 은혜언약의 전개에 할애하였다. 칼빈은 주권자 하나님의 위엄과 그 분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언약에 근거한 무조건적인 선택과 더불어 예정교리는 칼빈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고 기술한다. 창세전에 수립된 영원한 구속언약(엡 1:4)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그리스도의 구속에 선행한다는 관점이다. 필자는 칼빈의 이런 견해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극 동의한다. 그렇지만 은혜언약이 조건적인 의미로 사용된 곳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칼빈은 말하길“나는 이스마엘에게서 그리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로 인해 선택(adoption)에서 제외되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했던 조건들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성실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시켰다”고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주해한다. 은혜언약에 대한 칼빈의 이런 주해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은혜언약에 동반된 순종의 요구는 이를 순종하지 못할 때 언약적 징계가 따를망정 결코 언약의 파기자로 전락해 구원과 선택에서 제외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은혜는 행함의 대가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의 선물이기에 은혜의 수혜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한 번 베푸신 은혜는 결코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서도,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해 남유다의 왕들과 남유다의 경우에서도, 저들에게서 한결 같이 은혜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에 반하는 불의와 불법과 각종 우상숭배들이 만연했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형성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70년간 포로로 잡혀갔었으나 70년이 차매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 고토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다윗언약과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근거한 하나님의 언약적 회복사건의 가시적인 증거이다. 언약적 징계는 있어도 언약의 파기나 무효화는 불가능하다.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성과 은혜성에 기초한 일방적인 호의에 기초해 맺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마엘이나 에서 등은 저들이 비록 표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며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들로 표기될지라도 이면적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들이나 언약의 자손들이 될 수 없다(롬 2:28-29; 9:6-13). 그러므로 저들은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지, 뒤늦게 불순종의 결과로 언약의 파기자들로 전락된 것이 아니다. 은혜언약의 특성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곧 주권성에 근거해 맺어주신 것이기에 어떤 경우라도 수혜자의 불순종이 결코 은혜언약 자체를 파기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언약적 징계(히 12:5-13)와 언약적 파기의 의미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언약의 교리가 성경의 통일성의 열쇠이며, 따라서 구약시대는 신약시대와 전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모든 차이점들은 실체(substance)의 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방법의 차이다. 따라서 그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구원론적 용어 속에서 한 언약의 측면들로 이해했다“고 서요한은 기술한다.
칼빈의 견해에서 신구약 두 세대들 사이의 언약의 연속성은 유아세례 곧 믿는 자들의 자녀들 위에 임하고 있는 언약의 표징의 기초를 제공한다. 칼빈은 그들(구약시대)에게 할례였던 것이 우리(신약시대)에게는 세례로 대체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유아세례의 당위성을 할례와 세례 사이에 내재된 언약의 표징이란 신학적 상응성에서 찾는 일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 속에서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육체적 할례가 마음의 할례에 대한 모형이며(롬 2:28-29; 신 10:16), 마음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할례에 근거한 성령세례와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골 2:11)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예표적 사건 속에 담긴 원칙을 실체의 시대에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으로 여겨진다. 구약시대에 건물로서의 예표적 성전개념을 신약시대에 동일하게 예배당 건물에 적용시킬 수 없는 것과 본질상 동일한 이치이다.
Peter A. Lillback은 그의 저서 The Binding of God(칼빈의 언약사상)에서 칼빈은 군대를 하나의 통일된 개체로 결속하는 방법인 언약 희생의 고대적 용도를 알고 있다(창 15:10). 그러므로 칼빈의 언약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결속 개념이다라고 술회한다. 이 결속(bond)은 자신을 그의 피조물과 연결하는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Lillback은 칼빈의 말을 인용해“죄 사함은 우리에게 교회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것 없이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언약(covenant)이나 결속(bond)은 없다”고 피력한다. 그러므로“언약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결속이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스스로를 결속하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타락하고 자격이 없는 그러나 하나님 주권으로 선택된 백성과 상호적 언약으로 들어가신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택된 가족과 스스로 결속시키는 것은 당신을 위해 한 백성을 양자 삼으시겠다는 약속의 결과다. 그러므로 칼빈은 언약을 하나님과의 결속이나 연합과 같은 관련된 개념과 연결시킨다. 마찬가지로 양자삼음(adoption)과 언약은 종종 동의어처럼 함께 나타난다. 그래서 칼빈은‘양자삼음의 언약’을 말한다. 사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양자 삼았다. 언약관계를 맺었다. 칼빈은‘공통적 언약’과‘공통적 양자삼음’을 병행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언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백성을 택하시고 양자 삼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스스로의 결속을 함축한다. 따라서 기독교강요와 주석에서 약속(promise)과 양자삼음(adoption)이란 용어는 칼빈이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의미의 어의(semantic)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과 양자삼음, 그리고 결속이란 용어는 칼빈 신학에서 모두 언약의 동의어들이다.
칼빈의 언약신학의 특징은“첫째, 불링거처럼 언약의 통일성과 영원성을 주장한다. 구약의 족장들과 맺은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과 다르지 않으며 본질상 하나라고 주장한다. 둘째, 칼빈은 다양한 성경적 언약의 차이를 점진적 계시로 설명한다. 그는 말하기를 최초의 구원의 첫 약속이 아담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은 연약한 불꽃처럼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 빛은 마침내 햇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전체 지구를 밝게 비추셨다고 기술한다. 셋째, 칼빈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하나님 언약의 실질적 창립으로 본다. 칼빈은‘모세가 아브라함과 시작한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물론 칼빈은 아브라함 전에 언약이 이미 존재했었다고 믿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언약의 공식적 창립은 창세기 17장의 내용대로 아브라함과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강조한 아브라함 언약의 다섯 가지 양상이 확인된다. 첫째, 언약은 세상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분리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의 정체성은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언약과 선택은 그 기원과 정체성에서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언약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장소였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 속의 참 후손들은 근본에서 역사적 이스라엘이라기보다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갈 3:7, 29). 표면적 유대인이 아닌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요 참 이스라엘이다(롬 2:28-29; 9:6-8). 셋째, 아브라함 언약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 들어오게 될 남은 자(remnant)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될 뿐이다(롬 11:25-26).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이 오늘 날에도 유효하다는 칼빈의 견해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남은 자들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넷째,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그리스도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교회가 아브라함 언약의 참 후손들이며 하늘의 기업을 이을 후사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준다(마 1:1; 갈 3:29). 다섯째, 아브라함 언약에는 두 가지 위대한 구속적 유익이 포함돼 있다. 그것은 칭의와 성화다. 칭의는 성화적 삶을 요구하고 성화적 삶은 칭의의 열매이다(약 2:22).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상호 의존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항상 동행한다(고전 6:11).
이런 관점에서“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묶으셨고 인간 또한 하나님께 묶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더 많이 묶여 있을수록 하나님께 더 감사해야 한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칼빈은 계속해서“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 상호적 묶음(bond) 때문에, 언약은 믿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의무와 임무’하에 놓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언약의 상호성과 긴밀하게 관련돼 있는 것이 언약의 조건성이다. 언약이 상호적이고 조건을 포함한다면 언약이 파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칼빈은 동의한다.칼빈에 의하면“언약이 하나님께는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구이언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민 23:19). 그러므로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인간 편이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언약의 파기가 가능한 자를 위선자, 이단, 분리주의자, 그리고 영적 사생아로 분류한다. 심지어 구약의 제사장직과 로마 가톨릭 교회까지도 언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의 수혜자로 처음부터 편입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은 은혜언약의 성격상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기에(엡 1:4-6) 선택과 무관한 자들이 처음부터 언약의 수혜자로 편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시킨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처음부터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과 관련해 민족적인 차원에서 한시적인 계시의 도구로 선용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언약적 본의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롬 2:28-29). 이스라엘 백성 중에 청함을 받은 자(외적 소명)들과 택함을 받은 자(외적/내적 소명)들이 공존할지라도 전자의 경우는 처음부터 구속의 은혜와는 무관한 자들일 뿐이다. 이런 원리는 신약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마 7:21-23; 롬 10:2-3).
결론적으로 칼빈의 언약사상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 1559년 판을 통해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칼빈의 언약사상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속 개념에 집중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런 사실은“죄 사함은 우리에게 교회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것 없이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이나 결속은 없다”고 강조하는 데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런 관점에서“언약은 구원의 근원이고 원천이며 구원의 소망은 언약에 기초한다”고 칼빈은 피력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언약은 그리스도를 내포하고 그리스도는 언약의 기초가 되신다. 칼빈에게 언약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칼빈의 언약사상이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할 때, 언약의 정체성은 구속언약에 근거한 은혜언약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을 여자의 후손을 통해 약속해 주시는 원복음(창 3:15)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상일 수 있다. 칼빈이 말하는“만일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인간이 어떤 종국을 맞게 될지 미리 아셨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렇게 정하신 때문이다”(Inst. Ⅲ. 23. 7)라는 주장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수반된 행함의 요구에 불응할 때 언약의 파기가 가능하다고 보는 언약의 조건성은 은혜언약에 담긴 무조건적인 성격과 조화되지 않는 논리로 이해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은혜언약에 동반된 순종의 요구를 어길 때 언약적 징계를 통해 회개를 촉구함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정립을 이끌어 낼지라도, 근본적으로 언약의 파기나 무효화는 불가능한 것이 은혜언약의 특성으로 이해한다(히 12:5-11). 이런 관점에서 이스마엘과 에서를 불순종에 따른 아브라함 언약의 파기자로 보기보다는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과는 무관했던 표면적 유대인과 육체의 할례자로 평가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들을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의 참된 계승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갈 4:30; 창 25:23; 롬 9:10-13).
D. Zacharias Ursinus(1534-1583) :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는 대륙의 개혁교회의 언약신학자들로 이들은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Heidelberg Catechism)의 주요 저자들로 평가된다. 이런 사실의 중요한 증거는 일반적으로“신학요목문답(Catechesis, summa theologiae)으로 불리는 우르시누스가 작성한 두 가지 요리문답서인 소요리문답(Catechesis minor)과 대요리문답(Catechesis major) 때문이다”라고 이남규는 그의 소논문에서 밝힌다. 이남규는 계속해서 우르시누스의 소요리문답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초안으로 추정되고 신학요목문답은 참고자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피력한다. 이남규는 총 323개의 문답으로 구성된 우르시누스의 신학요목문답(기독교 교리)에 나타난 언약론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개혁주의 언약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우르시누스의 신학요목문답에서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언약이 신학체계내의 핵심주제로 등장해서 신학의 각 부분을 상호보완적으로 결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우르시누스의 신학요목문답 중 첫 번째“사나 죽으나 당신에게 어떤 견고한 위로가 있는가”란 질문의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고 설명한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그의 형상을 따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창조되었는데, 내가 고의적으로 아담 안에서 이것을 잃어버린 후에, 하나님은 크고 값없는 자비로부터 나를 그의 은혜언약 안으로 받으셔서, 육체 안으로 보내어진 그의 아들의 순종과 죽음 때문에 믿는 내게 의와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 언약을 내 마음에, 그의 형상을 따라 나를 다시 만드시고 내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 외치는 그의 성령을 통해, 그리고 그의 말씀과 보이는 그의 언약의 표를 통해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상기 우르시누스의 신학요목문답 1문에서 언약은 위로의 핵심에 위치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자를 은혜언약으로 받았고, 그 언약을 내 마음에 인쳤다는 것이 위로의 핵심 내용이다.‘말씀과 보이는 언약의 표’로 설명되고 있는 성례가 언약의 표로서 칭해지고 있는 데서도 언약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상기 1문은 사실상 신학요목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남규는 그의 소논문에서 신학요목(기독교교리)의 중심 주제를 율법, 복음, 기도, 교회사역 등 네 가지로 분류한다. 이는 우르시누스가 기독교 교리를‘하나님의 율법의 요약 또는 십계명, 복음의 요약 또는 사도신경, 하나님께 구함 또는 주기도, 교회사역의 윈리’등 넷으로 구분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이남규는 상기 신학요목문답 1문에서 창조의 목적으로 등장하는 영생은 율법과 관련되며, 은혜언약은 복음과,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성경은 기도와, 말씀과 보이는 언약의 표는 교회사역과 만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1문답에서 인간의 사나 죽으나 위로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언약은 우르시누스의 신학체계의 핵심요소로 등장한다고 피력한다.
이남규는 계속해서 신학체계의 네 가지 구성요소인 율법, 복음, 기도, 교회사역이 어떻게 언약과 밀접하게 연계되는지를 신학요목문답에 근거해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첫째, 율법과 관련된 부분을 신학요목문답 10문에 근거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창조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종류의 언약을 맺었는지, 인간이 그것을 지킴에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 처신해야 했는지, 새로운 은혜언약을 그와 맺기 시작한 후에 하나님이 그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즉 어떤 종류로 또 무엇을 목적하여서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어떤 신분으로 그가 떨어졌는지, 하나님께 화목 된 자가 그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세워야만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두 가지 언약사상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는‘창조 시 맺은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새로운 은혜언약’이다. 후자의 은혜언약에‘새로운’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은 전자의 언약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붙여진 표현이다. 창조 시의 언약에서 율법은 인간의 본래의 속성과 목적을 알려준다. 새로운 은혜언약에서 율법은 하나님께 화목 된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문답의 뒷부분에서 십계명이 회심한 자들에게도 필요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의 당사자들에게 요구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신학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복음은 은혜언약을 의미한다. 영원한 형벌 가운데 있는 인간(29문답)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시작하신 값없는 언약으로부터 갖는다(30문답). 하나님께서 이런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복음으로부터 안다(34문답). 은혜언약에 들어가는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와 그의 혜택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사람이며(37문답),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은 사도신경에 요약돼 있고(39문답), 그 후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도신경이 해설되도록 묶어내고 있다.
셋째, 신학의 세 번째 구성요소인 기도도 언약과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세 가지가 모두 언약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먼저 기도는 은혜언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예배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택자들이 기도라는 방식으로 언약을 지키는데 필요한 성령의 은혜를 얻고 보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옳게 부르는 자는 양자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수납되었으며 그래서 신적 언약의 증거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 신학의 네 번째 구성요소인 교회사역도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교회사역의 목적은 그것(교회사역)을 통해 우리를 자기의 언약으로 받으시고, 그 (언약)안에서 우리를 보존하시고, 그리고 그(언약) 안에 우리가 있고 영원히 거할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다. 성례는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의 언약의 표인데, 세례는 세례 받은 자가 하나님에 의해 은혜언약 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이고, 성찬은 세례에서 시작한 하나님과의 언약이 영원히 저들에게 유효하게 된다는 증거이다.
이남규는 이처럼 신학의 각 부분을 언약을 매개로 묶는 것은 우르시누스가 처음 시도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남규는 계속해서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에게 있어서 언약이 다루어졌어도 신학의 전 분야에 적용되지 못했고, 나아가 언약을 매개로 하여 신학을 체계화하지도 않았다고 피력한다. 우르시누스에게 이르러 언약이 신학의 여러 주제에 적용되고, 신학의 여러 주제가 언약을 매개로 정초되고 있다고 기술한다. 이런 시도는 올레비아누스가 이를 계승해 더 확장시키고 체계화시켰다고 분석한다.
이남규에 따르면 우르시누스의 공로는 언약을 매개로 신학의 여러 주제를 연결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언약개념을 분화시켜서 은혜언약의 통일성을 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이남규는 신구약 사이에 전개되는 언약의 점진적인 진행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언약적 특징을 우르시누스의 견해에 근거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째, 구약에서는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고, 신약에서는 오신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구약언약은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보호하는 특징을 가졌고, 신약은 모든 정부 아래서 교회를 보호하는 일반적인 약속을 갖는다고 보았다. 셋째, 구약은 레위의 의식을 가졌고, 신약에서는 그것들이 파기되었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셨다. 넷째, 구약은 더 희미하고 신약은 더 분명하다. 결국 우르시누스가 언약을 분화시킴으로 오해 없이 더 정확하게 신학적 내용을 설명할 수 있도록 공헌했다고 평가한다.
이남규는 이어지는 그의 논증에서 우르시누스는 창조 시 세우신 언약을 본성언약(창 2:17)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타락한 인류를 은혜언약으로 받으신 것은 전자의 의미에 반대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이는 당초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주실 것을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경륜이 결국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성취되는 방식으로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남규는 이런 사실과 관련해 본성언약의 이런 방식의 표현은 후에 개혁신학에 자리 잡은 행위언약 개념과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연결되었다고 평가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우르시누스가 창조 시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선악과 금령 언약을 본성언약으로 표현하면서 아담의 타락을 영생에 이르는 조건에 실패한 것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전통적인 개혁언약 신학의 관점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나아가 본성언약의 실패를 은혜언약을 통해 만회케 하신 것으로 해석하면서 결과적으로 본성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은혜언약을 통해 성취되기에 이르렀다는 관점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영원한 구속언약의 관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여겨진다.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원형과 기원을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 곧 영원한 구속언약에 기초할 때, 아담의 타락은 당초 하나님의 뜻이 거부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세 전 계회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그리스도 안에서'(엡 1:4)란 구속 곧 죄 사함(엡 1:7)의 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타락은 창세 전 신적 작정 속에 이미 고려되고 전제된 사건으로 해석돼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언약적 구속사상이 창세기 1-3장 속에서‘선 계획 - 후 성취’라는 구조적 맥락 안에서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이란 패러다임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뿐이다(롬 11:36). 하나님께서 인류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다(롬 11:32).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타락은 역설적인 논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의 동인으로 작용한다(엡 1:3). 로마서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신묘불측한 구속의 경륜을 깨닫고 이르기를“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설파한다.
이남규는 상기 그의 소논문에서 우르시누스의 언약사상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면서“우르시누스는 신학에서 언약의 자리를 확장했고, 신학의 중요 주제들을 언약을 매개로 엮었다는 점에서 칼빈을 포함한 앞선 개혁신학자들과 비교할 때 분명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본성언약이란 개념을 도출해서 율법과 복음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서 신구약의 통일성이 칼빈보다 더 정확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좁은 의미의 율법이 본성언약에 자리를 잡자 구약은 더 정확한 방식으로 은혜언약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칼빈에 이르기까지 언약은 한 언약(은혜언약)으로 이해되었으나 우르시누스는 두 언약(본성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었다”라고 정리한다.
E. Caspar Olevianus(1536-1587) :
Clarence Stam은“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언약교리는 불링거와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때에 행위언약이란 개념도 도입돼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Louis Berkhof 의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를 인용해 기술한다. Stam은 이후 행위언약에 관한 교리는 다양한 신조들에 의해서,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과 같은 신경에 의해 공식화된다고 피력한다.
올레비아누스도 언약을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로 채용했다. 올레비아누스도 은혜언약은 전적으로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된 무조건적이며 값없이 주시는 약속이라고 말한다. 이남규는 Bierma의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를 인용해 올레비아누스가 교리해설서로 내놓은 작품은 세 가지라고 기술한다. 첫 번째는 1567년에 나온‘견고한 기초’인데, 이 책은 올레비아누스가 사후에 그의 성만찬 설교와 다른 초기 독일어 글들과 함께‘하나님의 은혜언약’이란 제목으로 출간된다. 두 번째는 1576년에 출간된‘사도신경 해설’인데, 표지에 따르면 이 책에는‘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의 값없는 영원한 언약의 핵심이 짧고 분명하게 다루어졌다. 세 번째는 그의 말년인 1585년에 출판된‘하나님과 선택받은 자들 사이의 언약의 본질에 대하여 그리고 이 언약의 본질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단들에 대하여’이다. 이 작품들의 제목에서 언약의 위치는 흥미롭다. 첫 작품인‘견고한 기초’에는 언약이란 용어가 없다가 사후에 다른 작품과 함께 만난다. 두 번째 작품인‘사도신경해설’에서는 제목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고, 세 번째 작품에는 제목 자체에 들어간다. 이런 변화가 올레비아누스의 신학에서 언약의 자리가 점점 강화되어지고, 언약이 그의 신학의 중심 원리가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남규는 올레비아누스의‘견고한 기초’를 소개하면서“견고한 기초는‘인간의 복락’이 어디 있는가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 대답은‘모든 선과 영원한 복락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와 사귀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올레비아누스의 언약론은 이 대답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어야 하는데, 범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고, 복락의 실질인 하나님과 하나 되고 사귀는 것 안에 있지 못하다. 은혜언약은 인간이 이 복락 안에 있도록 해주는 방식, 즉 중보자가 원수 된 인간을 하나님께 화목시키는 방식이다.”사람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왜 언약의 방식 안에서 즉 은혜언약의 방식 안에서 우리에게 오게 되는가란 질문에 대해,“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변함없는 영원한 평화와 우호가 그 아들의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을 하나의 언약 곧 영원한 언약에 비유하신다”라고 답한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서 중보자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셔야 한다. 그래서‘견고한 기초’에서 올레비아누스는 은혜언약을 신학의 많은 주제에 연결시키지만 가장 많이 언약이 언급되는 부분은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이란 두 본성을 갖는 것에 대해 설명할 때라고 이남규는 강조한다.
‘사도신경해설’에서 올레비아누스는“언약은 은혜언약인데 언약 전체가 값없이 무조건적인 것”으로 기술한다. 언약이 무조건적이고 값없는 이유는“영광이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요 우리의 양심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밝힌다. 언약의 이중 혜택 개념이 여기서 등장하는데, 곧 믿음으로 되어지는 일이 두 가지인데,“죄의 값없는 용서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를 현대교회 용어로 환언하면 칭의와 성화를 의미한다.
‘언약의 본질’은 내용마다 언약이란 주제를 폭넓게 적용한다.‘견고한 기초’에서 언약이 서론과 중보자에 집중되었다면,‘사도신경해설’에서 더 많은 주제들에 적용되었던 것이‘언약의 본질’에서는 더 확장되었다. 이남규에 따르면 언약의 본질의 특별함은 두 번째 부분에서 성례에 대한 교리가 자세하게 추가돼 올레비아누스의 언약론이 완전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두 번째 부분은 언약이 전달되는 수단들로서, 들을 수 있는 증거와 볼 수 있는 증거를 소개한다. 전자는 설교를 후자는 성찬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전달되는 주요한 방식은 선포된 복음의 약속이다. 세례는 우리가 은혜언약으로 그리고 중보자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는 것과 그렇게 해서 전가된 의와 중생의 시작을 증거하고 인친다. 성만찬에서 이것이 더욱 증가되기 때문에 자주 해야 한다. 이렇게 언약의 이중 혜택인 칭의와 성화가 세례와 성만찬에 적용되어진다.
Bierma는 그의 저서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를 통해 올레비아누스에게서 은혜언약 외에도 다섯 가지의 다른 언약 개념을 소개한다고 이남규는 그의 소논문에서 밝힌다. 그것들은 시간 전 언약, 창조언약, 율법언약, 사단과 맺은 언약, 피조물과 맺은 언약이다.
‘시간 전 언약'과 관련해 올레비아누스에게서 (영원한)구속언약이란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시간 전 언약의 개념도 후대처럼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간의 협약이란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부의 명령과 맹세, 성자의 보증, 동의 등의 개념과 함께 등장한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를 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로 정하고, 성자는 성부의 명령을 성취할 것을 약속한다. 구원하려는 성자의 영원한 의지는 성부의 의지와 같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간의 시간 전의 협약이 있었다는 개념이 올레비아누스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올레비아누스의 언약사상을 통해 그의‘시간 전 언약’개념이 현대교회 속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영원한 구속언약’의 개념과 본질상 상응한다는 사실은 괄목할만한 언약사상의 진전이랄 수 있다.
창조언약은 우르시누스가 사용했던 창조 시의 언약 즉 본성언약의 개념과 유사하다. 올레비아누스에게 우르시누스의 창조언약은 첫 번째 언약, 본성(자연)언약, 창조율법과 동의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일치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며, 그 일치가 본성적인 의무라는 것을 알려준다. 아울러 본성적으로 알려진 법이 우리의 본성적 의무를 알려준다고 이남규는 Bierma의 저서 The Covenant of Caspar Olevianus를 인용해 기술한다. 올레비아누스의 창조언약은 후대에 등장하는 행위언약과 일치되는 개념은 아니나, 우르시누스와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후대에 행위언약을 본성언약으로 불렀다는 점에서, 이것이 양심에 쓰여져 있다는 것을 후대에도 강조했고 올레비아누스도 양심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음에 살펴볼 율법언약이 창조언약의 갱신이라는 점에서, 창조언약은 행위언약과 연결되는 개념이라고 이남규는 계속해서 피력한다.
율법언약은 창조언약의 갱신이다. 올레비아누스에게 율법은 하나님께서 본성에 심으시고 그의 계명 안에서 반복하시고 새롭게 하셨던 가르침이다. 율법을 지킨다는 조건과 함께 영생을 약속하셨다.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재차 진술된 것은 그런 의무를 분명하게 알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율법언약 아래서 죄를 깨닫게 됨으로 그리스도에로 피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회심해서 은혜언약 안에 들어오기까지 율법언약 아래 있게 된다고 이남규는 올레비아누스의 율법언약의 의미와 역할을 기술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언약에 들어오기 전까지 율법언약 아래 있게 된다는 올레비아누스의 관점은 옳다(갈 3:23). 그러나 율법 수여(에덴동산과 시내산)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과 복을, 불순종에는 저주를 약속함으로 순종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율법의 순기능(내적)보다는 역기능(외적)적인 면이 강조된 것으로 해석된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일차적인 목적이 생명과 복을 약속하고 있을지라도(레 18:5; 신 4:1; 겔 20:11; 마 19:17; 롬 10:5; 갈 3:12), 실제로 율법을 지켜 구원의 생명에 이른 자는 한 사람도 없다(갈 3:21). 이는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방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갈 3:22). 이런 사실은 율법수여가 처음부터 순종을 전제했다기보다 필연적인 불순종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tutor)의 역할을 담당케 함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송케 하기 위함이다(갈 3:23-25; 엡 1:6). 이런 관점에서 본질상 율법(구원에로 안내)과 복음(구원의 수여)의 신학적 상응성이 고려되는 가운데 신구약의 언약적 연속성과 통일성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올레비아누스가 기술한‘사단과 맺은 언약’은 다소 생소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죄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 시작되었다고‘사도신경해설’에서 지적한다. 올레비아누스는 죄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단과 언약을 시작한 사람이 있으므로, 틀림없이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하나 되게 하고, 모든 복의 근원이 될 사람이 있으므로 중보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단과 맺은 언약은 은혜언약을 보조하는 개념이라고 증거한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에 근거해 둘째 아담으로 오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망케 해준다.
‘피조물과 맺은 언약’은 올레비아누스의 저서‘사도신경해석’에서 섭리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 사용된다고 이남규는 기술한다.‘사도신경해석’에서 올레비아누스는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모든 움직임을 주시되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주신다고 피력한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의지 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들인 신자들은 필연적으로 피조물들과의 언약을 틀림없이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피조물과 맺은 언약도 은혜언약의 견고함을 위해 봉사하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올레비아누스의 언약사상은 그의 세 가지 저서‘견고한 기초’‘사도신경해설’‘언약의 본질’을 통해 그 발전이 드러난다. Bierma의 지적처럼 올레비아누스는 언약의 구도를 사용해서 신학을 정리하지 않고, 사도신경의 구조를 통해 신학을 해설했다고 이남규는 지적한다. 즉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신론/인간론), 언약의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기독론), 인간이 어떻게 은혜언약에 들어가는가(구원론), 언약 백성들과 언약의 표인 성례(교회론), 언약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종말론)까지 언약을 적용해 설명했다고 기술한다.
F. 요약(Summary) :
언약사상은 개혁신학의 중추적인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주제이다. 사실상의 언약교리의 골격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후 2세기를 거치면서 보다 조직적으로 발전했다. 언약신학은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제기되었고, 칼빈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 등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게 통설이다.
이남규는 “우르시누스에게서 칼빈의 옛 언약으로부터 좁은 의미의 율법이 본성언약으로 분화되었다면, 올레비아누스에게서 이것은 창조(본성)언약과 율법언약으로 다시 구분되지만, 이 둘은 후에 등장하게 되는 행위언약의 그림자였다고 진단한다.
이들에게서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의 개념은 정확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올레비아누스의‘시간 전 언약’속에서 성부와 성자 간의 맹세와 동의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사실상 은혜언약 하나만을 주장했다면, 우르시누스에게서는 은혜언약과 본성언약(행위언약의 개념)으로 분화되었고, 17세기 개혁신학의 언약론에 등장하는 세 가지 언약 곧 구속언약, 행위언약, 은혜언약이 올레비아누스에게서 희미하게나마 정착되고 있다고 이남규는 그의 소논문에서 결론적으로 평가한다.
Ⅲ. 종교개혁 시대의 각종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언약의 개괄적 이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신앙적 연구의 산물인 각종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속에는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에 대한 신학사상이 총체적으로 농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을 성경과 더불어 신앙과 삶을 구속하는 제2의 규범으로 천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본 논고에서는 이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 속에 기술된 언약에 관한 내용을 요약적으로 정리해 기술하고 이를 반성적 사고를 통해 선의적으로 분석해 평가하고자 한다.
A.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1647)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대/소요리문답과 함께 장로교회의 신앙표준문서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둘은 신구약 전체의 중요한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성경해설서이다. 경건하고 박식한 121명의 신학자들과 상, 하의원 30명 등으로 구성된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의해 5년 7개월(1643. 7. 1 - 1949. 2. 22)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특별히 제7장에 기술된‘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내용을 요약적으로 정리해 기술하고 평가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 1항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성적인 피조물이 마땅히 하나님을 그들의 창조주로 순종해야 하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무슨 축복이나 상급을 얻어 낼 수가 없었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자원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서만 가능하였다. 그런데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수단으로 하여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 기술한다.
상기 본문에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전달 수단이며 방편으로 기능한다. 은혜의 공급은 피조물인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의 개념이 아니다. 언약의 말씀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의 결과일 뿐임을 본문은 강조한다. 이런 사실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있어서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순종의 성격은 마땅히 행할 도리이며 본분이지 결코 보상과 대가성으로 평가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전 12:13; 눅 17:10).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저자는 피조물의 순종의 당위성은 비단 은혜언약 안에서 뿐만 아니라 행위언약의 경우에도 동일함을 피력한다. 왜냐하면 행위언약 또한 본질에서 은혜에 속하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의 경우를 이런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로 제시한다(눅 17:10). 저자의 이런 관점은 믿음이 행함과 동행하듯(약 2:22) 은혜가 동반하는 행함(딛 2:14; 골 3:1)이란 원리에 근거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제2항은“인간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그 행위언약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이었다”라고 기술한다. 이는 창세기 2:17에 명시된 소위 선악과 금령에 근거한 언약을 가리킨다. 그동안 초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조건적 언약, 본성언약, 창조언약, 율법언약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던 유사개념의 행위언약이 거의 한 세기가 지나면서 후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비로소 행위언약이란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다.
행위언약으로 정립된 선악과 금령의 요지는“...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는 내용이다. 본 언약에서 먹으면 죽음이 형벌로 주어질 것을 분명히 경계시킨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서 마땅히 행할 순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불순종에 죽음이 형벌로 부과된다고 해서 본 언약을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 당시 타락 전 아담의 상태는 비록 무죄자로서 완전자는 아닐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심히 좋은’상태로 지음 받았다(창 1:31). 이는 창세전 삼위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신적 작정(엡 1:4-6)의 상태와 목적대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당시 아담의 상태가 보다 온전하고 미래지향적인 지복의 상태로 성숙되고 발전해야 할 여지가 남아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순종을 통한 자력의 방식이 아니다. 타력에 의한 하나님의 방식이어야 한다. 자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한 사람도 없다(갈 2:21; 롬 2:20). 율법수여는 처음부터 인간의 무능과 무력과 죄악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이다(갈 2:22-23; 롬 2:19-20). 결국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갈 2:24-25; 롬 2:21-24).
이 뿐만이 아니다. 타락 전 아담의 상태는 땅에서 난자로서 흙에 속한 자며 혈과 육을 가진 자이다(고전 15:47-50). 혈과 육으로 난 자 곧 흙에 속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 구속함을 받고 의롭게 돼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만이 하늘의 기업을 이을 후사의 자격이 있다(요 3:3; 엡 3:6; 갈 3:29). 그러므로 첫 아담은 둘째 아담 안에서 거듭나 구속함을 받는 방식으로 의로운 자 곧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그리고 아담 안에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아담의 타락은 창세 전에 이미 고려된 사건으로 간주해야 한다.‘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란 언약적 표현이 이런 사실을 함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사건 곧 죄사함의 사상을 내포한다(엡 1:7; 골 1:14).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장하는 조건부적 언약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반성적 사고를 통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제3항은“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주께서 두 번째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셨다. 이 언약은 일반적으로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언약에 의하여 주님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고 생명에 이르도록 작정되어 있는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라고 기술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7장‘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제2항과 제3항에서 연속적으로 사람과 처음 맺은 행위언약과 두 번째 맺은 은혜언약이란 주제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행위언약의 핵심 주제를 순종을 담보한 영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류가 행위언약을 지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전적 무능(total inability)한 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창 3:15)을 통해 은혜언약을 맺어 주심으로 속죄의 방식으로 구원과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해설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언약을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과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으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언약의 점진적인 발전이란 관점에서 괄목할만한 진전임에 틀림없다. 종교개혁 이전이나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에 의해 다양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던 언약적 용어들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란 표현 속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정초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신앙고백서가 하나님께서 인간과 최초로 맺어 주신 언약을 행위언약(창 2:17)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언약의 점진성과 연계성이란 특성상, 그리고 언약의 원형과 뿌리가 창세 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신학적/언약적 연계성과 일관성 및 통일성이 결여된 것으로 분별된다. 첫째, 언약의 원형과 뿌리 및 씨앗으로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 딛 1:2)은 본질상 은혜성을 띤다. 은혜는 은혜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주신 최초의 언약은 신학적으로 행위언약일 수 없다 은혜언약이어야 한다. 둘째, 은혜언약은 은혜성의 특성상 행함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금령(창 2:17)은 독립된 행위언약이 아니다. 그 앞에 먼저 주어진 은혜언약에 종속돼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한다. 셋째, 이상의 논리에 근거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선악과 금령에 선행되는 은혜성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주신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으로 봐야한다(위스덤 강해주석:창세기 p.26). 창세기 1:28 본문에서 복(beraka)은 언약(berith)과 어근이 같다. 복과 언약의 관계는 언약의 내용이 복이고 복은 언약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창 1:28)은 언약적 복의 성격을 띤 창조언약으로서 최초의 은혜성을 띤 언약으로 간주돼야 한다. 복의 내용을 언약과 동일시하는 경우는 아브라함 언약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최초의 아브라함 언약으로 간주되는 창세기 12:1-3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표현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창 12:1-3)이 창세기 17:2-8에서 언약이란 용어로 표기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성경의 특정 본문이나 사건 속에서 언약이란 용어가 구체적으로 표기되지 않을지라도 내용의 성격상 언약의 구성 요소들인 시혜자와 수혜자 및 조건과 약속의 내용들이 담겨 있으면 이를 신적 언약으로 간주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창조언약(창 1:28), 선악과 금령언약(창 2;17),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다윗언약(삼하 7:11-17; 23:5; 대하 7:17-18; 사 55:3; 시 89:3-4; ) 등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위에 기술한 대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을 최초의 은혜성을 띤 언약으로 전제하면, 선악과 금령(창 2:17)은 독립된 행위언약이라기보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종속된 행함의 요구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이 불순종한 아담의 죽음을 강력히 요구할지라도 은혜성의 창조언약(창 1:28)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필자는 이 두 언약 사이의 충돌을 일컬어 수사적 표현으로‘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로 묘사한다. 이 둘의 요구를 절묘하게 충족시켜 주는 처방책으로 제시된 방안이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 창 3:15)언약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에는 구속의 원리가 암묵적으로 담겨 있다. 여자의 후손(단수)이 인류의 죄를 구속함으로 의롭게 된 인류(복수)가 지속적으로 문화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는 논리다. 이런 사실로 인해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명 원복음(proto evangelium)으로 부른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해설한 대로 당초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아담에게 영생을 보장해 주시려 했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구속의 방식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관점은 언약의 상호 연계성이란 특성상 보다 포괄적인 숙고를 필요로 한다. 칼빈의 지적대로“만일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 작정은 참으로 두려운 작정임을 나도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 인간이 어떤 종국을 맞게 될지 미리 아셨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렇게 정하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과 그 후손의 파멸을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타락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다”(기독교강요 Ⅲ. 23. 7)라고 정성욱은 그의 저서 Bible Theology and Reformational Theology(성경신학과 개혁신학)에서 밝힌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창세전에 수립된 신적 작정에 의한 필연적인 사건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란 언약적 선언 속에서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 속에는‘창조와 타락과 구속(재창조)’이란 언약적 패러다임이 묵계적으로 담겨 있다. 만사와 만물은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종속되고 의존된다. 피조세계에서 본질상 피조물 스스로 경영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선하신 목적을 위해 섭리적으로 관장될 뿐이다(롬 11: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구약과 신약을 서로 다른 두 언약이 아닌 하나의 언약으로 보면서 언약의 통일성을 강조한 것은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시적인 관점에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별개의 두 언약으로 구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총체적 관점에서 율법과 복음으로 대변되는 구약과 신약이 본질상 하나의 은혜언약으로 귀결된다면, 각론에 해당되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도 하나의 은혜언약으로 통합돼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과 행위언약과의 불가분의 관계는 불순종을 통해 은혜언약을 더욱 은혜언약 되게 하는 데 집중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온전히 담당해 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온전히 속량해 주셨다고 성경은 선언한다(갈 3:13; 롬 11:32).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찬송해야 할 이유가 이에 근거한다(엡 1:6). 우리의 우리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다(고전 15:10).
B. Heidelberg Catechism(1563)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독일의 영주였던 일렉토 프레데릭(Elector Frederick) 3세의 요청에 따라 1563년 1월 19일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 되었다. 당시 제후였던 프레데릭 3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 교수였던 28세의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와, 프레데릭 궁중 설교자였던 26세의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를 지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비되는 개혁교회 요리문답서를 작성토록 명령했다. 이런 관점에서 요리문답서의 작성 동기는 첫째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와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밝혀 정립함으로 당시 팽배돼 있었던 미사 중심의 가톨릭 교회의 신앙관을 배격하고 말씀중심의 개혁교회 신앙관을 확립하려는 데 집중되었다. 물론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중심 사상은 칼빈과 루터의 관점에 많이 의존돼 있었음은 자명하다.
요리문답이란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들로 일반적으로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교육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경우,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묻고,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모두 52장으로 구성돼 있다. 일 년이 52주이기에 매주 한 장씩 교회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계산 된 셈이다. 각 장은 여러 개의 세부 질문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도합 129개의 문항으로 작성돼 있으며, 총 700개 이상의 성경구절들이 증거본문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신경, 성례전, 십계명, 주기도문 등에 나타난 기본교리를 해설한 것으로‘서문(질문 1-2항), 제1부 :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질문 3-11항), 제2부 :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질문 12-85항), 제3부 : 우리의 감사에 대하여(질문 86-129항)'로 편집돼 있다. 본 요리문답서는 몇 차례에 걸친 종교회의를 통해 인준되었으며, 1619년에 도르트 의회에서 최종 인준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아담의 타락(창 2:17)과 구속(창 3:15)의 주제와 관련해 표기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란 용어를 명시적으로 구분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해당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제7문에서“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어디서 왔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우리의 첫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낙원에서의 타락과 불순종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행위언약’으로 해석하고 있는‘선악과 금령’(창 2:17)을 아담부부가 어김으로 불순종한 사실을 가리키는 내용과 본질상 동일하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계속해서 제9문을 통해“그렇다면 사람이 행할 수도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 가운데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너무한 것은 아닙니까”라고 질문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에 대해“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이 그것을 행할 수 있게 창조하셨으나, 사람이 악마의 시사를 따라서 기꺼이(고의로) 불순종함으로 자신과 그의 모든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제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이승구는 그의 하이델베르그 해설서에서 상기 본문에 기술된 답변대로 첫 사람 아담은 선악과 금령에 순종할 수 있는 영적 자질을 처음부터 충분히 갖고 있었음을 전제한다. 이승구는 더 나아가 아담이 선악과 금령에 의존해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망과 정반대인 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G. Vos의 Biblical Theology(성경신학)를 인용해 기술한다. 이승구의의 해석에 따르면 이런 사실에 대한 성례전적 증거(sacramental evidence)로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를 아울러 주셨다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에 대한 Heidelberg 요리문답의 답변과 이에 대한 이승구의 해설은 공히 선악과 금령이 자체 속에 처음부터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창조-타락-구속’이란 연속적인 언약적 주제들이‘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엡 1:4)약정된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미 잠재적으로 함축돼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면 불순종으로 인한 아담의 타락은 처음부터 고려되고 있었음을 아주 부인할 수 없다. 이남규는 그의 소논문에서 Heidelberg의 핵심 저자 중 한 사람인 올레비아누스가“시간 전 언약(영원한 구속언약) 개념을 통해 언약의 이중 혜택인 택자들의 죄를 속량할 것과 이에 근거해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킬 것을 성자가 보증했다”고 피력한다. 그렇다면 올레비아누스는 비록 성부와 성자 간의 시간 전 협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타락이 필연이 아니라 뱀의 시험에 따른 우연의 결과로 이해한 듯하다. 제9문에서“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이 그것을 행할 수 있게 창조하셨다”라고 답변함으로 이런 사실을 더욱 강력히 뒷받침해 준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이‘선(先) 언약과 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될 때,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성취시켜 나가는 방편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세상역사의 본질은 언약적 구속사이고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도구삼아 성취된다는 언약적/신학적 명제가 성립된다. 이처럼 창세전‘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 속에 내재된‘구속을 통한 죄사함’의 원리가 에덴동산이란 피조세계 속에서 뱀의 미혹을 통한 아담의 타락이란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합목적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롬 11:32-36; 8:2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행위언약에 불순종한 아담의 죄를 여자의 후손에 근거한 은혜언약을 통해 속량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과 관련해 제19문에서“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라고 질문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거룩한 복음으로부터입니다”라고 답변하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완해 설명한다. "이 거룩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처음 계시하셨고, 후에 거룩한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셨으며, 희생 제사들과 율법의 다른 의식들 속에서 미리 보여졌으며 마침내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 의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승구는‘낙원에서 처음 계시된 거룩한 복음'의 정체성을 창세기 3:15로 밝히면서 이를 Justin(AD160년경)이나 Irenaeus(AD180년경)를 따라서 원복음(Proto evangelium)으로 기술한다. 결과적으로 하이델베르그의 요리문답에 따르면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한 아담의 죄를 구속해 주시고 당초 계획대로 영생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 비상강구책(?)의 일환으로 여자의 후손이란 원복음의 카드를 마련해 주셨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언약의 기원과 출발을 창세전부터 연계시켜 총체적 관점으로 해석/적용시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이 자칫 상대화될 위험성이 상존한다. 이런 관점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이 아담의 타락을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이란 개념으로 수용하는 것은 자칫 변신론(theodicy)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일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선악과 금령과 여자의 후손에 담긴 언약적 정체성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근거해‘선 언약 후 성취’라는 구조적인 맥락 속에서 상호간 당위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성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면 신적 작정에 심각한 훼손과 폄훼현상을 빚게 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필연이 우연의 산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롬 11:36; 마 10:2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9문 답변에서 아담의 죄 문제 해결책과 관련해‘거룩한 복음’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여자의 후손에 담긴 원복음 외에 족장들, 선지자들, 희생제사와 율법의 다른 의식들을 통해 미리 보여졌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설명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이란 관점에서 구속계시를 예표와 실체라는 점진성의 원리에 근거해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사실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에 언약교리는 불링거와 올레비아누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 즈음에 행위언약이라는 개념도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을 인용해 기술하고 있는 Clarence Stam의 견해와,“올레비아누스는 언약신학의 실제적인 설립자”라고 Karl Sudhof의 말을 인용해 피력하고 있는 이남규의 평가에 적극 공감한다.
C. Belgic Confession(1561) :
이승구는 그의 벨직신앙고백서 강해에서“벨직 신앙고백서는 1567년 개신교회의 순교자로 소천한 Guido De Brs(1522-1567)가 1561년 당시 스페인의 천주교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Flanders와 화란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서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6년 Antwerp synod, 1571년 Emden synod, 1574년 Dort synod, 1581년 Middelburg synod에서 수납하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해인 1619년에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도르트 전국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하여 지금까지 화란 개혁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이다”라고 피력한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총 37조로 구성돼 있다. 그 중 제14조에서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부패와 관련해“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으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뜻에 일치되게 사람이 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이 영예로운 가운데 있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 자기의 탁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죄에 복종시키고 그 결과 죽음과 저주를 받게 되고 악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라고 기술한다. 14조는 계속해서 뱀의 미혹으로 인한 인간의 타락과 부패의 주된 원인을“사람이 받은‘생명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증언한다. 14조에서‘생명의 계명’이란 선악과 금령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고 있다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해설이나 행위언약으로 표현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해석과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
그러나 위에서 수차례 반복해서 지적한 대로 선악과 금령의 본의는 순종을 담보로 영생의 생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아담은 당시 비록 무죄자의 상태일지라도 본질상 흙으로 지음 받은 혈과 육을 소유한 자로서 자력으로 영생을 소유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고전 15:47-50). 위로부터 거듭나야한다(요 3:3). 이레니우스의 주장대로“아담은 불완전하고 미숙하게 피조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발전과 성장의 단계를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자력으로 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구속의 방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엡 1:4).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은 영생을 약속하기보다 타락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언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잘 부합된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된 언약적 선택사상은 죄로부터의 구속이란 원리가 전제됨으로 인간의 타락은 처음부터 예고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은 은혜성을 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로 주신 것이지 순종을 통해 영생을 약속한다고 보는 것은 계시의 비약일 수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17조는 14조에 기술된 인간의 타락과 부패의 해결책과 관련해 타락한 인간의 회복에 관해 피력한다. 17조는“우리는 우리의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놀랄 만한 지혜와 은혜로서 이렇게 육체적 및 영적 죽음에 떨어져서 자신을 전적으로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인간을 살펴보시고 자기의 목전에서 두려워 떨면서 도망칠 때에 즐겨 찾으시고 위로하시며 자기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실 분임을 믿는다”라고 선언한다. 17조에서“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실 분”이란 여자의 후손(창 3:15)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낙원에 처음 계시된 거룩한 복음’에 해당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은혜언약’을 의미한다.
D. 요약(Summary) :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으로 새롭게 재정립한 신앙지침서들로 신앙과 삶을 관장하는 제2의 규범으로 기능한다. 특별히 이들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 나타난 주요 언약에 관한 주제들을 살펴볼 때, 표현상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선악과 금령(창 2:17)과 관련해 벨직 신앙고백서(1561)에서는‘생명의 계명’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에서는‘행할 수 있게 창조되었다’(영생 암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에서는‘행위언약’으로 정초된다. 여자의 후손(창 3:15)과 관련해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뱀의 머리를 깨뜨릴 자’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처음 계시된 거룩한 복음’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은혜언약’으로 구체화된다.
상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선악과 금령(창 2:17)과 여자의 후손(창 3:15)에 담긴 언약적 의미와 관련해, 전자는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했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을 자초했고, 이에 대한 (불가피한) 해결책으로 후자의 약속이 추가적으로 주어지게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언약의 기원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신적작정/구속언약)에서 찾지 못하고, 선악과 금령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최초의 행위언약으로 설정하는 데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인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엡 1:4)란 선언 속에는‘선 계획 - 후 성취’라는 언약적 틀 속에서 창조-타락-구속-재창조란 연속적인 패러다임을 통해‘죄로부터의 구속’(엡 1:7)이란 사상이 처음부터 암묵적으로 내재돼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시사와 관련해 선(先)계획에 해당하는 에베소서 1:4-14과 후(後)성취에 해당하는 창세기 1-3장 사이에는 필연적인 언약적 상응성(correspondence)과 연속성(continuity) 및 상호 연계성(interrelation)을 갖게 된다.
Ⅳ.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언약에 대한 개괄적 이해
상기 내용을 통해 성경에 계시된 언약 사상을 초기 교부시대로부터 역사적 발전과 더불어 요약적으로 개괄해 보았다. 특별히 16세기 종교 개혁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던 언약적 용례들이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1647)에서 인간의 타락과, 타락한 인간의 회복과 관련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체화된 것은 언약개념의 괄목할만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화란의 신학 교수인 헤르만 위트시우스(Herman Witsius, 1636-1708)에 이르러 언약신학은 더욱 명료화된다. 위트시우스는 화란 교회 전체에게 개인적이며 신학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근원이 된 네 권의 중요한 책들을 썼다. 그의 네 권의 책들에는 다음과 같은 언약적 주제들이 담겨 있다. 1권은 행위언약, 2권은 구속언약, 3권은 은혜언약 그리고 4권은 서로 다른 시대들의 언약적 조례(regulations)들에 관한 것이다.
위트시우스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하나님과 인류의 머리인 아담사이에 체결된 협약(agreement)으로 정의했다.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에 근거해 순종을 조건으로 영원한 생명과 지복(felicity)을 약속하셨고 불순종에는 죽음을 경고하셨다고 피력한다. 위트시우스는 행위언약에 따른 긍정적/부정적 결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불순종했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해결책(은혜언약)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을 대신해 죄책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 대속물이 되어주시는 중보자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갈 3:13; 막 10:45; 롬 4:25). 이는 인간이 죽음의 선고 아래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해결책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위트시우스의 이런 관점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독립된 두 개의 언약으로 보지 않고, 언약의 연속성이란 관점으로 이해한 듯하다. 위트시우스의 이런 관점은 그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보여주는 은혜언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사이에 비준된 언약(구속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언약에 대한 그의 인식 속에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속언약을 은혜언약의 원형으로 본 듯하다.
위트시우스는 상기 그의 저서들에서 은혜언약이 무조건적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는 믿음과 거룩(성화적 삶)의 길을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믿음과 새로운 삶(성화적 삶)을 언약의 조건들로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이로 보건대 위트시우스는 구원과 언약의 개념을 본질상 동일시한 듯하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을 선택적 구원과 언약의 기원으로 삼을 때, 택자(구원)와 언약백성은 상호 교환적인 의미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즉 택자가 언약백성이고 언약백성은 택자의 정체성을 가진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체화되었던 언약개념은 위트시우스에 이르러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그리고 구속언약의 개념으로 진일보한다. 아울러 그의 언약개념을 통해 언약 간의 연속성과 상호 의존성이 어렴풋이나마 엿보이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A. Arthur W. Pink(1886~1952) :
Arthur W. Pink는 그의 저서 The Divine Covenants(하나님의 언약) 서문에서“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을지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언약들이 신적 계시의 여러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는“하나님이 인간을 취급하신 모든 것은 인간과의 언약적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A. W. Pink는 계속해서“이 언약들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 언약들이 신적 은혜의 계획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연결되는 여러 단계들을 이루고 있지만 그 언약들이 성경 속에 나열된 순서를 고찰해 볼 때, 그 언약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내 주는 계시과정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또한 그 언약들은 하나님 백성의 구속자에 의해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피력한다.
Pink는 언약의 특성과 관련해“만일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지혜라면 그의 계획은 하나여야만 하며, 영원해야 하며, 모든 것을 포괄해야하며, 불변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견지에서 모든 사물들이 하나의 조직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모든 지각의 분야에서 완전히 논리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다른 포괄적인 조직들 같이 언약 자체도 무한한 하부 조직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언약은 모든 섭리 과정에서 하나님이 사고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구체화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우리 눈 앞에 펼쳐 놓으신 하늘과 같은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신적 언약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전제 속에서 본질상 언약의 일원성, 영원성, 은혜성, 실현성 및 상호 불가분의 연계성과 연속성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언약의 연속성과 관련해 그의 저서‘하나님의 언약’제1장 영원한 언약(Eternal Covenant of Redemption)에서“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은혜로 구속하시기 위해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죄에 대한 대속물로 희생될 것을 창세전부터 작정하고 계셨다”는 천명을 통해 총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rthur W. Pink는 총체적인 언약의 개념을 영원한 구속언약(Redemption), 행위언약(Works), 은혜언약(Grace)의 관점으로 제시하면서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을 본질상 동일한 언약으로 간주해 크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이원화시켜 설명한다. Pink는 이런 그의 이중적 언약개념의 정립을 G. S. Bishop의 언약개념에 의존한다. Pink는 Bishop이“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단지 두 개의 언약만이 있을 수 있고, 이 두 언약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즉, 한 언약(행위언약)은 구원을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man shall do for the salvation)를 근거로 했고, 다른 한 언약(은혜언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What God shall do for man)를 근거로 했다. 다시 말하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그것이다”라고 Bishop의 저서 '갈라디아서에 계시된 은혜'(Grace in Galatians, p. 72)를 인용해 기술한다.
이로 보건대 Pink는 창세전에 수립된 영원한 (구속)언약이 피조세계에서 현실화될 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두 단계를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것을 인식한 듯하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Pink는 창세전 영원한 (구속)언약이 피조세계 속에서 여자의 후손(창 3:15)을 통해 최초로 선포되는 원복음이라고 증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독립된 두 개의 언약이라기보다는 본질에서 은혜언약 하나로 봐야 한다고 은혜언약 일원론을 주장했던 John Murray(The Covenant of Grace)의 견해와 일치한다.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행위는 은혜에 수반되는 열매이며 결과이다(약 2:22). 그러므로 은혜와 행함은 둘이 아니다. 본질상 한 몸이다. Arthur W. Pink의 언약사상을 그의 저서 The Divine Covenants(하나님의 언약)를 통해 요약적으로 살펴보자.
1. 영원한 언약(엡 1:4-6) :
Arthur W. Pink는 그의 저서 The Divine Covenants를 총 8장으로 구성하고, 제1장 영원한 언약에서부터 제7장 메시아 언약까지의 언약적 주제들을 비교적 순서대로 기술한다. Pink는 우선적으로 언약의 본질과 관련해 John Owen의 정의를 빌려“절대적으로 완전한 언약은 쌍방의 상호 관심이나 이익을 위해 그들 나름대로 어떤 일의 순서를 정하고 분배하는 것에 관해 쌍방이 자발적으로 계약하는 것(convention), 혹은 약정하는 것(pact), 혹은 동의하는 것(agreement)”을 말한다고 기술한다. Pink는 계속해서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구성 요소와 관련해“언약의 당사자들(the parties), 언약의 조약문(the terms), 의무적인 약속(the binding agreement) 등에 대한 상호 합의”라고 Black Stone의 말을 인용해 피력한다. 결국 Pink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시는 과정에서 언약을 계시전달의 방편으로 삼으셨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주체는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됨에도 불구하고 내용의 성격상 쌍무적(bilateral)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Pink는 영원한 언약이 창세전에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합의된 명백하고도 확실한 약속이라고 전제한다. 이런 사실은“인자가 작정된 대로 온다”(눅 22:22),“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등의 말씀을 통해 확증된다. 그는 영원한 언약 속에 담긴 약속들에 관해“중보자 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약속이 포함돼 있고. 그 대책의 능력 안에 그 아들이 수행해야 했던 사역에 대한 약속이 포함돼 있었다. 이 약속은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으며, 또한 그 아들이 자신을 죄에 대한 희생물로 내어주시며, 하나님 우편에 승귀 하실 것과, 그 아들이 교회와 교회를 위해 만물 위에 월등히 뛰어나실 것과, 그 아들이 나눠줄 수 있는 축복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이 영혼 구원을 위해 실행되어야 했던 범위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와 수난과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죽음 및 부활, 승천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성자 예수님의 합목적적인 대속사역의 전 과정을 기술하는 내용이다. 이런 관점에서 Pink가 언급하고 있는 영원한 언약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엡 1:4) 곧 그리스도의 구속사상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과 맥을 같이 하면서 세상창조와 인간의 타락이 자체 속에 이미 고려되고 있었음을 명백히 시사한다. 그러므로“영원한 구속언약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은 언약을 완성하셨고, 이로 인해 언약 안에서 정해진 모든 자들의 구원을 보증한다“는 Pink의 결론은 옳다.
2. 아담언약(창 2:17) :
Pink는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이해하며 이를 아담언약으로 기술한다. 그는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선악과를 먹는 것 자체가 죄 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에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되었다”고 피력한다. Pink는 계속해서 아담언약은 아담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근원적인 조건 속에서 타락할 수 있다는 가정에 의거해 맺어졌음이 분명하다고 전제한다. 여기서 근원적인 조건이란 창세전에 수립된 영원한 언약을 시사함에 틀림없다. 이는 바른 관점으로 보인다.
Pink는 아담의 타락의 가능성과 관련해,“첫째로 변덕스러웠거나 변하기 쉬운 존재였으며,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가변성과 피조성은 상호 연관되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둘째로 아담은 책임 있는 존재로 선정되었으며, 도덕적 대리자요, 자유의지가 부여된 자였기에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다고 피력한다. 셋째로 이상의 조건들로 인해 그의 피조적 완성들 안에서 영구한 위치가 주어지고 확립되기 전 필수적으로 시험에 놓여 져야만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피조적 완성들 안에서 영구한 위치가 주어지고 확립되기 전’이란 표현은 비록 아담의 처음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영원한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최종 목적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음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 아담은 비록 무죄자의 상태였을지라도 계속해서 보다 성숙되고 완성된 지복의 상태에 이르러야 될 여지가 남아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경지는 창세전 영원한 언약에 근거한 둘째 아담의 구속을 통한 중보적 사역을 통해 은혜의 방식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지 행위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을 통한 보상과 대가의 개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Pink가 아담언약을 영원한 언약에 근거해 해석하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방식(타락)을 통해 암시적으로 약속된‘행복의 최대치’에 이르는 길을 순종을 조건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ink는 아담이 미래지향적으로 소유해야 할‘행복의 최대치’와 관련해“그 약속은 언약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요소로 언약이 성취되었을 경우 보장되었던 상급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지는데‘네가 먹는 그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란 말씀이 반대 현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즉‘만약 네가 먹지 않으면 확실히 살 것이다’란 말씀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먹는 결과로 오는 죽음의 위협은 순종에 대한 생명의 약속을 확증해 준다”고 강변한다.
아담언약에 대한 Pink의 견해는 선악과 금령에 내재된 하나님의 본의를 창세전 영원한 언약과의 상호적 연계 속에서 해석하는 탁월함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전통적인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적 관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Pink는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이 소유한 생명의 정체성을‘영적인 생명’으로 간주한다. 그는 아담언약의 성격을 시험적 언약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담의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가 아담이 이미 소유한 영적 생명을 지속하느냐 혹은 상실하느냐를 결정하는 척도로 기능했다고 주장한다. Pink는 계속해서“아담이 언약의 조건에 응했다면 그는 그의 피조적 위치에서나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리고 그의 창조주와의 교제와 지상 낙원의 행복한 상태에 있어서 확고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피력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정리하면, Pink는 성자의 중보적 사역에 근거해 성부와 성자 간에 맺어 진 영원한 언약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 아담의 범죄와 타락을 이미 예고된 사건으로 전제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아담의 순종을 담보로 미래지향적인 지복의 상태를 약속했다고 강조하면서 이를‘행복의 최대치’란 표현으로 기술한다. 이는 양자 간에 논리적 모순이 발견된다. 영원한 언약에 근거해 인간의 타락이 전제되었다면 아담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는 아담의 순종보다는 불순종을 의도하셨다고 보는 것이 논리의 정당성과 언약의 연속성의 원리에 타당하지 않겠는가.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율법은 생명을 약속할지라도 그 생명을 실제로 줄 수 없음으로 결과적으로 중보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역설의 논리를 강조한다(신 4:1; 갈 3:12; 3:21-24).
아울러 Pink는 타락 전 아담의 생명의 정체성을 이미 영적 생명으로 간주하면서 아담이 언약에 순종했었다면 지복의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 생명을 확고하게 소유할 수 있었을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아담의 생명의 정체성과 관련해 성경은 아담의 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호 대비시키는 가운데 아담은 땅에서 난 자요 흙에 속한 자로서 신령한 자가 아니며, 나아가 흙에 속한 자의 특징인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피력한다(고전 15:42-50). 이는 아담의 처음 생명이 신령한 몸이 갖는 불멸의 영적 생명이 아니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는 방식으로 신령한 영적 부활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아담은 영원한 언약 속에 이미 작정되었던 타락을 통해 죄인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의 공효를 덧입음으로 비로소 영적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ink가 영원한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첫 번째 사건을 여자의 후손(창 3:15)에 연결시키면서도 이 과정에서 아담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를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타락의 당위성보다 순종에 대한 보상 개념을 강조한 것은 언약의 상응성과 연계성이란 특성상 모순된 관점이다. 창세전 영원한 언약과 창세기 1-3장 사이의 언약적 패러다임은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논리적/신학적/언약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 안에서 첫째 아담의 타락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 사건으로 간주된다(롬 11:32).
3. 노아언약(창 9:1-2; 8-10) :
Pink는 물 심판(창세기 7장) 후 인류와 피조물들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노아언약으로 표기하면서, 이를 아담과 맺으셨던 행위언약과 대비시켜 은혜언약으로 기술한다. Pink가 노아언약을 은혜언약으로 명칭 한 것은, 창세전 영원한 언약에 약속된 성자의 중보적 사역의 공효가 여자의 후손(창 3:15)을 통해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될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Pink는 이런 사실을“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하는 기반 위에서 축복을 받았다”라고 기술함으로 우회적으로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노아언약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근거해 은혜언약으로 정당화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여자의 후손(창 3:15)에 대한 은혜성의 약속을 행위언약에 실패한 아담의 범죄를 구속하기 위해 맺어 주신 은혜언약(여자의 후손언약)으로 정립하지 않은 채 지나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창세기 1-3장의 언약적 문맥 속에서 노아언약이 은혜언약으로 증거 되기 위해서는 아담언약(행위언약)을 어김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속해 주신다는 사실이 전제된 데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아언약이 인간과 전체 피조물의 보존을 약속하고 있다(창 9:8-10)는 사실에 근거해,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대상은 인간과 피조물까지를 포함해 전우주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엡 1:9-10; 롬 8:19-22). 이는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건설의 정체성이 완전 재창조(neos)가 아니라 첫 창조의 연속선상에서 그것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갱신(kainos)에 의한 재창조 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여자의 후손(창 3:15)의 구속 사상에 근거해 노아언약이 인간과 만물의 보존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주셨던 소위 문화명령(창 1:28)의 내용이 본질상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명령 자체가 처음부터 언약의 성격을 띠고 주신 것임을 간접적으로 추론하게 된다. 복(beraka)과 언약(berith)은 어근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언약의 내용이 복이고 복을 언약의 방식으로 약속하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이 후에 아브라함 언약이란 내용으로 기술되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창 12:1-3; 17:1-8).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인간과 최초로 맺어 주신 언약은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아담언약(행위언약, 창 2:17)이 아니라, 은혜성을 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영원한 구속언약(엡 1:4-6)이 은혜언약의 원형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최초의 가시적인 열매 또한 피조세계 속에서 은혜성의 언약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4. 아브라함 언약(창 12:1-3; 17:1-8) :
Pink는 아브라함 언약 체결의 배경을 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맺어 주신 이후 아브라함의 출현 때까지 성경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두 가지 사건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은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계시성을 띠면서 아브라함 언약 체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창세기 9:25-27에 기술된 노아의 미래지향적인 예언의 내용이다. Pink는 노아의 예언 속에서“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9:26)라는 표현은 셈의 후손들을 신적 축복이 넘쳐흐르는 여호와 후손의 계통으로 선택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여자의 후손(창 3:15)의 계보가 노아를 통해 그의 세 아들 중 셈에게로 연결 될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근접 문맥을 통해 셈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를 것을 암시한다(창 11:10-26). 또한 Pink는“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케 하실 것이며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다”(창 9:27)란 예언은 일차적으로 야벳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매우 거대한 영토를 주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며, 이어서“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다”란 후반부의 예언은“이 예언을 신약의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구원이 유대인에게로부터 이방인에게로 흘러들어간다고 하는 다른 표현을 써서 설명한다.” Pink는 계속해서 상기 예언과 관련해 로마서 11장 11절 이하를 인용하면서“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도 구원의 참여자가 되어야 했다. 셈 홀로 실제적인 뿌리와 줄기가 되지만 그들의 나무에 이방인들의 가지가 접붙여져야 했다”라고 피력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후에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란 말씀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기술한다.
둘째로 노아의 물 심판 이후 그의 세 자녀들로 인해 생육하고 번성한 인류가 총체적인 배도와 반역사건을 일으켰던 바벨탑 축조사건이다(창 11:1-4). 바벨탑 축조사건은 물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친히 목격하고 그 기억을 생생하게 갖고 있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당시 살아 있었던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데 더욱 충격적일 수 있다. 죄의 왕 노릇하는 권세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인격을 파괴시켜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지간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내용이다(창 3:15). 그런 의미에서 바벨탑 사건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이 연대해 하나님을 적극 대적하는 가운데 인간정부 곧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이 총체적으로 분출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창세기 저자는 바벨탑 축조사건의 동기를“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란 표현 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본문에서‘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제2의 물 심판에 대비한 자구책을 마련하겠다는 악의적인 저의의 표출이다.‘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배역행위에 해당한다.‘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은 과거 뱀의 미혹에 대한 적극적인 동조사상으로 하나님과 동등해 보려는 극한 지존사상의 발로로 해석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벨탑 사건은 과거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했었던 사단의 궤계가 보다 광범위하게 전 인류를 충동해 사단제국의 정체성을 띠면서 거국적으로 재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노아의 예언과 바벨탑 축조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계시성의 정체성은 노아의 예언과 관련해서는 여자의 후손의 계보가 셈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연결될 것으로, 바벨탑 사건과 관련해서는 사단왕국에 대립되는 신정왕국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신묘불측한 의중이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언약은 여자의 후손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그동안 창세기 4장-11장을 통해 초기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암시적이며 은닉적으로 진행돼 오던 것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보다 구체화되고 명시화됨으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Pink는 아브람의 조상들이 우상 숭배자들이었다(수 24:2)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브라함을 선택적으로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어주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산물임을 강조한다.하나님의 선택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엡 1:4-6).
아브라함 언약의 주된 내용은 창세기 12:1-3과 17:1-8에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특별히 창세기 12:1-3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메시아가 나올 것을 약속하고 있다고 Pink는 강조한다. Pink는 선악과 금령(아담언약/행위언약)을 어긴 아담의 죄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속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누구의 혈통을 통해 구체화될 것인가와 관련해 아브라함의 혈통 안에서 출현하게 될 것을 약속해 준다고 기술한다. 이런 사실은“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란 약속의 말씀이 첫째로“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 3:17)란 말씀과 연관돼 피조물의 회복을 암시하며,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택자들의 구속을 시사하는 것으로 Pink는 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Pink는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을 두 방면으로 해석해 아브라함이“자연적인 자손과 영적인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고 피력하면서“우리가 문맥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성령께서 그 두 자손들 중에 간섭하시고 계심을 단정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Pink는 계속해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갈 3:6상)라고 말씀하셨기에, 이 사실로부터“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아라”(갈 3:6하)는 결론이 도출 된다고 해석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아브라함에게 맺어 주신 약속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좇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그의 영적 후손들에게 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고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들이 아닌 것이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에 편입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마엘과 에서는 저들이 비록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의 기업과는 처음부터 무관한 자들로 존재했을 뿐이다(갈 4:30-31; 롬 9:6-13). 가나안 땅 또한 하늘나라의 상징이었다(히 11:8-16).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은 각각 이중적으로 성취될 것이 확실하다.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즉 문자적이고 영적인 방식으로 성취될 것이다.
5. 시내산 언약(출 24:1-8; 19:5-6) :
Pink는 시내산 언약을“먼저 체결된 모든 언약들과 관련하여 고찰해야 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그 언약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셨던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계시와 관련하여 고찰돼야 한다”고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는 언약의 연계성과 통일성을 강조하는 지적이다. 언약의 기원과 발생이 창세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비롯되었음을 고려할 때 Pink의 관점은 옳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들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상호간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시내산 언약의 정체성과 관련해 Pink는“시내산 언약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점진적이며 진보적인 계시의 일부로서 고찰해 보았을 때,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결정적인 진보이며 또한 기독교를 준비하는 가장 적절한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라고 피력한다. 이는 시내산 언약을 일컫는 율법의 본질적인 용도가 정죄와 심판의 불가피성을 강조함으로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tutor)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갈 3:23-24; 롬 3:19-20). Pink는 이와 관련해“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자연적이고 영적인 목적들을 촉진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보충적이고 보조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피력한다. 그러므로“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생명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생명을 지시하는데 있었다. 시내산 언약의 직접적인 의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그들이 선택된 세대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서로 서로를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방법을 명백히 해주는 것이었다“라고 강조한다.
반면에“시내산 언약을 그 자체만 따로 떼어서 고찰해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직접적인 사용을 위해 하나님이 예정된 통치 체계를 부여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Pink의 또 다른 관점이다. 그러므로“시내산 언약은 한 민족에게 축복을 선언한 것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거절하고 그의 율법들을 업신여긴다면 민족적인 저주들과 재난들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들 전체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Pink는 피력한다. 이런 사실은 율법으로 통칭되는 시내산 언약의 일차적인 기능이 은혜와 행함이란 상호 불가분의 원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셨음을 의미한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십계명의 수여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이루어진 출애굽 구원사건을 전제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거해 준다(출 20:1-2). 그러므로 순종은 축복을 보증하지만 불순종에는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띤 다양한 저주와 화가 임할 것을 경고한다. 후에 통일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722)에, 남유다는 바벨론(586)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게 되는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Pink는 시내산 언약(율법)에 근거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언급하면서“그 나라는 순전히 일시적이며 외부적인 나라이었고,‘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은’(히 7:16) 조직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그 나라에 관한 영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나라의 상징적 특성 속에서 관찰해 볼 때, 그 나라는 영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만 보면 그 나라는 단지 일시적이며 지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성문법에 의해서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려 하지 않으셨다”고 기술한다.
이스라엘은 언약적 구속사 진행과 관련해 계시의 도구로 선용되기 위해 한시적으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 받은 민족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들의 실체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원리를 좇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아브라함의 참 후손들이다(갈 3:7-9, 29). 시내산 율법은 순종을 조건으로 다양한 복과 의와 생명을 약속하지만(갈 3:12) 실제로 복과 의와 생명을 주지 못한다(갈 3:21). 그러므로 율법은 죄인을 복음에로 인도하고 복음은 믿음으로 죄인을 의인되게 한다. 이와 관련해 Pink는“율법은 가장 확실한 은혜로운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할 순종의 영적 범위와, 그들이 관계했었던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의식을 명심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 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수많은 죄와 죄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하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의 대책들을 이용하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거나 신적 진노를 피하는데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려는 목적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도록 한다“고 시내산 언약에 담긴 율법의 정체성을 해석했다.
6. 다윗언약(삼하 7:11-16) :
Pink는“구약에 기록된 여러 언약들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이 진전되어가는 중요한 단계들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피력한다. 이런 이유로 "언약과 역사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각각 서로를 조명해 주기 때문에 언약에 대한 어떤 지식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라고 기술한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이‘선(先) 언약-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될 때,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과 무대로 선용된다. 즉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는 세속사를 방편과 도구삼아 진행된다. 일례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수(稅收)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호적등록의 영을 내렸다(눅 2:1).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북쪽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부터 남쪽 고향 땅 유대 베들레헴을 찾아 먼 길을 여행해야 했다(눅 2:4-5).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낳아 사관(舍館)의 구유에 뉘었다. 이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던“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란 말씀의 성취이다. 이런 식으로 신적 예언과 언약은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때가 찰 때에 반드시 성취된다.
다윗언약은 달리‘왕국언약’으로도 부른다.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통해 다윗의 위를 영원히 보장해 주심으로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굳게 약속해 주시기 때문이다(삼하 7:11-16). Pink는 다윗언약에서 언약(berith)이란 용어가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다고 언약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일부 논적들의 지적을 궤변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상기 본문이 다윗과 맺으신 다윗언약이란 사실은 다윗 자신의 선언을 담고 있는 삼하 23:5(영원한 언약),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에 관해 솔로몬에게 친히 언급하신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하 7:17-18(네 아비 다윗과 맺은 언약) 및 시 89:1-4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증할 수 있다고 Pink는 강변한다.
Pink는 다윗언약 또한 앞 언약들과의 관련 속에서 문자적인 중요성과 영적인 중요성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Pink는“사무엘하 7:13-16에서‘영원히’란 말씀을 세 번 언급한 것을 통해 그 약속들이 궁극적으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다윗의 자연적 후손의 범위를 초월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진정 이스라엘의 보좌 위에 다윗의 육적인 후손을 세우셨고 그의 왕국을 확립하셨지만, 모든 후손들에게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이 왕권에 대한 언약은 다윗에게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자신의 후손 중 한 사람에 의해 그의 보좌가 점유되리라고 보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대해 왔던 사람들은 반박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런 사실을 반박한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을 솔로몬에서 물려준다. 솔로몬은 왕권을 르호보암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르호보암에게서 온 이스라엘에 대한 다윗계통의 통치는 사실상 영원히 중단되었다”고 피력한다. 르호보암 이후 통일이스라엘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분열이스라엘은 후에 앗수르(북이스라엘)와 바벨론(남유다)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한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고토로 귀환했으나 다윗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다윗의 왕조는 더 이상 가시적으로 지속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다윗언약에 담긴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더욱 확고히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하고 있는 아들의 이중적 정체성(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은 후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통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선언한다(롬 1:3-4). 다윗의 임종시 다윗은 솔로몬에게“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4)고 유언한다. 그러나 다윗의 유언 또한 르호보암에게서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윗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의 본의는 역사적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간직한다. 다윗의 유언의 온전한 성취는 다윗의 참 아들로 오실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성취될 것이다(눅 1:30-33). 따라서 다윗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의 본의는 역사적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Pink는 다윗언약의 정체성의 본의를 정리하면서“다윗언약의 약속들은 근본적이고 하부적인 부분들에서 솔로몬과 그의 직계 후손들과 관련되지만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과 관련 된다”고 해석한다. Pink는 이런 사실을 사무엘하 7:18-25의 내용을 주해하면서“다윗은 이미 다윗언약에 담긴 영적 본의를 미래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었다”고 기술한다. 특별히 사무엘하 7:18-21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Pink는“다윗은 영적으로 솔로몬이 아닌 다른 아들을 바라보았고, 돌과 나무로 세워진 성전이 아닌 다른 성전을 보았으며, 그의 보좌가 위치한 지상왕국 배후에 있는 다른 왕국을 보았다. 다윗은 자신이 시온산에서 받았던 왕홀(royal scepter)과 왕관이 단순한 상징들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밝힌다. Pink는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야 할 모든 약속들을 이해했다는 사실을“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삼하 7:21)란 말씀에 근거해 설명한다. Pink는 상기 본문에서‘주의 말씀’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나 기록된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격적인 말씀(요 1:1)인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Pink는 다윗이 당시 다윗언약에 함의된 하나님의 본의를 미래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왕국과 연관시켜 통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을 시편 89:1-4에서 찾는다. Pink는 이런 사실에 대한 증거를 베드로가 다윗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삼하 23:2) 말한 시편을 복음의 빛 안에서 해석하는 내용을 통해 확인시킨다.“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행 2:30).
그러므로 Pink는 피력하기를“시편 89편은 사무엘하 7:4-17에 대한 해결책이다. 시편 89편은 우리에게 다윗언약의 본의를 알려줄 뿐 아니라, 선지서에서 사무엘하 7:4-17과 관련이 있는 말씀들의 해석을 결정해 준다. 다윗과 맺어진 왕권언약이 그의 혈통과 그를 통하여 난 모든 그의 후손의 아비인 다윗과 맺어진다. 그리고 다윗을 위하여 은혜언약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과 맺어졌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택자들로 구성된 신약의 교회공동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신정왕국(Theocracy)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표상한다.
7. 메시아 언약 :
Pink가 말하는 메시아 언약은 메시아 언약의 정체성을 함의하고 있는 원초적인 약속(창 3:15)의 씨앗으로부터 발아돼,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렘 31:31-34; 겔 36:25-27)과 이의 구체적인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마 26:26-28, 눅 22:20; 고전 11:23-26)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Pink는“메시아 언약을‘새’(New) 언약으로 부르는 것은 그 내용이 옛 것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전에 있었던 모든 것의 성취요 확증이며 구약의 모든 것이 신약의 본질에 대한 예표요 상징을 닮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새것이라 호칭된다”고 기술한다.
메시아 언약(새 언약)사상과 관련해 Pink가 새 언약의 씨앗(seed)을 여자의 후손(창 3:15)에서 출발시키면서 이를‘원초적인 약속’으로 표기한 것은 괄목할만하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표기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여자의 후손을 은혜언약으로 대비시켜 기술할 뿐이지 이를 여자의 후손언약으로 구체화시켜 기술하지는 않는다. 물론 Pink는 그의 저서 The Divine Covenants(하나님의 언약)에서 자신의 언약적 주제들을 창세전 영원한 언약으로부터 순서대로 논술하는 과정에서 아담언약(행위언약)에 이어 여자의 후손언약에 대한 언급 없이 노아언약(은혜언약)으로 건너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언약과 관련해 여자의 후손을‘원초적인 약속’(primitive covenant)으로 기술한 것은 언약사상의 관점에서 해석상의 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근거한 메시아 언약의 설명에서 Pink는 이스라엘이란 명칭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들이 아닌 영적 후손에 관계되었다고 피력한다.“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롬 2:28-29)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라고 로마서 기자가 단언할 때, 이는 저자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들 모두가 다“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6)에 속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Pink는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기자는 보다 구체적으로“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제한함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들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와 직결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의 혈통적 후손들로 형성된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신약의 교회공동체인 사실이 확인된다(엡 2:11-16).
Pink는 성경에 기술된 메시아의 새 언약 사상의 정체성을 언급하면서“광범위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거룩의 상태와 과정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정화와 결과적인 보존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약속들”로 정의한다. Pink는 이 약속들을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히 8:8-12)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통해 네 가지로 요약해 기술한다. 첫째, 여호와께서 그리스도가 대속하려는 자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리라는 선언이며 이는 저들의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둘째, 여호와께서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보증 안에서 그들 모두의 필요에 대한 공급이 절대적으로 보증된다. 셋째,“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히 8:11)는 말씀을 통해 성육신하신 성자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충만하고 완전한 계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대부분 희미하고 연약하게 이해되어졌을 뿐이며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다수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결코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호 6:1-6). 이 점에서 새 언약의 탁월성이 강조된다. 넷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다시 기억치 않으시며 불의를 긍휼히 여겨주신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저들의 죄를 온전히 제거시켜 주실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까지를 내포한다. 레위 제사장들에 의한 속제제사를 통해서도 죄사함의 역사는 가능했으나 해마다 반복해야 했음으로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효력만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永)단번(once for all)의 속죄제사는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해주셨다(히 10:11-18).
Pink는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완벽한 순종을 기독교인들에게도 요구하신다고 기술한다. 물론 이 순종은 은혜에 수반되는 자율적 순종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수혜자(receiver)가 시혜자(giver)에게 마땅히 행할 본분과 도리이지 보상과 대가의 개념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의 심정의 발로이며 표출이기 때문이다(요 14:15; 눅 17:10). Pink는 이런 사실을 아담의 행위언약(창 2:17)과 메시아 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의 차이를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한다.
첫째, 행위언약과 메시아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의 의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는 칭의를 위해 율법적 순종을 요구한다고 피력한다. 후자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근거해 전가된 칭의를 받은 자로서 감사의 마음과 영광 돌림의 표현으로 순종한다는 것이다. Pink는 선악과 금령이 아담과 맺으신 독립된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복)로 맺어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요구하는 자율적 순종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듯하다. 사실상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들은 그 원천과 원형과 기원이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근거하기에 언약 상호간 불가분의 연계성과 연속성을 가지며 동시에 은혜성을 띠는 가운데 자율적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을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으로 간주하고 이를 순종의 대가로 얻게 될 칭의와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본의를 이탈한 관점으로 여겨진다. 선악과 금령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과 칭의를 보증하지 않는다. 은혜로 맺어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에 의존되고 종속돼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더구나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된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란 주제와 관련해 해석할 때, 오히려 아담의 타락(불순종)이 논리적/신학적/언약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 않으면‘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란 주제 속에 담긴‘구속을 통한 죄사함’이란 사상은 처음부터 허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둘째, 순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에 차이가 있다는 견해이다. 아담의 행위언약에서 순종은 자력에 의한 순종임에 반해 메시아 언약에 근거한 순종은 성령의 의한 타력적 순종이란 관점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죄성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능력의 원천으로 기능함을 고백하게 된다(행 17:28; 고전 15:10).
셋째, 순종의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Pink는 행위언약에서는 실패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에는 희생도 중보자도 없었기 때문에 완전하고 영원한 순종을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반면 새 언약에서는 온전한 순종 요구에 실패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공로에 의해 죄 값이 완전히 보상되기에 불완전한 순종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한 도리와 본분의 심정으로 표출되는 성실한 순종은 그것이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피력한다.
Pink는 신적 언약의 상호 연계성에 대해 한편으로 이해하는 듯 보이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분리시킴으로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언약의 상호 연계성과 상응성이란 관점에서, 창세전 영원한 구속언약(엡 1:4-6)은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언약적 세 주제들과‘선 언약 - 후 성취’라는 맥락에서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는다. 다시 말해 창세전‘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언약적 선택’(엡 1:4)이란 주제는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창조-타락-구속’이란 언약적 주제들을 이미 창세전부터 자체 속에 함축하고 있다는 관점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과 이로 인한 구속은 선악과 금령(창 2:17))과 여자의 후손(창 3:15)을 통해 에덴동산에서부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가운데 주도면밀하게 계획되어진 필연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작정과 무관하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우연히 주도된 세속적인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수립된 구속의 경륜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성취시켜 나가시는 과정에서 세상역사를 방편과 도구 삼으신다. 이런 관점에서 뱀의 미혹으로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의 타락사건은 이를 반전시키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더불어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시키시는 계시사의 절정을 보여준다(롬 11:32-36).
B. Geerhardus Vos(1862-1949) :
G. Vos의 Biblical Theology : Old and New Testament(1948)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이승구에 의해‘성경신학’으로 번역돼 1985년에 첫 출간되었다. 필자는 본서의 내용 중, 본 연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제3장‘전(前) 구속적 특별계시의 내용’(행위언약)과 제4장‘첫 구속적 특별계시의 내용’(은혜언약)을 중심으로 Vos의 언약적 구속사상을 피력하려고 한다.
G. Vos는 타락하기 전 아담은 무죄자의 상태로서 도덕적으로 완전히 선하게 피조되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아담의 이런 상태가 범죄와 타락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된 상태인 지의 여부와 관련해 Vos는 이를‘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험의 상태’(a state of indefinite probation)로 표현한다. Vos의 이런 관점은‘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고 말하는 완전한 선한 상태는 더 이상의 진보가 필요 없는 완전한 성숙과 완성의 의미는 아니란 견해로 해석된다. 그러므로‘완전한 선의 상태’와 ‘확정되지 않은 시험의 상태’란 묘사는 상호 모순처럼 보일지라도, 확정되지 않은 데로부터 확정된 선과 축복에로의 진보를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Vos는 피력한다. 여기서 Vos가 시사하는 확정된 상태(a definite state)란 선과 축복 등을 더 이상 잃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 더 이상 범죄 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 그래서 더 이상 죄의 결과에 종속될 필요가 없는 지복과 의의 상태를 말한다.
결국 타락 전 아담의 상태를 해석하는 Vos의 관점은 비록 아담이 무죄자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시험과 죄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완전자의 상태는 아니며, 지속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완전과 의와 생명의 상태로 진보해야 할 과정에 위치해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필자는 Vos의 이런 관점에 일차적으로 동의한다. 그의 통찰력은 예리하고 심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Vos가 이런 지복과 영생과 의의 상태에 이르는 방도를 하나님의 선의적인 시험(not temptation, but probation or test)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Vos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의적인 시험(probation)에 담긴 본의는 아담의 적극적인 순종을 가리킨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이 지향하는 전통적인 해석적 관점과 본질상 맥을 같이 한다. 즉 선악과 금령은 불순종에 죽음이 형벌로 약속되었듯이,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과 의와 지복을 보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아담이 뱀의 미혹에 빠져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당초 계획하셨던 지복의 상태에서 배제된 채 하나님과 원수관계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Vos는 타락한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처방책으로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을 기꺼이 따른다. Vos가 제4장의 제목을‘첫 구속적 특별계시의 내용’으로 표기한 데는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방도로‘여자의 후손’(창 3:15)을 약속하고 있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은 선악과 금령과 여자의 후손의 관계를 각각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독립시켜 개별적으로 취급함으로서, 당초 하나님의 의도(순종을 통한 영생과 지복을 보증)에서 빗나감으로 실패한 아담을 구제하기 위해 비상강구책으로 여자의 후손을 통한 은혜언약을 서둘러 수립한 것으로 문맥상 이해된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상대화된 느낌을 아주 배제할 수 없다.
G. Vos는 제4장을 통해 여자의 후손과 관련된 첫 구속적 특별계시의 내용을 기술하면서 구속(redemption)이란 용어를 선취적(preoccupied)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Vos는 구속이란 용례가 모세시대(속죄제) 이전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피력한다. Vos는 여자의 후손 예언 속에 세 가지 저주가 담겨 있다고 기술한다. 첫째, 뱀에 대한 저주에는 뱀과 그의 후손에 대한 승리의 약속이 있다. 둘째, 뱀은 여인의 씨가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도록 배로 기어 다니는 저주를 받는다. 셋째, 반면에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인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과 관련해 Vos는 개인적이며 집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뱀의 후손이 집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전제로 피력한다. 다시 말해 여인의 후손 예언 속에는 두 후손들이 복수적인 개념으로 대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후손과 뱀 또한 개인적이며 단수적인 개념으로 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인의 후손을 단수적으로만 해석해 메시아의 대한 예언과 약속으로 한정시켜 배타적으로 적용시키려는 태도는 타당하지 않다고 Vos는 주장한다. 구약 계시는 개인적인 메시아 개념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이 Vos의 관점이다. 필자는 Vos의 이런 해석적 관점에 절대 동의한다.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점진성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예표와 모형적 계시를 실체화시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다. 일례로 아담은 여자의 후손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수납함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의 실체(그)가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창세기 저자는 여자의 후손 약속에 담긴 대속사상이 아브라함 당시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계시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과정에서“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란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본문에서 전반부는 여자의 후손언약과 관련되고, 후반부는 이삭의 번제사건과 관련되고 있음을 문맥의 정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G. Vos는 그의 저서를 통해 에덴동산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논술함에 있어서 상당 부분을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의존한다. 다만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행위언약(창 2:17)과 은혜언약(창 3:15)과 관련해 용례상의 문제로 야기될 수 있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성경의 해당 사건에 근거해‘전 구속적 특별계시와 첫 구속적 특별계시’란 표현을 선용한다. 그러나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와 관련해, 전자를 순종을 조건으로 완전한 선과 의와 지복의 상태와 연결시키고, 후자를 예상치 않은 전자의 실패로 인해 불가피하게 급조된 비상강구책의 일환으로 해석한다면,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과 여자의 후손에 담긴 언약적 구속사의 본의를 해석하는 Vos의 관점 또한 종전의 개혁주의 견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Vos에게서 성경신학(언약적 구속사관)의 원천이며 기원인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이 크게 그리고 우선적으로 강조되거나 전제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성경에 계시된 제반 신적 언약들은 점진성과 연계성으로 상호 간 밀접하게 결속돼 있기에 그 기원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협약된 영원한 구속언약(엡 1:4-6)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C. S.G. De. Graaf(1889-1955) :
필자는 총 4권으로 구성된 De. Graaf의 저서 Promise and Deliverance(약속과 구원) 중 제1권 From Creation to the Conquest of Canaan(창조로부터 가나안 정복까지)의 제1장‘천지창조’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언약사상을 요약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Graaf는 창세기 1장의 중심 주제를‘하나님의 은총의 왕국’(The Kingdom of God's Favor)으로 표기한다. Graaf는 은총(favor)과 은혜(grace)를 구분해 사용한다. 특별히 은혜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자(죄인)에게 베푸시는 은총(favor) 곧 호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Graaf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만물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창조의 의미를 인간을 영광스럽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한다. 인간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돼 있는 존재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므로 모든 일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며 본분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세상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영광 구현과 수납에 집중된다. 이런 사실은 Graaf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을 인정하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서 비롯된 관점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Graaf는“하나님의 왕국은 만물이 인간에게 복종되어지는 왕국인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께 자발적인 순종으로 복종하는 왕국으로 묘사될 수 있다”고 피력한다. Graaf는 후에 이 땅의 왕국은 첫 아담의 타락으로 붕괴되어지지만 둘째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회복되어진다고 기술한다.
Graaf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 행위언약으로 부르는 선악과 금령(창 2:17)을 아담이 범죄로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언약이란 사실에 근거해 이를 은총의 언약(The Covenant of God's Favor)으로 표기한다. Graaf는 언약이 없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와 사랑과 믿음의 교제도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인간에게 결속시키는 수단이며 방편으로 기능한다.
Graaf는 선악과 금령을 일반적으로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으로 간주하는 것과 관련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특별히 Graaf는 행위언약이란 표현이“마치 영생이 인간의 봉사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처럼 선행에 대한 상급으로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Graaf는 선악과 금령이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행위언약으로 간주하기보다‘은총의 언약’으로 명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으로 피력한다. 선악과 금령에 대한 Graaf의 이런 관점은 종전의 대다수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 표명과는 상당히 대조를 이룬다. Graaf는 은총의 언약(선악과 금령)의 성격을 시험적 명령(probationary command)이 담긴 언약으로 해석한다. Graaf는 그 이유를 언약이 요구하는 자발적인 순종(conscious obedience)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Graaf의 견해에 따르면, 선악과 금령에는 처음부터 불순종에 따른 형벌로 죽음이 선고되는 것을 통해 자율적인 순종을 요구했을 뿐,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 의, 지복의 상태 등을 보상과 상급의 개념으로 약속하고 있지 않음을 피력하는 셈이다. 필자는 Graaf의 이런 관점에 적극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raaf가 선악과 금령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를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근거해 언약적 연계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논증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Graaf는 창세기 3장의 제목을 타락(The Fall)이라고 정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은혜의 언약(The Covenant of Grace)으로 부른다. 타락사건을 강조하다보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약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辯)이다. Graaf는 창세기 3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은혜로써 그것을 물리치시고 정복하셨는지를 보여주신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락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피할 수 있다고 피력한다.
Graaf는 인간의 처음 범죄와 관련해 사단이 뱀을 도구로 사용해 하와를 미혹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시험을 인간에게 허락하셨다고 기술한다. 이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허용적 작정이란 의미와 본질상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하나님의 신적 작정 속에 이미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선악과 금령에 근거한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허용과 허락의 산물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과 신학적 상응성 및 언약적 연계성이 보증된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허용적 작정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나 창시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인간의 변신론적 시도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창조자의 특권상 책임적 존재가 아니시다. 모든 일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실 수 있는 절대 주권자이시다(롬 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시다. 로마서 기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는 토기장이의 권한의 비유를 통해 그 정당성을 논증한다(롬 9:20-21). 아울러 토기장이의 권한이 불의일 수 없듯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근거해 행동하시는 모든 일이 불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롬 9:14)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하다는 게 성경의 증언이다(롬 8:28).
Graaf는 범죄한 아담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맺어주신 것을 가리켜 은혜의 언약으로 표기한다. Graaf는 은혜의 언약을 설명하면서“한 인간(a Man)에 의해 사단은 정복될 것이다. 한 사람 아담이 처음 세상을 멸망시켰던 것처럼 또 다른 한 사람이 세상을 다시 세우게 될 것이다“라고 피력한다. Graaf는 계속해서“이러한 목적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사단사이에 유대관계를 끊어버리시고 원수관계로 대치시키셨던 것이다. 인간을 다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멸망시킬 한 언약을 인간과 맺으셨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단 사이의 적대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비록 계속해서 사단이 인간에게 많은 해를 끼친다고 할지라도 어느 날엔가는 사단을 완전히 정복하고 세상을 구원할 한 사람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에 관해 기술한다. Graaf는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뱀에게 내린 저주의 말씀은 인간에 대한 구원과 은혜를 약속한 말씀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저주라고 할 수만은 없다”라고 기술함으로 본문 속의 여자의 후손의 정체성에 관해 단수(the Man)적이며 복수(택자들)적인 양면성이 함축돼 있음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D. Louis Berkhof(1873-1957) :
L. Berkhof의 저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상하권으로 번역되었다. 상권은 서론, 신론, 인간론을 다루고, 하권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포함한다. 특별히 언약과 관련된 주제는 상권의 인간론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L. Berkhof는 언약이란 용어가 창세기 처음 세 장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언약개념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성립되기 때문이라고 피력한다. 특정 본문 속에 언약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더라도 언약의 본질적 요소들인 언약의 당사자들, 약속이나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언약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견해이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창 2:17)과 관련해 이를 행위언약으로 정의하는 것은 조건이 규정돼 있는데, 순종에 대한 보상과 범죄에 대한 형벌이 제시돼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1. Berkhof는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간주해 사용한다. Berkhof는 선악과 금령 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문자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사실이지만 죽음이 불순종에 대한 위협적인 형벌로 제시된 사실이 순종에 대한 영생을 상대적으로 암시한다고 피력한다. Berkhof는‘율법을 지켜 생명에 이른다’는 말씀들(신 4:1; 레 18:5; 롬 7:10; 10:5; 갈 3:12)에 근거해 행위언약(선악과 금령)에 함의된 순종에 대한 영생의 보증을 정당한 관점으로 옹호한다. 특별히 Berkhof는“근본적으로 은혜언약은 우리의 담보물이신 그리스도에 의한 본래적인 협정의 수행이다”란 명제 하에,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당초 순종을 조건으로 약속된 영생획득에 실패한 것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의 조건을 만족시켜 주심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본래적 협정(행위언약)의 열매(영생)를 현재적으로 수확할 수 있다고 술회한다. Berkhof의 이런 관점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인다. 그러나 아담의 실패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성취해 주심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 주신 은혜언약(창 3:15, 원복음)에 근거해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은 당초 행위언약에 근거해 영생을 주시려고 의도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실패한 데서 취해진 불가피한 비상강구책(차선책)으로 곡해될 수 있다. 아담의 불순종과 이로 인한 타락은 표면적(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아담의 자유의지에 따른 우발적인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영원한 구속언약(엡 1:4-6)이란 관점(신적 작정)에서 보면 필연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행위언약(선악과 금령)과 은혜언약(여자의 후손)과의 언약적 관계는 쌍방 간에 놓인 내재적 성격상 필연적 관계이지 우연의 관계로 해석될 수 없다.
Berkhof는 범죄 하기 전 아담의 생명은“순종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영원한 행복과 영광의 최고의 발전으로 일으켜 세워질 생명을 향한 처음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피력한다. 그러므로 당시 아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지음 받았을지라도“아직도 사람을 위해 저장된 최고의 특권들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그는 여전히 최고 수준의 거룩을 소유하지 못하였고 생명을 최고의 충만한 분량으로 누리지 못하였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범죄와 선을 악으로 변경, 사망에 굴복하게 될 가능성 때문에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다. 행위언약에서 생명의 약속은 아담이 아직 예속되었던 생명의 모든 제한들이 제거된다는 것과 그의 생명이 최고도의 완전으로 일으켜 세워진다는 것이었다”고 갈파한다. 아담이 비록 무죄자의 상태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 뱀에게 미혹돼 범죄함으로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아담의 처음 생명의 상태에 대한 Berkhof의 주장은 일견 공감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영생의 생명은 율법의 요구를 인간의 힘으로 지켜 행함으로 획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율법이 의와 생명을 약속할지라도 그것을 직접 줄 수는 없다(갈 3:12, 21).“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책망하시고 그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게 하고 새 언약과 참 된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다시 말해 의와 영생을 위한 조건이 아닌 몽학선생으로서 방편적 기능을 담당하게 하기 위함이다(갈 3:22-24). 이런 원리는 처음 아담의 경우에도 원리상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담의 타락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영원한 구속언약이란 관점에서 볼 때 예정된 수순이다 우연으로 말미암은 의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에 근거해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지 율법을 행함으로 조건부적으로 수여되는 보상과 대가의 개념이 아니다(엡 2:8-9: 롬 3:28).
2. Berkhof는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을 언급하면서 전자는 창세전 성부와 성자사이에 약정된 언약이고(엡 1:4-6), 후자는 삼위일체(trinitarian)적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 또는 선택받은 죄인 사이에 맺어진 언약(창 3:15)이란 관점을 지지한다고 표명한다. 그러나 이 구별은 성경의 진술들에 의해 지지를 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행위언약에 대조되는 두 개의 독립된 언약들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피력한다. 다만 은혜언약과 구속언약은 하나의 복음적인 자비언약(covenant of mercy)의 두 양식(modes)이고 국면(phases)일 뿐이라고 기술한다. 이 점에 대해 Paul Enns도 그의 저서 The Moody Handbook of Theology를 통해 동의한다.
3. Berkhof는 구속언약과 은혜언약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창세전 구속언약(엡 1:4-6) 속의 성부와 성자 간의 의논(약정)은 본질상 은혜언약(창 3:15)의 영원한 원형이다. 이는 두 언약이 본질상 하나의 언약으로 묶여 있음을 의미한다. 전자는 성부와 선택받은 자의 보증인과 머리로서의 성자 사이의 계약(언약)이고, 후자는 삼위 하나님과 보증가운데 있는 선택받은 죄인 사이의 계약”이라고 기술한다.
“둘째, 구속언약 속의 성부와 성자간의 의논은 은혜언약의 확고하고 영원한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만일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평화의 의논이 없었다면 삼위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협정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의논은 은혜언약을 가능케 한다”고 피력한다.
"셋째, 구속언약은 결과적으로 은혜언약에 효력을 미친다. 왜냐하면 구속언약 안에서 요구되는 방편들인 성육신, 고난, 십자가에서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등은 은혜언약의 확립과 집행을 위한 준비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실로 인해 Berkhof는 은혜언약의 원천과 기초로 기능하는 구속언약은 성자를 선택받은 자의 머리와 구원자로 삼으시는 성부와, 자발적으로 성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대신하는 성자 사이의 협정이라고 정의한다.
4. Berkhof는 은혜언약(구속언약)의 특성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첫째, 그것은 은혜스러운 언약이다. 왜냐하면 은혜언약에는 우리의 책임을 담당할 보증인을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인격을 보증물로 삼아 공의의 요구들을 만족시킨다. 또한 성령을 통한 은혜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적 책임들을 감당케 하신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의 은혜의 효력으로 수행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죄인들의 생활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언약은 시종일관 죄인을 위한 은혜”라고 설파한다.
"둘째, 은혜언약은 삼위일체적인 언약이다(triune covenant). 삼위 하나님은 은혜언약(구속언약)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 기원은 성부의 선택적인 사랑과 은혜, 그 사법적인 기초는 성자의 구속을 통한 보증, 성령의 효과적인 적용에 의해서 죄인들의 생활들에서 완전히 실현된다”고 강조한다.
“셋째, 은혜언약은 영원성과 영속성을 띠기에 중도에서 파기되지 않는다. 은혜언약의 영원성과 영속성의 문제는 과거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에 영원히 참되시며 또한 변함없이 그것을 선택받은 자에게서 완전히 실현되도록 하신다. 그렇다고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은 사람 편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결코 깨뜨릴 수 없다거나 깨뜨리지 않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파한다. 은혜언약은 사람 편에서 설령 언약에 담긴 순종의 요구에 응하지 못할지라도 은혜언약 자체가 처음부터 사람의 선행과 공로에 근거해 조건부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기에 언약적 징계가 주어질망정(히 12:11) 언약 자체는 결코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히 10:12-14).
“넷째, 은혜언약은 특별한 언약이며 보편적인 언약은 아니다. 이는 보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은혜언약이 모든 사람들에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만인을 위한 만인의 구원(보편구원)을 수납하지 않는다.
"다섯째, 은혜언약은 모든 시대에 동일하지만 통치 형식은 다르다. 이는 언약의 개괄적인 표현이 신구약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시대의 언약의 통일성은‘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란 언약적 선언 속에서 확인된다. 모든 시대를 초월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단일한 복음이 모성적 언약(창 3:15)을 통해 시사되고 있음을 성경은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구원의 방도는 신약시대에 그들의 정체성이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를 막론하고 예표적이란 사실을 논증해 준다(롬 4:7-9, 갈3:7, 29). 언약의 중보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요 14:6).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후손은 그리스도시며(갈 3:16),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은 진정한 언약의 자손들이다(갈 3:16-29).”
"여섯째, 은혜언약은 무조건적이며 동시에 조건적일 수 있다. 이는 신중한 분별없이는 답변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 언약이 적용되는 관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은혜언약은 수혜자의 행함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지만, 대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은혜언약을 소개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순종에 의해 행위언약에 본래적으로 규정된 조건들을 만족시켜야만 하셨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Berkhof는 피력한다.
Berkhof가 지적하고 있는 은혜언약의 제반 특성들은 철저히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은혜언약의 특성 중 무조건적이고 조건적인 양면성을 공히 조심스럽게 제시한 대목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주로 무조건적인 면을 상대적으로 강조해온 것에 비해 상당히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관점으로 여겨진다. Berkhof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이것은 신중한 분별력이 없이는 답변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언약이 고찰되는 관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라고 단서를 붙인다. 여기서‘언약이 고찰되는 관점’이란 수혜자의 입장에서 보면 행위가 배제됨으로 무조건적인 것이, 시혜자의 입장에서 보면 택자의 불순종에 대한 그리스도의 중보적 순종이 요구됨으로 결과적으로 조건부적인 요소가 담겨있다는 관점이다(롬 5:18-19). 그러므로 죄인의 입장에선 은혜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은혜 되게 하는 상승효과를 배가시키게 된다. 구원이 수혜자에게 선물의 성격을 담고 있을지라도 시혜자의 입장에서는 수혜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들 되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하는 생명의 지불이 선행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예수님짜리’인 무한 가치의 선물인 셈이다.
5. Berkhof는 법적 관계로서의 언약 안에 있는 회원들에 관해 언급한다.
“첫째, 언약 안에 있는 성인들(Adults)은 단지 신앙과 신앙고백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 언약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진리는 신앙고백을 단순히 외면적인 언약과 연결시키는 모든 자들에 의해 암시적으로 또는 명백히 부인되고 있다”고 피력한다.
둘째, 언약 안에 있는 자녀들에 관련해 Berkhof는 신자들의 자녀가 나면서부터 법적 관계로서의 언약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즉각적으로 생활의 교제로서의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론적 은혜로 언약적 자녀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며 또한 그들을 언약의 산 회원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가 반역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이 언약적 생활을 소유하고 있다는 추측에 근거해 진행해야만 할 것이라고 기술한다.
Berkhof의 이런 견해는 신자들의 자녀들이 법정적으로 언약 자녀의 신분을 가질지라도 이런 사실이 언약에 담긴 순종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음을 보증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선히 주도해 나가실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관점으로 이해된다. 법정적 자녀란 혈통적 자녀란 의미와 본질상 상응한다. 그렇다면 Berkhof의 견해는 혈통적 자녀 된 사실이 부모와의 언약적 연대 속에서 순종을 담보로 자녀들을 자동적으로 언약백성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마엘과 에서는 법정적(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불순종이 언약의 파기자로 낙인찍혀 결국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외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Berkhof는 이런 사실을‘언약 안에 있는 비 중생자’란 제목으로 A. Kuyper와 H. Bavink의 견해를 인용해 논증한다.“아브라함 카이퍼는 저들이 비록 실제적으로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었지만(외적 언약) 언약의 본질적인 참여자(내적 언약)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들이 언약 안에 있었지만 언약 속에 있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결국 Berkhof는“언약은 하나님께서 결코 폐지하지 않으시는 영원하고 불가침적인 언약이지만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순종 여부에 따라 그것을 깨뜨릴 수 있으며 이때에 언약에 불순종한 자는 언약의 파기자가 된다고 피력한다. Berkhof는 앞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후손의 정체성을 이중적(육적/약속)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창 21:12; 갈 4:28; 갈 3:29) 정작‘언약 안에 있는 비중생자’란 주제를 통해 순종여부에 따라 언약백성의 신분이 유동적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시사함으로 논리의 일관성에 결핍을 보인다. 필자의 견해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이스라엘이 구약 역사 속에서 구속계시의 도구로 선용되는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로 언급될지라도 본질상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의 실체는 처음부터 영적 자손에 국한되었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갈 3:29; 롬 9:6-8). 이런 관점에서 이스마엘이나 에서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외된 것은 저들의 불순종의 결과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가 아닌 사실이 불순종을 통해 현실화되었다고 본다. 은혜언약은 언약의 당사자들이 언약 속의 요구조항에 불순종할 때에 언약적 징계가 주어질망정 언약 자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주신 것이기에 결코 중도 파기나 무효화가 될 수 없음이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가 영(永)단번(once for all)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선언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증해 준다(히 10:14).
6. Berkhof는 언약의 유형을 개혁신학의 전통에 따라 구속언약과 행위언약 및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면서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을 본질상 동일시하는 견해를 따른다. Berkhof는 언약의 유형에 근거해 구약시대에 발견되는 언약의 종류를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첫째, Berkhof는 최초로 계시된 언약을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에서 찾는다. Berkhof는 이를 원시복음(original gospel)으로 표기한다. 여자의 후손 예언에는 명시적으로 언약이란 표현이 문자적으로 사용되지 않지만 언약의 구성요소들인 언약의 당사자, 언약의 내용 등이 분명히 확인되기에 최초의 은혜언약으로 간주한다. 여자의 후손언약에서 뱀과 원수관계를 맺는 여자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하와일 수 있겠으나,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낼 후손을 낳을 자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두기 위해 여자가 먼저 언급될 수 있다고 O. Palmer Robertson은 그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밝힌다.
둘째, Berkhof는 여자의 후손언약과 불가분의 점진적인 연계성을 맺고 있는 언약으로 노아언약을 기술한다. Berkhof는 노아언약을 일명 자연 언약이나 일반 언약으로 부른다. 그는 노아언약과 은혜언약(여자의 후손)이 서로 다를지라도 본질상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피력한다. Berkhof는 두 언약 간의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노아언약은 적용면에서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은혜언약은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만을 포함한다고 제한시킨다. 그러나 은혜언약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가 미치는 범위는 택자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해 애매하게 저주를 받은 모든 피조물까지를 포함해“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회복)되게 하려 함”(엡 1:10; 롬 8:19-22)이란 말씀을 고려할 때, Berkhof의 관점은 재고의 여지가 남는다.
셋째, Berkhof는 구약계시에 있어서 아브라함 언약과 더불어 비로소 은혜언약에 대한 신기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강조한다. Berkhof는 아브라함 언약을 정형화된 은혜언약의 효시로 보는 이유를 아브라함 언약 이전에는 은혜언약의 형식적인 설정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은 비록 언약의 구성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을지라도 언약이 체결된 형식적인 계약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고 피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은 원복음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축복들에 관해서도 명백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브라함 언약에는 영적 축복들이 이전보다 더욱 명백하게 표명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에는 상징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현세적인 축복들은 영적 축복들과 동등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Berkhof는 아브라함 언약 속의 영적 축복들이 자연적인 후손들에게서 실현되지 않고 다만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른 언약(영적)의 후손들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런 사실을 통해 이스마엘이나 에서나 표면적 유대인들은 불순종의 형벌로 인해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외된 자들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에 접촉된 참된 영적 후손들과는 무관한 자들이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넷째, Berkhof는 시내산 언약을 가리켜 그 형식은 다를지라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본질상 동일하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은 행위언약의 갱신이 아니다. 오히려 시내산 언약 안에서 율법은 은혜언약(아브라함 언약)에 공헌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십계명에 대한 서론에 이미 암시돼 있다(출 20:1-2). 모든 율법과 규례와 율례를 대표하는 십계명의 수여는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출애굽 구원사건을 전제로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신 자율적 규범이다. 강제적 규율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율법은 은혜언약과 관련해 이중적 목적에 이바지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죄의식을 증가시키고(롬 3:20; 4:15; 갈 3:19), 다른 한편으로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수행한다(갈 3:24).
7. Berkhof는 언약의 유형에 근거해 구약시대에 발견되는 언약의 종류에 이어 신약시대의 은혜언약(새 언약)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 Berkhof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은혜언약도 구약의 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배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피력한다. 다만 언약이 미치는 범위와 대상에 있어서 신약시대에는 그것이 보편적이라는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민족주의적인 한계를 초월한다고 본다.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양하고 있었던 언약의 대상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주의에 제한돼 있지 않았다. 보편주의를 지향했었다(갈 3:28-29).“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는 말씀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증시켜 준다. 다만 그것이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과정에서 예표와 실체라는 형식에 의존했을 뿐이다. Berkhof는 이런 사실을 가리켜 아브라함 언약이 일차적으로 지향했던 혈통적 자손의 정체성은“영구적인 것으로 의도되지 않고 다만 그 목적에 이바지한 후에는 소멸되도록 의도되었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둘째, Berkhof는 신약시대의 은혜언약은 구약시대의 은혜언약에 비해 은혜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기술한다. 실제로 은혜언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값없이 주신다는 사실이 명백히 제시된다(롬 4:25; 5:8; 히 10:12-14; 고전 11:23-26; 마 26:28; 눅 22:19-20; 막 10:45).
셋째, Berkhof는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에 비해 더 부요한 축복들이 보장된다고 피력한다. Berkhof는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여“은혜와 진리가 충만할”때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성령은 교회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에 근거해 믿는 자들을 말씀을 통해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으로 부요케 하신다(계 2:7).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존재하면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이미 소유해 누리게 되는 현장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생명은 교회를 이루는 구원으로 표출될 때, 비로소 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소유해 누리는 영적 생명의 정체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천상적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성립된다(엡 2:5-6).
E. O. Palmer Robertson :
Palmer Robertson은 그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자신의 계약사상을 신구약을 망라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역자는 Palmer Robertson의 저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covenant를 통상적으로 해석하는 언약대신 계약으로 번역한다. covenant에 대한 역자의 번역이 저자의 의중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저자가 역자의 학문적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역자의 번역을 따라 계약이란 용어로 표기했다. 그러나 계약이란 통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정이란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기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계약관계로 표현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의미가 희석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역자의 관점을 존중해 The Christ of the Covenants의 내용 중 계약의 속성, 계약의 범주, 계약의 통일성, 계약의 다양한 유형과 계약의 구체적 종류를 선별적으로 소개함으로써 Palmer Robertson의 계약(언약)사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1. O. Palmer Robertson은 하나님의 계약의 속성을 첫째, 약정(bond)으로 표기하면서 이를 본질적인 면에서 계약의 당사자들을 한데 결속시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Palmer Robertson은 계약의 본의를 구약성경에 근거해‘계약을 자른다’(cut a covenant)로 표기한다면서 이런 사실의 증거로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횃불언약을 제시한다. 그는 계약수립 시 동물이 절단되는 것을‘죽기까지 서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런 관점에서 Palmer Robertson은 계약의 속성을 둘째,‘피로 세운 약정’또는‘삶과 죽음의 약정’으로 기술한다. 성경에 나타난 피의 의미는 잔인하거나 살벌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란 피 속에 있는 것이며(레 17:11), 피흘림은 생명과 관련해 심판을 나타낸다고 Palmer Robertson는 피력한다. 셋째로 Palmer Robertson은 계약이란‘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으로 기술한다. 이는 계약의 주체가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기초해 집행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2. Palmer Robertson은 신적 계약의 정체성을 언급하면서 계약이란 용어가 본문 속에서 문자적으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계약적 관계를 특징짓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확인된다면 용례의 형식적인 사용이 없어도 계약적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신적 계약의 범위는 세상창조 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포괄한다는 게 그의 견해이다.
3. Palmer Robertson은 신적 계약의 통일성을 말하면서 구조적 통일성과 주제적 통일성으로 구별해 기술한다. 전자는 특별히 아브라함과 모세 및 다윗의 계약과 관련해 상호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데, 첫째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의 진행을 통해서, 둘째로 혈통적 계승을 통해서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고 피력한다.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관계할 때, 계약의 중심을 이루는 요소로 기능한다. 그것은“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창 17:7; 출 19:5; 레 26:12; 삼하 7:14; 렘 31:33; 히 8:10)는 관용어적인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Palmer Robertson은 신구약 전반에 걸쳐서 언약의 공식처럼 사용되고 있는 위의 관용어적인 표현을 가리켜‘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서 이를‘계약의 임마누엘 원리’라고 표기한다.
4. Palmer Robertson은 계약의 다양한 유형들을 소개하면서 이를 첫째로 창조 이전의 계약과 창조 이후의 계약으로, 둘째로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으로, 셋째로 옛 계약과 새 계약으로 표기한다. Palmer Robertson은 종교개혁 이후에 비로소 삼위일체 사이의 창조 이전의 계약과 창조 이후의 역사적인 계약관계가 맺어 졌음을 기술한다. 전자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으로 흔히 구속의 계약, 영원한 계약, 평화의 협의, 또는 구속의 협의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왔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Palmer Robertson 자신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긍정적으로 해석돼야 하겠지만, 이런 사실이 영원한 협의에서 성부와 성자 간 창조 이전의 계약이 존재했음을 증거 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협의의 수수께끼를 계약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고 꺼려한다. Palmer Robertson은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법규에 대해 성경은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면서, 만일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삼위일체적 계약을 말한다면 이는 성경적인 증거의 한계를 넘는 부당한 처사가 될 것이라고 경계시킨다. Palmer Robertson이 창조 이전에 수립된 삼위일체적 계약의 불가능성을 제기하는 것과 관련해 Palmer Robertson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첫째, 위에서 Palmer Robertson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반면에 창세 전 삼위일체적 영원한 협약에 대해선 불가능성을 표명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세 전 계획을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협의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협의된 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곧 성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선택,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성령 하나님의 적용 및 인침의 사역에 근거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할 뿐이다. 성경이 이를 자증한다(엡 1:3-14).
둘째, Palmer Robertson은 하나님의 영원한 협의의 수수께끼를 계약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면서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은 별로 언급하지 않음으로 성경의 한계를 넘는 부당한 처사로 여겨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대해 증거할 뿐 아니라(엡 1:3-14; 3:11; 살후 2:13; 딤후 1:9; 벧전 1:2), 이를 약속(promise, 딛 1:1-2)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성경에서 언약이란 용례는 언약이란 용어가 문자적으로 표기되지 않더라도 언약의 구성 요소들이 확인될 때 언약으로 간주할 수 있다.
Palmer Robertson은 신적 계약의 다양한 유형들을 기술하면서 두 번째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해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으로 표기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구분을 인간의 타락 전후를 기점으로 삼아 피력한다. 필자는 본 논고에서 Palmer Robertson 자신이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이란 용어 사용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사실은 Palmer Robertson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계약 사상을 피력하는 과정에서 행위계약을 창조의 계약으로, 은혜계약을 구속의 계약이란 용어로 바꿔서 기술하는 것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Palmer Robertson이 전통적인 두 계약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 두 시대를 일컫는 데 사용된 계약적 술어가 명확성이 부족하다는 데 근거를 둔다. 다시 말해 은혜계약과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행위계약이란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관점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의 질서 속에서 본질상 은혜관계란 사실을 강조한다.Palmer Robertson은 주장하기를 은혜계약과 행위계약을 구분하는 것은 은혜계약 안에서는 행위가 차지할 자리가 없게 된다고 피력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행위는 은혜계약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약 2:22).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이에 상응하는 합당한 행함을 강력히 요구한다. 은혜와 행함은 상호적(bilateral)인 요소다. 동반자 관계다. 짝을 이루며 함께 동행한다. 그렇다고 행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Palmer Robertson이‘구원은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고, 심판은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피력한 것은 자칫 행위구원론을 긍정적으로 지지하는 것 같은 불필요한 인상을 준다. 종말론적 심판 때의 행함의 정체성은 본질상 믿음의 행함이지 믿음과 분리된 독립적인 행함이 아니다(요 5:28-29, 24). 물론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행실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성경은 부인하지 않는다(고후 5:9-10; 롬 14:10-12). 그러나 성도의 행실에 대한 심판은 형벌(punishment)이 아닌(요 5:24) 정화(purification)의 심판이란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Palmer Robertson은 마지막으로 신적 계약의 유형을 옛 계약과 새 계약으로 구분해 소개한다. 이 두 계약 사이의 구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는 옛 계약으로, 그리스도 이후의 유대는 새 계약으로 부른다. 옛 계약은 약속, 그림자, 모형, 예언 등으로 특징지어지며, 새 계약은 성취, 실체, 실현 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Palmer Robertson은 피력한다. Palmer Robertson은 특별히 히브리서 전체의 구성이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구분을 기반으로 전개되며 히브리서에 기술된 복음의 진면목은 새 계약에서 성취되는 옛 계약에서의 약속의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5. Palmer Robertson은 계약의 다양한 유형들에 이어, 그의 저서 나머지 부분을 신적 계약에 관해 종류별로 구분해서 기술한다.
첫째, 창조의 계약이다. 이는 선악과 금령(창 2:17)에 근거한 행위언약을 말한다. 그러나 Palmer Robertson은 애써 행위계약이란 용어의 사용을 피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적 결속은 어떤 형태의 계약이든 간에 근본에서 은혜성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신적 언약의 정체성은 은혜언약 하나로 통일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almer Robertson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할 책임이요 본분이라고 기술한다. 그는 선악과 금령이 인간을 시험(probation)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비록 창조의 면류관으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야 할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행동을 자율적으로 구속하는 기초가 된다. 선악과는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의 목적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신 8:3)는 것이 Palmer Robertson의 관점이다. 선악과 금령을 해석하는 Palmer Robertson의 관점에 필자는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Palmer Robertson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을 언약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을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 주신 최초의 언약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이 아니라, 선악과 금령(창조의 언약)이란 사실을 묵계적으로 인정한 셈이 된다. 이 점에서 Palmer Robertson도 전통적인 개혁신학자들의 언약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에 Palmer Robertson이 선악과 금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담의 절대 순종을 요구했을지라도,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과 지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종래의 개혁신학적 관점에 침묵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둘째, Palmer Robertson은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맺어 주신 은혜언약을 총체적 관점에서‘구속계약’으로 표기한다. 이는 여자의 후손(창 3:15)언약을 원복음으로 의식한 데서 나온 표현임에 틀림없다. Palmer Robertson은 이런 사실을“구속의 계약(창 3:15)은 창조의 계약(창 2:17) 아래 인간의 실패와 함께 곧 세워진다”는 표현을 통해 피력한다. 그러나 Palmer Robertson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아담과 맺으신‘시작의 계약’(covenant of commencement)으로 표기한다.
Palmer Robertson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①사단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신다. 여자가 먼저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자의 정체성은 문맥상 일차적으로 하와일 수 있다. 그러나 하와와 사단과의 원수관계가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여자의 정체성에 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암시한다. Palmer Robertson은“사단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낼 후손을 낳을 자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두기 위해 여자가 먼저 언급될 수도 있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 낼 한 사람을 준비케 하시기 위해 사단과 여인을 원수 되게 하셨다”라고 피력한다(딤전 2:15). ②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관계가 성립된다. 본 주제에서 여자의 후손은 육체적인 인류 전체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총칭한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을 소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은 사단을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 사단의 후손이다. 상대적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에게 속한 자로 판명된다. 그러므로 두 후손 간의 적대적인 대립과 투쟁의 관계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처럼 여자의 후손이란 표현에는 단수적이고 복수적인 의미가 공존한다. ③‘그’가 사단과 대립한다. 대명사‘그’(He)는 여자의 후손이 집합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단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Palmer Robertson은 히브리어 대명사‘그’를 문법적으로 남성 단수라고 설명한다. 여자의 후손(단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반면에 사단은‘그’(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확고하게 뒷받침해 준다. 마침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가 오셨다. 그는 사단과 치명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그것들을 밝히 드러내시고 그것들을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4-15)라고 Palmer Robertson은 여자의 후손 예언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적용시킨다.
셋째, Palmer Robertson은 물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어 주신 언약을‘보존의 계약’으로 표기한다(창 9:1-2, 8-10). 노아와의 계약의 특징은 창조계약(창 2:17)과 구속계약(창 3:15)의 면밀한 상호관계를 강조한다. 이는 선악과 금령을 어긴 인간의 죄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속해 주시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시기 위함이다. Palmer Robertson은 이런 사실과 관련해“구속계약의 맥락에서 창조적 명령(창 1:28)이 반복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전망을 확대시킨다. 구원의 정체성은 구원을 내면화시켜 영혼의 구원이라는 말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구원은 사회적, 문화적 실체로서 전 삶의 양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인간은 영적 존재의 제한된 형태 속에 좁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삶의 관점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설파한다. 이런 관점에서 Palmer Robertson에 따르면 구원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에덴동산의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새 이미지는 성경의 원리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전인적으로 활동하는 도시의 이미지로 나타날 것임을 전망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말미암아 회복된 에덴동산의 삶을 기술하고 있는 계시록 22:1-5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암시해 준다.
넷째, Palmer Robertson은 여자의 후손언약에 기초해 광의적인 구속의 은혜언약의 틀 안에서 아브라함과 맺어 주신 언약을‘약속의 계약’으로 표기한다. Palmer Robertson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관련해 계약의 개념을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창세기 15장의 횃불언약식에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그에 따르면 본 횃불언약식에서 아브라함 계약의 공식적인 수립을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짐승을 둘로 쪼개어 양쪽으로 마주대하여 놓고 그 사이를 하나님으로 상징된 타는 횃불이 지나가는 방식으로 체결된 횃불언약식(창 15:9-17)의 내용은‘주권적으로 맺어진 피의 약정’이라는 계약의 핵심을 명확히 지적한다고 Palmer Robertson은 강조한다. 이는 동시에 계약을 위반하게 될 때 죽음이란 저주가 부과되므로‘삶과 죽음의 약정’이란 의미도 수반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베푸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을‘약속의 계약’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Palmer Robertson의 입장이다.
Palmer Robertson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을 포괄하고 있는 옛 계약의 저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새 계약을 해석한다. 새 언약의 수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26:28; 눅 22:20). 옛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해돼야 한다. 그리스도는 계약적인 죽음의 서약의 모든 결과를 담당함으로써 저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한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 9:22). 그리스도는 계약적 저주의 희생 제물로서 그의 몸을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옛 계약의 저주를 지워버리고, 동시에 새 계약의 축복의 상태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고 Palmer Robertson는 피력한다.
다섯째, Palmer Robertson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총칭해‘율법의 계약’으로 표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Palmer Robertson은“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로 시작하는 십계명은 시내산 율법 계약을 이해하는 역사적인 기본 내용이라고 전제한다. Palmer Robertson은 모세의 율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보다 우월한 것은 법이 아니라 계약(언약)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어떤 성격의 법을 논한다고 할지라도 법은 항상 보다 넓은 계약 개념에 종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항상 율법보다 우선하는 넓은 개념이다. 계약은 사람을 묶는다. 구체화된 법적 조항은 항상 계약 사역의 한 방식을 나타낼 뿐이다. 이런 사실은 신적언약이 항상 행함의 순종을 요구하지만 그 요구에 담긴 법적 조항은 결코 신적 언약을 무효화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모세를 통해 수여된 시내산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돼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신 것이다.
Palmer Robertson은 율법의 계약(시내산 언약)을 전통적으로 말하는 행위언약(창 2:17, 선악과 금령)과 혼동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후자는 인간이 범죄 하기 이전에 영원한 축복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전자는 분명히 타락한 죄인인 인간들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Palmer Robertson이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 대신‘창조의 계약’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순종을 조건으로 영원한 지복을 보증한다는 사실에 침묵으로 일관해 왔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오히려 그는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이 아님(피조물)을 상기시켜 주는 상징적인 나무로서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했었다. 그런데 모세의 시내산‘율법의 계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Palmer Robertson은 행위언약의 본의를 순종의 당위성보다는 순종을 담보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변화된 입장을 보인다. 이는 Palmer Robertson이 선악과 금령에 대해 이중적인 해석적 관점을 드러낸 것으로 보여져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의심된다.
Palmer Robertson은 율법계약의 역할과 기능을 기술하면서 구속계약의 내용을 펼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단계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는 신약 기자들의 관점을 빌린다면,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해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깨닫게 함으로(롬 3:19-20, 정죄기능),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케 하기 위함이다(갈 3:23-24, 사죄기능).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의 생명을 약속할지라도(갈 3:12) 그 생명을 줄 수는 없다(갈 3:21)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 의와 생명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믿음으로 값없이 선물로 받는다(엡 2:8-9).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는 완성되었다(마 5:17; 롬 10:4, 8; 갈 5: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문자적 요구 앞에 서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 되어 성령의 법 곧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랑이 동기유발 된 실천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후 5:14-16; 마 11:30). 무익한 종의 삶의 정체성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예증한다(눅 17:10). 이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감으로 신앙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전인적인 건덕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이며 복음은 율법의 실체로 기능한다.
여섯째, Palmer Robertson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어 주신 언약을‘왕국의 계약’으로 표기한다(삼하 7:11-16; 23:5; 시 89:3; 132:11-12). 언약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일이다.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에 집중된다. 신정왕국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는 다윗의 왕국계약에서 최고의 실현단계를 맞는다. 하나님은 정해진 한 장소에 당신의 왕권을 공식적으로 세우신다. 유동적인 성막에서 고정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거기서 친히 통치하신다. 다윗의 통치하에 다윗과 맺어 주신 왕국계약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공식적으로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특별히 때를 맞춰 언약궤가 개선장군처럼 오벳에돔의 집으로부터 다윗성으로 이송된다(삼하 6:12-15).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다윗의 보좌와 연결시키신다.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왕국의 공식적인 출범을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다윗의 왕국계약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이 현시되는 공식적인 약정으로 기여한다.
Palmer Robertson은 다윗의 왕국계약의 핵심 사상은 ①다윗왕조의 영원한 보전을 보증, ②다윗의 아들로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의 건축 보증, ③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 간의 언약적 상응성으로 요약된다. 다윗언약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의 언약적 상응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롬 1:3, 4; 눅 1:31-3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언약에 약속된 두 아들 직분의 최종 성취자로 나타난다.
Palmer Robertson은 다윗언약에 약속된 다윗왕조의 영원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분열된 남북이스라엘 왕국이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사실과 관련해 다윗언약의 이중 구조적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 말해 다윗의 통치는 다윗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메시아의 왕권을 예표론적 형태로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Palmer Robertson의 언약적 통찰력은 탁월하다.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들은 한결 같이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성취의 양면성을 자체 속에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모형적이고 예비적으로 성취되고, 신약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적이고 궁극적으로 완성된다. Palmer Robertson은 이런 언약 성취의 이중성을 가리켜“모든 구약성경 형태 속에는 어떤 좀 더 완전한 성취가 요구되는 불충분함이 있었다”라고 피력한다.
Palmer Robertson은 다윗의 왕국계약을 정리하면서“다윗의 왕위에 앉게 될 한 위대한 자가 올 것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영원히 앉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를 의로 다스릴 것이다. 그는 임마누엘 전능한 하나님 자신이 될 것이므로 그의 왕위와 하나님의 왕위를 합병할 것이다”라고 요약한다. 다윗의 아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직임을 가지고 마침내 세상에 성육신하셨다(마 1:1, 21; 눅 1:31-33).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중보자의 대속사역을 완성하셨다(롬 4:25; 8:3-4; 10:4). 때가 찰 때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천상적 정권으로 평정하실 것이다(마 28:18; 빌 2:9-11; 살후 1:7-10; 계 1:7).
일곱째, Palmer Robertson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 새 언약 사상을‘완성의 계약'(covenant of consummation)으로 표기한다. 구약의 모든 언약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마 1:1). 성경은 이를 가리켜“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후 1:20)고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의 등장은 바벨론 포로귀한을 통한 신(新) 다윗왕조의 회복과 복권을 전망케 하면서 새 이스라엘의 출현을 기대케 한다.
Palmer Robertson은 구약의 역사 속에서 다윗왕조의 멸망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의 추방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통해 약속했었던 계약들의 반작용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피력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사건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통해 체결되었던 계약 형태보다 좀 더 지속적인 효과를 가진 어떤 새로운 형태의 계약이 상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한다고 주장한다. 선지자들에 의한 새 언약(렘 23:5-6; 31:31-34; 겔 36;24-28; 37:24-28; 사 9:6-7; 11:1-2; 53:5-6) 사상의 등장과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의 궁극적 성취를 보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마 26:26-28; 눅 22:19-20; 고전 11:23-26; 히 10:15-18) 사상이 이런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과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을 통합해 설명하는 Palmer Robertson의 관점은 바람직하다.
Palmer Robertson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내포된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총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이스라엘의 가나안에로의 복귀(렘 30:3), ②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회복(렘 31:38-40; 사 61:4), ③이전 언약의 성취(렘 31:33; 겔 36:27), ④성령의 역사에 의한 내적 소생(겔 36:26-27), ⑤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렘 31:34; 50:20), ⑥이스라엘과 유다의 통합(렘 31:31; 50:4; 겔 37:15-19), ⑦다윗 왕권의 복권(겔 37:25; 렘 23:5: 사 9:6-7; 11:1-2), ⑧메시아의 이중적 정체성(사 52:14-15; 53:5-6), ⑨새 계약(언약)의 영원한 성격(렘 50:5; 32:40; 겔 37:26; 사 55:3; 61:8). 특별히 선지자들의 새 계약에 함의된 영원성의 성격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종말론적인 차원을 전망케 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언약 속에 내포된 언약의 영원성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포함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성취 안에서 비로소 영원한 언약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궁극적 성취 또한 보장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에서 비롯된 구약의 구속언약의 총화로 기능하면서 죄 사함의 주제는 그 중심에 위치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새 언약 수립의 근본인 죄 용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할 것이며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할 것이라”(렘 31:34)고 증거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와 관련해 Plamer Robertson은 옛 언약 안에서 속죄제사의 반복은 죄의 사면보다는 죄의 간과(preterition)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짐승에 의한 희생제사는 죄가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넘어갔을(pass over) 뿐이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런 동물 희생제에 기초한 옛 계약의 규정들은 죄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실제적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마다 같은 제사를 반복해 드려야만 했던 것이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새 언약 예언을 통해 죄가 다시는 실제로 기억되지 않을 날을 확신하고 있었다. 모형과 예표적 성격을 띠고 반복되는 동물의 희생제사는 대속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만이 아니었다. 죄가 실제로 용서되지 않는 한시적인 제사 행위였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통해 죄가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것을 선언함으로써 구약의 속죄 제사제도의 종말을 예언한다고 Palmer Robertson은 강조한다. 그러므로 죄의 사면의 주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에서 연속성(속죄제의 모형과 실체)과 불연속성(효력의 한시성과 영속성)의 이중적 정체성을 분석하는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이 Palmer Robertson의 관점이다.
Palmer Robertson의 새 언약사상을 요약하면 구약시대에 맺어 진 다양한 신적 언약의 중심 주제는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통한 구속사상과 이로 인한 재창조사역(창조-타락-구속-재창조)에 집중돼 나왔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은 십자가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하나님의 택자들의 죄를 사면해 주심으로 구약의 모든 언약들을 총체적으로 성취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죄의 사면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대(大)위임명령(the great commission, 마 28:19-20)을 적극 수행하는 것을 통해 결과적으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창 1:28)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갈 수 있는‘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을 열어 준 셈이 된다. 성경은 이런 식의 삶의 자세를 일컬어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이를 가리켜‘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마 6:33)으로 표현한다.
F. Michael Horton :
Michael Horton은 그의 저서 Introducing Covenant Theology(언약신학)를 통해 자신의 언약사상을 피력한다. 본서는 총 9장으로 구성돼 있다. 필자는 본 연구와 관련해 그의 저서의 내용 중 일부를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해 소개하면서 본 연구에 참고하고자 한다.
1. Michael Horton은 1장의‘언약의 중요성’에서 하나님의 실존 자체를 언약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존재론적이고 경륜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 사고의 결과로 이해된다. 특별히 이런 사실은 경륜적(economy)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엡 1:4-14).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은 성부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선택사상, 성자하나님의 구속사역,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적용과 인침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된다.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근거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사이의 약정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택자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 이를 가리켜 창세전 영원한 구속언약으로 정의한다.
Michael Horton은 개혁신학을 언약신학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그는 성경의 다양한 주제들을 결합시키는 구조적인 틀을 언약에서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성경을 해석하는 틀(frame-work)이지 중심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피력한다.
2. Michael Horton은 성경 자체가 언약을 무조건적인 언약과 조건적인 언약의 두 형식 사이를 구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이런 관점에서 Michael Horton은 시내산 언약을 조건부적인 언약으로, 그 외의 다른 언약들을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이해한 듯하다. Michael Horton은 특별히 시내산 언약을, 이의 준수여부와 관련해 조건부적으로 임하게 될 복과 화를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혜성의 언약과의 연계 속에서 해석하기보다 독립적인 행위언약으로 간주한 듯하다. 시내산 언약은 독립적인 행위언약이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되고 의존돼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신 자율적 규범이다(출 20:1-3). 그러므로 불순종에 언약적 징계가 주어질망정 언약 자체가 근본적으로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전통적인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의 형식을 무조건적(은혜언약)인 것과 조건부적(행위언약)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언약의 연계성과 통일성이란 관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성경전체의 언약은 창세전 구속언약(엡 1:4-6)을 언약의 원형과 뿌리와 씨앗으로 전제할 때, 은혜성의 언약으로 일원화되는 것이 타당하다. John Murray는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Grace에서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 온 전통을 선의적으로 비판하면서 성경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이었다고 은혜언약 일원론을 제시한 것은 탁월한 계시적 안목으로 평가된다.
3. Michael Horton은 5장의‘언약신학의 핵심’이란 제목 하에서 "성경 안에 세 개의 구별되는 언약인 구속언약, 창조언약, 은혜언약이 존재한다는 것과 관련해, 개혁신학 안에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전제한다. Michael Horton은 성경에 계시된 대부분의 언약들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맺으신 역사적 언약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구속언약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 맺어진 영원한 언약이다(엡 1:4-14). 그런 의미에서 구속언약은 성부께서 중보자이신 성자 안에서 한 백성을 선택하여 성령을 통해 죄로부터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주신다는 약정의 의미를 띤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삼위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구속언약 속에는 인류의 타락이 이미 고려되고 있다. 구속의 본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는 방식으로 죄를 사면해 줄 뿐 아니라,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해 준다는 의미까지를 포함한다(롬 3:24).
첫째, Michael Horton은‘영원한 구속언약’과 관련해 일단의 개혁주의 언약신학자들조차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아담의 타락 안에서 정죄 받은 인류로부터 일부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삼기 위해 창세전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선언은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근거한 협약이며 약정이다. 그러므로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 속에는 성부께서 성자의 구속을 통해 아담 안에서 범죄 한 인류 중의 일부를 선택해 주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삼아주신다는 사실이 함의돼 있다. 이는 본질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피로 맺은 약정'(bond in blood)의 성격을 띤다.‘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엡 1:4)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죄 사함이란 주제가 함축돼 있다(엡 1:7).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전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기 때문이다(히 9:22). 따라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사상은 구속계시의 원천이며 구속언약의 원형과 뿌리로 기능하기에 족하다. 이상의 관점은 신학적인 추측이나 사변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라, 계시의존적인 성경적 통찰에서 나온 결과라고 Michael Horton은 강변한다.
둘째, Michael Horton은 구속언약은 영원하며 언약의 당사자들인 삼위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인 반면, 창조언약(창 2:17)과 은혜언약(창 3:15)은 인간 역사 속에서 펼쳐지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맺어진 언약으로 기술한다. Michael Horton은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을 인용해 피력한다.“....인간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행위언약 안에서 아담과 안담 안에 있는 모든 후손에게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되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행위언약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통 은혜언약이라 부르는 두 번째 언약 맺기를 기뻐하셨다.”Michael Horton은 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해‘창조(행위)언약’을 설명한다. Michael Horton이 행위언약을 창조언약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며, 아담이 범죄 전 창세기 1-2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본의가 피조물을 대표하는 아담과의 관계성을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Michael Horton은 창조언약과 관련해“이 언약은 한 의롭고 거룩한 인간 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조항들을 지킬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순종에 근거한 복과 불순종에 근거한 저주를 약속한다. 이것은 은혜의 상태가 아닌 무흠한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성에 관계한다”고 주장한다. Michael Horton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실례로 들면서 창조언약을 기술하는 것은, 자신도 선악과 금령(창 2:17)에 부과된 조건부적 조항을 이중적으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불순종에 죽음의 형벌이, 순종에는 복 곧 영생을 보증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Michael Horton을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Michael Horton은 창세전 삼위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은 이미 자체 속에 인류의 타락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그렇다면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과 맺어주신 창조언약(창 2:17)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한다고 해석하기보다 오히려 불순종함으로 타락하는 것이 구속언약과 관련해 논리적 일관성과 신학적 상응성 및 언약적 연계성이 성립되지 않겠는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엡 1:4)는 신적 작정이 실현되기 위해서 창조-타락-구속-재창조(완성)라는 언약적 패러다임의 필요성은 당위적인 요청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집행시키시는 하나님의 신묘불측하신 주권적인 섭리역사가 아담의 타락을 선용하시는 방식으로 현실화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셋째, Michael Horton은 말하기를‘은혜언약’은 아담의 타락 후 에덴에서 소위 원시복음의 성격을 띠고 선포되었다고 피력한다.이는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가리킨다. Michael Horton은 창조언약처럼 은혜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파트너 사이에 체결된다고 말한다. 은혜언약은 영원한 구속언약과 중보자에 의한 행위언약(율법의 완성)의 성취에 기초한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은혜언약에 따른 제반 약속을 상속받을 수 있다(엡 3:6). 그러므로 두 번째 아담에 의한 창조언약의 성취를 통해 첫째 아담은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온전한 모습과 영생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고 Michael Horton은 기술한다.
G. Clarence Stam :
Clarence Stam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에서 22개의 언약과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을 기술하는 가운데 자신의 언약사상을 피력한다. Clarence Stam은 신적 언약이 협약의 성격보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결속을 강조하는 사랑의 관계성에 무게를 둔다. 필자는 Clarence Stam의 저서 내용 중 일부 주제들을 선별적으로 소개함으로 그의 언약사상을 기술하는 가운데, 본 논고를 위한 참고 자료로 사용할 것이다.
1. Clarence Stam은 1장에서‘언약의 주도권’과 관련해“언약은 기원에 있어서는 일방적이지만, 유지됨에 있어서는 쌍방적이다”라고 전제한다. 이 정의는 언약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언약의 수혜자로서 인간은 언약의 내용을 전인적으로 수용하고 존중해야 함을 함축한다. 언약은 일시적인 협약이 아니다. 언약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일방적으로 맺어진 것이기에 영원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항상 영원하신 분으로 존재하시기에 신적 언약 역시 영원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비록 언약의 수혜자로서 인간이 언약의 요구조건에 불응할지라도 언약적 징계가 주어질망정 언약 자체는 결코 취소되거나 무효화 될 수 없다. 언약의 정체성이 본질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은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엡 1:4-6).
2.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는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유형을 구속언약, 행위언약, 은혜언약으로 구분해왔다. Clarence Stam은“언약은 몇 개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성경에 다양한 종류의 언약이 소개됨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한 언약만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 언약이 여러 시대에 다양한 경륜을 띠면서 나타났을 뿐이라고 해석하면서“모든 계시, 즉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는 태초부터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De. Graaf의 말을 인용한다. 신적 언약의 일원론과 관련해 John Murray도 성경 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 안에서 통합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Clarence Stam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최초로 맺으신 언약을 아담과 맺으신 선악과 금령(창 2:17)에서 찾는다. 당시 아담은 인류의 머리로서 대표성을 띤다. 그러므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은 본질상 인류와 맺은 언약이란 성격을 가진다. Clarence Stam은 선악과 금령을 아담부부와 맺으신 언약으로 표기하면서 행위언약이란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그는 행위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될 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인간 편의 선행과 공로와 수고를 조건으로 형성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는가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언약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맺으신 사랑의 결속관계에 기초하기에 행위언약이란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더 나아가 Clarence Stam은 행위언약이란 용어가 종교개혁 직후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후에 불링거와 올레비아누스 등에 의해 발전되는 과정에서 행위언약이란 개념도 정착하게 되었다고 피력한다. 종교개혁이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1647)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최초의 언약(창 2:17)을 행위언약으로 명시한다. 계속해서 행위언약에 실패해 타락한 아담부부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묵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은혜언약으로 기술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명시된 행위언약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고 있으나, 아담의 타락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돼 주님께서 두 번째 언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다고 진술한다.
3. Clarence Stam이 언약의 정체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자신을 인간과 결속시킨 사랑의 관계로 정의하면서 행위언약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설파한 것은 탁월한 관점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larence Stam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최초로 맺은 언약은 행위언약으로 표기될 수는 없을지라도, 선악과 금령을 통해 에덴동산에서 첫 언약을 맺어주신 사실은 성경적이라고 강조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Clarence Stam이 선악과 금령을 통한 순종의 요구를 선악과 금령에 선행되는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의 연계 속에서 해석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성경에서 순종을 요구하는 언약적 명령은 명령에 앞서 은혜로 베푸신 언약적 사건에 종속되고 의존된다는 것이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원리다(딛 2:14; 벧전 2:9; 골 3:1-3). 믿음이 행함을 요구하듯이 은혜 또한 동일한 원리 속에서 행함을 동반한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증거 되듯이 은혜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금령이 아니다. 선악과 금령을 통해 순종을 요구하는 은혜성의 언약이어야 한다. 그것은 선악과 금령에 앞서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약속해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다(창 1:28). 문화명령이 언약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아담부부 사이가 언약적 관계로 맺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복(beraka)과 언약(berith)의 히브리어적 표현에 있어서 어근이 같다. 그러므로 언약의 내용이 복이고, 복은 언약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한 예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복을 약속해 주셨는데(창 12:1-3), 그 복의 내용이 뒤에 가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창 17:1-8). 이 뿐만이 아니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삼위하나님의 구속언약은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 속에서 체결되는 최초의 언약은 당연히 은혜성의 언약으로 나타나야 한다. 은혜언약의 씨앗에서 은혜언약의 싹을 틔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마 7:17-18). 이 뿐만이 아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명하신 문화명령의 내용(창 1:28)이 노아에게서 반복되면서(창 9:1-2) 이를 노아와 맺어주신 보존언약으로 표기(창 9:8-10)하는 것을 통해 문화명령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 주신 최초의 은혜성의 언약인 사실이 재확인 된다.
4. Clarence Stam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전제하고,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는 것으로 주해하는 것은‘근거가 없고 문제가 대단히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아담 자신이 신실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 어디에도 입증하는 곳이 없다”고 단언한다. Clarence Stam은 아담부부에게 맺어 주신 언약(창 2:17) 안에서“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롭고도 자애로운 공급하심으로 생명과 풍성을 이미 받았다. 이들은 이 선물들을 스스로 획득하거나 더 높은 정도의 완전함을 달성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종하고 의롭고 거룩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했다”고 피력한다. 선악과 금령이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하고 있지 않다는 Clarence Stam의 견해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타락 전 아담의 상태가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심히 좋은 상태’(창 1:31)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그것이 미래지향적인 발전이 불필요할 정도로 완전한 상태는 아닌 것이다. 당시 아담의 상태는 선하게 창조됨으로 무흠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담이 당시 무죄의 상태에서 무흠했다는 것은 창세전 신적 작정에 근거할 때, 일차적 목적에 적합하게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더 이상의 발전과 성숙이 불필요한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된 창조란 의미는 아니다. 흙에 속한 아담의 육의 몸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고린도서 기자의 지적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전 15:47-50). 그것은 처음 에덴동산의 상태가 하나님 나라를 성례전적으로 반영하고 있었을지라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초기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본질상 동일한 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는 경지는 순종을 통해 보상과 대가의 개념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구속사역에 근거해 은혜의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롬 3:21-24). 이런 관점에서 Clarence Stam이 아담부부의 타락을“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의적인 거부”라고 주해한 것은 표면적으로 옳을지라도 본질상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택자들을 죄로부터 구속하신다는 사상이 처음부터 자체 속에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은‘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의적인 거부’로 해석하기보다‘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논리의 일관성과 언약의 연계성이란 관점에서 옳다고 본다. 로마서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지지해 준다.“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본문을 통해 아담 안에서 인간의 불순종과 이로 인한 타락은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덧입는 결정적인 동인과 첩경으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반전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난 필연의 결과였다는 관점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일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실 수 있는 절대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매사에 책임적 존재가 아니시다. 스스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이다.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토기장이의 권한(롬 9:21)이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정체성을 비유적으로 설명해 준다.
5. Clarence Stam은 선악과 금령(창 2:17)을 행위언약으로 표기하는 것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면류관으로 지음 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을 대리해 에덴동산을 관할할 수 있는 일체의 통치권을 부여해 주셨다.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대로 먹을 수 있는 권한도 주셨다. 큰 특권과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은혜는 본질상 자율적인 행함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은 순종을 조건으로 지복의 상태나 영생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이미 받은 은혜에 따른 자발적인 순종의 삶을 요구할 뿐이다. 이때의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동기유발 된 실천적 삶이란 성격을 띠게 된다(엡 5:2). Clarence Stam은 이런 사실을 가리켜“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창 2:16-17) 안에서 요구하신 것은 자발적이면서 온전한 사랑의 반응이다. 이 사랑은 그 사랑에 의해 아담이 어떤 부가적인 이득을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고 바르게 피력한다. 필자는 선악과 금령에서 요구하는 순종의 당위성을 사랑의 발로로 해석하는 그의 관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6. Clarence Stam은 선악과 금령(창 2:17)을 행위언약으로 호칭하기보다‘사랑의 언약’(The Covenant of Love)으로 표기하기를 선호한다. 사랑의 언약이라는 표현이 에덴동산에서 인류와 맺으셨고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이 언약을 가장 잘 특징지을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 그의 변(辯)이다. 선악과 금령을 독립적인 관점에서 언약의 구성요소에만 의존해 행위언약으로 간주해 왔던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본 언약을 하나님의 창조사역 전체(창세기 1장)와 관련시켜‘선 은혜-후 행함’이라는 언약적 틀을 통해 해석하려는 Clarence Stam의 통찰력과 계시적 안목은 탁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Clarence Stam이 선악과 금령에 담긴 언약적 순종의 요구를 보상과 대가가 아닌 선행(先行)하는 은혜의 사건과 관련시켜 본분과 도리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은 괄목할만한 언약신학의 진전이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을 통해 자발적 순종을 요구하는 선행하는 은혜성의 언약이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주신‘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미처 간파하지는 못한 것 같다. 복은 언약의 내용이고 언약은 복의 표현 방식이다. 히브리어에서 복(beraka)과 언약(berith)은 동일한 어근을 취한다.
7. Clarence Stam은 아담부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을 때, 이는 피조물로서 아담부부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 의존적인 삶을 살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한 지존자가 되려는 야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한다(창 3:5-6). 결국 아담부부의 타락은 욕심의 발로로 사랑의 언약을 자원하여 깨뜨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타락사건을 반전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하신 구속의 경륜을 성취시키시는 일에 선용하신다(롬 11:32).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속사를 방편삼아 진행된다는 언약적 명제가 아담의 타락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8. Clarence Stam은 아담부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저주의 말씀 안에 인류를 위한 약속과 소망이 담겨 있다고 피력한다. 뱀에 대한 저주는 훨씬 더 깊고 영적인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 즉 뱀과 여자 사이에, 집합적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단수적인 여자의 후손과 뱀 사이에 적대적인 치열한 전투가 있을 것을 예언한다. 뱀의 실체인 사단에 대항하는 이 전쟁은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남은 자들에 의해 수행될 것인데,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종결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본 여자의 후손언약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영적 전쟁의 승리를 세 차례에 걸친 사건을 통해 기술한다.
첫 번째는 십자가상에서‘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는 선언을 통해서다(요 19:30).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한편으로 뱀에 의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이란 예언의 성취와 연결된다(창 3:15). 그러나 사흘 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치명상을 입힌 사건의 성취로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은 본질상 사단과의 종말론적 전투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최종적인 승리로 장식될 것에 대한 확실한 예고이다.
두 번째는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 가운에 쏟을 때, 하늘 성전의 보좌로부터‘되었다’(It is done)라는 큰 음성이 나는 것과 관련된다(계 16:17). 공기는 공중을 의미하며 이는 사단 세력의 본거지를 상징한다(엡 2:2). 사단의 세력들과의 최후의 영적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계 16:12-16)을 종식시킨다는 의미와 관련해 일곱 번째 대접재앙은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띠고 집행된다.
세 번째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이루었도다’(It is done)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관련된다(계 21:6). 이처럼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속언약(엡 1:4-14)이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통해 원복음으로 가시화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 구속사건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사건에 근거한 사단의 종말론적 패배와 심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마침내 역사 속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계 21:6).
9. Clarence Stam의 언약사상을 정리하면, 첫째로 그는 선악과 금령을 은혜를 입은 인간들에게 자발적 순종을 요구하는‘사랑의 언약’으로 표기하면서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주신 최초의 언약으로 기술한다. 그가 비록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표기하지 않음으로, 순종을 담보로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 것은 해석상의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Clarence Stam이 선악과 금령을 여전히 최초의 언약으로 간주함으로, 언약적 순종의 동인으로 기능하고 있는 문화명령(창 1:28)에 담긴 언약사상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둘째로 Clarence Stam은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어 주신‘사랑의 언약’곧 선악과 금령(창 2:17)에서 찾으면서도, 신적 언약의 원형과 뿌리와 씨앗으로 기능하는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담긴 영원한 구속언약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아담부부의 타락 후, 뱀을 저주하는 말씀 속에 범죄 한 인류를 위해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약속과 소망을 피력하셨다고 기술한다.
셋째로 Clarence Stam은 여자의 후손에 담긴 구세주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보다 진전시킨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에 담긴 적대적인 두 계보에 대한 예언은 노아시대에 통혼의 방식으로 결속돼 급속히 죄를 확산, 심화시킴으로 하나님의 물 심판을 자초한다(창 6:1-2, 5-7). 하나님께서는 물 심판 후, 노아와 만물을 포함한 보존언약을 체결해 주신다(창 9:1-2, 8-10). 이후 여자의 후손(창 3:15) 예언에 담긴 구세주의 언약(원복음)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창 12:1-3)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고 명시화됨으로 언약진전의 획기적인 전환을 맞는다. 아브라함과 맺어주신 언약은 물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후손들이 인간정부를 상징하는 바벨탑을 쌓음으로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을 보여준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에 의존해 살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탑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패역한 인간의 도성(정부/나라)을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아브라함 언약은 바로 이런 인간의 죄악 된 도성에 맞선 거룩한 하나님 나라(신정왕국)의 건설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 예언에 담긴 구세주의 출현은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언약의 성취를 통해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될 것이다(갈 3:16).
10.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손길이 이후 출애굽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형성하시고 저들에게 시내산 언약을 통해 율법을 하사해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백성으로서 저들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명실상부하게 대내외에 알려주셨다. 그러나 율법 수여의 본의는 그것이 비록 생명과 의와 지복을 약속할지라도 그것을 지키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자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갈 3:21).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롬 3:20). 그러므로 율법수여의 본의는“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갈 4:5).
이후 아브라함 언약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시내산 언약을 거쳐 다윗의 왕국 언약이 솔로몬 통치 하에서 성취될 때 절정을 이루게 된다. 열왕기서 기자는 이때의 통일이스라엘의 영적 정체성을 가리켜“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5)고 천명한다. 이는 솔로몬 통치 하의 당시 통일이스라엘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구현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미 4:4; 슥 3:10). 그러나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이스라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솔로몬 이후에 남북으로 분열돼 북쪽은 이스라엘로 남쪽은 유다로 나뉜다. 후에 분열이스라엘은 각각 북이스라엘은 앗수르(BC 722)에, 남유다는 바벨론(BC 586)에 의해 멸망당한다.
11.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기와 때를 맞춰 선지자들에 의한 새 언약 사상이 등장한다. 포로 시대까지 새 언약이란 용어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Clarence Stam은 선지자들에 의한 새 언약 사상의 특징을 기술한다.
첫째, 여호와의 종(메시아)에 의해 성취된 영구적인 화해를 기초한다(사 53:5-6).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율법의 제반 요구가 성취되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의미한다. 죄의 사면은 새 언약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둘째, 율법이 성령에 의해 심비에 새겨짐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소통이 이루어진다(렘 31:33).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포로 된 자로 그 사랑이 동기유발 된 실천적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셋째, 가나안에로의 포로귀환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중건이 약속된다(겔 37:25-26). 이는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는 다윗왕권의 복권과 성전계시의 성취를 의미한다(눅 1:31-33; 요 2:19-21; 마 1:21-23).
넷째, 종말론적인 주제를 포함한다. 이스라엘의 포로귀환과 예루살렘의 중건은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을 함의한다. 그러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현재적(already)이며 미래지향적(not yet)인 이중 구조 속에서 성취될 것을 신약은 시사한다(마 12:28; 눅 17:20-24).
다섯째, 복음의 보편성이 강조된다.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창 12:3)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범주를 넘어 이방인까지를 복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사 49:6).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사람으로 묘사되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참여케 될 것이다(엡 2:13-16).
여섯째, 복음의 보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주의가 극복됨을 의미한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일 뿐임을 선언한다(갈 3:28).
12.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의 특징은 무엇보다 메시아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에 집중된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졌고 원수 관계가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은 물론 인간과 피조물과의 제반 불화의 근본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도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도래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을 죄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사망을 비롯해 일체의 악의 열매들이 철저히 제거될 것을 예언한다(계 21:4). 악의 세력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악의 배후 세력인 사단이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계 20:10). 이상의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맺어 주신‘피로 세운 새 언약’(눅 22:19-20; 마 26:26-28; 1:1) 안에서 마침내 총체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친히 유월절을 폐지하시면서 대신 성찬식을 마련해 주시는 방식으로 새 언약을 제정해 선포하셨다(고전 11:23-26).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게 된다. 피가 죄를 속한다(히 9:22).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표기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비롯한 제반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의 의미를 가진다(눅 24:27, 44).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의 빛 안에서 그 본의가 드러나고 (patent)신약의 정체성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latent) 있다.
H. 요약(Summary) :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괄목할만한 진전을 가져왔다. 특별히 16-17세기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대소요리 문답 및 각종 고백서들을 통해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즈음 성경의 언약사상은 크게 행위언약(창 2:17)과 은혜언약(창 3:15)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은혜언약의 당사자들에 관해 상이한 진술들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삼위일체적 하나님과 사람들, 다른 한편에서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대표한 성부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나머지 한 부류는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 시대 이후로 은혜언약을 두 개의 언약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하나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맺은 구속언약(엡 1:4)과 구속언약에 기초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 또는 선택받은 죄인 사이에 맺은 은혜언약(창 3:15)을 구별했다. 이런 구별은 성경에 의해 분명히 지지를 받는다. 그렇다고 행위언약에 대조되는 두 개의 구별되고 독립적인 언약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은 본질상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복음적인 자비언약(covenant of mercy)의 두 가지 양식(modes)과 두 국면(phases)을 나타낼 뿐이다.
18세기 이후 전통적인 개혁주의 언약사상의 동향은 보편적으로 창세전 구속언약, 행위언약, 은혜언약으로 구분되었다. 원복음의 성격을 담고 있는 은혜언약(창 3:15)은 자체 속에 암시된 구속주의 출현을 위해 역사를 방편 삼아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다 여러 종류의 언약들로 세분화되고 구체화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 언약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보편화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언약적 주제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첫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성부와 성자간의 구속언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근거한 신적 작정을 통해 인간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Michael Horton, Arthur W. Pink, Thomas E. McComiskey, 등에 의해 이런 견해가 개진되고 있다. 무엇보다 성경이 이런 사실을 적극 뒷받침해 준다(엡 1:4, 11; 롬 11:32; 갈 4:4-5; 행 2:23; 딤후 1:9). 아담의 타락이 창세전 신적작정의 결과로 전제될 때, 죄책에 대한 책임공방은 종래의 허용적 작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합목적적이며 전포괄적인 섭리역사의 일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달리 책임적 존재가 아니시다.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용적 작정 논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행동을 동일한 수준에서 평가한 데서 나온 변신론적 용어로 평가된다.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토기장이의 권한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의 정체성을 바르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롬 9:20-21). 하나님은 창세전에 수립하신 신적 작정을 세상역사 속에서 집행해 나가실 때,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성취시켜 나가신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창세전 목적을 이루시는데 언약적 방편과 도구로 선용된다(창 45:5-8; 50:20; 시 105:17-19; 롬 9:17-18). 그러나 인간 편에서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전혀 강제 당함을 느끼지 않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귀결된다(롬 11:36).
둘째,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표해 아담과 맺어주신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선취적(preoccupied)으로 입고 있는 아담부부에게 자원하는 순종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과 지복을 약속하고 있지 않다는 견해이다. Clarence Stam,S. G. De. Graaf, Chul-won Suh등이 이런 해석적 관점을 견지한다. 이는 괄목할만한 언약사상의 진전이다. 은혜와 사랑은 본질상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한다(요일 5:3; 요 14:15, 21, 23). 신적 언약의 연계성이란 주제를 간파할 수 있다면 선악과 금령(창 2:17)은 독립적인 행위언약으로 기능할 수 없다. 선행되는 은혜언약(창 1:28)과의 연계 속에서 마땅히 행할 도리로 해석돼야 한다.
셋째, 선악과 금령은 조건부적인 순종이 아니라 본분과 도리차원의 자율적인 순종을 요구함으로 개별적인 행위언약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견해이다. 오히려‘사랑의 언약’(Clarence Stam)이나‘은총의 언약’(S. G. De. Graaf)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순종은 사랑의 발로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무익한 종의 고백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시해 준다(눅 17:10).
넷째,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주신 최초의 언약은 행위언약(창 2:17/선악과 금령)이 아니라 은혜성을 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이란 사실이다. 행위언약을 본분과 도리 차원에서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로 주셨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선악과 금령에 담긴 자발적인 언약적 순종의 당위성은 선행하는 은혜성의 언약과 불가분의 연계성을 갖게 된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당위성은 이런 맥락에서 설정된 것이다. 문화명령(창 1:28)을 은혜성의 창조언약으로 설정하는 데는 다섯 가지 성경적인 근거가 전제된다. ①신적 언약의 원형인 창세전 구속언약(엡 1:4)이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은혜언약의 씨앗은 은혜성의 언약의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다. ②선악과 금령이 요구하는 언약적 순종은 선행되는 은혜성의 언약(창 1:28)에 의존되고 종속돼야 한다.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다. 상호 보완적이며 의존적이다. ③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주신 문화명령은 자체 속에 언약사상을 담고 있다. 복(beraka)과 언약(berith)은 히브리어적 표현상 어근이 같다. 그러므로 복은 언약의 내용이 되고 언약은 복의 내용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으로 기능한다. ④복의 약속이 언약의 내용으로 재정립된 경우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구체화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1-3을 통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열국의 복의 근원을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복의 내용은 창세기 17:1-8을 통해 아브라함과 맺으신 구체적인 언약으로 명시화돼 갱신된다. Yong-gi Park, Sung-wook Chung, 위스덤 종합주석(창세기, p.26) 등이 이런 관점을 견지한다. 문화명령을 인간에게 맺어주신 최초의 언약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견해는 널리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언약적 통찰력이란 의미에서 신선한 충격을 준다. ⑤문화명령(창 1:28)의 내용은 물 심판 후 노아와 맺어 주신 보존언약(창 6:18; 9:1-2, 8-10)을 통해 언약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구체적으로 재 확약된다. 물론 이 때에 노아와 맺어 주신 보존언약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통해 약속해 주신 구속사상이 전제된다. 다시 말해 구속을 통한 재창조사역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창조-타락-구속-재창조).
다섯째, 신적 언약의 원형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협약된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에 근거할 때, 피조세계에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의 정체성은 본질상 은혜언약으로 일원화된다는 관점이다.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언약도 언약의 연계성이란 관점에서 선행되는 은혜성의 언약에 종속되고 의존되기 때문이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 선악과 금령언약(창 2:17), 아브라함 언약(창 12:1-3)과 시내산 언약(출 19:5-8; 20:1-17; 24:1-8; 신 5:1-3) 간의 상호관계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증해 준다. 은혜와 행함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지 독립된 별개의 두 주제가 아니다. John Murray, Clarence Stam, S. G. De. Graaf 등이 이런 관점을 견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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