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福音主義)에 대하여
1. 복음주의의 발단
근본주의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이라면,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는 17세기 이후 독일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을 품은 경건주의(敬虔主義)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교회에는 점점 신앙의 고정화 현상이 나타나 교리적 정통주의가 만연케 되자, 슈페너(P. Spener 1635~1705)와 후랑케(Francke, 1663~1727)를 중심으로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독일교회에 커다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경건주의 운동이 바로 독일과 영국, 그리고 기타 유럽의 복음주의의 모체가 된 것이다.
복음적이란 용어는 복음에 기초하려는 모든 개신교 교회에 붙여졌다.
‘복음주의’란 말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에도 적용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파 감리교회에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복음주의는 기독교회 기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성경의 권위와 완전 영감설을 강조하고, 의식적 예배보다는 설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짙은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2. 복음주의의 역사
위에서 말한대로 복음주의는 17세기 이후에 생긴 운동이지만,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경(信經)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성경의 교훈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변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시대의 사상과 손을 잡고 다음 내용들을 확인하였다.
• 즉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이며,
•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는 것,
•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
• 하나님은 성육신에서 구속적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
•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
•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것,
• 죄의 권세와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다 같이 실재(實在)한다는 것,
• 하나님은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는 것,
• 역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반적 부활,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
• 복음주의 신학은 또한 초기 중세교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이 주장한 속죄론에서 만족설(滿足說)을 비중 있게 취하였으며,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도 강조하였다.특히 복음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특징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성을 강조하고, 특별히 설교와 관련하여 성경의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 교리와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성령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등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 복음주의는 또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강조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자기계시(自己啓示)를 신뢰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 복음주의는 역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또는 항상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기쁘게 고백하였다.
종교개혁은 제도화된 여러 구조들과 민족주의적 충동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 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다양성이 발생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성례의 본질, 개인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위치, 천년 왕국의 시기, 교회의 정치형태, 성경영감의 정확한 성격,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는 방법, 문화와 국가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하여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오늘의 복음주의 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약간 이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문제로 생각될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한 대략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때 복음주의는 위대하고 표준적인 전통신학을 재차 확인하고,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특별한 역점을 두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나 회심의 성질에 대한 논의는, 비록 회심의 시간에 대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과 이에 따르는 성질의 변화 문제와 함께 계속 전면에 나타났다.
성화의 수단과 가능성도 역시 강조되었는데, 성화의 시간과 성취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가 다시 한 번 있었다. 공동의 영적 삶의 신학이 또한 강조되었는데, 교회의 갱신과 세계의 복음화, 사회의 개선을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대에 와서 복음주의 신학은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서 벗어나 진지한 성경해석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사상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중세 초기와 종교개혁 시대처럼 정통신학의 유산을 활기차게 선택하려는 증거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당시에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충돌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옛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주의와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는 다리로서 인간의 자각을 강조하는 후기 칸트 철학의 결합이었으며, 이 신학은 낭만주의 시대에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 가운데서 복음주의 신학은 그 새로운 견해들과 타협함으로 약화되거나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 침체를 변호하려는 노력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정수를 옹호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도, 자주 그 당시 사상의 많은 부분을 버리고,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대한 독특한 복음주의적인 강조점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형성을 종교개혁시대의 신앙고백에 끼워 넣은 인상을 주었다.
이때 복음주의 신학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어 주던 학파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 이후에 나타난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이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전통을 확인하고, 모든 부분에서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문제점들을 느끼고 그 당시 발생되는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압력은 계속 증대되고, 복음주의는 약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방어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가장 중요한 보루는, 교회와 사회가 파멸을 향하여 돌진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이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미래’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 어떤 활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학자들이 진지하고 학문적인 성경해석 방법의 접근에 공헌하였고, 미국 학자들은 조직신학, 변증학, 윤리학 같은 조직신학의 보조학문 영역에서 열심히 연구하였다. 화란학파와 메노나이트파(Mennonites)는 중요한 여러 종류의 출발점부터 사회적 행동의 신학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의 카리스마 운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통해 강하게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성령의 신학을 선언하였다.
3. 영적신학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영적신학 (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신학 전통의 일부분인 삶의 신학의 방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명상하고 기도하며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신학연구의 목표는 신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학문적인 만족에 대한 유혹은 극복되어야 한다.
즉 신학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산의 날이 가깝다는 자각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의 작업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4.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다. 복음주의는 요약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에 개혁주의가 가미된 운동이라고 하겠다. 복음주의 자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대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현재 여러 교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복음주의사상· 신앙· 사업 확장에 힘쓰고 있다.
비록 사상과 교파의 배경은 다르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을 가지고,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소망스러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할 것은 복음주의가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에 비해 유럽의 복음주의 신학이 약세에 있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경건주의가 내세운 생활위주의 기독교는 얼마 안가서 교리적으로 이질화의 염려가 있으며 현재 한국교회가 점차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서 우려가 크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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