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4. 2. 26. 23:44

복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



1.이끄는 말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이란 말처럼 흔하게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때로는 복음이라는 말이 기독교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이해되는 경우도 잇다. 그런데 복음에 대해 저마다 각각 다르게 이해하는 데서 문제가 되고 있다.

단순하게는 "예수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말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 부요와 건강을 얻어 잘 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조금은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들 중에는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셨으니까 율법은 필요가 없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율법의 반대 개념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율법의 일부분은 아직도 그 기능이 남아 있어서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규범이 되고 있어 복음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어떤 극단론자들 중에는 모든 제도나 형식을 무시하고 지상교회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복음적인 것처럼 주장하는가 하면, 혹자들은 사회 정의 구현이나 복지 증진을 위한 노력이 복음적인 행위로 알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서로 복음적이라고는 하지만 주장하는 내용은 모두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복음에 대한 견해가 각양 각색이라서 이로 인한 교파 분열이나 사이비종파 속출은 물론, 기독교 신앙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기독교가 풀어야 할 당면 과제이다.

현대 기독교가 안고 있는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이해의 접근방법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기존의 방법대로 각 개인이나 교파들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리에 기초해서 복음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복음에 대한 견해 차이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각 교파의 주장이나 교리를 초월해서 성경을 기초로 복음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문제 해결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 교파가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리는 완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거나 오해에서 나온 결과일 수도 있다. 교리는 어디가지나 진보 아니면 퇴보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각 교파에서 현재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리들은 오랜 역사와 함께 여러 차례 수정 또는 보완을 통해 진보 내지는 퇴보된 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많은 수정과 보완을 통해 진보 아니면 퇴보된 가변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교리를 기초로 복음에 대해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견해 차는 더욱 극심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성경은 교리의 근본 원칙으로서 불변적이고 절대적이다. 따라서 수정이나 보완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진보나 퇴보를 허락하지 않는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복음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면 문제 해결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과연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전 포괄적인 절대적인 성경적 해답은 무엇인가?

 

2. 복음이란 말의 뜻

구약성경에서 '복음'이란 용어와 동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동사에 '빠솰' 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proclaim good news), 또는 '승리의 소식을 가져오다(to bring of victory)'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래적인 언급과 함께 '약속하다(promise)'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시편 40편 9절이나 이사야 52장 7절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분사로는 '메바쉘'이라는 용어인데 '하나님의 승리를 전하는 자'라는 듯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 역시 이사야52장 7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잇는 헬라어는 '유앙겔리온'이라는 용어인데 '기쁜 소식(good news)' 또는 '복음(gospel)'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헬라어 명사는 신약성경 가운데 바울 서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유앙겔리제스다이'라는 헬라어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to announce good news)라는 뜻으로 사용고 '유앙겔리테스'라는 헬라어는 '복음 전하는 사람(preacher of the gospel)' 또는 '전도자(evangelist)'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헬라어 어군들은 70인 역본에서 히브리어 '빠솰'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사용한 용어들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복음을 "반가운 소식(good news)" 또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아니면 "복된 소식" 등으로 알고 있다.

성서 대백과에서는 복음을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라고 인간을 부르시는 초청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에 의해 알려지는 한 사실의 선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이라는 용어에 대한 뜻이 여러 가지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 모든 내용들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전해지는 복된 소식"이라는 듯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3. 복음의 내용

앞에서 복음이라는 말의 뜻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복음이라는 말의 뜻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신. 구약성경은 복음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에는 복음이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들은 신약성경은 복음이고 구약은 율법이라고 이해하고 있고, 어떤 자들은 신약성경에서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과 같은 4복음서만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4복음서로 국한되거나 신약성경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섭리 내용으로 그 범위가 넓어진다. 신.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섭리 내용에 나타나는 복음의 내용은 크게 세 구분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의 작정섭리이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3:3-6, 참조 3:7-11)"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 안에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실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 하늘과 땅의 크기나 구조, 만물의 종류와 모양, 또는 우주의 운행과 질서, 역사의 진행과 결과, 또는 인간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예정 등 온갖 만사 만물이 모두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섭리 안에 포함이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섭리는 복음의 내용의 영원한 기초이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으로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을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아직 계시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복음의 내용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하나님의 비밀이 그 근본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복음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면서도 그 근본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일부러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섭리에 대한 불신앙의결과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성숙된 교회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예정섭리에 대하여 심도 깊게 강조하여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의 기초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섭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를 심어서 가꾸려는 자와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의 내용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예정을 포함하는)섭리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불가분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내용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섭리가 포함이 되어져야 하며, 이를 근거로 나머지 복음의 내용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언약섭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1-2)"

인간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작정섭리를 근거로 한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을 세우신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계시하시기 위한 언약섭리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으신 후, 1) 생육번성 2) 땅 정복 3) 만물 통치의 3대 언약으로서의 복을 그들에게 처음으로 언약하셨다. 이 언약은 창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신 언약이다. 아담은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아담과의 언약은 장차 오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해 주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언약이었다. 이와 같은 아담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곧 복음의 내용이며 복을 언약하는 복된 소식임이 틀림없다.

아담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살아남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언약하셨다. 그 후, 노아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다시 복을 언약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의 내용은 1) 자손이 생육하고 번창할 것, 2) 온 땅을 정복하고 살 것, 3) 모든 것을 다스리고 살 것 등이다. 이 언약된 복의 내용은 일찍이 타락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세우신 언약의 내용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은 타라 전 아담과 세우신 언약이, 아담 타락 이후에도 유효하다는 증거로서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아담과 언약하신 복은 아담 타락과 무관하게 반드시 성취해 주신다는 확증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같은 내용의 복을 언약하시고 그대로 현세적이고 모형과 그림자적인 것으로 성취해 주시는 섭리 내용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 섭리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출애굽기로부터 에스더까지의 내용에는 창세기에서 언약하신 복의 내용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성취되어지는 섭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는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번성하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섭리 내용이다.

여호수아와 사사기는 땅을 정복하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언약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섭리 내용이다.

룻기에서 에스더까지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세 번째 언약이 성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욥기로부터 아가서에 이르는 시서에는 복을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양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는 언약대로 이루시려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교훈하며 예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복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 것은 첫 아담과 타락 전에 세우신 언약이 유효해서 둘째 아담 예수를 보내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언약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섭리는 복음의 본론 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성취섭리이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제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4-48)"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섭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한 사역이시다. 하나님께서 첫 아담과 언약하신 복을 이루시기 위해서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는 언약의 자손으로 오셨다. 예수의 잉태나 출생과 성장과정은 모두가 구약의 예언된 언약대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의 모든 사역도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언약의 말씀들을 이루어신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사역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셨다는 것을 밝혀준 바 있다.

복음의 내용에 예수의 잉태와 출생 그리고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등의 내용이 포함이 되는 것은 예수가 구약에서 언약된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언약된 복이 이루어진 예수의 사건은 복음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창세 전에 언약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백성들도 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은 메시야 되시는 예수의 지체들이다. 이것이 바로 지상의 교회 즉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며 천국인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를 가리켜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친 것이다. 죄의 저주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택한 백성에게는 죄와 저주가 없는 영원한 천국의 내림 소식은 복음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신약성경 4복음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4복음서는 예수는 구약에서 언

약한 언약의 자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예수 자신의 증거사역에 대한 기록이다.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제자 즉 사도들이 예수의 약속하신 바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가 그리스도 이시다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내용과 사역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는 사도들의 서신인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사도들의 증거 내용이 서신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 서신들은 신앙의 초보자에 해당하는 내용과 조금 장성한 자에 해당하는 내용, 그리고 성숙해서 이단과 싸워야 할만큼 장성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들로 구분이 가능하다.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최종 승리를 약속하는 언약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결국, 이들 신약 내용들은 모두가 구약에서 언약한 복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이루어질 언약성취 내용으로서 복음의 결론적인 내용이다.

4.복음의 효능

하나님의 작정섭리와 언약섭리 및 성취섭리 내용으로 이루어진 복음은 어떠한 효능을 가지고 있을까?

복음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려면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능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은 참으로 많은 효능을 가지고 잇다. 복음의 효능이 인간계를 비롯한 피조계에 다양하게 미치는 효능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것은 복음의 효능이 인간계에 미치면, 그 여파가 피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피조계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모든 피조계도 함께 따라서 타락하게 되고 인간이 믿어 구속이 되어 회복이 되면 다라서 모든 피조계도 회복이 된다.

복음의 효능이 인간계에 특히 선택된 백성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미치게 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복음은 믿고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결과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밝혀 준 바가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믿음에 이르도록 섭리하셔서 거저 은혜의 선물로 얻어지게 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복음의 내용은 그 진리성이나 너무도 분명하고 정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영접한 자는 믿음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 이같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 복음의 효능인 것이다.

믿음은 막연한 것을 억지로 신임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맹신과는 전연 그 질을 달리한다. 모르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자기 최면에 의한 광신과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복음의 내용이 되는 성경을 잘 깨달아 아는 데서부터 얻어지는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내용의 범위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웅장함이나 치밀함은 물론, 논리성과 합리성에 의해 믿어지게 하는 설득력은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듣는 자에게 믿음에 이르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16)"

복음의 또 하나의 효능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3:6)"고 하였다. 즉 복음의 능력으로 이방인이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공로가 아닌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 복음의 능력에 의한 선물이라면 구원 역시 인간 공로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인간 자신의 선한 공로의 대가나 노력과 열심에 의한 산물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목표하고 달려간다고 해서 붙잡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힘을 모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시다. 인간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예정섭리에 따라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은 것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구원도 모세를 통해 전해진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에 의한 결과였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력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성도를 견고케 한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찌어다 아멘(롬16:25-27)"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효능은 복음을 믿고 구원에 이른 성도로 하여금 견고케 하여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세워주는 것이다.

성도의 견고함은 확신에서 오는 결과이다. 확신은 진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인 복음의 내용에서 얻어진다. 복음을 인하여 견고하게 된 성도는 의심이나 낙심 같은 것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바울 같이 복음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평안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능 때문인 것이다. 구약의 수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어도 조금도 약해지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같은 경우인 것이다.

성도의 견고함이란 믿음의 성숙도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도가 견고하다는 것은 믿음이 장부처럼 자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말이다. 성도의 믿음의 성숙은 삶의 현장에서 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성숙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효능을 그 자체안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이 성도의 신앙을 견고케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며 놀라우리 만큼 웅장함에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깨달은 자의 그 신앙이 견고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견고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도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복음 자체가 있는 효능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이다. 즉 복음의 능력이 성도의 신앙을 자라게 하고 견고케 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5. 맺는 말

앞에서 복음이란 말의 뜻과 함께 복음의 내용과 효능에 대하여 설명했다. 결국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작정하신 것을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성취해 주신 것으로서 택자들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견고케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잇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된다.

지금까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왜곡되고 가려진 복음에 대한 생각은 이제 정리가 되어야 한다. 소극적이고 부분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복음에 대한 이해는 많은 갈등과 분쟁 또는 신학의 좌경 내지는 이단의 속출 등의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으로 순수하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저마다 만져보고 서로가 자기 설명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듯이, 복음에 대한 지엽적인 이해의 결과는 기독교를 자기 교파의 교리만을 고집 하는 현대판 장님들의 토론 광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 복음에 대한 이해를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교리나 신학서적에서 찾으려고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헛수고를 멈추고 올바른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개혁파 정신은 교리수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한 교리 수정과 보완에 있는 것이다. 마땅히 성경에 의하여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교리를 복음진리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몇 개의 나뭇잎이나 꽃잎을 열매의 뿌리로 삼는 격이나 다름없다. 열매의 근원은 나무의 뿌리이듯이 복음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개혁파 교회는 교리에 대한 관심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고 그 복음이 가지고 있는 효능을 발견하고 경험해야 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복음이란 무엇인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럼 비복음적이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복음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복음적인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신자로서 그릇된 처신을 하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들을 행하는 신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권면하였습니다.

복음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혹은 넓은 의미로 ‘복음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 대한 죄인들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장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갈 1:7; 빌 1:27)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명령은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은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은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눅 2:11). 복음과 예수님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1:4).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나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동전의 안팎과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느냐고 물으면 복음의 정의에 따라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단순히 ‘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면 ‘예스’ 대답이 나오고, 복음의 정의를 ‘예수를 믿는 것+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면 ‘노’가 될 것입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대답이고, 후자는 믿음+행위라야 구원이라는 대답입니다. 이 두 갈래의 엇갈린 주장들은 지금도 신학계와 교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의에 붙잡히지 말고 성경 본문 자체에서 해답을 얻는 것입니다. 정의는 신학자들이 내립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학 체계를 새워놓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의 개념을 정의합니다. 문제는 신학자들에 따라 정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움도 주지만 혼란도 일으킵니다. 우리는 학자의 소명을 받지 않은 이상 그들처럼 전문적인 많은 연구를 한 후에 비로소 어떤 결론에 이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성경 본문 자체를 공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하나씩 깨달아 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본문을 내 앞에 놓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깨닫도록 힘쓰십시오. 상식적인 방식이란 문장을 대할 때 문맥이나 단어의 뜻이나 혹은 역사적 배경이나 주제나 중심 교훈이나 저자의 의도나 관련 구절 등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참고 서적이나 쉽게 쓴 좋은 강해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읽는 성경이 내게 가장 은혜로워야 합니다. 이제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떻게 진술했는지를 살피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믿었기에 복음을 위해 목숨도 걸었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로마로 가려고 한 것도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그처럼 귀하게 여긴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복음은 사람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국경과 인종과 문화와 신분과 성별과 나이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입니다. 사도요한은 믿으면 곧 영생(구원)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세상에 이처럼 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라고 하였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은혜 구원’이라고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믿음만 있으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 간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은 타종교에서도 권장합니다. 물론 신자에게는 ‘복음에 합당한 삶’(빌 1:27)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첫 구원에 관한 한,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믿지 않더라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죄의 세상입니다. 죄인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날마다 온갖 죄악이 범람합니다. 죄의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음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능력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복음은 인간을 죄로부터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자신의 체험으로 압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작정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지만 오늘날의 대도시처럼 온갖 종류의 부패와 죄악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으키는 매우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떠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직접 간접으로 죄에 물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이 세상을 벗어난다고 하여도 죄를 안고 떠납니다. 인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우주선을 발사하는 플로리다의 Kennedy Space Center 지역에 삽니다. 집에서도 하늘로 치솟는 로켓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런데 지구의 궤도를 벗어났다 돌아오는 우주비행사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 떠났다가 다시 죄인으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무리 발달했어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복음이라고 믿었습니다. 문화가 인간을 바꾸지 못합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품고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할 것입니다.

 

셋째, 불의한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불순종으로 타락했을 때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하나님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날마다 죽음을 안고 사는 불치병 환자와 같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자신의 관을 끌고 다닙니다. 그럼 살길이 없을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마 19:27).

 

인간의 허무한 운명을 하나님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행하시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가 없는 완전한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힘으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단 지은 죄는 용서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용서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시 51:4).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럼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대신 형벌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달렸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치렀어야 할 죗값을 지불하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주 예수를 자신의 대속주로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입혀집니다. 그 순간부터 에덴동산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교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가지셨던 원래의 선한 뜻이 성취되게 합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안식으로 연결되는 새 창조의 삶입니다.

 

넷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 3:1).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은 살고, 죄 없는 예수님은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죄 없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 복음은 예수님에게 인간의 죄를 씌워 죽게 하였듯이, 죄인에게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씌워 마치 죄인이 죄 없는 자로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롬 4:5)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가치로 보면 이것은 오히려 불의한 일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데도 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품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는 편은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희생시키고 죄인을 풀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공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나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 덮여서 하나님의 눈에 전혀 죄가 없는 의로운 자로 보입니다. 이 일에 어떤 인간도 자신의 경건이나 선행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원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엡 2:9; 고전 1:31).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롬 1:16, 표준새번역)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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