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전심으로 사랑하라 신명기 6:1-9절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늘 있었고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들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읽은 그 유명한 구절인 신명기 6장에서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하는지 우리가 들어야 하는 그 말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이 듣던 말씀이 신명기 6: 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신명기서는 이스라엘이 곧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함으로 시작하였습니다(신 1:5). 요단 그 강변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와는 환경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한 분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이스라엘과 세우셨던 은혜의 말씀을 내리시고 의무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은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동일한 의무도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음성을 잘 듣고 하나님을 알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다’입니다.
Ⅰ. 하나님을 알아라
Ⅱ. 하나님을 사랑하라
III.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아라
오늘 이 신명기의 말씀이 기록되기 약 40년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종된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건져내셨습니다. 또한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십계명과 성막을 지으라는 말씀을 내려주셨고 계속해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의 말씀을 내리신 뒤 채 2년도 안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직전에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20세 이상의 장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인도로 두 번째 세대 20세 이하가 어른이 되어 약속의 땅 경계선에 이르렀고, 그리고 약속받은 유업을 받을 참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갱신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이 책을 두 번째 율법의 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5장에서는 십계명을 반복하셨는데 단순히 반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신님께서는 이 계명들을 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확대하여 모세를 통해서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미 저들은 그 말씀을 처음에 시내산에서 들었지만 그 말씀이 아직 제대로 체험되지 않는 상태에서와는 달리 이제 광야 40년 동안에 체험된 수많은 일들을 겪고 나서 그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의미가 더 깊고 분명하게 들려졌을 것입니다. 신명기 안에서 세 개의 모세의 설교로 나눌 수가 나와 있습니다. 첫번째 설교는 1-4장으로서 여기에서는 과거가 회상이 됩니다. 바로 광야 40년 동안 체험했던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5장에서 26장까지의 두 번째 설교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그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도록 호소함으로써 언약의 의무를 새로운 세대들에게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27장에서 34장까지는 장래의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유명한 신명기 28장은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5장에서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지고 그 언약 안에 들어 있는 계시를 새롭게 자기 것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5:22-33).
오늘 읽은 6장의 중심은 4절과 5절에 있습니다. 4절과 5절이 “들으라(쉐마)! 오 이스라엘아”라는 교훈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겸손한 태도로 듣기를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였던 것은 바로 그들이 오랫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설교를 듣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인가를 지적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아니하였도다”(렘25:4절)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요단강 건너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부터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왜 이스라엘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 온 마음을 기울여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들은 ‘여호와’라는 말이 여기에서 대문자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시는 이름 여호와 즉 나는 영원히 나이다(Yahweh, I am that I am)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이름은 먼저 출애굽기 3장에서 타는 가시덤불에서 이스라엘이 여전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신음하고 있을 동안 모세에게 계시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시면서“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겠다”고 그리고 이 압제받는 백성에게“젖과 꿀이 넘치는 땅을”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17절).
이 약속은 아주 한번도 사람들이 눈으로 보지도 귀로도 듣지도 못했던 특별한 역사를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특별한 역사란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세상의 최대 강국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내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과연 다 애굽에 행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단강변 거기에 모였던 백성들은 자기 부모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잔인하게 압제를 당하였고,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강한 팔로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셨다는 사실을 그들의 부모 세대로부터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 약 47세부터 60세이하의 사람들 중에는 어릴 적 추억들로부터 종살이의 특별한 면모들, 유월절의 특별한 음식들, 급하게 도망쳐 나온 일, 홍해에서 물이 갈라져서 물 사이로 행진한 일 등을 회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핵심은 바로 여호와께서 하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의 열 가지 언약의 말씀을 주셨고, 또 이렇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40년 뒤에 바로 요단강변에서 그들과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셨습니다.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은 서론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5: 6절)
모압 땅 요단강 저편에 서 있는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애굽에서와 광야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미 경험하고 알았습니다. 이미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맛보아서 알았습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첫번째 것이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는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반드시 듣고자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다,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애굽의 신이나 가나안의 신들은 실제로 신이 아니며,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여호와는 하나이시다”라고 우리 개역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점은 ‘주님께서는 나누어지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벨직 신앙고백서 제1항에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은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단순하시다”고 고백했습니다. 달리 말해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만들어 섬기는 다른 신들은 변덕스럽고, 예측 불허하며, 변화무쌍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이런 신들과 같지 않으며, 변덕스럽지 않으며, 스스로 나누어지지 않으며(비록 삼위일체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이시라는 사실 즉 존재에서도 하나이시며, 목적에서도 하나이시며, 행동에서도 하나이시다. 여호와께서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시며, 분위기에 좌지우지되시는 분도 아니시기에, 우리들이나 사람들이나 환경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니시기에, 여러분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그분을 항상 의지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14:8).
“한 분 여호와”이신 “우리 하나님”은 놀라운 확신과 위로를 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니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든든하고 안전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친히 오래전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약속은 입으로만 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 한 가운데 오셔서 성막에 거하셨습니다. 그분은 성막 안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사 때문에 자신의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회복된 에덴동산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하신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대로 하셨고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실하시고 부요하신 하나님께 속해 있는 이스라엘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2장에서 서술해놓은 똑같은 부유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와 허물 가운데 죽었던” 사람들이며, 죄와 사탄의 종노릇했던 사람들이며, 그리고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우리가 살았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4)
애굽에서 바로에게 종살이한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을, 그러나 은혜로서 약속의 땅을 상속할 수 있도록 건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죄와 사탄에게 종살이 하는 아무런 쓸데도 없는 사람들을,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받을 가치가 없는 이스라엘과 당신과의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속박으로부터 구속하셨고, 광야를 지나갈 때에 돌보아 주셨고,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변하시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을 알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Ⅱ. 하나님을 사랑하라
요단강 평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잘 듣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감동시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복음은 백성들 앞에 공포하여서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4절과 5절 사이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은 십계명과도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하고 이스라엘이 왜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살인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즉 “내가 너희를 종된 땅 애굽 땅에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는 안 된다”, 또 그러므로 “너희는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이 말이 모든 계명에 순종해야 할 동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분이 우리와 어떻게 관계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감사로부터, 하나님께서 자비로 우리들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한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요구합니다. 신명기에 있는 모든 계명들은 너희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리시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 의무에 순종하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보잘 것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종살이 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 심지어 그런 미천한 티끌과 같은 자들과 은혜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과분한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는 반응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실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 아주 오랜 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긍휼하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한 것처럼, 이미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셨고,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셨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가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신 구속에 대한 감사함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셨던 동일한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본문에 있는 말씀 그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모든 계명에, 순종은 죄인인 나를 위해서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충만한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마태복음 22:37참조).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행동 즉 우리를 향한 그분의 행동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사람의 모든 감정을 포함하며, 모든 생각을 포함하며, 모든 결정 즉 전 존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자신 안에 나누어짐이 없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한 마음이어야 하며, 마음이 나누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과 손, 영혼과 몸, 모든 것이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께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섬기셨으니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그 사랑으로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이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생활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양식이 그분의 계명에 따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 사랑이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III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큰 사랑을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6절에서 요점을 부연해놓으셨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라.” 새길 것은 4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만 새겨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이 놀라운 복음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생각 속에 항상 새겨져 있어야 했습니다.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 사실상 8절 이하에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고에 먼저 깊이 새겨져야 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손놀림 하나까지도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하는 결과로 결정되어야 했고, 자신들의 집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도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하는 결과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했고, 또 성문 안(너희 “문”)에 일어나는 모든 일까지도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하는 결과로 결정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하는 결과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가운데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작은 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해서 너무도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벗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 그들이 집 안팎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그들과 은혜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반드시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사랑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다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7절의 어려운 명령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선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는 칼이나 화살촉을 날카롭게 가는 것처럼, “날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요점은 부모들이 반드시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새겨주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그분이 그의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 또 그러므로 이제 자녀들이 어떻게 듣고 반응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살아있을 동안 줄 곳, 비록 자신들의 연약함과 여전히 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에게 자신들과 관련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이 살았던 것보다 완전히 다른 시대와 다른 환경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모세 시대에 보았던 것보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생했던 가장 복이 있는 여인이었던 마리아가 보았던 것보다 더 훨씬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 약속이 교회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구세주를 보내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즉 신실하시고 불변 하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증거를 받았던 것보다 더 큰 엄청한 역사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여기에 반응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이렇게 행하신 그분을 “사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셨던 측량할 수 없는 보배를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더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어떻게 하나님께 보여드리라고 하십니까? 신명기 6장에서 우리가 이 복음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함으로 이 사랑을 반드시 보여드리는 것이 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아니 모든 환경에서 이 말씀으로 그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말로나 우리의 행동으로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자녀들이 “그들이 집에 앉아 있을 때에도 이 말씀으로 말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환경은 요단강 저편 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환경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행하신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변하지 않았고, 또 그러하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함으로 되돌려 드려야 할 사랑의 깊이 역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다른 세상이나 욕심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이 복음으로 우리 마음에 가득 채우도록 반드시 전념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이나 차에서 어떤 종류의 음악을 틀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TV 프로나 인터넷에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역사에 대해서 서로 나누면 “우리들이 집에 앉아 있을 때에나, 길을 걸을 갈 때에나, 누워있을 때에나 일어날 때에” 우리들의 삶의 양식, 즉 우리들이 하는 일들이나 또 참아야 하는 일들에 영향이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말씀을 우리들의 손목에 표징으로 묶는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미간에 붙여 표를 삼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생각과 우리들이 눈을 떠서 바라보는 모든 것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집 문설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놓는다는 것은 집 안의 모든 분위기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성 문에 하나님의 원리들을 둔다는 것은 성 안으로 유포되는 불경건한 생각들을 제재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너무도 철저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철저한 사랑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원하십니다. 변치않는 사랑으로 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언약을 세우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죄인들을 주님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이스라엘이나 현재 우리나 이런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보여드림으로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반드시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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