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130630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5)
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의 일입니다. 영국 런던의 신문 편집자가 국회의원, 대학교수, 작가, 사업가 등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 일백 명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을 조사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3년간 밀폐된 생활을 한다면 꼭 지니고 싶은 3권의 책이 있다고 하면 무슨 책인가”라고 했더니 그 결과 응답자의 98%가 첫 번째 책으로 성경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 대부분이 신앙을 가지지 않은 무신론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경은 소외되고 고난을 당했을 때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당신은 지명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장자 에서가 있는데 야곱을 지명하여 불렀습니다(창세기 25:23).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을 지명하여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은 너무도 정확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당신을 지명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지명을 받은 당신을 그의 피로서 씻으시고 구속해 주셨습니다. 성령 보혜사는 성부 하나님의 지명을 받은 야곱을, 성자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을, 성령 보혜사가 당신 곁에서 항상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물건은 소유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집니다. 소유권자가 존귀하면 소유된 물건도 귀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쓰던 붓이나 칼은 국보로 지정이 되어 보호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자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지명하여「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참으로 존귀한 자입니다. 당신이 소유할 거처는 영원한 천국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내 것에 애착을 갖습니다. 열심히 돈을 버는 것도 더 많은 것을 내 것, 내 소유로 만들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 것이 안 된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제가 베트남에 갔을 때 가이드가 베트남에 대해 소개할 때 베트남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한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개인 소유의 농토가 없습니다. 국가 소유의 땅을 집단농장 식으로 농사를 지으니 내 소유라는 애착이 적어 소출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폐단을 인지한 베트남 정부는 토지개혁 정책을 펴서 농토를 모두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답니다. 그리고 생산량의 10%만 세금으로 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농부들이 죽자 사자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사를 지어 쌀 생산성을 크게 높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겨우 먹고 살 정도의 곡물 생산이 이루어졌는데 땅을 개인 소유로 분배하고 나니 쌀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태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쌀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 것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내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일할 의욕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만 내 것에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 이십니다. 출20:3절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찌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은 ‘너는 내 것이야, 내가 지었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다 준거야! 그러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만들지도 말며 섬기지도 말아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니 하나님이 얼마나 애착을 가지시겠습니까?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너는 내 꺼야! 내가 책임진다!'고만 해도 마음이 든든한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뭘 더 바랄 것이 있습니까?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이라 인을 쳐주셨습니다. 종교 개혁을 했던 '루터'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늘 이 구절을 되새기면서 '그래. 나는 하나님의 것이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편이신 데 내가 세상을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인가.' 다시 힘과 용기를 회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마귀가 손을 대지 못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강하시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인디언 최초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육학 박사가 된 바르텟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 한 인디언 소년으로 언청이로 태어났습니다. 흉측하게 생겨서 친구는 물론 심지어 부모의 학대와 형제의 멸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때는 너무 배가 고파서 개와 고양이들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질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장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백인 여자의 눈에 뛰게 되었고, 그 자매는 소년을 데려다가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외로움은 서서히 지나가고 새로운 사랑이 이 아이를 감싸게 되었습니다. 무관심과 멸시 천대를 받던 아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언청이도 수술을 받게 되었고, 당시 인디언 마을에서 최초로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육학 박사가 되어 존경받는 자선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가장 큰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과 감격을 느낄 수 있었던 때는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옷을 입었을 때고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쓰레기 더미에 있을 때 백인 아줌마가 내게 와 손을 잡아 주었을 때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지명하여 부른 것이 한 영혼으로 담대하게 하고, 새 인생을 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
1절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구속했다는 말은 속량했다는 말입니다. 속량이란 '대신 값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또 구속이란 말은 '내가 네 대신 죽었고'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깨달아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41:14절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속해 내심과 같이 우리 성도들은 마귀와 죄의 종이 된 자리에서 구속해 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구속하여 주셨습니까? 벧전1:18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또 고전6: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예수님께서 피로 값을 내시고 사신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역경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폴 스톨츠(Paul Stoltz)라는 분이 [역경지수, 장애물을 기회로 전환시켜라](Turning Obstacles into Opportunities)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리더십 분야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책에 사람들이 역경을 만나게 될 때 보이는 태도가 세 가지라고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등산할 때 보이는 태도를 비유로 해서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첫째가 퀴터(Quitter)형입니다. 퀴터란 포기하는 사람 혹은 비겁자라는 말입니다. 등산하다가 정복하기 힘든 산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그만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캠퍼(Camper)형입니다. 캠퍼란 캠프치고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등산하다 힘든 코스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 자리 펴고 고기나 구워먹고 놀고 쉬고 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극복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리고 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클라이머(Climber)형입니다. 클라이머란 산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등산하다가 아무리 힘겨운 산이 나타나더라도 결국 정복하고 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서 결국은 극복해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세 유형의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념으로 그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바로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퀴터형은 역경지수가 매우 낮은 사람이고, 캠퍼형은 역경지수가 중간 정도의 사람이고, 그리고 클라이머형은 역경지수가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에서 결론적으로 인생의 성공은 IQ가 높은 사람이나 EQ가 높은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AQ 즉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역경은 찾아옵니다. 그런데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이 역경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경지수를 높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역경지수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경을 만날 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역경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둘째, 역경과 맞서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역경이 닥쳐왔을 때 담대하게 맞서라는 말씀입니다.
일본 아오모리 현은 사과 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워낙 사과 맛이 뛰어나서 일본 농산물 수출의 1등 공신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사과가 유명해 지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1991년 큰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마침 사과 수확철이었는데, 이 지역의 사과 중 90%나 되는 거의 대부분이 낙과를 해서, 그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부들이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어떻게 이 역경을 극복할까를 고심하다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다 떨어지고 조금 남은 사과를 수확했습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시작했습니다. “풍속 53.9m의 강풍에도 절대 떨어지지 않은 사과!” 마침 대학입시철이 다가와서, 이 사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행운의 사과”로 알려지면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나중에는 물량이 딸려서 원래 가격의 10배에 팔려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의 사과 맛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이 지역사과는 일본 사과의 대표주자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역경이 다가올 때, 좌절하고 주저앉으면 극복할 수 없습니다. 역경이 다가올 때,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그럴 때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경 앞에 좌절하는 사람은 돕지 않으십니다. 역경과 맞서는 사람들을, 그들을 도우십니다.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성도라고 해서 물 가운데로 지나지 아니하는 것 아닙니다. 불 가운데로도 지나갑니다. 이것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피해 가는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땅 위의 어려움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이 실패해서 망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시험을 통과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라가 망하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물이 침몰케 못하고 불이 사르게 못합니다. 영원히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불 가운데로 행할 때' 어떤 극한 위험이나 재앙을 만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건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물 가운데로 지난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홍해 바다에서 사람들이 맥이 풀려서 '우리는 죽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물을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건지심과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고 책임지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 구절에서 발견되어집니다. 강을 건널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광야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애물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단강이었습니다. 그때는 모맥(밀과 보리)을 거두는 시기이므로 요단 강물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수3:13)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도 언약의 말씀을 앞세우고 나가면 하나님이 정복하게 하십니다. 앞으로 정복할 여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 여리고 성을 돌고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외칠 때에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불 가운데로 행할 때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불같은 시험이 와도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나가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는 친구 다니엘과 같이 언약의 말씀을 지키기로 뜻을 정했습니다(단1:8/3:16-18). 그래서 그들은 풀무 불 속으로도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사를 보내어서 지켜 주었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3:25)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단코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18:8) 절대로 해 받음이 없게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1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5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휴 미실딘' 박사는 아기가 어머니 모태에서 나올 때 느끼는 두려움을 세 가지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떨어지는 두려움입니다.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며 밀려서 떨어지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모태는 한없이 조용했는데 세상에 나오니 각종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버려지는 두려움입니다. 모태로부터 이탈되면서 의지할 것이 없어지게 되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에드 영'의 '지금 나는 두렵다'라는 책에서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 무려 645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두려움의 양상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두렵지 않은 일인데도 자기만 특별하게 느끼는 두려움도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여섯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통의 두려움입니다. 어딘가에 부딪혀 아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아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집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현실감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연약함의 두려움입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됩니다. 노력해도 안 됩니다. 무언가 목표를 가질 때마다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이 때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다섯 번째는 외로움의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혼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여섯 번째는 혼돈의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혼돈 속에 뒤엉켜져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들을 해보셨거나 주위에서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렇게 건강했는데 갑자기 질병에 걸립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해보니까 암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기도해주고 돌보아주지만, 결국 고통 받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뿐인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깊은 외로움의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 모두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인 공황, 영적인 두려움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두려움이 계속해서 침전되면 우울증이 됩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토해내면 분노가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면 신앙의 축복으로 승화됩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움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것을 믿을 때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두려움을 마귀가 주는 심리적 압박입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도록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불속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 속에 수장되는 위험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이기는 성도는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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