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130623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40:1-8)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 명을 상대로 해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에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 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 더 좋은 세월이 오기를 기다리고, 좀 더 발전되기를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무던히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그 많은 세월들 속에 기다림으로 한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좋은 소식은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주)SK가 20-50세 되는 남녀 500여명에게 “하루에 얼마나 웃는가?” 하고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하루에 평균 10회를 웃는데, 8.6초 동안 웃으며 이를 계산하면 하루에 90초 웃고, 80년을 산다고 했을 때, 겨우 30일 정도 웃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걱정하는 시간은 하루에 3시간 6분이고, 80년을 산다고 하면 평균 10여년을 걱정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다림 속에 걱정 근심으로 탄식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존재입니다.
이사야 1-39장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바벨론에 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고, 40-55장은 바벨론 포로생활로 고난을 당한 이스라엘에게 위로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최강국 바벨론이 지배하던 기원전 6세기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 유대인들 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을 빼앗긴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건물들은 파괴되고, 이스라엘의 영적, 정신적 중심지인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좌절과 침체의 늪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어날 소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기간은 잡혀간 백성들에게는 절망입니다.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예루살렘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할 소식은 이제는 복역기간이 끝났고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종으로 복역한 기간이이 70년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우상을 섬기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던 유대민족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려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복역하게 하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형벌이 끝나고 다시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요지입니다. 희망을 잃고 낙담하여 살아가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위로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그러나 이사야는 단순하게 어려운 상황을 참고 견디라는 의미에서 위로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위로는 다시 그 땅이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 희망이 담긴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뭐라고 반복하여 명령하십니까? 내 백성을 “위로하라”(comfort)라는 것입니다.(1절)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의 메시지와 긍정의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그 메시지는 사람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1951년 추운 어느 겨울날 6. 25사변의 전쟁 때 있었던 일이었는데 유엔군에 속하는 해병대 장병들은 압록 강변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부득이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고, 포위당한 가운데서 쫓기던 중 그들은 잠시 바위틈에 은신하여 피곤에 지친 몸들을 쉬고 있었는데 이때 한국 전쟁 취재로 풀리쳐 상을 받은 히긴스 기자가 중공군과의 대전으로 몹시 지친 해병중대를 찾아 얼어붙은 콩을 씹고 있는 어느 병사와 대담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습니까?" 하는 질문을 했을 때 한 병사는 "내일을 주십시오." (Give me tomorrow) 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미래가 약속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는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이사야 40, 1-8에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반복, 강조).” 어떻게 위로하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을 품에 안고 쳐다보면서, 정다이 말하듯이 말하라), 그것에게 외치라(정답게만 말하지 말고, 이번에는 큰 소리를 외치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어 우리를 도우십니까? 그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칭대명사를 눈여겨보십시오. 이사야는 그 분을 '너희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와 실수와 부족함이 다 덮어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어두운 과거, 운명적인 삶, 저주스러운 것들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복음 말씀인 것입니다. 이 복음 소식으로 격려 받을 때 우리 인생은 일어나게 되고 회복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낙심과 절망 속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사49: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십니다. 사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형편을 보고 계십니다. 힘든 형편을 다 알고 계십니다. 왜 힘들어졌는지도 알고 계시지요.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중심을 다 아십니다. 교만함도 고집도 아십니다. 슬픔도 아시고 절망도 아십니다. 열등감도 아시고 죄책감도 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외치라.” 1절에 보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는 히브리어는 [탄후모트] 헬라어는 [파라클레시스]입니다. 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을 주어 새롭게 한다. 힘이 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말할 때 '보혜사' 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바로 '위로자'인 '파라클레시스'입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위로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위로가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인 위로가 있습니다. 물질을 통하여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대단히 중요시하는 요즈음에 이런 위로는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우리교회는 계속해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물질적인 위로를 베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심리적인 위로가 있습니다. 찾아가서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위로와 인정과 격려의 눈길로 상처 입은 심령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손을 잡아 주고 기도함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내며 위로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적인 위로가 있습니다. 내 속 사람, 내 영혼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위로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할렐루야! 죄의 멍에를 메고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멍에를 깨뜨려 주실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리라.”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시고, 소망을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뿐이십니다.
실수와 실패로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믿음의 길에서 좌절한 영혼에 힘을 불어 넣어 주시고 위로의 손길로 일으켜 주실 분 또한 예수님뿐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놀라운 치유의 역사, 변화의 역사, 위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희망으로 미래로 성공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영적인 위로를 받습니다. 가장 큰 위로는 우리가 힘들어 할 때 나와 함께 하여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요?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위로의 내용
2절에서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이사야의 말은 바빌론의 포로생활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고난 받은 백성의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포로생활을 끝내면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사실 포로기의 생활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비해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비해 두 배나 더 힘든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고통이 “배나 더했다”고 함으로써 백성들의 상한 심령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의 죄악은 바빌론의 포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망각했으며, 우상을 섬기며 음란과 방종의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은 포로기 이전의 이사야나 미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백성들의 죄악보다 포로기의 고통이 훨씬 컸다고 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배나 받았다, 이제 위로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위로를 주십니다. 2절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죄수가 특사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장이 말합니다. ‘너는 특사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생활이 끝났다. 나가라. 이젠 자유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최고의 위로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십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네 죄를 대신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너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라. 이제는 죄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집에서 살아라.’ 죄인에게 주시는 최고의 위로인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겁니다. 인생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운명을 영원토록 바꿔주신 것입니다.
1700년대의 위대한 음악가 헨델은 24일간의 침식을 잊은 채 놀라우신 하나님을 주제로 곡을 쓰기 시작해서 낸 곡이 바로 헨델의 '메시야'입니다. 이 메시야의 첫머리는 무엇으로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입니다. 즉 오늘 읽은 본문의 첫 절이 바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기쁜 소식을 외쳐 알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에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닿도록' 외치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닿도록' 무엇을 외치라고 합니까? 역시 2절에서 보면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으며,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다'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지은 모든 죄로 말미암아 치러야 할 죗값을 두 배나 치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자신들의 죗값을 두 배나 치른 것은 아닙니다. 두 배는커녕 본래의 죗값도 다 갚을 수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다만 그들이 갚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다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일 뿐입니다. 여기에 크나큰 위로, 넘치는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보응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죄는 인생의 모든 불행을 가져오는 근본입니다. 죄는 인간을 사탄의 저주아래 놓이게 합니다. 죄는 질병을 안겨주며, 가난과 저주의 사슬로 우리를 묶어 놓습니다. 죄의 결과는 곧 죽음입니다. 죄에 매인 인생은 바로 마귀의 종노릇을 합니다. 불순종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로 삽니다. 언제나 사탄의 지배아래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죄의 사슬에서 자유 할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내가 믿어야지 라고 선택한 분이 있는지요? 내가 안 믿을 수도 있는데 내가 믿어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내가 주님을 믿어주기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쉽게 열면 빨리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바로의 마음처럼 강퍅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부르십니다. 내가 버티면 버틸수록 대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유한하나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다.
‘한 소리’의 외침은 이제 예언자를 향합니다. 그 소리는 예언자에게 ‘외치라’고 부르짖습니다. “너는 외쳐라.” (cry, cry out).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라고 되묻자,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6b-8)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들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나 행복은 풀 같은 우리들의 시간에 잠시 맺혔다가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습니다. 피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사라졌다고 너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앞당겨 가지려고 무리수를 두어가며 조바심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벨론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알렉산더 황제가 유럽을 다 점령하고 난 다음에 바벨론의 수도를 그의 거처로 잡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그가 원정을 다 마치고 돌아와 머문 곳은 바벨론의 수도였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영화에 보면 그 수도가 굉장히 아름다운 곳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바벨론은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수도의 아름다움은 들에 있는 꽃처럼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잡혀와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잘 사는 나라, 이렇게 대단한 나라가 있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내가 너희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 바벨론의 아름다움은 들에 있는 꽃처럼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는 나의 메시지는 시들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늘 끝에 닿을 듯했던 바벨론의 영화는 메디안과 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 100년도 못 되어 멸망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바벨론의 영화는 잠시 피었다가 지는 풀의 꽃과 같은 것이였고 꽃은 떨어지고 풀이 마르듯이 바벨론의 영화도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고은 시인의 짧은 시가 있습니다. . “내려갈 때 / 보았네 / 올라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이게 답니다.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허위단심으로 앞만 보고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천천히 내려오는 길에는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곁에 두고도 그것이 보물인지 모른 채 삽니다. 성취해야 할 목표가 우리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삶의 목표가 있어야 힘차게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목표는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목표가 우리를 이끌도록 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서’ 주님이 누려야 할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Tolstoy, Lev Nikolayevich 1828-1910)는 달을 향해서 “근심과 걱정이 없는 곳을 보았거든 나에게 알려 다오, 모든 것을 버리고 그 곳으로 달려가겠노라”고 하였으며, 바람을 보고도 똑 같은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걱정 근심이 없는 곳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렇게 찢기고 상처받으면서 사는 나약한 것이 인생들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한 소리’가 절박하게 외치라 하신 것은 인간의 유한함입니다. 뒤플레시스 모르네(Duplessis Mornay)는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복을 누리려거든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살면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한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삶의 유한성, 곧 죽음과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걸 알지 못해 우리 삶이 비루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굳게 붙잡으셨기에 죽음을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셨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사실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과 회복과 희망은 영원히 서리라(유효하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화려한 꽃일수록 그것이 시들고 떨어질 때는 더 없이 비참해 보이는 법입니다. 야고보서 1:10-11에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를 주름잡던 영웅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문명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때가 있었지만 얼마 못가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4:35).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13:8). 요한1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풀의 꽃과 같이 덧없는 인생을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외침 속에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한평생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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