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구약 읽기 3 - 레위기
1. 제목
레위기의 히브리어 성서 제목은 앞선 두 책의 원리와 동일하게 책의 첫 낱말인 ‘봐이크라’로 되어 있다. 그 제목은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뜻이다. 70인역에서는 이 책이 제사를 주로 담당하는 레위지파, 더 정확하게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역할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하여 제목을 Leuitikon, 레위기로 바꾸어 번역했다. 국내를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어 번역성서는 ‘레위 지파에 관한’, ‘레위 지파에 속한’ 등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Leviticus’ 레위기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 제목에 대해서는 그 의미의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제목을 레위기로 표기하는 의도의 핵심엔 구약 제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한정적 의도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 제사의 연속성을 은연중에 신약의 그리스도적 갱신 제의에 그대로 접목시키려 하는 무의식적 결탁 본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제목, 레위기는 위의 두 책, 창세기나 출애굽기처럼 70인역의 의견을 따르기에 곤란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봐이크라’,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어떤 심층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이것이 심층 구약 읽기에서 살펴볼 심층 레위기 읽기의 시작이다.
‘봐이크라’, ‘그가 불렀다는 것’, 그 부름의 가능성이 곧 인간 구원의 시작임을 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레위기는 불러냄의 사건과 함께 제사와 규범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제사와 규범의 행위 전반이 ‘이크라’, 불러냄의 신비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제사라는 하나의 큰 의식, 그 의식에 참여하기 원하는 참여자, 참여자를 대신해 제사란 의식의 범주 안으로 대신 들어서는 제사장,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행위의 총체, 그것이 레위기를 신약적 의미로 표현하면 ‘에클레시아’, 교회의 원형임을 분명히 하는 텍스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부터 살피게 될 내용은 ‘봐이크라’,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부름의 실체와 역동성에 대한 묵상으로 채워나갈 것이다.
2. 레위기의 배경과 목적
레위기는 구약성경 중에서도 재미없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책으로 평가받는다. 출애굽기엔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개가 전반부를 차지해 지루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레위기는 전체가 온통 제사 과정과 순서, 규범의 준수 방법 등으로 채워져 있다. 레위기는 출애굽 사건과 그 이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위기의 집필 목적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하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의도로 메워진 것이다. 특히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건축하게 하셨던 성막에서 어떤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들의 삶 속에서 개인과 가족의 성결함을 유지하면서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교훈하는 책으로 보인다. 레위기의 이러한 목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본문은 바로 출애굽기 19:5~6이다.
또한 레위기는 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하나님의 거룩함, - 히브리어 코데쉬란 단어로 1차 의미로는 ‘구별되어 있는 상태’, 2차 의미로는 ‘도덕적 탁월성’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 을 본받아 백성들 역시 거룩해질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문서로 이해된다. 그 핵심구절은 바로 19장 2절에 있다. (11:44~45, 20:7~8, 26, 21:23, 22:31~33 등 참조) 레위기는 이 거룩함의 방법론으로서 삶 속에서 발생하는 거룩함과 반대되는 삶의 악영향들을 제사를 통해 어떻게 제거하며, 또한 이 거룩한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이루어 나갈지를 고민하는 두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3. 레위기 집필목적 속에 나타난 심층성
레위기의 뿌리는 제사 행위에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기 위해 어떻게 제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제사행위의 장, field가 어디냐는 것이다. 제사행위의 장은 출애굽기에 제시되었듯 하나님이 지시하셔서 실제로 그 지시대로 지어지는 지시의 건축성이 배여 있는 성막 안에서였다. 그런데 과연 성막에서 주목할 것은 성막이라는 현상에 나타난 건축물 자체인가. 그리스도론적 의미 맥락 안에서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성막은 건축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성막을 지으라고 지시하신 그 지시자의 지시 행위, 곧 말씀하심에 있는 것이다.
레위기는 제목이 말해주듯 ‘그리고 그가 불렀다.’이다. 하나님, 그가 인간에게 무언가를 부른 것이다. 그 무언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중요치 않다. 하나님, 그가 우리에게 불렀다는 표현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 그리고 그 부름의 기록이 지시 행위로서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성막 안이다. 이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절정을 이루어내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 그가 부르는, 부름과 요청의 장소이며, 그 장소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장소 개념만이 아니라 부르고 있는, 그 부름을 듣고 있는 말씀하심,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제사 행위는 어떤 장소 개념 속에서 태동되는가. 바로 말씀하심 자체인 성막에서 벌어진다. 여기서 제사의 퍼포먼스가 갖는 계명의 확실성은 더 이상 표면 텍스트에서 언급되는 제사 행위의 결과물이나 재료의 지시체, 그것의 명확한 재연에서 찾는 것이 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위해 단번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 말씀하심의 행위 극치, 곧 성막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성막 안에서 벌어지는 제사 행위에 대한 구약의 기록은 성막이라는 하나님 말씀하심의 절정 속에서 인간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존재가 그 절정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그 발견한 흔적을 우리의 영혼에 새겨 넣음으로써 그리스도 자체인 성막과 연합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 과정의 신비는 다시 레위기 진짜 제목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가 불렀다.’ 우리의 행위는 부르신 그 존재, 우리를 불러내신 야훼의 말씀하심, 절정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4. 구조 및 주요 내용소개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되는데, 첫째 부분(1-10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며, 둘째 부분(11-27장)은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내용으로 꾸려져 있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을 다시 세분해 보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이제부터 그 네 부분의 심층성을 묵상해 보자.
5. 제사의 심층성에 대하여
첫 번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류,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한 기록으로 1-7장까지가 이 내용에 해당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이스라엘 5대 제사가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이에 속한다.
5대 제사의 표층적 메시지를 요약하면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관계 유지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제사의 심층적 메시지는 향기로운 제물 행위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관계의 유지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제사행위의 준수를 통한 결과물로 연속되는 게 아니라 향기로운 제물을 인지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발견으로, 즉 과정과 결과, 행위와 상태가 동시적으로 드러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묵상의 중심엔 이스라엘의 5대 제사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이 5대 제사의 모든 제사 행위에서 행위자의 역설적 한계를 극한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제사 행위자에게서 드러나는 모든 행위의 순간순간에서 드러나는 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 외에는 없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그리고 그 희생은 행위자의 제사 행위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며, 그 의미 없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미 있게 한다.
이렇듯 레위기는 하나님 말씀하심이란 그 사건 자체의 주목을 제사행위의 본질로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제사행위의 매개엔 성막 자체인 그리스도 예수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는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속건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다섯 제사에서 제사행위의 모든 순간순간에 해방테제로 존재하고 있다.
순간순간의 해방테제란 무슨 뜻인가. 번제의 신비 속에선 (1장) 소, 양, 염소, 비둘기와 같은 희생의 매개로 구현된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희생의 절정을 완성하였으므로, 이제 신약의 관점 속에선 소, 양, 염소, 비둘기의 제사행위가 눈에 보이는 단순재연의 퍼포먼스가 아닌 우리 시간 속에서의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속으로 해방되는 체험을 뜻함이다.
소제 또한 마찬가지다. (2장) 소금은 산상수훈에서도 기록되었듯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기념으로 볼 수 있다.
화목제(3장)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하나 됨을 위한 영적 만찬이다. 제사장의 나눔과 예배자의 나눔은 층위로 구분되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의 위한 영적 살과 피의 나눔,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이다.
속죄제와 속건제 사이엔 죄에 대한 연쇄성이 내재되어 있다. (4-7장) 속죄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야훼의 계명을 위반했을 때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라면(4:1-5:13), 속건제의 경우는 (5:14-6:7) 범죄 행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에게 실수했을 경우 드리는 제사의 성격이 강하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크게 분리되지 않지만, 속죄제가 인간이란 존재의 필연적 계명파기 본능을 고발하는 것이라면, 속건제는 그 고발되는 속성을 인간의 시간 속에서 펼쳐 보이는, 그래서 범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신비의 인간 시간 속의 체현이란 모티브를 만족시키는 성격을 갖는다는 차이성을 보인다.
6. 제사장 임명과 위임식, 그 심층성에 대하여
레위기 두 번째 부분은 제사장의 임명과 위임식에 관한 규정을 다루고 있다. 8-10장까지의 내용이 그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1-7장에 있는 각종 희생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중시되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자, 즉 헌제자(예배자)와 제사장이 서로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제물 드리는 자, 헌제자 사이를 중재함으로써 중요한 직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희생 제사의 중심에 서 있는 자라 볼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의 심층성에서 부각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장소성인 성막과 그 성막을 향해 제사를 드리려 하는 헌제자인 예배자, 그 헌제자인 예배자와 성막을 매개해주는 제사장과의 역동적 다면성이다. 이 역동적 다면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거대한 장, 혹은 좁은 문과 같은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이다.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보자, 중매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성전을 자신의 몸, 지체들의 몸이라고 밝혔고, 그리스도의 몸은 곧 하나님 말씀의 현현, 곧 말씀하심의 인간 시간 안으로의 돌입이다. 이것이 바로 매개의 신비이다. 성막이 곧 말씀하심이고 그 말씀하심의 핵심에 그리스도 예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때, 제사장과 헌제자는 인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두 상태를 뜻한다.
헌제자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행위로 어떻게든 제사를 드려 자신 안에 드러나는 모든 죄책과 양심, 반대로 모든 문제 해결을 이뤄내고 싶은 욕망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 욕망은 또 다른 헛된 욕망의 바벨탑을 쌓아올릴 뿐이다. 제사장은 이 욕망의 제사 행위를 매개의 신비 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매개, 곧 그리스도 예수의 현현을 담아낼 수 있는 하나의 숨길이다. 이 숨길이 욕망으로 가득한 헌제자의 제사행위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발견하게 해주는 하나의 생명통로가 되어준다.
여기서 제사장은 인간 중심이면서도 철저히 인간 비중심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인간이 중심이 된다는 건 헌제자의 적극적인 행위를 성막의 중심성인 의미 있는 제사 행위로 끌어올린다는 입장에서 그러하며, 인간이 비중심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건 그것이 의미 있는 제사 행위가 될 수 있으려면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지시하심,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하나님 시간에서의 하나님 말씀하심이란 고유함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성막과 제사행위자의 교집합이며, 그 중심엔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인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가 존재한다.
7.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 그 심층성에 대하여
세 번째 부분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 및 부정한 것의 처리 방법에 관한 규정과 속죄일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어 11-16장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이 부분은 음식물(11장), 출산(12장), 피부병과 곰팡이(13-14장), 유출병(15장), 속죄일(16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번째 과정에는 입체적이고 동시적인 심층성의 발견이 요구된다. 과연 이 행위들은 제사행위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 속에서 지켜야 할 규범들만을 뜻하는 걸까. 제사와 삶을 구별해서 본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신약적 사유 방식 속에서 이미 성막은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말씀하심 그 자체가 공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화된 말씀에 반응하는 것, 그것이 곧 제사행위로 수렴되었는데, 이 제사행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따로 떼어내어 만든 특정한 한 때를 말하는 것인가. 아님, 이러한 인간의 시간 자체를 영적 혁신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변화의 전체를 말함인가. 마땅히 후자의 것이다.
새로운 의미의 시간 속에서 제사행위와 일상생활의 규범은 분리될 수 없다. 제사행위가 말하는 절정의 국면들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속속들이 들어오는 것이며,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것이 레위기의 제목 ‘그리고 그가 불렀다.’의 의미핵심이다. 세 번째 부분인 11-16장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말씀하심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제사행위, 그 제사행위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사건으로서 뚫고 나오는 생명의 관통사건, 그 자체이다.
생명의 관통 사건은 거룩, 코데쉬, 곧 구별하는 것으로 일어난다. 부정한 것이 드러남으로써 정한 것이 나타난다. 때론 정한 것이 지시됨으로써 부정한 것이 나타난다. 처음에 그것은 숨을 쉬고 있는 존재성으로 상징되는 동물로부터 시작되어 (11장), 그 숨을 생명의 숨, 영의 숨으로 인지할 수 있는 생명문의 열림으로서 출산으로 이어진다.(12장) 그와 함께 이 출산은 영적 생명 양육의 상태성과 궤를 같이하는 몸의 사건으로 연결된다. 문둥병과 나병, 심지어는 옷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13:47-59 참고) 몸을 두고 벌어지는 모든 상태로부터의 구별된 상태를 하나의 지시사건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유출병 텍스트와 함께 이어지는 텍스트는 속죄일에 관한 규례로 이어진다.
이렇듯 동물, 출산, 문둥병, 유출병과 같이 한 존재에게서 영적 실재로서 일어나는 제사행위로 인한 부정한 것으로부터 정한 것이 도출되는 이 시간은 과연 어떤 시간인가. 인간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발견하는 압도의 지점, 곧 속죄일이다. 신약의 죄인식을 빌리자면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인 죄요, 그 죄를 씻어내는 속죄의 신비는 또 다시 영의 매개가 되는 성막에서의 제사행위로 수렴된다. 그러므로 그 하나의 날, 시간의 신비는 그리스도라는 매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매개성에 대한 자각이 곧 11-16장이 가리키고 있는 지시체에 대한 지시대상의 전부다. 다시 말해 이 행위를 모두 외재화하여 규범화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야훼를 숭배하는 유대교적 우상숭배라면 이 모든 행위를 내적 제사행위로 치환하여 그 퍼포먼스 자체를 내적 제사행위의 절정매개인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향하게 할 때, 무의미의 퍼포먼스는 소멸되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의미의 제사행위만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레위기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한 부르심의 궁극이다.
8. 성결 법전, 그 심층성에 대하여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은 독일의 신학자 클로스터만이 말한 것을 인용해 표현하자면 성결 법전(Holiness Code)이라 불린다. 16장의 속죄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결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한 기록으로서 17장에서 26장까지가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제사행위의 하나님 시간으로의 수렴, 그 심층성이 묵상된다면 17-26장까지의 텍스트는 16장 속죄일을 기준으로 그 속죄일을 상징하는 영적 실재로서의 시간을 견뎌내는 헌제자로서의 인간의 제사행위 지속 전반을 다루는 이른바 영적 규범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피를 취급하는 방법은 (17장) 절정의 매개인 그리스도 예수와 헌제자인 욕망체인 우리 존재의 연합이 새로운 피의 소통을 통해 가능케 됨을 발견하게 하고, 근친상간(18장)의 텍스트는 끊임없는 욕망의 굴레 속에서 뒤섞이는 혈과 육으로 상징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뒤엉킴의 경고와 구별, 기타 법들(19-20장)과 제사장들과 제사에 관한 법(21-22장), 안식일과 절기들(23장), 성막(24:1-9), 신성모독자에 대한 처벌(24:10-23), 희년(25장), 축복과 저주(26장), 서원 예물과 십일조(27장)에 대한 규례들 모두 이러한 절정 매개와의 연합 지속을 가능케 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지시대상의 환기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결 법전 규례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와 개인 간의 관계, 그 윤리적 요청에 대한 상황 질문과 응답의 지침,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제사행위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 말씀하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엔 그 매개가 단 하나, 살아있는 성막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넨 하나님 말씀하심의 궁극이 욕망체로 뒤엉킨 인간의 규범적 행위 전반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다는 생명역설의 발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고민과 종교적 준엄성, 시대 상황에 대한 교훈의 메시지를 과연 하나님 말씀하심에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의심해 봐야 한다.
희년 역시 마찬가지다. (25장) 가난한 자들과 노예, 불균형의 균형이란 희년의 주제는 사회적 정의와 공동체 질서 유지를 위한 합리성의 논구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궁극의 희년사상은 보다 근원적인 해방을 지향한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 억압, 그 고리를 끊어내는 제사행위의 본질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기쁨의 시간이 됨을 뜻하는 의미로서 희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리스도 예수는 이스라엘의 절기 속에서 추수의 정점을 하나의 영적 시간으로 구획화함으로써, 그 추수의 때를 생명에 참여하는 생명의 시간으로 화하고 있다. 절기엔 반드시 축제가 따라온다. 그 축제는 오락이며, 오락은 인간의 감정과 이성, 본능이 쏟아 부어지는 희노애락의 집결체다.
그 희노애락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희노애락을 통해 추수는 개화되고 그 추수의 영적 정점에서 인간의 희노애락으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십자가와 부활이 존재한다. 절기의 절정인 유월절에서 우리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발판으로 삼았으나 인간의 희노애락을 넘어서는 이월의 신비를 맛보게 된다.
함께 보면 도움이 될 문헌
변순복 편저,『히브리어 분해대조성경』, 서울:로고스, 2011.
von Rad, G, Das Formgeschichtliche Problem des Hexateuch, BWANT 78. Stuttgart,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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