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심층 구약읽기 2 - 출애굽기

하나님아들 2015. 9. 22. 17:25

심층 구약 읽기 2 - 출애굽기

 

1. 제목

 

  히브리 성서에서 출애굽기는 베 엘레 쉐모트그리고 이것들은 ~의 이름들이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70인역에서는 출애굽기 19:1에 근거해 제목을 엑스 ~호도스, 길에서부터 벗어난다는 탈출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길에서 벗어난다는 메시지가 가져오는 영적 환기는 신약적 관점에서 두 개의 길로 제시된다. 하나는 인간에게 천형처럼 내려진 인생의 길이 있다면, 또 하나는 그 천형의 길로부터 탈출하는 해방의 길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70인역이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 텍스트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핵심 내용으로 전개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 출애굽기 구조와 내용

 

  창세기가 톨레토트, 족보의 연계성을 가지며, 개인이나 가족 집단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음인데, 이는 광의적 개념에서 모든 존재의 보편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체성, 즉 개인과 공동체의 일치성을 나타내려 하는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큰 골격을 이루는 두 가지 사건,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1~18)과 시내산에서의 율법 수여(19~40)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건은 그 배경 구조에 따라 다시 이집트(1:1~13:16), 광야(13:17~18:27), 시내산(19:1~40:38)의 삼층 구조로 분리해 볼 수 있으며, 성막 건축에 중심을 두고 보면 출애굽 해방(1~18), 율법수여(19~24), 성막 건축(25~40) 등의 삼층 구조로도 분류해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문체의 차이는 확연히 두드러진다. 전반부의 구조가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대한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부에는 기술(descriptive) 문체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를 하나의 영적 몸을 이루는 과정으로 살피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한 존재의 신성한 생명으로의 이행 과정을 다루고 있다면, 율법을 수여하고 성막을 건축하는 내용에 대한 기술, descriptive는 그 이행 과정을 구성하는 생명의 흔적, 기념비를 구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를 토대로 출애굽기의 주요 내용을 세분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탄압당하는 이스라엘

2~6. 모세의 성장과정과 소명받는 부분

7:1~13:16. 열 가지 재앙과 유월절

13:17~15:21. 애굽에서의 탈출과 홍해에서의 구원

15:22~18. 시내산으로의 여정

19~24. 시내산 언약

25~31. 성막과 제의에 관한 가르침

32~34. 언약 파기와 갱신

35~40. 성막 건축

 

3. 출애굽 사건의 시대적 배경

 

  BC 1720년경부터 시작된 힉소스 족의 이집트 통치(15~16왕조)155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가 이뤄진 뒤,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곧 이집트 제18왕조를 창건한 아모세가 힉소스을 몰아내고 수도를 아바리스에서 테베로 옮긴 이후부터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이집트 체제의 변화에 근거한다. 아모세 통치 이전엔 이민족들의 자치 체제였던 것이 아모세 통치 이후엔 이집트 본토인들의 직접 통치 체제로 전환되면서 야곱 후손들은 요셉때 누리던 특권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출애굽기 1:8에 말하는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을 제18왕조 왕 아모세로 보는 견해가 그렇다.

 

 히브리인들의 본격적 고역 시작은 제19왕조에 이르러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19왕조 왕인 세티 1세는 힉소스 족의 옛 수도 아바리스를 재건축하려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고, 이 역사는 그의 아들 람세스 2세에 의해 지속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람세스 2세는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국가의 노예로 전락시켜 건설 현장에 강제로 투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1:11), 그런 맥락에서 람세스 2세가 곧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 바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다.


출애굽기 심층 읽기

 

1) 모세, 그리고 출애굽의 심층

 

  출애굽기 1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으로 시작된다. (7, 12, 20)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을 이집트의 바로는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때문인지 바로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건축사업에 강제로 동원하기에 이르고(1:8~14),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수적 증가를 막기 위해 새로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게 하다가 그 시도가 미완에 그치자 나중엔 모든 남자 아이들을 태어나는 즉시 나일강에 빠뜨려 죽게 하라는 명령에 내리게 한다. (1:15~20)

 이민족인 히브리 민족의 번성과 이를 탄압하는 지배 민족인 이집트의 세력 다툼은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감지와 이에 대한 핍박의 텍스트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출애굽기 텍스트는 그 시각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갈 것을 요청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과 이를 박해하는 세력의 싸움은 민족 번성의 욕구와 이에 대한 억제의 투쟁 양상 자체가 혈과 육의 움직임인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스라엘 민족의 번성은 눈에 보이는 문명성의 창궐이며, 이를 탄압하려는 시도는 얼핏 보면 의로운 백성들을 향한 탄압으로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문명성의 창궐을 또 다른 지배문명의 압도로 이기려 드는 물고 물리는 인간 문명사의 불수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사건 역시 이 문명사의 욕망이 암시하는 궁극적 파멸의 예표로 보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층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에서만 지칭하는 히브리인들을 말함인가. 그렇게만 볼 경우 당시 이집트가 피지배 계급인 히브리인들이 되고 히브리인들이 당시 지배계급인 이집트가 된다면 동일한 세력 다툼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곧 이스라엘 민족이란 개념은 신약적 사유방식 속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닌 이면적 유대인의 상황을 뜻함이며, 이면적 유대인의 발현은 오직 영적 생명의 출현을 갈망하지만 보이는 세계에서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의 탄식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메시지의 성취를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2:23~25, 3:7~9, 26:6~8 등에 재차 언급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부르짖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갖는 상관관계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강제노역으로 상징되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쟁투 속에서 살아남아 지배 계급의 심장 속에서 성장하고(2:1~10), 그곳에서 문명의 절정을 익힌다. 그 뒤, 모세는 민족감정, 피지배 계급을 향한 동질성을 표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고, 이로 인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거기서 광야에서의 탈각과정을 거친다. (2:11~22). 모세의 특질은 피지배계급 출신이면서 지배계급의 그늘 아래서 성장한 양면성을 하나의 사건으로 표출시켜 이 두 기준 모두를 거부하고서 광야를 선택하게 되는 이면적 유대인의 탈각적 대표성으로 볼 수 있다. , 지배와 피지배, 세력 다툼이란 현상계에서 생명의 소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기준 모두가 무너진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생명의 소명을 현상계에 이끌고 들어오는 특질을 가진 것이다. 80세 되던 해에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3장 참고) 바로 그 소명 과정에서 자신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는 선포를 통해 생명의 돌입은 원인과 결과의 존재론에 빚지는 것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지속성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스스로 있는 자, 야훼 하나님의 움직임에 가장 격렬한 저항을 벌이는 것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인해 발각되는 인간의 종교적 욕망이다. 나일 강 물이 피로 변하고(7:14~25), 개구리(8:1~15) (8:16~19), 파리(8:20~32), 악질(9:1~7), 독종(9:8~12), 우박(9:13~35), 메뚜기(10:1~20), 흑암(10:21~29) 등의 재앙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중 여덟 가지 재앙은 당시 이집트의 자연현상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자연현상은 당대의 범신론적 경향과 맞물려 모든 자연현상을 주관하는 신들의 추종욕구를 상징한다. 이는 보이는 세계에서 경배대상을 설정하려 하는 모든 우상숭배적 욕구, 곧 원초적 종교성과 맥을 같이한다. 스스로 있는 자, 야훼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로 대표되는 우상숭배적 욕구의 경배성을 그 기축에서부터 뒤흔드는 존재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 그리고 이어지는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11:1~12:36)은 절정의 이중교차성을 드러낸다. 흑암은 당시 모든 자연현상 중에 최상의 신성을 담보하는 태양신에 대한 절멸을 뜻함이다. 그런데, 이 어둠의 도래와 함께 드러나는 건 모든 우상숭배적 욕구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혈통적 존속의지에 대한 원초적 폭로다. 그것이 바로 장자로 상징되는 인간의 시간이 품고 있는 불멸의지의 개화와 궤를 같이한다.

 

 유월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월절은 흑암과 함께 드러난 장자의 죽음이 창세기 원역사 텍스트에서 밝힌 인간이 품고 있는 욕구의 필멸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욕구의 필멸에 연루되지 않는 해방의 길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절대적 메시지다.

  열 개의 재앙으로 인해 보이는 세계에서의 모든 희망은 절멸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세계를 살게 하는가. 그것이 바로 유월절이 말하고 있는 이월의 신비, 부활의 신비이다. 이것이 어째서 부활이냐 하면 바로 이 유월절 어린 양을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2) 시내산 언약의 심층

 

  출애굽을 이뤄낸 뒤 3개월째가 되던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시내산(호렙산으로도 불림)에 도착하고(19:1), 이곳에서 하나님은 지배와 피지배를 탈각한 존재자의 절정인 모세를 통해 언약을 체결한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20:1~17)

  그런데 이 십계명의 근본을 관통하는 내러티브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 체결을 끝내고(24), 성막을 지을 것과 성막에 봉사할 제사장들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은 뒤(25~31),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들을 받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다. 이 숭배 사건을 통해 처음 받은 십계명의 돌판은 산산이 부서진다. (32:1~19) 그리고 다시 한 번 십계명 돌판이 새겨지는 사건이 등장한다. (34, 34:11~26)

 이 사건이 지향하는 메시지는 상당히 근원적이다. 앞서 유월절 사건이 지향하는 메시지는 유월절을 통해 인간 시간에서 보이는 세계를 통해 진행되는 모든 범재신론적, 다시 말해 우상숭배적 욕구가 폭로되고 오직 하나, 이월하는 생명 신비만이 드러났다면 십계명과 언약 체결의 상태가 처음 것이 절멸되고 두 번째 것이 새롭게 세워진다는 것은 언약의 체현, 다시 말해 언약의 주체인 하나님의 현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는 표면적 세계가 아닌 이면적 세계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면적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저 무용한 헛됨,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가. 이면적 세계의 눈뜸, 유월절의 신비가 현현되는 장소에 주목한다면 이제 표면과 이면의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을 보게 된다.

  처음 돌판에 새겨진 당시의 계명들이 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성격이 강했다면, 두 번째 새롭게 갱신되는 돌판과 함께 주어진 메시지에는 주로 제의적 성격이 강한 규정들(34:11~26)이 첨언된다. 제의적 규정의 본질은 때마다, 절기마다 제사를 제대로 지켜서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의미로 보기에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물을 통해서도 경배 받을 수 없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둘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제의적 규정의 본질은 우리 안에 그 스스로 있는 자를 받아들일 수 없음에 대한 기억과 고백의 의도로만 충만히 채워져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하나님이 압제받은 이들의 탁신과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하나님의 자비, 헤세드 출현의 필연성과 맥을 같이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탄식, 부르짖음은 총괄적 맥락에서 인간이 이끌어가는 모든 표면적 세계의 역사, 그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음에 대한 한계의 자각이다.

 

 그런데, 이 한계의 자각이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것이 바로 신약의 눈으로 보는 구약 텍스트의 새로운 재구성이다.   ‘스스로 있는 자’, 그리스도 예수가 오셨다. 그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 안에서 스스로 있는 자의 현현을 붙잡을 수 없음을 우리 대신 고백하셨다. 마태, 마가에서 외친 외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바로 그것이다.

  그 고백과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움직인다. 하나님의 사랑이 현현되는 유일한 고백의 연결고리가 바로 스스로 있는 자의 육체적 현현,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가 과거 구약 사건들 속에서는 다가오는 그리스도로, 신약 사건 이후에는 나타난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무한의 시간성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3) 계명과 성막의 심층

 

  십계명은 말 그대로 열 마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34:28, 4:13, 10:4). 십계명은 그 성격을 종교적 계명과 사회적 계명의 결합으로 이해하거나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다섯 번째에서 10계명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십계명에서 본질적으로 주목할 내용은 부정, 곧 행하지 말라는 계명의 압도와 그 중심을 채우는 긍정 계명, 행하라는 계명과의 관계에 있다. ‘행하라는 계명은 단 두 가지이다. 안식일 계명과 부모 공경 계명이 그것이다. 나머지 계명은 행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압축되는데, 신약에서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행하지 말라는 계명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계명의 궁극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행하라’, ‘행하지 말라는 계명의 역동성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계명은 단연 첫 번째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다. 이 계명의 실천은 행하지 말라는 계명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려면 스스로 있는 자인 야훼가 누구인지, 그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계약 법전으로 불리는 출애굽기 20:22~23:33 부분에는 히브리 종에 대한 규정(21:1~11), 사형(21:12~17), 사람의 생명이나 몸에 상처를 입힌 죄(21:33~22:15), 처녀를 성폭행한 죄(22:16~17), 종교적 규정들(22:18~31), 재판 절차에 관한 법(23:1~9), 각종 절기들에 대한 규정(23:10~19), 결론적 교훈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 규범들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보호의 텍스트로 메워져 있는데, 이 윤리적 규범의 덕목은 앞서 밝힌 두 번째 십계명 돌판 수여에 기록된 제의에 대한 규정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비, 헤세드에 대한 흔적이 인간이 갖고 있는 구멍 난 자리, 한계의 자리 안에서 발현됨을 지켜보라는 촉구로 볼 수 있다.

 예수는 신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에 대한 해석은 눈에 보이는 가난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는 우리 세계에서 보이는 가난함에 대한 외층성의 돌봄을 아우름과 함께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의미의 한계, 자각의 한계, 욕망공존의 한계를 발견함을 뜻하고 있다.

 

 성막 건축의 이야기는 중간에 금송아지 사건의 삽입으로 인해 표면적 유대인에서 이면적 유대인, 외형성의 성전과 내형성의 성전으로 이행되는 과정의 성취를 그 역시 내적으로 현실화시킨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막 건축에 대해 지시를 받는 이야기(25~31)와 성막을 실제로 건축하는 이야기(45~50)와의 관계 역시 실현성의 의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시를 받는 이야기와 그 스스로 있는 자의 말씀이 실체로 구현되는 실제 건축의 구현과정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새롭게 받은 돌판의 메시지가 매개가 되어 역동적으로 구현됨을 보게 된다.

 

 표면에서 이면으로, 다시 이면에서 표면으로, 외형성에서 내형성으로, 내형성에서 외형성으로 순환되는 이 과정은 성막의 히브리어 미쉬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쉬칸은 동사 샤칸에서 유래했는데, ‘샤칸은 거하다, 머문다는 뜻을 가지며, 이는 곧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뜻한다. (25:8). 이 머무름은 그러나 우리에게는 역동성으로 나타난다. 이유인즉, 우리의 시간성은 움직임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그 움직임 속에서 무한한 신비를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함께 보면 도움이 될 문헌

 

변순복 편저,히브리어 분해대조성경, 서울:로고스, 2011.

강사문 외 4,구약성서개론,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11.

 


출처 : 동서말씀연구회
글쓴이 : 주 원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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