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구약 읽기 1
창세기
창세기는 율법서의 첫 번째 책임과 동시에 구약성서 전체의 첫 번째 책이며, 성서 전체의 포문을 여는 책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만큼 창세기가 중요한 책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본래 히브리 성서는 율법서 각 권의 첫 번째 낱말을 그 책의 제목으로 삼기에 그 원리대로 따르면 창세기는 ‘베레쉬트’로 불려야 옳다. 하지만 70인역은 그 제목을 게네시스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창세기의 기본구조가 히브리어 톨레토트, 곧 족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헬라어 게네시오스나 게네시스는 발생, 기원, 근원, 혈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70인역 성서는 창세기의 주요 모티브를 인간의 발생과 그 근원성에 주목하려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구조, 주요 내용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는 족보나 계보를 뜻하는 톨레도트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족보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2:4 - 창조 이야기의 결론
6:9 - 노아 홍수 이야기
11:27 - 데라 가족 이야기
25:19 - 야곱 이야기 시작
37:2 - 요셉 이야기 시작
5:1 - 아담의 자손들
10:1 - 셈, 함, 야벳의 자손들
11:10 - 셈의 자손들
25:12 - 이스마엘의 자손들
36:1 - 에돔의 자손들
36:9 - 에서의 자손들
이러한 창세기를 내용상의 구분으로 나눠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1장에서 11장에 걸쳐 전개된 원역사, Primeval History이고, 다른 하나는 12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지는 족장사, Patriarchal History이다.
1장과 11장에 나오는 원역사는 하나님의 만물 창조로부터 시작해 인간 창조를 정점으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그들의 퇴락, 에덴에서의 추방, 가인과 아벨의 등장, 최초의 살인, 노아 홍수에 얽힌 일화, 민족의 번성과 분열로 대표되는 바벨탑 이야기 등을 담고 있는데, 이를 특별히 원역사라 부른 것이 그 이야기들을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시대를 가리키기에 그렇다.
원역사의 이야기는 인간의 퇴락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신비적 개입이란 테마로 구성된 네 개의 연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모두 인간의 퇴락상, 그로 인해 벌어진 심판의 양상, 심판과 함께 주어지는 신의 일방적 은혜 등을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원역사의 메시지는 지극히 원형적인 특징을 갖는다. 곧 원형성은 모든 인류의 역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심판과 구원의 테마에 대한 주체적 발견을 시대를 막론하고 요구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원역사와 다르게 족장사는 어느 정도 역사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시대와 공통분모를 갖는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의 하란 땅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에 이어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따라서 족장사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인 것이다.
족장사 내용을 인물 중심으로 배열해 보면 12장에서부터 25:18까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고, 그의 아들 이삭 이야기는 대부분 아브라함 이야기(21,24장)과 야곱 이야기(26장)에 흡수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후 25:19부터 36장까지는 야곱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야곱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의 관계, 야곱과 외삼촌 라반의 관계, 야곱과 그의 아내들과의 관계 등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그 뒤 37장에서부터 50장까지는 요셉의 이야기로 다뤄진다.
족장사 내용의 기본 골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두 가지 약속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땅을 주실 거란 약속과 또 하나는 아브라함, 그로부터 큰 민족이 이뤄지게 할 거라는 약속이다. 하지만 이 두 약속은 실제적으로 족장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성취되지 않는다. 적어도 아브라함에서 요셉으로 이어지는 텍스트에서는 그렇다. 이러한 특성이 시사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 온다는 식의 인간 측에서의 인내와 기다림을 강조하는 것이라기 보단 하나님 말씀하심이 갖는 미래성과 내재성에 대한 주목이다. 미래성과 내재성에 대해선 더 자세히 풀어보기로 하자.
족장사의 시대적 배경
확실히 창세기 원역사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원역사의 주요 내용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을 삼으며, 메소포타미아 문헌 전승과 비교될 만 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는 점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창세기 원역사의 시대적 배경을 산출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족장사의 배경은 다르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족장들의 시대는 대략 중기 청동기 시대, 곧 BC 2000~1500년경으로 추정된다. BC 2000년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민족들의 광범위한 대이동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 역시 그러한 민족 이동의 틈바구니에 끼여 가나안으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층적 의미
1)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퇴락
창세기 원역사 그 중에서도 1장에서 밝히는 바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창조의 독창성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 만물 창조의 중심, 절정에는 인간 창조가 있다. 여섯 째날 인간 창조를 위해 다른 날들의 창조를 배치, 구성했다는 흔적과 의도가 충분히 엿보이는 시점에서 독자들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 우주 만물 창조의 중심에 인간 창조가 자리 잡는다는 것을 공감하게 되며, 그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창조가 구원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재창조, recreation의 모티브를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2장과 3장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의 상호 연관성과 독립성의 관계를 유비해보면 알 수 있다.
여하튼,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이 논점만으로도 독자들은 하나님만이 창조주라는 창조의 독립성을 인식하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선 해, 달, 별 또는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오늘날 범신론이나 범재신론으로 통하는 자연 종교, nature religion이 성행했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은 우주 만물의 창조 중심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만이 창조주요, 절대자로서 유일한 생명의 통로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확실히 창세기 1장의 포인트는 여섯 째 날에 벌어진 인간 창조이다. (1:26~28) 그리고 이 인간 창조는 창세기 2장과 3장 이야기로 넘어가 아담에게 주어진 에덴동산을 잘 가꾸고 지키라는 명령과 결부된다. 하나님 창조의 절정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명령인 에덴동산을 지키라는 것이 곧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반응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유일한 반응을 소홀히 여겼고, 유기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설정해 놓은 일종의 한계선을 넘어서버리고 말았는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의 위반이 그것이다. 여기서 선악과가 뜻하는 바는 금기의 테마만이 전부가 아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배제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또 하나의 양태를 가리킴인데, 이를 두고 퇴락이라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퇴락은 하나님 창조가 가진 만물의 필연적 진보성에 대한 배신이며, 필연적 명령에 대한 방임이 낳은 욕망의 결과다. 그리고 그 방임의 욕망이 곧 뱀을 이끌어내었으며,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그것이 곧 죄의 원형이다. 이러한 원형적 죄, 원죄의 발발로 인해 인간의 양태는 이제 퇴락의 늪 속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것을 창세기에선 에덴에서의 추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2) 인류 문명의 번성과 죄의 지속적 상승
인류의 테마는 문명의 번성과 궤를 같이한다. 창세기 4장에서 11장까지의 이야기는 인류의 문명이 지속적으로 진흥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명의 지속적 진흥은 안타깝게도 원형적 죄, 원죄와 함께 하고 있다. 신약시대 예수가 말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처럼 마치 원죄는 독버섯처럼 인간이 인간답고자 하는, 존엄 있는 삶을 누리고자 하는 기본적 보편양심의 증가와 함께 번져 오르고 있던 것이었다. 가인과 아벨,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은 이러한 인간 문명의 진흥과 함께 피어오르는 방임의 욕망이 낳은 원형적 죄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자각케 하고 이를 자각함으로서 어떤 길이 문명의 번성의 근원되는 말씀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는 하나님 명령을 참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길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
창세기 1장과 11장이 원형의 관계망 속에서 퇴락과 그 반대인 구원의 심연을 설명하고 있다면, 이후 족장사의 이야기는 그 원형의 퇴락과 이를 변형시키는 과정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진단의 메시지로 채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족장사의 출발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엔 그 어떤 인과도 생략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이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지에 대한 설명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 스스로의 힘, 곧 퇴락한 인간의 욕망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역사의 개입으로 인해 가능함을 설명하려 함이다. 그 새로운 역사가 바로 구원역사, 해방역사이다.
4) 족장사의 중심 주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조상 이야기의 족장사는 눈에 드러난 이스라엘 역사의 전개과정을 다루지만 동시에 전체 인류 역사 속에 개입되는 하나님 구원 역사의 전개과정을 함께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중요한 단초가 바로 약속 성취의 지연이란 주제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부르실 때, 하나님은 두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자손을 주겠다는 것과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연의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이뤄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었다. 하지만 그 성취는 역사 속에서의 인간이 기대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했던 것처럼 비옥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자손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이 나타날 거라고 했지만,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보잘 것 없음에 비교한다면 그 예언은 허황된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약속의 성취는 필연적인 하나님 시간, 하나님 역사의 개입이란 측면에서 볼 때엔 참된 진리의 약속임을 보게 된다. 하나님 역사의 개입은 퇴락과 방임의 욕망에 연루된 인간 역사의 시각과 관점을 넉넉히 넘어선다. 그 초월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퇴락한 장을 스스로 버리게 하고 새로운 지평에 눈을 뜨게 한다. 그 새로운 지평은 곧 예수 시대에 예수가 말한 새 하늘, 새 땅의 도래다.
또한 족장사에서 주목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차자 상속의 주제이다. 일반적으로 장남이 상속권이 갖는 게 정상인 당대 사회에서 창세기 족장사에선 이상하게도 장남이 장자권을 향유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새창조를 위해선 옛 것의 지속과 공존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하나님 섭리의 불변성을 뜻함이다. 하나님 섭리의 절정은 창세기 1장에 언급된 창조 절정인 인간 창조의 심미에 집중된다. 1장의 인간 창조가 2~3장의 아담 하와 이야기와 연결되듯, 장자로 상징되는 퇴락한 욕망체로서의 인간이란 껍질이 깨어지고 다시 에덴동산을 지키고 가꿀 수 있는 명령의 회복이 구현되는 새창조의 변혁과정이 차자 상속의 주제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임에 대한 주제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족장사에서는 불임사건이 집요하리만치 집중되어 다뤄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 이 세 여인 모두 불임의 고통 속에 신음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불임의 테마는 차자 상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출산의 신비가 비단 눈에 보이는, 즉 자연 순리와 인간 행위에 의한 결과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현됨을 나타내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다 되었을 때에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는 건 이미 경수가 끊어진 그녀로선 자연의 순리나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명이 들어왔다는 의미로밖엔 다르게 읽을 수가 없다. 이렇듯 불임이란 주제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 말씀의 시대의 돌입이 인간 창조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보면 도움이 될 문헌
변순복 편저,『히브리어 분해대조성경』, 서울:로고스, 2011.
강사문 외 4인,『구약성서개론』,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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