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전신갑주 3 - 의의 흉배를 붙이라.(엡 6:13-14)
지난 주에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는 “진리의 허리띠”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영적전쟁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치렁치렁 땅에 끌리는 옷을 입고서는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들인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정직과 성실로 무장하고 항상 깨어 사단의 공격을 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진리가 우리의 삶이 되어 진리로 균형잡힌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영적 무장인 “의의 흉배”에 대해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흉배의 문자적 의미는 가슴과 등. 가슴의 등쪽을 말하며 무구(武具)로서 흉배는 관복의 가슴과 등쪽에 붙이는 수놓은 헝겊 조각을 말합니다. 이 흉배는 몇가지 중요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이 흉배는 옛날 관복의 가슴과 등쪽에 그 사람의 관직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즉 오늘날 군인의 계급장처럼 멀리서도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얼마나 높은 자인지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왕조 초기에는 문관 일품은 공작 흉배, 이품은 운안 흉배, 삼품에는 백안 흉배, 무관 당상관은 호표, 웅비, 해치 흉배, 대군은 기린 흉배, 왕자, 군은 백택 흉배등을 달았다고 합니다. 또 한가지 흉배를 가슴에 착용하는 중요한 목적은 전쟁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투구를 써서 보호하듯 심장과 오장 육부가 모여있는 가슴과 등을 흉배로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흉배를 비유로 들면서 성도의 영적 싸움에도 이와 같은 영적 흉배가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가장 확실한 영적 흉배는 바로 성도의 ‘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의 흉배”라는 말은 사실 바울이 처음으로 말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9장을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불법과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로 호심경을 삼으신 공의의 하나님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 호심경이 바로 오늘 본문의 흉배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 군인들은 놋쇠로 만든 가느다란 사슬들을 엮어서 흉배를 만들어 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심장과 폐, 위와 간등의 주요 기관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의 흉배에 대한 이러한 대략적인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의로 무장하라.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바입니다.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결코 완전한 의로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 이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애썼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더 큰 절망과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인생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로 죄의 용서를 얻게 하셨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의를 얻어 구원을 성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된 의로움 외에 그 어떤 의로움도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구원을 위한 어떤 효력도 가질 수 없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갖추어야 할 ‘의의 흉배’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의입니다. 이 절대적 의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단의 공격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보통 전투에서도 그렇듯 사단은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연약한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려 합니다. 일격에도 끝장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곳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가릴 수 있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어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사단이 인간의 숨겨진 약점을 하나씩 들추어 내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그 앞에서 담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의가 있다면 모든 사단의 공격과 파상공세를 막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계속되는 죄책감으로 큰 고통 속에 잠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흑판을 든 천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흑판 위에 ‘루터’의 모든 죄를 낱낱이 열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큰 절망 가운데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손이 나타나 열거된 모든 죄목 위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그 손은 대못에 찔려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손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흑판 위에 적혀진 모든 죄의 기록을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이 꿈을 통해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더 이상 죄책감으로 고통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노인이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예수도 믿지 않다가 60이 넘어서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평생 죄만 짓고 살아 온 그로서는 죽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손녀를 불러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손녀는 처음부터 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죄책감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손녀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요한일서 1장 7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고 이 말씀을 듣던 노인은 깜짝 놀라면서 “그런 말씀이 거기 있어?”라고 묻고는 “다시 읽어라”라고 말했습니다. 거듭 그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되뇌이던 그는 갑자기 숨을 헐떡이면서 손녀에게 “내가 이 말씀을 믿고 죽었다”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 누구도 사단의 참소와 독설과 죄에 대한 정죄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오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모든 죄를 사할 수 있으며 우리를 완전한 의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의 의로 여러분의 가슴의 흉배를 삼으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예리한 화살이나 칼도 뚫지 못하며 강력한 총알도 뚫지 못할 완벽한 흉배가 되어 줄 것입니다.
2. 자신의 바꿔진 신분을 드러내라.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 모두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각양각색의 취향과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옷을 입는 스타일, 좋아하는 이상형, 정치적 색깔, 종교, 좋아하는 음식 등 얼마나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자 같은 취향과 성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결속을 다지기도 하며 그러한 취향과 성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은 사회의 이익단체나 정치단체 등을 형성하고 때로 국가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종 이러한 단체나 모임의 결속력을 다지고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옷이나 뺏지 장식품들을 달기도 합니다.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을 보십시오. 나라들마다 그들을 대표하는 색깔과 장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가 혈전을 벌이는 경기장에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색깔의 옷을 입은 관중들이 반으로 나뉘어 뜨거운 응원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멀리서도 저 사람이 누구를 응원하는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바울이 말하는 의의 흉배에는 바로 이와같은 의미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흉배라는 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나라, 직급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이용되었습니다. 그 가슴의 흉배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스도에 속한 군사가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표식과 표지가 있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추구하고 드러내는 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의의 표식이 아닌 형벌과 죄와 저주의 표식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의심해 봐야 할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형벌의 대상에서 은총의 대상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단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사단의 군사에서 하나님의 군사로의 완전한 신분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분이 바뀌면 지금까지 가슴 한 가운데 붙여 놓았던 표식을 완전히 뜯어내고 새로운 신분에 걸맞는 새로운 표식을 붙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떤 표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알아볼 수 있는 거룩과 참됨과 의로움의 흉배를 우리 가슴에 붙이고 그것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이것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주관자들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당해야 할 수많은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금도 살아가는 이유이며, 살아가야 할 목적임을 알기에 철저히 나 자신을 철저히 구별하고 드러내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로움이 방패가 되게 하라.
”를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허리띠”와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많은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의 전쟁은 군사의 수가 많은 편이 이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전쟁에 나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봤자 백해무익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갓 결혼한 신랑이 있습니다(신명기 24:5). 이런 사람은 전쟁에 나가봤자 두고 온 신부 생각에 제대로 싸울 리가 없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디모데후서 2:4).”고 했습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이 자기 먹고 살 걱정이나 한다면 그런 군인을 데리고 무슨 전쟁을 하겠습니까?
바울 당시 로마 제국은 정복의 야욕으로 차 있었습니다. 지휘관들은 전쟁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저 산만 넘자. 그리고 정복하자. 그리하면 마을의 술과 여자들이 모두 너희의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군인들의 마음을 정복에 대한 야욕과 탐욕으로 불태웠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터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무엇으로 가슴이 불타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베소서 6:12)”을 정복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들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저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마음이 “의(義, righteousness)”로 가득 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가슴이 “의”로 불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흉배는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쉽게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성경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로마서 12:2에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 그러나 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보세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린도후서 4:3-4).”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도 그 복음을 가리우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그 사람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막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昏迷)하게 해서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가지고 계셨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도 이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나라, 모든 족속,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불려져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어서 속이 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주님의 간절하고 절박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세상은 주님의 기도처럼 그렇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확장되고 있습니까? 아니요. 이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統治)를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런 나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보세요.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편 2:2-3).” 이 시편을 다윗이 약 기원전 1,000년에 썼다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쓴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의 군왕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들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의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 나서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목마름으로 싸움터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적군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전리품을 챙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熱望)입니다.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땅에 하나님의 의의 깃발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의 지배 밑에서 복음의 영광의 빛이 비추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 가슴이 불타야 합니다.
현대어 성경은 에베소서 6:14절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번역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흉패를 가슴에 붙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정(認定)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정 받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인정을 받는 사람은 의욕이 넘칩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挑戰)합니다. 아무도 해 보지 않은 일을 시도합니다. 모험을 합니다. 반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의욕이 떨어집니다.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자포자기합니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디모데후서 4:7-8).”고 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자기를 위해서 예비된 의의 면류관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에도 “의의 면류관(the crown of righteouness)”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의의 면류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착하고 신실한 종아, 나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자.” 이 한마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 한마디 말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그는 일생을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헌신했던 것입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지금이나 쓸모 있지 우리가 인생을 다 살았을 때는 아무 쓸모 없는 것입니다. 돈이 좋은 시간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정은 영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불타 오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幻想)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결코 감상적(感傷的)인 우리의 느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힘써서 추구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가슴은 하나님의 의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하고는 상극(相剋)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을 믿습니까? 믿으시면 됐습니다. 이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아요. 그러나 “설명할 수는 없어도 나는 그 사실을 믿어요!”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는 게 아니라 많습니다. 이 문제 해결하지 않고 봉사를 해요? 이 문제 해결하지 않고 선교여행을 가요? 여러분, 저는 요즘 꼭 써야 하는 글 하나를 아직 써 주지 못해서 그 부담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밥 맛이 없어요. 잠도 편히 못 잡니다. 꼭 써야 하는 글 몇 장을 쓰지 못해도 그런데……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직 죄의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직 내 삶 속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가슴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질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면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예전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고 합니다. 구습(舊習)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가졌던 예전의 나쁜 습관들 아닙니까? 이 문제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가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수많은 우상(偶像)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탐심(貪心, covetousness)이라는 말은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갈망(渴望)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상숭배가 될 가능성이 짙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십니다. 우상이라는 말만 나오면 하나님 몸에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보세요.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2:8).”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이렇게 싫어 하시는 수많은 우상들이 앉아 있는데, 어떻게 그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수 있습니까?
또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성경에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디모데전서 4:7).고 했습니다. 경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바리새인같이 경건의 외적 모습에 힘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우리의 속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면서 그분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죽도록 사랑해 본 적 있습니까? 죽도록 좋아해 본 적 있습니까? 사랑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해 보세요. 어느 새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을 같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의로 가슴이 불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10).”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도, 하늘의 천사들도 모두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을 그냥 놔 두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붙타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잘 하다가도 시험에 빠집니다. 사탄은 “네가 의의 흉배를 붙이고 다니는구나. 좋아. 하지만 이제 너는 인생의 즐거움과는 작별을 해야 할 거야!” 이렇게 시험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지 않았을 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많았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없었습니까? “나는 이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니까 인생의 즐거움은 생각하지 말아야 해. 내가 잘 하는 일일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때 여러분이 가졌던 기쁨이 어디서 온 기쁨이었습니까?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이 좋은 일을 한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함으로써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잘못된 기쁨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은 즐기는 거야. 왜 그 즐거움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야?” 이런 사탄의 음성이 들려 올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십시오.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비장하고 엄숙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쁨의 얼굴로 살아갑니다. 이 기쁨은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런 기쁨이 아니라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그분이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모든 삶의 즐거움을 잊은 채 비장한 얼굴을 하고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인생을 즐겁게 사셨습니다. 먹는 자리에 빠진 적이 없고, 마시는 자리에 빠진 적이 없고, 잔치 자리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어째 너희 선생은 매일 놀고, 매일 먹고 마시고, 아무하고나 어울리고 그렇게 사시냐?” 이렇게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내가 가진 기쁨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요한복음 15:1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22).
여러분, 이런 기쁨을 맛보셨습니까? 바로 이 기쁨이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기쁨(요한복음 15:11)이고, 바울이 감옥에서도 가지고 있었던 기쁨이고(빌립보서 4:4), 제가 주 안에서 누리고 있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모든 주의 사역자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슴을 보십시오. 크고 작은 수 많은 상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가슴에 웬 상처들입니까? 의의 흉배를 붙이지 않았더니 사탄은 그 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그렇게 상처를 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슴에 의의 흉배를 붙이십시오. 하나님의 의로 여러분의 가슴이 붙타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가슴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여러분 속에서 불타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점령한 적지(敵地)를 탈환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의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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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의 전신갑주 3 - 의의 흉배를 붙이라.(엡 6:13-14) (0) | 2014.10.01 |
[스크랩] 성령의 전신갑주 2 -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엡 6:10-18) (0) | 2014.10.01 |
[스크랩] 첫 번째.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8) (0) | 201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