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주일설교(14.03.23)] / 진리의 허리띠 // 사람의 생각과 주님의 뜻 (이장우 목사)

하나님아들 2014. 10. 1. 23:20

 

 

 

[주일설교(14.03.23)]

/ 진리의 허리띠(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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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14.03.23)]

/ 사람의 생각과 주님의 뜻

 

 

 

 

에베소서 6:13~17 진리의 허리띠 014. 2. 23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이기에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입은 최초의 옷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두렵고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들어 입은 옷입니다. 이것으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과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과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가죽 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이 원시복음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전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어 입은 옷이라는 것이 그들의 마음의 생각들로 인하여 나온 행위들입니다. 그 생각들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생각들이기에 그러한 생각으로 나온 행위로서 만들어 입은 옷은 독사의 독이며 거미줄과 같아서 결코 자신을 가릴 수가 없었음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입은 옷으로는 결코 전신갑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의 열심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에 그 열심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오늘은 전신갑주의 구체적인 부분으로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진리로 허리를 동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허리로 동이라고 하는 말이지만 허리로 동이려면 무슨 띠가 있어야 하기에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허리의 띠를 띤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싸움을 하든지 간에 허리에 띠를 띠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영화를 보니 죄수 여러 명을 잡았습니다.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려서 발목에 걸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리띠를 푸는 것은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지만 허리띠를 묶는 다는 것은 일과 전투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허리띠를 매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사람들의 힘과 열심들로 허리띠를 동이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표현을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내핍생활을 해야 할 때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합니다. 실제로 허리띠를 졸라매면 든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허리띠를 동이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허리띠를 동여매어도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그러한 노력들을 무너뜨려버립니다.

 

이사야 8:9~10절입니다. “9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10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나라들을 의지하려고 할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 민족들이 허리를 동이고 허리에 띠를 띠고 무언가 계획을 하지만 끝내 패망하리라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다 이렇게 허리를 동이자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밴드를 형성합니다. 유럽연합, 환태평양연합, 선진국연합, 개발도상국연합, 유엔도 연합단체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끼리 모이자는 것은 서로 연대하여 살아남자는 것입니다. 이런 묶음은 자기의 이익을 따라 합종연횡 하는 것이기에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연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연합만이 아니라 교회들도 수많은 연합기구들이 있습니다. 그 연합단체들이 과연 진리로 띠를 띠는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띠를 띠자고 하는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띠를 띠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 13~14절을 봅니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 하는 이유는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악한 날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악한 날들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믿음의 싸움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악의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이들과 싸우고 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선다는 것은 진리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서는 것입니다. 서서 진리로 띠를 띤다는 것도 역시 진리가 되신 그리스도로 띠를 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리를 헬라어로 ‘알레데이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진리나 참을 말할 때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진리라고 하면 절대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세상의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잠재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진리라는 것이 나오면 언제든지 자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진리란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로 허리띠를 동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시는데 그 진리가 바로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이단들이 다 성경으로 자기들이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도 역시 성경으로 자기들이 진리라고 합니다. 광주에서 목사님 몇 분을 만났습니다. 한 분은 수백 명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서는 자신은 성경의 사실을 가르쳤는데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십자가를 전한다고 합니다. 또 한 분은 예배당도 크게 잘 짓고 좋은 목사로 소문이 났는데 약 4년 전에 복음을 새롭게 깨닫고서는 교인들 앞에 그동안 복음을 잘 못 전했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최근에 그 예배당도 팔아버리고 상가 건물로 이사하였다고 합니다. 진리가 임하게 되면 늘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알았다고 하는 것도 다 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장악하여 가기에 나는 부인되어집니다. 말로 하는 자기부인이 아니라 진리가 임하면 자신이 진리가 아님이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로 여긴 것들이 풀어지고 날마다 새롭게 진리의 띠를 띠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에서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32절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진리란 세상의 신에 의하여 속고 있는 자들이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런 세상의 비 진리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형제를 섬기는 종의 되는 자유인데 우리는 진리를 알아서 자유 한다는 것을 마치 자신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을 자유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자유롭게 하여야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요8:36).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임을 알아 볼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고린도후서 4:4~5절입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자들을 다시 종으로 삼기 위하여 법을 들고 온 자들이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않은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5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복음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로 허리띠를 동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참된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아닌 표적과 기적을 찾아 가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이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게 되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어지는 13~14절입니다.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택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셔서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으로 부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17~18절입니다.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진리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리의 성령이며 복음이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이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설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15절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무엇이 복음인지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게 됩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8절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진리를 대적하는 일들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띠를 동이라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의 보내신 성령이 무엇을 하시는지 복음으로 드러낸 것이 무엇인지 알고 믿는 것이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로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이제 전투에 돌입한 것입니다. 악의 영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이라는 곳에서 탈출을 각오하고 영적인 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기초체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그 힘의 능력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이며 그 일에 우리가 함께 묶인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무기들을 갖추는데 진리라는 허리띠를 띠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출세가 아니라 출세상이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됩니다.

 

출애굽기 12:11절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유월절 규례입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그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먹으라고 합니다. 그 유월절 양을 먹을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유월절 규례입니다. 우리가 진리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마치 출애굽 하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진리로 띠를 띠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떠날 마음이 없다면 진리로 띠를 띠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35~38절입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진리의 띠를 띤 자라면 주인이 언제 올지 깨어 기다리는 자가 됩니다. 이런 자는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우리가 진리로 허리띠를 띠었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사모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특징은 23~24절을 실재로 믿고 살게 됩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복음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영광을 부수어버리고 영원한 진리만 담기게 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의 나타나실 때에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로 허리에 띠를 띠고 사는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산다는 것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매여 진리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끌고 가시는 것이 사랑의 줄입니다.

 

 

[주일오후설교(14.03.23)]

/ 사람의 생각과 주님의 뜻

 

 

사무엘상 27장 사람의 생각과 주님의 뜻 2014. 3. 23

 

27:1~4. 다윗이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자 사울은 자신이 범죄 하였다고 하고 다윗을 추격하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음이 놓이지를 않습니다. 사울의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았기에 언제 다시 자신을 공격하려고 올지 모르기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에 생각한 대로 행동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600명과 그의 가족들까지 함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전에 아기스에게 갔다가 미친 체 하여 살아남은 곳이 다시 망명을 갑니다. 600명과 그 가족들이 함께 하였다면 상당한 무리입니다. 이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서는 이제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함께 망명길에 나섭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수색하지 않습니다. 이로서 다윗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께 무엇을 물어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인데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 마음에 생각한 대로 행동하였을까요?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선악간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0장에 보면 자기의 가족들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가고 재산이 약탈 되는 것으로 다윗이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로 오히려 아말렉 사람들을 공격하여 사람도 재산도 다 되찾아 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말렉 사람들을 크게 무찌르게 되었기에 그 말도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늘 부닥치는 문제입니다. 원범이가 일 년간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갔습니다. 저에게 묻기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너의 마음은 어떠냐고 물으니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답변은 가든지 가지 않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이 부닥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여 놓았다고 하는 말씀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하는 일을 일일이 물어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이것도 물어보아야 합니까? 점심은 자장면을 먹을지 국밥을 먹을지 물어보아야 합니까?

 

이런 문제를 ‘아디아포라’라는 말을 합니다. 헬라어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신학적인 용어로도 사용되는 이유는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언급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문화와 의식에 관한 문제들입니다. 특히 유대교의 전통과 복음 사이에서 이런 문제가 대두 되었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의 문제, 할례의 문제, 정결규례와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바울은 분명하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식의 문제 같은 경우에 자신은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있지만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지 말고 이웃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식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블레셋에 망명하여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를 보호하려고 한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이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이 가는 곳 까지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부분은 이렇게 봅니다. 물론 중요한 일에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결정하고 가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런 부분은 자기 마음의 생각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5~7. 다윗이 아기스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주어 살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왕에게 땅을 하사 받는다는 것은 주종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왕도에 함께 살 수가 없기에 변방의 한 성읍을 하사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스가 준 성읍이 시글락인데 이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기록이 이미 많을 세월이 지나서 유다 왕에게 편입된 시점에 기록한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이 일 년 사 개월입니다. 아기스 왕이 다윗에게 그 성읍을 허락한 것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도 알았겠지만 그 지역을 통하여 블레셋의 변방을 지키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대로 아기스는 아기스대로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여호수아 15:31절에서는 시글락이 유다 자손의 기업으로 주어집니다. 여호수아 19:5절에서는 시므온 지파의 유업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시글락이 왜 두 지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 경계가 접하여 질 때에 그렇게 됩니다. 이미 여호수아를 통하여 정복하려고 한 땅들이지만 사사시대 이후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다윗에게 주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윗이나 아기스가 생각하지도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대로 일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그 일들을 이루어내십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도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지를 잘 못할 뿐입니다. 감지를 못하는 이유는 늘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에 그러하기도 합니다.

 

8~12. 다윗이 시글락에 살면서 주변 지역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진멸합니다. 이러한 지역 역시 여호수아로 하여금 진멸하도록 한 지역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지역을 공격하면서 진멸을 한 이유가 아기스 왕에게 블레셋 지역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이스라엘 지역이 차지하여야 할 땅을 공격하여 전리품을 챙겨오면서 아기스 왕에게도 마땅히 공납을 해야 합니다. 그 때에 아기스 왕이 어디를 공격하였느냐고 물을 때에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라고 대답합니다. 아기스는 블레셋의 변방을 공격하였으니 자신의 국경이 든든해졌다고 여기며 더구나 유다를 공격하였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는 이제 다윗이 영원히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지역들이 다 누구에게 약속된 땅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땅입니다. 더구나 아말렉을 공격하여 진멸한 것은 사울이 아각왕을 살려온 모습과 대조되기도 합니다. 아말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공격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천하에서 멸하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17: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이러한 말씀이 지금 다윗을 통하여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창세기 15:17~21절입니다.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쪼개진 짐승사이로 횃불이 지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 체결을 통하여 씨와 땅에 대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씨란 하늘에 별처럼 많게 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땅은 지금 다윗이 진멸하여 정복하고 있는 그 땅들이 다 포함되는 지역입니다. 결국 그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한 사람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천년 만에 이루어집니다. 그 씨에 대한 약속은 이천년 만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땅마저 그리스도 안인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이 이루어지는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6:8~9.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다고 언약하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땅을 안 주십니까? 결국 주시고야 맙니다. 10가지 재앙을 보내시고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밀어내게 하여서라고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출애굽기 11:1~3.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2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

 

출애굽기 12:35~36.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신명기 1:6~8. “5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7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 8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얻을찌니라”

 

다윗은 다윗대로, 사울을 사울대로, 아기스는 아기스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지만 결국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말씀들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게 됩니다.

 

이사야 40:1~11.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인생은 풀이며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영원한 말씀 곧 복음만이 영원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믿어졌다면 그 사람도 주의 영원함에 포섭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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