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05.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Rightly Dividing the Word)

하나님아들 2014. 7. 17. 17:32
Dispensational Truth
V

Rightly Dividing the Word

 

5.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쓰기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2:15).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을 “일꾼”으로 언급하고 있다. 어떤 일꾼도 계획 없이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설계도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에 관하여 말씀하실떄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example)와 그림자라. 모세가 성막을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 지시를 받은 것과 같으니 말씀하시기를 ...

 

"보라, 너는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여 준 “모형”을 따라 지으라"(히8:5).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God's Plan and Purpose in the Ages, "

 

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성경해석에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설계도면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설계도면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빌딩의 설계도와 세부계획은 분리된 반면 그것들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의 도면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초래한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비교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기간들과 성경을 구별하는 것은 조화를 이룬다”고 말했으며, 골던 목사(Dr. A.J Gordon)가 “시대에 따른 계획”이란 설교는 마친 후 마차에 어떤 한 청년이 다가와서 “왜 목사님은 매 본문마다 칸막이를 쳐서 구분하십니까?”라고 물었던 일도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Rightly Divide the Word of Truth." 

방법을 배워야 한다.

 

“진리의 말씀”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으며 우리가 배우도록 기록되었다. 일반적인 모든 사람에게 씌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본문은 유대인, 어떤 본문은 교회, 어떤 본문은 이방인에게 쓰여졌다. 이 세 가지 구성은 인류가 이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고전10:32). 성경의 전체는 교회에 관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 교훈을 주기 위하여 쓰여졌다. 교회에 관하여 구약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교회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이었으며, 바울에게 처음으로 계시된 것으로 에베소서3:1-10에서 그에 의해 말해졌다. 구약의 대부분은 한 나라, 즉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창세기의 처음 다섯 장은 창조의 역사이며, 1700년 간의 인류의 역사이다. 그 다음 네 장은 홍수에 관한 역사이다. 10장과 11장은 400년 이상의 인류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신다(창12:1-3). 여기서부터 성경은 유대 민족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구약을 이룬다. 우리가 구약의 약속을 취하여 교회에다 그것들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약속된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이사야의 예언을 교회에 적용하지만,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사1:1)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신약에서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유대적이다. 야고보서는 교회에 쓴 서신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야1:1)인 유대인에게 쓴 글이다. 그러므로 병든자를 위한 “믿음의 기도”는 주로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 주어진 약속이다. 비록 그것이 상황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히브리서에서 많은 신자들은 “떨어져 나간”이란 말에 걸려 넘어진다(히6:4-6). “만약 우리가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면”(히10:26) 하지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거듭난 적도 없는 배교한 유대 기독교인들이 주를 입으로만 고백한다면 이는 실제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형제 유대인들처럼 악한 것이며, 예수를 다시 못 박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몇몇 서신은 보편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같은 서신이다. 아무도 로마서8장을 유대인에게 로마서11장을 교회에게 적용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1:1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으신 것으로 교리책망바로잡음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일은 본보기훈계를 위해 기록되었다(고전10:11).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것을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말씀을 올바로 나눔”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심을 배웠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 가지 사역을 묶어서 같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신다. 아담의 타락에서부터 십자가의 대속까지 그분은 “선지자(Prophet:예언자)”이셨다. 주님은 현재 “대제사장”이시며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왕”이 되실 것이다. 에덴에서 십자가 사이에는 “제단”이 있었으며 십자가에서 왕관 사이에는 “주님의 식탁”이 있으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넘기실 때까지는 “보좌”가 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애와 사역”이란 도표를 참조할 것

 

히브리서1:1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만약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유대인, 교회, 이방인 중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말씀하신 횟수”와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선지자로서 말씀하신 “지나간 때”와 그분의 아들로서 말씀하신 “마지막 날”에 관해서도 구분해야 한다(히1: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합하는 것”과 “나누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와 “구원”, “믿음”과 “행위”처럼 합하신 것과 반대로 “천국과 지옥”, “침례와 거듭남”, “육신적 성품”과 “영적 성품”, “신분”과 “상태”(Standing and State), “교회”와 “왕국”등과 같이 나누신 것을 합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반드시 “때들)”와 “시기들”를 구별해야 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그는 ‘때’‘시기’를 바꾸시며”(단2:21)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는 그 ‘때’‘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행1:7) 욥은 “전능하신 분에게서 ‘때’가 감추어지지 않음을 알면서”라고 증거하였다.(욥24:1) 그리고 잇사칼 자손 중에서 “때들(Times)을 알고”(대상12:32)란 말씀이 있다. 시기들로 우리는 해, 달, 별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변화되는 기후를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현상을 하나님께서 시기를 통제하기 위해 명하신 법칙이다(창1:14). “때들”에 관하여 우리는 “무지의 때들(Times of ignorance)”(행17:30), “이방인들의 때(Time of gentiles)”(눅21:24), “새롭게 되는 때(Time of refreshing)”(행3:19), “회복될 때(Time of restitution)”(행3:21), 그리고 “때가 찬 경륜 안에서 만물의 충만한 때들(Fullness of Times)”(엡1:10)와 같이 일컬을 수 있다.“때들과 시기들”이란 도표를 참조할 것

 

 

 

 

이방인들의 때”이란 어휘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권력을 잡고 있는 때이며 유대인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여전히 “이방인들의 때”가 지속되고 있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결코 정부를 세우거나 왕권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방법으로만 성경을 구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때”와 “영원”을 “시대들”과 “시간”의 “경륜”에 맞춰 구분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를 보면 성경에 언급된 시간대 외에 “두 시대”를 언급하고 있는데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인 알파 Α(Alpha)시대인 “창조 시대”와 끝나는 영원 시대인 오메가 Ώ(Omega) 시대인 “시대들의 시대들”의 있다는 사실이 계시되어 있다. “때(Time)”에는 세 “시대”와 일곱 “경륜”이 있다.

 

세 시대란:

1.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 (The Antediluvian age)

이것은 “타락”에서부터 “홍수”까지

 

2. 현 시대(The Present Ages)

“노아 홍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3. 시대들의 시대(Age of Ages)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부터 “시간의 끝”까지 이 마지막 “시대”는 다시 “두 시대”로 나누어지는데

  1).천년왕국 시대(The Millenial Age)

  2).완전한 시대(The Perfect Age)

 

“천년 왕국” 시대는 앞선 여섯 “경륜”과 연관이 있다.

성경에서 “시대”란 “지각”의 대변동이나, 지구상의 “기후”의 대변화 등을 동반하는 것이다.이것은 흔히 지질학에서 말하는 “시대” 개념과 일치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과 성경이 “시대”란 말의 개념에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홍수의 때에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기 때문에 지상에는 엄청난 지각, 지표, 기후 변화가 있었다(창7:11). 노아의 홍수로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준 커다란 물리적인 변화가 있었고 대기권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고 있는 동물들과 사람들은 수명이 단축되어서 60년에서 10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그의 발이 그 날(천년의 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

{온 땅이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람몬까지 평원처럼 바뀔 것이요, 예루살렘은 높여져서 그곳에 사람이 거하게 되리니.}(스카랴14:4,10)

{살아있는 물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 반은 “앞바다(홍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고 반은 “뒷바다(지중해)”로 들어갈 것이다}(에스겔47:1-12)

이는 지중해보다 1200피트가 낮은 사해가 높여질 것이며 그 물이 넘쳐 남쪽 홍해로 흐를 것이며 소금기가 없어서 큰 고기떼가 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에스겔서 47:1-12절에서 어부들이 그들의 그물을 해변가에 친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12절).

이 “큰 지각변동”은 대홍수 이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의미이며 생명 또한 길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사야65:20에서 볼 수 있는데 천년 왕국에서는

{거기에는 날 수로 되는 어린 아이도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노인도 더이상 없을 것이니, 이는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여 백세가 된 죄인은 저주를 받은 것이 될 것임이라}

즉 100세는 어린 아이로 여겨진다면 대홍수 이전의 므두셀라처럼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도표는 “세 시대”로 나누는데 여기서 “셋”은 하나님의 수인데(성부, 성자, 성령)이며 “7 경륜”이란 하나님의 수인 3과 세상의 수인 4(봄, 여름, 가을, 겨울) 또는 4가지 원소인(땅, 공기, 불, 물)을 합한 완전수인 7과 상응한다.

시대”와 “경륜”의 차이는 “시대”가 지구상의 물리적인 엄청난 기후, 지표상의 변화를 초래하는 반면, “경륜”은 인간 역사의 “도덕적” 또는 “과도기적” 기간을 나타낸다. “경영”은 각 “경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의 경륜에서 경영원리는 “율법(Law)”이었고 현시대의 경영방침은 “은혜(grace)” 이며 다가올 경륜은 “공의(righteousness)”이다.

“시대”와 “경륜”과 “세상의 끝”에 관한 모든 혼란은 헬라어 두단어를 잘못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그 첫 번째 단어는 “Kosmos(코스모스)”이다. “Kosmos”란 뜻은 자연세계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질서를 뜻하는데 마태복음4:8절에서 처럼 세상적인 소유와 민족과 국가의 사상을 포함한다.

{마귀는 다시 주를 아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주께 보여주며}

또한 마태복음 13:38절에서 “밭은 세상이요”와, 누가복음11:50절에서 {‘세상의 기초’가 생긴 이래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는 이 세대에서 찾아내야 하되} 여기서 이 “코스모스”란 단어는 170회 이상 나타나며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단어는 “Aion”으로서 그 의미는 “시대”, “경륜”,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28회 나타나며, 또한 “세상”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들을 얼마나 잘못 번역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3:39,40,49절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을 13:39,40, 49을 보라.

{독보리를 뿌린 그 원수는 마귀이며, 추수는 세상의 끝이요,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니라}

여기서 “세상의 종말”이란 “시대(Age)의 끝”이라는 말이다. 로마서12:2에서 또 같은 예를 볼 수 이다. “너희는 이 세상(age)과 일치하지 말고”, “그들 가운데 이 세상(Age)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고후4:4) “주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며 이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Age)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이라”(갈1:4)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를 통하여 그 분께서 세상(Ages)들을 지으셨느니라”(히1:2)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들(Ages)이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으로 지어진 것을 아나니(히11:3).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세계”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요1:1-3). “시간의 세계”도 지으셨으며 “시대”와 “경륜”을 계획하셨다.

이제 우리는 “시대들”과 “경륜들”을 하나하나 공부해보자.

 

I. 창조의 시대

(THE CREATIVE AGES)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라는 장엄한 선포로 시작한다. 여기서는 "하늘"이란 말이 단수로 쓰인 것을 볼 때 이 때 창조행위는 우리들의 행성에만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운이 있는 은하계의 공간이나 우주 전체라기 보다는 태양계에 한정되어 있다.

   

1. 아담이전의 최초의 땅 (THE ORIGINAL OR PRE-ADAMITE EARTH)

 

이 창조는 말할 것도 없이 무한한 과거이며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창1:1). 이것은 창세기1:3-5에 묘사된 첫째날의 시작이 아니다. , 창세기 1:3-31에 기록되어 있는 6일동안의 일은 하늘들이나 태양계 밖의 우주 공간이 아니라 "형체가 없고 공허한" "물과 어두움"이 스며들기 이전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벧후3:5-7)

아담이 지음 받기 이전의 "창조" 방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냥 단순히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라고 선포한다.

 

 

과학을 참고로하여 살펴보면, 태양계와 최초의 지구에 관한 몇가지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라플라스 성운 가설"이다.

 

 

라플라스 성운 가설 (Nebular Hypothesis)  

 

1796년 천문학자인 라플라스는 태양과 태양계의 행성들과 위성들은 엄청나게 큰 고온의 성운이 발전되어 이루어졌다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거대한 가스 성운 물질이 냉각되면서, 수축되면서 중심을 기준으로 회전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적도 부근이 돌출되고, 극이 평평해지고, 불록 렌즈처럼 가장자리가 길어지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중심 물질이 응축되면서 떨어져 나간 많은 환상 물질도 또한 응축되었다. 중심 부분과 멀리 떨어져 나간 성운 물질은 동일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일부는 늦게 돌아 더욱 멀어지고, 나머지는 뭉쳐지면 더욱 가속되었다. 이로써 가장 바깥의 궤도는 해왕성이 가장 안쪽은 수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과 같은 "위성"들도 마찬가지로 형성되었는데, 성운을 이루는 물질이 각 행성들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떨어져 나가 형성되었다. 이때 형성되다가 남은 흔적으로 목성의 띠를 예를 든다.

또한 지금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이 때 남은 잔재들로 추측되는 소행성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행성들의 파편들이다. 이것들은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주위를 같은 방향으로 공전하고 있으며, 이 소행성들이 행성들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소행성들 거대한 행성인 목성에 근접해 있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태양과 태양계의 행성들이 동일한 원시 성운으로부터 기원한다면 화학적 구성이 동일하며, 스펙트럼 분석과도 서로 일치하여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장 바깥의 행성들이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성이 클수록 천천히 식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성운 가설"이 옳다면 목성과 토성은 여전히 뜨거워야만 하고, 점차 시간이 흘러 지구처럼 적당한 온도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성운설"의 반대 주장으로서 성운설의 바탕인 "가스" 성운은 이 차가운 우주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성운의 이루는 물질은 가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빛나는 유성에서 알 수 있듯이, 유성 입자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입자들이 결합하여 행성들이 형성되거나, 작은 소행성들이 서로 충돌하며 결합하여 뭉쳐졌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가설들은 증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우주에는 "태양계"로 형성되가는 것처럼 보이는 "나선형의 성운"들이 수 없이 많다. 이것들을 고성능의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 이러한 성운들은 가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별들의 잔재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수 많은 성운들은 가스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14년 5월, 아리조나에 있는 플래그스태프 천문대의 슬리퍼 박사(Dr. Slipher)는 슬펙트럼 분석을 통하여 처녀자리 성좌에서 "라플라스 성운설"을 증명하는 성운들을 발견하였다.

성운설에 관한 증거로써는 (1) 행성들의 궤도가 거의 원에 가깝다. (2) 태양의 적도와 거의 같은 선상에서 행성들이 공전한다. (3) 행성들은 태양과 같은 방향으로 공전한다. (4) 각 행성들의 자전 방향이 서로 같다. (5) 각 행성들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는 성운들과 "위성(달)"들이 있다. (6) 지구는 식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뜨거운 철구를 식힐 경우 외부는 금방 식지만 내부는 여전히 뜨겁다. 즉 지구의 지각은 식었지만, 화산 폭발로 알 수 있듯이 내부는 여전히 뜨겁다.

지구가 형성되가고 있을 당시 가스와 금속성 기체로 가득찬 대기로 둘러싸인 용융 상태의 뜨거운 덩어리였다. 이 구형의 덩어리는 복사열을 방출하면서 식어가기 시작했으며 겉 표면에는 얇은 지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식어가면서 지각은 점차 두꺼워졌으며, 지각의 식은 부분은 내부로 가라앉고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진, 화산폭발과 지충이 기울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지구 표면의 산맥들과 다양한 지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태양계가 형성되는 수천년 간 땅은 식어가면서 대기중에 수소와 산소를 방출했으며 이 원소들은 물을 형성하여 지구 위에 떨어졌다. 지구는 매우 뜨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물은 즉시 증발하여 수증기로 변했다. 처음에는 증기 상태로만 존재했으나, 계속적인 순환으로 바다와 대양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바위로만 뒤덥혀 있던 지구 표면은 풍화작용으로 토양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채소와 나무들과 초목들이 나타났다. 그 후 바다 생물과, 물고기 새들이 뒤따랐으며, 다른 생물들이 생겨난 후에야 지상의 동물들이 처음의 땅에 거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구가 이처럼 거주하기 적당한 환경이 되기 위해 걸린 시간을 관한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다. 우리는 알고 있듯이 석탄은 죽은 식물들로 형성된다. 이 석탄이 말들어졌던 "석탄기"의 대기는 탄소산 가스로 가득차 있어 동물들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당시 대기는 축축하고 한증탕의 수증기 같았을 것으며 식물들은 매우 조밀하게 자라나, 양치류와 초목은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지각 변동과 환경의 변화로 석탄기의 거대한 산림은 땅밑으로 묻혔으며, 이 죽은 식물들은 엄청난 압력이 가해져 석탄이 되었다. 이러한 작용이 계속되면서 석탄층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가장 무성한 식물들로 석탄층 6인치를 형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200년이 걸리며, 3피트(약0.9m)의 층을 형성하는데는 약 7200년이 걸린다. 노바 스코티아는 76피트의 석탄층을 측정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22피트, 다른 사람은 37피트를 측정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지구의 석탄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수천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구가 용암상태에서 거주하기 적당한 상태가 되기 위한 수만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성경과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과학은 땅이 형성되기 위한 수천년이 필요하다. 즉 이 모든 시간은 창세기 1:1절의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경이로운 말씀이 해답이다. 이 구절은 땅이 형성되는 모든 기간과 인간이 거주하도록 땅을 준비시키는 모든 기간이 포함된다.

옛날 이집트인인 플라토는 땅과 하늘은 "펄프"의 일종에서 기원하였으며, 사람은 나일강의 진흙에서 발생하였다고 가르쳤다. 이집트의 다른 현자들은 세상은 "날개 달린 달걀"에서 부화하여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웠던"(행7:22) 모세는 왜 날개 달린 달걀에서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모세에게 계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2. 혼돈된 땅 (THE CHAOTIC EARTH)

 

"태초의 땅"이 창조된 후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났다. 분명히 이 땅은 가장 아름답고 땅위에는 식물들과 고기와 가축들이 덮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이 상태가 지속되었는지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물과 어둠속에 잠겼다(창1:2). 이 사건이 태초가 아님을 이사야45:18절에서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늘들을 창조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나님은 스스로 땅을 조성하고 만들었으며, 그는 그것을 견고히 세우되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셨으니, 사람이 거주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태초에 창조한 땅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헛되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분명히 인간이 창조되어지기 이전에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켰던 죄가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에스겔28:12-19절에 매우 주목할 만한 계시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투로 왕"

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 있었으며 아름다움과 지혜가 충만했었다. 여기서의 에덴은 아담의 에덴이 아니라, 처음 창조된 땅의 에덴이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서 걸어다녔으며", "그는 창조된 날로부터 죄악이 그에게서 발견되기까지 완벽하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높아졌으며" 그의 지혜는 찬란함으로 인하여 부패되었다.

아직 이 지상에는 말씀에 기록된 "투로 왕"이 존재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여기에 묘사된 투로왕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육신을 입은(육화:Incarnated) 사탄으로 그가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이 때 사탄은 엄청난 무리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태초의 땅, 즉 아담이전의 지상을 책임지고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교만으로 인해(딤전3:6, 사14:12-14)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였다. 이 땅은 혼돈케 되었으며 하나님은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심판하셨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하늘의 천사 중 1/3정도의 수)(계12:4)은 하늘에서 쫓겨나 그들의 처소가 된 둘째 하늘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둘째 하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권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세째 하늘의 사이의 우주공간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사와 권세", "이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 높은 곳들에 있는(둘째 하늘) "영적인 악"이 되었다. 이에 대한 경고는 에베소서 6:12에 잘 나온다. 이것은 일리 있는 말인데, 왜냐하면 성경은 사탄은 "이 세상의 공중 권세의 통치자"(엡2:2), "이 세상(시대)의 신"(고후4:4)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은 그가 이 세상의 통치권을 다시 얻은 것과 같다. 만약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담 이전, 태초의 땅에 존재했더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사탄이 타락할 때 그 부류에 속했거나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바와 같이 "마귀들(demons)"은 아담 이전의 시대에 육체가 없는 영들로 이 땅에 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인간의 몸에 들어가려 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다시 몸을 입고 싶어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몸이 인간의 몸과 비슷한 몸을 입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당연한 의문을 갖게 되는데, "만약 아담 이전의 지상에 살았던 거주자들이 인간과 비슷했다면 혼동되었을 때 그들의 화석이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우리는 그들의 화석을 바위나 흙에서 찾을 수 없는 거지?" 대답은 이렇다. "그들의 몸은 불로 소멸되었으며, 마치 천년왕국의 말기에 곡과 마곡에서 반역한 무리들의 경우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계20:7-9) 그리고, 모면한 영들은 위에서 언급한 마귀들이 되었다. 마귀들은 분명히 사탄의 천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은 자유로운 반면에 사탄의 천사들은 끝없이 깊은 구렁(bottomless Pit)에 갇혀 있으며 단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제한된 자유가 주어질 뿐이다(계9:1-21). 그들은 또한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6-7장에 나오는 "타락한 천사들"(fallen angels)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보좌 심판 때에 흑암의 사슬에 갇힐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고통받을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마8:29).

만약 사망이 아담 이전의 시대에도 있었다면, 아담이전 시대에 살던 자들의 육체도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이 땅에 그들이 매장되었다면 아마도 그 장소는 대서양이나 태평양이 될 것이다. 이 말이 그러한지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대답해 줄 것이다.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Hades)'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 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계20:13). 여기서 우리는 "사망"(Death)과 다른 "바다"가 있음을 알게 되며, 육신을 삼켰던 (무덤) "지옥" 또는 "하데스"에서 죽음과 부활사이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다의 죽은 자들"은 해저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인간의 부류와 다르며, 아담이전의 세계의 죽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같다. 아담 이전의 죽은 자들은 현 세대의 죽은 악인들보다 먼저 심판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

아담 이전 세상의 모습은 "형체가 없고 공허" 하였으며, 이것은 단지 거주지로서의 지구의 외면의 모습만을 언급하는 것이며 베드로에 의해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벧후 3:5-6).

여기서 베드로가 언급하는 물은 노아의 홍수가 아니다. 노아의 날의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창3:1-11)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큰 백보좌 심판)(계 20:11-15)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라}

아담 이전의 세상은 물에 의해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다. 땅의 표면 위에 있는 물은 땅덩어리의 약 1/4950 이다. 물이 11마일의 깊이로 땅을 덮으면 온 세상을 평평하게 완전히 덮을 수 있다. 격렬한 지각 변동은 아담 이전의 지구에 생존해 있던 모든 생물들을 완전히 파괴시켰으며 물이 땅을 완전히 덮었다. 땅위에 살아있는 동물은 모두 죽었다. 모든 목적과 의도 속에서 비록 셋째 날이 되면 부활의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있는 식물들의 씨앗이 땅 속에 묻혀있었지만 땅은 여전히 지구는 죽은 행성이었다. 태양의 따듯한 광선이 없음으로 이 땅을 생명의 "겨울"로 만들어 버렸으며 잠긴 물들이 얼음으로 응고되어 네발 달린 짐승과 날개 달린 짐승들이 보존되어 아담이전의 지상의 생물들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이것이 지질학에서 말하는 빙하시대일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 그 시대의 환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땅을 보았더니, 보라, 형체도 없고 공허하며 하늘들에는 빛도 없더라. 내가 산들을 보았더니, 보라, 그것들은 떨고 모든 작은 산들도 가볍게 진동하더라. 내가 보았더니, 보라, 사람도 없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도 날아 갔더라. 내가 보았더니, 보라, 비옥한 곳이 광야가 되었으며 거기에 있는 모든 성읍들이 주의 임재 앞에서 그의 맹렬한 진노로 무너져 내렸도다.}(렘4:23-26)

만약 이것이 보이는 대로 지상의 모습과 그 파괴를 묘사한 것이라면, 아담이전의 거주자들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아담이전의 이 땅을 파괴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 땅을 점령한 자들의 죄성의 증거들과 역사적 유적들을 지워 없애는 것일 것이다.

이 땅을 창조한 시기와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을 때"의 시간적 경과가 얼마나 되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또 그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거주할 수 있는 장소로 회복하시고자 하신 목적을 가지셨을 때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으로 조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6일이란 기간 동안 이 일을 하셨다. 히브리어로 "날"(day)는 하루 24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고 더 길 수도 약간 짧을 수도 있다.

  

3. 현재의 지구

 

창세기 1:1-31절에 묘사된 6일 동안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최초의 지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형체가 없고 공허한" 이 땅을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로 회복하셨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만약 노아 때의 홍수가 지역적이고 단지 이 세계의 한 부분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면 회복된 지구의 지형은 아마도 오늘날과 똑같았을 것이다.

 

 1). 7일간의 회복 사역

(The seven days of the Restoration week)

 

 

물질의 기원

1. 첫째 날- 우주의 빛

2. 둘째 날- 대기권의 재정리,창공을 나눔

3. 셋째 날- 1.마른 땅이 다시 나오게 함

2.식물이 다시 나옴

 

생명의 기원

4. 넷째 날- 태양 빛이 회복됨

5.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들의 창조

6. 여섯째 날- (1).육지의 동물을 창조

                  (2).인간의 창조

7. 일곱째 날- 일하지 않으시고 안식하심

 

 

 

 (1). 첫째 날

창세기1:2-5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 거니시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고 낯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이것이 "첫째 날"이더라}

때가 되어 이 지구를 거주할 수 있는 환경으로 회복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 땅을 거주할 수 없게 만들 때와 반대 과정을 밟으시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성령은 물의 표면 위를 알을 품듯이 품으셨으며,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창조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단순히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마치 "불을 켜라"와 같은 식의 말씀이다. 이 빛은 태양의 빛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름들은 걷히지 않았기 때문에 태양 빛이 땅에 비추일 수 없었다. 최소한 넷째 날까지는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 빛은 의심할 바없이 '전기 에너지의 빛'일 것이다. 마치 오로라 현상이나 북극의 빛과 비슷한 것이다. 전기는 최초의 힘이었으며, 공기중에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최근에야 우리는 이 전기를 이용하는 법을 배워 도시를 밝히고 있다. 대기권의 백열은 말할 것도 없이 매우 강렬하여 지구를 둘러 싸고 있는 얼음들을 녹여 물을 형성했으며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형성되어 구름이 생겼다. 이리하여 둘째 날 사역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어두움(Darkness)이 빛(Light)으로 변했으므로 하나님은 "어두움"을 이라 하고 "빛"을 이라 부르시게 된 것이다. 지구는 역사의 밤(Night)을 통과하여 이제 부활의 날의 밝음(the brightness of Resurrection day)으로 나오게 되었다. 매일의 사역은 전날의 사역에서 약간씩 나아갔으며, 밤에 시작해서 아침에 끝났다.

 

(2). 둘째 날

창세기1:6-8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게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창공을 만드시고 창공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창공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더라}

하늘이라고 부르는 "창공"은 하늘이란 말을 통해 우리의 대기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혼돈된 땅'에서는 대기권이 없었으며 구름의 형성에 상관이 없는 우리들이 하늘이라고 부르는 창공, 즉 대기권으로 둘러싸인 하늘로 이해할수 있다. 혼돈된 땅"에는 대기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수증기를 통해 구름을 형성하기에 부적합했다. 땅위에 있는 물(바다)을 창공(대기권)위에 있는 물로 나누셨다. 둘째 날의 사역은 현재의 지구와 같은 바로 "대기권의 회복"이었으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둘째 날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는 말씀을 주목할 만하다. 나머지 모든 날들에 있는 이 말이 둘째 날은 빠져있다. 우리는 이 까닭을 별로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에베소서 2:2에서 "공중의 권세의 통치자"란 말을 읽게 되는데 "높은 곳에있는 영적 악들"(엡6:12)은 그들의 두목인 사탄과 함께 다시 이 땅을 그들의 거주지로 삼으로 의도로 대기권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공과 대기권을 보고 "좋았더라" 라는 말씀을 할 수 없으셨다.

 



 

(3). 셋째 날

"셋째 날"의 사역은 두 가지인데, 바다로 부터 땅의 출현과 식물의 재출현이다.

땅의 출현

창세기 1:9-10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이것은 단순히 아담 이전의 물로 뒤덮였던 세상을 반전시키고 땅의 융기를 통해 "물에 잠겼던 지구"에서 땅을 드러 낸 것이다.

식물의 출현

창세기 1:11-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땅 위에 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땅이 풀과,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나무를 내더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더라.}

이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부활이다. 땅은 "죽음의 물"로 부터 나와서, 씨들, 식물의 뿌리들과 풀과 나무들이 싹트도록 명령을 받았으며, 아담 이전에 물에 잠겼던 대재앙(catastrophe)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싹을 내고 씨를 맺고 자라도록 하셨다. 만약 "대재앙"'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빙하기"에 있었던 일이라면, 식물의 부활은 더이상 "창조적 행위"가 아니라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 싹을 내는 것과 같은 그런 이치일 것이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 진다. "땅은 땅위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본래대로(in itself)내라"(창1:11-KJV역) 즉, 씨는 이미 이 땅에 있었으며 아담 이전에 땅을 휩쓸었던 물에 매장되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시고 명하시자 싹이나 신록과 함께 이 땅을 덮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 이전의 지구는 현재의 지구와 마찬가지로 나무들과 식물과 신록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4). 넷째 날

창세기 1:14-1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낮과 밤을 나누기 위하여 하늘의 창공에 '광명들'이 있으라. 그것들로 하여금 징조계절날짜연도를 위해 있게 하라. 그리고 광명들은 하늘의 창공에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위를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넷째 날"이더라.}

넷째 날의 태양과 달의 출현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그들은 아담 이전의 지구에 이미 존재했으며, 땅이 공허해졌을 때 파괴되지 않았다. 16절의 "만드사"(made)란 단어는 1절의 "창조"(created)와 같은 단어가 아니며, "창조" 행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구름이 벗겨지고 태양과 달의 광선이 보여졌으며, 그때부터 해와 달은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징조와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측량하도록 명해졌다. 다시 말하면, 넷째 날에 "영원"에 대비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5). 다섯째 날

창세기 1:20-2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생물들을 풍성히 내고,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모든 날개 있는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더라}

"다섯 번째 날"은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란 단어를 1절에서 '태초의 땅'을 창조할 때 접한 이후로 처음 보게 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담 이전의 세상에 살았던 모든 동물은 "대재앙"때 멸망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날"에 창조된 고기와 새들은 오늘날 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종(種)이다. 화석에 나타나 있는 거대한 바다 고기들, 동물, 새들은 아담 이전의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다섯재날

창세기 1:20-2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생물들을 풍성히 내고,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모든 날개 있는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더라󰡕
“다섯 번째 날”은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란 단어를 1절에서 ‘태초의 땅’을 창조할 때 접한 이후로 처음 보게 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담 이전의 세상에 살았던 모든 동물은 “대재앙”때 멸망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날”에 창조된 고기와 새들은 오늘날 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종(種)이다. 화석에 나타나 있는 거대한 바다 고기들, 동물, 새들은 아담 이전의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6). 여섯째 날

"여섯째 날"의 창조 사역은 두가지로, 땅의 짐승과 인간에 관한 것이다.

 

1). 첫번째 사역 (땅의 짐승 창조)

창세기 1:24-25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땅의 짐승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땅의 짐승들은 현재 우리 시대의 짐승과 똑 같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종류대로"

란 말은 5번 반복되는데, 이는 한 평범한 종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와 "진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동물의 모든 종(種)들은 각각 서로 다르게 지음받았기 때문에 종(種)과 종(種)의 결합은 불가능하거나 후손을 양성할 수 없는 종(種)으로 출현한다. 당나귀와 말을 교배하면 노새가 나온다. 이 노새는 자손을 생산할 수 없는 종이다. 만약 동물과 식물의 점진적 발전을 주장하는 진화론이 맞다면, 우리는 화석에서 종과 종의 중간단계를 발견할 수 있거나, 현재도 진화 도중에 있는 종자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인간으로 변할 것같은 동물이나 식물)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없다. 동물과 식물은 인간의 지식속에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새들은 예전에 늘 그러했던 것처럼 둥지를 짓고 알을 낳으며 새끼를 기른다. 비버는 둑을 만들고 벌은 벌집을 만들지만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만이 홀로 생활양식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업에서만 보아도 인간은 돌조각으로 만든 쟁기로 시작해서 키를 만들고 복잡한 쟁기와 경운기와 바인더와 컴바인과 탈곡기를 만들며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농기구를 통해서도 인간의 삶의 여러 형태를 추적해 나갈 수 있지만 어떤 동물계나 식물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이는 중간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진화론이 정확하다면, 이 원리는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종족에서 슈퍼맨의 종족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중간 형태의 인간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2). 두 번째 사역 (사람의 창조)

창세기 1:26-28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image)대로 우리의 모습(likeness)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모든 땅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니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Replenish)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에 언급된 인간은 물론 "창조"되었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 "원숭이"의 형상으로 지음받지 않았다. 인간은 짐승을 재료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땅의 흙"으로 형성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등 동물이라도 저능한 인간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한 종족인 것은 서로 다른 인종이나 민족이 결혼을 했을 때 후손은 불임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백인종과 유색인종은 서로 다른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백인종만이 아담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주장이 근거없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아무런 모순이 없다. 창세기 1:26-28은 인간 창조의 사실을 말해주며, 창세기 2장은 인간 창조의 방법을 말해준다(창2:7). 하나는 또 다른 하나를 보충해 설명해 준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엘로힘"(Elohim)으로 계시되어 있고, 2장에서는 인간과 더불어 계약을 맺으시기 때문에 "여호와(JEHOVAH-The Lord)"로 불리운다. "엘로힘(Elohim)"과 "여호와(Jehovah)"란 이름은 복합어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분의 존재(Being)에 관한 모든 의심을 불식시켜 준다. 이 두 이름은 이 부분에서는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며 다른 곳에서는 다른 적절한 이름이 계시된다. 성경 비평가들은 "엘로힘파"와 "여호와파"라고 명명하는 조잡스럽고 모순되는 여러 문서들에서 편집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실은 거룩한 성경 기자들이 이 두 이름을 철저히 구별해서 사용한 것이다.

창세기2:7에서 우리는 {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부터 인간을 취하셔서 회반죽으로 만든 조각품 같은 인간을 단장하시고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이 삼중적인 존재로 지어졌음을 알 수있다.

1. "몸(body)"의 형성- "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2. "영(spirit)"을 주심-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이것은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인의 영(Natural spirit)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안에 성령이 반드시 내주하셔야만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안식" 하신다.

3. "혼적인(soulish)" 부분-"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혼은 인간의 "자아를 인식(self-conscious)"하며, 감정, 애정, 기억등의 기능을 한다.

인간의 주요한 두부분은 몸(Body)과 영(Spirit)이지만, 각각의 기능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첫째는 육이요, 둘째는 영, 셋째는 영과 몸을 연결해 주는 혼이라 부르는 부분이다. 혼을 통해 영과 육은 교통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삼중적이다(살전 5:23, 히4:12). "영적 세계"와 "인간의 3중성"이란 도표를 참고하라.

아담 안에서 원래 창조되었을 때는 인간의 혼은 거의 완벽한 매개체로써 육과 영의 교통에 아무런 다툼이 없었다. 영, 혼, 육 이 세부분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이 타락하자, 혼은 몸과 영의 전투 장소가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7:7-24절에서 이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브는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나중에 지음받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동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돕는 베필"을 주시기로 하셨다.

{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드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거기를 채우시더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했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셔서(made) 그녀를 그 남자에게로 데려 오시니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서 나와(out of Man) 취해졌음이라." 하니라.}(창2:21-23)

아담과 이브는 똑같은 방식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둘 다 하등 동물에서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음을 받았다.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창1:27) 이브가 아담과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지음받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남자와 여자는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육체적인 관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본다. 이브가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는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이서 한 몸이 될지니라.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엡5:30-32).

아담은 어린 아기나 원시인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장한 어른으로 지음받았으며,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의 이름을 다 지을 수 있을 만큼 지능과 지식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후손이 음악과 악기를 만들고 기계 장치를 고안하였으며, 도시와 탑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노아는 방주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지혜와 재능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하등 동물에서 진화한" 대신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창세기 1:29-30절에서 우리는 본래는 동물과 인간이 모두 식물만을 먹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 인간과 동물은 육식이 허락되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동물)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내가 모든 것을 푸른 채소(그들의 음식)같이 너희에게 주었느니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과 더불어, 즉 "거기에 있는 피째" 먹지 말지니라}(창9:3-4).

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먼저 피를 완전히 빼야한다. 왜냐하면 "피"는 동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에 와서야 비로서 시내산으로 부터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율법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기어다니는 짐승, 날아다니는 새 등등을 그들에게 금지하셨다(레위기 11:1-47).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시다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very good). 저녁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더라."(창1:31).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 아니다. 악은 죄와 불순종의 열매이다. 가시와 엉겅퀴와 독있는 식물, 씨앗들, 뱀과 같은 독있는 동물들은 모두 죄의 결과이다. 이것으로 하늘과 땅은 6일동안 모두 회복되고 다시 거주하게 되었다. 이를 "회복 주간"이라고 한다. 과학의 순서와 성경의 회복주간에 있었던 8가지 하나님의 사역의 순서가 정확히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 8가지를 경우의 수로 정확히 순서대로 일치시키려면 1/40,320 (1×2×3×4××6×7×8)의 확률이 나온다. 확실히 모세는 영감을 받아 이것을 기록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7). 일곱째 날

창세기 2:2-3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3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하셨고, 아들 하나님은 그 물질을 취하셔서 세상과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생명이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요1:1-3,엡3:9,골1:12-16). 하나님은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쉬셨다. 일이 끝난 것은 안식을 위한 합당한 이유이다. 하나님이 쉬신 것은 일이 끝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시기에 좋았기(Good)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으신 것에 대해 조금도 불만이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이 죄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훼손되었을 때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졌다. 인간이 타락하자 마자 하나님은 다시 일을 시작하셨는데, 이 일은 물질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의 구속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New Creation)"이 되도록 하는 일이었다(고후5: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실 때-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나의 아버지께서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지금 구속을 위해) 일하노라."(요5:17).

창세기 2:1-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사역의 "일곱째 날"에 쉬셨다라고 듣는다. 그 날은 안식일(Sabbath day)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 즉 일곱째 날을 쉬는 날로 떼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창조 때의 일곱 째 날의 길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죄가 그 날을 짧게 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다른 날과 같을 것이다.

 

 

 

 

THE SABBATH

 

안식일

 

하나님께서 만약 안식일을 "인간의 타락" 이전에 제정하셨다면, 창세기에서 안식일이란 단어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칠일에 대에 가진 유일한 암시는 창세기 7:4,10이며, 홍수가 나기 이전에도 일곱 째 날은 은혜의 날로 인식되었다. 창세기 8:8-12에서, 비둘기를 내보는데 칠일의 간격을 둔다. 안식일에 대해서 우리가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곳은 출애굽기 16:23-26에서이다. "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둘 것이나 칠일째는 "안식일"이니 그 날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 하더라. 여기서 일곱 째 날은 안식일로 인식되었다. 창조주간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의 모형으로써 출애굽기 20:11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엿새 동안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는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 날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출애굽 후에야 비로소, 안식일은 지켜야 하는 계명이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타락"으로 깨어졌으며, 구속이 완료될 때까지 안식이란 없으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을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집이 출애굽할 때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을 구속한 목적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과 힘든 노역으로부터 해방하여 카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신5:15).

몇주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며,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출20:8)고 명하셨다. 그들이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일곱째 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지정하신 그 날은 친히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날이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방인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안식일은 "모세의 언약"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표적"(sign)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출31:13; 겔20:12,19-21). 안식일은 유대인에게만 속한 것이며 이방인(세상)이나 교회(자녀들)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여러분들은 유대인을 제외한 어떤 민족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폐기되거나 변경되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이다. 지금은 호세아서 2:11의 예언대로 안식일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다시 결합되어서 그들의 땅으로 되돌아 올 때 안식일은 지켜질 것이다(사66:23,겔44:24, 46:1-3).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식일"은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의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율법"의 일부분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롬6:14). 갈라디아 교회에 쓴 바울의 편지에는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을 어리석다고 책망했으며, 율법을 행하려하는 자는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저주 아래 있다"고 선포했다(갈3:10).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알려졌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종교적 의식들)으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종노릇하기를 원하느냐? 너희는 (안식일)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도다. 나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려한다면 그는 그들의 모든 율법과 의식을 다 지켜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의식으로서 안식일은 다른 모든 "명절"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경륜이 마감됨과 동시에 그 기능들도 중단되었다. "할례"가 "침례"가 아니듯이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그리스도인들의 주일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유대인과 연관되어있고 "그리스도인"은 은혜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분리하신 "율법"과 "은혜"를 다시 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week)의 첫째 날에 모였다(요20:1,19, 행20:7, 고전16:2). 안식일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주의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들이 쉬고 예배드리는 날로 모였다. 구약에서 "제 팔일" 또는 "안식일 후 다음날"로 예시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수확을 거두면, 너희는 수확의 '첫 열매들'의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지니라. 그러면 그가 앞에서 그 단을 너희를 위하여 받아들여지도록 흔들지니 '안식일 후 다음 날'에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지니라"(레23:10-11). "첫 열매들"은 무엇을 예표하는가? 고린도전서15:20절을 읽어 보자.-"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 열매들'이 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첫 열매들"이 되신때는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때는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 다음날 아침"인 "주(Week)의 첫째 날"이다.

부활하신 때는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이었다는 사실과 이 날이 바로 "주의 첫째 날"이었다는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즉 "일곱째 날"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첫째 날"을 지켜야 한다는 근거가 된다.

유대인들의 안식일(토요일)이 구약 시대에 해당되는 진리라면 주의 첫째 날(주일:周日)은 신약에 해당되는 진리인 것이다. 로마 캐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7일째인 안식일이, 8일째인 주일로 바뀌었다는 교리는 완전히 거짓이다. 왜냐하면, "주의 첫째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는 날로 정착된 후, 한참 후에야 로마 캐톨릭 교회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제 4 계명인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항만 제외하고 나머지 계명들만이 다시 한번 재 강조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롬13:8-10, 엡6:1-2, 약5:12, 요일5:21). 만약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여전히 있다면 왜 신약 성경에서 빠져있겠는가? 그것은 '주일(Lord's day)'로 불린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날은 예배와 경배와 거룩한 행위로 채워져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날은 게으름이나 쾌락이나 세상적인 토론이나 행사를 하는 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기 위한 날인 것이다.

 

II THE ANTDILUVIAN AGE

2. 대홍수 이전 시대

 

이 시대는 공허한 땅을 회복한 때부터 노아 홍수 때까지의 기간이다. 여기에는 두 경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The Edenic Dispensation.

1. 에덴의 경륜(무죄 시대) 

 

 

이 시대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때부터 이들이 타락하여 동산에서 쫓겨날 때까지이다. 이 기간이 얼마나 오랫동안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무죄 시대"였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지구위에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 한 때는 가장 완벽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 땅은 창조이전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물들에는 고기들이 놀았고, 땅위에는 온갖 진귀한 과실들과 채소들이 있었으며 언덕과 계곡과 평지에는 양들과 소들,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향기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위협하는 해일이나 폭풍, 자연을 파괴하는 재해도 없었을 것이다. 땅은 안개로 지면을 덮어서 수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완벽했으며 우리가 창세기 1:3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의 동편에 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 사람을 두셨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거주하게 하신 이 동산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많은 과실수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동산은 에덴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강으로 적셔졌으며, 하나님은 그곳에 아담을 두시기 위해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에덴의 동산은 비교할 수 없는 희락과 형용할 수 없는 사랑과 상담자이신 하나님과 손님으로 방문하는 천사들과 교제하며 죄없이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인간의 선조들은 살 수 있었던 곳이다. 환경은 너무나 이상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과 같은 동료가 없었다. 남자가 홀로 지내는 것은 좋지 못했기에 그런 완벽한 환경 가운데서도 외로왔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고 하시며 그를 깊은 잠이 들게 한후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셔서 여자를 지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최초의 수술이다.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신 후 얼마나 지난 후에 살을 채워넣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눈을 뜬 후에는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알았다. "이는 내 뼈중의 뼈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Isha)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Ish)에게서 취해졌음이라."(창2:23) 이는 처음부터 아담이 그녀를 깊이 사랑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왜 죽음의 위협을 무릅썼겠는가?

이들 최초의 부부는 행복한 생활을 했으며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밟고 있는 이 땅은 반역으로 이미 심판받은 적이 있는 땅임을 알지 못했으며, 초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동산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 땅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하늘에는 사탄의 지휘 아래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희락의 동산"인 에덴에서 자신들이 쫓겨나 조만간 육체의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사탄이 와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할 것이라는 사전 경고를 주시고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몇 차례 주의를 주셨더라면, 아마 사탄의 계획을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따르는 것이다. 아담이 시험에 들어 타락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는 복음(the Gospel) 안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시험과 타락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갈보리 언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용서와 사랑, 값없는 구속의 은혜와 같은 최고의 광경을 절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지음받은지 얼마나 지난 후에 이브가 지음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데려오는 들의 모든 짐승들과 가축들의 이름을 짓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브가 시험에 들기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아담과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떻든 이들은 성인으로 지음받았기에 유아의 성장기를 겪은 경험이 전무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최대의 원수인 사탄의 간교한 술책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것 같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Temptation)"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 창1:27) 좌절시켜 자신들이 반역함으로써 잃어버렸던 빼앗긴 땅을(失地)를 다시 차지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인간이 이 땅위에 생육하고 번성하기 이전에 범죄하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이 최초의 부부를 파멸시키기를 바랬다. 그는 아주 유능한 솜씨로 게임을 운영했다. 아담과 이브가 함께 있다면 저항할 것을 염려하여 여자 혼자 있을 때를 기다린 것이다.

금지된 실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여자는 아담의 눈을 피해 혼자서 그 나무 근처에 있었다. 사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그녀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만약 이브가 "선악의 지식의 나무" 부근에만 있지 않았더라도 그 나무의 실과를 먹고자 하는 욕구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먼저 여자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대한 불만을 품게 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어 넣으며 교묘하게 그녀에게 접근해서 말을 걸었다. 여자가 사탄과 이야기 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사탄은 무섭거나 아주 싫은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녀에게 완전히 낯선 존재도 아니었다. 여자는 전에도 이미 사탄을 본적이 있었거나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탄은 결정타를 날리기까지 자신의 정체나 지혜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뱀이 저주를 받아서 땅위에 기어다니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모습은 대단히 아름다웠음에 틀림없다. 뱀이 말을 할 수 있었던 존재였는지, 단순히 사탄의 도구로 쓰임받았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육화되어서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브가 한동안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쳐다보고 있었을 때 뱀(Serpent:사탄≠snake)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와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의 교묘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선악의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신 것은 불공평하며 불친절하다는 불만을 갖게 했다. 사탄의 질문에 대한 이브의 답변에서 그녀는 "그것을 만지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사항에 없는 말을 갖다 붙임으로써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 죽을까 함이라"는 말로 죽음의 확실함에 대한 의심을 표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계22:18-19). 타락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다룸"으로써 출발했다(고후4:2).

사탄은 최초의 "고등 성경 비평가"이다. 그는 "불신의 씨앗"을 심는 창조자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 .라고 말씀하시더냐?"는 질문에 이브의 지성과 이성에 불신이 심기운 것이다. 이 질문이 하나님 이브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했다. 이 "불신의 병균"은 이브로부터 시작하여 전인류가 감염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만큼 그렇게 심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런일은 하면 안된다고 말씀셨는가? 이 일은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오해하거나 잘못해석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셔서 악한 자를 영원히 벌주지는 못하실거야" 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탄이 일단 의심의 씨앗을 뿌리고 나면 그 독은 급속도로 번진다. 그 후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마귀는 "거짓말의 아비"이다.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있다". "악인은 영원한 형벌 가운데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 거짓말은 오늘날 세상 종교 속으로 흘러들어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되어서 "신들(gods)"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그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동기를 비난했다. 이 말은 이브의 호기심과 야심을 자극했고 그녀의 마음가운데 "욕망의 급류"를 흐르게 했다. 그녀가 그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 하고"(육신의 정욕), "보기에도 즐겁고"(안목의 정욕),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이생의 자랑)(요일3:16) 나무로 보였으며, 그녀는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남편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손을 내밀어 그 실과를 따 먹어 버렸다. 그녀의 무죄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아담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마음의 갈등도 없이 바로 남편을 유혹해서 그 실과를 먹게 했다. 아담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먹었다. 그 결과는 인류의 파멸이었다. 무죄(Innocence)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았다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그것은 여자의 잘못이었다(딤전2:13-14).

사탄이 이브에게 제공한 미끼는 "지식의 습득"이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그녀와 아담을 신들과 같이 되어 하나님과 같은 수준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사탄은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동일한 야심을 제공하며,그의 앞잡이들을 통하여 거대한 도시 문명을 건설하고 발견과 발명을 통해서 하나님없이 스스로를 높이도록 한다. 그의 최종목적은

"인간의 신격화"

이며, 이를 통해

"슈퍼맨(Superman)", 즉 "적그리스도"

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앉을 것이며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할 것이다(살후2:3-4). 이것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세상 제도"의 통합운동이, 인류의 진보라는 슬로건 아래 세계 단일정부로 나아가는 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아담과 이브는 "무죄"의 상태로 지음받았다. "무죄"는""가 아니다. "무죄"는 시험(test)을 받을 때까지 "의"가 될 수 없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시험"을 잘 이겨냈다면, 그들은 "의롭게" 되거나 "거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해서 "죄인들"이 되었다. "무죄"는 "거룩함"에 이르는 첫 단계일 뿐 아니라 ""와 "죄인"에 이르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만약 시험을 이기는 길을 걸었다면 "죄"를 지을 가능성 마저도 넘어 설 수 있는 "거룩함"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새로운 탄생" 없이 "거룩함"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에 대한 사탄의 승리는 완벽했다.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에 대한 첫번째 결과는 "자아 의식"(Self-consciousness)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창3:7). 이것을 알고 나서 그들이 한 첫번째 일은 "무화과 잎"으로 옷을 창안하였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천연적인 옷을 입고 있다. 고기는 비늘이 있고 새들은 깃털이 있고, 짐승들은 털과 가죽이 있고 심지어 뱀들도 아름다운 색깔의 살가죽을 지니고 있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종도 많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자연이 제공해 주는 옷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오직 인간만이 옷이 없는 채로 남았기에 부득이하게 인공적으로 옷을 만들어 입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의 결과이다.

처음에 아담과 이브는 옷을 입지 않았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죄한 상태에서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타락하기 이전의 성품은 빛나는 광채가 몸에서 나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감추었을 것이라고 한다. 타락할 때 그들은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타락하자마자 바로 부끄러움을 알았고, 곧바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옷은 죄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옷의 모양과 특성은 곧 변했지만, 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옷은 사람의 눈으로부터 우리들의 수치를 가리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는 없다. 더러운 마음이 흰 옷 뒤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타락한 날을 지켜보았던 그 날의 해가 진다. 어두움이 깔리고 두려운 밤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평상시와 같이 시원한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동산 나무들 사이에 자신들을 숨겼다. 그들은 평소 하나님의 일상적인 방문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죄는 우리 모두를 겁장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심판석에 앉아 판단하도록 하셨다.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해 이브를 비난했고, 여자는 뱀에게 핑계를 댔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할 기회를 주시며 인내심있게 들으신 후 그들 위에 심판을 내리셨다. 그러나, 주님은 뱀에게는 정당화할 기회를 전혀 주시지 않고 바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이것을 행하였으니 너는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아 네 배로 다닐 것이며 네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그녀의 씨(그리스도)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창3:14-15).

"너의 씨"(사탄의 씨)란 표현에서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 2:3에 있는 "멸망의 아들"로 불리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죄를 짓고 선고를 기다리는 범죄자에 대한 심판의 말이며, 사탄이 전에 지은 범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앞으로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신다. 뱀이 사탄이었든지,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지간에 그는 기어다니며, 메스껍고, 해로운 파충류로 변하게 되었다. 여자에 대한 선고는 남편과 동등한 지위를 잃어버리고,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었으며,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어머니가 될 때의 고통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너의 전생애 동안 고통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는 들의 채소를 먹을 것이며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선고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동산을 쫓겨 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무화과 나무잎"으로 엮은 옷은 부적합한 옷이었다. 그 옷은 그들이 범한 죄의 형벌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옷은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사람은 스스로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제거할 수 있는 모형으로서 적합한 옷을 하나 만들어 주실 필요가 있으셨다. 우리는 창세기 3:21에서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옷을 제공해주지 않았을까?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너무나 동물적이 되어서 그가 입기에 가장 적합한 옷은 동물의 가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 가죽은 모형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형이었던 죄없는 짐승(아마 양일 것이다)의 죽음으로써만 안전해 질 수 있으며,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히9:22). 그들이 입은 양가죽은 인간이 다시 옷입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옷입혀 질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끔찍한 날의 밤하늘에도 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한 개의 "약속의 별"이 어둠 가운데 떠 있었다. 그 약속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이 아름다운 땅위에 더럽혀 놓은 그의 모든 자국을 깨끗이 지워버릴 것이다.

이 약속을 주신 분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하신 약속이란 사실에 주목하라.

"여자의 씨"(Seed of Woman)"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지어 입히신 분은 "주 하나님"이셨으며 삼위중 제 2위이신 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

이 되신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벌거벗음을 가려주기 위해 필요했던 옷을 입히기 위해 살해되었던 양은 갈보리산 위에서 죽으실 자신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사탄의 아래에 있는 이 세상 체계는 몇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를 막지 못해서나, 타락한 인간에 대한 형벌로써 철저히 무관심해서 그냥 놓아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씨가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약속안에서 구속의 치료책을 마련해 두신 것이다. 인간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는 사탄의 그물로부터 피할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피할 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이 사탄의 기원과 목적과 운명을 기록해 놓은 "확실한 예언의 말씀"(벧후1:19)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탄의 "계략"(고후2:11)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은 무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의 목적에 "짜맞추는데"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있다. 그들은 마치 성경을 "우리에게 '불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무엇에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읽는 것 같다.

에덴의 경륜은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이 시대는 "죄의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로 특징지워진다.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까지, 새하늘과 새땅에서 인간과 함께 거할 때 까지 이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계21:3). 에덴의 경륜에 하나님은 아담을 "무죄"에 근거해서 다루셨으며, 인간의 죄로 인한 저주가 이땅에서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이렇게 다루실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시련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요3:18).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으로서, 잃어버린 자로서, 쓸모없고 타락한 자로써 다루셔야 했다. 타락한 죄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타락한 피조물로써 대하셔야 했다. 인간 안에는 어떤 선한 것도 거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는 자"(롬8:6-7)였다. 인간은 완전한 실패자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인간을 죄인으로써 동산에서 추방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셨으며, 그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죄인으로서 불멸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이로써 인간의 첫 경륜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인류는 저주 아래 있고 온 땅은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완벽한 환경만 주어지면 어떤 악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에덴의 재앙은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2. 에덴부터 홍수이전 까지의 경륜

 

이 경륜은 "타락"에서 "홍수"까지를 일컫는다. 기간은 약 1656년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 경륜을 "양심"의 시대라고 한다. 이때는 사람의 모든 행동이 양심에 인도함을 받았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양심이란 없었다. 양심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양심은 때때로 두려움과 후회를 낳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옳지 못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피의 희생제물"에 대해 설명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구약 시대의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아담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로부터 시작한다. 아벨은 최초로 피의 희생제물을 드린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추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담과 이브는 타락하기 이전에 자식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은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신 후 복을 주시며 하신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창1:28)

우리는 "땅을 다시 채우라"는 말씀에서 놓칠 수 없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땅이 공허한 상태가 되기 전에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떤 이유로 멸망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담의 창조이전에 인간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아마 지음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타락하였을 것이다. 첫번째 아이는 아들이었으며 이름은 카인이었다. 이름에 담겨진 뜻은 "획득하다", "얻다"라는 의미인데 이브는 카인이 "약속의 씨" 인줄로 잘못 알았다. 아벨이란 이름은 "수증기", "안개"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이브가 매우 실망했던 것 같다. 아벨이 꼭 둘째 아들이란 뜻은 아니다. 카인을 낳고서 아들과 딸을 많이 낳았을 수도 있다. 카인과 아벨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카인과 아벨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 사람은 악한자의 계열이요, 다른 한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나온 의로운 사람의 계열이다.

이브에게 내린 저주 가운데서 약간의 암시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너의 고통과 너의 임신을 크게 늘리리니"(창3:16)란 말을 통해볼 때 임신은 자주 있었을 뿐 아니라 한 번에 여러명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류는 매우 빠른 속도로 번성해 나갔다. 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모두 근친혼인 밖에 할 수 없었으며 홍수 이후에도 얼마간은 계속해서 이런 일은 금지되지 않았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카인과 아벨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도 100살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며, 그의 양이 아니라 아버지의 양이었다. 그는 장성한 사람이었으며 가축의 주인이었다. 카인은 농사꾼이었으며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담이 셋을 낳을 때 130세였다는 것을 안다(창5:3). 셋은 아벨의 죽고 난 후 곧 태어났을 것이다.

아벨의 죽음은 카인과 누구의 제물이 더 옳으냐에 관한 종교적인 분쟁으로 시작되었다. 아벨은 "피의 희생제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카인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땅에서 나온 소산물, 행위의 제물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였으나 카인의 것은 배척하셨다. 하나님은 칼멜산에서 불로 제물을 태운 방식으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 이것이 카인을 분노하게 했다. 그는 그날 바로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님은 카인에게 "속죄를 위한 제물"을 드리도록 기회를 주셨으며 아직도 시간은 있었다. "죄가 문앞에 엎드리니라"(4:7)는 표현은 "속죄를 위한 제물이 문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인은 듣지 않고 그의 분을 오랫동안 누그러뜨리지도 않았다. 어느날 카인은 들판에서 혼자 있다가 다시 이 문제를 끄집어 내었다. 그는 아벨을 들판으로 불러서 아벨과 이야기 했다(창4:8). 카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그가 서있던 자리에서 바로 돌을 집어 들고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이 모든 계획은 사탄이 아벨을 죽이기 위해 꾸몄던 것이다. "약속의 씨"가 아벨을 통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벨은 자식이 없었다. 최소한 그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것은 셋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하다.

사탄은 아벨을 살인하도록 충동했을 뿐 아니라 카인의 종교의 창시자이다. 이는 유다서에 기록된..

"카인의 길"

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가진 종교의 기원을 본다.

카인이 유랑할 때 그는 그의 아내를 데리고 갔다. 그는 놋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그녀를 알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거기에서 임신해서 아들 에녹을 낳았다. 여기에서 언급된 에녹은 셋의 계열에서 나오는 에녹이 아니다.

에녹이 태어난 후 카인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도시문명과 거기에 따르는 현존하는 모든 악이 시작된다. 카인의 후손들 가운데 악기를 만든 조상인 유발이 있었으며, 동과 철을 사용한 투발카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하나님이 없는 도시 문명의 건설을 위해 그들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수명은 70년정도가 아니라 1000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지식과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었을 것이며 이런 것들이 도시문명을 건설하는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을 볼 때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 노아의 홍수이후에도 바벨을 건설하면서 다시 한번 도시문명의 건설이라는 메아리는 울려퍼진다. 후에 축조된 대피라미드 등을 볼 때 그들의 수학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우리 시대를 능가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명철로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문명화되었고 인구가 증가되었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창6:1) 경건한 셋의 자손들도 카인의 자손들과 결혼을 함으로써 홍수 때에 노아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범람하는 죄의 물결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던 이 세상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창6:2).

여기서 일부다처제가 등장하며, 그들의 결혼은 "셋의 아들들"과 "카인의 딸들"과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사람들과 사악한 사람들이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본문을 깊이 생각해보면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의 딸들"이란 셋의 후손만 일컫는 것이 아니다. 카인의 후손도 사람들의 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인간과 다른 어떤 존재들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의미와 다르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남" 의해 새롭게 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요1:12, 롬8:14-16, 갈4:6, 요일3:1-2).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천사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표현은 다섯 번 나온다. 창세기에서 두 번(창6:2-4) 욥기에서 세 번(욥1:6,2:1,38:7)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지음받은 존재들이다. 천사들도 지음받았고, 아담도 지음받았다. 그래서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눅3:38). 아담 이후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행위로 지음받지 않았다. 아담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받았지만(창5:1), 그의 후손들은 모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입고 태어남을 창세기 5:3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담은 "자기 모습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육신의 출생을 통해 "사람의 아들들"이며 단지 "거듭남(born again)"(요3:3-7),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을 통해서만 신약적 의미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6:2-4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셋의 후손"들이 아니다. 셋의 후손들은 "사람의 아들들"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며 인간의 아들들이 아니며, 더욱이 셋의 후손들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부활한 자들은 장가가거나 시집가지 않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으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또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27-36)는 이유로 흔히 사람들은 여기서 천사들은 성(性)이 없고, 동거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라.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성(性)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의인들이 부활했을 때 이 세상에서의 아내와 자식들로서 서로 알 수 있다.

본문이 가리치는 것은 천사들이 생식을 통해서 출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통틀어서 창조되었으며, 그들은 죽지 않기 때문에 결혼이 필요없는 것이다. 결혼은 종족의 멸종을 방지하기 위한 인간의 제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인간이 부활하면 죽지 않으므로 하늘 나라에서는 결혼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들과 인간이 교접했을까하는 의문을 많이 갖지만, 창세기의 본문은 분명하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더 확신을 가지려면 베드로서와 유다서를 읽어보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타타루스)에 던져서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으며}(벧후 2:4-9).

{또 자기들의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또 그 주위의 성읍들까지도 그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 주어 다른 육체(strange flesh)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한 본보기가 되었느니라}(유6-7).

여기서 언급된 천사들은 사탄의 천사들일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천사들은 현재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갇힌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못(게헨나)"으로 들어갈 자들이다(마25:41). 그 당시에 이 천사들은 틀림없이 특별한 부류에 속한 천사들이었을 것이며, 어떤 특별한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위에 언급한 두 구절을 통해서 그들이 죄를 지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주어 '다른 육체'를 따라간" 죄악이었다(유7). 죄의 때는 마치 홍수이전의 시대와 비슷하다(ꒈ휴2:5).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죄와 똑같은 죄악이다. 롯에게 천사들이 왔을 때 거기에 살던 거민들은 롯에게 두 천사를 넘겨달라고 했다. 이들은 남성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들은 육체적 교제를 원했다(벧후2:6-8, 유7, 창19:5).

성경은 천사들이 육체적 몸을 입고 있으며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창18:1-8).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읽을 때 어려움은 다 사라진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처럼 몸을 입고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것이다.

우리는 천사들이 떠났다는 "처음 위치"는 잘 모른다. 그들은 아마 사탄의 추종자들처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한 거룩한 처소를 떠나 버렸던 자들일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까지 에덴의 동산은 파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동산을 지키는 천사들(스랍들)과 가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창3:24). 하나님의 아들들이 때때로 사람의 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위치(동산)를 떠나서 '사람의 딸들'과 섞였으며, 성경에서 기록하는 것처럼

"다른 육체(strange flesh)"

를 따라 가서 동산을 지켜야 할 그들의 임무와 "처음 위치"를 떠나버린 것이다.

이런 관점을 지지해 주는 또 다른 강력한 견해는 이 결합이 힘센 사람(mighty), 즉 거인(giant), 고대의 유명한 사람가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이다(창6:4). 오늘날도 경건한 후손들의 남자들과 불경건한 후손들의 여자들이 결혼하지만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 사이에서 거인들을 낳은 사람은 없다. 즉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은 인간들의 정상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자손이라면 왜 전에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겠는가? 이전에도 셋의 아들들과 카인의 딸들이 결혼했음은 분명한 일인데도 그들 사이에 "능력있는 사람"(mighty man)이 나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 세상에 천사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민족이나 가지고 있는 신과 인간 간의 사랑, 반신 반인의 신화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베드로전서 3:18-20에서 말하는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않고 떠나 감옥에 있는 영들이다. 주님은 이들에게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복음을 전파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는 새로운 종이 출현하여 인간세계에 깊이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노아의 홍수의 원인이 되었다. 노아의 홍수는 에덴의 동산까지 모두 없애 버렸다. 이로써 홍수이전의 경륜이 막을 내린다.

홍수 이전의 인류는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인류 전체로써 다루어졌다. 그렇다고 민족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경륜을 사도행전 17:30에서 "무지의 때"라고 말하고 있으며, 율법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죄의 간과하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다. 이 때 인간은 서로 서로 고발하고 용서하며 양심의 기준대로 살았다. 로마서 2:15절을 읽어보라. 출애굽기까지는 율법이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율법이 없었던 시대에는 율법으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으며 기준이 될 수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롬3:20). 그 당시 하나님은 인간과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변명하거나 핑계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셨기 때문에 카인을 꾸짖으셨고(창4:14), 에녹과 동행하셨으며(창5:22-24), 노아와 대화하셨던 것이다(창6:3).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고 감사치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정욕에 따른 더러움 가운데 내어 버려 두셨던 것이다."(롬1:20-32).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어떤 죄인들보다도 더 불경건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무지의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은 모세의 시대와 같지 않았다. 우리는 율법이 없었던 시대와 율법아래의 시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이것은 심판의 근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로마서 2:12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난다.

{율법 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요,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에 의하여 심판받게 되리니}

이 말씀은 율법이 없었던 시대, 무지의 시대라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핑계가 없으며, 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큰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이 행해질 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이 누구일까? 하지만 어쨌든 율법없이 죽은 사람들과 율법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과는 심판의 근거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 복음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는 사람과는 분명히 심판의 원칙이 다를 것이다(살후1:7-10).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성문법"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기록된 양심과 이성이라는 "손으로 씌여지지 않은 법"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서 스스로 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양심과 이성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롬2:11-16). 오늘날도 복음을 듣는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마음으로 영접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만약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코넬료와 같이 본성으로 하나님을 찾고 양심과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면(행10:1-6),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런 논리를 내세워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가지 않으려는 핑계거리를 삼아서는 안된다.

"홍수 이전 시대"의 특성에 관해서 피어슨 박사(A.T. Pierson)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계시의 충만함이 분명했다. 그 후에 성령께서 육체가 되어 버린 인간을 떠나 버리셨다. 인간들은 통일성과 단결력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거인들의 문화는 진보적이고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없었다. 선과 악은 함께 발전하다가 '배교'로 끝장났으며, 결국은 심판으로 멸망 받았다."

우리는 완전한 시대가 올 때까지 모든 시대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III. THE PRESENT AGE  

III. 현재 시대

(노아 홍수부터 주님의 재림까지의 경륜)

 

 노아의 홍수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일컫는다. 여기에는 4개의 경륜으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1. 홍수 이후의 경륜.

1. The Post-Diluvian Dispensation.

 

이 경륜은  “인간 정부”의 시대이다. 만약 인류의 모든 종족이 한 정부로 통일해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간 시기가 있었다면, 홍수 이후에 바로 세워진 정부일 것이다. 노아는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600세의 인간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인류 정부를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영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노아의 막내아들인 셈의 나이 98세였으며, 자치 국가를 세울 수 있을 만한 역량의 소유자였다. 그들에게는 홍수라는 하나님의 경고와 엄청난 심판을 눈으로 목도한 경험과 아담때부터 축적된 여러 가지 지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아의 언약(창8:20-22)이라고 일컫는 하나님이 주신 세로운 언약도 가지고 있었다. 노아는 제단을 세우고 희생제를 드림으로써 보다 온전한 예배의 형태를 다시 세웠다. 하지만 이 세대도 예외없이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흩어지라는 말로써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고 하셨다. 그들의 후손들은 함께 모여 살며 도성을 건설하고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큰 탑을 세워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버리시고 땅의 온지면으로 그들을 흘어 버리셨다. “님롯”이란 이름을 제외하고는 이 탑을 건설한 사람의 이름은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창10:8-10). 여기서 우리는 땅의 언어들이 기원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 언어를 하나로 합하시는 표적이 나타난다(행2:4).

 바벨의 흩어짐은 홍수가 있은지 약 325년 뒤에 발생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0:25에 셈의 후손인 펠렉의 때에 “땅이 그 때에 나뉘었음이요”라는 말씀이 나온다. 민족들이 나뉜 사건이다. 펠렉은 홍수가 있은지 340년이 지난 후에야 죽는다(창11:10-19).  그러므로 이 경륜은 102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모두 합하면 427년간이며, 전에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실패로 막을 내린다. (창세기 10:25과 11:10-19을 자세히 비교해 볼 것)

 

 

  

2. 족장의 경륜

The Patriarchal Dispensation.

 

 이 경륜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시작해서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마감하는 이집트를 탈출할 때까지를 일컫는다. 우리는 이 경륜을 “가족”의 경륜이라고 한다.

 바벨의 사건 후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후손들은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한 증인을 두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지만,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은 이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아버지까지 우상숭배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들의 가족 가운데서 따로 불러 내셔서 새롭게 시작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아브라함은 택함받은 사람이었으며,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었다. 믿음은 대를 거치면서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삭은 선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만큼 믿음의 용사는 아니었으며,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속여서 장자권을 획득했지만 아버지가 소유한 만큼의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믿음에서 많이 뒤떨어졌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결국 이집트에서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마지막 절이 “그를 이집트에서 관에 넣었더라”는 말씀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집트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세상의 무덤이었을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사탄에 의해 4번씩이나 좌절되었다. 첫 번쨰는 에덴에서, 두 번째는 홍수로, 세 번째는 바벨사건으로, 네 번쨰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이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그가 항상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점을 알아 볼 것이다.

 

 

 

 

3. 율법의 경륜.

 The Legal Dispensation.

 이 경륜은 출애굽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로 약 1491(?)년간 지속된다. 우리는 이 경륜을 “율법의 경륜”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그들을 속박으로부터 풀어 줄 것을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간구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라는 한 구원자를 보내셨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허락셨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율법과 규제를 통해서 국가를 조직했으며 지정된 장소에서 정하신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고, 눈에 보이는 규제를 많이 두셨다.

 이 국가는 신정국가(Theocratic)이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자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해서 한 민족을 통치하시고, 그 민족을 통해서 전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릴 작정이셨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모세였다.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 뒤를 이었다.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을 아스라엘에는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과 전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자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 450년간 그들에게 재판관을 주셨다(행13:20).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구했다. 그래서, 사울이 왕으로 선출되어서 40년간을 다스렸다. 그 뒤를 이어서 다윗이, 그 다음에는 솔로몬이 각각 40년간씩 다스렸다.

B.C 975년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분열되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두 지파를 차지하여 유다가 되었으며, 여로보암이 열지파를 차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254년간 지속되다가 B.C721년에 앗시리아의 포로가 되었으며, 115년후에 유다는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다.

 B.C. 536년에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유다는 바빌론에서 귀환했다. B.C. 166-40년에 에스모니언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B.C 40년에 헤롯대왕은 로마에 의해 왕이 된 이두메인이었다.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Titus)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방화를 해서 유대인을 팔례스타인 땅에서 완전히 쫓아내 버렸다.

 율법시대에서 하나님은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을 다루셨다. 이스라엘을 다루신 근거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기록된 율법”이었다. “의식에 관한 율법”은 세계의 어떤 다른 민족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이 율법은 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외적이었으며 행위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된 A.D.70년 이후에는 이 율법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다. 거기에는 어떤 자비도 없다. 하나님은 선민인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대적해서 싸우시며 그들을 파멸시키신다. 율법은 “저주의 찬미”이다.

 율법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적적인 간섭을 하신 장면이 수없이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실 때부터 시작된 이적들은 장자 재앙, 역병, 개구리, 우박, 홍해를 가르시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직접 음성을 발하셔서 말씀하셨다. 또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세우셔서 그들을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간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여 살리셨으며, 요단강을 건너게 하셔서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기거하고 있던 민족들을 정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친히 거두시고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의 씨”를 보내주셨지만 그들은 불신과 시기심으로 가득차서 오히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이로써 이들 세대도 전에와 마찬가지로 배교로 끝나 버렸다. 인간은 단순한 실패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전혀 은혜를 모르는 존재들인 것이다.

 


4. 복음의 경륜.

The Ecclesiastical Dispensation

 

 흔히 “은혜의 경륜”라고 부르는 시기로써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시점에서부터 그리스도것 영광의 면류관을 쓸때까지다. “성령께서 내려오신 때”로부터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공중 휴거”까지를 말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시기는 또한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올 회복의 시기까지의 기간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목적은 “그분의 이름을 위한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없이 구성된다.

교  회

 하나님의 이런 목적은 구약 성경에는 계시되지 않았다.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약간 언급하셨을 뿐이다.

ꡔ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ꡕ(마16:18)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그 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를 알게 하신 것이며 그것이 성령으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지금 계시된 것처럼 다른 시대들(구약시대)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니”(엡3:3-6).” 그리고 또한 이것은 창세로부터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엡3:9).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신비가 아니다(롬9:24-30). 하나님의 목적에서 신비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의 인 교회안에서 하나로 묶는 것이다(고전13:12-13).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도 모두 다윗의 언약하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아들”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오늘날 민족 단위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별로 대하신다. 이 세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롬11:25). 성령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각 개인을 부르셔서 교회라는 으로 조직하신다. 이 “새 몸”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롬6:14). 심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보좌를 받으셔서 “심판의 보좌”가 아닌 “은혜의 보좌”로 바꾸셨다. 그래서 이 경륜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악한 민족들에 대해서도 오래참고 호의로 대하시는 것이다(벧후3:9).

 그렇다면 이 경륜도 다른 경륜들과 마찬가지로 배교로 끝날것인가? 그렇다. 에덴에서, 홍수로, 언어의 혼란, 이집트의 노예 생활,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시대도 결국은 배교로 끝난다. 지금까지의 경륜은 이미 흘러간 과거이므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교회시대는 지금 진행중인 현재의 경륜이다. 그렇다면 예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견해로는 끊임없는 복음의 전파로 세상은 변화되고 그 뒤에 천년왕국이 도래하고 영광스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은 추수때까지 알곡과 독보리가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들과 나쁜 물고기들이 함께 있다. 양과 염소가 함께 자라며 현명한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이 함께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하셨다(눅18:8).

 바울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온다”고 경고했다(딤후3: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는 홍수 이전의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

ꡔ그러나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의 날들에 그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가고 시집가고(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과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하기를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던 날까지 하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다 쓸어 버릴 때까지 그들이 알지 못하였던 것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ꡕ(마24:37-39)

 

우리는 노아의 때의 특성을 잠깐 살펴봄으로써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경륜을 알아 보자. 우리는 일곱가지 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을 죄를 속량하신 구속주가 아니라 단순한 조물주 정도로 섬기려는 경향이 팽배해진다.

 2. 예술과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전이 있다.

 3. 거룩한 셋의 계열과 악한 카인의 계열의 결합이 성행한다.

 4.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도시로의 집중현상이 가속화 된다.

 5. 결혼의 원칙이 깨어지고 동성애가 성행한다.

 6. 사람의 딸들과 외계에서 온 존재들과의 불법적인 결혼을 한다.

 7. 에녹과 노아의 전파를 거부했듯이 복음을 거부한다.

 

 조금만 주의해서 이 현상들을 관찰해보면 “시대의 표적”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시대적 특성에 대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이 영은 “미혹하는 영”이다. 그래서, 마귀들의 교리가 아주 성행하고 있다(딤전4:1).

이것은 영성술(Spirtulism)이란 이름 대신 “영성 탐구(Psychical Research)”라 부르며 근래에는 “불사주의”(Immortalism)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주의 오심에 관해 설교하고 전파하면 거의 대부분 배척받는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 보자.

ꡔ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ꡕ(벧후3:3-4).

 곧 성령께서는 더 이상 사람과 다투지 않으실 것이다. 홍수가 있기 전에 인간들을 포기하신 것처럼 포기하실 것이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120년간이나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창6:3).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회가 들림받고 나면 세상은 심판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시대 또한 전과 마찬가지로 배교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경륜

DISPENSATION OF JUDGMENT

 

 복음의 경륜과 천년왕국의 경륜 사이에 심판의 경륜이 있을 것이다.

과도기적인 경륜
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는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경륜이 시작될 때 곧바로 들림받아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는다(고후5:10).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로 이 땅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들의 심판은 “야곱의 환란”이라고 불린다(렘30:4-7, 단12:1). 이방인들은 환란 끝에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에루살렘에 있는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모든 민족들은 “양의 민족”과 “염소의 민족”으로 나뉘어 질 것이다. 양의 민족만이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을 것이며 “염소 민족”은 멸망당할 것이다(마25:31-46).

 

 

 

 

 

 

IV. THE AGE OF AGES

IV. 시대들의 시대 

여기서 "두 시대"는 "천년 시대"와 "완전한 시대", 즉 하늘과 땅이 불로써 타버려지기 전의 시대를 말한다. 현 시대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면 교회의 "휴거"와 뒤따르는 환란으로 끝이 날것이며,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 시대들의 시대는 재가 될 것이며, 그리고 그분께서 "나라들"을 심판하신 후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1. 천년시대  The Millennial Age.

작가들과 시인들은 우주적인 의와 평화의 시대를 "황금 시대"라고 기록하고 노래했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 시대에 관한 묘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유대인들은 창조 이후 일곱번째 천년을 "안식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때는 사탄은 결박당하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통치하실 것이고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이 기간을 계시록에서 여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계20:1-7).

성경은 창조로부터 새하늘과 새 땅이 오기까지 7번의 커다란 시험을 거친다. 에덴동산에서 "무죄의 상태에서" 시험을 거쳤고, 홍수 이전에 "양심의 경륜에서", "바벨에서 인간 정부를 세웠을 때", "족장시대 때에 한 가족의 우두머리로써", "율법의 경륜"에서, 그리고 지금은 "은혜의 경륜"에서 거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시험하실 것이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고, 소망없고,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요, 불순종하는 존재임이 완전히 증명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인간을 포기하시기 전에 최종적으로 한 번 더 시험하실 것이다. 이 마지막 시험은 인간에게 변명의 여지조차 없애 버릴 것이다.

그 변명의 여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그의 실패와 죄를 늘 사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왔다. 인간은 "사탄만 없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실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탄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를 결박해 놓이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걸림돌이 없는 완벽한 환경에서 살게 해 주신다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배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할 가능성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여기에 응답하신다. 사람들을 속이지 못하게 사탄을 천년동안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가두어 두신다. 그리고, 인간들이 죄악된 습성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서 단시간에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천년간이란 긴 시간을 주신다. 인간은 그 천년이란 검증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완벽한 환경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천년왕국의 끝에 사탄이 풀려날 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반역하는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세대도 예외없이 배교롤 끝맺게 된다(계20:7-10).

천년왕국의 경륜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을 개개인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전체로서 다루신다.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와 천년왕국 정부를 수행할 행정각료들만 있을 것이다. 민족으로써 유대인민족들의 머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신28:13). 그들은 다시 율법을 지키게 될 것이며, "새 언약"을 체결할 것이다(렘31:31-37;히8:7-13). 그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율법도 은혜도 심판도 아닌 "공의"에 근거해서 다루실 것이다. 그 정부는 일인 독재 정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쇠막대기(iron of rod)"로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사11:1,4; 계2:27,19:15;시2:9).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통치 또한 사랑이 저변에 확고하게 깔려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때에는 사탄이 묶여 들어가고, 인류 역사상 어떤 시대에서도 누려 보지 못한 평화와 완전함이 있을 것이다.

 

2. 완전한 시대  The Perfect Age. 

"천년 기간"이 끝난 후에 현재의 땅은 "불로써 타버리며" 의가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것이다(벧후3:13).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바칠 완전한 왕국이 될 것이다(고전15:24,28). 왜냐하면 "천년 왕국"은 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곳이 아니며, 마지막은 "배도"로써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완전한 "왕국"은 또한 "때가 찬 경륜"이라고 하는 경륜이다(엡1:10). "천년왕국"과 "완전한 왕국"은 "인자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V. THE AGES OF THE AGES

V. 시대들의 시대들

 

"창조의 시대"는 "알파" 시대였다면, 이것은 "오메가" 시대가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는 "완전한 왕국"을 아버지께 바칠 때 "시대들 중에 시대"라 부르는 "영원한 시대"의 시작이 된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오는 시대들"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시대들은 천년왕국과 영원한 시대를 일컫는 것이다(엡2:7). 요한은 계시록에서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밤낮,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계20:10). 이 시대는 하나님의 종들이 통치할 시대이기도 하다(계22:5).

우리는 "시대들의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정확한 계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에게 속해서 영원히 살아가면서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 시대들의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며, 영원 "시대"는 여전히 작은 기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출처 : 나눔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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