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마지막 경고 -요한계시록22:6~21 -
Ⅰ. 천사의 증언(22:6~11)
(6)여기에 나오는 “이 말은”이란 표현은 위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게 주신 말씀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이 관한 모든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되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고 선포하는천사의 증언이 요한 계시록에 두 번 나타나고 있다(21:5 ; 22:6).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란 문장 가운데서 “영”이란 말은 복수로 사용되었다(고전 14:32과 비교하라). “영”이란 말이 복수로 사용될 때는 항상 그것이 교회를 세우게 하시는 성령님의 선물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또 “선지자들의 영”이란 말 속에는 신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의 영이 다 포함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2장 6절 말씀과 또 1장 1절 말씀을 비교해보라. “저가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는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는 주 예수께서 천사를 보내었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 22장 6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다시 보내셨다고 증거한다(22:16 말씀과 비교하라).
22장 6절부터 본서의 결론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전히 요한계시록 1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는 문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책이 자녀로서가 아니라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개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 이 천년 동안이나 지연된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혹자는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들의 성취는 인간적인 시간개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대감각에 따라서 확정되다는 사실이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6절 말씀은 천사에 의해서 전달된 것이지만, 7절 말씀은 주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나타내신 것이다. “보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의 약속이 요한 계시록의 결론부분인 22장 6~21절 사이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다(22:7,12,20). 이렇게 반복법을 사용한 배후에는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목적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이 책은 지키고 또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주어졌다.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키는 자의 복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시간적으로 보아서 모든 사람들이 벌써 그것을 다 읽었을 것이고 또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일은 오직 지키는 일 뿐이다.
(8) 요한은 지금 자신이 성령에 크게 감동되어 주께서 찬사를 보내어 저에게 지시하던 모든 일들을 보고 들었노라고 말함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천사는 아마도 19장 10~20절까지 그리고 21장 9절에서 나타난 그 천사와 동일한 인물일 것이다.
이 일을 네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이것은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두 번째 엎드리 장면이다(19:10 ; 22:8). 요한이 경배하려고 엎드리자 마자 그는 곧 천사에 의해서 제지를 받았다 한마다의 찬사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경배의 표시로써 몸을 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9) 하나님은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경배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구약시대에 주님은 종종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본서에서도 그는 역시 자주 천사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에는 그가 더 이상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실 것이다.
(10) 이 책은 예언의 말씀인데 그것을 더 이상 인봉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하지만 다니엘서 12장9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서는 원래 상징적이며 또 긴 역사를 합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종말이 이를 때까지 봉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요한계시록은 종말이 다 할 때까지 현존할 것이기 때문에 그서은 역시 이해될 수 있고 또한 인을 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봉합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복음서 13장 10, 11, 13절 그리고 17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이 바로 말씀을 봉해 두려는데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봉하지 말라”는 말은 이 책이 더 이상 비유적인 것도 아니고 또 상징적인 것도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봉함된 책이 아니라 역사적인 해석법을 적용시키는 사람들의 잘못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아버린다는 점이다. 또 미래적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 역시 이 책의 대부분을 상징적인 것으로 취급해서비르는 파오를 범하고 있다. 사실상 이 책 속에는 28회의 상징적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4회에 걸쳐서 그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금 촛대와 일곱 별과 같은 것들인데 그 나머지 것들은 중요성에 있어서 설명된 표현들보다 덜한 것이며, 또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정도이다. 이 표현들보다 덜한 것들이며, 또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소수의 상징적인 표현을 제외하면, 이 책의 내용은 전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만일에 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 대부분이 상징적이라면 이 책은 과연 무슨 목적으로 쓰여졌겠는가.
때가 가까우니라: 참으로 때가 가까이 왔음을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11) 우리는 이것이 천사에 의해서 전달된 말인지 아니면 주님 자신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 구절 말씀은 앞절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시간이 매우 촉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늘이라는 기회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기회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변화받을 자에게는 변화받을 기회가 되겠지만 변화받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Ⅱ. 주의 증언(22:12,13)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것은 22장 7절의 말씀이 선포된 때와 매우 비슷한 상황이다. 그것 역시 관심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구절은 말씀도 역시 앞절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면 주께서 속히 오사 그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시겠는다는 말씀이다.
(13)“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표현이 요한계시록에 여러번 반복되고 있다(1:8,17 ; 2:8 ; 21:6 ; 22:13). 주께서 끊임없이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심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현현 방법은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족장시대의 방법과 율법시대의 방법, 그리고 은혜시대의 방법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며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실 뿐이다.
Ⅲ. 두 부류의 사람들(22:14,15)
(14) 본문 말씀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들이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성으로 들어가는 일은 방문객들이 얻을 특권이 아니다. 22장 19절에 의하면 그 거룩한 성은 옷을 깨끗하게 세탁한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기업으로 되어 있다. 옷을 깨끗하게 빨았다 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다(7:14).
(15)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들은 멸망의 자식들이다. 한 가지만 조심스럽게 고찰해보기로 하자. 그 거룩한 도성 밖에는 열방들이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그들이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성밖”이란 말은 신천신지에 열방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 말씀을 21장 8절 말씀과 비교해봄으로써 우리는 “성밖”이란 말이 바로 불 못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옛날 하늘과 옛날 땅을,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지상의 예루살렘을 대치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천신지에 있는 그 영원한 불 못도 현재의 바다를 대신해서 있게 될 것이다. 도벳이 땅 위에 있는 예루살렘 밖에 있던 것처럼(왕하23:10, 사30:33) 불 못은 새 예루살램의 외곽지대에 위치할 것이다. 그리고 “못”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것이 제한된 영역이라는 의미를 주기 위함이었다.
“개들”이란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서 7장 6절 말씀과, 또 빌립보서 3장 2절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개들”이 깨끗지 못한 자들과 또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술객”들은 마귀와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울 왕이 망하게 된 원인도 바로 그가 악령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는데 그것은 그가 영지주의자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죽은 자들로 더불어 교류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Ⅳ. 그리스도의 자증(22:16)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위해서 주신 책이다. 주님은 천사를 보내사 당신의 백성들이 당연히 들어야할 사실들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특히 본문 말씀은 주께서 맺은 이중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과 또 유대 왕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라는 말씀은 그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다윗이 바로 가의 뿌리도신 주께로부터 나왔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임을 암시한다. 다위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선정된 최초의 왕이었던 것처럼 천년왕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바로 그 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그의 인성을 가리키는 말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에게서 나왔다는 의미가 된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평화의 왕이었던 것처럼 처년 왕국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평화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 양면성은 주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반문하신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마태복음서 22장 45절 말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둘째로 그는 교회와 그리고 교회의 휴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광명한 새벽별이 되신다. 새벽별이 일출 직전에 나타나는 것처럼 주님은 깨어있는 신자들이 휴거할 수 있도록 새벽별이 되어주신다. 가장 어두운 시각을 대환난이라고 볼 때 일출은 왕국시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Ⅴ. 성령과 신부의 증언(22:17)
여기에 나오는 신부는 19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신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언서의 신부는 22장 5절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부는 바울 서신에서 증거하고 잇는 신부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교회 전체가 지금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19:7의 주해와 비교해보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이것은 성령과 교회의 기도이다. 22장 16절 말씀이 특별히 교회를 향하여 증거된 말씀이기 때문에 22장 17절에 기록된 내용은 그에 대한 교회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듣는 자”라는 표현은 1장 3절과 13장 9절, 그리고 특별히 2장과 3장에 여러번 반복되어 사용되었다. 각인은 스스로 들을 수 있어야만 하겠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여기에서 또다시 교회의 형편에도 되돌아가는 것 같다. 목마른 자는 영적으로 갈급한 심령을 의미한다. “오라”는 말 역시 마태복음서 11장 28절 말씀과 문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말은 22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목마름을 더 이상 느끼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만족함을 누리게 하는, 그리고 신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영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속히 재림하실 것을 고대하는 자들은 역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한편 주의 오심을 간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죄인들의 구원을 간절히 열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Ⅵ. 마지막 경고(22:18,19)
여기에 언급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은 22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22장 14절에서는 오직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22장 18절에서는 성도들의 기업으로서의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중에서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가장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Ⅶ. 마지막 증거와 기도, 그리고 요한의 축도(22:20,21)
(20) 주 예수께서 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증거하신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써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우리는 주의 재림에 대하여 사람이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이 진실로 주의 재림을 고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논할 뿐이며, 또한 그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느냐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느냐를 따지고 싶을 뿐이다. 성경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기도가 바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내용이다. 언젠간 이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고 말 것이다. 약 2000년이 계속되는 동안 신실한 성도들은 다 이와 같은 기도를 계속했던 것이 사실이다
(21) 이것은 사도 요한이 실시한 축도의 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죄인들이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거니와, 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도 전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들림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아멘.
- 요한계시록 강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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