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천년왕국 이후에 될 일들 -계 20:7~22:5 -
Ⅰ. 사단의 마지막 반역(20:7~9)
(7),(8) 일반적으로 말하면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천년왕국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의 사건들에 관하여 예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에 전개될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정통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여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단원에서 취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분명히 천년왕국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임에 틀림없다.
혹자는 천년왕국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천 년이 지나간 다음에 또 다시 유혹을 받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천년왕국 시대에 이 땅 위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하겠다. 첫째로 유대인들인데 그들은 모두 의롭게 될 것이다(사60:21). 그리고 둘째는 선한 백성들이다(마25:34~40,46). 악한 백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고(계19:21), 오직 양과 같이 선한 백성들만 왕국을 유업으로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천년왕국 시대에 살게 될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열방 보다 더욱 좋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이 사람들은 살과 피를 가지고 있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인간들이며 그들이 거기에서도 여전히 자손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방 중에 태어나는 처음 세대들은 구원을 받는 것이나 그들이 낳는 후손들은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것 같다. 이사야서 65장 말씀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심지어 그 때까지도 이 땅에 죄가 여전히 실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가랴서 14장 17절 말씀은 그 때에 사람들이 주님 경배하기를 거절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래서 주님과 성도들은 철장을 가지고 열방을 통치할 것이다. 말하자면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굴복시킨다는 말이다. 거역하는 자마다 즉시 부서지고 만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는 순식간에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 사단은 그가 잠시 동안 풀려날 때 이런 사람들을 아주 쉽게 유혹할 수 있을 것이다.
“마곡”은 창세기 10장 2절에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곡”은 민수기 24장 7절에 나타나는데 70인경에 보면 “아각”이란 말을 “곡”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또 아랍 문서에 의하면 마곡과 곡은 아주 광대한 러시아 대륙과 몽고 일대, 그리고 독일의 동부 국경까지 정복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사나운 유목민들이다. 혹자는 몽고인들을 억세고 아주 사나운 달단족으로 부리기도 한다. 그들의 조상들은 유대인들을 매우 적대시하였다.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여기에서 말하는 지면은 유대땅을 뜻한다. 반역도배들이 무수히 몰려와 온 유대지역을 포위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진”은 신자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하늘에는 천군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19:14) 그들이 일시적으로 이 땅에 진을 치고 있을 뿐이다. “진”이란 말 그 자체가 가변적인 그 무엇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천년왕국도 결국은 지나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하시는 성”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말한다. 그렇게 좋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질투를 받을 것이고 결국은 공격도 받게 될 것이다.
Ⅱ. 사단의 영원한 종말(20:10)
사단의 거짓 삼위가 이제 영원한 불 못 속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혹자는 왜 거기에 밤과 낮이 있느냐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 성은 해와 달의 비췸이 필요치 않다”고 증거하는 성경 말씀은 대하게 될 것이다(21:23). 그러나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해와 달이 필요치 않다는 말과는 다르다. 생명나무는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다고 했다. 해와 달이 없다면 어떻게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Ⅲ. 백 보좌 심판(20:11~15)
(11) 이 보좌는 4장과 5장에서 보여진 그것과는 다르다. 여기에 묘사된 그 보좌는 두 개의 형용사가 그것을 수식하고 있다.
(1) “크고” - 이 보좌가 크다 함은 그 심판이 가장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의가 크게 작용하는 심판이다.
(2) “흰” - 흰색은 특별히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예를 들면, 그의 머리가 희다는 점과 또 그가 흰 말을 타고 나온 사실들을 들 수 있다. 흰색은 완전한 순결과 또 절대적인 의로움을 상징한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주님인 것은 의심할 것이 못된다. 우리는 아에 대한 증거로써 신약 가운데서 많은 성경구절들을 찾아 낼 수 있다. 예를 들면,(요한복음 5장22절, 사도행전 10장42절, 그리고 17장31절, 로마서 2장6절, 베드로전서 4장5절,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절)과 같은 말씀들이 바로 그것이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혹자는 땅과 하늘이 없어졌다는 이 말은 단지 재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행위로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것들이 간곳 없다고 증거하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처음에 있던 그 하늘과 땅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처음의 피조물 속에는 죄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베드로후서 3장 4절과 10절, 그리고 12절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사 처음에 있던 그 하늘과 그 땅을 태워버리신 것이 확실하다.
(12) 여기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 언급된 “그 나머지 죽은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다는 말은 그들이 지금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말이다. 그들이 부활햇음에 틀림없다.
그 크고 흰 보좌 앞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있겠는가? 다음과 같은 근거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심판의 장면이다. 심판은 사건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결정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할 것이라면 저주에 대한 선언만으로 모든 일은 충분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만 하겠는가?
둘째로 각 사람이 행한대로 기록해두었던 행위의 책만이 아니라 구원받을 성도들의 이름일 새겨진 생명책도 지금 여기에 펄쳐 놓은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행위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셋째로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어떤 사람들이 구원얻을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셨다는 사실이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넷째로 심판의 날에 구원받을 사람이 전혀 없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천년왕국 시대에 죽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이 순간에 부활한다면 그들 중에 구원받는 영혼들이 없을 수 있겠는가?
(2)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이전에 살았지만 첫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이때에 나타나게 된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3) 파문을 당했거나 아니면 아직 회개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신자들의 영혼들은 주의 날에 구원받게 될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이 때에 나타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4) 사람들 앞에서 주를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주께서도 저들을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고백하지 않으시겠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에 그들이 이 순간에 나타난다면 그들은 분명히 구원받는 자의 무리 속에 포함될 것이다.
(5) 구약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한 자격은 없어도 구원받을 사람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 때에 나타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구원받는 자들 속에 포함될 것이다.
(6) 어려서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때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언제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다섯째로 부활된 그 죽은 자들 외에도 살아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다. 누가 보좌 앞에 설 수 있는가? 또 보좌 앞에 서 있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사단의 마지막 반역시에도 그를 따르지 않은 민족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나온 “책들”은 복수로 되어 있다. “자기 행위에 따라”라는 말은 첫째로 행위를 근거로 하여 심판이 거행된다는 뜻이고, 둘째로 형벌도 행위의 성격에 따라서 가중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3) 또 사망은 맨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이다(고전 15:25, 26, 55, 56).
(15) 이 구절 말씀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에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분명히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백 보좌 심판은 원리 원칙대로 이루어지는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멸망받는 사람은 그의 선한 행위는 전혀 기억되지 아니하고 오직 저가 행한 행위 때문에 멸망받게 된다. 반대로 구원받는 자도 자신의 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Ⅳ. 신천신지(21:1~8)
본 단원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촉구하고 싶다.
1. 새 하늘과 새 땅(21:1)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바다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17절 이하에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천년왕국을 가리키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사야서 65장을 집약해서 말씀은 천년왕국을 가리키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사야서 65장을 집약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와,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서 65장 17절 말씀을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그의 선포라고 할 때, 18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천년왕국 시대에 나타날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한 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과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여기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묘사하고 있는 그것과 똑같은 것이다.
2. 새 예루살렘과 사람들과의 관계(21:2~4)
(2)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만 가지고 계실 뿐 거룩한 도성이 없었으며 또한 그가 땅 윙에 있는 성소에 거하셨는데 지금은 그 거룩한 없었으며 또한 그가 땅 위에 있는 성소에 거하셨는데 지금은 그 거룩한 도성이 성소를 대신해 있고 또 거기에 거하는 자들 모두가 제사장으로 살게 된 것이다. 처음에 있던 그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지었으며 또한 그것은 낡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완전히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천년왕국 기간에 그 새 예루살렘은 공중에 있었다. 처음의 예루살렘이 아직도 땅에 있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이 땅에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아직 신부의 예복을 벗지 않은 것으로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것 같다. 혼인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어린 양과 더불어 만찬을 나누는 그 여자가 바로 신부이다. 이제 그 여자는 영원히 어린 양의 부인이 될 것이다.
(3) 보좌에서 들려온 큰 음성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있으리니: 이후로는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는 모두 의인이 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은 이제 하나님의 장막으로서 땅 위엥 내려오게 된다. 과거에 하나님의 장막으로서 땅 위에 내려오게 된다. 과거에 하나님의 장막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은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로 더불어 함께 거하신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제부터는 저희가 하나님께 속하며 또 그의 말씀을 즐거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께셔서 저희의 하나님이 되신다 함은 저가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이다(렘24:7, 겔11:18~20 참조).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흘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눈물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의 원인이 되는 죽음과 애통하는 것과 또 고통 같은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심으로써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죄의 소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스려질 때 죄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3. 구원받을 자와 멸망될 자의 차이점(21:5~8)
세 번째의 분류가 두 번째의 분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6절 하반절에 언급된 사람들과 또 3절에 나타난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현저한 차이점이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일이다.
(5) 여기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인 것 같다. “기록하라”는 말로 보아 그것이 책 속에 기록되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명령은 세 번째 분류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이 책속에 기록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땅을 원래 당신이 의도하시던대로 이루실 것이다. 그가 알파와 오메가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이루신다.
(7) 여기에 나오는 “이기는 자”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언급된 승리자들과는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2장 3장에 나오는 그들은 행위로 말미암아 승리한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랗자면 신자와 신자들을 비교하여 이긴 사람들이 여기에 다 포함된다. 그러나 본문에 나온 그들은 불신 세계와 비교한 신자들을 내포하고 있다(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었다고 증거하는 요한 일서 5장4절 말씀과 비교해보라).
21장 6~8절 사이에 언급된 그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2절과 3절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가? 다음에 나오는 관찰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라.
(1) 21장 3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땅에 있는 저희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장면을 요한이 환상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우리는 잘 안다. 21장 6절 하반절에 언급된 그 사람들은 위에 묘사된 기쁜 소식을 듣고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2) 2절과 3절에서 보여지고 있는 사람들은 새 땅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반면에 21장 7절에 있는 언급된 사람들은 그 도성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볼 수 있다.
(3) 21장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땅에서 일반적인 축복을 함께 받아누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21장 7절에서 인용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 한편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와 더불어 통치할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22:3, 5).
(4) 21장 3절에 나오는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라고 표현은 어쩐지 연합적이고 또 평범한 의미를 주는 것 같다. 그러나 21장 7절에 나오는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은 개별적이며 또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21장 3절에 나오는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라는 표현은 제 삼자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고 21장 7절에 나오는“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6) 21장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거하고 있는 반면에, 21장 7절에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살고 있다.
신자들간에 있는 위치적 차등은 천년왕국 시대로 끝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모든 신자들은 다같이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8)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두려워 하는 자들”은 그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솔직하게 믿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또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섬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천재들까지 숭배하는 자들이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더 이상 있지 않다. 대신에 영원한 불 못이 있을 뿐이다.
Ⅴ. 새 예루살렘(21:9~27)
(9) 어린 양의 아내의 이름이 이제야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장차 문자적인 새 예루살렘이 실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문자적인 새 도성이라는 증거는 많이 있다.
(1) 오늘날과 같은 교회가 그 때에는 없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교회는 모든 구속받은 무리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교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똑같은 책인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은 무엇 때문에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특별하게 언급된 새 예루살렘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인가?
(3) 3장 12절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은 교회가 기대하는 바라고 했다. 만일에 새 예루살렘이 진실로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교회가 교회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비 합리적이며 또 비 논리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4) 요한계시록 19장 7~13절 사이에 보면 새 예루살렘은 신부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교회는 손님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장면은 분명히 교회가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5) 새 하늘과 새 땅에 새로운 도시가 없다는 말이 도대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와서 사람들은 어디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주님께서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14:2).
(6) 만일에 12장 1절에 언급된 그 여자를 예루살렘으로 보고, 또 17장 1절에 인용된 그 큰 음녀가 로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21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린 양의 아내는 실제적 도성을 가리키지 않는 것으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7) 일곱째 나팔이 울린 다음에 왕국은 도래했고 또 신비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새 예루살렘이 신천신지에 공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신비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문자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 17장에서 요한이 바벨론을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천사에 의해서 그에게 설명되어야 할 정도로 신비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놀라지도 않으며 또 천사에 의해서 해설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것은 하나의 실제적 도성을 가리킴에 틀림없다고 본다.
(9) 사라들은 영원 세계를 완전히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어린 양으로 단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천신지에 들어가서야 모든 것이 현실적이며 또 실제적인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누가 지금 당장에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솔로몬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께서 금과 은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면 신천신지에 있는 하나님의 새 도성을 건축함에 있어 왜 금이나 은이 사용될 수 없겠는가?
(10)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육체와 더불어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신령한 육체를 가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쉴만한 장소도 필요치 않다는 말인가?
(11) 여기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 크기, 그리고 그것을 건축할 때 사용된 재료들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교회에 적용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12) 21장 27절 말씀은 성문들을 낮에는 결코 단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교회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13) 여기 21장 9절에서 지금 어린 양의 아내가 요한에게 보여지고 있다. 만일에 어린 양의 아내가 하나니의 신비요, 또 예루살렘이 그에 대한 설명으로써 나온 것이라면 어떻게 그 설명이 문자적으로 취해질 수 없다는 말인가?
(14) 새 예루살렘은 처음에 있던 예루살렘과 비교되고 있다. 처음에 있던 예루살렘이 문자저인 도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새 예루살렘 역시 문자적인 도시를 상징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로 간주될 수 없다.
(15) 갈라디아서 4장 26절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고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 예루살렘은 교회와 전혀 다른 실체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것을 가리켜 우리의(교회의)어머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16) 히브리서 11장 10절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지반을 갖춘 실제적 도성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교회를 기다렸다는 말인가? 그 당시에 그는 감히교회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7) 히브리서 12장 22절은 천상의 예루살렘과 또 무수한 천군천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따. 특히 23절 말씀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즉 구약성도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들은 다섯 부류로 구분하여 열거할 수 있다.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교회, 또한 천상의 예루살렘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와 하늘의 예루살렘은 서로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같은 실체로 볼 수 없다.
(10) 성령을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우리가 만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환상을 보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크고 높은 산으로 인도하실 필요가 있으시다. 영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서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평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솜씨의 극치인 새 예루살렘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이 보았던 어린 양의 아내는 바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대한 묘사는 온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보유하려고 목적하셨던 공동체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도시였따. 하니님께서는 그 도식, 즉 연합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두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고 있는지에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다. 목적지 뿐만 아니라 근원에 초점을 맞추셨다는 말이다. 환언해서 말하자면 어린 양의 아내는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에게 과거에 죄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과거에 죄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며, 또 우리가 회개할 필요도, 구원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구절 말씀은 단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업, 즉 에베소서 5장에 나타난대로 그리스도 앞에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새 예루살렘의 제일되는 특징이 바로 거룩함이라는 점이다.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되기를 갈망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거룩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는 바벨론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요, 후자는 새 예루살렘의 원리를 좇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따. 그러면 거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만 홀로 거룩하신 분이요, 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도 역시 거룩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히 2:11).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직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요한이 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은 보석같이 영광스러운 것이었다(4:3참조). 다시 말하면 그 보석은 본문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우리가 보좌 앞에 설 때, 뵙게 될 하나님은 보석처럼 아름다우신 분이다. 그러나 이 땅 윙에서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용어를 빌어다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서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희미하거나, 또는 불가사의한 표현에 불과할 것이다(고전13:12). 하지만 우리는 보석과 같이 영광스러운,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그 분의 모습 그대로를 이 도시에 들어가서 볼 것이 틀림 없다.
(12)~(14) 크고 높은 성곽이 잇고 열 두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자파의 이름들이라……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이 연합된 인간 속에는 어떤 사람들이 포함되는가?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문 위에 있고 또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기초석 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도시는 아마도 신, 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로 구성되는 것 같다. 새 하늘고 새 땅이 도래할 때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은 모두 이 새 예루살렘에 포함될 것이다.
(15)~(17) 내가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하나님의 영광 다음으로 묘사된 것이 바로 그 성을 두르고 있는 성곽이었다. 여기에서 성곽이라고 표현된 “성별”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잇어서 아주 중요한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성별되지 못한 삶은 신자의 가치를 추락시키고 만다.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대한 선을 분명하게 그을 줄 알아야만 하겠다. 새 예루살렘은 울타리, 즉 구별지어 줄 수 있는 성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바벨론적인 것은 거절하고 하나님의 원리에 합당한 것은 길이 보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곽을 쌓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다. 예를 들면, 느혜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무너진 성곽을 수축할 때 그는 산발렛과 토비야에게 심각한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한 손에 무기를 들고 나머지 다른 손으로 성곽 수축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늘에 있는 사악한 영적인 원수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한 손에 영적무기를 들고 싸우며 또 동시에 성별의 원리를 견지할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될줄 안다.
기초석 위에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었다 함은 그 도시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도들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 위에 기초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20절에 언급하고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는 말씀은 단지 사도들이 주께로 받은 그 계시가 새 예루살렘의 기초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그 문 위에 기록되어 있을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선포하신 주님 자신의 말씀이 그 대답에 도움이 될 것이다(요4:22).
성경은 금을 들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설명하는데 익숙해 있다. 금 갈대로 척량한다는 말은 이 도시가 하나님의 표준에 의해서 척량된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표준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성전에 있는 모든 거룩한 것들과 또 새 예루살렘이 완전한 입방체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천신지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때에 사람의 척량을 천사의 척량과 같은 것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활시에 사람은 천사와 같이 되기 때문이다(눅20:36). 다시 말하면, 그 도성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이 부활의 기반에 서 있다는 말이다. 죽음에 의해서 제한을 받거나 아니면 제지를 당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부활의 상태이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십자가 앞에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은 죽음이라 한들 손댈 수 없다.
(18)~(21)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새 예루살렘에 관한 특별한 묘사 가운데 하난가 거기에 잇는 금이 모두가 다 정금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기 때문에 티끌 하나라도 잡것이 섞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나 다 순수하지 못하다. 아무도 자기 자신 속에 하나님께 드릴만한 그 무엇이 들어 있따고 자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름아닌 정금이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금과 보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금이 단일 화학물질로 이룩된 것임에 반하여 보석은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금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지만 보석은 땅속에 있는 몇 가지의 물질을 아주 높은 온도와 압력에 단련시켜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석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 속에 역사하셔서 수행하신 단련의 사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금이라고 할 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또 역사하도록 계속적으로 섭리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 열 두문은 열 두 진주니: 진주는 바다에 살고 있는 연체동물이 모래알이나, 혹은 다른 이물질에 의해서 상처를 받아 그것의 깊은 곳에서 고통을 참고 견딤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진주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생명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죽음에서부터 승리하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거리는 친교를 위한 장소이다. 그 성의 길이 정금으로 되어있다고 햇으니 그 길을 걷는 사람, 또한 발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목욕한 자는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그들의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요 13:10). 우리들이 이 땅 위를 걷고 있는 한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땅의 먼지에 더럽혀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영향을 미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도 없고 또 하나님과의 친교를 방해하지 못할 때가 분명히 온다. 우리를 더럽힐 것은 영원히 없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전인은 거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맑은 유리 같은: 현재의 모든 상황은 불투명하다. 그러나 장래에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부터 진실되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학습해야 할 것이고 오히려 우리 자신 아닌 그 무엇으로 가장하려는 위선적인 삶을 추구해서는 안될 것이다.
(22) 그 거룩한 성에는 성전이 있지 않다. 구약시대에 성전마 유일하게 거룩한 곳이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만 해도 성전은 이 땅 위에 있었다. 그러나 교회시대에는 성전이 하늘에만 있었고 땅에는 있지 않았다.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에는 성전이 땅에도 있고 또 하늘에도 있을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성전이 존속하지 않을 것이다.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새로운 도시 전역이 모두 거룩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성에 살고 있는 사람 전체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이 거룩한 새 도성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23) 그 성에는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없다고 증거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해와 달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히며 또 어린 양은 등불이 되실 것이기 때문에 그 도성에는 분명히 해와 달이 비췸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그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활체를 소유하고 있따. 그러나 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살과 피를 가진 육체로 살 것이다. 이들은 바로 새 땅에 거주하고 있는 열국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과 방언과 족속으로 더 이상 나누이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사단이 최후로 반역할 때에도 그에게 속아 유혹에 빠지지 않았떤 천년왕국의 마지막 때에 살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 성안에 잇는 구원받은 사람들은 신, 구약 시대에 주를 믿고 또 그의 보혈을 의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성문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또한 그 성의 기초석에는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새 도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며(21:7), 그들은 왕으로서 통치하게 될 사람들이다(22:3). 반면에 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천년왕국 기간에 산 채로 변화를 받아 그 새 땅의 주민들이 된 것이다(21:3).
“땅의 왕들”은 열국들을 영원히 통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보다 높은 신분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도성에 있는 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또 신자들은 이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왕의 신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닌다”는 말은 여행을 뜻한다.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지상의 예루살렘은 세계의 수도로 생각될 것이다. 열국들은 수 년에 한번씩 그리고 여행하게 된다. 이 때에도 역시 열국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행할 때 성내에 있는 빛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다른 안내자가 필요없다. 그 도성의 빛은 마치도 마태복음서 2장 9절에서 별이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것처럼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그 도성 자체는 지상의 빛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도성의 빛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여기에 묘사된 영광은 구약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가장 좋은 땅의 소산물을 가리킬 것이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그 “영광”이란 말이 땅의 소산물이나 상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 도시로 들어온다는 말은 열국들이 자기의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상품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가져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에 1:4과 비교하라).
(25)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과 밤과 낮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땅의 왕들은 낮 시간에 그 새 도성을 향하여 여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새 도성에는 밤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상태는 아마도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입장과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혈과 육의 몸을 소유하고 있을 것 같다.
요한계시록에서 “낮과 밤”혹은 “밤”이란 말이 영원세계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만 해도 다섯 차례나 된다(7:15 ; 14:11 ; 20:10 ; 21:25 ; 22:5).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도 낮과 밤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성 안에는 밤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등른 낮과 밤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그들이 부활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칠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이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가능하다.
(26) 만국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저들의 왕들과 더불어 영광과 존귀를 기자고 그 도성으로 들어올 것이다. 모든 일들이 아주 조화있게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27) “속되다”는 말은 “평범하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무 가치 없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가증한 일을 하는자”는 우상숭배자를 뜻하며 “거짓말 하는 자”는 특히 마법사와 술책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세계에도 여전히 우상숭배하는 자와 술객들이 존속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곳이 얼마나 깨끗하며 또 엄숙하고 고귀한 도성인가를 반영해주고 있을 뿐이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첫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아 그 도성에 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성도들이고, 둘째는 천년왕국 시대에 산 채로 옮기움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와서 결국 새 땅의 시민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우리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도성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 역시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들이 녹명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 땅에 살고있는 주민들의 생활양식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매우 유사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곳에는 영원히 범죄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타락 전 아담의 생활과 비슷한 삶을 살것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다.
(1) 주께서 말씀하신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간다”는 사실이다(22:30). 오직 부활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은 결혼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 땅의 주민들은 부활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결혼하게 될 것이다.
(2) 새 하늘과 새 땅의 형편이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에덴동산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새 땅의 주민들은 그 옛날의 아담처럼 살게 될것이며 또한 번성하게 될 것이다.
(3) 십계명의 일부분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는 내용이 나온다(출20:6). 만일에 인류가 천 대까지 번성하지 못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약속을 하셨겠는가?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는 겨우 76세대 밖에 안된다. 누가복음서 3장 23~38절 사이에 나오는 족보 가운데 하나님까지 다 포함시킨다해도 77세데 밖에 안된다.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약 4천년이 걸렸다. 그렇게 오랜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76세대 밖에 안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지금까지를 계산 할 때 모두 몇 세대나 될 것인가. 과학적으로 계산하자면 한 세대에 30년을 한 세대로 취급한다. 그렇다고 볼 때 2천년은 약 70~80세대에 해당할 것이다. 천년왕국 기간에는 사람들의 생명이 연장될 것이기 때문에 몇 세대 안될 것이 분명하다. 천년왕국 기간을 약 50세대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이 세 기간을 모두합 할 때 그것은 겨우 200~300세대에 불과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 천 세대로부터 300세대를 공제하면 아직도 700세대가 남게 된다. 그러면 이 남은 세대가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까? 이런 점으로 보아 새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 확실하면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때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Ⅵ. 생명수 강(22:1,2)
(1) 이 단원도 역시 그 새 도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날 에덴 동산에서는 네 개의 강물이 흘렀으나 여기 새 도성에는 오직 하나의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 도성은 에덴 동산 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진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정도 일 것이다.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본서는 여러 측면에서 보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 복음시대에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셨듯이 주님도 하나님과 더불어 보좌에 앉으신 사실을 성경이 증거한다(3:21).
(2) 천년왕국 시대에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으신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보좌에 앉으신다(3:21).
(3) 백 보좌 심판 때 아들은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다(20:11).
(4) 그 새 도성 안에는 오직 한 개의 보좌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바로 그것이다(22:1). 이제 보좌에 관한한 아버지와 아들간에 더 이상 차이점이 없게 되었다.
영원세계에서 주의 이름은 항상 어린 양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지난날에는 세상에는 죄가 실존했으며, 또 그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주께서 어린 양이 되사 이 땅에 오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사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생명나무나 실과를 먹을 수도 있고 또 생명 강가에서 영생수를 마실 수도 있게 되었다.
(2) 여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 잠언 3장 18절 말씀과 11장 30절 ; 13장 12절, 그리고 15장 4절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그것은 그런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17장 15절에 나오는 “많은 물”이란 말이 상징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천사가 곧 요한에게 그것을 설명해주었던 것처럼, 만일에 여기 22장 2절에 인용된 생명나무란 말도 상징적으로 쓰여졌다면 천사가 즉시 나타나서 그것을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아마도 상징적인 것 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계실고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낙원에 잇는 것을 의미했다(2:7). 하지만 22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 나무는 길 가운데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따.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바로 하나님의 낙원임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 2장 9절에 묘사된 에덴 동산의 낙원은 인간의 낙원이지만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낙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생명나무”란 말은 원래 단수로 되어 있다. 어떻게 한 나무가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대로 강 좌우에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나무라 할지라도 많은 줄기를 땅에 번식시켜서 다시금 뿌리를 내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마다 그 실과를 맺는다”는 말로 보아 거기에 달이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장 25절에 낮과 밤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분명히 거기에 해가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또 여기에서 달마다 실과를 맺는다고 하는 말은 그곳에 달이 있다는 심증을 더욱 굳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하룻 낮에 12시간이 있고, 또 하룻 밤도 12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일년은 12달로 구성된다. 아마도 열 둘이라는 숫자는 영원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12장 4절에 보면 거기에는 더 이상 고통이나 사망이 없을 것이며, 또 덧붙여서 말씀이 전개되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질병도 없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함이 없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마태복음 8장 17절 말씀을 읽고 또 연약함과 질고를 비교해보라). 연약함과 질병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다. 이 연약함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새 땅에 사는 사람들이 혈과 육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약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생명나무 잎사귀로 그들의 약함을 끊이 없이 치료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피곤하게 않게 되리라는 것이 명확한 결론이다. 혹자는 새 땅에 사는사람들이 영생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의문을 품을지 모른다. 본문이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 9절에 의하면 생명나무가 에덴 동산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 본문에서 우려는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그 거룩한 도성에 생명나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열국이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는지, 혹은 먹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에게 아렬지지 않은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Ⅶ. 구속받은 자들이 누릴 일곱 가지의 영광(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이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죄짓는 일이 저혀 없음을 보장하는 말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그의 양심이 그렇게 활동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이 선악을 구분하는 일에 매우 양심적일 것이며 악마는 실존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거기에는 더 이상 저주가 있지 않다. 아래에 논술되는 사실들은 이것을 지지하는 논거들이다.
(1) 세상에 저주가 들어온 것은 천사장의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초래되었다. 하지만 영원세계에서는 천사들이 더 이상 권세를 누리지 못하며 대신에 우리 성도들이 그 권세를 양도받게 될 것이다.
(2) 과거에 마귀가 속이는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뱀을 이용했으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동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살이다.
(3) 포도즙을 만들면서 노아가 죄를 범했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류의 분복에 또다른 저줄르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 외에 다른 나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하나니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가운데 “어린 양”이란 호칭을 일곱 번씩이나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또 그 거룩한 도성의 설립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상관성이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21:9, 14,22,23,27 ; 22:1,3).
“그의 종들”이란 표현은 1장 1절에도 나온다. 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과 성도들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그를 섬기매: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봉사는 노복으로서 봉사가 아니라 사제적 봉사를 뜻한다. 20장 6절에 보면 승리자들이 하나님의 제사장과 왕이 될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세계에는 더 이상 죄가 없기 때문에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은 그렇게 탁월한 것으로 지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많은 분야가 있다. 우리는 영원세계가 빈둥거리면서 시간이나 보내는 곳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는 오직 그 승리자만이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영원세계에서는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김다.
(4)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천년왕국 기간에는 오직 승리자들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히12:14). 왜냐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은 예외적인 특권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멸망받는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났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 것이다”(살후 1:9). 구약시대에 오직 모세만이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는 영광이 허용된 바 있다. 하지만 그 거룩한 새 도성에 들어가면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으며 또 그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22장 3절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잇는 반면에, 22장 4절에는 “그의 얼굴”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분될 수는 있어도 분리 될수는 없다.
그의 이름은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는 144.000명만 그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터이지만(14:1), 이 때에는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이 다 그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5) 그 때에 그곳에는 자연적이 빛도,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인 빛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이 저들에게 비취실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영원세계에서 다스리는 일은 두 번째 할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최우선적인 일이다. 천년왕국에서 승리자들은 천년 동안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몇 사람의 주석가들은 21장 9절~22장 5절까지의 말씀을 새 하늘과 새 따엥서 전개될 국면에 대한 설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년왕국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해석에 대한 증거로서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는 22장 2절 말씀을 듣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씀이 그 땅에 질병과 죽음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말씀은 천년왕국을 묘사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그들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충분히 논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1) 새 예루살렘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다음에서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이다(21:1,2). 처음 땅이 없어지기 전에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순히 처음에 있던 땅 위에 위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21장 2절 말씀과 또 21장 10절 말씀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는 처음에 있던 그 예루살렘이 땅 윙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때에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면 땅에는 두 개의 예루살렘이 있게 되지 않겠는가? 처음에 있던 예루살렘이 없어지기 전에 어떻게 새 예루살렘이 내려올 수 있다는 말인가?
(3) 21장 1절과 2절에서 요한은 처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그리고 그 때에 새 예루살렘을 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마땅히 신천신지에 있을 새 예루살렘이 처음에 있던 땅 위에 내려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혹자는 21장 1~8절까지의 말씀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적한다고 인정하면서도 21장 9절 ~ 22장 5절 까지의 말씀은 천년왕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21장 2절과 21장 10절은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씀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21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은 21장 2절에서 보여지고 있는 그 도시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21장 5절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한다. 어떻게 새 예루살렘이 새롭게 되지 않고 또 만물이 새롭게 되기도 전에 그 모습을 천년왕국에 드러내 보이겠는가?
(5) 21장 8절 말씀은 천년왕국 이후에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 못속에 던져질 멸망의 자식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 거룩한 새 도성에 던져질 멸망의 자식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 거룩한 새 도성과 영원한 불 못에 던지는 일이 천년 후에나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새 도성이 먼저 도래할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는가?
(6) 21장 22절에 보면 요한이 더 이상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년왕국이 계속될 동안에는 에스겔이 예언한 대로 성전이 있을 것을 확신다.
(7) 21장 23절은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는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이 된다”는 사실이다(사 30: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새 예루살렘이 땅에 내려올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8) 21장 24절과 21장 26절 말씀은 그 성으로 들어가는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계속될 동안에는 그 도시가 공중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은 그리고 들어가지 못한다.
(9) 어린 양의 생명책은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에서야 보여지고 있다(20:15 ; 21:27).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이 어떻게 천년왕국이 계속될 동안에 그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겠는가?
(10) 22장 3절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더 이상 저주가 없을 것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에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같은 저주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21장 9절에서 22장 5절까지의 말씀이 천년왕국을 가리킨다는 말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11) 또 22장 3절 말씀으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는 땅 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 대한 언급이 업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21장 9절에서 22장 5절까지를 천년왕국에 해당하는 것으로 적용시키기르 거부한다.
(12) 22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길가운데, 혹은 그 도시의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반면에 선지자 에스겔은 주의 영광이 거룩한 성전에 충만해 있는 환상을 본 것도 사실이다. 만일에 새 예루살렘이 천년왕국에 내려왔다면 예배의 중심지는 그 도성이 될 것인가 아니면 땅 위에 있는 성전이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과연 어디에 거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첫째로 21장 9절에서 22장 5절까지의 말씀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고,
둘째로 6장 1절에서 22장 5절까지의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특히 예언적 성격을 띈 부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셋째로 22장 6~21절까지의 말씀은 이 예언의 본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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