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17:1~20:6 -
17장 1절~18장 24절까지의 말씀이 비록 긴 단원이 되겠지만 그것을 한 장으로 묶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8장 1~3절까지의 말씀이 문장 전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사실에 대한 결론임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한 서두가 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내용을 발견 할 수 있다(18:3).
첫째로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오직 17장에서만 이 내용을 취급하고 있다(17:2).
둘째로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18장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18:11,15).
셋째로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17장과 18장이 모두 언급하고 있다. (17:2 ; 18:9).
“바벨론”이란 말은 “바벨”에서 유래되었다. 니므롯이 시날땅에 바벨성을 건축했다는 사실이 창세기 10장과 또 11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한 첫 번째의 사람이 바로 그 니므롯이다. 바벨탑의 기원에 대해서는 창세기 11장 1~4절 사이에 나온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사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성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11:9).
“바벨” 혹은 “바벨론”이란 말은 “혼잡”이란 의미를 가진다. 우상숭배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도성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건축되었다. 그 도성은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느부갓네살 왕 때에 가서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셧다.
다니엘이 살던 때에 느부갓네살 왕은 큰 신상에 관한 꿈을 꾼바 있다. 그 꿈의 해석에 따르면 느부갓네살 왕 자신은 금으로 된 신앙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었으며, 그 때가 바벨론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였다. 그 다음에 신상의 은으로 된 팔 부분에 해당하는 메대 파사가 일어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자 그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후에 신상의 동으로된 배 부분에 해당하는 그리스가 일어나서 메대 파사를 멸망시켰고, 또 그리스는 차례대로 신상의 철로된 다리부분에 해당되는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첫 번째 왕국이었다면. 로마가 마지막 왕국이 될 것이다. 이 네 왕국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그 중에 세 왕국은 이미 멸망하고 말았지만 로마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상의 열 발가락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바벨론이 우상을 대대적으로 섬기고 또 유대인들을 크게 미워했던 것처럼 로마도 그러할 것이다.
로마는 정치적인 도시일 뿐만 아니라, 역시 종교적인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로마에서 도시일 뿐만 아니라, 역시 종교적인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로마에서 많은 신자들이 배출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신자들을 가장 많이 박해한 곳이 바로 그곳이다. 주후 4세기 경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일이 계속되었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공인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계속되었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관료적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 당시에 정치의 중심지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에 계속 순응했으며 6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했다. 교황 레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총회가 열러 우상숭배를 이단적이며 또 비합법적인 것으로 정죄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에 반대를 하고 나섰고, 결국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를 끊는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 로마교회(희랍정교)와 서 로마교회(로마 가톨릭교회)가 역사적인 분립을 하게 된 것이다. 동 로마교회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반면에 서 로마교회는 점차 세력을 굳히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악한 손길에 의해서 순교의 제물이 되는 핍박을 받았다.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 의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과거를 능가할 만큼 장차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리라고 예상된다. 영향력 또한 악명 높을 것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경배의 대상으로서 우상을 세울 때 로마와 그의 심복 열 왕들은 로마교회를 멸망시키고 말 것이다. 로마의 종교시대가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정치체제는 계속된다. 그리고 로마는 지중해를 세력의 요충지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삼년 반이 지나서 하나님은 로마의 정치체제까지도 완전히 멸망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면 왜 17장과 18장은 로마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대신에 바벨론이란 은유적 표현을 쓰고 있는가? 요한이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에 그가 로마에 대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기술했더라면 그의 기록은 아마도 보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자신이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은 또 한번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문자적인 바벨론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조명하고 간섭하신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7장 5절에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1)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비밀이라고 말씀하심이 보아 그것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11장 8절에 나오는 큰 성을 솔직하게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다면 아마도 유대인들이 즉시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영적인 형식을 취하여 글을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단순히 바벨론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그 큰 성 바벨론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실제적 바벨론 보다 훨씬 더 위대한 바벨론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바벨론이 문자적으로 바벨론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로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Ⅰ. 왜 여기에서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가?
첫째로 세계에서 일곱 언덕, 혹은 일곱 산 위에 세워진 유일한 도시가 바로 로마라는 점이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불리웠다(17:9과 비교해보라.
둘째로 17장 10절에 나오는 “망하였다”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상고한 바와 같이 비통한 죽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살해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살하기도 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살아 있었던 왕이라면 로마 가이사 황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셋째로 그 때에 땅의 왕들을 다스릴 수 있었던 사람은 로마 황제 외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17:18참조)
Ⅱ. 어떤 점에서 바벨론이 로마와 비슷한가?
첫째로 바벨론이 유대인들의 성지를 침범하여 거룩한 땅을 짓밟았다는 사실이 로마의 그것과 같다.
둘째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바벨론이란 말은 혼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로마 역시 과거에 대단히 혼잡했으며 지금까지도 혼잡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유사점이라 하겠다. 교회와 국가, 그리고 교회와 세상, 율법과 은혜,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이 교도와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약속,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 등이 이리저리 얽히고 또 혼잡된 상태였으며, 또 한편 장래의 영광 보다는 현세의 쾌락에 젖어 있던 것이 바로 로마의 실정이었다. 사실상 로마는 모든 잡동사니들의 총 집결지라 할 수 있었다. 그 혼잡이야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도였다.
셋째로 교부 자신들이 로마를 바벨론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특별히 터툴리안은 바벨론을 로마로 못 박아 말했다. 그리고 제롬은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밝히고 있다. “내가 바벨론에 머물며 그 자주색 음녀의 도성 안에 살면서 로마의 자유를 누릴 때 나는 그 도시의 감독이라고 인정받는 신분으로서 성령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 어거스틴은 “바벨론은 로마 이전의 로마이며, 로마는 바벨론 이후의 바벨론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넷째로 로버트 벨라민과 시저 바로니우스, 쟉크 부셑, 그리고 헉과 같은 로마교의 작가들도 바벨론이 로마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벨라민과 같은 사람은 “더군다나 요한은 요한계시록 곳곳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른다”라고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잇다.
바벨론은 단지 정치적인 로마만을 상징할 뿐이지 종교적인 로마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이다. 만일에 바벨론이 정치적인 로마만을 가리킨 것이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14장 8절과 16장 19절에서 두 번씩이나 그것이 “멸망했다”고 말했겠는가? 14장 8절에서 “망했다”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사건은 그 짐승의 우상을 만들기 이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첫 번째 삼년 반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6장 19절에 나타난 “망했다”는 말은 일곱째 대접의 재앙이 내릴 때, 다시 말하면 짐승의 우상이 세워진 이후에 되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벨론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종교적인 로마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역시 정치적 로마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이란 말은 혼잡되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결국 이 혼잡함은 종교의 영역에까지 파고 들어 왔으며 또 히브리어로 로마라는 말은 “자기를 높이는 자”라는 뜻인데 그것이 얼마나 자기를 높이며 하나님을 대적했는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곧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비밀이라 큰 성 바벨론이라”는 17장 5절 말씀은 로마의 종교적 측면을 상징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했다(17:1). 이 음녀는 한 도시를 상징한다. 그러마 로마는 많은 물 위에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음녀를 정치적인 로마에 적용시키기는 어렵다(로마에는 오직 하나의 강이 있을 뿐이다).
(2)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고 했다(17:9).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로마는 일곱 산 위에 건설되었다. 그래서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라고 불리운다. 이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가 정치적인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일곱 산 위에 앉아 있는 그 음녀는 정치적인 로마를 상징 할 수 없고 오히려 정치적인 로마 배후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종교적 로마를 의미한다고 보겠다.
(3)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17:6)라고 본문은 말한다. 이 여자가 정치적인 로마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그렇게 기이하고 또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 여자가 종교적인 로마를 상징한다고 볼 때 거기에는 놀랄 만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열방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4) 17장 2절에 언급된 “음행”은 물리적인 그 무엇에 적용될 수 없고 성격상 교리적인 그 무엇으로 상징되어야 할 것이다. 한 물질적인 도시는 실제적으로 음행을 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는 종교적인 로마를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5) 정치적인 로마라야 땅의 왕들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로마가 그들과 더불어 음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7장 2절에 나오는 그 큰 음녀는 틀림없이 종교저인 로마일 것이다. 그럼에는 불구하고 바벨론은 정치적인 로마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17장 16절에 의하면 그 여자의 종말은 그가 짐승(적그리스도)과 열 뿔들(열 명의 분봉왕들)에 의해서 불태워짐으로써 끝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8장 8절에 보면 그 여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7장 16절 말씀은 종교적인 측면을, 그리고 18장 8절 말씀은 정치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 18장 7절에서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라고 말하지만 17장 16절에 보면 그 여자가 벌써 그 짐승과 열 왕들에 의해서 폐위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18장 7절에서 어떻게 그 여자가 자신을 가리켜 여왕으로 앉은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로마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로마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할 것이다.
셋째로 17장은 주로 상징적인 반면에 18장 후반부는 거의 전부가 문자적이라고 볼 수 있다. 17장에서 보여진 내용들이 은유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천사가 요한에게 그것을 설명해주었지만 18장 후반부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해 줄 필요가 없었다.
넷째로 8장 13절에 보면 “화 있도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오는데 사실상 곧이어 세 번의 화가 뒤따라 나왔다. 이와 비슷하게 18장 2절에 보면 “무너졌도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두 번에 걸친 멸망이 있을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하나는 정치적인 로마의 몰락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로마의 멸망이다.
다섯째로 요한계시록에서 두 개의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지상의 예루살렘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서에서 두 가지 측면의 로마를 발견하게 된다. 하는 정치적인 로마의 모습이요, 또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로마의 모습이다. 이 둘은 각자가 서로 특징적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서로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1) 일곱 대접을 쏟은 후에 일어날 일들을 서두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17장 1절에 기록된 말씀과 직접적으로 대조해가면서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 아닌가? 그 음녀가 심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시지 않을 것이다.
17장 1절에 나오는 “많은 물”이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을 상징한다(17:15). 그 음녀가 바로 백성과 열국과 무리와 벙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의 영향력이 온 세계에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로마교의 조직이 그렇게 자주 모든 교회의 여 주인, 혹은 어머니로서 묘사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또 한편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가리켜 음녀라고 부르시는가? 그 여자가 세계와 더불어 혼잡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성도의 교제를 지나치게 확대시켜 세상과 더불어 관계를 맺도록 한 것이다. 또한 그 여자가 얻고자 하는 것도 세상적 쾌락과 현세적 허영 뿐이다. 따라 그 여자는 결국 맛을 잃어가는 소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음녀는 정당한 결혼 관계를 맺지 않고 혼음하는 여자를 말하며, 또한 간음은 결혼 후에 혼음하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여자를 가르켜 음녀라고 부르신다. 왜냐하면, 음녀는 결혼하기도 전에 혼음을 일삼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한 단체임을 천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음녀와 같은 로마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
이 여자는 “큰 음녀”라고 불리운다. 가톨릭교회가 마태복음서 5장 7장에 기록된 말씀은 읽었더라면 그는 결코 크게 되기를 힘쓰지 아니하고 오직 적은 무리 속에 포함되기를 노력하였을 것이다(눅 12: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오히려 세상에 반역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그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내니라”고 말씀하시는 창세기 1장 12절 말씀을 읽어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덧붙여 “자란 후에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마태복음서 13장 32절 말씀을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무가 자라듯이 급속도로 성장 한 음녀에 대한 묘사가 있다. 로마 교황이 황제보다 더 큰 자가 된 사실을 관찰해보기를 바란다. 황제는 사람의 육체만을 통솔하지만 교황은 인간의 영혼을 관할한다. 그렇다. 황제는 분명히 인간의 육체만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교회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걸맞지 않는 비정상적 행위이다.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당의 임금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는 세례 받을려고 하는 그들에게 거침없이 그것을 베풀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둘째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국가로 연장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었다. 로마인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다 신자가 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원래 교회의 국가보다 작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국가에 맞먹을 만큼 성장했다고 했다.
셋째로 그 교회가 왕이나 또 통치자 같은 정치적 권력자들과 결탁 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범할 수 있는 가장 극악무도한 음행이 바로 왕이나 황제들의 권력을 빙자하여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로마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행 되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 결과는 사람들을 명목상 신자로 만드는 것 뿐이었다.
땅의 임금들로 더불어 음행했다는 것이 해석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들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맺은 관계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는 말은 땅에 거하는 자들과 맺은 로마교회의 간접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또 여기에서 포도주는 이단 사설을 의미한다. 사실상 로마 가톨릭교회는 땅에 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단적 교리를 받아들이게함으로써 자아 결정권을 포기하는 바보 얼간이로 만들어버렸다. 다른 한편 로마교회는 약간의 속죄금을 내거나 아니면 개인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인지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세속적인 쾌락에 도취되도록 허용했을 뿐이다. 참으로 그 음행의 포도주는 온 세계를 취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종교없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교는 세상의 구미에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또 한편 로마교는 영적 실제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모든 종류의 종교 의식들을 감정적이 위로와 또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과거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장차 재생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응 약 30만 내지 40만 명 정도의 개신교도가 있는 반면에 200만 명이 넘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한 번 가톨릭 신자가 되면 죽을 때까지 그 신자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한편 미국에 이는 몇몇 대 교단들이 일년에 그렇게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로마교 신자들은 수백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3) “광야”란 말은 영적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격에는 종종 세상을 광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시 107:33,34). 다른 한편 그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로마의 인접지역 자체가 “대리석으로 된 광야”라고 흑자들에 의해서 불리웠기 때문이다.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이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일곱 머리와 열 뿔은 로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시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유는 그가 여덟째 머리 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일곱 머리들이 보여주었던 그 모든 사악함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열 뿔들이 소유하고 있던 그 권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야수로 보신다. 더군다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 여자를 음녀로 보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비이성적으로 야수와 같은 사악함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상을 포기하고 음녀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는 것은 로마교회가 로마 정부와 결탁했다는 말과 문맥을 같이 한다. 그 여자가 로마 정부를 어떻게 이용했던가! 만일에 지방 제후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에서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교황은 즉시 그 도시에 좃를 내려 미사 집행을 금지하고 또 시민들로 하여금 그 제후를 폐위시키도록 선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혹시 로마교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모종의 조처를 내리고 싶어할 때 로마교회는 직접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 정부를 움직여 행동했던 것이다. 그 여자가 짐승을 탔다는 사실로 보아 그녀의 영향력은 짐승의 그것보다 훨씬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 짐승의 색깔은 용의 색깔과 같이 붉은 것이었다. 이것은 그 짐승이 바로 용에게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용과 같은 색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다”는 말은 참람되다는 말과는 다르다. “참람된 이름들”이란 말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사용한 이름들을 썼다는 뜻이다. 로마의 황제들이 얼마나 거룩한 명칭들을 사용함에 익숙해 있었던가!
(4) 자주색은 로마제국이 존경과 권세의 상징으로 채택했던 색깔이다. 예를 들면, 로마제국의 상원들은 가슴에 넓은 자주색 띠를 두르고 다닌 반면에 기사들은 그 띠를 좁게 하여 착용하고 다녔던 사실이 그것을 입중한다. 더군다나 황제도 자주색으로 만든 왕복을 입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이 여자가 자주색 옷으로 단장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지금 지상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따. 누가복음서 16장 19절에 보면 부자가 역시 자색 옷을 입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자주색이 원래 기본적인 색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푸른색과 붉은색의 혼합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색이기 때문이다. 푸른색은 하늘의 색이며 또한 붉은색은 땅의 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성경에 나오는 에돔이란 지명은 붉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색은 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주색은 하늘과 땅을 혼합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주홍색은 로마를 상징하는 색이다. 반즈(Barnes)는 오랜 시간을 로마에서 보낸 지성미 넘치는 신사에게 자신의 의도를 알리지 않고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로마를 방문하는 나그네에게 특별히 마음을 끌거나 아니면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는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고 생각되는가?” 그 때마다 그들은 서슴없이 “붉은색”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붉은색은 교회의 추기경들 뿐만 아니라, 또한 교화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주는 색이었다. 추기경들은 그들의 의복이나 모자, 겉옷 그리고 심지어 양말까지도 붉은색을 사용했다. 교황의 경우에는 그들의 겉옷 내부까지도 붉은색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는 시종들의 옷들도 모두 붉은 색깔의 천으로 지어 입혔다. 심지어 교황이 여행하는 곳곳마다 붉은색의 장식으로 단장하여 그를 환영하고 또 영접하는 것이 예우로 생각할 정도였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상징한다. 로마교회는 이 여자처럼 자신의 외모를 단장한다(벧전 3:3, 딤전2:9).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그 여자의 참모습은 진실로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이 여자는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다. 진정한 여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 여자의 손에는 어떤 홀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마도 지상의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에 그 여자의 손에 가증한 물건으로 가득찬 금 잔이 들려 있는데 그것은 그 여자가 유혹하는 비법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여자가 승리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어떤 직접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하는 특유의 비법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이 가슴에 달고 있던 그 메달은 그 여자가 손에 금 잔을 들고 있던 것과 유사핟. 그리고 그 메달에는 “교회가 우주 위에 앉아 있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무의식 중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로 그 여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그 여자는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나 이 비밀은 그 여자의 이마에 가록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비밀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예배의 중심지(종교적)로 생각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상의 통치적 요충지(정치적)로 생각하신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대신에 자신을 세우사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중심지로 만들었다고 착각하는데 있다. 천년 왕국 시대에나 있게 될 예루살렘을 로마교회는 현재 벌써 완성한 것으로 생각한다.
땅의 음녀들과 기증한 것들의 어미라: 자신이 큰 음녀이기 때문에 그 여자에게서 나온 것들은 모두 음녀들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 음녀들은 모두 로마의 국가 교회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제도적 조직은 로마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결속된 교회는 모두 다 하나의 작은 음녀와 같다. 예를 들어, 교회의 화원되는 것이 중생과 사죄의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재정적으로 후원할 것을 서약하면 그것으로 서슴없이 회원됨을 허용하고 말기 때문이다. 또 주의 성만찬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이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 모두에게 그것을 함부로 허락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가증한 것은 항상 우상을 가리켰다(신7:25,26). 로마교회는 우상숭배로 유명하다. 마리아를 섬기며 또 천사들과 사도들, 그리고 성자들을 경배한다. 콘스탄티노플과 결별을 선언한 것도 사실은 이와 같은 우상숭배 문제 때문이었다.
(6) 본문은 이 여자가 과거보다 더 강도 높게, 그리고 더 잔인하게 될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 여자 자신이 친히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를 흘리게 될 것으로 말하기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 해야 한다. 단지 그 여자가 피에 취했다고 말할 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코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대신에 로마 정부의 권세 아래 붙이어 그를 죽이는 수법을 쓴다. 로마교회가 뒤에서 선동하고 직접적으로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은 로마 국가가 맡아서 한다.
여기에 나오는 “선동들”이란 말 속에는 역시 유대인들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장차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라도 로마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한 민족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그가 그렇게 큰 놀람으로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17장 1~6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은 천사의 해설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므로 17장 7~18절까지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7) 천사가 요한에게 일곱 머리의 비밀과 또 열 뿔의 비밀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8) 천사는 요한이 본 그 짐승의 역사적 4단계를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짐승은 첫째로 전에 있었다가, 둘째로 시방 없으며, 셋째로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넷째로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짐승은 앞에서 이미 생각해보았거니와 적그리스도, 혹은 로마제국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역시 국가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 개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 짐승이 “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로마제국이 요한이 살던 이전 시대에 있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그 짐승이 시방은 없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요한의 시대에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셋째로 그 짐승이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사실이다. 무저갱은 영물들이 갇혀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로마제국이 무저갱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넷째로 그 짐승이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로마로 알려진 정치적인 실제가 어떻게
장차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할 수 없고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전에 있었다는 말은 요한이 살던 이전 시대에 그와 같은 한 실제적 인물이 이 땅에 살았던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방 없다는 말은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요한이 살던 때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더군다나 창세기 42장 36~38절에 사용된 “시방 있지 않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죽음을 가리켰다. 그리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말은 그가 지금 무저갱 속에 있지만 장차 그곳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사실, 다시 말하면 그가 재생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그가 땅에 살면서 영원히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운명은 곧 불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19:20 ; 20:10).
그의 존재가 전에 있었으나 시방은 없고 장차 올 자로 나타나는 것은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하나님을 아주 간교하게 모방한 것이라 하겠다(1:4,8 ; 4:8).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것을 보고 기이히 여겼던 것이다. 이런 놀람은 결과적으로 그 짐승을 경배하기에 이른다(13:12).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다. 창세로부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며 결단코 그 짐승을 경배하지 않을 것이다.
17장 9절 말씀은 13장 18절 말씀과 의미를 같이하고 있다. 13장 18절 말씀이 총명있는 자가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는 반면에 17장 9절은 지혜있는 자가 그 짐승의 머리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곱 머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장소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뜻한다.
(1) 장소를 가리키는 경우: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을 뜻한다. 땅의 머리는 산이다. 그것은 역시 능력이나 권세를 상징하는 인상을 풍긴다(민 21:20, 렘22:6, 암 1:2 ; 9:3).
특별히 우드워드 박사는 “요한이 살던 때에 로마는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라고 흔히 불렀다”라고 증거한다. 많은 고대의 로마 시인들도 역시 그들의 작품 가운데서 모라를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라고 읊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한이 살던 시대로부터 약 500년이 흘러간 다음에도 여전히 로마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로마를 일곱 언덕으로 된 도시로 명명했다는 사실을 혹자는 상기시킨다. 때로는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여인상을 새겨넣은 로마의 금메달이 발견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캡틴 스미드(로마 동전의 일종)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베스파시안 황제 시대의 동전은 로마가 일곱 언덕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잘 반영해준다. 동전의 이면에는 로뮤러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또 전면에는 타이버 강을 인격화시켜서 새겨넣었던 것이다(로뮤러스와 레무스는 쌍둥이로서 늑대의 손에 의해서 키워졌다고 한다. 그 중에 로뮤러스는 로마의 건설자이며 최초의 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역자주). 시인 호레이스는 그의 작품 가운데서 “일곱 언덕을 사랑하는 신들이여!”라고 읊고 있으며 또 다른 사인 티버루스는 “너희 황소들이여! 일곱 언덕 위에서 풀을 뜯거라”고 노래한 바 있다. 그 일곱 산들의 이름은 아벤틴, 콜리안, 에스퀼린, 캐피톨린, 팔라틴, 퀴리날, 비미날이다.
(2)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 이 일곱 산들은 역시 일곱 왕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왕은 백성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땅의 머리, 즉 산들이 현존적이며 계속적인 반면에 사람들의 머리는 일시적이며, 또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땅의 백성의 머리라는 이 머리에 대한 이중적인 개념은 이사야가 증거한 특별한 말씀, 즉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라”는 말씀을 논증하는 것 같다(사 7:8 ,9).
어떤 사람은 일곱 왕을 계속되는 일곱 가지의 정부 형태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성경 해석의 원리에 위배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라고 한 것은 천사 자신이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다른 방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2) 성경은 결코 한 왕을 가리켜 한 정치체제를 상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전주의 작가들이라 할지라고 그런 상징주의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3) 왕에 대한 개념 그 자체가 벌써 한 형태의 정부를 상징한다(그가 전제주의 군주이거나 아니면 입헌주의 군주를 상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왕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형태의 정부를 각각 뜻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4) 서로 다른 로마의 일곱 가지 정부 형태를 찾아낸다 할지라도 어떻게 여기에 나오는 일곱 왕들이 계속적으로 뒤를 이어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일곱 형태의 정부들은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 간헐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만일에 일곱 왕들이 일곱 형태의 정부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열왕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들 역시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정부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로마의 정치사는 열 일곱 왕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6) 17장 9절은 여자가 일곱 산 위에 앉아 있다고 증거한다. 그 일곱은 각각 한 개의 산이다. 어떤 것은 산맥이고 또 다른 것은 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일곱 왕들 역시 단순히 일곱 왕들일 뿐이다.
(7)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머리”는 항상 인격을 가리킨다. 다니엘서 7장 6절에 언급된 네 머리는 곧 네 왕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네 왕조를 상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왕들만이 유별나게 일곱 오아조를 상징한다고 고집해야 될 이유가 있겠는가?
(8) 만일에 그 왕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콘스탄틴 대제와 같은 그리스도인인 황제들도 역시 여러 가지 정부 형태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12장 3절 의하면 일곱 머리가 용에게 달린 것이라 했으니, 이 모든 머리들은 사단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시 사단에게 속한 단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어떤 비평학자들은 로마를 열 두 가이사들이 통치한 바 있으며 특히 요한이 살고 있던 시대에 다스렸던 도미티안 황제가 열 두 번째의 가이사 황제였다고 말함으로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로마에는 오직 일곱 왕들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인용된 특별한 일곱 교회들만이 그 당시에 실재하고 있었던 교회들의 전부였겠느냐고 반문함으로써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곱 교회들이 대표로 선정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곱 왕들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또 어떤 사람은 일곱 왕들이 대표로 선정되었다면 열 두 가이사들 가운데서 선정된 일곱 황제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여전히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와 같이 추론해봄으로써 그 일곱 황제들을 가려낼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첫째로 13장 1절에 기록된 “그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는 말씀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일곱 머리에 모두 참람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곱 왕들은 자신들이 신이라 자처하면서 자기들을 경배하도록 강요했던 그 오만한 황제들임에 틀림없다.
둘째로 17장 10절에 나오는 “망하였다”는 말이 비참한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이다(삼하 1:19, 25, 27). 참으로 비참하게 죽은 왕들이 있다면 그들은 다음에 나오는 왕들일 것이다. 다섯 황제들, 즉 줄리어스 시이저, 티벨리우스, 카리큘라, 글라우디우스, 그리고 네로는 자신들을 신격화했던 황제들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신처럼 경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었으니, 어떤 사람은 살해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살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미티안 황제가 바로 여섯째 왕이 된다. 그는 요한이 살고 있던 때에 통치했던 왕이다. 그 역시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후에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곱째 왕은 장차 나타날 것이다. 여섯째 왕으로부터 일곱째 왕 사이에 얼마 만큼의 시간 간격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한다. 그는 요한이 살고 있던 때에 통치했던 왕이다. 그 역시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후에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다만 일곱째 왕이 나타나서 잠깐 동안 계속하여 다스리다가(17:10), 마침내는 그도 역시 살해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17:10 ; 13:3, 14).
여섯째 왕과 일곱째 왕 사이에 있는 간격을 종교적인 로마가 통치함으로써 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왕으로부터 여섯째 왕까지 또 일곱째와 여덟째 왕이 이를 때까지는 정치적인 로마가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적인 로마를 대신해서 종교적인 로마가 권력을 뚜렷하게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 후에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왕이 없었다. 그르스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긴 간격이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로마가 멸망하고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일정한 간격이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잘 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나타나자마자 일을 착수하여 삼년 반 동안에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왕은 벌써 여덟째 왕을 영접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을 것이다.
(11) 본절 말씀을 17장 8절 말씀과 비교하여 읽어야 하겠다. 17장 8절이 그 짐승에 관한 역사적 4단계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17장 11절 말씀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17장 11절에 의하면 그 짐승의 역사적 4단계가 첫째로 전에 있었다가, 둘째로 시방 없으나, 셋째로 일곱 중에 속하고, 넷째로 멸망으로 들어갈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7장 11절에 나오는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 그리고 넷째 단계는 17장 8절에 언급된 그것들과 아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17장 11절에 기술된 셋째 단계 역시 17장 8절의 그것과 일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짐승이 무저갱으로부터 나왔음에 틀림없다고 본다. 저가 여덟째 왕이지만 일곱 중에 되기 위해서 죽은 자로부터 재생한 일곱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가 일곱 중에 누구이겠는가?
(1) 그는 일곱째 왕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일곱째는 아직 세상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17:10). 그러나 짐승은 벌써 이 땅에 온 바 있다(17:8).
(2) 그는 여섯째 왕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여섯째는 요한의 때에 이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짐승은 요한이 살던 때에는 이 땅에 없었다(17:11).
그가 일곱째도 아니고 여섯째도 아니라면 그는 분명히 다섯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다섯 가운데 어떤 왕일까? 13장 18절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그가 네로 황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일곱째 왕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덟째가 바로 그 일곱째의 몸을 이용할 것이다. 여덟은 부활의 수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주 예수의 부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주님은 스스로 부활하셨지만 그 여덟째는 다른 영혼에 육체를 제공하여 재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는 가이사 황제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은 역시 주를 영접하지 않았다. 장차 적그리스도가 가이사로 재생할 것인데 그 때에도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를 영접할 것이다.
(12)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었던 것처럼 열 뿔 역시 열 왕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머리와 뿔은 서로 다르다.
첫째로 뿔이 머리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머리보다 더 작을 것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한 머리가 로마의 전체를 통치하게 될 것이지만 한 뿔은 로마에 예속된 한 분봉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한 시디에 오직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반면에 열 뿔들은 동시대에 다스리는 열 명의 분봉왕들이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셋째로 일곱 머리 가운데 아직 한 머리가 남아있는 반면에 뿔은 아직 열 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열 뿔, 혹은 열 왕들은 요한의 시대에는 아직 통치할 왕국이 없었다. 그러나 여덟째 왕국이 나타나면 그 열 왕들은 동시에 권세를 얻게 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열 왕들은 열 왕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음의 이유로 보아 적합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열 왕이라고 한 것이 천사의 해석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해석을 찾아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둘째로 17장 12절 말씀과 17절 말씀은 열 왕들을 열 개의 왕국으로 재해석 할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셋째로 그 짐승이 한 인격이기 때문에 그 열 왕들도 마찬가지로 인격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열 왕들은 땅의 임금들과는 다른 존재들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땅의 임금들이 음녀와 더불어 음행했으나 이 열 왕들은 아직 그 큰 음녀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후에 그 음녀를 멸망시킬 것이다(17:16).
(13) 그 짐승이 교황에게 자기들의 권세를 한 번도 양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짐승이 과거에 있었던 로마 황제들 가운데 그 누구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열 왕들이 한 번도 로마 황제 중 누구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바쳐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열 왕들이 자기들의 권세를 그 짐승에게 준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그 짐승이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는 것을 그들이 친히 목격하였기 때문에 그를 초자연적 인간으로 생각했음이요, 둘째는 그들이 악령에 의해서 꾀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강림하사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악령도 적그리스도가 모종의 방법을 통하여 재생한 후에 열 왕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짐승에게 권세를 양도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14) 논리적 순서로 보아 17장 14절 말씀이 17장 16절 말씀의 앞에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적인 순서를 규명하자면 17장 16절에 언급된 사건이 17장 14절 말씀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다. 19장 11~21절까지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17장 14절에 언급된 그 전쟁에 관한 세부적인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실세적으로 그 때에 가서야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이 많을 것이지만 사실 승리는 어린 양 자신에 의해서 얻게 된다.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이 한 검을 가지고 어린 양은 원수들을 이기고 또 이기어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는 원수를 이기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권세로 이길 것이다. 그의 이김은 곧 그가 만왕의 왕이시오 또 만주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힘이 아니라 권세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양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 가지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로 부름받은 자, 둘째로 선택받은 자, 셋째로 믿음이 신실한자가 바로 그 자격 규정이다. 그들은 추수할 곡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린 양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부르심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그의 결정적 의지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선택을 받는 것이 보통 부르심을 받는 일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것이 부르심을 받는 일 후에 오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자들 가운데서 선택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님도 일찍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22:14). 그러므로 그것이 맞는 순서인 것 같다. 시편 89편 19절 말씀은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해줄 수 있는 설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을 받았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또 달리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들만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한 부류의 그룹을 형성하는 반면에 승리한 사람들은 또 다른 부류의 그룹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따르는자는 누구나 부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 특별히 선택함을 받을 수 있도록 신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 생각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을 버릴 것을 뜻한다.
(15) 본절 말씀은 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음녀가 비밀이고 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물 역시 신비한 것이고 또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가 만일에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많은 물 위에 앉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이 교제를 넓힌다는 미명으로 세상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다면 바로 그것이 많은 물 위에 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여자는 세 장소를 앉기를 즐겨하고 있다.
첫째로 이 여자는 짐승 위에 앉기를 좋아한다(17:3). 말하자면, 로마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일곱산 위에 앉기를 원한다(17:9). 그것은 로마를 활동의 요충지로 삼는다는 말과 같다.
셋째로 이 여자는 많은 물 위에 앉는다(17:15). 이것은 그 여자의 영향력이 전 세계에 미치고 있음을 뜻한다.
왜 그 여자가 어느 때에 음녀로 또 다른 때는 여자로 불리우고 있는가? 여자란 용어는 로마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음녀란 말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여자란 말은 다분히 정치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음녀란 말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6)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여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여자(로마)가 바로 저들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음녀가 그리스도와 관련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본서에 나오는 그 짐승은 로마와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재생한 네로가 바로 적그리스도로 나타날 것을 이미 생각해보았다. 그가 과거에 신자들을 그렇게도 잔인하게 핍박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라고 해서 스스로 회개하고 로마를 주께 양도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의미에서 그 음녀를 멸망시키려고 처음부터 발벗고 나설 것이다.
네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세상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으로 그 음녀의 행위가 너무 가증하고 사악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에 의해서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열방은 로마교회의 행동을 너그럽게 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제가 빵을 가지고 축복하면 그것이 변하여 주의 몸이 된다는 교리나, 또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독선, 고해성사, 종교재판, 그리고 면죄부 판매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 외에도 여자가 자행하는 더 많은 비열하고도 악독한 행위를 열방은 더 이상 방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여자의 장점을 인하여 미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삼위일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일,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같은 진리들을 여전히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에 열방은 그녀를 미워할 것이다.
아마도 세계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다음과 같이 응징할 것이다.
(1)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교황이 거하는 바티칸은 황무지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2) 발가벗는 수치를 드러내보일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물질적인 생활에 큰 곤욕을 겪을 것이며, 영적으로 말한다면 자신들의 비밀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3) 자기 살을 먹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의미를 추구한다면 그 여자에게 속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할 것을 뜻하며, 또 일반적인 표현을 쓴다면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의미한다.
(4) 비참하게 불시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는 줄로 믿는다.
그러나 땅의 임금들이 로마교회의 죽마고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여자가 저지른 악행을 볼 때에 단지 슬퍼할 뿐이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18:9,10). 심지어 일곱째 왕도 그 여자의 친구이지만 그 역시 잠깐 동안만 통치할 뿐이고 어떤 도움도 주지못한다(17:10). 적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가장 큰 원수가 될 것이다.
(17) 여기에 나오는 사건은 아마도 그 큰 음녀가 완전히 멸망을 받은 다음에 일어날 것이다. 그 때에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8) 여기 나오는 여자는 로마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이 살던때에 로마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릴 수 있었던 유일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18): (1) 본문에 언급된 인물이 그리스도 자신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렇게 큰 권세를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큰 영광으로 땅을 환하게 밝힐 수 있겠는가?
(2) 하나님은 그 짐승과 또 열 뿔을 통하여 종교적인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키신다(17:16). 이제 그는 또 다시 정치적인 로마를 파하시려고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힘센 음성의 선포를 수반하시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벌써 구약이 예언한 바 있다. 이사야서 13장 21절에 보면“들 양이 거기서 뛸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70인경에 의하면 “마귀가 거기서 춤을 출 것이다”로 되어 있다. 비록 이사야서 34장 13~15절까지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에돔을 가리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요한계시록 18장 2절에 묘사된 말씀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3)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무너진 만국이다. 17장 2절에서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종교적 로마를 가리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 그로 더불어 음행한 땅의 왕들이다. 17장 2절과 18장 15절 말씀을 보면 이것이 특별히 로마의 상업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18장 3절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또 심사숙고해보면 우리는 곧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면 더 이상 교역이 있지 않다. 여기에 보면 그 무역이 사치심리 때문에 성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업은 개인적인 이익만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또 인간에게 사치할 것을 자극한다. 그런 상업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4) 여기에 나오는 “그”는 정치적인 로마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로마를 가리킨다. 예언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볼 때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있은 후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큰 지진이 있을 것이다(16:17,18). 그리고 하나님은 그 큰성 바벨론을 기억하사 땅에 또 큰 우박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쏟으실 것이다(16:19,21). 17장은 바벨론이 그 큰 음녀인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이마에 비밀이라 그 큰 성 바벨론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또 17장 말씀은 역시 그 여자의 과거와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 여자의 종말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다시 18장은 우리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해준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명령이 비록 이 문맥에서 주어졌지만 그것은 17장에 나타난 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로마 속에도 주를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이 구절 말씀은 16장 19절 말씀과 일치한다. 두 곳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큰 성 바벨론을 멸망시키시는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시는 한 그는 반드시 응징하신다. 또 그가 기억하실 때에는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신다. 그러나 그가 죄를 간과하실 때에는 아주 철저하게 간과하신다.
(6) 이것은 로마의 2장 6~9절까지의 말씀이 성취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또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라” 그의 행위에 대해서 갑절로 갚아주라고 했으니 이것이 모순되지 않는가? 아마도 이것은 바벨론에 대한 양면성을 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썩은 잔에도 심판하실 때 바로 종교적인 로마의 죄 때문에 정치적인 로마까지 멸망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7) 교회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정반대로 행하고 있다. 로마는 자신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치에 자신을 방임하고 있는 것이다.
(8) 통곡은 슬픔 후에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그 큰 성을 심판하사 울게 하시며(18:10) 또한 통곡하도록 하신다. “주 하나님”이란 명칭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구약적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구약적 위치로 환원하셨음을 보여준다.
(9) 땅의 왕들은 그 여자를 도와줄 만한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 그 여자를 심판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일 수 밖에 없다. 17장 16절에 말씀하고 있는 그 음녀가 태움을 받은 것처럼 이 도시 역시 불태움을 받을 것이다.
(10) 땅의 왕들은 “화로다 화로다”라고 외치면서 슬픔을 삼킬 것이다. 18장에 보면 세 번에 걸쳐서 이와 같은 탄식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10절과 16절, 그리고 19절에서 발견된다.
(11)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로마는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그리나 18장 11절에 보면 이 도시가 수입과 수출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물건을 사들이김나 할 것이다. 거기에는 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로마는 일방적으로 사들이기만 한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가 그 곳에 살면서 사치를 일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12),(13) 여기에 그들이 사용한 아주 다양한 일곱 가지의 상품들이 열거되고 있다. (1)금, 은, 보석, 진주, (2) 세마포, 자주 옷감, 비단, 붉은 옷감, (3)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 (4) 계피, 향료, 향, 향유, 유향, (5) 포도주, 감람유, 고운 밀가루, 밀, (6) 소, 양, 말, 수레, (7)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마지막 상품으로 나타난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란 말은 육체와 영혼이란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 시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속담 가운데 “바벨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황금이고, 가장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바로 사람의 영혼이라”는 말이 항간에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18장 14절 말씀은 로마의 과거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5),(16) 이번에는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며 멀리 서서 울며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울부짖느다(16절). 18장 16절 말씀과 17장 4절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는 곧 그들에게 일치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7)~(19)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이 말씀과 앞절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에는 선장들과 선인들이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외치면서 슬퍼한다(19절). 그리고 “일시간에”라는 말이 요한계시록에 세 번 사용되었는데 한 번은 땅의 왕들에 의해서(18:10), 또 한 번은 상고들에 의해서(18:17), 그리고 세 번째는 선장과 선인들과 선객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18:19).
(20) 여기에 나오는 성도들과 선지자들은 아마도 신약과 구약의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모두 포함시킬 것이다.
(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키실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큰 지진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큰 성 바벨론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16:19). 아마도 바벨론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지진이 있은 후에 반드시 불이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땅의 왕들과 상고들, 그리고 그 여자가 불태워지는 모습을 목도한 사람들이 불 붙는 연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 감히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22)~(24) 21~23절 사이에 “결코 다시”라는 말이 여섯 번 씩이나 기록되었다. 이 부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로 바벨론의 상고들이 땅의 왕족처럼 군림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복술을 가지고 만국을 미혹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바로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상업의 맹점도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 넣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한 죄악이다. 그리고 복술은 마귀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로마가 장차 복술의 아성이 될 것을 뜻한다.
물론 로마는 과거에도 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던 것이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피를 흘릴 것임에 틀림없다.
19장 1~6절 사이에 언급된 사건은 18장 24절 말씀의 결과로 초래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19):(1) “이 일 후에”라는 말은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한 다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허다한 무리 속에는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이 다 포함된다.
또 “할렐루야”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을 가진 문자 그대로는 “알렐루야”라는 말이다. 왜 그들이 할렐루야를 외쳤을까?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지금 임했기 때문이다.
(2)“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는 말씀은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노래한 15장 3절 말씀과 의미를 같이하고 있다. 하나님이 참되시다 함은 그가 실제적 상황을 감안하여 판단하시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함은 그가 합당한 절차에 의하여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 큰 음녀(종교적 로마)에 대한 심판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로마에 대한 심판은 세세토록 계속될 것이다.
(4) 성경 가운데 24장로들과 네 생물들에 대하여 언급되기는 본문이 마지막이다.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가 “할렐루야”하고 주를 찬양한 후에 24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또 “아멘 할렐루야”라고 화답했다. 이것은 앞에 나오는 허다한 무리와 또 그 무리의 찬송을 받아 화답한 그들이 서로 다른 그룹임을 보여준다. 하늘에 있는 그 허다한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구원”과 “영광”과 또 “능력”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교회가 그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 같다. 24장로들은 교회를 대표하지 않는다. 본문 이후에는 더 이상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이 때가 지나서 그들은 지금까지 맡아온 그 고귀한 직책을 양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5) 보좌가 성소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본문이 마지막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성소만 있고 도성이 없지만,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 그곳에는 도성만 있고 성소가 필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뜻한다. 이유인즉 어린 양이 바로 보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5:6).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라는 문장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 있는 신자들 각자 각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이란 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주께서 항상 하시는 일이다(히2:12).
(6) 허다한 무리의 음성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르 뜻한다. 많은 물소리 또한 그 허다한 무리의 메아리치는 음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또 큰 뇌성과 같은 소리는 위엄과 장엄함을 나타내주는 음성을 말한다.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전능하신 분이 항상 통치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는 단지 그것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을 뿐이다.
(7)여기에 나오는 어린 양의 아내는 누구인가? 그것을 교회 전체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9장 1절에 언급된 그 허다한 무리 속에는 이스라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열방 각처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 포함된다. 교회도 이속에 포함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장 7절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들이 바로 그 허다한 무리이기 때문에 교회 또한 그 사람들 속에 포함될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 아내는 다른 어떤 인물을 가리킬 것임에 틀림없다.
(2)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서 오직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만이 혼인 잔치에 참여할 특권을 받았다(마25:1~13). 그러므로 교회에 있는 사람 전부가 다 처녀일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다.
(3) 여기 나오는 어린 양의 아내는 바울이 그의 서신 가운데서 언급한 신부하고는 다르다. 바울이 말한 신부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증거한다. 바울 서신에서는 교회가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교회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납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가 자신의 행위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울 서신에서는 교회가 전체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가 구원 받은 자의 무리와 승리한 성도들의 무리로 구별되고 있다.
이 어린 양의 아내는 새 예루살렘 외에 다른 그 무엇일 수가 없다(21:9, 10).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성소 안에 계시니 허다한 무리의 부르는 찬송 소리가 그 성소로부터 들려오는 것은 당연하다. 천년왕국 시대에는 승리자들이 그 도성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며, 또한 그 성소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성소는 점차적으로 그 탁월성으로 상실하여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 자신이 그 성소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가운데서라도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으나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그 잔치에 결코 참예하지 못할 것이다.
(8) 우리가 이미 앞에서 토의한 바와 같이 그 어린 양의 아내는 새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그에게 허락하사”라는 말은 상급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빛난다”는 말은 세마포에 합당한 흰색을 가리키며, 이것은 그 큰 음녀가 입었던 옷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17:4). 또 여기에 나오는 “깨긋하다”는 말은 19장 14절에 언급된 “깨끗하다”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는 표현 가운데서 옳은 행실이란 말은 이사야서 64장 6절에 나오는 “우리의 의”라는 말과 같다. 이 성도들은 곧 새 예루살렘 성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신부의 신분으로 살게 되지만, 잠깐 후면 아내의 신분으로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된다. 새 예우살렘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에는 새 예루살렘이 영원한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신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들과 승리자들로 구분된다. 오직성도들만이 승리한 천년왕국 시대에 새 도성 안에서 살게 된다. 혼인 예복은 오직 한 번만 사용될 것이며 승리한 성도들이 신부로서 거기에 함께 참예할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예식을 위하여 새 예루살렘의 문이 열리되 처음에는 승리자들에게만 입장이 허용되며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9) 이 구절 말씀은 혼인 잔치에 어떤 사람들이 청함을 받을 것인데 청함받는 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복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도성은 어린 양의 신부이고, 또 그 도성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사람들은 바로 성도의 옳은 행실을 가지고 있는 초청받은 사람들이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 또한 그 도성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이런 표현은 21장 5절과, 또 22장 6절에서 두 번 더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방금 주신 말씀에 대하여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표현이다. 사실상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하늘 나라에서 분복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받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서 나누어 가질 분복이 전혀 분배되지 않는다. 오직 승리한 성도들만이 그 예식에 참예하도록 청함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주님과 더불어 만찬을 나누게 되리라고 생각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과 일치하는 것 같다.
(10)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피조물을 경배하려는 큰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나오는 “대언의 영”이란 말은 고린도전서 14장 32절에 나오는 “예언하는 자들의 영”과 관계된다. 왜냐하면, 예언하는 사람들이 곧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11) 혼인 예식이 끝나고 이제 주께서 그의 신실한 추종자들과 더불어 이 땅에 재림하신다. 주를 따르는 “신실과 충성”이란 이름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 벌써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나는 그런 이름들은 특별히 교회와 관련시킨 이름들임을 알아야 하겠다.
(12) 면류관은 머리에 쓰는 영광스러운 모자를 말한다. 그들이 많은 면류관을 여러 겹으로 쓸 수 있는 것은 그 면류관에 선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쓰여진 이름은 아주 특별한 것이어서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었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 보면 주께서 보가모교회의 승리자들에게 약속하신 새 이름도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느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이 특별한 이름 역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이름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13)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 이 옷이 하늘에서 뿌린 피로 물들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 땅에서 겪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사63:1~6).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과거에 이와 같은 표현을 한 사람은 오직 사도 요한 밖에 없다(요1:1).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바로 그 요한임을 증명하는 표현이다.
(14) 여기에서 하늘 군대로 묘사된 그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17장 14절에 언급된 부름심을 입고, 또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자들과 똑같은 인물들이다. 이 때에 신자들이 득세할 것은 벌써 결저오딘 사실이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모두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부의 예복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기 때문이다.
(2) 성도의 옳은 행실은 한편으로 그 새 예루살렘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되기 때문이다.
(3) 어린 양의 혼인예식에 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성도의 옳은 행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주와 더불어 나타난 사람들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4) 마가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한 때“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막 14:25). 이것은 그 잔치가 바로 왕국에서 즐길 잔치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5)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말씀하신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표현은 19장 9절에서 말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과 일치한다.
(6) 19장 9절에서 복이 있다는 말은 20장 6절에 나오는 복이 있다는 말과 관계된다.
(7) 왕국에서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될 것이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에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런데 21장 9절의 때까지도 새 예루살렘은 여전히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신부일테니까
(15) 이 구절 말씀은 주님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첫째로 그의 입에서 이 한 검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의 검을 뜻한다.
둘째로 주께서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리겠다는 말씀이다. 이런 표현이 요한계시록에 세 번 나오는데 그것은 2장 27절과 12장 5절, 그리고 본문에서 발견된다. 왕국 초기에 그는 모든 반대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말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겠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17~20절까지의 말씀과 또 이사야서 63장 1~5절까지에 묘사된 표현과 일치하고 있다.
(16) 그의 다리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가 지금 말을 타고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17), (18) 19장 9절에 언급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큰 잔치”는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을 위한 것이다.
(19),(20) 본문 말씀은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운명을 말해준다. 다음과 같이 사건의 진상을 자세하게 세분하여 살펴보자.
(1) 19장 11~16절까지의 말씀은 주께서 어떻게 원수들과 싸우시고 또 승리를 거두시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2) 17, 18절의 말씀은 어떻게 공중에 나는 새들이 그 반역자들의 살을 먹는가에 대해서 논술하고 있따.
(3) 19,20절의 말씀은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종말을 설명한다.
또 거짓 선지자가 행한 세 가지의 악행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20절).
첫째는 짐승의 앞잡이로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거짓 이적을 행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을 미혹했다는 점이다.
셋째로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미혹했다는 점이다.
“산 채로” 그들을 불 못에 던져 넣었다는 사실을 유의해보라. 그것은 우리가 13장 11절과 또 13장 18절 말씀을 설명할 때의 상황과 매우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 짐승과 선지자가 모두 무저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의 육체가 두 번 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불 못 속에 집어 던질 때에 그냥 산 채로 넣었을 것이다.
(21) 이 구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이 다 지나간 다음에 주를 신실하게 따르던 그 성도들이 다른 신자들보다 먼저 천 년 동안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다.
Ⅲ. 사단의 결박(20:1~3)
(1), (2) 요한계시록 9장 1절에 보면 무저갱의 열쇠를 사단이 받았다고 증거한다. 그가 그 때 그곳에서 두 가지 행한 일이 있다.
첫째로 그는 그 때 그곳에서 두 사람을 재생하도록 했다.
둘째로 그는 짐승을 풀어 사람들을 해치도록 했다.
사단은 하늘에 전쟁이 있을 때에 패배하여 그곳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했다(11:7~9). 이제 그는 또 다시 무저갱으로 던짐을 받은 것이다(20:3). 왜냐하면, 주께서 만왕의 왕이시오, 또 만주의 주로 오셨기 때문이다(19:16 ; 20:1). 주님은 사단을 이기시되 권세로 이기셨다. 그의 말씀은 충만한 권세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3) 혹자는 왜 사단을 곧바로 불 못 속에 던져버리지 않는가 하고 의혹을 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답은 마귀를 결박하여 일 천년 동안 무저갱 속에 그를 가두어 두었다가 잠깐 동안 풀어 놓아야 될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 용이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이고, 둘째로 사람의 숨은 죄를 폭로할 목적이며, 셋째로 하나님의 선하신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Ⅳ. 천년왕국(20:4~6)
(4)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게 될 것이다.
(1) 승리자들이 보좌에 앉을 것이고, 또 심판할 권세를 받게 될 것이다(20:4). 이것은 그들이 왕국을 유업으로 물려 받았음을 보여준다(단7:10과 18절 그리고 22절 말씀을 비교해보라).
(2) 약 2천년 동안에 걸쳐서 주님을 위하여 목베임을 받은 순교자들이 그 영광을 누릴 것이다(20:4). 이들은 다섯째 인을 땔 때에 보여진 제단 아래 있던 영혼들과 같은 사람들이다(6:9). 그들은 예수님의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다.
(3) 대 환난 기간 동안에 순교를 당한 성도들이다. 이들은 짐승과 또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의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20:4).
여기에 나오는 “살아서”라는 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첫째로 이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때까지 아직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부활은 단지 이루어진 사실로 여기에 투사하고 있을 뿐이다. 요한도 그들이 그 때에 이미 부활한 것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이 살았다고 인식한 것 뿐이다.
둘째로 여기에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는 부활한 성도들 뿐만 아니라 살아서 휴거된 신자들까지도 다 포함된다. 왜냐하면, 부활 성도들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할 것이라고는 우리가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서 휴거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5) 이는 첫째 부활이라: 오직 한 차례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러 차례의 부활이 있을 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본문은 단지 이것이 가장 좋은 부활임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첫째 부활이란 말 속에는 20장 4절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된다. 첫째는 “살아서”라는 말이고 둘째가 바로 그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부활이라 함은 사는 것과 또 왕노릇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부활에는 상급이 따르는데 이 때 상급이라 함음 부활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20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둘째 사망은 첫째 부활과 대칭 관계를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후자가 영광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반면에 전자는 영원한 고통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은 다름이 아닌 보상의 때라고 볼 수 있다(눅14:14 ; 20:34~36).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바는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죽은 자들이 장차 다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가 기대하는 바는 더군다가 영적인 부활도 아닐 것이다. 성도의 영적인 부활은 중생과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런 정도의 부활을 원한 것이 아니다. 오직 그가 추구한 바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는 부활,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수 있는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장 좋은 첫째 부활을 의미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좋은 첫째 부활을 의미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빌립보서 1장 23~25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그가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가 부활을 말할 수 있는가? 빌립보서 3장 20,21절의 말씀을 보면 그는 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결론적으로 그가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바는 바로 주와 더불어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 속에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 포함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 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그들은 부활하게 될 것이다.
(6) “복이 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행복하다”는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현재의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은 거룩하지 못할 것이고 반대로 거룩하게 되기를 힘쓰는 자는 지금 행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첫째로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삼중적인 행복을 누린다.
(1)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한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불못을 뜻한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한 자들은 둘째 사망에 의해서 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신자들은 장차 징계를 받는다(마 18:34,35). 특히 형제를 괴롭히는 자는 주의 징계를 면치 못할 것이다(살전4:6). 우리 성도들은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고 계신 그 분을 경외하도록 권고받은 사람들이다(눅12:4,5). 이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임할 것을 내포한다. 만일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결국 불에 던져 태워지고 말 것이다(요15:6).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결코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당신은 어떤 신자들이 멸망당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말하고 있단 말인가? 아마도 다음에 나오는 성경구절들을 오해한데서 그러한 의문이 나왔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8장 51, 5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원래 “결단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뜻이며, 또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결단코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의미로 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10장 28절에 나타나고 있는 “멸망치 아니하리라”는 말은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리라”는 말로 되어 있고, 또 요한복음서 11장 25,26절에 언급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원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2)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것이다. 제사장의 중요성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데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또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질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아주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모두 제사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 시대에는 첫째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 앞에서 제사장의 직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론은 그의 지팡이에서부터 싹이 남으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직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싹이 난 지팡이는 부활을 상징한다. 제사장으로 선별된 사람은 부활로서 증거를 받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때 그들은 모두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출 19:6).
그러나 그들이 금 송아지를 섬기는 망령된 일을 자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후에 아론의 가족을 제사장으로 선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다 함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도 예배를 받으실 수 있음을 뜻한다.
(3)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할 것이다. 대체로 구약시대에는 왕이 제사장을 겸할 수 없었고, 또 제사장이 왕을 겸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하고 있다. 제사장의 신분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또 왕의 신분으로 그들은 땅을 통치한다. 오직 환난을 경험한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며 또 영광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들이 어떻게 통치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천상의 통치 이념으로 다스릴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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