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7-7 처음 익은 열매

하나님아들 2014. 5. 3. 12:55

7장 처음 익은 열매 (요한계시록14:1~20)

 

. 첫 열매(14:1~5)

시온산은 하늘에 있는가 아니면 땅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땅에 있는 것을 말함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뉴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땅에 있는 시온산은 벌써 이방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11:2).

둘째로 14 4절에 보면 그들이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더 이상 지상의 시온산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셋째로 14 4절 마지막 부분의 말씀과 출애굽기 23 19절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열매가 익자마자 그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들에 두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전에 가져다 드려야만 한다는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 34:26). 144,000명도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으니 그들을 들판, 즉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고(13:38) 대신에 새 예루살램인 하늘의 시온산에 들어가도록 함이 당연하다.

넷째로 14 3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다”라고 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로 14 1~5절까지에 언급된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들인 반면에 14 14~16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추수 때에 거두워 들인 곡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직 추수할 곡식들이 야지에 있을 동안이라 할지라고 처음 익은 열매를 하늘 곡간에 들이지 아니하고 어디에 보관하겠는가?

여섯째로 주님의 재림은 19장 때에 가서야 비로소 있을 것인데 그것을 굳이 지상에 있는 시온산이라고 주장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 144,000명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7 4절에 나타나는 144,000명과 14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144,000명은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인 것 같다. 그것을 아래와 같이 대조해 볼 수 있다.

 

(1) 7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14 1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들이 받은 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7 2절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구약적 용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4 1절에서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교회와 관계되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나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3) 7 3절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호칭을 한 반면에 14 1절에 언급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이런 결론은 “아버지의 이름”이란 말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4)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주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다는 점이다. 그런 호칭은 항상 교회와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1:6 ; 2:27 ; 3:5,21). 그러나 주님은 한번도 그것을 이스라엘과 관련지어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5) 14 1절 이하에 언급된 사람들은 어린 양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어린 양과 더불어 그들이 서 있고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며 또 처음 익은 열매로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러나 7장에 보면 주님은 다른 천사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주께서 구약적 위치로 환원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6) 14 3절에 모사된 바와 같이 그들이 부른 노래는 새 노래라고 했다. 그러나 7 4절 이하에 언급된 사람들은 그와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은 듯 하다.

(7) 14 4절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절을 지키지 못한 슬픔을 맛보지 않았던가?(출애굽기 23 26, 신명기 7 14, 사무엘상 2 5, 그리고 시편 113 9절과 같은 말씀들을 보면 자손을 갖게 되는 것은 축복이지만 무자하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 주느 한님의 저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8) 14 1절과 7 4절에 나오는 144,000명 앞에 붙는 관사가 모두 부정관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반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지 앞에 나왔던 그 사람들을 특별히 지적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두 곳에 나오는 144,000명은 서로 다른 두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1) 여기 나오는 144,000명은 교회 가운데서 특별하게 선별된 일부 성도들을 말한다. 그들이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7 14절에 묘사된 144,000명이 문자적인 것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숫자도 역시 문자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14 4절을 보면 이 사람들을 가리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다. 모든 교회를 가리켜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셋째로 모든 교회가 다 정절을 지키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넷째로 대호나난이 이르기 전에 이 사람들은 벌써 시온산으로 휴거 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장면은 세 천사들의 음성이 들리기 전이었기 때문이다(14:6~11).

다섯째로 14 5절 말씀은 이 사람들의 특별한 성품을 묘사하고 있다. 모든 중생한 사람들이 다 그와 같이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하게 되리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은 교회의 승리자들 가운ㄷ 가장 모범적인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144,000명이 모든 승리자들의 대표”라는 것이다.

 

(2) 하늘에서 나느 소리를 들으니: 이 소리는 144,000 성도가 부르는 찬송소리일 것이다. 그들의 음성은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소리처럼 칭아하고 또 한편 우레소리와 같으며 많은 물소리와 같은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3) 새 노래는 그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모든 신자들이 세상에서 구속함을 받을 것이지만 이들은 특별하게 첫 열매로서 고향에 먼저 오게 된 사람들이었다.

 

(4) “이 사람들”일나 표현을 두 번씩이나 사용함으로써 본절은 특별히 144,000명이 어떤 사람들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1)“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우리는 여자라는 말을 우상으로 영해해서는 안되겠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런 해석을 지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악한 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속단해서도 안된다. 성경에 보면 여자라는 말이 종종 부인으로 번역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1 5절에서 “부인”으로 사용된 헬라어가 요한계시록 14 4절에서 사용된 “여자”와 똑같은 낱말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144,000명의 성도들을 가리켜 여자돌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들이 정절을 지켰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말씀은 순결성 정도를 지적함이 아니고 정조, 즉 처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결론은 마태복음서 19 10~12절까지의 말씀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14 1절 말씀으로 비추어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144,000명이 된다는 것이다(20:35, 고전7:7).

또한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한 가지 큰 잘못을 저지르도로 유혹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결혼을 금하는 일이다(딤전4:1~3). 다니엘서는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결혼지 않을 것을 말함으로써 이에 대한 증거를 보강하고 있다(“여자의 사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11:37>).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악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 오직 144,000명만 있으리라는 추측은 도무지 불가능한 생각이다. 한편 144절 말씀이 그들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가 사실인 것으로 믿으며 더 이상 그 보다 훌륭한 해석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본다.

(2)“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이 말씀은 과거를 말함이 아니고 오히려 현재와 미래를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들이 주를 가까이 하여 섬기며, 비서처럼 그에게 봉사할 것이다.

(3)“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들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고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 레위기에서 우리는 추수에 세 단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처음 익은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고(23:10), 둘째는 본격적으로 알곡을 추수하는 일이며(23:22), 셋째가 이삭을 줍는 일이다( 23:22). 농부는 밀이 다 익을 때 추수하는 법이다. 그는 곡식을 베어 곡간에 들이되 들판에 그냥 놓아 두지 않는다. 이것을 성도의 휴거와 비교할 때 어떤 면에서 휴거의 시기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추수는 이삭이 다 익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열매는 먼저 익은 성도들이며 그들이 먼저 들림받을 것은 당연하다.

 

(5) 입술의 말은 심령 속에 들어있는 것의 반영이라 할 수 있겠다. 본문에 나오는 표현들은 우리 주님에게 관계되는 것들인데 여기에서 144,000명의 성도를에게 역시 그런 표현을 적용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부분의 말씀이 144,000명 가운데 여자들은 전혀 제외된다느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항상 남자들만 숫자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그 속에는 많은 여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여자를 세지 않으시고, 오직 남자들만을 계산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디나가 야곱의 딸이었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만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성경 본문 말씀은 첫 번째 휴거된 사람들 가운데 오직 이 숫자의 사람들만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첫 번째 휴거된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 첫째 천사(14:6, 7)

(6) 여기 나오는 “다른 천사”는 주님을 가리키는 7 2절에 언급된 다른 천사와는 이질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영원한 복음, 혹은 좋은 소식은 은혜의 복음과는 성격상 다르다. 14 7절에 묘사된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 이 영원한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인도할 목적만을 가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그 영원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 양을 예배하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만을 경배하게 할 뿐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지 못하고 오직 심판만을 전한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말씀과 또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이란 말씀은 엄격한 의미에서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전자는 후자들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세상 것들을 가장 사랑하고 또 사모하는 땅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로마제국으로 그 영역이 제한될 것이지만, 그 영향력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에게 미칠 것이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말은 아마도 로마제국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징할 것이다.

문맥상 여기에 나오는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고 구원받을 것을 선포하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짐승의 우상을 섬기지 말도록 교훈함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마태복음서 25 34~40절 사이에 언급된 그 양들이 어떻게 주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를 대접할 수 있게 되는가? 아마도 여기 나오는 천사의 선포에 감동을 받음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7)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구약시대에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시로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심판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넷째 나팔이 울릴 때에 하늘이 상함을 입었다. 반면에 땅은 첫째 나팔이 울릴 때에 해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두 번째 나팔 때에 또 모든 샘물의 근원은 세 번째 나팔이 울릴 때에 각각 해를 입었다.

 

 

. 둘째 천사(14:8)

바벨론 성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글자 그대로 바벨론인가? 아니면 로마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인가? 17장에 나타나는 바벨론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종교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로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 14 8절에 나오는 바벨론 역시 두곳의 묘사가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종교의 체제를 갖춘 로마와 관계 있다고 보겠다. 그래서 둘째 천사는 세계의 멸망을 바벨론의 몰락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로마의 종교체제가 완전히 무너질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본격적인 추수가 로마의 종교체제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그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는 로마의 종교체제가 사람들에게 미칠 압력을 뜻하고 있는 것 같다. 주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것은 음행의 포도주를 제공할 것이고, 반대로 주께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진노의 포도주를 먹일 것이다. 여기에서 포도주는 사람을 혼미케 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로마의 종교체제는 외관상 다시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 것이다.

 

 

. 셋째 천사(14:9~12)

(10) 본문에 기록된 말씀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14 9절에 기록된 대로 행동하며 살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데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기에서 두 가지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15장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은 더 이상 은혜받을 희망이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천사들 앞에서 고난받는다는 말은 그들이 천사들에 의해서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질 것을 의미한다.

 

(11) 이 말씀은 사람이 한번 불 못에 들어가면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짐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편 성도들은 천국에 가서 잠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들은 불 못에 들어가서 잠을 이룰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ᅟᅡᆮ.

 

(12) 본절은 13 10절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함은 특별히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가 인내해야 할 때다.

 

 

.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14:13)

“자금 이후로”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도록 강요할 때를 말한다.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짐승의 박해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이겠는가? 신자들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그 영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명칭으로 불리지 않고 오히려 성령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일곱 영이란 명칭이 특히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있는 것으로 사용된 반면에 성령이란 말은 교회와 특별히 연관되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한 행위의 결과는 우리보다 앞서 하나님 앞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속죄사역이 우리보다 앞서 가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받을시기에 합당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리워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상금을 받을 수 있다.

 

 

. 추 수(14:14~16)

(14) “흰 구름”이란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4 16절부터 17절에 나타나는 말씀과 오나전히 문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라는 말은 교회와 깊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뜻으로 사용된다(1:13). 또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다는 표현으로 보아 우리는 그가 이미 영광을 얻으셨다고 생각된다. 예리한 낫은 추수의 시급성을 지적한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서 13 37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씨뿌리는 자로 비유하시면서 또 재림하실 때에는 또 다시 추숫군으로 오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

 

(15) 한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주께 전달했다. 왜냐하면, 주께서 지금 종의 위치에 있으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서 9 38절에 보면 주님이 하나님을 가리켜 추수하는 주인으로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신 기록을 볼 수 있으며, 또 여기 14 15절에서는 주님 자신이 추수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은 결코 추수를 나쁜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무화과나무에 달린 열매와는 다르게 밀은 익은 다음에 들판에 너무 오랫 동안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그것을 속히 추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 가운데 최초로 나타나는 추수가 창세기 8 22절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그 말씀하실 때에도 역시 좋은 의미로 말씀하셨다( 4:35).

 

마태복음 3 12절 말씀에 의하면 곡식은 모아 곡간에 들인다고 했다. 그리고 레위기 23장에 의하면 추수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도록 되어있다(23:19 ; 34:26). 이것은 최조로 휴거된 신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려감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곡식을 거두어 곡간에 들인다는 말은 신자들이 공중으로 들림받아 주를 만나게 될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공중으로 들림받아 주를 만나게 될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공중으로 들림받는다는 것은 보통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를 들판과 집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이라는 들판(13:38)과 천국이라는 집의 중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추수 때에 성도들은 하늘과 세상 중간에 있는 공중으로 휴거 될 것이다.

 

마태복음서 13 37~43절 사이에 언급된 추수는 주인이 일찍 뿌렸던 좋은 것을 거두어 들일 목적인 것 같다. 주인이 좋은 씨앗만을 뿌렸기 때문에 그는 추수 때에도 좋은 것만을 거두어 들일 것이다. 마가복음 서 4 26~29절까지의 말씀에 의하면, 추수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추수하러 오실 것이다. 처음 익은 열매들이 거룩한 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역시 거룩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11:16). 요한계시록 14 1~5절 사이에 말씀하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들 뿐만 아니라 같은 장 14절부터 16절 사이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좋은 열매들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추수가 죄인들의 심판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었다”는 말은 역시 “말랐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익지 않은 밀은 추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숙하지 못한 신자는 휴거될 수 없다. 따라서 먼저 익은 열매들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신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또 익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 (16) 마태복음서 13 39절에 보면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 15절과 16절에 언급된 낫은 천사들의 손에 들려진 그 무엇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낫이라고 추측된다. 주께서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는 휴거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는 모두 인자 앞에 서게 될 것이다.

 

 

. 포도송이를 거두라(14:17~20)

14 14~16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언급되고 있는 추수와 또 14 17~20절 사이에 말씀하고 있는 포도를 거두어 들이는 일을 잘 관찰해보자. 성경을 통하여 살펴볼 때 밀은 항상 신자들을 상징하는 반면에 무화과 나무는 보통 유대인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열방 가운데 있는 악한 자들을 상징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런 결론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주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포도나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요 신자들은 그에게 붙은 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늘나라의 포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에 나타난 지상의 포도나무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2) 포도송이를 거두는 일은 추수가 끝난 다음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때가 좋은 것을 거두어 들인 후이니 좋지 못한 것만 남아 있을 것은 당연하다.

(3) 19 18절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기에 인용된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인들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4) 구약성경도 역시 악한 사람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할 때가 종종 있었다(32:32)

(5) 포도주 틀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던 사실만 보아도 이 포도는 좋은 것을 의미할 이유가 없다(14:19, 20)

(6) 요엘서 3 13절 말씀과 또 이사야서 63 1~6절에 있는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포도주 틀을 밟는 일이 벌써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4 14~16절까지의 말씀은 계속해서 밀을 추수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반면에, 14 17~20절까지는 가라지 추수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신자들이 휴거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어 가라지를 뽑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낫이 예리할 것은 당연하다.

 

밀은 익으면서 또한 마르게 된다. 그러나 포도는 익으면 익을수록 더욱 물기를 띠게 된다. 그러므로 밀과 포도는 서로 반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땅에서부터 순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많은 열매를 맺어 익힐 수 있다. 열방은 더욱 세속화되고 또한 밖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 할수록 죄악이 더 관영해지며, 따라서 그들의 심판의 때가 그 만큼 더 임박해진다고 볼 수 있다. 14 16절에 나오는 “낫을 땅에 휘두르매”라는 표현을 주의해보자. 그것은 아주 급하게 포도를 베어 나갈 것을 의미하고 있다. 14 19절에 보면 “낫을 땅에 휘둘러”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배어 없애 버리겠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이것은 밀의 추수와 포도송이를 거두어 들이는 일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포도주 틀”은 포도 열매를 넣어 즙으로 짤 수 있는 일종의 석조압력기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환난과 고통의 의미를 합축하고 있다. 14 17~20절 사이에 있는 말씀은 주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성취될 것이다. 그것은 19 15절 말씀과 내용을 같이하고 있다. 첫째로 14 20절에 나오는 “성 밖에서”라는 말은 그것이 예루살렘 밖에서 일어날 사건임을 증명한다(15장과 16장은 일곱째 나팔에 대한 보충이다). 둘째로 14 20절에 언급된 “말 굴레”라는 말은 19 14절에 나오는 주와 또 하늘에 있는 천군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과 문맥을 같이한다.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14:20). 16 16절에 의하면 이 전쟁은 아마겟돈에서 일어날 것이고, 또 이사야서 63 1절에 의하면 그것이 보스라에서 시작될 것이다. 보스라에서 아마겟돈까지의 거리는 약 200마일, 다시 말하면 1,600스다디온에 이른다.

 

아마겟돈 전쟁은 주의 발이 감람산에 서실 때에 일어날 것이며, 그 때에 산은 둘로 갈라져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도망하는 유대인들이 그 곳에 숨게 될 것이다(14:4,5). 마침내 주님은 적그리스도와 싸워 그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만다(19:17~21).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복음 전파를 통해서가 아니라 피를 흘림으로 도래하게 된다. 교회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게 될 것이며 드디어는 영원한 왕국이 임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 34 1~8절까지의 말씀은 보스라에서 큰 학살이 있을 것을 말해준다. 이 일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추수와 포도송이를 거두어 들인 다음에 천년왕국을 상징하는 초막절을 지키게 된다.

출처 : 감추어진 만나
글쓴이 : 요나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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