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제22장 10~12절 / 인봉하지 말라

하나님아들 2014. 4. 18. 17:19

제22장 10~12절 / 인봉하지 말라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22:10-12)


오늘은 22장에서 세 번째 단원을 상고하게 된다. 요한은 ‘또 내게 말하되’라 하였다. 이 말은 천사가 전할지라도 권면의 메시지를 주시는 분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분의 메시지다. 그러기에 16절에서 ‘나 예수는’하셨고, 1장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하셨기 때문에 천사를 통하여 권면의 말씀을 주시는 분은 어린양 예수시다.


이 단원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은 행위에 있음을 강조하신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상고한 경고는 이렇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을 볼 때 상 받을 행위는 없고, 입으로만 믿는다는 점이다. 신자들뿐만 아니다. 바울 사도가 시내산의 율법을 떠나, 국법으로 정해놓은 율법을 강조하는 서기관 법을 시내산 율법으로 오해하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9)를 오해하고 잘못 가르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대교회는 의를 이루는 행위는 없고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언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믿기만 하면 모두 천국에 가고, 믿기만 하면 다 휴거되고, 믿기만 하면 모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믿기만 하면 모두가 어린양의 신부가 되고, 믿기만 하면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서는 밤낮 수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바쁘다,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수고하지 않으려한다. 또한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서는 돈이 아까운줄 모르고 물 쓰듯이 하면서도 자기 영육에 복 주시는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인색한가? 그러면 심판 주이신 예수님은 무어라 하시는가? ‘내가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음을 명심해야 된다.

봉함이냐 공개냐?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10)


천사는 요한에게 “이 책의 예언을 인봉하지 말라”하였다. 또한 1장1절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쓰도록 하셨고, 3절에서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는 것은 묵시라고 하는 예언이 봉해진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부터 ‘읽으라고 열어 놓았고, 들으라고 공개되었고, 지켜 행하라고 Open된지 오래다.


그런데도 목자들은 무어라 하는가? 어떤 교단에서는 칼빈도 감히 계시록에 손을 대지 못했다면서 ‘계시록은 인봉된 책이니 보아서는 안 되고 누구도 함부로 해석하면 안 된다’면서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는 때가 가까우니 “인봉하지 말라”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알지도 못하고 남들이 전해주는 이설로서 양 무리를 우롱하면 안 된다. 왜인가? 각 사람의 한대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예언을 인봉하지 말라; 인봉하지 말라는 뜻은 계시록을 덮어두지 말고 열어서 배우고 가르치라는 의미가 강하다. 인봉(σφραϒίζω-스파라기조)은 ‘인치다’ ‘봉하다’ 등이므로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봉 앞에 불변부정사(不變否定詞ㅡΜὴ-메)를 두었으므로 “인봉하지 말라”가 된다. 이 뜻은 열어놓은 예언이므로 읽는 자는 깨닫게 될 것이고, 듣는 자들도 깨닫고, 예언을 말씀을 지키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읽지 아니하고 듣지 못해서 지키지 못하는 탓으로 심판을 받게 됨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때가 가까움 이니라; 무슨 때인가? 우리말에는 그냥 때가 가깝다고 되었으나 원전에는 “주의 때가 가까움 이니라” 하였다. 주의 때는 곧 주의 날을 말하며 이러한 표현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으로 해석하기를,


ⓐ. 어떤 이는 ‘이것은 마지막 때가 임박하였기 때문에 회개시키려는 하나의 풍자(諷刺-무엇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한다는 뜻)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참으로 전능자의 말씀을 함부로 세상적인 학문으로 해석하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11a)


그대로; 각 부류마다 그대로(ἔτι-에티)로 하라는 뜻은 ‘여전히’ ‘아직도’ ‘계속적으로 하라’ 이므로 반복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대로는 회개가 없고 절제가 없고 돌이킴이 없이 전과 같은 방법이나 행동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불의를 하는 자; 불의(ἀδικἐω-아디케오)는 외적행위며 따라서 선의에 반대되는 행위이므로 행하는 사람이다. 불의를 하는 사람은 악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단12:10). 따라서 불의를 하는 사람을 패역한 사람으로 취급한다(겔3:27). 불의한 행동은 패악 불순하므로 사람다운 점이 없는 존재이므로 동물과 같이 취급되므로 패역한 사람이라 한다.(벧후2:12)


그대로 불의를 하고; 그대로 불의를 한다(ἀδικησάτω-에디케사투)말은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습관이다. 그러므로 법을 어기고, 남을 해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계속하여 같은 행위를 지속한다는 뜻이다.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11b)


더러운; 루파로스(ῥυπαρὸ?)는 내적인 더러움에서 외적으로 나타나게 됨으로 불결하고 깨끗하지 못함이다. 따라서 더러움은 내적더러움과 외적더러움을 함께 취급한다. 내적으로 성결하면 외적인 환경도 깨끗하게 정리가 된다. 반대로 외적인 환경이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사람은 내적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대로 더럽고; 자신의 영적 사람인 내적으로 성결한지를 아는 방법은 자신의 외적인 환경이 깨끗한가? 더러운가? 로 알게 된다. 따라서 더러운 자가 계속 더럽게 되는 것은 마귀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계속 더럽게(ῥυπανθήτω-루판데투) 지속된다는 말이다.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11c)


의로운; 의(δίκαιο?-디카오스)는 거룩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외적인 행위가 된다. 의로움에 대하여 에베소 기자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선한 일을 하라고 지으셨다”(엡2:10)고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마5:6)하셨다.


그대로 의를 행하고; 의로운 사람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된다. 특별히 마지막 때가되면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하여 살려고 하겠지만 의로운 사람은 많은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가 돕고 따라서 하늘나라에 관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주시려고 만세전부터 예비하여 놓은 시온의 축복이므로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여 열매를 맺는다. 다니엘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 날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라”(단12:3) 하였다.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d)


거룩한; 하기오스(ἅϒιο?)는 내재적인 성품이다. 마음과 생각이 자기를 지으신 분을 향하여 항상 감사하므로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고 이웃과 항상 화평을 도모하려는 심령이다.


그대로 거룩하게 하고; 히브리 기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ἁϒιασθήτω-하기아스데투)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하였고,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하신 말씀만 보더라도 왜 거룩 하려고 애쓰는지 알게 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12a)


내가 줄 상이 내게 있다; 상을 주시는 분은 어린양 예수시다.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성자에게 위임하였으므로 상을 주고 벌하는 일도 성자의 몫이다. 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행위, 곧 일한 대로이다. 이것은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표현이지만, 실상은 인간의 뿌리에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인간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따라서 영원한 저주로 유황으로 타는 불 못도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상’과 ‘벌’이라는 보상과 보응을 말한다.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12b)


각 사람에게; 각 사람이 행하는 행위를 나눌 때, 옳음(Right)과 옳지 않음(Wrong)으로 분리시키심을 앞에서 상고하다. 그러한 옳음과 옳지 않은 행위는 내적인 거룩함과 더러움에서 시작된다고 말하였다.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사람이 어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였던 그것은 전적으로 자유다. 그러나 그 결과로 옳음과 옳지 않음에 대한 상벌은 전적으로 수여자인 주님의 몫이지만, 수납자로서의 인간 편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불가항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수없이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신자들이 행위에서는 영벌 받은 일만 한다면 아니라 하겠는가?


그것은 인간 개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지도하는 선생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보아야 된다. 그러한 일예가 ‘믿기만 하면 된다’면서 행위를 부정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적으로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들이나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행하는 신자들의 몫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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