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제20장 11~15절 / 우주적인 심판

하나님아들 2014. 4. 18. 17:16

제20장 11~15절 / 우주적인 심판


“또 내가 보니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20:11-15)


요한이 본 장면은 맑고 깨끗하고 큰 보좌가 있었고,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의 앞에는 땅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베드로는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들어나리로다”(벧후3:10) 하였다. 이것이 불 심판이다.


일찍이 사탄의 사주로 악하게 살던 때에 물로 심판하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와의 약속으로 무지개의 언약을 체결하실 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물이 아닌 불로 심판하시기 때문에 심판주의 보좌에 두른 무지개가 없음이 보인다. 요한이 앞에서 보았던 두 번의 보좌에는 무지개가 있었다.(4:3,10:1)


4장에서 보았던 보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서 승천하신 후에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기 때문에 심판의 보좌가 아니므로 무지개가 있었다. 그리고 10장에서 보았던 보좌는 심판을 알리기 때문에 역시 무지개가 있었다. 그러나 20장의 보좌는 심판하시는 자리이므로 무지개가 없는데, 이는 노아와의 약속에서 물로는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나 불로 심판하시는 것이다.


보좌위에 앉으신 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4a).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11a)


요한에게 또 보이는 장면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분은 누구신가? 앞뒤 문맥을 볼 때 만물을 심판하실 그리스도시다. 심판에 관해서는 지상에 계실 때 누누히 강조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7) 하신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보내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아들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을 지으신 목적대로 삶을 살 때 심판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누구든지 지음을 받은 목적대로 행하지 않을 때에는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하리라”(요12:48)하심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인간이 지음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하심이니(엡3:9-10)


인간의 삶에서 목적과 의무를 행하였을 때에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 그런데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대 환난에 남겨졌으니 심판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5:22b). 아버지 하나님은 심판하시지 않을지라도 아들은 심판하신다.


그래서 그 아들이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것이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하셨으니 그분의 말씀대로 심판하셔야 되기 때문에 심판의 보좌에 앉으셨다. 그것은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기”(요5:27) 때문에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날 때’ 심판하시기 때문에 심판의 보좌위에 앉으셨다.


없어지는 땅과 하늘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11b)


요한이 보니 땅과 하늘이 피하여(ἔφυϒεν-에프겐) 간데없다 한다. 간데없다는 뜻은 보이지 앉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없어졌다(εὑρέθη)고 하였다. 그렇다면 땅과 하늘은 어디로 갔는가? 땅은 사람이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물질계였었다. 다시 땅에 살아야 될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땅에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없으므로 없애버린 것이다. 땅이 생길 때 말씀으로 생겨났듯이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라면 순간적으로 없어진다는 뜻이 간데없더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늘은 공간이므로 땅이 없어진 상태에서 하늘이란 공간이 보일리가 없는 것도 자연의 법칙이다. 그것은 심판 후에 되어 질 내용에서 답을 찾게 된다. 심판 후에는 하늘나라에 살 자들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고통당할 영원세계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하늘나라와 영벌의 유황불 못만이 존재되고 그 외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에 없애버린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12a)


재판정 안에는 재판관과 검사들이 각기 자기 자리에 앉은 후에 피고들이 들어오는 장면이다. 앞에서 재판장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리고 주임판사를 돕는 배석판사와 검사들이 누구인가를 4절에서 설명되었다. 피고인으로는 죽은 자들이며 그들은 연령의 구별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무리들을 가르칠 때 세상에서 쓰는 용어는 남녀노소(男女老少)라고 한다.


여기서는 무론대소(無論大小)라는 점이다. 세상에서의 생명은 남녀라는 성별과 장유(長幼)라는 연령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과 하늘이 없어진 영원의 상태에서는 남녀의 성별과 장유의 차별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말한다. 다만 영원세계에는 크고 작은 차이만이 있으므로 무론대소라는 것이다.


이들은 죽은 자(νεκρούs-네크로우스)들이라 한다. 그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적으로 죽은 자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뜻은 영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영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도록 타락됨을 말한다. 그들의 타락은 각기 자기들의 행한 행위 책에 기록되어 있음이 증거가 된다.


생명과 행위의 증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


재판관들과 검사관들의 책상위에는 두 종류의 책이 놓여있다. 한 종류는 생명책이요, 다른 종류는 행위에 관하여 기록된 책들이라 한다. 그러면서 요한은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였다. 앞의 4절에서 보좌에 앉은 자들의 심판(κρίμα-크리마)은 ‘재판’ 또는 ‘심판’이란 뜻이므로 여기서의 심판(ἔρϒα-엘가)는 ‘조사’ ‘검사하다’이므로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 ‘조사하는 검사의 자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다른 책들은 행위가 기록된 책이므로 검사들로서의 심판관들이 각인들의 행위를 조사 받게 되는 것이 심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끊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0-12)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3:9)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믿음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권면하실 때 에베소교회에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회개하라”(2:2,5)하셨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가운데 던지고, 내가 너의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2-23)하셨다. 사데 교회에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그러나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었노니”(3:3) 회개하라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3:15)라고 믿음의 행위를 책망하셨다. 그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내용은 행위(ἔρϒον-엘곤)이다. 엘곤(ἔρϒον )은 ‘실행, 행위, 일, 사건, 행동과정, 업무, 직업, 등 사람이 사는 동안에 자신이 한 행동과 말과 생각까지 포함되지 않음이 없이 다 포함시킴을 말한다. 그런데 많은 무리들이 믿기만 하면 다 구원된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말씀부터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 파’처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설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귀중한 영혼이 마지막 백보좌심판 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음을 알아야 된다. 먼저 우리가 상고해야 될 내용은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와 예수님께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된다. 그리고 믿음과 행위의 연관성을 알아야 된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서기관들이 제정한 국법(πολιτεία-폴리테리 아)’ 곧 헌법을 말한다. 이것을 그때 당시 이스라엘의 국법을 ‘율법’이라 하였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3대 족장들과 체결된 선민 들었다. 애굽에서 출발하여 광야에 도착한 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왔다.


이것이 ‘시내(Σινά)산의 율법’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국법을 제정할 때 시내산의 율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자기들의 당파(사두개, 바리새)들의 정책에 유리하도록 법을 바꾸어놓고서 국민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 헌법, 곧 국법이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국법[율법]의 행위[따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3:28)하였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국법[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국법[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한 말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것은 국법[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하면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국(헌)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하고, 끝으로 “무릇 국법[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갈3:10)하였다.


예수님과 모든 사도들은 행위를 강조하신다. 무엇이 다른가?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국법대로 행하여서 구원되거나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내산 율법을 바탕으로 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국법(πολιτεία-폴리테리아)이라는 율법의 행위를 부정한 것이지, 시내산 율법을 부정한 일은 한 번도 없었음을 알아야 된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의 행위는 시내산의 율법에 근거하심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원어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행위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되지 않고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 면서 행위를 부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믿음에 대하여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로 보건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1-22) 하였다. 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자라날 수도 없거니와, 결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야고보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3)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2:20)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약2:26)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마지막 심판대 앞으로 나아오는 것은 그들의 생애에서 행위가 온전치 못하였고 악했기 때문에 각자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믿기 만하면 된다고 행위를 부정하겠는가?


바다와 사망과 음부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3)


먼저 기억할 것은 법정재판에 나오는 신분들은 바다와 사망과 음부만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1,2,3,층천은 말할 필요도 없고 멀리 바깥 어두운 곳인 연단장(βήμα-베마)과 낙원 안에 있는 ‘교정(παιδεία-파이데이아)’장은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뜻은 교육장에 있는 신분들은 거듭난 성도들로서 의의 세마포 옷이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천국에 올라가서 교육을 받으면서 뉘우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인정되어서 깨끗하게 되어서 각기 자기의 영원한 처소인 1,2,층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심판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깥 어두운 데에서 연단받는 신분들도 예수는 믿었어도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극심한 고통과 연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지막 심판때까지 회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영적인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1층천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아야 될 대상에 포함된다.


이들에 대하여 넷째 인에서 청황색 말 탄자는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6:8) 하였다. 따라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도 그 ‘죽은(νεκροὺs-네크로로우스) 자들을 ‘내어준다(ἔδωκαν-에도칸)’ 하였으므로 심판의 대상은 어떤 신분인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죽음(νεκροὺs)’는 ‘생명 없는 것’ ‘죽게 되어있는’ 등을 뜻한다. 그리고 ‘내어주다(ἔδωκαν)’는 ‘주다’ ‘바치다’ ‘지불하다’ ‘놓다’ ‘따지다’ 등의 뜻이다.


이 내용은 사데 교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 이처럼 육체는 살아서 호흡할지라도 영적으로 살지 못했던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3:1-2)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천년왕국당시에 출생한 세대가 바다(θάλασσα-달라싸) 가 될 것이다. 그 세대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가 없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호흡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생명이 없이 살다가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사망이나 음부에서 나오고 여기 ‘바다’가 내어준다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가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심판날이 이르렀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행위대로 심문을 받기 위하여 심판대 앞으로 나온다는 뜻이다.


사망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가 없었던 자들이다. ‘사망(θάνατοs-다나토스)’이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는 뜻은, 창세 이후부터 백보좌의 심판날까지 ‘연단장(βήμα)’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예수를 믿었던 자들 중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다. 연단(βήματι)이 끝나고 영벌을 받기위하여 심판대 앞으로 나온다는 뜻이다.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음부(ᾅδηs-하데스)’는 죽은 자의 거처, 처벌받는 곳, 지옥, 지하세계, 죽음, 등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음부는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있던 곳이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던 상관없이 예수를 믿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연단장소에서처럼 회개의 기회도 없이 심판날만 기다렸던 자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나온다는 뜻이다. 이 무리들은 모두가 심판받고 유황으로 타는 불 못을 들어갈 자들이다.


모든 것을 불 못에 던지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그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14-15)


우주적인 심판은 끝났다. 그리스도께서 주임심판관으로 중앙에 앉으시고, 그 주위로 배석심판관과 검사들로서 144,000인이 앉아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에서 나오는 자들의 행위를 심문받았다. 그들이 행한 일들이 행위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을 심문하는 검사들은 각기 맡겨진 책들과 거기에 해당되는 자들을 심문하였다. 물론 자신들의 “입으로 자백하고 직고하게 된다.” 심문이 끝나고 심판주 그리스도의 판정대로 불 못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 한다. 둘째 사망으로 떨어지는 신분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 이제 그들이 갈 곳은 영원한 고통만 있는 유황불 못이라 한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고; 우주적인 심판이 끝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회개시키기 위한 바깥 어두운 곳(βήμα)을 두어야 될 이유가 없다. 또 한 음부(ᾅδηs)도 더 이상 둘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불 못은 사회의 쓰레기 소각장으로 생각하면 된다. 필요 없는 것은 불로 태워서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이던 연단장이든 음부도, 사람까지도 필요 없는 것은 유황으로 타는 불로 태우기 위해 던져 넣는다.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둘째 사망이라는 뜻은 문자대로 두 번 죽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첫 번째 죽음과는 완전히 다르다. 첫 번째 죽음은 영과 육이 분리되고 육은 땅에서 썩어 없어지고 영만이 연단장이나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은 분리되었던 영과 육이 결합되어서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된다. 또 다른 면은 첫 번째 죽음은 연단장이나 음부일지라도 마지막 심판 때까지라는 기간이 있었으나 두 번째 죽음은 기간이 없는 영원함이 다르다. 또 다른 면은 두 번째 죽음은 구원이란 희망은 전혀 없는 것이 다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처음에 예수 믿고 거듭나는 순간에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녹명되면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란 어떤 자들을 말하는가?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름이 녹명되지 않았거나, 또는 녹명된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된다.


생명책에 관해서 바울은 주의 일을 하는 동역자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거듭난 성도이면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자신의 이름이 책명 책에 녹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녹명되려면 거기에 부합되는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사데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신 내용은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3: 5) 하였다.


또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할 때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라”(출32:32-33) 하였다. ‘반드시 흐리겠다.’의 반대가 ‘반드시 흐리지 않으리라’ 하셨고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선포하셨음을 오해하면 안 된다.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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