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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0장 4~6절 /생존의 연장체냐? 부활체냐?

하나님아들 2014. 4. 18. 17:15

제20장 4~6절 / 생존의 연장체냐? 부활체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을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20:4-5)


  제20장에서 두 번째 내용이다. 이 단원은 많은 이견을 보이는 대목이다. 사람마다 각기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 ‘보좌들’이 누구의 것이냐 하는데 있다. 그 보좌들은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게 될 신분을 알아내는 문제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과, ⓑ.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살게되는 사람들이 '생존자들의 연장체냐? 아니면 부활체냐?'하는 문제와, ⓒ. 이들이 앙노릇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등으로 해석상의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설이 있으며, 각기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요한이 보았던 내용 안에서 상고해야 된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처음에 요한에게 계시록을 주신 목적에서부터 바른 이해가 없을 때에는 전체를 보는 각도에서 그때그때마다 편리한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에게 보이는 내용들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앉아서 우주적인 심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상고하면 은혜가 되리라 본다.


  ①. 법정구성에 대한 내용이며.(4a)

  ②. 목 베임을 받았다가 살아난 영혼들의 신분에 대하여.(4b)

  ③. 표를 안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의 신분에 대하여.(4c)

  ④. 첫째부활과 복에 대하여.(6a)

  ⑤. 둘째부활과 사망에 대하여.(6b)


법관의 자리와 대상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a)


   본 절에서 말하는 ‘보좌들(θρόνουs-트로노스)’의 성격부터 파악되어야 한다. 복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좌는 아니며, 심판주 그리스도와 더불어 어떤 역할을 하는 자리일까? 또한 그 자리에 앉게 되는 신분에서도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보좌들을 보니; 보좌에 대하여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보좌가 아닌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보좌들(θρόνουs)의 숫자도 명시되지 않았고, 성격에 대하여는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 하였다. 그렇다면 권세가 주어지는 심판석의 자리는 누구의 것일까? 그것은 그 보좌에 앉게 되는 신분에서 찾게 된다.


보좌에 앉은 자들; ‘카데마이(κάθημαι)는 앉다, 앉히다. 자리에 앉음을 말한다. 다수의 이견들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보좌에 앉은 ’신분(ἐκάθισαν-에카디샨)’에 대하여,


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 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하노라”(눅22:30)고 가르치셨다.


②. 그 후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하리라”고 믿음에서 이긴 자들에게 보좌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다.(3:21).


③.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때에 예수 안에서 잠자던 자들의 무덤이 열리서 부활되고,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휴거된 어린양의 신부들에게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14:3)고 약속하신 보좌를 주셨다. 이긴 자들은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서 자기들에게 배당된 보좌 앞에서 기쁨으로 노래를 불렀다.


④. 그들이 대환난이 끝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 자리에 앉았으므로 이 보좌들은 어린양의 신부들의 보좌가 된다.


심판하는 권세; 144,000인에게 허락된 권세는 앞에서 약속하신 재판 권의 위치다. κρίμα는 심판, 재판, 정죄, 벌. 등 선고할 때 쓰이는 표현이다. 그러나 최고 재판관(Chief judge)에는 그리스도시고, 그 외는 검사나 배석판사(Associate judge)나 하급재판관의 역할을 말한다. 그것은 엘가(ἔρϒα )에서 그 뜻이 설명되므로 4절에서의 심판(κρίμα-크리마)하는 권세는 12-13절의 임무 를 위한 검사(檢事)자리가 된다.


목 베임을 받은 자들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4b-5a)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까지 살지(부활되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다시 부활하는 존재들은 환난사역자들과 표를 안 받고 죽었던 사람들만이 부활된다. 그래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과, 환난에서 짐승의 표를 안 받고 죽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났다거 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ζάω3인칭 복수“ἔζησαν”는 '살아나다, 생기가 들어가다'이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말한다. 이들에 대하여 '이는 첫째 부활(ἀνὰστασίs)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서"라는 단어해석을 어떤 사람은 페트라에 솜었던 사람들, 또는 하나님이 예베해 놓은 피난처에 숨었던 사람들을 "살아서"라고 오해를 하였다.  그리고 이 무리들이 천년왕국으로 넘어가 살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생존자의 연장체라면 현실적으로 그 수면이,100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1000년을 살수 있다는 것인가? 그 답은 다음절에서 설면된다. 


ⓐ. 그런데 어떤 이는 보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으로 얻은 구원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기 때문에 보좌들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라고 잘못 해석하였다.

ⓑ. 또 다른 이는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은 순교자들이며, 앞에서의 보좌들도 순교자들의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 분명히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은 자들, 곧 환난사역자들이라고 명시하였다. 그럼에도 모든 순교자들이라고 속이고 있다.


①.예수의 증거에 대하여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중에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12:17)”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위에 섰더라하였으므로 환난사역자들이다.


②.6장에서 대환난의 총체를 설명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6:9) 있었으므로 둘째 근거다. 그러므로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은 환난사역자들이 다시 살아난 부활제를 말한다.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는 자들; 대 환난에서 지구정부정책을 이기고 구원받은 무리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셀 수 없었다고 7장 9절에서 설명되었다. 이 무리들과 대 환난사역자들의 영혼들도 대환난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살아났다. 이들은 생존의 연장체가 아니라 부활체를 말한다. 또한 천년이 끝나고 우주적인 심판 때에 참관인 또는 증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중강림부터 여기까지가 첫째 부활되는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계20:6)하였으므로, 이들은 천년왕국이 끝나고 우주적인 심판 때에 가서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죽은 자들은 누구일까?


  14장에서 천사는 죽은 자들의 신분에 대하여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 다.”(14:13) 하였으므로 죽는 자들은 주안에서 살지 아니하다 죽은 영혼들이다. 예수를 믿었던 믿지 않았던 상관없이 첫째부활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둘째부활에 나타나는 존재들이다. 예수를 믿지 아니했던 자들이라면 음부(ἄδηs)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교회생활을 했던 자들이라면 바깥 어두운 곳(βήμα)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하셨으므로 천년이 차기까지는 살지 못하는 무리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나 살게 되지만, 심판은 받게 될 신분이라는 뜻이다.


첫째 부활과 대상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5b-6a)


첫째 부활: 마지막 심판이전까지로 기간이 설정된다. 어떤 이들은 부분부활이라고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첫째부활(ἀναστάσει-아나스타세이)에는 단 두 번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공중강림 때가 첫 번이고, 대환난이 끝나고 지상 재림 때가 다음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 어떤 사람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가의 질문이다. 성경 두 곳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내용을 보면;


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하셨으므로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첫째부활 때에 부활된다. 다음의 근거는,


②.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고전15:23-24), 하셨으므로 어린양의 신부가 먼저요,


③. 그리고 다음 순서로는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또한 이마나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과,


④. 창세 이후로 666표가 나타나는 이전시대에 예수 믿고 거듭난 신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마지막 심판 후에 둘째 사망이 없으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들이라 한다.


두 번째 사망이 없다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6b)


   요한은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천년동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 먼저 복이 있다는 뜻은, 비록 대 환난에 남겨져서 죽임은 당했을지라도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았고, 또한 이마나 손에 짐승의 이름으로 계수되는 표를 받지말라는 “예언의 기록된 말씀을 지켰기”(1:3)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망이 없다; 둘째사망(θανατοs-다나토스)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함에 대하여서는 이견이 없다. 이것은 예언의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두번 다시 죽음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제사장’과 ‘왕 노릇’에 대한 해석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고, 천년동안 왕으로서의 권세를 행사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그러면 성경에는 무어라고 기록되었는가? 자세히 살펴보고 오해하면 안 된다.


제사장; 제사장(ἱερείs-히에레이스)는 성례를 ‘이행하는 사람’이므로 목자들처럼 성례를 ‘집례하는 제사장(ἱερατεία-헤에라테이아)’의 직임을 담당한 집행자가 아니라, 수행자다. 거룩한 성도로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영원히 경배하는 일에 따르는 수행자의 자격이지, 경배하는 일에 대한 집례자의 자격이 아니다.


왕 노릇 하리니; ‘노릇’은 왕으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왕에게 속한 신분, 그와 비슷한 구실, 또는 업으로 삼는 일, 등므로 왕이 아니라, 왕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리라(βασιλεύσουσιν-바실레소오신)’는 뜻은 ‘천년왕국시대에 왕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다.이 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대로 가장 해석하기 어려웠던 부문들은,


①. 심판의 보좌에 앉은 신분에 있었다. 전체의 그리스도인으로 보면 전체가 왕이 되고 백성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심판관과 보좌의 주인의 신분이 설명되었으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②. 두 번째로 해석상의 어려웠던 부문은 제사장이란 단어에 있었다. 대부분의 해석들은 제사장(ἱερείs)이란 단어에서성례의 ‘수행자’로 보지 아니하고 ‘집례자’로 오인하였으나, 그것도 깨닫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③. 그리고 세 번째로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는데도 ‘왕 노릇’에 여러 이견이 있었다. ‘왕’과 ‘노릇’이란 두 단어를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하나로 묶는데서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좀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살아야 된다는 교훈이다.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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