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2절 / 믿음으로 이기고 낙원에 들어간 성도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15:2)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낙원에 들어간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긴 자라한다. 이들에 대하여 요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로 분명하게 알리셨다. 이 단원에서 상고할 내용은 짐승(Ideology)과 짐승의 우상(Image)과 그의 이름의 수에 대해서는 앞에서 수없이 설명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유리 바닷가(θἀλασσαν ὑαλίνην)는 어디며, 이긴 자들이 서 있는 바닷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내용으로 대지를 넷으로 나누어서 상고하도록 하겠다.
①.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곳.(2)
②.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
③.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서있는 곳.(2)
④.어린양의 노래.(3-4)
1. 유리바다와 같은 곳
“또 내가 보매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2)
불이 섞인 바다가 있는데, 그 바다는 유리와 같다 하였다. ‘허올리노스(ὐάλινοs)’는 투명함을 나타내므로 바다가 유리와 같아서 투명하게 깊은 밑바닥까지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유리와 같은 바다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는 해석들은;
①. 어떤 이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보좌를 반영한다.’ 라고 하였고,
②. 다른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홍해에서의 사실
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설’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보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사야가 해석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이라.”(사62:4)
유리 바다와 같은 곳; ‘유리’가 아니라, ‘같다’는 바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빛같이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평한 의로 구속시키시는 ‘쁄라(ה?וּב?)’를 말한다. 이사야는 쁄라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젊은 청년이 처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만남”과 같이,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때, 첫 번째 밟는 땅이라 한다. 쁄라 땅을 밟을 수 있는 상태는,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육체와, ⓑ.죽어서 영만이 들어가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죽은 후에 육신은 땅에 묻어놓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음부(ᾃδηs-헤데스)와 바깥 어두운 데서(βήμα)에서 연단을 받는 사람들은 이곳 쁄라를 밟지 못했다. 다만 바깥 어두운데에 가지 아니하고 직행으로 낙원과 왕국과 시온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 쁄라를 밟아보았다. 그렇지만 인류역사상 죽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육체와 함께 쁄라를 밟은 사람은 오직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 뿐이다.
유리와 같은 바다는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관문 격이지만, 온전한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준의 영적 사람들만이 첫 발로 밟게 되는 땅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장소를 이사야는 쁄라(ה?וּב?) 땅이라(사62:4) 하였고, 요한은 “유리 바다와 같은 곳”으로 설명하였다.
이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시온을 소망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아들들에게 주시려고 창세전부터 준비하셨다”(엡1:3-5).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만큼 온전하지 못해서 그리고 들어가지 못하였고, 살아서 들어간 사람은 오직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만이 유리와 같은 바다를 건너갔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의 날이 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삶을 살다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되고, 또 예수 안에서 삶을 살다가 어린양의 신부로 들림 받은 144,000명은 “불이 붙은 유리 같은 바다”를 건너서 쁄라를 밟게 된다. 그 외에는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이 바다를 건너간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성결이 없으면 “불붙은 유리 같은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는 곳임을 말한다.
유리와 같은 투명함; 유리와 같은 바다라는 단어에 숨겨진 의미는 투명(Transparency)함에 있다. 깊은 속까지 보이는 것이 유리라는 속성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시온에서 인간의 심령을 살피심을 말한다. 환난심판을 앞두고 휴거시킬 자와 남길 자들을 가려낸 다음에 환난에 남겨진 자들 중에서 구원시킬 자와 저주할 자를 공평하게 가려내서 구원시킬 자들은 하늘나라로 끌어 올리심이다.
요한이 말한 “유리와 같은 바다”라는 의미는 이사야가 말 한대로 “구원받고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사람들”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잘 지키면 정결한 ‘처녀’라 하였고, 믿음을 잃어버리면 ‘이혼한 여자, 과부, 버림받은 여자’등으로 말씀하셨다. 쁄라를 유리 바다와 같다는 이유는 이렇다. 인간의 심령상태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거룩함에 따라 구원을 결정하신다. 이러한 관찰은 ‘심령골수는 물론이요, 마음의 생각이나 뜻까지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의 속을 살피실 때, 유리 안을 보듯이 투명하게 보신다는 뜻이다.
2. 짐승과 그 이름의 수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
이 내용은 앞에서 여러 번 상고한 13장 1,15,17절 말씀이며 세 가지는 같은 것을 말한다. 대격변 이후에 지구정부가 시작되면서 사회는 혼돈상태였다. 그런 때에 사탄의 사상을 받은 지구주의자(Globalist)들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세계단일정부(One world government)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지구정부통치자로 나타난 사람이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라고 한다. 지구주의자들은 하루속히 지구사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추진시켜왔던 새세계질서(NWO) 정책에서 기독교 탄압으로 활용한 것이 ‘새시대비법(New age mystic)’이다.(UN. TC. URO 참조)
세시대비법에는 여러 가지 조항들이 있으나, 그중에서 특별히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서 착안된 것이 ‘짐승의 표’ 또는 ‘짐승의 이름’으로 불리는 666표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말하는 “짐승과 그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라는 말은 이러하다.
ⓐ짐승(θηρίον-데리온)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Ideology)을 말한다. 지구정부 통치자는 하나
님을 대적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때문에 그는 적그리스도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의 우상이라는 ‘εἰκόνοs(에이코노스)는 어떠한 물체가 아니라, 행위에서 갖고자하는 갈망이 그
사람에게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경배라는 ‘αὐτού(아우토우)는 재귀동사로서 ‘스스로 함께,
또는 그와 같이’이므로 자기 유익을 위해 갖고자 하던 것을 취함이 경배이므로, 지구정부가 시행하
는 그러한 제도와 문화에 굴복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우상에게 경배함(ἐκ τή?
εἰκόνο? αὐτού-스스로 그녀[사탄]을 닮은 생을 살아가다)’이다.
ⓒ이름의 수는, 지구주민신분증(666)을 짐승의 이름으로 계수(Counting)하면서 사람의 손에 Biochip
을 넣음을 말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양육시키고 보호한 지도자들이 있게 되
는데, 그들이 곧 모세와 엘리야의 심령을 받은 두 증인으로서의 대환난사역자들이다. 그들은 제7
장에서 말하는 144,000인이며, 각기 맡겨진 임무가 다른 12지파별로 구분되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기고 벗어난 자들과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이 사명이 끝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환난사역자들은 그때, 죽은 것이 아니라, ‘3일반’은 3년반 동안이라는 기간에 죽임을 말한다. 그렇지만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은 부활되어 하늘나라로 끌리어 올라갔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기고 벗어난 자들은 부활되지 못하고 다만 영만이 하늘나라 유리와 같은 바닷가에 서있는 모습을 말한다.(※666표 참조)
3. 이기고 벗어난 자들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2)
이기고 벗어났다 해서 저들이 처음부터 믿음이 온전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는 출석했던 사람들이다. 1년에 한두 번, 또는 매주일에 예배에 출석은 하였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던 자들”(계3:2)이었다. 그러면서 저들은 “회개하지 아니했고, 살아보려고 일깨지 아니했던(계3:3)” 자들이었다. 믿음이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상태이면서도 잘 믿는 줄로 착각하였던 자들이다(계3:15). 그러기에 주님의 강림 때를 모르고 살다가 대환난에 남겨진 것이다.(계3:3)
신자들이 믿음이 온전치 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대환난을 겪으면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이름을 붙들고 죽임을 당한 믿음, 곧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계7:14), 기쁨으로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장소가 유리와 같은 바닷가라고 이사야는 말한다(사62:5). 유리와 같은 바다는 ‘소망’으로 건너야할 쁄라(ה?וּב?)이다. 지금까지 이 바다를 건너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문으로 들어와서 시온으로 향하여 믿음생활을 하게된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여러 가지 유혹에 이끌려서 뿔라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쁄라 앞에까지 갔다가 되돌아섰다.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시온에 들어갈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쁄라를 건너가지 않으려하는 것이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3-5)
유리바다에 서 있는 자들이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신앙적으로는 무지했던 자들이었다. 시온으로 향하여 쁄라까지 오기를 싫어서 유리와 같은 바다를 건너지 않으려는 자를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느니라.”(잠13:4)하였다. 신앙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이 불붙는 유리와 같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물어보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순종을 은혜롭게 받아주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시고, 저주에서 건저주실 것을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이 종교적 행실들이 아버지께 받아드리며, 이로서 자신은 의롭게 됐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지, 우리의 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왜곡하지말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은 행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도적질하려는 마귀의 심보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스스로 환상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믿
음은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행하지 아니하
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행한 행위로 이루신 의를 도적질해서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격에 대한 구원자(Justifier)가 아니라, 자기 자
신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구원자로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인격보다
중요한 셈이므로 이러한 믿음은 거짓 믿음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러한 믿음은 기만적인 것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날에 스스로 불의로 인해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주는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율법에 의해 상실
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의란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순종을 받아들여서 의롭
다 함을 주시도록 만드는 은혜의 행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율법에 대한 개인적 순종이다. 이
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하지는 아니하고 말로만 믿는다던 자들이 대환난을 당하게 된
자들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신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의로 인하여 자신이 의로워 졌다’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믿음’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다른 교회가 갖지 못한 ‘믿음’이 좋아서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으면서도 휴거에서 탈락되었고, 또한 대 환난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제일 이라며 ‘사랑’만 강조한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다른 교회가 갖지 못한 ‘사랑’이 있었음을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도 받았으나 휴거에서 탈락되었다. 또한 대환난에 남겨졌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소망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예수님은 시온을 얻고자하는 소망이 없으면 시온을 얻지 못한다 라고 하셨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때 의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도 휴거의 면류관을 주신다 하였다.(딤후4:16)
여기에서 ‘불이 불은 유리와 같은 바다’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지구상에 대격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천국을 향한 소망을 가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대환난에 남겨졌었다. 그러한 그들이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자들로부터 올바른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동안에 잘못 배웠고 또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선 행위가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지구정부에 굴복당하지 아니했고, 666표를 받지 아니한 믿음으로 성숙된 것을 이긴자라 한다.
이처럼 성숙된 믿음을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공중강림 이전에는 천국을 향한 소망을 가지지 않아서 대환난에 버려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너를 버려진 자라 칭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황무지라 칭하지 않는다.”하시면서 헵시바(ץ??)와 쁄라(ה?וּב?)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헵시바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뿔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이므로 대 환난에서 이긴 자들이 유리와 같은 바닷가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사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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